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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 시행착오, 표절, 도용으로 가득한 생명 40억 년의 진화사
닐 슈빈 지음, 김명주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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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과학 분야 책은 어렵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 선뜻 손이 안 가는데, 이 책은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며 챙겨보는 최재천 교수님의 추천사가 눈에 띄기도 했고, 표지에서도 흥미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흥미가 항상 여러 분야를 짧게짧게 건드리고 넘어가서 그런지, 나는 한 분야를 오래 연구한 사람들의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는 게 너무 좋다. 그래도 전문가가 쓴 책은 좀 어렵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생물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읽을 수 있을만큼 눈높이를 맞춰준 책이었다. 심지어 재미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저자의 다른 책인 <내 안의 물고기>와 더 읽을 거리에서 추천한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우연과 필연, 우회, 혁명과 발명이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쓰일 줄은 몰랐는데, 책 첫머리에서부터 흥미진진했다. 목차를 읽어보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흉내쟁이, 인수합병 같은 말들이 있어서 이게 도대체 진화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 싶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위로를 받았다. 무슨 일이든 우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실제로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지금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좋은 변화가 시작되는 시작점이었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든든해졌다. 생명사도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니 그 일부인 내 삶도 그렇겠지 생각했다. 과학책을 읽으면서 이런 힐링을 얻게될 줄은 몰랐다.



동물의 몸도 자체 온도 조절기가 있는 집과 같아서, 어느 한 부분의 조절 기관에 문제가 있어도 다른 기관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신선했다. 그래서 돌연변이체도 생존할 수 있고 진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헤밍웨이의 고양이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다시 떠올렸다. 스노우 화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헤밍웨이의 고양이는 발가락이 6개였는데, 그 후손들이 아직도 헤밍웨이의 생가 주변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놀랐던 건 유전자가 내 예상처럼 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기적 유전자와 숙주 사이에서 날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치열한 경쟁과 내전이 일어나고 있다니, 내 몸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유전자가 40억 년 동안 어떻게 흉내내고 베끼면서 변화해왔는지가 너무 흥미로웠다.



공룡 멸종의 원인으로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소행성과의 충돌로 일어난 환경 변화를 책에서 읽으니 새로웠다. 동물 몸 안에서 유전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신기하고 하나의 작은 우주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외부 요인으로 그 세계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약간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여섯 번째 대 멸종은 어떤 모습일까, 인간도 그때 멸종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세포의 탄생이나, 그 세포의 변이에 대해 읽으면서 동물 몸의 복잡함과 다양함이 새삼 놀라웠다. '규칙을 어기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개체의 필요를 외면하고 자신의 증식이나 죽음에만 전념한다'는 암세포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는 한숨이 나왔다. 언젠가는 그 암세포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앞부분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생명사의 길이 탄탄대로가 아니라 꼬이고 구부러진 길이라는 게 이상하게 많이 위로가 됐다. 그리고 우리 뇌가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읽으면서, 그래서 내가...하며 깨달았다. 어떤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구성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나니까 내 몸이 읽기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나는 유전자를 아주 정적이라고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적이기는커녕,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움직이는 존재였다. 내가 알고 있던, 혹은 막연히 넘겨짚고 있던 사실들을 책을 읽으며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리 몸과 유전자에 사본이 이렇게 많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진화나 생물학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최재천 교수님이 생물학의 길 끝에서 만난 저녁노을 같은 책이라고 추천하셨는지 알 것 같다. 추천의 글부터 에필로그까지 싹 다 읽고 나니까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쓸까. 글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기까지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책에서 제일 감탄했던 부분은 내용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구성이었다. 저자는 내용을 뚝뚝 끊어지는 부분 없이 유기적으로 이끌어가면서,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읽게끔 유도했다. 우리 몸이, 현재 동물의 몸이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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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다 사진관
허태연 지음 / 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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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설 표지에 유행하는 것 같은 2층 건물 일러스트며, 푸릇푸릇한 제주 배경 등을 보며 휴가철에 읽기 좋은 소설이겠다는 짐작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올여름 당신의 휴식을 책임질 단 한 권의 힐링 드라마'라는 문구를 보면서 요즘 부쩍 복잡한 마음을 좀 달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살짝 있었다. 이전 작품이 정말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지 두근두근했다.



'힐링'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건만, 첫 장부터 위기였다. 주인공 제비가 사진관까지 도착할 때까지의 일이 여러번 나를 화나게 했다. 이걸 견뎌야 다음 장부터 힐링이 시작되는 거겠지...하면서 한 줄 한 줄 참아가며 읽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도 제비의 과거 이야기가 나오면 순간순간 열이 오를 때가 있었다. 제비에게 화가 날 때도, 주변 인물에게 화가 날 때도 있었다. 이쯤되면 그냥 내가 화가 많은건가 싶기도 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을 가리켜 '속정 깊은 사람' 혹은 '뒤끝은 없는 사람'이라고 칭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회사에서는 후자를 더 자주 만나게 되는데, 뒤끝이 없다고 어필하는 사람들은 뒤끝이 있으면 안되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성격에 뒤끝까지 있으면 그쪽이 사람인가요...?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그런 불같은 성격이었다. 제비의 사회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서 공감도 되고 왠지 모르게 속도 쓰렸다.



제비의 등장 이후 사진관을 처음으로 찾았던, 바이크를 타는 50대 여고 동창생들의 이야기가 나는 손님들 이야기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다. 어느 부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고, 책 마지막에 나왔던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지만, 때떄로 서로를 돌보고 있어'라는 말을 제일 잘 나타낸 그룹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리고 힙한 결혼 사진을 찍으러 왔던 예비 부부의 에피소드 끝에 '만일 헤어지더라도 사이 좋게 헤어질 거야'라는 말이 제비에게 그랬듯이 나한테도 찡하게 다가왔다. 소설을 읽는 내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여러 번 고민하며 읽게 되었다.



사회 초년생이 휴가 중에 읽게 된다면 마음에 꽂히지 않을까 싶었던 문장들이다. 읽다 보면 제비의 사회 생활이나 사생활은 왜 이렇게 어려운 장면들이 많을까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제비가 왜 저런 선택을 하고, 왜 저런 대응을 했는지 속이 터지며 읽다가 문득 제비가 아직 스물 다섯이라는 걸 깨닫고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씁쓸한 마음이 되었다. 제비가 살아가는 내내 어떤 짐은 영원히 내려 놓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대왕 물꾸럭 마을에서 많이 웃으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책장을 덮었다.


대왕 물꾸럭 마을의 하쿠다 사진관을 찾았던 많은 손님들 중 여고 동창생 라이더들과 지질학자만이 내 마음을 조금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른 손님들의 이야기도 매력적이고 가끔은 마음을 찡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개연성이나 소재가 이래도 괜찮은가 싶은 걱정이 살짝 들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소설 속에서 힙한 결혼사진을 요구하던 까칠한 예비 신부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내가 너무 삐딱한 마음으로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가 너무 책 띠지에서 본 '힐링'이라는 키워드에 집착하며 읽고 있는 느낌도 살짝 들었다. 

책에서 나온 것처럼 자꾸 비교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지만, 이번 소설은 에피소드 위주의 작품이다보니 굵직한 큰 줄기를 따라가면서 섬세한 감정 묘사를 보여주던 전 작품과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혹시 작가님의 작품 중 이 소설을 먼저 읽게 되는 독자가 있다면 <플라멩코 추는 남자>도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사람마다 소설 취향이 다르니까, 이 소설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나처럼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다 읽어보면 좋겠다. 그리고 작가님이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앞으로도 많이많이 만들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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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ㅈㅅㅎ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조금 사소하고 쓸 데 많은 제주 산호에 관한 거의 모든 것
녹색연합 외 지음, 박승환 사진, 조인영 감수 / 텍스트CUBE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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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창작과 비평 여름호를 함께 읽는 북클럽을 신청한 이유 중 하나는 녹색연합과 함께하는 에코 미션이 있기 때문이었다. 요즘 부쩍 환경에 대한 무서운 소식들을 자주 접하게 되어 이대로 괜찮은가 걱정될 때가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구 표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해양환경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바다를, 특히 오염이 많이 진행된 바다를 직접 볼 일은 거의 없지만 매일 아침, 먼 바다에서 잡혔을 참치로 만든 고양이 캔을 열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그 참치는 오염된 바다를 헤엄치다가 잡혔을까. 그 참치로 만들어진 캔을 먹는 여명이는 괜찮을까. 여명이랑 나는 오늘 하루동안 바다를 얼마나 더 더럽히게 될까. 그런 걱정을 안고 살다가 이번 북클럽을 신청했다.

창작과 비평을 열심히 읽던 중에 제주산호에 대한 책을 읽을 기회가 주어져서 흥미롭게 참여했다. 초성으로만 이루어진 책 제목도, 책에 담긴 내용도 참신했다. 얇다면 얇은 책에서 제주산호에 대한 저자들의 애정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이 책을 세상에 나오게 한 가장 큰 동력은 저자들의 제주산호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그 산호가 살고 있는 바다에 대한 걱정은 산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너무나 필연적인 것이고, 그 염려가 책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세면대와 화장실에서 바다를 떠올릴 수 있다면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시인의 말이었다. 화장실은 바다의 입구라는 말을 읽고 느꼈던 감정을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 번 느꼈다. 안타까운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테니, 바다를 덜 괴롭힐 수 있도록 아주 작은 것이라도 바꿔나갈 수 있도록 행동해야겠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누어져있다. 1부에서는 저자들이 산호와 처음 만나고 산호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가 담겨있다. 2부에서는 제주 산호의 이름과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고, 3부에서는 그 제주산호들을 제주 바다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지도로 수록했다. 1부에서는 2부에서 만나게 될 산호의 이름들을 눈여겨봐줄 것을 당부하는데, 좋아하는 것을 함께 보고 싶은 덕후의 마음이 느껴져서 읽는 동안 종종 웃었다.



나는 깊은 바다를 무서워해서 한번도 바닷속으로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이 많은 사람들이 반했다는 산호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바닷속에서 산호를 본 순간, 앞으로 산호를 연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그 산호들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ㅈㅈㅅㅎ는 올해 읽은 책 중에서 대상에 대한 격렬한 애정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사실 나는 무지하다고 해도 될만큼 산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된 것들이 많았는데, 산호가 식물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것도 놀라웠고 말미잘이 산호라는 것도 놀라웠다. 그리고 산호와 산호초가 다른 것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 책의 카테고리를 에세이로 넣을지 과학으로 넣을지 고민하다가 과학으로 한 것은, 나에게 과학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줬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했듯이 어쩌면 평범할 수도 있는 이 소원이, 나에게는 너무 뭉클하게 느껴졌다. 지구의 온도는 점점 올라가고 있고, 돌이킬 수 없어진다는 때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심지어 그 연도가 점점 당겨지고 있어서 어른인 나도 지구에서 끝까지 살 수 있을지 불안한데, 어린이들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무사히 지구를 물려줄 수 있을지 너무나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다음 세대가 산호의 매력을 알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깨끗한 바다를 물려줄 수 있도록,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책 자체가 두껍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볼 문제들도 있고 산호 사진과 설명도 다채로워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었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제주 바다에서 이 산호들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제주 바다의 오염이 심하지 않기를, 그래서 산호들이 사는 데 무리가 없기를 바라면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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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시선 -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
이윤희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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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졸업한지도 10년이 넘어서 가물가물하지만 대학생 때는 영역별로 필수로 들어야하는 교양 강의가 있었다. 나는 그중 예술 분야에서는 서양 미술사를 수강했다. 강의 시간에 시대별로 대표적인 화풍의 그림들을 보며 서양의 미술이 어떤 흐름을 거쳐 현대에 이르렀는지를 배웠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지만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있다. 어느날 강의 시간에 <나이 든 여인>이라는 그림을 봤을 때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불쾌했던 기억이다. 내가 실제로 혹은 그림이나 영상에서 봤던 할머니들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고, 화가가 악의를 가지고 그린걸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그 불편한 감정이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그림을 보며 묘하게 불편함을 느꼈던, 하지만 그 불편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던 나같은 사람을 위해 다양한 그림과 그 그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짚어가며 이야기해준다. 나는 책에서 '노화' 파트를 읽으며 예전에 봤던 그 그림에 악의가 다분했음을 깨달았다. 노화를 포함해 의문, 시선, 누드, 악녀, 혐오, 허영, 모성, 소녀, 위반이라는 10개의 키워드로 나누어 차근차근 불편한 시선의 정체를 알아가는데, 꽤 두꺼운 책인데도 재미있게 금방 읽었다.



앞서 내가 서양 미술사 강의를 들으면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도, 불편하기는 했지만 왜 불편한지 무엇이 불편한지를 콕 찝어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미술 작품이나 배경에 대한 내 지식이 부족해서라고 어렴풋이 짐작했었는데, 책의 앞머리에서 미술사의 전문가인 작가님도 그랬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왠지 모를 안도를 느꼈다. 불편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에서 300쪽에 가깝게 그 불편함의 실체에 대해 다루고 있을 것 같아서 내용이 기대됐다. 

10개의 키워드를 분석한 내용을 모두 읽고 나니 마지막 부분에 이 책의 내용이 또 다른 불편함을 되도록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써 있었다. 이분법적 편 가르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테지만 많지 않기를 바란다는 작가님의 말이 무엇을 예상하고 의식한 것인지를 알 것 같아서 읽으며 마음이 조금 착잡했다. 



책을 읽다가 반가운 부분이 있었다. 나도 성별을 특정해서 써야할 때는 '여류' 작가라는 말보다 '여성' 작가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하는 편인데, 이 책의 저자도 정확히 같은 이유로 그 말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었다. 여류는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지만, 나는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사람은 성별에 관계없이 전문가 혹은 그 직업을 나타내는 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직업 앞에 '여류' 혹은 '여'라는 말이 붙는 순간 그 직업의 주 종사자가 남성이고 여성은 소수라는 것을 반증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직업뿐이 아니다. 여대생, 여고생이 아니라 여자든 남자든 그냥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으로 불렸으면 좋겠다. 책에서 여성이 바지를 입고 길에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경범죄였던 시절의 이야기를, 입고 싶은 옷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입을 수 있는 시대에 읽으니 기가 막혔다. 너무 멀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은 예전에는 여류라는 말을 썼다는 사실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언젠가는 직업이나 신분 앞에 '여'가 붙는 것이 더 어색한 시대가 오지 않을까?



책의 표지에도 수록되어 있는 <올랭피아>를 전에도 몇번 보기는 했지만, 당대의 남성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항상 그림 속 여성이 수줍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대에 화면 밖을 똑바로 응시하는 여성을 담은 <올랭피아>를 보고, 지팡이나 우산으로 그림을 훼손하려는 관객도 있었다고 해서 놀라웠다. 수천년을 이어오던 시선의 역전을 이룬 이 그림의 실제 모델이, 다방면에 재능있는 빅토린 뫼랑이라는 화가였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는 것도 나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책에 나온 다른 책을 읽고 싶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에는 작품 중심의 책이라서 파생 도서가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번에도 읽고 싶은 책이 몇권 나왔다. 그중에는 게릴라 걸스의 책도 있다. <여성은 벌거벗어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공공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이들인데, 문제제기 내용이나 방식이 재기발랄하고 참신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함으로써 받기로 예정되었던 기금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광고도 곧 실을 수 없게 되었지만 당초 목적이었던 문제제기에는 성공했다. 이 게릴라 걸스의 서양미술사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게릴라 걸스 외에도 기존의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며 불합리한 상황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에는 많이 담겨있고, 그 사람들로 인해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책의 앞부분에 요즘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에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이 포함된 걸 보고 생소함을 느꼈다는 작가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여성 화가들의 이름을 보기 전에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외에는 떠오르는 여성 화가가 없었다. 그러다가 신사임당의 이야기가 나온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신사임당을 아예 화가 카테고리의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산수도로 높이 평가 받았고 화가 신씨로 일컬어졌으며, 지폐에까지 등장한 인물인데도 여성 화가로는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책을 읽으며 알았다. 가정을 돌보고 육아를 하는 일도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신사임당의 경우 그림에 대한 훌륭한 재능보다 어머니로서의 모습만이 부각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17세기 유교적 세계관이 도대체 뭘 어떻게 바꿔놓은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은 인물화의 모델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정물과 같은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실제와는 다르게 미화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는 내용을 읽으며 살짝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구약 외경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용기를 낸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유디트는 클림트의 그림 안에서 악녀에 가깝게 그려진다. 다른 키워드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나에게는 '악녀' 파트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가정에 속박되었던 여성이 사회활동을 시작하고 참정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19세기부터 유독 많은 악녀들과 팜므파탈이 그림에 등장했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외모의 미추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남성 화가와 다르게 여성 화가들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고 한다. 뛰어난 재능으로 유럽 전체를 매료시켰던 로살바 카리에라 역시 외모에 대한 아쉬운 소리를 들었고, 무례한 소문이 무성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책에 나온 로살바 카리에라의 두 자화상을 아주 인상깊게 봤다. 자신이 해온 작품 활동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책에는 나이 든 여성 화가의 자화상이 그 밖에도 실려있는데, 그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서양 미술사 강의에서 봤던 <나이 든 여인>이 얼마나 악의를 가득 담아 그린 그림이었을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문장은 사실 책의 제법 앞부분에 등장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이 부분을 보니까 느낌이 새로웠다. 내가 몰랐던 역사 속 많은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작품 활동을 하기에 썩 적합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어떻게든 각자의 자리에서 투쟁에 가까운 작품 활동을 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묵묵히 작품 활동을 했던 여성 화가들이 이미 너무나 대단해보였다.


책 자체의 내용이 풍성하기도 했지만, 유독 공감하거나 마음에 남았던 문장들이 많아서 노트앱에 따로 기록하는 문장들이 역대급으로 많았다. 그 중에서 필사할 문장을 다시 어떻게 추릴지 고민을 많이 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데 읽어도 괜찮을까,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딸과 아들들이 유쾌하고 재미있게 미술을 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했다고 하는 이 책이,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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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손글씨를 ! 너무 좋아요~
축하드립니다.
 
기분을 관리하면 당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 눈뜨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들이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우울증・기분장애 관리 가이드
수전 J. 누난 지음, 류초롱 옮김, 양용준 감수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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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는 다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약 40%는 우울증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고 한다. 감기처럼 가벼운 우울증이 있는가하면 폐렴만큼 진행되어 약물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예전보다는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지고 더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 수도 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의 저자는 의사이기도 하고, 우울증을 실제로 겪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우울증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지, 벗어나려면 어떻게하면 좋은지를 모두 10개의 챕터로 나누어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 책을 감수한 분의 추천사를 읽다가 마음에 남았던 문장이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같은 것이라고 하는 말은 종종 들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일텐데, 자칫 감기처럼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그 부분을 짚어내어 정도가 심화되면 약물 치료 등 치료를 권하는 내용이라서 공감했다. 그리고 감기도 감기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으면 더 빨리 나을 수 있겠으니, 아직 폐렴 수준까지는 가지 않은 수준의 우울증이라도 상담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울증에 대한 기사나 치료법에 대한 책들은 시중에서 정말 쉽게 접할 수 있다. 우울증을 겪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데 정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집중해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책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차근차근, 순서를 아주 잘게 나누어 실천하기를 권한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을 수도 있는 기본적인 방법들을 왜 기술하고 있는가에 대해 저자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의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면 늦고, 하고 싶든 하고 싶지 않든 일단 몸을 움직여 실천하기를 권한다. 행동이 시작되면 의욕은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책 표지에서 봤던 '눈뜨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들이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책이라는 말을 새삼 다시 돌이켜보며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부분은 우울증과 기분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들을 굉장히 세세하고 쉽게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앞사람과 대화를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눈을 맞춘다'부터 알려주는 식이다. 심지어는 여러 체크리스트와 표까지 실려있어서 실천해야 할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위 문장을 읽으면서 정말 단순하고 쉽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며 방법들을 왜 그렇게 세세하게 수록했는지를 알았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책에 나온 '혼자 덧없는 시간을 한없이 보내는 것'과 내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그러다가 책에서 고립과 고독을 구분해놓은 부분을 읽으며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고립이 아닌 고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몰랐던 개념이나 상황들에 대해 책을 읽으며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시작할 때부터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는 질병이라고 단정 짓고, 책의 마무리 부분까지도 이 말은 여러번 반복된다. 일반 성인도 그렇지만, 특히 노년층에서 우울증 치료를 잘 받지 못하는 이유를 질병이 아니라 나약함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 부분을 보고 많이 안타까웠다. 우울증은 당뇨병이나 심장질환과 같은 질병이므로, 치료를 받으면 더 나아질 수 있다.



아무리 획기적이고 좋은 치료법이 있더라도 당사자의 의지가 없으면 큰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울증의 경우 의지를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질병이라서, 작은 것부터라도 행동하며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잘 돌봐야한다는 말이 책에서 자주 반복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파트를 읽으면서 예전에 어느 방송인이 죽고 싶었던 순간에 대해 말한 내용이 생각났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은 글자 그대로 찰나였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 순간을 이겨내지 못했으면 살아있지 못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우울증은 단기간에 끝나는 질병이 아니지만, 죽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일시적이라고 하니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이번에 읽은 이 문장을 떠올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사랑하는, 우호적인 사람들과만 지내면서 어느정도 우울증이 호전되었다가도 명절이나 그 밖의 다른 일들로 나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또 악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그럴 때의 대처법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너무 무리한 기대에 부응하려고 한 적은 없는지, 나도 읽으면서 찬찬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태가 아닌 사람에게도 그랬다. 우울증이나 기분장애도 질병이기에, 자가 진단이나 해결 방법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그런 상황에 대비하거나 질병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다보니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사실은 그때 나는 약한 우울증이었구나, 라고 여러 차례 깨달았다. 모르고 겪으면 힘들 수도 있겠지만, 질병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대응 방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면 실제로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조금 더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부쩍 마음이 힘들거나, 무기력한 사람이 있다면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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