그날의 세계사 - 세계를 뒤흔든 결정적 365장면 속으로!
썬킴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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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토리텔러 썬킴 교수님의 신간이 나왔다. 한 때 스브스 러브에펨 쳐돌이를 하며, 라디오를 들을 적 《허지웅쇼 - 히스토리 월드》 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고 들었던 나다. 오죽하면 《허지웅 쇼》가 끝난 뒤에는, ‘히스토리 월드’ 만큼은 팟캐스트로 무한 정주행을 했다. 원래 역사더쿠였던 나였지만, 히스토리 월드에서 정말 맛깔나게(?) 이야기해주는 썬킴 교수님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죽하면! 썬킴 교수님이 말하는 세계사를 듣다보면 분명 아는 이야기인데, 왜이렇게 처음 듣는 이야기(?) 같은지!! 들어도 들어도 새롭기 그지 없었다.



각설하고! 그런 썬킴 교수님의 세계사책 신간을 소개한다. 제목은 『그날의 세계사』. 정말...진짜.. 제목 그대로 그날의 세계사다ㅋㅋㅋ. 아니 교수님, 어쩜 이렇게 직관적인 제목을 쓸 수가 있죠? 정말 책 내용이 진짜로 완전 ‘그날’의 세계사...아 이걸 더 어떻게 설명해야해 ㅋㅋㅋ



『그날의 세계사』 내용 자체는 지면 하나당, 말 그대로 ‘그날’에 있었던 일화가 적혀있기에, 막힘 없이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세계사 책이다. ‘그날’에 따라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거시적인 역사 일화도 있고, 또 어떤 날은 매니아 조차도 모를만한 미시적인 일화가 적혀있기도 하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세계사 책인가! 


어떤 날은 1537년, 또 어떤 날은 1983년. 일화에 따라 해당 사건이 발생한 연도가 다르기에, 당연히 책 내용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끊어읽기에 아주 제격인 세계사책이다. 만약 내가 태어난 달, 날에 일어난 사건이 궁금하면 해당 지면만 찾아서 읽어도 무방하다. 정말 쉽게 읽을 수 있는 세계사책으로 추천추천 왕추천이다!


이 세계사책을 펴서 제일 먼저 찾아본건, 내 생일이다. 나도 궁금했다구. 내 생일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읽고 나서 실망했다. 에이, 내가 푸이와 생일이 같다니. 썩 유쾌하진 않다. 차라리 그 다음날인 표트르 1세 사망일과 같았다면 좋았을 것을. 적어도 표트르1세는 촌동네 러시아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든 대제가 아닌가! 쳇. 아쉽다 아쉬워.



기세를 몰아 신랑 생일도 찾아봤는데 에잇, 여기도 썩 유쾌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 상전 생일은? 허허허. 이번엔 유명인 사망일과 같다. 심지어 그 사람은 ‘전설’이라는 칭호까지 얻은 아주 유명인!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이번엔 개인적으로 궁금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날을 찾아봤다. 예컨데 발렌타인 데이라던가, 메이 데이 같은...?



1863년 1월 1일,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북부의 링컨 대통령은 그 유명한 노예 해방 선언을 했다.


1766년 2월 14일, 영국의 인구학자 토머스 맬서스가 태어났다.


1879년 3월 14일,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독일에서 태어났다.


1865년 4월 14일, 미국 제 16대 대통령 링컨이 암살 저격을 당했다(저격 다음날 사망).


1865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주장하며 총파업 궐기대회를 열었다(노동절의 시작).


1821년 5월 5일, 전직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서아프리카 앞 대서양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사망했다.



오 뭔가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도 있고, 매니아들만 알법한 사건도 있다. 신기하다 신기해. 이번엔 12월로 넘어가보자! 



노벨상의 ‘노벨’인 알프레드 노벨과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가 사망한 달도 12월이었다. 죽기만 했는가? 12월엔 누군가 태어나기도 했다. 중국의 마오쩌둥,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에펠탑의 구스타브 에펠, 대한제국 의병장 최익현 선생이 태어난 달도 12월이다. 하룻강아지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침공한,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날도 12월이다. 그 일본이 중국에서 일으킨 난징대학살도 역시나 12월이었다. 


31건이나 되는 12월에 일어난 모든 역사적 사건 중 내 눈에 들어온 사건은 1956년 12월 30일에 일어났던 일이다. 나라에서 버림받았던 섬 독도. 오랜기간 백성들이 지켜온 섬 독도. 그 독도를 나라에서 직접 지키기로 결정했던 그 날이 바로 12월 30일 이다.



▶ 1956년 12월 30일, 독도의용수비대가 해체되고 그 자리에 독도경비대가 들어갔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울릉도민들이 독도를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결성한 민간인 경비대다. 경찰의 독도경비대 창설로 임무를 끝맺었다. 자, 독도는 누구 땅? 당연히 우리 땅이다. 그럼 이유를 설명해보라. 대부분 정광태의 노래 <독도는 우리 땅>만 부르고 끝이다. 자, 일본과 독도 논쟁이 벌어지면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1877년 태정관지령. 책 앞에서 언급했는데(8월 28일 글) 독도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므로 또 짚고 가자.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후 신일본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지도 작성에 들어간다. 시마네현으로 파견된 지도 제작팀이 일본 태정관(일본 정부)에게 문의한다. ‘동해(자기들 표현으론 일본해)상의 두 섬(독도, 울릉도)은 누구 섬인가?’란 문의를. 여기서 태정관은 답변한다. ‘그 두 섬은 일본과 아무 관계가 없는 섬이다. 명심하라.’ 라고! p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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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인문 기행 2 그리스 인문 기행 2
남기환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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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인문 기행2』가 출간되었다. 1권을 올 여름에 읽었는데, 반 년 만에 2권이 나온 것이다. 앞서 1권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책은 그리스 여행에세이라는 옷을 입은, 술술 읽히는 인문학 책이다. 그리스 고전을 독파한 저자가, 그 고전 속에 나온 지역들을 따라 인문학 여행을 나섰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그저 여행에세이 라고 치부하기에는, 내용이 깊다. 모든 챕터마다 그리스 신들이 살아숨쉬고, 그리스 고전의 향기가 난다. 


본디 그리스 고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조차도,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런 고전을 토대로 여행을 하고, 다시 책을 쓴다? 그건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해냈다. 어려운 그리스 고전과 여행에세이를 합쳤다. 그렇게 저자가 쓴 이 책 『그리스 인문 기행』은 그리스 고전의 길라잡이가 되었다. 


 

트로이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 오디세우스. 그의 귀향길은 힘겨웠다. 항해 중에 제우스의 폭풍을 만나 표류하였고, 부하들을 잃기도 하고, 괴물도 만났다. 심지어 저승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렇게 힘겨운 고난과 역경에도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다짐 하나로, 끊임없이 앞으로 향했다. 그러다 불멸의 존재인 칼립소를 만났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며, 그를 사로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는 유혹을 뿌리쳤다. 이런 오디세우스를 지켜보던 그리스 신들이, 신탁을 내렸다. 오디세우스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20일 만에 스케리아 섬에 도착하면, 그에게 명예와 재물은 물론 편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오디세우스는 신탁에 따라 20여일을 표류하였고, 결국에는 신들이 말한 스케리아 섬(현 케르키라로 추정)에 도착했다. 그 섬에서 오디세우스는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의 이름은 나우시카. 이 스케리아 섬을 다스리는 알키노오스 왕의 딸이었다. 왕은 오디세우스를 사위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이 역시 거부했다. 오디세우스는 표류하기 전 부터 지금까지 늘 단 한가지만 생각했다.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오디세우스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케르키라 섬이다.



고난과 역경은 신들의 뜻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그 고난을 극복하고 계속 나아가는 것은 인간 오디세우스의 의지였다. ‘이미 많은 고통을 겪었으니, 이들 고통에 또 다른 고난이 추가되어도 상관없다’는 호메로스의 명문은 ‘불운한 일은 언제나 다른 불운과 함께 닥치기 때문에, 한 가지 불운만 온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크레타 속담과 이어진다. p 036


인간의 강한 의지는 신 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꺾을 수 없는, 그야말로 불멸이다. 드라마 《도깨비》 주인공인 지은탁도 그러지 않았는가. 하물며 오랜 기간 고난과 역경, 유혹을 견디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오디세우스는 정말, ‘의지’가 인간으로 태어난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케르키라 섬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빌미가 된 섬이기도 하다. 기원전 448년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라는 두 도시가 권력을 나눠가졌다. 두 도시는 상호 평화조약을 맺었고 잘 지켜지는 듯 했다. 하지만 아테네가 케르키라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함선을 파견하면서 평화에 균열이 생겼다. 이후의 결과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27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시간을 건너 뛰어 중세로 가보자. 이번엔 케르키라 섬에 지어진 견고한 요새에 대한 이야기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세 차례나 케르키라 요새를 함락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는 것은, 그 성채의 위엄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채는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보호했다고 한다. 성 밖에 남겨진 여성, 어린이, 노인들은 죽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성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결국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인함만 드러낸 셈이다. p 055


오디세우스의 강한 의지가 남겨있는 케르키라 섬.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었던 케르키라 섬. 아이러니하게도 오디세우스 이후의 케르키라 섬은 그 ‘의지’가 나쁜 방면으로 작용했다. 권력을 향한 끊임없는 탐욕. 이런 인간의 질 나쁜 의지는 케르키라 섬을 전쟁으로 이끌었고, 약자들을 학살로 내몰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그러했고, 오스만 제국 침공 당시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쓸모없는 존재’라 치부하며 성밖으로 내보내 죽어가게 버려둔 것이 그러했다.


케르키라 섬은 알려준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또한 그 의지가 마냥 좋은 길로만 안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스 고전은 흔히들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가 아니다. 아니, 반은 맞다. 다만 반이 틀릴 뿐.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 고전은, 어린이 만화에서 본 올림푸스가 고작이 아닌가. 이는 그리스 고전을 사유하기는 커녕,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조차 없다. 그렇기에 이 인문학책을 읽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으로 하여금 그리스 고전을 어떻게 사유하는지 경험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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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의 세계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잘난 척 인문학
이상화 지음 / 노마드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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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하면 읽게 되는 책 중 하나가 민속신앙(샤머니즘) 관련 책이다. 민속신앙은 거대 종교로 인해 많이 잊혀졌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여러나라에서 명맥이 남아,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 휩쓸려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민속신앙. 역사 속에서, 구전 설화에서, 각종 유물에서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는 민속신앙. 심지어 민속신앙은 인문학적 사고의 토대가 되었다.





지금까지 샤머니즘의 원형이 잘 보존된 지역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일대다. 학계에서는 시베리아의 정통 샤머니즘이 아시아 일대를 시작으로 세계 전역에 전파되었다고 본다. 그렇게 전파된 샤머니즘은 각 지역 특성에 맞게 변화되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종교로 발전하기도 했다. 시베리아에서 샤머니즘이 태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인류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고대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찾기 위해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이들중 일부가 시베리아로 북상했다. 그렇게 바이칼 호수에 다다랐을때, 영하 70도라는 신빙하기가 찾아왔다. 극한의 추위로 인해 더이상 이동이 어려웠던 이들은, 바이칼 호수 일대에 흩어져, 서로 무리 지어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이칼 호수 일대에는 수많은 소수민족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극한의 추위를 자랑하는 곳. 추위로 인한 굶주림과 질병 같은 고난이 따라왔다. 이들이 고난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하늘에 기도를 하는 방법밖에 없던 것이다. 그렇다. 바이칼 일대에서 샤머니즘이 태동한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점은 바이칼 일대에 사는 소수민족들은 서로 교류가 없었기에 언어마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샤먼이 등장했다. 비단 바이칼 호수 일대 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4대 문명이 탄생했다. 각 문명들 모두 하늘신이든, 태양신이든 숭배하는 신이 있었다. 이는 여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대 유물인 ‘비너스상’ 처럼 ‘문화의 보편성’의 한 사례라 볼 수 있다.




샤머니즘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초자연현상을 믿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 초능력이나 초자연현상을 일으키는 신이 있으며, 살아 있는 동식물에는 정령, 죽은 자에게도 혼령이 있어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것이다. p 016


정통 종교가 탄생하고 여러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면서 샤머니즘과 결부되고 타협했다. 정통 종교도 신을 숭배하며 사후 세계를 존중하고 강조하기 때문에 샤머니즘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정통 종교의 기도와 샤머니즘의 주술, 예배의식과 샤머니즘의 의례의식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의 부두교와 같은 종교는 샤머니즘에서 파생됐다고 할 수 있다. p 022








여기서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TMI를 풀어보자면.


무엇보다 바이칼 호수 일대는 우리와도 어느정도 연관이 깊은 곳이다. 왜?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 바로 신빙하기 때 바이칼 호수에 갇혀, 극한의 추위를 이겨낸 인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북방계’ 인류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화학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바이칼 호수 일대 원주민과 우리나라와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는 역사/문화적 증거로 한 바이칼 호수 일대 원주민과 우리나라와의 연관성이다. 우리나라에 세워졌던 여러 고대국가중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가 있었다. 바로 신라다. 다른 나라와 달리 신라는 황금문화(+사슴뿔모양 금관)는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을 확인한 결과, 고대 신라와 동일한 문화를 가졌던 곳을 찾아냈다. 바로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일대였다. 황금문화 말고 하나 더. 고대 신라인은 자작나무를 이용한 생필품을 사용했다. 남부지방인 신라에는, 추운 지역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은 바이칼 호수 원주민들처럼 자작나무 생필품을 사용했다. 이 외에도 문무대왕릉비에 기록된 신라 김씨 기원이라는 ‘투후’도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이러한 유물만으로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일대와 우리나라가 큰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샤먼의 역할과 기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신 또는 죽은 자의 영혼과 살아 있는 사람을 연결하는 중개자라고 할 수 있다. 샤먼이 인간 사회에 가장 먼저 나타났다는 시베리아, 북아시아에는 튀르크족을 비롯해서 알타이족, 야구트족, 예벤크족, 부랴트족, 몽골족 등 100여 민족이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퉁구스어로 ‘무아지경’, ‘몰아지경’, ‘망아지경’ 상태에서 지식을 얻는 사람을 ‘사만’이라고 한다. 샤먼은 이 ‘사만’에서 유래했다. 물론 샤먼이 인도 고어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퉁구스 토착어라는 견해가 가장 지배적인 학설이다. p 040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는 18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 유일한 유인도가 ‘올혼 섬’이다. 한 때는 러시아 정치범 유배지이기도 했던 올혼 섬은 아주 오래전 부터 샤먼의 고향, 신들의 고향이라 불렸다. 올혼 섬에는 샤머니즘 유적이 곳곳에 있는데, 일부 유적은 우리나라 솟대와 서낭당과 비슷한 형태도 볼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샤머니즘의 기원이 바이칼 호수 일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파된 샤머니즘이 각 나라 특색에 맞게 변형되었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서낭당이나 솟대 역시 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올혼 섬에선 매년 7월이 되면 ‘국제샤먼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렇게 샤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대체적으로 발원지인 시베리아를 비롯한 아시아 일대 사례가 나오곤한다. 그러다보니 샤머니즘이 아시아권의 고유 민속신앙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절대로 아니다. 역시나 위에서 언급했듯 시베리아에서 발원한 샤머니즘은 아시아를 비롯해 유럽 권역까지 전파되었다.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이 직접적으로 전파되지는 않았더라도, ‘문화의 보편성’에 따라 동 시간대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같은 여러 신앙이 나타났다. 그 중 대표적으로 켈트족 신화가 있다. 켈트족은 게르만족과 함께 유럽인의 뿌리다.








켈트족의 드루이드는 사제, 교사, 법관 등의 역할을 한꺼번에 담당했다. 그만큼 존경받는 최고의 계급이었다. 드루이드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제사를 주관했고 젊은이들에게 교사로서 모든 지식을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갖가지 분쟁을 심판해 처벌하는 재판장이었다. 드루이드가 내세우는 삶의 철학은 ‘영혼불멸’이었다. 영혼불멸은 그들이 신봉하는 믿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관이었으며 신앙의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켈트족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의 문화는 드루이드의 구술로 계승되고 전해졌다. p 064


드루이드는 고대 유럽에서 샤먼의 역할과 기능을 했다. 온갖 질병을 고치기도 했으며, 의례/의식을 통해 죽은 자의 영혼과 소통하면서 살아있는 사람과 중개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고대 유럽의 종족들에게 샤머니즘은 절대적으로 삶을 지배하는 신앙이었으며 종교였다는 사실이다. p 066


*‘나무를 보는 사람’이라는 뜻의 드루이드. 지식을 기록하지 않고 말로만 전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적이 기록된 문헌은 드물다. 기원전 2세기 무렵 그리스의 소티온이 그의 저서에 이들을 드루이다이로 표기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한마디로 샤머니즘은 시베리아, 아시아를 넘어 동시간대 유럽권역까지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 등 신흥종교가 나타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샤머니즘은 그 입지가 빠르게 좁아졌다. 이들 신흥종교들은 샤머니즘을 ‘미개하다’는 이유로 탄압하거나, 반대로 신흥 종교를 빠르게 전파하기 위해 샤머니즘을 ‘흡수’했다. 예컨대 기독교는 샤머니즘을 탄압했고, 불교는 샤머니즘을 흡수했다. 


샤머니즘을 흡수한 불교의 대표적인 사례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민속신들을 불교신으로 포용하여, 사찰에 그들을 위한 법당을 만들었다(칠성각, 산신각 등). 반대로 샤머니즘을 탄압한 기독교의 대표 사례는 중세시대 유행했던 ‘마녀사냥’이 있다.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서양에선 샤머니즘이 그 씨가 말랐지만, 아직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10월 31일 핼러윈이다. 핼러윈은 원래 켈트족의 축제였다. 


켈트족은 10월 31일에 지하세계에 있는 저승의 문이 열려 죽은 자의 영혼과 악령이 이승으로 올라온다고 믿었다. 하여 조상들과 죽은 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을 괴롭히려고 나타난 악령이 자신들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기괴한 모습으로 분장을 했다. 뿐만 아니라 순무를 귀신형상으로 파내어, 그 안에 초를 넣고 밝혔다. 제 아무리 샤머니즘을 탄압한 기독교일지라도, 모든 이가 참여하는 축제만큼은 없애지 못했던 것이다. 없앨수 없었기에, 그들은 핼러윈을 기독교로 흡수했다. 




여기까지! 킬링타임용으로 읽은 인문학책 치고는 꽤 내용이 풍부하여, 킬링타임이 아니게 되었..지만. 가끔 생각나면 읽을 책 리스트에 포함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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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이 역사책 두 권을 같이 올리는 건 같은 대상을 상대로, 왕이 각기 다른 판단을 하여 초래되는 결과가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판단은 포로로 잡혀있던 백성들을 무사 귀환시켰고, 또 한 사람의 판단은 전 국토를 전쟁에 몰아넣고 황폐화 시켰다. 


​​


『책중일록』 : 1619년 명나라와 연합하여 후금의 수도를 선제 공격했으나 패배한 ‘심하전투’에 참전하고, 청나라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종사관 이민환이 남긴 종군 기록물이다(‘심하전투’는 명청전쟁에 속한 일부 전투 중 하나). 청나라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있던 조선군은 약 1년여만에 조선으로 귀환한다.


『산성일기』 :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던 김상헌의 아들 또는 조카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후금의 시작부터 병자호란 이후 삼전도의 굴욕까지 장장 50년 간 인조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기록물이다. 




책중일록


심하전투의 패배는 우리 해외 파병 역사에서 유례없는 대참변이었다. 1619년의 사르후 전투와 심하 전투의 실상이나 조선군의 항복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공정한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패전의 주된 요인은 전체 병력을 네 갈래로 분산하여 공격을 시작한 명나라 지휘관들의 전략 실패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명과 조선 연합군의 빈약한 무기와 군량 고갈 그리고 허허벌판에서 후금의 기병과 맞붙었던 작전도 결정적 패인이었다. 후금에 대한 조선의 선제공격은 뒷날 두 차례 호란의 구실이 되기도 했다. - 머릿말 中



명/청교체기 과정에서 일어난 ‘명청전쟁’. 그 전쟁 중에 조선군이 파병하여 참전한 전투가 있다. 명나라와 조선군이 연합하여 후금을 선제공격한 ‘심하전투’와 ‘푸차전투’다. 매우 생소한 이름의 이 전투들은 명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인해 진행되었다. 당시 조선의 왕은 광해군이었다. 광해는 명나라의 파병요청에 응하려 하지 않았지만, 당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재조지은’의 나라였다. 조선의 대신들은 파병을 적극 찬성하며, 파병을 하기 위해 광해를 압박했다. 그들에게는 주변정세는 관심밖이었다. 이 파병으로 인해 백성들이 어떤 고통을 받게 될지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오로지 재조지은의 나라를 도와줘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이런 점은 2024년 현재,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 측근들의 행동과 매우 오버랩된다.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냈던 명나라를 위한 조선군 파병. 광해군은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조선군은 명나라군과 연합하여 후금의 수도를 선제공격했고, 결과적으로 패배했다. 패배의 원인은 열거하면 입아프니 생략. 전투에서 패배한 군인들에게 선택지는 두 개다. 죽거나 살아서 포로로 잡혀가거나. 



다행스러운 점은 광해군이 전투 전후로 중립외교에 힘쓰며 후금에 적잖은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비록 패배한 전투이긴 하지만, 조선군은 위 전투에서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그로 인해 후금은 명나라 포로들은 학살한 반면, 조선군 포로들은 생포했다. 특히 조선군 중 고위직 인물들은 꽤나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일반 조선군 병졸 포로들에게도 매일 양식과 땔감을 지급했다. 청나라는 광해군이 명나라에 파병을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조선군 포로 중 양반 출신 일부가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만, 이는 청나라의 무차별적인 학살이 아니었다. 조선군 포로들이 주인을 죽이고 도망가거나, 여인을 강간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분노한 청 황제 누르하치는 조선군 포로 전부를 죽이려 하였으나, 측근들이 극구 만류하여 양반 출신 조선군만 죽이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렇게 포로생활 1년이 흘렀다. 그 1년간 광해는 중립외교로 청황제 마음을 돌렸다. 이미 승기는 청나라에 있었고, 대신들도 점점 재조지은을 외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군 포로들은 1년만에 조선으로 무사귀환 하였다. 



광해 말년의 평가는 차지하고서라도, 광해군은 주변 간신들과 달리 대외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조선을 안정화시키고, 백성을 지킬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광해의 이런 점은 리더라면 꼭 갖춰야할 기본 소양 중 하나다. 전제군주든 민주공화국의 대통령든 국민을 대표하는 리더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자질인 것이다. 슬프게도 2024년 겨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은 이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그의 사상은 사백여 년 전 왕보다도 못했다. 오히려 지켜야할 국민을 학살했던, 군부독재를 하던 박정희, 전두환과 닮아 있다.



산성일기


《산성일기》를 통해 독자는 병자호란 당시에 있었던 참담한 우리의 역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떤 민족의 발자취를 직접 읽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더불어 이 책이 다시는 이러한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우리 민족혼을 일깨우는 지침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머릿말 中



『산성일기』는 청태조 누르하치가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이라는 이름을 얻는데서 시작해, 1669년 12월 삼전도에 승전비를 세우는 데 까지 기록한, 장장 5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쓰여진 일기다. 이 일기를 쓴 사람은 전해지지 않으나, 작품속에 묘사된 내용을 보면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한다. 특히 김상헌이 목을 매었던 사건이나, 정온이 칼로 배를 찔러 죽으려 했던 모습, 인조가 성안에서 했던 행동이나 각종 외교문서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보아 역사가들은 이 책의 저자를 김상헌의 아들 김광찬 또는 조카 김광현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대표였다. 



솔직히 말하여, 이 책을 읽고 있는 내내 답답함과 분노가 그라데이션으로 차올랐다. 지금까지 인조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어왔기에, 무념무상하며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이 책은 역사책이기 전에 인조 옆에 있던 측근이 실시간으로 쓴 일기다. 확실히 현대인이 요즘 관점에서 쓴 역사책과는 다르다. 기백년이 지난, 이미 알고 있는 사건에 대해 아주 생생하게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다니. 괜히 읽었나 싶으면서도, 현재와 오버랩되는 것이 반면교사 삼기 딱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조같은 콤플렉스 덩어리인 인간이 왕이 되자, 나라가 어떻게 되었는가! 



광해를 끌어내리고 왕이 되자마자 그가 한 일은 측근챙기기 였다. 임진왜란 직후라 민생을 챙겨야하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측근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나마 그 측근챙기기도, 성과를 따져 챙긴게 아니라 자기 입안의 혀처럼 구는 간신들만 챙겨주다가 ‘이괄의 난’이 터져, 백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가기도 했다. 정묘호란이 터졌을 때도 그는 백성을 버리고 또 도망갔다.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도 그는 백성을 버리고 또또 도망갔다. 그 뿐만인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얘탓이다 쟤탓이다 줏대라고는 하나 없는, 남탓하기에 급급한 왕이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피해는 조선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전 국토는 청나라 군에 짓밟혔고, 수없는 조선 사람들이 죽었으며, 살아있는 조선 여자들은 청나라에 끌려갔다.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사람이 왕이 되었더라면, 이 모두가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들이었다. 



놀랍게도 사백여 년이 흐른 지금 컴플렉스 덩어리인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측근챙기기였다. 자기 주변 인사를 최측근들로 구성했다. 그 과정에서 민생은 파탄이 났다. 파탄난 민생은 자기 탓이 아닌, 남탓으로 일관했다. 거기다 북한이 전쟁을 유발하도록 무인기를 보낸 정황까지 나왔다.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민들의 안녕을 헤치는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인가? 기어이 국민을 향해 총구를 들이댔다. 2024년에 비상계엄이 왠말인가. 이 역시 피해는 고스란히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이 모두가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들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반복을 끊어내는 해답은 다름아닌 ‘역사’에 있다. 



2024년 겨울, 나라의 존폐를 흔들만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나라의 수장이라는 대통령으로 인해. 그는 잘못된 명령을 내렸고, 지금도 변명에 변명을 거듭하고 있다. 콤플렉스 덩어리 임금인 인조와 똑 닮은 대통령, 광해군 주변에 있던 간신들과 똑 닮은 그 측근들. 약 400여년이 흘렀음에도 나라를 대표하는 자와 간신들의 얼굴과 이름만 달라졌을 뿐, 하는 짓은 똑같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대통령이 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주변에 간신이 있을리 만무하다. 이 모든 일들은 국민들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국민들은 대체 무슨 죄인가. 투표를 잘못한 죄인가? 아니, 애초에 제대로된 검증 없이 저런 인물을 대통령 후보랍시고 내놓은 정당이 제일 큰 죄인이다. 이미 2016년 같은 정당 출신 대통령이 헌법 위배로 탄핵된 지가 불과 8년 전이다. 이쯤되면 인재를 보는 눈이 없거나, 국민을 기만하는 것 둘 중 하나이니, 정당 해체해야하는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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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OUT 일본근대백년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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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작년에 동 제목 시리즈로 유럽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문학책을 출간했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은 유럽을 떠나 일본에 주목했다. 그것도 일본 근대사에! 


한일관계사를 전공하기도 했고, 나름 관심도 많아서 관련 책도 많이 읽었던 나다. 그러다보니 일본근대사가 그 어떤 세계사보다,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고 있다. 또한 중요성과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 근대사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수시로 일본근대사 책을 읽고 리뷰도 올리고 그랬다. 내 블로그를 오는 이들이라도 일본 근대사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에.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책을 쓴 저자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이 책 『TAKE OUT 일본근대혁명』의 저자는 일본 근대사의 무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왜? 일본근대사는 보는 사람 시각에 따라, 우리나라 근대사를 왜곡하는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이 왜곡의 길로 들어서지 않게끔, 최대한 사실을 반영하여 ‘읽기 쉽게’ 서술하였다. 이 ‘읽기 쉽게’라는 게 정말 중요하다. 일본 근대사는 대체로 내용이 무겁다. 그저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화하는 과정이라고 하기엔, 그 안에서 수시로 ‘정한론’이 나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본 근대화 영웅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은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 당시 악랄한 가해자 일 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본능적으로 이 내용들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읽기 쉽게’가 중요하다. 내용은 무거울지언정, 책 속의 글은 역사책 형식이 아닌, 인문학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되어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 선진국을 견학하고 온 그들이 유신 상황에서 지금은 내치에 전념해야 할 때라는 주장을 편 것이 더 힘을 얻은 것입니다. 일본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정벌 불발로 실각 후 실권을 잡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도하에 1874년 대만을 정벌하고, 1875년 운요호로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정한론의 서막을 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 침략의 전초 단계이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한 것과 같은 전면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묵은 정한론이 12년 후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아시아를 벗어나자는, 더 확대된 탈아론으로 진화되어 살아난 것입니다. p 027




일본 근대화의 분수령이었던 ‘메이지 유신’. 이 근대화 혁명을 주도한 건 다름아닌 사무라이였다. 쉽게 말해서 문신이 아닌 무신들이 근대화 혁명을 추진했고, 심지어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계급에 따른 거주지 제한과 ‘독서’에 답이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거주지 제한으로 인해, 본인들이 지켜야할 주인(번주)가 있는 도시에 살아야 했다. 하지만 에도시대는 전국시대와 달리 전쟁이 사라졌기에, 사실상 그들이 칼을 쓸 일은 없었다. 여가 시간이 많아진 그들은 자연적으로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독서였다. 거주지 제한으로 인해 도시에 살수 밖에 없는 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건 바로 도시로 몰려드는 각종 책이나 신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에 이르면 다수의 사무라이들이 주자학을 배우거나, 이미 그 수준이 꽤 높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시에 살다보니 그들은 격변하는 세계 정세를 몸소 느꼈다. 특히 수시로 해안가에 나타나는 서양 함선은 사무라이들에겐 커다란 충격이자 공포였다. 서양 함선으로 인해 그들은 일본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서구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서양 함선의 출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하여 막부는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한 사절단을 조성하여, 서양으로 유학을 보냈다. 유학생들은 당연히 위에서 언급한 독서하는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들은 ‘이와쿠라 사절단’이라 불렸다. 후술하겠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간 핵심인물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유신호걸이자 대게 조슈번 출신이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일본 중앙 권력이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을 보내는 동안 조선은 무엇을 했는지를. 동시대 조선은 이른바 세도정치 시대였다. 지배층인 왕실을 비롯한 노론 세력은 지들끼리 권력 나눠먹고, 백성들 수탈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삼정의 문란’이 바로 이 때다. 양반들은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걷어갔다. 가렴주구,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양반네들은 온갖 방법으로 수탈하며 백성들을 옥죄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많은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후기 민란이 많이 발생한 이유다.



일본이 근대화 혁명인 메이지 유신을 성공했을때 조선은 어땠을까.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비주류 지역인 시코쿠의 도사번 출신으로 그의 고향은 오늘날 고치현에 해당됩니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에도 유학 중 앞바다에 떠있던 미국의 흑선 함대를 보게 됩니다. 그의 흑선 목격은 일본이 구미 선진국과 같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막부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된다는 당위성을 더욱 강하게 만든 사건으로 그때부터 그는 왕정복고를 위한 대정봉환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p 046



메이지 유신 후 승자들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삿초동맹의 멤버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인물들이 대거 출세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최후의 승자가 가려집니다. 이제 그들은 대륙을 탐하고 눈을 돌려 바다로까지 뻗어나갑니다. p 054




조슈번은 현재 야마구치현이다. 야마구치현이 어디인가. 일본 중앙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혼슈 끝에 있는 지역이다. 거리로 치면 중앙 권력인 에도나, 과거 일본 정통 권력지였던 교토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다. 중앙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어떻게 혁명의 불씨가 타올랐을까? 그 이유는 기백년간 이어진 이 지역의 반골 기질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1614년에 발발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데야스의 일전 오사카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가 알듯 승자는 도쿠가와 이데야스였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및 도요토미 지지 가문은 이 때 거의 죽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모리 가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의 영지와 녹봉을 거의 몰수하다시피 하고, 조슈번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조슈번은 중앙 권력에서 배제된 채, 중앙권력에 이를 갈며 오랜 기간을 준비하고 또 준비한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막부를 타도한 ‘대정봉환’, 근대화 개혁인 ‘메이지 유신’이다.


그렇게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수많은 유신 호걸을 배출한 조슈번(야마구치현).  그리고 여전히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일본 총리다. 야마구치현 출신 일본 총리는 21%로 타 지역에 비해 매우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과거 조슈번 유신 호걸부터, 현재 야마구치현 출신 일본 총리들의 공통점은 비단 지역구 뿐만이 아니다. 일본을 벗어나 다른 나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 그 야욕마저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이어졌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들은 조슈번에 있는 ‘쇼카손주쿠’라는 아주 조그만 사숙에서 공부를 했다. 그들을 가르친 사람은 요시다 쇼인. ‘정한론’을 처음 알렸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콕집어 이야기한게 아니다. 일본의 해외팽창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일본의 해외팽창을 위해선 조선이 그 시작점이었을 뿐, 조선을 넘어 만주, 훗카이도, 캄차카 반도, 대만,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 한마디로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한 사람이다. 하지만 당대 일본 권력자들은 요시다 쇼인의 이런 주장을 허무맹랑하다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쇼인은 권력에 가깝지 았았을 뿐더러, 이른나이에 요절했다.



이런 요시다 쇼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은, 스승의 구상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서구 문물을 배우고, 대정봉환에 이어 메이지 유신을 성공하고, 내각을 점령했다. 내치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그들은 스승의 해외팽창 구상을 하나씩 착수해나갔다. 조선침략, 만주사변은 폐기되었던 요시다 쇼인의 ‘대동아 공영권’ 부활의 서막이다. 일제의 진주만 공습은 ‘대동아 공영권’이 완벽했다는, 그들의 축포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들의 축포는 결과적으로 원자폭탄으로 되돌아왔지만. 



TMI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메이지 유신의 아이러니 하나. 메이지 유신 주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세이난 전쟁 같은 사유로 대게 서로 맞서며 20세기 전에 요절했다. 반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일왕에게 권력을 넘긴 뒤 무려 공작 작위를 받고(!) 천수를 누리며 76세에 죽었다. 일본을 근대화로 이끌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이들과는 달리, 구시대를 대표하는 마지막 쇼군은 매우 안온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TMI 둘. 일본 근대화 개혁의 선봉장은 단연 사카모토 료마다. 비록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가 대정봉환에 앞장서고, 일본의 근대화 불씨를 점화하지 않았더라면 일본 근대화는 조금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사카모토 료마는 동료들과 ‘해원대’를 설립해 운영했다. ‘해원대’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오늘날 일본 해군의 기원이며, 일종의 군산복합체 성격을 띈 단체였다. 료마가 자객에게 죽음을 맞이한 뒤, 해원대는 해산되었다.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의 동료 이와사키 야타로가 해산된 해원대를 합쳐, 다시 기업을 세웠다. 그 기업이 바로 미쓰비시 그룹이다. 메이저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던 미쓰비시(우리에겐 강제동원 가해자이자 전범기업이다). 미쓰비시 창업은 사카모토 료마가 남긴 유산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2차 대전 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딱 두 도시와 그곳에 거주하는 민간인만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사실 원폭으로 많은 사상자가 집중되어 피해가 커 보이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전체 피해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 공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본토 상륙 공격을 당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패배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침략한 국가들은 그들이 영토의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만신창이를 만들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인권 유린을 자행하였으니까요. p 095


도쿄 전범재판은 저지른 범죄와 흉포함에 비해 턱없이 약한 처벌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재판에 조선이든 대한제국이든 코리아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학국의 눈엔 우리가 전쟁 훨씬 전인 1910년 한일합방으로 식민지화가 완료된 일본과 한 덩어리인 국가로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피해자로 분류하면 연합국 중 그때까지도 인도를 식민지로 갖고 있는 영국 같은 나라들이 난처해질 수도 있어 모른척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p 11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그 회의에서 독도는 조약의 5차 수정 문서까지는 우리나라 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떤 작자가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독도를 일본 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정치 고문을 맡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6차 수정 문서엔 독도가 일본 땅으로 기록되었는데 영국과 뉴질랜드가 이견을 제시하자 그 다음 차 수정 문서엔 아예 독도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최종 조약 문서에도 독도는 빠졌습니다. p 123



겉으로 보면 원자폭탄 엔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 같은 일본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저자가 말했듯, 실질적으로 일본 본토를 향한 집중공격은 없었고, 오히려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우리나라가 그랬고 중국이 그랬고 동남아시아 여러나라가 그랬다. 하지만 일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원자폭탄’에만 초점을 맞춰서, 본인들이 피해자라는 대대적인 쇼를 하고 있다. 매년 8월 15일만 되면 온갖 방송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역사적으로 명백히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쇼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연코 미국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미국에 의해 망했는데, 미국 덕분에 쇼를 한다니. 



일제 패망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 들어와 통치를 하고, 일본에도 들어가 통치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일본을 ‘아시아 민주주의 선봉장’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 재건을 이끌었다. 반면에 일제로 인해 유린된 한반도에서는, 일제가 했던 그대로 통치했다. 쌀 공출이 그러했고, 친일파를 재등용이 그러했다. 살기 어려운 국민들이 뭐라 할라고 치면 ‘빨갱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주 4.3이다. 그러다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며 벌어진 동족간의 전쟁이었지만, 실상은 소련 공산주의를 등에 업은 북한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연합군 뒤에 숨은 남한의 전쟁이었다. 결과는 모두가 알듯 휴전이다. 



전쟁 당사자들에게만 중요할 거라 생각한 6.25전쟁,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일본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왜? 미국은 전쟁물자를 전쟁물자를 일본에서 가져왔다. 우리에겐 아픔을 준 6.25전쟁이, 일본에서는 경제 부흥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우리나라 외교에 있어서 대일외교는 언제나 중요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향해 야욕을 드러냈고, 그 야욕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는 두 번이나 뼈아픈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도 그렇다. 야욕의 성격은 변했어도, 그들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일본이 왜 그렇게 야욕을 드러내는지, 우리나라는 먼 과거, 가까운 과거에 참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과오를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일본 근대화, 메이지 유신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이 녹록치 않다. 일본? 미국? 외치는 커녕 내치도 안되고 있다. 정말 놀랍게도 유사 민주주의의 대명사인 일본보다 못한, 민주주의 후진국이 되어버렸다. 헌법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대통령이 헌법을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하, 뭐 진짜 뭐라고 해야할지. 이 책 『『TAKE OUT 일본근대혁명』을 읽을 때만해도, 우리나라, 일본과 미국 그리고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야. 뭐라 할말이 없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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