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묵은 먼 산의 기억에서 블레이크를 "글과 그림을 동시에 생각한 가장 위대한 거장"(P. 130)으로 언급하며, 자신 또한 그처럼 글과 그림이 공존하는 세계를 평생 탐구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 두 예술가의 만남은 단순한 존경의 차원을 넘어 창작의 본질에 대한 대화를 여는 열쇠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오르한 파묵. 두 이름을 나란히 두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긴장이 흐른다. 한 명은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로, 초월적 비전과 신화적 상징을 창조한 예술가다. 다른 한 명은 21세기 터키를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 주로 글쓰기를 통해 서사를 엮어온 현대의 예술가다. 그는 지난 14년 동안 몰스킨 노트에 일상의 생각과 관찰, 그리고 그림을 기록해 왔다. 먼 산의 기억은 이 수천 페이지의 노트를 한 권으로 집약하여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으로, 기억과 일상이 글과 그림으로 엮인 그의 창작 세계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 속했지만, 글과 그림을 통합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된다.


블레이크는 "시와 그림은 하나의 언어"라는 신념 아래 자신의 판화 작업에 글을 새기고, 시를 삽화와 함께 출판했다. 그의 순수와 경험의 노래(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는 순수와 경험,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이라는 상반된 주제를 문학적, 시각적으로 교차시킨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초월적 상징과 강렬한 비전을 통해 독자에게 단순한 해석을 넘어서는 다층적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The Tyger는 경험과 두려움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블레이크의 대표작이다. 호랑이의 "불타는 듯한 빛 (burning bright)"은 단순한 동물이 아닌 초월적 존재로 형상화되며, 창조의 신비와 두려움, 그리고 그 창조주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Did he who made the Lamb make thee?"라는 구절은 순수와 경험, 인간 존재와 신의 본질에 대한 블레이크의 탐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붉은색, 주황색, 검은색으로 묘사된 호랑이는 경험이 가져오는 고통과 성숙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블레이크의 시 The Tyger는 문학적 경계를 넘어 현대 음악과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마이크 배트(Mike Batt)가 작곡한 곡 Tiger in the Night는 블레이크의 시적 이미지를 음악적으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곡은 사랑과 열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블레이크의 "burning bright"라는 이미지를 차용하며, 불타는 호랑이의 강렬한 에너지를 새로운 예술적 방식으로 구현했다. Tiger in the Night는 블레이크의 상징이 단지 문학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현대 음악에서도 창작의 영감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이는 블레이크의 시가 가진 초월적 힘과 보편성을 증명하며, 그의 작품이 시대를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Mike Batt & The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 Vocal by Colin Blunstone ~ Tiger In The Night


반면, 파묵의 먼 산의 기억은 훨씬 개인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기억과 감정을 그림과 텍스트로 엮어내며, 과거의 자신과 대화한다. 그의 그림은 도시의 풍경, 창문 너머의 자연,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창문 밖으로 펼쳐진 푸른 풍경과 테이블 위에 놓인 일상의 흔적은 정적인 아름다움과 평화로운 사색을 담고 있다. 이는 블레이크의 The Tyger의 강렬한 상징성과 강렬히 대비된다. 블레이크가 두려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호랑이를 그려냈다면, 파묵은 따뜻한 색감과 고요한 풍경으로 독자를 위로한다.


파묵이 블레이크를 떠올리며 남긴 고백, "나는 그처럼 평생 글과 그림을 같은 페이지에서 생각하고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P. 130)는 단순한 동경을 넘어 두 예술가의 접점을 드러낸다. 블레이크가 신화와 상징의 언어로 영원의 경계를 탐구했다면, 파묵은 기억과 일상의 언어로 시간을 초월하는 세상을 구축했다. 한 명은 영국의 산업혁명 속에서 신성한 비전을 노래했고, 다른 한 명은 현대 터키의 역사와 개인적 사색 속에서 인간의 흔적을 그려냈다. 두 거장의 작업은 글과 그림이 서로를 해석하고 확장할 때 얼마나 풍부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의 작품은 각자의 시대와 맥락을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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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의 기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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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먼 산의 기억을 펼치며 처음 느낀 것은, 이 책이 그의 삶 자체라는 점이었다. 글과 그림,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던 그의 예술적 여정이 하나로 합쳐진 흔적이 페이지마다 숨 쉬고 있었다. 소설가 파묵과 화가 파묵이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마침내 화해하는 과정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글쓰기다. 이와 같은 열정으로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다른 사람이 되었으리란 걸 이제 깨달았다. P. 32


50년 전, 소설가 파묵은 화가 파묵을 묻어버렸다. 물감과 붓을 내던지고, 그림을 조롱하며, 자신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 어딘가에는 항상 화가의 유령이 존재했다. 어느 날, 다시 물감을 손에 쥔 그는, 마치 오랫동안 잊혔던 자아와 조우하듯이 노트 위에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먼 산의 기억이다. 



오르한 파묵의 이 시각적 노트는 그의 글과 그림이 하나로 엮여 탄생한 예술적 기록이다. 도시의 구조와 부드러운 색감, 아치와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따뜻하면서도 고독한 그의 시선을 담고 있으며, 노트에 적힌 문구들은 그림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상상력과 사색을 드러낸다. "Nights of Plague"라는 제목은 그의 창작 세계의 시간성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확장하며, 기억과 상상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그의 예술적 비전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 풍경을 둘러싼 시간과 감정, 그리고 그의 꿈과 사랑을 담아낸 하나의 작은 우주처럼 보인다.


파묵의 손길은 자유롭고 충동적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낙서를 하듯 노트의 줄을 벗어나기도 하고, 작은 글씨와 큰 글씨가 뒤섞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경이로웠다. 작은 산과 들, 인형 같은 집과 사라지는 거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새의 눈. 그의 그림은 단순히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담은 일종의 "감정 지도"처럼 느껴졌다.


이 페이지는 오르한 파묵의 일상과 내면을 담아낸 시각적 기록으로, 그의 섬세한 관찰력과 기억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터키의 풍경을 담은 수채화와 그 주변을 채운 글씨들은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대화처럼 느껴진다. 그림 속 풍경은 단순히 도시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본 삶의 아름다움과 고독, 그리고 이를 초월하려는 그의 욕망을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파묵은 풍경을 통해 자신을 잊고, 또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며, 이 순간을 영원히 붙들어두려는 듯한 시도로 이 페이지를 완성했다. 글과 그림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며 파묵의 내면세계를 한층 더 풍부하게 드러낸다. 이 노트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그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시각적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표현한 예술적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매일 그리고 있는 일기장의 작은 그림들을 떠올렸다. 펜으로 스케치한 나무들, 물감으로 물들인 간단한 풍경들. 그러나 파묵의 그림은 나의 단순한 습관적 그림과는 달랐다. 그의 그림에는 깊은 사색이 녹아 있었다. 그 사색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글을 쓰는 태도,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끈질긴 의지로부터 나왔다. 


작가와 화가가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여정. 파묵은 그림을 통해 글을 풍요롭게 했고, 글을 통해 그림을 살찌웠다. 두 예술적 자아가 공존하며 만들어낸 이 책은, 단순히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예술과 삶이 결합된 하나의 우주였다.



이 페이지는 오르한 파묵의 노트 중에서도 특히 따뜻하고 일상적인 순간을 담아낸 작품처럼 느껴진다. 고아(Goa)에 있는 집의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단순한 건물 묘사가 아니라 그곳에서 흘러갔을 소소한 시간들과 그의 기억을 오롯이 담아낸 시각적 기록이다. 집의 구조와 주변의 나무들, 계단 아래 보이는 강아지 두 마리,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텍스트들은 그 공간에서 느꼈던 평온함과 향수를 생생히 전달한다. 특히 강아지가 그의 일상 속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이는 그가 단순히 풍경이나 건물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의 생명력과 교감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강아지가 포함된 그림이 주는 따뜻한 인상은, 그곳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함께 이 작품을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각각의 문구는 단순한 메모를 넘어, 그가 경험한 시간의 조각들을 한데 엮어내는 역할을 하며, 그림과 글은 상호 보완적으로 그의 내면세계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단순히 고아에서의 시간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가 느꼈던 삶의 아름다움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하나의 작은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상상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소설가 파묵일까, 화가 파묵일까? 아니면 그 둘이 경계를 허물고 완전히 화해한 어느 순간, 삶의 본질을 붙들고자 했던 그 시간의 기록일까?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작은 기록들은 결국 그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조각들이 아니었을까. 


파묵은 말했다. “인생은 일련의 그림으로 구성된다. 사람은 그림 뒤에 오는 그림을 궁금해한다. 그다음 그림이 궁금하기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 그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펼쳐지는 한 장의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이어지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단순히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열망 때문일 것이다. 그림은 인생의 여정을 닮았다. 각 그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며, 삶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림이 끝나는 순간, 우리의 여정도 끝난다. 파묵이 “그림이 끝나면 어둠이 시작된다”고 말했듯, 그 어둠은 그림 없는 삶, 즉 존재 없는 상태를 암시한다. 그렇기에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림이 계속되고, 그 그림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곧 삶을 향한 애착과 같다.


결국, 『먼 산의 기억에서 소설가와 화가로서의 자아를 모두 발견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여정을 그림과 글로 기록하며, 다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다시 붓을 들었다. 그의 노트는 단순히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다음 그림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끝없는 궁금증이자, 삶을 앞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그림이 끝나지 않기를, 삶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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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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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아일리시 스택이라는 한 여성의 눈을 통해 펼쳐진다. 남편이 사라지고,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받으며, 세상은 더 이상 익숙한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아일리시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차려주고,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장을 보고, 방을 정리한다. 그녀의 삶은 점점 부서져 가지만, 그녀는 무너질 듯한 현실 속에서 일상의 작은 질서를 붙들려 애쓴다. 이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그녀가 삶을 지탱하기 위해 붙든 마지막 버팀목이다.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 순간은, 아일리시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는 장면이었다. 폭격 소리가 창문을 흔드는 와중에도, 그녀는 싱크대를 붙잡고 균형을 유지하며 깨끗한 접시를 정리한다. 얼핏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 행동 속에서 나는 삶을 버티려는 인간의 끈질긴 의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작은 것이라도 붙들어야만 하는 절박함을 보았다.


이 장면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뉴스에서 매일 접하는 비극적인 사건들, 전쟁과 억압 속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숫자와 영상으로만 지나칠 때가 많다. 그러나 『예언자의 노래』는 이 익명의 얼굴들 뒤에 숨겨진 인간의 고통과 그들이 붙들고 있는 작은 희망들을 조명한다. 뉴스 화면 속 익명성이 덧씌워진 얼굴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린치의 이야기는 거대한 사회적 혼란의 전조를 넘어, 이미 일어난 개인의 종말에 초점을 맞춘다.


작중에서 예언자가 노래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들, 앞으로 일어날 일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다. 린치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 『예언자의 노래』는 거창한 정치적 메시지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전 세계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작은 종말들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를 희생하고,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마주하는 것이다. 아일리시는 가족을 위해 끝까지 싸운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종종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예언자의 노래』는 사랑이란 항상 희망을 담고 있지만, 그 희망이 대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묵직하게 전한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히 비극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일리시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는 모습은 전쟁, 가난, 혹은 일상의 무게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려는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그들은 삶의 조각들을 이어붙이며 버텨나간다. 이 책은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책을 덮으며, 나는 아일리시의 이야기가 단지 그녀만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세상이 흔들릴 때, 부엌을 정리하거나, 아이들을 챙기거나, 빨래를 개거나,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근간인지도 모른다.


『예언자의 노래』는 거창한 결단이나 영웅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일깨운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중요한 것은 늘 거대하거나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과했던 평범함 속에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다시금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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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의 신작 『작은 자비들』(Small Mercies)은 그저 또 하나의 범죄소설로 분류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하다. 이 책은 1974년 보스턴의 사회적 갈등과 인종차별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 어머니의 복수와 분투를 통해 인간 본성과 공동체의 허상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영문 원서를 먼저 읽었을 때의 그 거친 힘과 긴장감이 잊히지 않는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을 읽으며, 서효령 번역가가 원작의 분위기와 감정을 섬세하게 전달하려 노력한 점이 돋보였다.


소설의 배경인 1974년 보스턴은 공립학교에서 인종 차별을 없애기 위해 시행된 ‘버싱’ 정책으로 인해 폭력과 증오로 얼룩진 시기다. 이 정책은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을 서로 다른 학교로 통학하게 만들어 교육의 평등을 추구했지만,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다. 부유층과 권력자들이 사는 교외 지역은 이를 피해 갔고, 결과적으로 가난한 백인과 흑인 사이의 대립과 분노만을 심화시켰다. 루헤인은 이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독자의 눈앞에 펼친다. 메리 패트가 살던 아일랜드계 백인 공동체는 마피아가 통제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흑인 갱들과 거래를 하고 폭력을 조장했다. 이 모든 구조 속에서, 메리 패트의 딸 줄스가 실종되고, 한 흑인 청년이 살해당한다. 처음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던 이 두 사건이 얽히며, 메리 패트는 자신이 믿었던 공동체와 진실의 어두운 면을 마주하게 된다.


메리 패트는 한때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어머니였다. 하지만 남편은 떠났고, 아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후 마약에 빠져 죽었다. 줄스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줄스마저 실종되면서 메리 패트는 절망 속에서 분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루헤인은 메리 패트의 분노를 단순한 감정의 폭발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를 통해, 가난과 분열, 그리고 인종차별로 인해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메리 패트는 단순히 딸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평생 몸담았던 공동체의 거짓된 안정을 뒤흔들며 진실을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대로 딸을 위해 싸우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점점 더 깊은 절망과 고립에 빠져든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메리 패트가 속한 공동체의 증오와 갈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가? 왜 우리는 누군가를 '타자'로 구분하고, 그들을 인간 이하로 간주하는가? 소설 속에서 흑인 청년 어기가 잔인하게 살해당했을 때, 대부분의 백인은 그가 마약상이나 범죄자일 것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어기는 성실하고 사랑받는 아들이었으며, 그의 가족은 메리 패트와 함께 일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대조적인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선입견이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한국어 번역본은 원작의 잔혹한 현실감을 섬세하게 전달하면서도, 번역 과정에서의 문화적 차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특히 루헤인의 대사는 캐릭터의 심리와 사회적 맥락을 동시에 담아내는데, 번역본에서도 이런 강렬함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영어 원서에서 느껴졌던 날것의 리듬감과 거친 문장은 번역 과정에서 다소 완화된 느낌도 들었다. 이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루헤인은 메리 패트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측면을 조명한다. 그녀는 결코 완벽한 인물이 아니지만, 그녀의 분노와 고통은 독자를 사로잡는다. 『미스틱 리버』에서 보여준 가족의 비극보다도, 이 작품은 더욱 넓은 스케일에서 사회적 부조리를 탐구한다. 우리가 가진 편견과 분노,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폭력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은 단순히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었다. 메리 패트는 고통스럽게 현실을 깨달았고, 그 과정은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증오와 갈등의 순환을 멈추기 위한 도전을 던진다. 그 질문이 불편하더라도, 그 답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작은 자비"일지도 모른다.


『작은 자비들』이 주는 강렬한 여운과 사회적 메시지를 이어가고 싶다면, 다음 작품들을 추천하고 싶다.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같은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대표작으로, 어린 시절의 비극이 현재의 살인 사건과 얽히며 드러나는 인간 관계의 복잡성을 다룬 작품이다. 강렬한 심리 묘사와 긴장감 넘치는 플롯이 돋보이며, 루헤인의 명성을 확고히 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가장 파란 눈』 (The Bluest Eye) 

흑인 소녀 피콜라의 삶을 통해 가난과 인종차별이 개인과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탐구한 작품이다. 토니 모리슨 특유의 시적 문장과 섬세한 서사가 돋보이며, 문학적 깊이와 감동을 선사한다.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 

인종차별과 정의를 다룬 고전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와 그의 딸 스카웃의 이야기를 통해 성장과 사회적 불의를 조명한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강렬한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Little Fires Everywhere) 

계급과 인종, 그리고 선택의 여파를 탐구하는 현대 소설로,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갈등을 흡입력 있게 풀어낸 작품이다. 이 소설은 높은 평가를 받으며, 리즈 위더스푼과 케리 워싱턴 주연의 8부작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2020년 훌루(Hulu)에서 방영된 드라마는 원작의 긴장감과 감정선을 성공적으로 스크린에 옮기며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이 작품들은 각각 다른 시대와 배경을 다루지만, 모두 깊이 있는 질문과 감동적인 서사를 통해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작은 자비들』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 이들 책에서 또 다른 깊이와 통찰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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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 Me Everything (Hardcover) -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선정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Random House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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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작, 『Tell Me Everything』소식을 듣자마자 책을 손에 들었다. 번역본을 기다릴 인내심 따위는 없었다. 이 책은 스트라우트의 이전 작품인 『오, 윌리엄!』 과도 유사한 정서를 품고 있다. 『오, 윌리엄!』에서는 루시 바턴이 전 남편 윌리엄과 함께 메인 주로 떠나 과거와 현재를 되짚으며 관계의 상처와 화해를 탐구했다.


이번 작품 『Tell Me Everything』은 그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루시 바턴과 올리브 키터리지, 그리고 크로스비라는 작은 마을이 다시 무대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로운 인물과 사건들이 더해져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마을의 조용한 풍경 속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나를 다시 불러 세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그녀의 문장은 북적거리는 소리 대신 한 사람의 낮은 목소리처럼 귓가에 닿는다. 『Tell Me Everything』에서도 그렇다. 메인의 작은 마을 크로스비.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그 공간에서 이야기는 서서히 펼쳐진다. 이곳은 그녀의 인물들이 한 번쯤 지나쳤던 곳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엮인 관계의 실타래가 하나둘 풀려 나간다.


스트라우트는 늘 그렇듯, 한 사건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삶을 얽어 간다.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하나 고유하다. 어떤 목소리는 오래된 슬픔처럼 낮고, 어떤 목소리는 다급하며, 또 어떤 목소리는 삶의 피로에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크로스비라는 작은 마을에 깊은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 생명력은 단지 마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는 진실을 속삭이는 듯하다.


루시 바턴은 여전히 자신과 싸우고 있다. 그녀의 기억, 그녀의 가족, 그녀의 과거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끝내 떨쳐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질문은 루시만의 것이 아니다. 『Tell Me Everything』의 모든 인물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질문에 맞서고 있다.


한편, 우리의 올리브 키터리지는 마치 오래된 나무처럼 크로스비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녀는 변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지만, 바람은 점점 더 강하게 불어온다. 올리브는 그 나이에도 여전히 깊은 뿌리를 내리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크로스비라는 공간은 마치 인물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다. 작은 마을의 고요한 풍경 속에서 갈등과 상처가 조용히 엉키고, 그 사이로 희망의 씨앗이 잔잔히 움튼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이미 고령의 나이로 등장했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이야기에서도 그녀 특유의 고집과 연륜으로 독자에게 깊은 통찰을 선사한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가장 감탄하는 점은 그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의 미묘한 결을 포착해낸다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 오해와 화해, 이렇게 그녀의 인물들은 늘 삶의 작은 순간들 속에서 자신만의 진실과 마주한다. 스트라우트의 문장은 그러한 순간들을 예리하고도 따뜻하게 조명하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게 만든다.


특히, 이번 소설에서도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능숙하게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루시와 올리브, 그리고 크로스비 마을의 또 다른 인물들은 각자 과거의 상처를 다시 들춰내며, 현재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스트라우트는 시간이라는 도구를 통해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탐구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래도록 한 질문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스트라우트는 그녀의 인물들을 통해 이해란 단순한 동의나 공감이 아니라, 고통과 기쁨, 미련과 화해의 과정을 모두 아우르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 관계를 이루는 본질임을 깨닫게 한다.


『Tell Me Everything』은 완벽한 화해를 약속하지 않지만 관계란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에서 엉성하게나마 만들어진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녀의 문학은 마치 낙엽 사이에서 귀한 이삭을 줍는 순간처럼, 우리가 지나쳤던 삶의 조각들을 깊이 응시하게 만든다. 이번 책도 참 좋았다. 스트라우트다, 역시. 그녀가 그려내는 크로스비의 풍경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여운처럼 오래 남아, 마음 한구석을 조용히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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