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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실패한 한 인간의 초상을 그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작품이다. 읽는 내내 사프디 형제의 영화 <언컷 젬스>가 떠올랐다. 주인공 윌헬름은 단지 사회적으로 낙오한 인물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침몰을 겪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한 인간의 인생 전체가 응축된다. 경제적 실패, 가족으로부터의 소외, 존재론적 고립을 통해, 물질주의 세계에서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쉽게 균열되고 붕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벨로는 이 몰락을 결코 과장하거나 드라마틱하게 연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평이한 하루의 틀 안에 인생의 본질적 비극을 은은히 스며들게 한다.
이 점이 개인적으로 <오늘을 잡아라>가 지루했던 첫 번째 이유다.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며, 윌헬름이 처한 상황은 끊임없이 답보한다. 그의 고통과 절망은 서사의 극적 변화를 통해 해소되지 않고, 무력하게 반복된다. 현대 독자에게 익숙한 내적 성장이나 구원의 서사는 이 작품에서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읽는 동안 답답함과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벨로는 애초에 독자에게 만족스러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실패의 리얼리티를 어떤 윤색도 없이,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럼에도 <오늘을 잡아라>는 단순한 패배의 기록으로 머물지 않는다. 벨로는 윌헬름의 무너짐 속에서 근원적인 인간성을 끌어올린다. 돈에 쫓기고, 아버지에게 외면당하고,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된 이 사내는 결국 '오늘'을 붙잡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영광을 쥐려는 몸짓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비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처절한 행위에 가깝다.
문체적으로 벨로는 건조하면서도 예리한 글쓰기를 구사한다. 서술은 절제되어 있으나, 곳곳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번뜩인다. 인물 묘사 또한 섬세하다. 윌헬름의 나약함과 동시에 그가 지닌 어설픈 고집, 애처로운 허세까지도 벨로는 집요하게 포착해낸다. 다만 그러한 치밀한 심리 묘사와 일상성의 강조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약화시키고, 독서의 밀도를 떨어뜨릴 위험을 동반한다. 특히 오늘날처럼 빠른 전개와 극적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오늘을 잡아라>가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나 역시 그런 지점들에서 지루함을 느꼈다.
서사적 만족이나 감정적 폭발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분명히 아쉬움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어떤 허구적 윤색도 없이 인생의 패배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드문 성취를 보여준다. 벨로는 패배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실체를 탐구하고자 했다. 윌헬름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는 오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에 무너진다. 그러나 어쩌면,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음의 가장 분명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실패를 견디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고독하고도 가장 진실한 인간의 과업이기 때문이다.
이 눈물은 어떤 개인적 패배의 표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존재 자체가 감당해야 하는 비극성에 대한 통곡이다. 그는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자신의 살아 있음의 고통과 무게를 함께 껴안는다. 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의 폭발은, 그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였다는 신호다. 살아 있음의 비루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벨로가 말하는 '오늘을 붙잡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결말은 절망만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무너진 자리에서도 슬퍼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울 수 있다는 사실. 그 감정의 회복은 어쩌면 가장 소박하고도 근원적인 희망이다. 벨로는 그런 희미한 가능성을, 과장 없이,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마지막 장면에 새겨넣었다.
<오늘을 잡아라>는 실패를 미화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 아름다움—무너질 수밖에 없는 약함 속의 진실—을 발견한다. 벨로는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대신, 오히려 그 부재를 통해 삶의 본질적 고독을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윌헬름은 모르는 이의 죽음을 마주하고 끝내 오열한다. 평소 눈물을 부끄러워하며 억눌렀던 그가, 마음껏 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처지와 겹쳐 보며, 결국 감정을 숨기지 않고 폭발시킨다. 그 눈물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무너진 삶과 세계의 허망함을 함께 껴안는 눈물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인생의 승패를 넘어선 보편적 연대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낀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벅찬 인간 존재의 무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