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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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미디어 / 살인의 쌍곡선 / 니시무라 교타로 장편소설

1930년생이란 작가의 탄생 연대만 봐도 뜨헉한 기분이 드는 '니시무라 교타로'의 <살인의 쌍곡점>

작가의 탄생 연대를 보여주듯 이 작품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본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살인사건을 다룬 주제와 쌍둥이란 설정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은 설정에도 기담이라고 생각될 만큼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며 최근 만난 작가들의 이야기도 아니라 어쩌면 더욱 궁금증이 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44년 8월 일본의 어딘가에서 일란성 쌍둥이가 탄생한다. 그것도 너무 똑닮아 부모조차 알아보기 힘든 쌍둥이들이었으니 그렇게 자란 쌍둥이들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둘 중 하나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죄를 뒤집어 쓰기로 하면서까지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이야기는 시작한다.

새해를 앞둔 연말, '야노 히로키치'는 슬슬 주점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연말이라 꽤 흡족한 하루 매상을 보고 있던 그때 갈색 코트에 흰 장갑을 낀 괴한이 총을 들이밀며 돈을 요구한다. 이 날을 기점으로 주변 가게들이 속속 같은 인상착의의 범인에게 강도를 맞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경찰은 수사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도둑맞은 가게 한 곳의 사장에게 발견되어 잡힌 범인, 도둑맞은 다른 가게의 주인도 모두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지목한 가운데 다른 한 곳에서도 범인을 잡았다는 신고가 들어오게 되고 그렇게 범인으로 지목된 두 명은 놀랍게도 같은 얼굴에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출근길 지하철에서 만난 게 인연이 되어 결혼을 앞둔 교코와 모리구치 커플, 연말이라 한껏 기분을 내고 싶지만 결혼을 앞둔 터라 절약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마침 교코와 모리구치에게 도호쿠에 위치한 호텔로부터 숙박과 여행경비를 대주는 여행 제안을 받게 된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K 역에 도착한 교코와 모리구치는 자신들 외에 초대된 아야코와 이가라시, 다지마, 야베를 만나게 되고 호텔 주인 하야카와로부터 초대된 손님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멋진 설경만큼이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들의 공통점을 걸고 호텔 주인 하야카와와 내기가 걸리기도 하지만 도착 다음날 말도 없이 혼자만 있던 아베가 목을 매달아 죽음으로써 분위기는 어수선해진다. 그리고 자살로 여겼던 아베의 방에서 '이렇게 첫 번째 복수가 이뤄졌다'라는 카드가 발견되면서 하야카와는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만 전화기는 먹통에 설상차까지 고장 나 적막한 호텔에 모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살인의 쌍곡선>은 쌍둥이 범인 이야기와 깊은 산속 호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는 그럼에도 계속 이야기의 살을 더하며 흥미를 유발하는데 도대체 어떤 반전 이야기를 담고 있길래 초반부터 작가가 독자와의 공평함을 내세우며 쌍둥이 트릭을 미리 예고했던 것일까란 궁금증 때문에 중간에 소설을 덮을 수 없게 만든다.

호텔로 향하는 설상차 안에서 초대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는 하야카와의 말에 모리구치는 어느 소설에서 이렇게 초대된 사람들이 한 명씩 살해된다는 내용을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독자에게 던져진 쌍둥이란 단서와 깊은 산중에 초대된 연관성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왠지 어떤 사연으로 그 결말이 뻔하게 다가올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으로 인해 소설의 끝을 향해 달려나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 정확하게 맞추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비스무리하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당초의 생각이 어처구니없게 깨지며 한방 먹은 기분이 드는 결말에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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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블 블랙홀 청소년 문고 14
은모든 외 지음 / 블랙홀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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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 앙상블 / 은모든 정명섭 정은 탁경은 하유지

<앙상블>은 탁경은, 하유지, 정명섭, 은모든, 정은 작가의 글을 엮은 청소년 소설이다.

청소년 사설하면 왠지 모를 순수함과 풋풋함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막상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풋내 나는 이야기보단 낭만 따위 느낄 새도 없이 공부에 치이는 아이들의 현실적인 모습은 안타깝게만 다가온다.

탁경은 작가의 <러블리 오혁>은 빠지지 않는 외모와 성적, 거기에 다정다감한 성격까지 겸비해 학교 여자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심오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인 박세린은 잘생겼지만 거리감이 있는 아이돌보다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는 심오혁을 대상으로 팬클럽을 결성한다. 오혁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하지만 세린은 친한 친구들과 함께 오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움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오혁과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던 혜미는 오혁의 실체가 궁금하다면 알려주겠다는 말을 남긴다. 하지만 세린은 오혁이 그럴 리 없다면서도 가슴 한편엔 찝찝한 마음이 드는데....

그러던 어느 날 독거노인 봉사로 연탄 배달을 하게 된 세린은 오혁이 폐가에서 다른 반 진우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지금까지 학교 아이들에게 보였던 오혁의 상반되는 모습에 놀라게 되는데.....

하유지 작가의 <진짜든 가짜든>은 핸드폰 중독인 민서와 엄마, 담배를 끊지 못하는 아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핸드폰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민서에 대한 엄마의 불만을 시작으로 급기야 엄마는 민서에게 서로 밤 10시 이후엔 핸드폰을 하지 않기로 하고 아빠에게는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을 들어 실천에 들어간다. 하지만 민서와 엄마는 결국 핸드폰 유혹을 이기지 못했고 아빠 또한 담배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으니 약속을 어긴 벌칙으로 엄마는 민서의 딸이 되기로 하면서 맞벌이하는 엄마의 고충, 가족의 사랑을 조금씩 느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핸드폰을 대상으로 엄마와 딸이 벌이는 신경전이 너무 리얼해서 공감이 많이 되었는데 직장 맘인 민서의 엄마가 까부장의 인격 모욕적인 발언이나 성차별에 관한 발언을 밥벌이 때문에 참고 견디는 이야기 또한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평소 좀비 이야기나 역사소설을 많이 쓰시는 분이라 청소년 소설은 어떤 이야기로 풀어낼까 궁금했던 정명섭 작가의 <벙커의 아이>는 전쟁이나 재난 등의 이유로 지구 멸망을 준비하는 남성욱이란 아이의 이야기이다. 성욱이는 지구가 머지않아 멸망할 거라 굳게 믿고 있다. 번번이 사업을 말아먹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술만 마시는 아버지와 다단계에 빠져 있던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현실은 성욱을 더 그런 생각에 몰입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학교에까지 벙커의 아이로 소문이 나 성욱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냉담하면서도 호기심이 어려있는데 그러던 중 두 달 전에 전학 온 진한이가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성욱에게 자기도 '프레퍼 족'에 관심이 있다며 성욱에게 말을 걸면서 성욱이에겐 조금은 마음을 열 만한 친구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조금은 못 미더웠던 마음의 벽을 허물며 다가온 진한이는 성욱에게 벙커의 존재에 대해 묻게 되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벙커의 위치를 알려주고 그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성욱은 진한의 속셈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부모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며 자기만의 보금자리라고 여겼던 벙커로 도망쳤던 성욱이는 아버지가 알려준 벙커로 인해 다가온 재난에 대비할 수 있었지만 부모님의 생사는 알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맺는다.

은모든 작가의 <201호의 적>은 웹툰 작가에 대한 진로를 고민하던 윤정이 웹툰 작가 가믈란 작가를 인터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인터뷰하는 윤정과 수민이의 이야기와 웹툰 속 한 명의 남자를 둔 두 여자의 경쟁 구도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초반엔 작가에 대한 고민과 관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진로 선택에 대한 청소년들의 고민을 담았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가믈란 작가의 '201호의 적'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TV에서, 심지어 책에서도 너무 많이 접했던 내용이었고 아주 오래전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기에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던 것 같다.

정은 작가의 <급식왕>은 맛없는 학교 급식에 대한 재단의 비리를 캐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오랫동안 키웠던 고양이가 죽은 후로 갑자기 말을 할 수 없게 된 주인공과 그럼에도 묵묵히 곁을 지키는 인섭이는 영양가도 없고 맛도 없는 급식 개선을 학교 회장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며 재료나 업체 선정 등으로 준비할 것이 많아진다. 그리고 현재 이사장 아들이 꾸리는 급식에 대한 비리를 알게 되면서 이것을 자신들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어른들의 잘못을 아이들이 바로잡는 문제는 재단을 상대로 하고 있기에 아이들이 어른들의 강압에 의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너무 일찍 현실을 알아버려 희망까지 다치게 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은 생각지도 않은 긴장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지혜를 발휘해 잘 해결해나간 아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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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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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냄 / 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 / 시마모토 리오 장편소설

홋카이도 출신인 야마토는 같은 반 여학생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다가 보기 좋게 차인다. 그럼에도 도쿄의 대학에 합격하면 자신의 고백을 순순히 받아줄 거라 믿는 순진함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공부만 판 덕에 야마토는 도쿄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 나이대 주체하지 못하는 왕성한 성 호기심 때문에 가차 없이 차이게 된다.

열심히 공부해 도쿄의 대학에 합격했지만 여자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다는 생각도 잠시, 야마토는 도쿄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면 곧 여자친구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내심 기대하지만 야마토의 엄마는 하숙집인 '마와타 장'에서 도쿄 생활을 시작하게 한다.

그렇게 홋카이도 생활을 떠나 정신없는 도쿄에 도착한 야마토는 첫날부터 전철을 잘못 타서 헤매는 등 복잡한 도시의 생활에 주눅이 든다. 그리고 도착한 마와타 장에서의 생활은 오래되어 낡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고 하숙하는 사람들과도 조금씩 친해지면 바짝 긴장한 도쿄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부모님이 하던 하숙집을 물려받아 약간의 손을 본 후 계속 하숙을 이어나가는 '와타누키 치즈루', 본업은 작가며 1층에 거주한다. 그리고 그녀의 옆방엔 그녀가 내연남이라 부르는 '마지마 세우'가 하숙하고 있다. 야마토를 비롯해 여대생인 '구지라이 고하루'는 찹쌀떡같이 생겨 푸근함을 풍기지만 자신의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고 다른 방을 쓰는 '야마오카 쓰바키'는 표현에 서툴며 돌려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타입이다.

하숙집 주인인 치즈루를 비롯해 그녀가 내연남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렇다 할 애정 표현 없이 그저 생활만 하는 세우와 아버지의 부도로 인해 가족들은 흩어지고 홀로 도쿄에 남은 고하루, 학생 때 강간당한 기억과 그런 기억을 밀어내기 위해 자신에게 호감을 표했던 남자 선배에게 고백한 후 선배가 내뱉은 말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여자를 편해하는 쓰바키 그리고 고등학생이며 쓰바키의 여자친구인 '야에코'.

이들의 이야기는 함께 생활하는 하숙집에서의 이야기와 대학생활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마와타 장에서 생활하는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그들의 시선에서 각각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들의 시선으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닌, 그들과 연관된 등장인물의 시선이 교차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게 재미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팽팽한 긴장감을 뿜어내는 치즈루와 세우, 여자를 좋아하며 여러 가지 혼란을 느끼는 스바키, 인간적으로 배려 깊고 자상하지만 보이는 외모 때문에 늘 자신감이 없는 고하루, 발라당 까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마음이 따뜻한 요스케.

사회적 잣대로 판단하기엔 치즈루나 스바키, 야에코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자신만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독자의 이분법을 파괴시킨다.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고하루의 물음에 동성 간이라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면 행복한 일 아니냐고 대답하는 고야 선배의 대답은 지금까지 옳고 그름에만 초점을 맞추며 비난했던 우리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말 같아 기억에 남는다.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이들도 자신을 깨고 더 넓은 바다로 헤엄쳐 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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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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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빌리스 / 분리된 기억의 세계 /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대망각' 시대의 정확한 시작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초신성 폭발이나 병행 세계의 간섭, 다른 시대의 침략, 상고 시대의 구지배자의 부활, 독재 국가의 실험 등 다양한 가설 중 제일 유력하게 재기되는 것은 핵을 실험할 능력이 없었던 국가에서 엉터리 이론에 따라 자행한 의사핵 실험이라는 견해가 대부분이었고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공간의 상전이 현상이 발생하면서 인간의 장기 기억은 불가능해졌다.

인간은 모든 일을 단기로 기억한 다음 그것을 장기 기억으로 넘기는데 '대망각' 시대의 도래로 인해 장기 기억이 불가능해진 인간들은 10분 후면 그동안 일어난 일을 잊는다. 대망각 이전에 태어나 뇌를 활용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 기억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지만 대망각 이후의 기억은 10분마다 리셋되었고 대망각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그나마 뇌의 활용은 꿈도 꿀 수 없을 정도여서 외부 기억 메모리를 인체에 주입해야만 기억이 가능하였으니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인류 대재앙인 대망각 사고 이후에 일어나는 인간의 혼란스러운 사건들을 다룬 이야기이다.

오후 8시 반, '유키 리노'는 일기를 쓰고 있다.

오후 9시 20분, 리노는 그전의 기억을 잃고 일기를 쓰고 있다.

오후 10시, 리노는 좀전까지의 일이 생각나지 않아 일기를 쓰지만 자신이 쓴 것이 분명한 앞의 글들을 보며 그동안 발현되지 않았던 자기 안의 다중인격이 나타난 것이라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같은 시간, 아래층 거실에 있던 엄마는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며 반복해서 눈물을 짓고 있다.

동시간 원자력발전소, 리노의 아빠는 냉각수로 이용되는 바닷물에 걸린 오징어를 동료와 걸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미 휴식시간이 2시간이나 지난 상황에 정신을 차려 사무실에 들어가니 모두들 자신처럼 기억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잃어가는 기억 속에서 발전소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대망각 이후에 태어난 '히로타 테쓰지'는 지하철역에서 급하게 내려오다 누군가와 부딪쳐 순간 정신을 잃는다. 다시 깨어났을 때 부딪친 사람은 서둘러 자리를 떠난 후였고 다행히 근처에 있었던 중년 부인의 도움으로 떨어져 있던 메모리를 신체에 삽입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은 분명 남자인 히로타란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몸은 여자로 바뀐 상황, 지갑을 열어보니 자신을 증명할만한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히로타는 금방 부딪쳤던 사람과 메모리가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이대로라면 여자인 몸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히로타는 바뀐 사람의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형편은 좋지 않지만 머리는 좋은 편이라 의대에 다니고 있는 '토시야'는 어느 날 중학교 때 동창이지만 별로 친하지 않았던 녀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는다. 토시야는 동창과의 만남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병원장인 그의 아버지는 큰돈을 제안하며 몇 번이나 의대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자기 아들의 시험을 대신 봐달라고 부탁한다. 몸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메모리만 바꿔 끼면 되므로 시험 볼 때 불이익을 받을 염려는 없지만 그럼에도 토시야는 찝찝한 기분을 털어낼 수 없다. 하지만 시험 보는 시간만 메모리를 바꿔끼면 평생을 모아야 만질 수 있는 거액 앞에서 토시야는 흔들리게 되고 그렇게 동창생과 자신의 메모리를 바꿔 끼게 된다.

이렇듯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대망각으로 인해 장기간 기억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해진 인간에게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몸은 나이지만 외부 메모리가 없으면 다 큰 성인도 그저 갓난아이에 불과한 수준이므로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공포를 불러온다. 이로 인해 죽은 이의 메모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가족이 죽은 이를 그리워하여 무당을 통해 현재로 불러내는 모습이나 대망각 시대를 피해 산속에 숨어든 사람들의 기억을 조정해 몸을 바꾸는 시청 공무원의 행동 속에 기억과 신체의 분리를 예측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들은 기존에 만났던 SF 속 이야기들과 맥락은 다르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나의 기억은 데이터로 남겨지고 고장이 잦아진 신체는 더 새로운 기능의 신체로 대체되는 SF 단골 이야기는 인간의 고독과 씁쓸함이 느껴지지만 이 책은 인간의 기억 소실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와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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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오치 도시유키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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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나무사이 /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 오치 도시유키 지음

'모든 시작은 후추로부터'인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으잉? 이번엔 물고기닷!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는 '모든 것은 청어와 대구로부터' 버전인데 이 책을 쓴 '오치 도시유키' 교수님은 해양연구가나 역사가가 아닌 영문학 전공을 했다는 사실은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꽤나 재미있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에는 청어와 대구가 등장한다.

대구는 어렵지 않게 봐왔던 생선이지만 청어는 어릴 때부터 쉽게 접하지 못해서 그런지 나에게는 낯선 생선이란 인식이 있는데 그런 청어를 고전문학에서는 어렵지 않게 마주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저자가 영문학 전공이란 사실을 말해주듯 셰익스피어의 고전에서 청어나 대구가 풍자되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청어 자체가 생소한 느낌이 있었기에 좋은 뉘앙스의 생선은 아니라고 느꼈는데 같은 시대를 살았던 셰익스피어가 왜 청어와 대구를 불온한 뉘앙스로 묘사했는지도 설명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청어는 워낙 기름기가 많아 볕에 말리기만 해서는 안되는 물고기라 소금에 절이는 방법으로 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는데 헤게모니를 이룬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에 비해 배나 조업 기구 등이 발달했고 거기에 더해 소금에 절이는 방법에서 잉글랜드보다 백여 년이나 앞섰기에 똑같이 청어를 잡아도 염장법 때문에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인들의 청어보다 절반의 가격밖에 받을 수 없었다.

네덜란드가 청어로 인해 엄청난 부를 쌓아올리는 동안 잉글랜드는 네덜란드가 자신들의 영해에 들어와 그 어떤 세금도 내지 않고 청어 조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동안 같은 종교 선상에 있었기에 강경한 입장을 펼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동안 분쟁이 되었던 어업권을 조정해보려 했으나 상황만 더 안 좋아지게 된다. 그렇게 해상을 누비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네덜란드는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해양강국의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타국의 영해에서 막대한 청어 조업을 하며 잉글랜드나 프랑스의 미움을 받았던 것을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갑작스럽게 이동 경로를 바꾸기도 하는 청어로 인해 바이킹의 잉글랜드 습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며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청어와 관련된 기록과 비교해보면 겹치는 부분들이 생겨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내용은 후에 네덜란드가 청어 조업을 따라가던 이동경로와도 맞아떨어지는데 육류보다 생선을 더 많이 먹었던 당시의 식습관을 보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부분인 것 같다.

이후 등장하는 스톡 피시라 불리는 대구는 소금에 절여 일 년간 저장할 수 있었던 청어에 비해 긴 저장 기간을 자랑하고 있어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를 맞아 오랫동안 바다를 누비며 신항로 개척에 나섰던 이들에게 요긴했던 음식으로 각광받는다. 그렇게 시작된 대항해 시대에 '뉴잉글랜드'를 발견했던 존 스미스에 대한 이야기는 디즈니 만화에 등장하는 포카혼타스와도 연결되어 사실인지 거짓인지 다는 믿을 수 없지만 그런 시대적 배경 자체가 꽤 흥미롭게 다가왔다.

청어와 대구 때문에 발생한 국가들 간의 알력 다툼, 청어와 대구를 따라간 대항해 시대로 인해 기존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자리를 바꾸며 없어져 버렸는지, 신조차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물고기를 통해 투영된 인간의 욕망은 가히 끝이 없음을 과거에도, 현재에도 역사는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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