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 별사
정길연 지음 / 파람북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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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의 나라 조선. 그런 조선을 개혁하고자 뜻있는 유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제시한다. 경세치용, 실사구시, 이용후생을 기본으로 한 조선후기 ‘실학’이다. 실학파도 세부적으로는 경세치용학파, 이용후생학파로 나뉜다. 경세치용학파는 농업 중심의 개혁론이라면, 이용후생학파는 중/상업 중심의 개혁론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론 ‘실학파’라고 하면, 중/상업 개혁을 말한 이용후생학파, 즉 ‘북학파’를 떠올리곤 한다. ‘북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는 박지원을 비롯하여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이 있다. 국사 시간에 한번 쯤은 들어봤을 이름들이다.


이렇게 북학파 이야기로 시작하는 건, 이 역사소설 『안의, 별사』 주인공이 바로 북학파의 영수였던 연암 박지원이기 때문이다. 연암은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을 연구하며 『열하일기』, 『허생전』 같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실력도 매우 뛰어났던 그지만, 출세에는 뜻이 없었다. 



나라의 기강이 위에서부터 무너진 지 오래고, 지방관 역시 알량한 벼술자리나마 잃게 될까 제 몸부터 사린다. 아무도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모나지 않는 처세라 합리화한다. p 044


“공부가 과거를 보는 수단이 되는 걸 경계하라는 말이지. 사람 되기를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글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해서 다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마는.” p 176



“우리 반남 박씨 집안은 누대에 걸쳐 청빈과 검소를 실천하며 부귀와 안일을 멀리해왔다. 이는 타고난 데다 가풍을 따른 것이다. 너희가 또 나를 보고 배울 것이니 나 또한 너희 앞일지라도 조심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너희가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부르기를 바라지만 어디까지나 아비로서의 인정일 뿐이다. 인정은 자칫 의를 그르친다. 내 바람은 두 가지다. 삿됨을 분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 사대부 집안으로서 글 읽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 그 뿐이다.” p 176



연암이 살았던18세기 조선은, 위 소설속 내용으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할 만큼 양반네들은 부패했고 백성들의 삶이 궁핍했다. 백번 양보해 모두가 잘사는 나라는 아니더라도, 백성들이 배는 곯지않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었어야 할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다. 아무리 좋은 개혁안이 있다치더라도, 사농공상 및 유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모조리 차단되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이다보니 연암은 더더욱 조정에 나갈 뜻이 없었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야에 있기엔 연암의 학문이나 능력이 워낙 출중했기에,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늦게나마 출사길을 걷는다.



연암은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그 중 1792년 안의 현감을 지냈을 때가 이 소설의 배경이다.




무릇 역사소설은 사실과 허구가 혼재하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설은 왜곡 논란에서 사뭇 자유롭다. 왜? 저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암 덕후였다. 연암에 대한 모든 것을 공부하며 그의 자취를 쫓았다. 그렇기에 저자는 소설을 쓰면서, 알려진 연암의 자취를 소설 속으로 무리없이 옮겨올 수 있었다. 다만 연암의 생애 중 비어있는 구간을 허구로 채웠는데, 그 허구가 바로 연암이 안의 현감을 지냈을 시기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적 허용을 빌어 무책임한 왜곡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소설적 허구를 반영함에 있어서도, 밝혀진 연암의 생애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반영했다. 따라서 허구적 장치는 안의면에서 만났던, 가상의 여인 ‘은용’과 그녀의 서사 정도다. 하지만 이 조차도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게. 역시나 연암의 생애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만 활용되었다. 


특히 은용의 서사는 오히려 알려진 조선 후기 첩의 여식의 삶, 과부의 삶과 비교하면 비교적 담담하고 담백하게 서술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홀아비 였던 연암의 삶과 더욱 비교가 되어, 은용의 삶이 더 처절하고 기구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는 홀아비다. 아무도 내게 수절을 권면하지 않는다. 벗들도 집안사람들도 궁색히 여겨 볼 때마다 오히려 재혼을 권한다.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었다면 누구도 아내더러 개가를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가한 여인의 자손과 첩실의 자손이 받을 부당한 대우는 차지하고서라도, 세상은 온통 여인에게만 부부간의 신의와 절개를 강요한다. 불공평하다 못해 해괴하다. 


유금과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성대중, 백동수, 이희경…. 나는 내 벗들이,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따돌림과 핍박을 당하며 살아온 삶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들이 저지르지 않는 죄목으로 대가를 치르며 살았고, 살아간다. 그들을 이 세상에 내보낸 그들의 아버지들조차 자식이 받는 불이익에 침묵한다. (…)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나의 적은 나의 마음이고, 욕망을 비우고자 하는 마음의 나의 것이다. 하므로 신독,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갈것, 이를 내 여생의 수행의 화두로 삼는다. p 330



그래서 은용이 ‘인연 없음’을 방패삼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또한 은용과는 다르면서도 같은 연암의 도리가 마음을 울렸다. 그렇다. 이 소설은 연암과 은용의 ‘단심(丹心)’을 고스란히 담아낸 소설이다. 



국어사전은 ‘단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런 마음이라고. 연암과 은용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단심’만큼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대게 생각은 다 망상이요, 인연은 다 악연이다. 생각하는 데서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이 맺어지면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해지고, 친하면 정이 붙고, 정이 붙으면 마침내 이것이 원업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 참혹하고 공교로우면 평생 서로 즐거워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데 마침내 재앙과 사망으로 인해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찔러댄다. 이것이 어찌 망상과 악연이 합쳐져서 원업이 된 게 아니겠는가. p 395, 애사


뜰을 이리저리 어정어정 걷다가 뛰기도 하고, 점잖게 걷기도 하고, 달그림자와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한다. 명륜당 뒤뜰의 오래된 나무는 우거져 하늘을 덮었고, 서늘한 이슬이 동글동글 맺혀 잎사귀마다 구슬을 머금었으며, 진주 같은 이슬은 달빛에 반짝인다. 애석하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밤, 이렇게 좋은 달빛에 함께 놀 사람이 없다니. p 444, 미혹


▶『안의 별사』에서 인용한 연암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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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2 : 일본 백제계 지명과 신사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2
홍성화 지음 / 시여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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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하반기에 읽은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1권에 이어 이번엔 2권이다. 1권을 읽은 독자들은 필히 2권도 읽어야 한다. 1권과 2권은 내용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1권은 한일 고대사 이론(또는 개념), 주요 인식 및 쟁점등에 대한 에 대한 역사책이다. 반면에 2권은 일본 곳곳에 ‘현재’ 남아있는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을 찾는 일종의 답사기다. 고로 나처럼 한일 고대 유적지 답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2권을 필히 읽어야만 한다. 



지금이야 답사여행을 못하고 있지만, 아이를 낳기전만해도 주기적으로 국/내외 유적 답사를 다녔었다. 특히 한일관계사 부분은 내가 제일 관심있어하는 부분이다보니, 해마다 일본을 찾아 많은 유적지 답사를 했다. 다만 실제로 답사를 다닌 지역은 관동/관서/규슈지역에 한정되있다보니 그 외의 지역은 책으로 공부하는게 끝이긴 했다. 그래도 이런 경험들로 인해 나름대로 도래인 신사나 현존하는 지명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알고 있는 건 정말로 한정적이었달까. 거기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는 과거의 내용으로, 현재 학계에선 새로운 내용들이 대두된 것들도 있었다. 



저자는 이 역사책이 일본 백제계 지명과 신사 답사기인 만큼, 일본 지역별로 묶어서 집필하였다. 제일 땅 덩어리가 큰 혼슈는 긴키, 간토, 주부, 주코쿠 등 세부적으로 나뉘었고, 그외 시코쿠랑 규슈는 각 하나씩 구성했다. 훗카이도는 없다. 훗카이도가 없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 긴키 지방: 오사카부, 교토부, 나라현, 시가현, 와카야마현, 효고현, 미에현

2. 규슈 지방: 후쿠오카현, 사가현, 구마모토현, 오이타현, 미야자키현

3. 주고쿠 지방: 야마구치현, 오카야마현, 시마네현

4. 시고쿠 지방: 도쿠시마현, 에히메현

5. 주부 지방: 후쿠이현, 기후현, 아이치현, 나가노현,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6. 간토 지방: 군마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이바라키현


고대 한반도 도래인은 바닷길을 이용해 일본열도로 넘어갔다. 지금도 위험한 바닷길, 고대라고 다를까? 그래서 도래인들은 일본 열도로 가기 위해 최대한 짧은 바닷길을 이용했다. 고대인이 주로 이용했을 대표적인 바닷길 경로가 몇개 있는데, 어떤 경로든 종착지는 규슈와 혼슈 일대다. 혼슈는 동해와 인접한 주로 긴키(간사이), 주코쿠 일대다. 최초 규슈, 혼슈 일대에 도착한 도래인들은 터전을 점점 넓혀가며 관동지역까지 올라간 것이다.


반면에 일본 열도 북동부에 자리한 훗카이도는 지리적으로도 멀다. 그리고 춥다. 대체로 일본으로 넘어간 도래인들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살던 사람들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추운지역인 고구려계 도래인도 있었지만, 고구려와 훗카이도를 비교해도 훗카이도는 한참 더 북쪽에 위치해있다. 아무리 북쪽에 있는 고구려라고 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곳이 훗카이도다. 대충 현재 북한과 러시아 기후를 비교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여튼 그러한 이유로 도래인들이 훗카이도까지 갈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훗카이도는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일본이 아닌, 아이누족의 땅이었다. 일본조차도 같은 국가라 생각하지 않았던 곳이다. 



메이지 유신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일본 국수주의가 최고조였던 일본 근대화 시기(메이지 유신)에 수많은 도래인 신사의 주신이 일본 신으로 강제 변경되었다. 한반도계 지명도 일본식으로 거의 바뀌었다. 해서 메이지 시대 이전과 비교하면 실제로 남아있는 도래인의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신이 일본 신으로 강제 변경되었던 도래인 신사 중 어떤 곳은 현재 원래의 주신인 지역신(도래인이 모시던 신)으로 바꾼 곳도 있다. 없앴던 한반도계 지명이 다시 부활한 곳도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 동네이름을 갑자기 바꾼다고 해서, 쉽게 바뀔까? 지도상의 공식 지명은 바뀔지언정, 옛 이름들은 학교 이름으로, 거리이름으로, 간판으로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일본이 아무리 한반도계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도 절대 지울 수 없다. 우가우가 석기시대를 살던 일본 열도에, 청동기+철기를 비롯하여 각종 주요 기술을 전수하며 고대 일본을 발전시킨 도래인에 대한 고마움은 일본인 DNA에 박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오사카는 지금도 재일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처럼 우리와 여러가지로 인연이 많은 오사카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백제’라는 명칭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실제 오사카 시내의 이쿠노구, 히가시스미요시구 일대를 둘러보면 백제라는 명칭을 다수 목격할 수 있다. 거리의 이름도 백제(구다라) 이며 부근 화물열차의 역도 JR백제역이다. 뿐만 아니라 오사카시립남백제소학교, 백제대교, 흐르고 있는 개울의 이름도 백제천이다. p 016




백촌강 전투 후 한반도에서 ‘백제’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반대로 일본에서 ‘백제’ 라는 이름이 부활했다. 백제 유민들은 대거 일본 열도로 넘어온 것도 있었고, 백제 멸망 전에도 이미 백제와 왜는 왕실끼리 혼인도 하는 등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무령왕이 백제에서 탄생한 사례로 보듯, 백제 왕자들은 수시로 왜에서 체류하기도 했다. 연장선상에서 백제 멸망 시점에 일본엔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이 나니와(현 오사카)에서 체류중이었다. 백제가 멸망하며, 선광은 그대로 왜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선광 후예들은 ‘백제왕’이라는 성을 받았고,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은 정식적으로 ‘백제군’이라는 행정구역이 되었다. 그 역사가 이어져 지금도 오사카에서 ‘백제’라는 지명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오사카에는 의자왕의 아들 선광 후손인 백제왕씨 뿐만아니라, 근구수왕의 후손인 후이지씨/후나씨/쓰씨 일족, 근초고왕의 후손인 니시고리씨 일족,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후손, 왕인박사의 후손인 다카시씨/가와치노후미씨 일족 등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 다카아이정의 주군총: 전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왜왕의 왕녀)의 또 다른 아들로 추정


왕인 성당: 왕인 박사가 학문을 전파했던 성당. 현재는 재물의 신인 벤자이텐을 제사지내고 있다. 


도토와 다카이시 신사: 도토라는 지명은 왕인의 후손인 일본의 최초 대승정 교키가 건립한 토탑에서 유래했다. 부근에 있는 에바라사는 교키가 태어난 사찰이다. 교키 사후 480년이 지나서 발굴된 사리함에는 ‘그의 속성은 다카시씨로서 백제 왕자 왕이의 후손이다’라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신찬성씨록』에는 다카시노무라지를 왕인의 후손으로 기록한다.


하야시와 도모하야시노우신사: 전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의 후손인 하야시 일족은 부근에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지카쓰아스카의 아스카베신사: 아스카베신사는 백제계 아스카베노미야쓰코 일족의 조상신으로 아스카대신 즉, 곤지를 제신으로 하고 있는 신사다. 곤지는 『일본서기』에서 개로왕이 왜국으로 파견했던 동생 곤지를 말한다. 과거에는 곤지왕 신사로도 불렸다. 『일본서기』에서 곤지가 왜국에서 생활하며 5명의 아들을 갖고, 그중 둘째인 동성이 백제로 돌아가 왕이 된 상황을 기록한다. 이를 보아 곤지의 직계자손들은 실제 일본에 남아 자손을 번성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지금까지 일본에 남아있는 곤지 전승이 곤지의 후손들이 일본에서 위상을 떨쳤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백제왕신사와 백제사 유적: ‘의자왕-선광-창성-낭우-경복’으로 이어지는 백제왕 계보는 백제왕 신사 족보에 기록되어있으며, 특히 백제왕 경복은 종3위에 오르는 등 가장 화려한 경력을 가졌다. 백제왕 경복때 백제왕씨 본거지를 나나외에서 가타노로 옮겼으며, 씨신을 모시는 백제왕 신사와, 씨사로 백제사를 건설하여 백제왕 일족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하타, 우즈마사: 지명의 유래는 고대 호족인 하타씨와 관련이 있다. 하타씨는 한반도계 대표 도왜씨족이다.



교토는 도쿄가 수도가 될 때까지 약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하지만, 정치의 중심지로서는 헤이안 천도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까지 약 400년 간만 일본 열도를 호령했을 뿐, 막부에 의해 형식적으로만 수도의 역할을 한 기간이 많았따. 그렇기에 교토는 실권을 잃은 천황만을 위해 조성된 상징적인 동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토에 남아있는 백제계 지명과 신사는 대체적으로 하타씨에 의해 남겨진 것이 많다. p 067



교토에서 만나는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은 99.9%는 하타씨라고 봐도 무방하다. 백제에서 하타씨가 일본 열도로 도왜한 내용은 수많은 포스팅에서 언급했기에 생략한다. 



보통 도래인 계열 씨족들은 ‘누구누구의 후손’으로 통칭할 수 있는데, 하타씨는 거기서 약간 예외적인 존재라 볼 수 있다. 물론 하타씨도 궁월군이라는 조상을 두고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궁월군 후손을 포함하여, 당시에 궁월군이 일본으로 대려온 백제 유민들을 모두 포함하여 하타씨로 본다. 이때 들어온 궁월군과 함께 일본으로 온 도왜인, 즉 하타씨들은 토목(제방공사), 광산, 농업, 염전, 양잠, 양조 등 도시개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술을 지닌 집단이었다. 하타씨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 곳곳에 터를 잡고 크게 번성하였다. 실제로 하타씨는 540년 경에 이미 일본 내에서 거대한 집단이 되어있었고, 700년 경에는 일본 전국 어디에나 살 정도로 번성하였다. 



하타씨가 터전을 잡은 곳은 주로 큰 강줄기가 있는 곳, 하타씨의 제방공사로 인해 큰 도시로 번성한 곳들이다. 교토도 그 중 하나다. 교토 아라시야마 도게츠교 맞은편에 있는 대언천 제방이 바로 하타씨 작품이며, 이를 시작으로 아라시야마 일대를 개발하여 고대 도시 교토를 만들어냈다. 특히 교토는 천황이 거주한 지역이다. 전문적인 기술로 부와 명성을 쌓은 하타씨 중 일부는 고위직에 종사하기도 하고, 천황에게 성씨를 하사받기도 했다.



TMI이긴 한데 교토 북부(가모강변)에 자리잡은 도래인 일족인 가모씨는 제철(대장장이) 기술 보유자로, 하타씨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9세기 전후로 두 일족은 혼인으로 맺어졌고, 일족 간에 양자 입양도 하는 등 꾸준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유지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로부터 교토의 유명 축제인 ‘아오이마츠리(가모마츠리)’는 가모씨 신사인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와 하타씨 신사인 마츠오 대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두 일족의 공동 축제다.



- 우즈마사의 고류사와 오사케신사: 야마토 정권 당시 쇼토쿠 태자의 후견인 하타노 가와카쓰는 그들의 씨사인 고류사를 건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하치오카사, 하타노기미사, 가도노하타사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국보 금동반가사유상과 흡사한 목조반가사유상이 보관된 곳이기도 하다. 오사케신사의 제신은 진시황제, 궁월군, 하나토사케공이 봉안되어있다. 궁월군은 『일본서기』 오우진조에서 백제로부터 120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는 인물이다. 오사케신사 도리이 옆에 있는 돌기둥에는 ‘누에 치고 베를 짜는 일, 관현학과 춤의 신’이라고 쓰여있다. 


가이코노야시로의 고가이신사: 고류사 건너편에 가이코노야시로라는 전차역이 있고, 부근에 고노시마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노시마 신사 경내에는 고가이 신사가 조그맣게 자리한다. 과거에는 고가이신사가 이 동네를 대표했을정도로 거대한 신사였다. 가이코노야시로라는 명칭은 하타씨가 전수한 가이코 신앙, 즉 양잠 신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고가이신사는 하타씨가 직물의 조상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설립했다.


마쓰오대사: 하타씨가 씨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신사다. 중세 이후에는 양조신을 모시는 신사로 알려졌고, 현재는 일본에 있는 11만개의 신사 중 4번째로 격식을 갖춘 신사이며, 제신은 스사노오의 두 아들로 바뀌었다.

 

후시미이나리대사: 전국 3만 5천개가 있는 이나리 시사의 총 본산이다. 제신은 이나리대신으로 풍요를 관장하는 농경신이다. 역시나 하타씨가 창건한 신사로, 후시미지역은 하타씨 근거지 중 한 곳이다.


히라노신사: 8세기 간무천황의 명으로 만들어진 신사다. 제신은 이마키신, 구도신, 후루아키신, 히메신이다. 히메신은 간무천황의 모친인 나카노 니이가사인데, 그녀는 백제계 도래인 후손이다. 이마키신 역시 백제계 도왜인들이 모시던 고향신이다.


오카노야: 교오부 우지시 우지천 동편 고카쇼의 옛 지명은 오카노야 이다. 현재 오카노야소학교로 지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카노야의 유래는 백제계 오카노야공에서 유래한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오카노야공은 백제 비류왕의 후손이라 한다. 『일본삼대실록』 및 『고사기』 에 따라 오카노야공의 조상을 더 쫒아올라가면, 비유왕의 후손이 후에 황별 계통인 하타노아손으로 개성된 것으로 본다.




대충 여기까지! 3권은... 안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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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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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었던 식물 세계사 책 중에 제일 흥미로웠던 책이 있었다. 지금은 절판되었으나, 내 책장에서 항상 날 부르고 있는 책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그 책을 읽고서, 저자의 다른 책을 또 읽어보고 싶어서 구매했던 책이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하는 식물 세계사책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이다. 물론 구매했을 당시에는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뒀다가, 이번 구정 연휴에 읽었다. 왜? 공부하기 싫어서..ㅋㅋㅋㅋㅋ




늘 회사, 집을 오가는 워킹맘이지만 아이가 자는 시간에는 식물보호기사 필기 공부를 하고 있다. 이번 연휴에도 어김없었는데, 공부하기가 왜이리 싫은지! 책이라도 읽자 싶어서 책장에서 서성이다가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공부는 하기 싫지만, 이왕 책 읽는다면 시험과 연관된 책을 읽자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책이 식물보호기사 시험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라고 한다면 대충 재배학원론에 나오는 내용 일부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특히 재배학원론에서 중요하게 보는 작물들이 대거 포진해있다. 



이 세계사책에서 말하는 13가지 식물이 ‘감자, 토마토, 후추, 고추, 양파, 차(tea), 사탕수수, 목화, 밀, 벼, 콩, 옥수수, 튤립’ 이다. 이 중 ‘감자, 토마토, 벼, 콩, 옥수수’ 는 정말.... 재배학원론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작물들이랄까. 특히 식물들 기원지라던가, 세계사적으로 유명했던 식물병도 이 책 읽으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개이득!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에서 ‘감자’ 이야기만 살짝 가져와본다. 재배학원론에서 식량작물로써 감자, 식물병리학에서 단골문제인 감자역병의 감자. 그리고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많이 가지고 감자!!! 정말 재미있는 감자이야기 시작해본다.


남미 안데스산맥 주변이 원산지인 감자가 유럽에 처음 전해진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한 이후였다. 그렇기는 해도 유럽에 감자를 처음 소개한 이가 콜럼버스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곳을 탐험했으나 산지에서 재배한 감자를 직접 접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속속 남미로 찾아들었고 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감자가 발견되고 유럽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초, 중반의 일이었다. p 028



감자의 원산지인 안데스산맥 주변 지역은 해발고도고 높고 기후가 서늘한 편이며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된다. 감자의 사촌 작물이자 또 다른 덩이뿌리 식물인 고구마도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데 아열대성 기후인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땅속에서 열매를 맺는 뿌리채소는 열대나 아열대 기후의 중, 남미나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경우가 적지 않다. p 029



이때까지 유럽인들은 땅속에서 열매를 맺는 무, 순무 같은 뿌리채소는 키워봤으나 덩이뿌리 식물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 감자를 접했을 때, 유럽인들은 감자를 먹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보니 유럽인들이 먹는 다른 녹황채소류 처럼 덩이줄기가 아닌 감자 싹이나 잎을 먹거나,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인은 안다. 감자 싹,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는 절대 먹으면 안된다는걸. 왜? 감자싹과 잎,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에는 솔라닌 이라는 독성물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솔라닌은 조금만 먹어도 중독되거나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물질이다.



하지만 당대유럽인들은 이를 몰랐다. 그래서 감자를 먹고 중독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감자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는 식물이기도 했다. 결국 감자는 마녀재판의 피고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감자는 악마의 열매라는 별칭을 얻게되었고, 화형을 선고받았다. 화형된 감자라.... 감자를 구우면 참 맛있는 냄새가 났을텐데, 당대 유럽인들은 그 냄새를 어떻게 참았으려나? 이유야 어쨌든 악마의 열매가 된 감자는 유럽인들이 기피하는 식물이 되었다.



감자라는 식물은 대표적인 구황작물 중 하나다. 원산지가 안데스산맥인 만큼 척박한 환경에서도 아주 잘 자라는 효자식물이다보니, 식량난을 해결하기에 최적인 작물이기도 하다. 유럽인은 이런 신의 열매 감자를, 먹는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악마의 열매로 매도하여 기피하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은 빠르게 사라졌을 식량난을, 더 오랜시간 버텨야만 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감자는 귀족만 먹을 수 있다! _ 프리드리히 2세



감자의 진면목을 알았던 19세기 프로이센(현 독일) 국왕 프리드리히 2세. 그는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7년간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 하지만 긴 전쟁은 나라를 황폐화시킨다. 프로이센의 식량부족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때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를 떠올렸다. 여러 방면으로 감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았다. 감자는 어디까지나 악마의 식물이었으므로. 



유럽 대륙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막대한 상금을 내걸고 주식인 밀을 대신할 구황작물을 모집했다. 이떄 파르망티에는 자신의 포로 시절 경험을 살려 감자 보급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루이 16세는 단춧구멍에 감자꽃을 꽂아 장식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도 감자꽃 장식을 달게 함으로써 대대적인 감자 홍보에 나섰다. (…) 감자는 서민에게 보급해야 하는 작물인데 어째서 왕족과 귀족이 독점하겠다는 취지의 공지를 냈을까? 사실 여기에는 루이 16세의 교묘한 책략이 숨어 있었다. 국영농장은 낮에는 엄중하게 경비를 서지만 밤이 되면 경비가 느슨해진다. 그러다 보니 호기심을 누루지 못한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감자밭에 침입해 감자를 서리해갔다. 그렇게 감자는 서서히 서민들 사이로 널리 퍼져 나갔다. p 041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프랑스 루이 16세, 마리앙투아네트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감자 보급에 성공했다. 어떤 묘안인가! 바로 ‘유행(트렌드)’다. 왕족이 하는 것은 귀족들이 따라하여 붐을 일으킨다. 그렇게 상류층에서 일어난 붐은 자연스레 하류층에 퍼진다. 프리드리히 3세와 루이 16세는 이를 파악하여 감자 보급에 접목한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감자보급에 힘썼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지면 참 좋은 내용이라, 조금 아쉽다.




이렇게 유럽 여러나라에서 감자 보급에 성공하며, 유럽은 매년 찾아오는 식량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감자로 인해 감자는 유럽인의 주식이 되었다. 자연스레 유럽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늘어난 인구는 노동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그 노동력은 산업혁명과 공업화로 이어진다. 감자 하나로 유럽의 역사가 크게 바뀐 것이다. 



그뿐만인가? 대항해 시대 선원들은 이름모를 병으로 힘들어했다. 헌데 감자가 주식이 되고, 감자를 배위에서 먹을 수 있게 되자 선원들은 이 병에서 벗어났다. 당시에는 이름모를 이 병의 이름은 괴혈병. 비타민C 결핍시 발병한다. 그때만해도 장기간 배를 탈 때, 배 위에서 먹을만한 식량이 없었다. 먹을게 없으니 자연스레 선원들은 비타민C가 결핍되어 줄줄이 괴혈병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감자가 등장하면서 이 괴혈병은 사라졌다. 감자는 비타민C가 풍부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자는 온/습도만 맞다면 장기보관이 가능한 아주 착한 식물이다보니, 망망대해에서도 보관이 아주 쉬웠던 것이다.



1840년대에 들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역병이 창궐해 지독한 흉작이 이어졌다. 그 무렵 아일랜드에는 감자가 주식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상태였기에 감자가 없으면 꼼짝없이 굶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근이 닥쳤고 100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갔다. 감자 역병 원인 조사 결과 감자의 증식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p 048



인류의 구원투수 감자. 하지만 감자로 인해 100만명이 죽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그 유명한 감자역병! 



감자는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다. 즉 단일품종인 씨감자로 번식하는 것이다. 고로 하나의 씨감자가 특정 질병에 걸리면, 그 씨감자와 같은 덩이뿌리에 있던 모든 씨감자들도 그 질병에 걸릴 확율 100%다. 하여 감자의 원산지인 안데스에선 감자를 재배할 때 여러 품종을 섞어서 심는다고 한다. 감자의 전멸을 막기위해서다.



하지만 아앨린드 사람들은 품종을 고르고 골라서, 제일 우량하다고 생각된 하나의 품종만 재배했다. 그 결과가 바로 감자역병이다. 감자가 주식이 되어버린 아일랜드에서, 감자역병은 엄청난 문제였다. 100만 명이 굶어죽었고, 400만 명이 아일랜드를 탈출해서 미국으로 향했다. 여기서 약간 의아한 점 하나! 아일랜드인은 왜 바로 옆에 있는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향했는가.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원조 나쁜놈 영국은 이 때도 여지없이 나빴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일랜드를 속국이라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4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미국 땅을 밟았다.



그렇게 미국땅을 밟은 아일랜드인의 후손들이 미국 역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존F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오바마 등이 있다. 이뿐만 인가? 월트 디즈니를 창립한 월트 디즈니, 맥도날드를 창립한 맥도날드 형제 역시도 감자역병을 피해 미국으로 피난온 아일랜드인의 후예다. 



감자는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못해 미국의 역사까지 그 영역을 넓힌, 정말 대단한 식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감자전이나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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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 홍성화 교수의 한일유적답사기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1
홍성화 지음 / 시여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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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일고대사 역사책을 멀리했었다. 시중에 나온 한일고대사 관련 책들은 내용이 대게 비슷해서, 내용면에서 업데이트된 부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게 비전공자들이 쓴 책이었으며 본인 연구결과가 아닌, 과거 다른 학자들이 공개한 연구결과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러다보니 어쩔수없이 한일고대사책을 멀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작년에 알라딘에서 홍성화 교수가 한일고대사 책을 출간했다는 알람이 떴다. 이것은 바로 구매하라는 하늘의 계시!! 왜? 나는 홍성화 교수가 2008년에 출간했던 『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를 읽고, 많은 걸 배웠다. 틈만 나면 읽었고, 책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어느정도 눈 감고도 남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서야, 책을 책장에 꽂아두었다. 무엇보다 이 책으로 하여금 한일고대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하는지 배웠다. 그런 홍성화 교수의 신간이 나왔으니 당연히 읽어야하는 것! 



그래서 바로 구매했지만, 1분 1초가 아쉬운 워킹맘은 이 역사책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를  제대로 읽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몇 달전 2권 발매 알람이 떴고. 하하하. 부랴부랴 2권까지 구매 완료. 그렇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책을 펼치기 전엔 한일고대사에 국한될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한일관계사를 전방위적으로 아우르고 있었다. 더 좋아!!!! 그리고 역시 현직 전공자답게, 새로운 가설들과 연구결과 등 많은 내용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정신이 혼미해질정도! 그치 본디 역사책이란 바로 이런거지. 


정말 포스팅하고 싶은 내용들이 너무 많지만, 일단 고대사 부분만 기록해본다.





1. 칠지도의 진실


지금까지 우리나라와 일본은 칠지도를 근초고왕 때 만들었다고 보았다. 다만 우리나라는 근초고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으로 보고, 일본은 칠지도를 ‘헌상’한 것으로 보았다. 칠지도에 새겨진 일부 명문과, 역사서를 토대로 추정한 것이었다. ‘하사’와 ‘헌상’의 차이일뿐, 적어도 369년 근초고왕때 칠지도가 일본으로 왔다는 건 양국에서 인정하는 통설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통설을 뒤집는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칠지도의 제작년대가 바뀐것이다. 



칠지도 명문을 찍은 확대 근접사진과 X-레이 사진으로,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일부 한자가 확인된 것이다. 기존 통설인 근초고왕 369년은, 명문에 새겨진 일부 한자를 중국 동진의 연호로 보고 추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이 확인된 한자로 인해, 이는 중국의 연호가 아닌 백제 자체 연호로 추정된다고 한다. 연호와 함께 새겨진 날짜, 일간지를 비교검증한 결과 제작년도는 408년. 전지왕 때다. 고구려와, 당 등 주변국에 대항하기 위해 왜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던 바로 그때다.



중요한 것은 칠지도가 전지왕 4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면, 408년 경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통해 칠지도가 만들어진 정황을 여타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08년이면 광개토왕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 침탈당했던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대항하던 시기이다. 비문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게 58성 700촌을 빼앗긴 백제는 이후 왜와 화통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비단 광개토왕비문만이 아니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즉 396년 고구려의 백제 공격 이후에 백제는 태자였던 전지를 일본에 보내 일본과 우호를 맺고 있다. 이후 405년 아신왕이 죽자 백제로 돌아와 왕으로 등극한 인물이 바로 전지왕이다. p 051



특히 『삼국사기』 전지왕 5년조(409년)를 보면 왜국 사신이 야명주를 선물로 가지고왔는데, 왕이 후하게 대접해주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왜국 사신이 돌아갈 때, 전지왕이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보낸 선물 중에 408년에 만들어진 칠지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 해석하면서 일본의 역사를 구성해왔던 것이다. 칠지도는 408년 백제의 전지왕 4년 11월 16일에 만들어져 백제왕세자 구이신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된 칼로서 그동안 칠지도를 『일본서기』 진구기를 근거로 하여 369년 백제에서 제작되어 372년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일본학계의 통설은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p 055



『삼국사기』에 드물게 왕후의 기름이 기재된 전지왕의 부인 팔수부인을 비롯하여 책계왕의 부인 대방왕녀 보과, 침류왕의 어머니 아이부인 세 명이 왜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라던가, 새롭게 확인된 칠지도의 명문과 전지왕 연관성이 더 궁금한 사람은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2. 한일 고분에 얽힌 수수께끼


한일 고대사 관련 서평이나 유적지 답사기 포스팅에서 누누히 언급했듯, 일본 고대사 주요 자료인 『고사기』, 『일본서기』는 그대로 믿어서는 절대 안되는 책이다. 물론 완전 거짓은 아니다. 대충 5%의 진실에 95%과장(또는 왜곡)이 들어갔다고 해야할까? 당대 집필된 역사서긴 하지만, 후대 천황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집필되었다. 그러다보니 인간 신이자 만세일계 혈통이라는 천황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내용들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다. 거기다 소위 백 살 넘게 살았다는 천황들이 들어가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당대 집필된 중국 사서가 남아있고, 당대는 아니어도 후대에 집필된 우리나라 사서 『삼국사기』도 남아있기에 이 사서들을 교차검증이 가능했다. 따라서 일본 사서에 있는 연대가 대략 120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학계 통설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고 하면, 일본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알려진 고분 형식 전방후원분 때문이다. 일본 궁내청은 일본 곳곳에 산재해있는 고분, 전방후원분에 각각 고대 천황 무덤이라고 소개해왔다. 헌데 일단 그 천황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1차 함정이 있고, 실질적으로 연구&발굴을 허가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조성연대 파악도 어려워서, 실제 어떤 천황의 무덤인지 매칭이 어렵다는 2차 함정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만세일계 혈통이라고 우기지만, 왕조교체설에 대한 타당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지들 땅에 있는 전방후원분에 대한 정확한 연구 결과도 없는 주제에,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된 전방후원분을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써먹으려고 수시로 발악을 하고 있다. 일본 국사 교과서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가있고, 한반도 남부지역이 야마토 정권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닌코쿠에 대해서는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보고 백성의 곤궁함을 살펴 3년간 부역을 면제시킴으로써 성제라는 칭송을 들었따는 전승을 남기고 있다. 인덕(仁德)이라는 이름도 ‘어질고 덕이 있는 천황’으로 덧씌워진 듯해서 닌토쿠 천황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조작된 천황이라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궁내청이 붙여준 대로 닌토쿠 천황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일단 천황이라는 칭호도 7세기 후반에나 성립되었돈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왕을 천황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p 060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무덤과 일본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는 전방후원형 무덤이 왜인의 집단 이주에 의해 생겼고 그 배경에 규슈나 왜 왕권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빈약하다. 단순히 일본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고 외형이 비슷한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 전방후원형 무덤을 만들었던 이들을 왜인으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전방후원형 무덤은 단순히 외형만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그 내부에 보이는 무덤방의 형식 및 유형을 함께 아울러 판단해야한다. P 065



규슈 계통과 흡사한 돌방무덤은 영산강 유역뿐ㅁ나 아니라 서부 경남의 고성이나 진주, 의령, 거제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지역은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해안을 통해 일본 열도와 연결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지역들의 초기 돌방무덤은 그 모양이 규슈 계통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곳에서 출토된 이미 현지화된 토기라든지, 대부분의 돌방에서 발견된 관고리와 관못, 꺾쇠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매장 방식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따. 사후에 대한 의식적인 관념은 백제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돌방무덤 안에 독널무덤이 놓여있는 것은 물론,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 등 소위 백제 계통의 위세품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백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P 066 



한반도 남부 전방후원분의 주인들. 일본이 말하는대로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되기엔, 부족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일부를 이런 전방후원분은 백제 중앙이 아닌 변두리에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남부를 장악한 사람들이 중앙이 아닌 변두리에 묻혔다? 누가봐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일본 내에서도 백제식 굴식돌방무덤을 비롯한 한반도계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 애초에 우가우가하던 석기시대에 머물러있던 섬나라를, 단숨이 청동기&철기시대로 점프시켜준 사람이 다름아닌 한반도인이니, 한반도계 유적이 발견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논리대로라면, 임나일본부는 개소리고 고대일본을 다스린건 한반도라고 보아야하는게 아닌가.



자기들 편한대로만 해석하고, 불리한건 생략하는 그들의 행태란. 에휴.





 


3. 인물화상경은 누구를 위해 만들었던 것일까?


나름 한일고대사책을 읽으면서 관련 유물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일본화상경이라는 유물은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된 유물이다. 이 전까지는 이 유물에 새겨진 명문 해석이 여러 버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백제가 진구에게 헌상한 칠자경이 바로 인물화상경이라고 하는 설이다. 내용면에서도 명문에 새겨져있는 인물이 일본의 호족이라는 설 등 여러모로 천황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해설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 해설들이 타당하지 않다는 반박이 나오기 시작했다. 첫번째, 1971년, 우리나라에서 무령왕릉 발굴시 발견된 지석. 두 번째 그동안 잘못 판독되었던 글자를 정확하게 판독하게 된 것이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피장자가 확인된 백제왕 무덤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에는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학계에서는 ‘사마’라는 이름을 쫓으며, 여러 사서 교차검증 결과 일본의 한 섬인 가카라시마가 무령왕 탄생지라는 것까지 밝혀진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만, 『일본서기』에 해당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가카라시마에서도 이와 관련된 동굴과, 전승이 내려오고 있었다. 



다시 인물화상경으로 돌아와서!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났고, 이름이 ‘사마’라는 사실을 염두해두고 인물화상경의 명문을 보자. 내용이 많이 달라진다. 아래는 새로 해석된 명문이다.



미년(기미년,479년) 8월 10일 대왕년(삼근왕의 치세) 남제왕(동성왕)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가 오랫동안 섬길 것을 생각하면서 귀중비직 예인금주리 2인을 보내서 아뢴 바 동 이백한을 올려 이 거울을 취한다. p 089



지금까지 일본 고대 왕권과 관련된 유물로, 일본 국보에 등록된 인물화상경의 진짜 모습은 백제 왕권과 관련된 유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근왕과 동성왕, 무령왕의 관계는?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첫째아들을 무령왕, 둘째를 동성왕으로 본다. 반면에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두번째 자식으로 나온다. 무엇보다 무령왕릉 지석에 새겨진 생몰연도와 『일본서기』의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따라서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동생인 동성왕이 먼저 즉위하였고, 이런 동생을 섬길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이 바로 인물화상경의 명문인 것이다.



현재 인물화상경은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근데 나는 왜 못봤는가. 분명 도쿄국립박물관에 갔었는데!! 이래서 사전 지식이 중요하다. 봤어도 내용을 모르면 백프로 그냥 지나치게 생길 유물이니, 뭐. 어쩌면 그 앞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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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 - 지친 나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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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에세이는 애니더쿠라면 한번쯤 눈길이 갈 만한 제목이다. 특히 나랑 비슷한 세대이거나, 나와 가까운 앞 뒤 세대 더쿠들에겐 더더욱!



나는 어린나이부터 덕질을 시작했는데, 최초 덕질이 다름 아닌 애니 덕질이었다. 뭐, 비슷한시기에 다른 덕질도 같이 시작하긴 했지만, 여튼 최초는 애니덕질! 그런 나에게 이 에세이 『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는 눈길이 가기엔 정말 충분한 제목이었다. 물론 지금은 휴덕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애니메이션’은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 무언가! 라는 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저자는 내용을 4개의 파트로 구분하였고, 각 파트도 애니메이션 3개씩 할당하였다. 고로 총 12개 애니메이션 속 내용과 명대사가 이 에세이 속에 담겨있다. 나는 이 에세이를 읽으며 그때 그 시절, 애니를 보고있던 과거의 나와 다시 만났다.



자랑은 아니지만 12개의 애니메이션을 모두 봤던 나였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그때 그 애니를 봤던 과거의 나와 만났다. 띠부띠부씰 모으기에 열중했던 초등학생 때의 나, 중2병이 한창이었던 중학생 때의 나, 수능준비에 찌들어있던 고등학생 때의 나, 알바로 바빴던 대학생 때의 나, 그리고 사회생활을 갓 시작했던 나와 회사에 찌들어있던 나까지. 이 책을 읽으며 모든 나이 대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살아왔는지.




『포켓몬스터』는 주인공 지우가 세계 제일의 포켓몬 매니저라는 꿈을 꾸며 방방곡곡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지우의 여정에는 수많은 우연과 만남이 존재하죠.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의지와 운명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오롯이 꿈 하나만 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고난을 겪는 지우의 모습을 보다 보면, 꿈에 대한 어린아이의 무조건적 열정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순수함에서 오는 강렬함이기도 하고요. p 040



초등학생 때 방영한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심지어 지금도 끝나지 않는 포켓몬스터! 그때는 그저 포켓몬을 잡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지우를 보며 박수치고 좋아했다. 덩달아 띠부띠부씰 모는 것에도 전투적이었고. 당시 띠부씰 모으던 열정, 이는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에 미친듯이 빠졌던 최초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3n살이 된 나에게 그런 열정은 당최 찾아볼 수가 없다. 뭔가 빠져볼까? 하다가도 나중을 생각하면서 시작조차 안하고 포기하는게 습관이 되어버렸달까.


그 뿐만인가? 분명 그 때는 세계 최고의 포켓몬 마스터가 될꺼라는 지우처럼, 나에게도 꿈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조차 안나는 내 꿈.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지니던 꿈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현실과 타협하며 점점 작아지더니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다. 내 딸 만큼은 나처럼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꿈을 지켜나갔으면 좋겠다고.  



- 인생은 주어진 카드로 펼치는 진지한 승부야. 내가 받은 카드에 불평하기 보다는, 그 카드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한단다.

-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어. 우리가 스스로 개척하는거야!

- 언제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꿈을 진정으로 뒤쫓는 사람이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작이죠.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무정부주의적인 성향과 더불어 반전주의, 평화주의 등 전쟁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인 배경이 소피와 하울의 사랑 이야기와 잘 어우러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하는 작품 속 세계관은 우리에게 환상과 동시에 현실의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기술과 마법이 함께 성장한 상황을 유토피아적으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발생한 국가 간 잔인한 전쟁 상황을 디스토피아로 그려내죠. p 105




고등학교 진학, 외모, 교우관계 등 고민 많은 중3. 질풍노도의 중학생. 하울은 그때 내가 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당시 나는 하울과 소피의 성장을 보고 깨달은 게 하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다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한창 외모에 관심 많은 중학생에게 이런 깨달음을 얻기란 꽤 어려운 일인데, 하울이 그걸 해냈다. 그때부터였던것 같다. 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가!



- 자기 미래는 자기가 정하는거야

하울이 마음을 잃었다니요! 확실히 이기적이고 겁쟁이에다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울은 솔직하고 자유롭게 살려는 것 뿐이죠. 하울은 여기 오지도, 악마가 되지도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악마와의 관계를 스스로 정리할거예요. 난 그렇게 믿어요!


유바바는 치히로에게 일을 주며 원래의 이름을 빼앗습니다. 그리곤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죠. 그러자 하쿠는 센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원래 이름을 절대 잊지 말라고 합니다. 유바바가 이름을 빼앗아 사람들을 조종한다면서요. 그렇다면 이름을 잊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물질만능주의가 도래한 지금, 우리가 이름, 즉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조언하는 것입니다. 치히로는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며,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죠. 이는 니체의 ‘초인’ 사상처럼 고난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p 144




센과 치히로는 개봉하고도 한참 나중에 보았던 애니였다. 아마 고딩때 봤던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청소년일것 같은데, 곧 사회로 나가야한다는 압박감을 가졌던 그때. 인 서울 해야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수능준비로 예민해졌던 그 때. 그 때 센과 치히로는 나에게 잠깐의 휴식을 주었고, 내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 이름을 뺏기면 돌아가는 길을 잊게 돼. 난 아무리 해도 생각이 안나.

내가 어렸을 때 강에 빠졌었는데, 그 강은 이미 메워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대. 문득 생각이 났어. 그 강의 이름은…. 이름이 코하쿠 강이었어. 네 진짜 이름은 코하쿠야!

자 어서가, 뒤돌아보지 말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서 만난 과거의 나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정말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가끔은 뒤를 돌아봐도 되고, 옆으로 빠져도 돼. 너는 해내고자 하는 건 어떻게든 해내는 아이니까, 너 자신을 믿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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