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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모티머 J. 애들러.찰스 밴 도렌 지음, 독고 앤 옮김 / 시간과공간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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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제는 'How to Read a Book'이다. 1940년, 이미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책 읽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으니, 저자에겐 그만큼의 자신감이 있었던 셈이다. 모두가 책을 읽는 법쯤은 안다고 믿는 시대에, 그는 감히 ‘진짜 독서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독서법 저술의 고전이 되었고, 수십 년에 걸쳐 세계 곳곳에서 읽히는 책이 되었다. 국내에도 번역본이 들어오며 많은 독자들에게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한국어판 제목이 원제의 간결한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독서를 다룬다. 그러나 그것은 독서라는 말이 암시하는 낭만적 고요나 개인적 취향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은 읽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복잡하고 의식적인 작업인지, 그리고 그 작업이 삶의 근육과도 같은 사고력을 어떻게 단련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언어로 길어 올린다.


책은 질문한다. 당신은 진정 책을 읽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문장을 스쳐 지나가는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읽기의 본질에 대해 되묻게 된다. 이 책이 제시하는 독서의 네 단계—기초적 읽기, 살펴보기 독서, 분석 독서, 종합 독서—는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를 해부하고 재구성하며 타인의 사유를 온전히 소화하기 위한 실용적인 방법이다. ‘읽기’란 곧 타인의 정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자신의 내면으로 이식하는 일이며, 그렇게 들여온 타인의 사유를 다시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종합하는 행위다. 이 복잡하고도 숭고한 과정을 이 책은 낱낱이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종종 마찰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안락한 독서의 리듬을 방해받는 감각이다. 책은 철저히 논리적이고 기능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정의 장식은 거의 배제되어 있으며, 언어는 날것에 가까운 지적 명료함으로 다듬어져 있다. 이 점에서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은 독서의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위안보다는 훈련을 말하는 책이다. 그것이 이 책이 지닌 지적 성실함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상의 여백을 좁혀 독자로 하여금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나는 마치 러닝머신 위에서 호흡을 조절하며 생각의 근육을 단련하는 기분을 느꼈다. 특히 분석 독서와 종합 독서에 이르는 과정은 책 한 권을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해부하는 행위와도 같았다. 그것은 철저히 의식적인 사고이며, 우리가 쉽게 빠지는 감성적 독서 혹은 수동적 수용과는 거리가 멀다. 책은 독자를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점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좋게 평가하는 이유는, 이 책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쉽게 사고의 무력함 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지를 정직하게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문장을 읽지만, 정작 그것들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자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단순히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얼마나 깊고 정직하게 읽었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 결국 ‘생각을 넓히는’ 독서란, 한 권을 통해 세계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는 정신의 확장을 의미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이전처럼 읽지 못하게 된다. 한 문장을 읽을 때조차 그것의 구조와 저자의 의도를 탐색하게 되고, 무심코 넘기던 단락 앞에서도 멈춰 서게 된다. 그것은 읽기의 속도를 늦추는 대신,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훈련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독서란, 책을 읽는 사람이 점차 책 그 자체가 되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우리는 더 많이 읽기 위해 이 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더 ‘제대로’ 읽기 위해 이 책을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독서는 비로소 우리 안의 침묵을 깨우고, 사고의 게으름을 몰아내며, 세계를 다시 응시할 수 있는 내면의 시력을 회복시킨다.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은 그렇게, 책을 읽는 법을 말하면서도 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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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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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책장을 삼키고, 활자가 재로 흩어진다. 화씨 451은 단순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불태워지는 것이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것은 사고의 말살이며, 기억의 단절이며, 인간이 더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이다.


브래드버리는 이 작품을 통해 한 개인이 ‘생각하는 존재’에서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하는 순간을 탐구한다. 소방관 가이 몬태그는 불을 끄는 사람이 아니라 불을 지르는 사람이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호스가 아니라 화염방사기이며, 그가 태우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지식이다. 책은 위험한 것이고, 따라서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지의 평온 속에서 살아가던 그가 어린 클라리스와의 만남을 계기로 의심하기 시작할 때, 이 세계의 균열이 서서히 드러난다.


화씨 451의 진정한 공포는 폭력적인 억압에 있지 않다. 이곳에는 전체주의적 독재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거리를 가득 메운 감시 카메라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은 거대한 벽면 스크린 속 가상의 가족과 대화하며, 이어폰을 통해 끊임없는 소음을 주입받는다. 그들은 더는 독서를 금지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치 않는다. 사고를 요구하는 모든 것이 피곤하고, 불편하고,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억압이 아니라 유희를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며, 시민은 자신을 감시하는 경찰이 필요 없이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가장 효과적인 검열이란, 검열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점을 브래드버리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2025년, 우리는 이미 몬태그의 화염방사기 대신 '알고리즘의 시원한 물줄기'로 스스로를 적시고 있진 않은가?


언어는 건조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감정은 뜨겁다. 소설 속 불길처럼 문장은 빠르고 격렬하게 타오른다. 몬태그가 점점 더 거대한 저항 속으로 내던져질수록, 독자 또한 그 불길 속에서 허덕이게 된다. 파버와의 대화, 책을 태우라는 명령 앞에서의 갈등, 그리고 최후의 도망길에서 펼쳐지는 숨 막히는 추격전까지, 작품은 결코 한순간도 느슨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화씨 451이 단순한 경고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은 존재한다. 책의 문장을 외워 전승하는 사람들, 기억된 지식이 다시금 활자화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폐허에서 새로이 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 브래드버리는 우리가 불길 속에서 무엇을 지켜내야 하는지를 묻고 있으며, 그 질문은 작품이 출간된 20세기 중반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읽지 않는다면,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화씨 451 속 세계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가장 무서운 것은 책이 불타는 것이 아니라, 그 불꽃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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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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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실패한 한 인간의 초상을 그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작품이다. 읽는 내내 사프디 형제의 영화 <언컷 젬스>가 떠올랐다. 주인공 윌헬름은 단지 사회적으로 낙오한 인물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침몰을 겪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한 인간의 인생 전체가 응축된다. 경제적 실패, 가족으로부터의 소외, 존재론적 고립을 통해, 물질주의 세계에서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쉽게 균열되고 붕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벨로는 이 몰락을 결코 과장하거나 드라마틱하게 연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평이한 하루의 틀 안에 인생의 본질적 비극을 은은히 스며들게 한다.


이 점이 개인적으로 <오늘을 잡아라>가 지루했던 첫 번째 이유다.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며, 윌헬름이 처한 상황은 끊임없이 답보한다. 그의 고통과 절망은 서사의 극적 변화를 통해 해소되지 않고, 무력하게 반복된다. 현대 독자에게 익숙한 내적 성장이나 구원의 서사는 이 작품에서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읽는 동안 답답함과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벨로는 애초에 독자에게 만족스러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실패의 리얼리티를 어떤 윤색도 없이,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럼에도 <오늘을 잡아라>는 단순한 패배의 기록으로 머물지 않는다. 벨로는 윌헬름의 무너짐 속에서 근원적인 인간성을 끌어올린다. 돈에 쫓기고, 아버지에게 외면당하고,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된 이 사내는 결국 '오늘'을 붙잡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영광을 쥐려는 몸짓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비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처절한 행위에 가깝다.


문체적으로 벨로는 건조하면서도 예리한 글쓰기를 구사한다. 서술은 절제되어 있으나, 곳곳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번뜩인다. 인물 묘사 또한 섬세하다. 윌헬름의 나약함과 동시에 그가 지닌 어설픈 고집, 애처로운 허세까지도 벨로는 집요하게 포착해낸다. 다만 그러한 치밀한 심리 묘사와 일상성의 강조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약화시키고, 독서의 밀도를 떨어뜨릴 위험을 동반한다. 특히 오늘날처럼 빠른 전개와 극적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오늘을 잡아라>가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나 역시 그런 지점들에서 지루함을 느꼈다.


서사적 만족이나 감정적 폭발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분명히 아쉬움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어떤 허구적 윤색도 없이 인생의 패배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드문 성취를 보여준다. 벨로는 패배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실체를 탐구하고자 했다. 윌헬름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는 오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에 무너진다. 그러나 어쩌면,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음의 가장 분명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실패를 견디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고독하고도 가장 진실한 인간의 과업이기 때문이다.


이 눈물은 어떤 개인적 패배의 표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존재 자체가 감당해야 하는 비극성에 대한 통곡이다. 그는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자신의 살아 있음의 고통과 무게를 함께 껴안는다. 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의 폭발은, 그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였다는 신호다. 살아 있음의 비루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벨로가 말하는 '오늘을 붙잡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결말은 절망만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무너진 자리에서도 슬퍼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울 수 있다는 사실. 그 감정의 회복은 어쩌면 가장 소박하고도 근원적인 희망이다. 벨로는 그런 희미한 가능성을, 과장 없이,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마지막 장면에 새겨넣었다.


<오늘을 잡아라>는 실패를 미화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 아름다움—무너질 수밖에 없는 약함 속의 진실—을 발견한다. 벨로는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대신, 오히려 그 부재를 통해 삶의 본질적 고독을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윌헬름은 모르는 이의 죽음을 마주하고 끝내 오열한다. 평소 눈물을 부끄러워하며 억눌렀던 그가, 마음껏 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처지와 겹쳐 보며, 결국 감정을 숨기지 않고 폭발시킨다. 그 눈물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무너진 삶과 세계의 허망함을 함께 껴안는 눈물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인생의 승패를 넘어선 보편적 연대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낀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벅찬 인간 존재의 무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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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리커버) 문학동네 숏클래식 리커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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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상을 조각낸 뒤, 보석 파편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이듯 세공해낸다. 그리하여 모인 조각들은 결국 하나의 빛나는 집합체가 되어 삶의 가치를 묵직하게 드러낸다. 독자의 삶을 담은 듯 무색무취한 이야기들은, 오히려 더 깊고 날카로운 충격으로 다가온다. 마치 필립 로스가 모든 남자들의 운명을 책의 페이지 안에 몰래 숨겨둔 듯하다. 삶의 무의미함, 그리고 죽음의 무게에 우리는 서서히 짓눌린다.


미리 말하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다소 과장되었을지 모른다. 작중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주인공의 삶은 내 아버지의 삶을 닮았고, 그의 내면은 마치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와 나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이 이야기가 내 삶을 예견한 것만 같아 강한 충격을 받았다.


필립 로스의 탁월함은 인간 본성의 가장 은밀한 층위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의 통찰은 내면의 심연을 넘어서, 우리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본능의 그림자까지 꿰뚫는다. 그는 하찮고 본능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정교하게 추적하며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평범한 일상’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는 무풍의 방 안에서도 공기의 움직임을 읽는 사람처럼, 정적 속의 미세한 동요를 포착해낸다. <에브리맨>을 읽으며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가 문장이 된 상태를 경험했다. 어쩌면 그것은 주인공의 성격이 내면 깊은 곳의 나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내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뛰어나다고 느끼는 이유는, 필립 로스가 인간의 감정을 정제하지 않은 채 날것 그대로 통찰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감추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며 깊이 후회하는 주인공의 사색은 누구나 지나온 인생의 어딘가를 건드린다. 필립 로스는 그런 삶을 비난하지 않는다. 한없이 부족한 인생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는 중립적인 관찰자의 위치에서 인간의 본성을 응시하며, 독자를 깊은 사유로 이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독자는 그 어떤 허구보다 무거운 현실성의 무게에 짓눌린다. 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마치 실재 인물의 일기장을 몰래 들춰본 듯한 진실함을 전한다. 독자 자신의 일기장을 누군가에게 보여준 느낌마저 준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묻힌 곳에서 뼈가 되어,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될 우리의 허무한 인생에 대한 경고일지 모른다.


우리가 죽은 자리에는 뼈만 남는다. 그 뼈를 찾아오고 애도해줄 사람은 결국 남은 자들이다. 주인공처럼, 죽음이 다가온 시점에서 늦은 후회와 함께 자신의 뼈를 찾아올 누군가를 갈구하기보다, 아직 늦기 전에 주변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는 건 어떨까.


뼈가 되어도 후회 없을 삶을, 오늘부터 시작해보라는 따뜻한 권유처럼, 나는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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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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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책장을 삼키고, 활자가 재로 흩어진다. 화씨 451은 단순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불태워지는 것이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것은 사고의 말살이며, 기억의 단절이며, 인간이 더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마스터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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