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잠언 시집
류시화 엮음 / 열림원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살면서 많은 후회를 한다. 그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 건데, 혹은 그렇제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하는 따위 말이다. 실상은 아무런 보탬도 안되는 후회들이지만 부족한 인간이기에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후회가 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류시화가 엮은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는 유태교의 랍비, 시인, 성직자는 물론 이름 모를 선인들이 남긴 시들이 담겨져 있다. 이들의 시 속에는 지혜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미사여구로 채워져 있지만 왠지 허한 느낌이 나는 글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투영되어 살아 꿈틀대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거투르드 스타인이란 사람이 남긴 '해답'이란 시를 읽고나면 무릎을 절로 치게 된다. 이 얼마나 명쾌한 해답인가. 해답이 없다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란 사실은 아이러니다. 이 또한 인생의 비극이다. 인생의 기로에서 해답을 찾으며 괴로워하고 있을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다.

...했더라면 하는 가정법은 가장 허무하면서도 한편 무의미하다. 이 책에 실린 잠언들에 담긴 삶의 통찰과 지혜를 제대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이미 흘러가버려 되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후회하며 아쉬워하기 보다는 앞으로 남은 날을 좀더 의미있게 보내는 것에 많은 시간을 들여보자. 그것이 잠언이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이유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칼릴 지브란의 시를 소개할까 한다. 이 책에 실린 수십여편의 잠언 중에서 마음을 끄는 그 무언가가 강하게 느껴졌던 시로 기억된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세 춤추게 하라."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말처럼 쉽지 않은 가르침이지만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는 참나무와 삼나무와도 같은 우리는 저만치 떨어져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거운 농락 - 허봉조 에세이
허봉조 지음 / 시와산문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참 전에 책 한권을 선물로 받았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이 낸 첫 수필집이었다. 맨 앞장에 '나의 천군만마'라며 친히 싸인까지 해주신 자상함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저런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두다 이제서야 책에 실린 글들을 찬찬히 읽어 볼 수 있었다.

화려하게 꾸미거나 척하지 않아서 읽기에 좋은 글들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읽었던 글도 있었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도 많다. 몽골, 러시아, 일본, 유럽 등을 여행하며 겪었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는 '길 위의 학교'라는 여행의 달콤함이 묻어난다.

책에는 쉰 여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1956년에 태어나 올해로 쉰 여섯의 나이가 된 작가의 '센스'가 느껴진다. '인생의 릴레이경기' 라는 글에는 그녀의 곡절 많았던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순탄하지 못했던 학업과 느즈막히 시작한 말단 공무원 생활, 불혹의 나이에 한 결혼과 출산 이야기에서 교통체증으로 꽉 막히는 도로처럼 더디기만 했던 '지각 인생'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정체'와 '더딤'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열정과 의지는 본받을 만 하다. 단 한번도 문학 수업을 받지 못했지만 거듭된 습작을 통해 지난 2008년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녀의 독특한 이력이 그녀가 걸어온 삶을 증명해 준다. 매 순간 출발이 늦었던 지각대장이었지만 인생의 모든 절차를 순리대로 밟아가고 있음에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는 그녀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책에 실린 글들은 내게도 큰 자극이 되어 주었다. 큰 어려움을 모르고 학창시절을 보내던 내게 인생이란 여태 그랬던 것처럼 순탄한 길로 그저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암초에 걸려 항로를 이탈한 배처럼 나의 이십대도 그렇게 정처없이 세찬 바람과 파도에 흔들렸다.

어쩌면 그렇게 표류하다 끝날 수도 있었던 인생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 삶이 그리 윤택하거나 남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는 아니지만 매일아침 출근할 직장이 있고, 가끔 취미생활을 즐길 마음의 여유는 있으니 이만하면 행복하다 여겨도 좋을 것 같다. 

행복이란 게 뭐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닐테고 기준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수십억원의 로또 당첨금을 손에 쥐는 일확천금의 행운이 퇴근길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맥주 한잔의 즐거움보다 큰 행복이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 조건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해지고자 하는 마음과 일상을 행복으로 채워가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내게도 있다. 누군가에게 드러내놓고 자랑할만한 멋진 사진을 찍고 싶기도 하다. 십년 후, 혹은 이십년 후의 내 삶에 대한 밑그림도 이미 그려 놓았다. 그런 욕심과 꿈들이 그저 쉼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풍화되어 사그라들지 않으려면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해야겠다는 각오를 이 책을 덮으며 새삼 다져 본다. 

글을 쓴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보람 또한 큰 것 같습니다. 우선 솔직해집니다. 거짓으로 글을 쓸 수는 없으니까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사물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게도 됩니다. 화를 내는 일이 줄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결국 정신이 부유해진 것이겠지요.  - 책머리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고 있으면 기분 좋아져라
정헌재 글.그림.사진 / 살림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독특한 형식의 재미난 책이다. 나도 취미로 사진을 찍으면서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호작질(?) 이었지만 그림 솜씨도 없고 글 솜씨도 모자라 언감생심 시도를 해보지 못했던 일. 한 장의 사진 속에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주는 그림과 글을 넣어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지은이의 능력이 부럽기만 하다.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나이 들면서 우리가 상상하기를 그만 두기 때문이라는 지은이 정헌재의 얘기에 공감이 가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무미건조해 진 삶을 세월 탓, 세상 탓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무심함에서 그 원인을 찾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상상하는 법을 잊었다기 보다 상상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혹은 창피하다고들 생각하죠.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해 버리는 겁니다.
......
"같은 것을 보면서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라."

그건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이 말이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씨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나갈 수 있는 문을 그릴 수 있었던 것도
다 '상상'의 힘이었습니다. - 상상으로 기분 좋아지다 중에서

남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멋진 재능이다. 친구와 함께 같은 풍경 속에 머물며 카메라에 담는다고 해도 각자가 찍은 사진을 보면 비슷한 듯, 또 다른 느낌을 많이 받곤 한다. 내가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쳤던 것들의 숨겨진 가치를 찾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꽉막힌 내 관념과 인식의 프레임도 조금 더 넓어질 필요가 있다는 자극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기록이 기억이 되고, 기억이 추억이 되고, 추억이 모여서 반짝이는 삶이 된다는 글에 한참 멍해졌다. 이건 꼭 내 머릿 속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같지 않은가. 내 삶이 반짝일 수 있도록 많은 추억을 남기고, 또 그러기 위해서 많은 것을 기록해야겠다. 좋은 사람, 풍경, 느낌들로 내 삶을 좀더 많이 채울 수 있도록 물러지지 않을만큼 또 말랑말랑하게도 살아봐야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좋아요.

"비가 내리면 비 냄새가 좋고
그 비에 젖은 흙냄새가 좋고
비를 품은 바람 냄새가 좋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좋고."  - 사랑으로 기분 좋아지다 중에서

시작글에 담겨져 있는 지은이의 마음이 참 따스하다. 뭔가 대단한 글을 써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옆에서 조곤조곤 같이 얘기 나누는 느낌으로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글로는 부족하니 사진을 얹고, 사진으로도 부족하니 그림을 얹었다는 그의 말은 지나친 겸손이겠지만, 나도 그처럼 한장의 사진이나 글로 누군가의 가슴에 말을 걸 수 있었으면, 기분을 좋아지게 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보고 있으면 기분 좋아져라'는 그 누군가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 같다. 내 주위에 내 기분을 좋아지게 해주는 사람, 사물, 풍경이 좀도 많아졌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다가 책을 읽다보니 문득 그런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 누군가에게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그런 존재일까 하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환경학 최고의 고전이라는 찬사를 받는 '침묵의 봄'이 1962년 출간된 지 올해로 딱 50년을 맞았다. 이 책을 통해 환경과 생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의 큰 공을 인정해 지난 2002년 12월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녀를 '20세기를 변화시킨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너무나 유명한 이 책의 내용은 사실 단순하다. '완벽한 살충제'로 알려졌던 DDT와 같은 합성 살충제의 과도하고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해 우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으며, 종국에는 그 피해가 인간에게 미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보다 적은 비용을 들여 해충을 효과적으로 '몰살'시키기 위해 뿌려진 화학물질들의 감춰진 위험성은 가히 충격적이다.

출간 당시 이 책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책의 출판을 막으려던 거대 화학업계의 방해 공작은 이후에도 그녀의 진실된 주장을 폄하하고 연구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자행됐지만 대중들은 그녀의 진실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결국 의회의 국가환경정책법안 통과와 DDT 사용 금지라는 획기적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겨우 18개월이 지난 1964년 레이첼 카슨은 유방암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비록 그녀는 생전에 미국 내 DDT 사용 금지가 확정되는 순간을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무지와 오만에서 벗어나 자연과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자각할 수 있는 큰 계기를 만들었다. 그녀 자신은 어둡고 긴 침묵의 봄을 보냈지만 모든 생물체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따뜻하고 화창한 지구의 봄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자연을 통제한다"는 인간의 오만으로 인해 지구 생태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큰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탐욕은 자연과 더불어 살던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을 망각하게 하고 있다. 철저하게 인간의 관점에서 명명된 '해충'이나 '잡초' 역시 거대한 지구 생태계의 구성요소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DDT란 이름은 우리에게 참 익숙하다. DDT(다이클로로다이페닐트라이클로로에테인)는 1874년 독일 과학자에 의해서 처음 만들어졌지만 전성시대를 연 것은 1939년 살충제로서의 효능이 확인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DDT를 발견했던 스위스의 파울 뮐러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노벨상의 창시자인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는 과학적 업적을 이루었으나 결국 그 발명품이 전쟁 무기로 변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던 것처럼 해로운 곤충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으로 여겨졌었던 DDT가 결국 봄이 왔지만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침묵의 봄'을 불러왔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 DDT는 한국전쟁 이후 못살던 시절, 배고픔 못지 않게 사람들을 괴롭혔던 이를 박멸하는 효과적인 약품으로 애용되었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DDT 세례를 받고 개운한 기분을 느꼈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추억들이 오래된 흑백필름 속에서만 존재하듯 우리나라에서도 DDT는 1976년 생산중지에 이어 1979년에는 사용이 전면 중지되었다.

지구의 역사는 생명체와 환경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모든 생명체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생존과 진화를 거듭해 왔지만 지구 탄생 이후 인간이라는 생물종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힘으로 지구 환경을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기술적 진보와 경제적 번영을 얻었을 지는 몰라도 그 오만함이 결국 인류의 파멸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두려운 진실이다.

DDT로 대표되는 염화탄화수소 계열, 파라티온이나 말라티온과 같은 유기인산 계열의 합성 살충제의 위험성은 이제는 일종의 상식이 되었지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노출되고 있는 화학물질의 심각성은 여전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고 있지만 지구 생태계의 '침묵의 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지음, 송필용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운 시가 그림을 만났다. '접시꽃 당신'의 저자 도종환 시인이 시를 쓰고, 화가 송필용이 시 한편 한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렸다. 흔히 시를 읽으며 떠올려지는 이미지를 나름대로 그려보곤 하는데 이 시집은 그런 수고마저 덜어주려는 것처럼 친절하다. 표지에는 풍성하니 꽉 찬 보름달을 배경삼아 수많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듯 피어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시인의 말에 위로를 얻는다. 세상에 나 혼자만 바람에 흔들리며, 비에 젖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고마운 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빛나는 꽃들로 피어났다 지는 것이니 순간순간 찾아오는 시련에 절망하지도, 잠깐 얼굴을 내민 봄햇볕에 너무 들떠하지도 말아야 겠구나.

"가장 뜨거운 시간이 지나간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시는 제게 그렇게 다가 왔습니다. 시가 빗줄기처럼 쏟아져 저를 때리면 저도 그 비를 다 맞았습니다. 치열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절절하지 않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면, 울컥 치솟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가장 뜨거운 순간이 담겨 있지 않으면, 간절한 사랑과 아픈 소망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 시에는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골짜기 물처럼 말들이 넘쳐흐르곤 합니다. 더 많은 진정성을 담고, 더 경건해지고자 말들이 두 손을 모으는 때가 많습니다."  - 도종환 -


도종환 시인이 책에서 밝힌 얘기다. 시란 그런 것이다. 절절하게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고, 울컥 눈물이 치솟게 하는 것이 있어야 시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쓰기가 어렵고, 또한 제대로 시를 읽기도 어려운 법이다. 세상에 시인은 넘쳐나고 그들이 읊조리는 시들은 많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만나기가 어려운 이유가 또 그러한 데 있다.

그렇게 서른해 동안 펴낸 아홉 권의 시집 중에서 도종환 시인이 아끼고 좋아하는 시들을 골라 만든 시선집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 담겨진 시들을 여러번 읽으며 나는 비로소 "시는 말로 만들어진 그림"이라는 그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림 자체가 한편의 시가 되고, 시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실감하게 된다.

굳이 시를 써야 겠다고 욕심을 내볼 생각은 없다. 30년 이상의 세월동안 시를 써 왔으면서도 정작 뒷세상에 오래오래 남을 시 한편은 아직 쓰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시인 앞에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시를 통해 사물들과 풍경이 내게 보여주는 말없는 그림을 볼 수 있는 눈만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람도 오고, 그리움도 오고, 아픔도 올 것이다. 머물러 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갈 것이다. 세월도 그렇게 왔다가 갈 것이니 가도록 그냥 두련다. 나 또한 그렇게 어딘지 모를 곳에서 와 잠시 머물다 다시 갈 것이니까. 더 흔들려 보련다. 바람에 더 흔들리고, 비에 더 젖어 보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