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기분을 관리하면 당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 눈뜨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들이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우울증・기분장애 관리 가이드
수전 J. 누난 지음, 류초롱 옮김, 양용준 감수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도는 다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약 40%는 우울증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고 한다. 감기처럼 가벼운 우울증이 있는가하면 폐렴만큼 진행되어 약물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예전보다는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지고 더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 수도 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의 저자는 의사이기도 하고, 우울증을 실제로 겪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우울증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지, 벗어나려면 어떻게하면 좋은지를 모두 10개의 챕터로 나누어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 책을 감수한 분의 추천사를 읽다가 마음에 남았던 문장이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같은 것이라고 하는 말은 종종 들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일텐데, 자칫 감기처럼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그 부분을 짚어내어 정도가 심화되면 약물 치료 등 치료를 권하는 내용이라서 공감했다. 그리고 감기도 감기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으면 더 빨리 나을 수 있겠으니, 아직 폐렴 수준까지는 가지 않은 수준의 우울증이라도 상담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울증에 대한 기사나 치료법에 대한 책들은 시중에서 정말 쉽게 접할 수 있다. 우울증을 겪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데 정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집중해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책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차근차근, 순서를 아주 잘게 나누어 실천하기를 권한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을 수도 있는 기본적인 방법들을 왜 기술하고 있는가에 대해 저자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의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면 늦고, 하고 싶든 하고 싶지 않든 일단 몸을 움직여 실천하기를 권한다. 행동이 시작되면 의욕은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책 표지에서 봤던 '눈뜨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들이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책이라는 말을 새삼 다시 돌이켜보며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부분은 우울증과 기분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들을 굉장히 세세하고 쉽게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앞사람과 대화를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눈을 맞춘다'부터 알려주는 식이다. 심지어는 여러 체크리스트와 표까지 실려있어서 실천해야 할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위 문장을 읽으면서 정말 단순하고 쉽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며 방법들을 왜 그렇게 세세하게 수록했는지를 알았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책에 나온 '혼자 덧없는 시간을 한없이 보내는 것'과 내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그러다가 책에서 고립과 고독을 구분해놓은 부분을 읽으며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고립이 아닌 고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몰랐던 개념이나 상황들에 대해 책을 읽으며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시작할 때부터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는 질병이라고 단정 짓고, 책의 마무리 부분까지도 이 말은 여러번 반복된다. 일반 성인도 그렇지만, 특히 노년층에서 우울증 치료를 잘 받지 못하는 이유를 질병이 아니라 나약함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 부분을 보고 많이 안타까웠다. 우울증은 당뇨병이나 심장질환과 같은 질병이므로, 치료를 받으면 더 나아질 수 있다.



아무리 획기적이고 좋은 치료법이 있더라도 당사자의 의지가 없으면 큰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울증의 경우 의지를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질병이라서, 작은 것부터라도 행동하며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잘 돌봐야한다는 말이 책에서 자주 반복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파트를 읽으면서 예전에 어느 방송인이 죽고 싶었던 순간에 대해 말한 내용이 생각났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은 글자 그대로 찰나였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 순간을 이겨내지 못했으면 살아있지 못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우울증은 단기간에 끝나는 질병이 아니지만, 죽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일시적이라고 하니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이번에 읽은 이 문장을 떠올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사랑하는, 우호적인 사람들과만 지내면서 어느정도 우울증이 호전되었다가도 명절이나 그 밖의 다른 일들로 나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또 악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그럴 때의 대처법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너무 무리한 기대에 부응하려고 한 적은 없는지, 나도 읽으면서 찬찬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태가 아닌 사람에게도 그랬다.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도 질병이기에, 자가 진단이나 해결 방법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그런 상황에 대비하거나 질병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다보니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사실은 그때 나는 약한 우울증이었구나, 라고 여러 차례 깨달았다. 모르고 겪으면 힘들 수도 있겠지만, 질병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대응 방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면 실제로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조금 더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부쩍 마음이 힘들거나, 무기력한 사람이 있다면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잊기 좋은 이름 (리커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품절


매번 소설을 참 재미있게 읽어서, 첫 산문집이 나온다고 했을 때 기대를 많이 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게 읽은 <잊기 좋은 이름>은 김애란 작가의 소설들처럼 담담하고 따뜻한, 때로는 가슴이 시리고 찡한 이야기들이 한가득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주변 환경을 작가가 직접 보여주고 들려주는 느낌이었다. 가족과 친구, 동료들의 이야기에 따뜻한 애정이 묻어 있어서 읽는 동안 마음이 시리기도 훈훈하기도 했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어머니는 밥장사를 하면서도 인간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기꺼이 아무 의심 없이 딸들에게 책을 사줬다. 동시에 자기 옷도 사고 분도 발랐다.

나를 키운 팔 할은

살았던 기간에 비해 깊은 인상을 남기고 큰 영향을 주었다는 '맛나당' 생활 이야기를 읽는데, 모르는 곳인데도 그 칼국수집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삼익피아노와 밀가루 포대가 공존하던 맛나당에서 작가는 알게 모르게 어머니가 긍정적이고 주체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배웠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맛나당'에서 어린 작가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긍지로 얼굴이 빛나는 어머니의 손칼국수를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등단 소식을 들은 곳은 대학교 컴퓨터실이었다. 수화기에 대고 내가 '소설인가요, 시인가요?'라고 묻자 저쪽에서 소설이란 답이 들려왔다. 시는 예선에도 못 올랐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었을 것을 굳이 얼굴을 붉혀가며 물은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내가 소설가인지 시인인지 알고 싶었다.

당신과 조우

하필 '정숙'이라는 말이 붙은 컴퓨터실에서 등단 소식을 듣는 바람에, 공중제비를 돌고 싶을만큼 기뻤지만 양껏 기뻐하지 못한 작가의 지난 날 이야기에 웃으면서도 짠했다. 나에게는 처음부터 소설가였기 때문에 시와 소설 사이에서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는 줄은 몰랐다. 담담하지만 섬세하고 따뜻하게 인물을 그려내는 김애란 작가의 소설들을 너무 좋아해서 역시 시보다는 소설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시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선에도 못 올랐다는 그 시가 문득 궁금했다.

희망 목록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자긍심과 부담감이 섞여 먹구름을 예감한 곤충처럼 심란해졌다. 나는 헌책방에 가본 적이 없었다. 내가 자란 마을에는 헌책방은커녕 서점 하나 흔치 않았다. 그래서 내겐 헌책방에 가는 게 동물원에 가고 놀이공원에 가는 일처럼 설레었다. 헌책방에서라면 왠지 세상 모든 책을 가장 싼 가격에 살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들었다.

여름의 풍속

먹구름을 예감한 곤충처럼 심란해졌다는 표현 때문에 좀 웃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을 생각했을까. 어떤 마음인지를 너무 잘 알겠고, 나도 그런 마음이었던 적이 있었다는 생각에 여기서 좀 터졌던 것 같다. 읽고 싶다기 보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작성했다는 작가의 그 당시 희망 목록은, 아마 대학교 1학년 때 받아들었던 권장 도서 100선에서 어려운 책만 추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겠지.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이런 적 있었어!하면서 반가웠던 장면들이 몇 있었는데, 이 헌책방 대목이 유독 그랬다. 요즘은 사러 가기 보다는 팔러 가는 일이 더 많은 곳이지만.

나는 부사가 걸린다. 나는 부사가 불편하다. 아무래도 나는 부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조그맣게 한다. 글 짓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부사를 '꽤'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매우' 좋아하며, 절대, 제일, 가장, 과연, 진짜, 왠지, 퍽, 무척 좋아한다. 등단한 뒤로 이렇게 한 문장 안에 많은 부사를 마음껏 써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참' 좋다.

부사와 인사

부사 이야기에도 크게 공감했다. 부사를 되도록 안 쓰는 게 좋은 문장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지만, 부사를 안 쓰고는 양껏 오바를 할 수 없는데요...? 이렇게 많은 부사를 써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던 저 많은 부사들을, 나는 글 한 편 쓸 때 거의 모든 종류 다 쓰는 느낌이다. 되도록이면 너무 많이 안 쓰도록 노력하겠지만, 나는 부사가 너무 좋다.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생일 축하

창비 50돌을 위한 글이라는 '생일 축하'는 공감가는 부분들이 많았다. '농담이 불가능한 시기'를 버텨낸 선배들이 마련해 준 찧고 까불며 놀 수 있는 마당에서 하는 작가의 농담은 선배들의 진담에 빚지고 있다는 부분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은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 도서관에서 느꼈다. 철제 서가들은 그대로인데 20살 새내기 때 그 느낌이 아니라서 마음이 이상했었다.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 때문이었나보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살아낸' 거니 그럴 거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선배는 그렇게 '자신이 읽은 문장이 아닌 산 문장'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여름의 속셈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해주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김연수 작가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 좋았다. 서른 다섯 무렵의 김연수 작가, 서른 다섯 무렵의 김애란 작가 이야기를 곧 그 무렵이 되는 내가 읽고 있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이 들려주는 '산 문장'에 머물면서, 서른 다섯이 되면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시간 외 Y를 만난 적은 없다. 안산에 혹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도 묻지 못했다. 본가가 안산인데다 시 전체가 장례를 치렀으니 건너서라도 아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 거다. 더구나 그해 우린 모두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Y가 불면증을 이기기 위해 부러 고된 식당 일을 택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점, 선, 면, 겹

우리가 본 것과 같은 걸 아이들이 봤다. 배 안에서 한 명도 구해내지 못한 걸. 다투어 생명을 지켜야 할 시간에 권리를 외치고 이익을 도모한 모습을. 그 '도모'를 가능하게 한 이 세계의 끔찍한 논리를. 아이들'도' 봤다. 어른들이 있는 데서도, 없는 데서도. 그리고 자신들이 본 것의 의미를 알았다. 아마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게 알았을 거다.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그 당시에 막내 동생이 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막내는 그 친구들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같은 학교가 아니었음에도, 누군가의 형제였고 친한 친구였고 안면이라도 있는 사이라서 관계가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고 한다. 막내는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우울해했다. 막내뿐만 아니라 친구들 대부분이 그랬다. 작가 말대로 우리 모두 '아는 사람'였는데, 안산에서 학교를 다녔던 그 또래들이 받은 충격은 오죽했을까 싶었다. 작가의 시선은 우리와 같은 것을 보고 알아버린 또래 학생들에게 머물렀다가, 제발 그냥 놔두라는 절절한 애원을 하는 유족들을 향했다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슬픔을 나누기 위해 모인 분향소에서 만난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서 멈춘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해 4월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중 어떤 불은 지금도 내게 원초적인 두려움을 일깨우는데 이청준의 중편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이 그렇다. 한밤중 느닷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너는 어느 편이냐'고 붇는 불. 답에 따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데 도무지 저쪽 실체가 보이지 않아 얼어붙은 한 가족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겐 저 눈부신 추궁 혹은 폭력이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처럼 느껴지는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한국의 많은 갈등 이면에 여전히 저 전짓불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빛과 빚

모의고사를 풀 때 저 작품이 나와서 문제를 풀던 내가 식은 땀이 날 것 같았다. 전짓불 뒤에 누가 있었을까. 어느 편이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저 소설을 처음 지문으로 만난 날 악몽을 꿨다. 실제로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닌데도 그 순간이 너무 공포스러웠다. 잊기 좋은 이름에서 저 대목을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작가도 '원초적인 두려움'을 일깨우는 장면이라고 해서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싶었다.

이 단편을 발표한 지 1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한 소년을 크레인 위에 세워둔 채 소설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남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도 거기에 있다.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나면 인물들이 나에게서 떠난다.

간다는 말도 없이, 또 보자는 인사도 없이, 잘 간다.

그런데 이 소년은 그러지 않았다.

혹은 그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갈 데가 없었나 보다......짐작하다가

그럼 계속 곁에 있게 하자고 마음먹는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이에는 처음부터 '인사'가 없었다.

잊기 좋은 이름

수많은 인물과 이름을 만들었을 작가라서 잊혀진 이름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는 마지막 말이 너무 좋았다. 마음에 남는 구절들이 너무 많아서, 추리고 추렸는데도 인용한 부분이 이렇게 많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부담스럽지 않은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따뜻한 눈으로 보고 싶어질 때 종종 꺼내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