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에 읽은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1권에 이어 이번엔 2권이다. 1권을 읽은 독자들은 필히 2권도 읽어야 한다. 1권과 2권은 내용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1권은 한일 고대사 이론(또는 개념), 주요 인식 및 쟁점등에 대한 에 대한 역사책이다. 반면에 2권은 일본 곳곳에 ‘현재’ 남아있는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을 찾는 일종의 답사기다. 고로 나처럼 한일 고대 유적지 답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2권을 필히 읽어야만 한다.
지금이야 답사여행을 못하고 있지만, 아이를 낳기전만해도 주기적으로 국/내외 유적 답사를 다녔었다. 특히 한일관계사 부분은 내가 제일 관심있어하는 부분이다보니, 해마다 일본을 찾아 많은 유적지 답사를 했다. 다만 실제로 답사를 다닌 지역은 관동/관서/규슈지역에 한정되있다보니 그 외의 지역은 책으로 공부하는게 끝이긴 했다. 그래도 이런 경험들로 인해 나름대로 도래인 신사나 현존하는 지명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알고 있는 건 정말로 한정적이었달까. 거기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는 과거의 내용으로, 현재 학계에선 새로운 내용들이 대두된 것들도 있었다.
저자는 이 역사책이 일본 백제계 지명과 신사 답사기인 만큼, 일본 지역별로 묶어서 집필하였다. 제일 땅 덩어리가 큰 혼슈는 긴키, 간토, 주부, 주코쿠 등 세부적으로 나뉘었고, 그외 시코쿠랑 규슈는 각 하나씩 구성했다. 훗카이도는 없다. 훗카이도가 없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 긴키 지방: 오사카부, 교토부, 나라현, 시가현, 와카야마현, 효고현, 미에현
2. 규슈 지방: 후쿠오카현, 사가현, 구마모토현, 오이타현, 미야자키현
3. 주고쿠 지방: 야마구치현, 오카야마현, 시마네현
4. 시고쿠 지방: 도쿠시마현, 에히메현
5. 주부 지방: 후쿠이현, 기후현, 아이치현, 나가노현,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6. 간토 지방: 군마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이바라키현
고대 한반도 도래인은 바닷길을 이용해 일본열도로 넘어갔다. 지금도 위험한 바닷길, 고대라고 다를까? 그래서 도래인들은 일본 열도로 가기 위해 최대한 짧은 바닷길을 이용했다. 고대인이 주로 이용했을 대표적인 바닷길 경로가 몇개 있는데, 어떤 경로든 종착지는 규슈와 혼슈 일대다. 혼슈는 동해와 인접한 주로 긴키(간사이), 주코쿠 일대다. 최초 규슈, 혼슈 일대에 도착한 도래인들은 터전을 점점 넓혀가며 관동지역까지 올라간 것이다.
반면에 일본 열도 북동부에 자리한 훗카이도는 지리적으로도 멀다. 그리고 춥다. 대체로 일본으로 넘어간 도래인들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살던 사람들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추운지역인 고구려계 도래인도 있었지만, 고구려와 훗카이도를 비교해도 훗카이도는 한참 더 북쪽에 위치해있다. 아무리 북쪽에 있는 고구려라고 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곳이 훗카이도다. 대충 현재 북한과 러시아 기후를 비교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여튼 그러한 이유로 도래인들이 훗카이도까지 갈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훗카이도는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일본이 아닌, 아이누족의 땅이었다. 일본조차도 같은 국가라 생각하지 않았던 곳이다.
메이지 유신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일본 국수주의가 최고조였던 일본 근대화 시기(메이지 유신)에 수많은 도래인 신사의 주신이 일본 신으로 강제 변경되었다. 한반도계 지명도 일본식으로 거의 바뀌었다. 해서 메이지 시대 이전과 비교하면 실제로 남아있는 도래인의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신이 일본 신으로 강제 변경되었던 도래인 신사 중 어떤 곳은 현재 원래의 주신인 지역신(도래인이 모시던 신)으로 바꾼 곳도 있다. 없앴던 한반도계 지명이 다시 부활한 곳도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 동네이름을 갑자기 바꾼다고 해서, 쉽게 바뀔까? 지도상의 공식 지명은 바뀔지언정, 옛 이름들은 학교 이름으로, 거리이름으로, 간판으로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일본이 아무리 한반도계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도 절대 지울 수 없다. 우가우가 석기시대를 살던 일본 열도에, 청동기+철기를 비롯하여 각종 주요 기술을 전수하며 고대 일본을 발전시킨 도래인에 대한 고마움은 일본인 DNA에 박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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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는 지금도 재일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처럼 우리와 여러가지로 인연이 많은 오사카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백제’라는 명칭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실제 오사카 시내의 이쿠노구, 히가시스미요시구 일대를 둘러보면 백제라는 명칭을 다수 목격할 수 있다. 거리의 이름도 백제(구다라) 이며 부근 화물열차의 역도 JR백제역이다. 뿐만 아니라 오사카시립남백제소학교, 백제대교, 흐르고 있는 개울의 이름도 백제천이다. p 016
백촌강 전투 후 한반도에서 ‘백제’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반대로 일본에서 ‘백제’ 라는 이름이 부활했다. 백제 유민들은 대거 일본 열도로 넘어온 것도 있었고, 백제 멸망 전에도 이미 백제와 왜는 왕실끼리 혼인도 하는 등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무령왕이 백제에서 탄생한 사례로 보듯, 백제 왕자들은 수시로 왜에서 체류하기도 했다. 연장선상에서 백제 멸망 시점에 일본엔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이 나니와(현 오사카)에서 체류중이었다. 백제가 멸망하며, 선광은 그대로 왜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선광 후예들은 ‘백제왕’이라는 성을 받았고,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은 정식적으로 ‘백제군’이라는 행정구역이 되었다. 그 역사가 이어져 지금도 오사카에서 ‘백제’라는 지명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오사카에는 의자왕의 아들 선광 후손인 백제왕씨 뿐만아니라, 근구수왕의 후손인 후이지씨/후나씨/쓰씨 일족, 근초고왕의 후손인 니시고리씨 일족,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후손, 왕인박사의 후손인 다카시씨/가와치노후미씨 일족 등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 다카아이정의 주군총: 전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왜왕의 왕녀)의 또 다른 아들로 추정
- 왕인 성당: 왕인 박사가 학문을 전파했던 성당. 현재는 재물의 신인 벤자이텐을 제사지내고 있다.
- 도토와 다카이시 신사: 도토라는 지명은 왕인의 후손인 일본의 최초 대승정 교키가 건립한 토탑에서 유래했다. 부근에 있는 에바라사는 교키가 태어난 사찰이다. 교키 사후 480년이 지나서 발굴된 사리함에는 ‘그의 속성은 다카시씨로서 백제 왕자 왕이의 후손이다’라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신찬성씨록』에는 다카시노무라지를 왕인의 후손으로 기록한다.
- 하야시와 도모하야시노우신사: 전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의 후손인 하야시 일족은 부근에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 지카쓰아스카의 아스카베신사: 아스카베신사는 백제계 아스카베노미야쓰코 일족의 조상신으로 아스카대신 즉, 곤지를 제신으로 하고 있는 신사다. 곤지는 『일본서기』에서 개로왕이 왜국으로 파견했던 동생 곤지를 말한다. 과거에는 곤지왕 신사로도 불렸다. 『일본서기』에서 곤지가 왜국에서 생활하며 5명의 아들을 갖고, 그중 둘째인 동성이 백제로 돌아가 왕이 된 상황을 기록한다. 이를 보아 곤지의 직계자손들은 실제 일본에 남아 자손을 번성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지금까지 일본에 남아있는 곤지 전승이 곤지의 후손들이 일본에서 위상을 떨쳤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 백제왕신사와 백제사 유적: ‘의자왕-선광-창성-낭우-경복’으로 이어지는 백제왕 계보는 백제왕 신사 족보에 기록되어있으며, 특히 백제왕 경복은 종3위에 오르는 등 가장 화려한 경력을 가졌다. 백제왕 경복때 백제왕씨 본거지를 나나외에서 가타노로 옮겼으며, 씨신을 모시는 백제왕 신사와, 씨사로 백제사를 건설하여 백제왕 일족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 하타, 우즈마사: 지명의 유래는 고대 호족인 하타씨와 관련이 있다. 하타씨는 한반도계 대표 도왜씨족이다.
교토는 도쿄가 수도가 될 때까지 약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하지만, 정치의 중심지로서는 헤이안 천도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까지 약 400년 간만 일본 열도를 호령했을 뿐, 막부에 의해 형식적으로만 수도의 역할을 한 기간이 많았따. 그렇기에 교토는 실권을 잃은 천황만을 위해 조성된 상징적인 동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토에 남아있는 백제계 지명과 신사는 대체적으로 하타씨에 의해 남겨진 것이 많다. p 067
교토에서 만나는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은 99.9%는 하타씨라고 봐도 무방하다. 백제에서 하타씨가 일본 열도로 도왜한 내용은 수많은 포스팅에서 언급했기에 생략한다.
보통 도래인 계열 씨족들은 ‘누구누구의 후손’으로 통칭할 수 있는데, 하타씨는 거기서 약간 예외적인 존재라 볼 수 있다. 물론 하타씨도 궁월군이라는 조상을 두고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궁월군 후손을 포함하여, 당시에 궁월군이 일본으로 대려온 백제 유민들을 모두 포함하여 하타씨로 본다. 이때 들어온 궁월군과 함께 일본으로 온 도왜인, 즉 하타씨들은 토목(제방공사), 광산, 농업, 염전, 양잠, 양조 등 도시개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술을 지닌 집단이었다. 하타씨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 곳곳에 터를 잡고 크게 번성하였다. 실제로 하타씨는 540년 경에 이미 일본 내에서 거대한 집단이 되어있었고, 700년 경에는 일본 전국 어디에나 살 정도로 번성하였다.
하타씨가 터전을 잡은 곳은 주로 큰 강줄기가 있는 곳, 하타씨의 제방공사로 인해 큰 도시로 번성한 곳들이다. 교토도 그 중 하나다. 교토 아라시야마 도게츠교 맞은편에 있는 대언천 제방이 바로 하타씨 작품이며, 이를 시작으로 아라시야마 일대를 개발하여 고대 도시 교토를 만들어냈다. 특히 교토는 천황이 거주한 지역이다. 전문적인 기술로 부와 명성을 쌓은 하타씨 중 일부는 고위직에 종사하기도 하고, 천황에게 성씨를 하사받기도 했다.
TMI이긴 한데 교토 북부(가모강변)에 자리잡은 도래인 일족인 가모씨는 제철(대장장이) 기술 보유자로, 하타씨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9세기 전후로 두 일족은 혼인으로 맺어졌고, 일족 간에 양자 입양도 하는 등 꾸준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유지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로부터 교토의 유명 축제인 ‘아오이마츠리(가모마츠리)’는 가모씨 신사인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와 하타씨 신사인 마츠오 대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두 일족의 공동 축제다.
- 우즈마사의 고류사와 오사케신사: 야마토 정권 당시 쇼토쿠 태자의 후견인 하타노 가와카쓰는 그들의 씨사인 고류사를 건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하치오카사, 하타노기미사, 가도노하타사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국보 금동반가사유상과 흡사한 목조반가사유상이 보관된 곳이기도 하다. 오사케신사의 제신은 진시황제, 궁월군, 하나토사케공이 봉안되어있다. 궁월군은 『일본서기』 오우진조에서 백제로부터 120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는 인물이다. 오사케신사 도리이 옆에 있는 돌기둥에는 ‘누에 치고 베를 짜는 일, 관현학과 춤의 신’이라고 쓰여있다.
- 가이코노야시로의 고가이신사: 고류사 건너편에 가이코노야시로라는 전차역이 있고, 부근에 고노시마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노시마 신사 경내에는 고가이 신사가 조그맣게 자리한다. 과거에는 고가이신사가 이 동네를 대표했을정도로 거대한 신사였다. 가이코노야시로라는 명칭은 하타씨가 전수한 가이코 신앙, 즉 양잠 신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고가이신사는 하타씨가 직물의 조상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설립했다.
- 마쓰오대사: 하타씨가 씨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신사다. 중세 이후에는 양조신을 모시는 신사로 알려졌고, 현재는 일본에 있는 11만개의 신사 중 4번째로 격식을 갖춘 신사이며, 제신은 스사노오의 두 아들로 바뀌었다.
- 후시미이나리대사: 전국 3만 5천개가 있는 이나리 시사의 총 본산이다. 제신은 이나리대신으로 풍요를 관장하는 농경신이다. 역시나 하타씨가 창건한 신사로, 후시미지역은 하타씨 근거지 중 한 곳이다.
- 히라노신사: 8세기 간무천황의 명으로 만들어진 신사다. 제신은 이마키신, 구도신, 후루아키신, 히메신이다. 히메신은 간무천황의 모친인 나카노 니이가사인데, 그녀는 백제계 도래인 후손이다. 이마키신 역시 백제계 도왜인들이 모시던 고향신이다.
- 오카노야: 교오부 우지시 우지천 동편 고카쇼의 옛 지명은 오카노야 이다. 현재 오카노야소학교로 지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카노야의 유래는 백제계 오카노야공에서 유래한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오카노야공은 백제 비류왕의 후손이라 한다. 『일본삼대실록』 및 『고사기』 에 따라 오카노야공의 조상을 더 쫒아올라가면, 비유왕의 후손이 후에 황별 계통인 하타노아손으로 개성된 것으로 본다.
대충 여기까지! 3권은... 안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