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분기점 - 8인의 석학이 예측한 자본주의와 경제의 미래
폴 크루그먼 외 지음, 오노 가즈모토 엮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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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스미디어 / 거대한 분기점 / 폴 크루그먼 외 7인

전쟁이 없어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현재, 하지만 평화로운 시대라고 하기엔 피부로 직접 체감하는 온도는 서늘하기만 하다. 한참 미중 전쟁으로 위기일발이던 분위기는 생각지 못했던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커다란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점들은 한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위기이자 위기를 발판 삼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거대한 분기점 앞에 세계 석학 8인의 자본주의와 경제의 미래를 향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꽤 특별하게 다가온다.

<거대한 분기점>은 국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오노 가즈모토'가 8인의 석학을 만나며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폴 크루그먼', 퓰리처상을 세 차례나 수상했던 '토머스 프리드먼', 런던정치경제대학교 문화인류학교 교수인 '데이비드 그레이버', 체코공화국 경제학자인 '토마스 세들라체크', <거대한 침체>를 펴냈던 미국 버지니아주 조지메이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타일러 코웬', 유럽에서 주목받는 젊은 사상가 '뤼트허르 브레흐만', 옥스퍼드대학 교수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 그리고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최배근 교수가 현재의 문제점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을 담아내고 있다.

AI, loT, 플랫폼의 연계 등은 인간의 편리는 물론 지구 곳곳에 흩어진 이들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고 있다. 힘들고 열악한 공간에서 일했던 인간의 노동 공간은 점점 개선되는 한편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먼 미래엔 AI가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된다는 SF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결국 인간은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건가란 고민거리를 낳기도 하지만 '폴 크루그먼' 교수는 AI로 인한 대량 실업은 당분간 발생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당분간이라고 하면 얼마큼의 기간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폴 크루그먼 박사는 영화나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미래처럼 인간이 일자리를 잃는 대량 실업은 먼 이야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렇게 단언하는 이유엔 현재 로봇의 생산성은 여전히 낮으며 AI가 활동하는 대부분의 분야는 인간이 기피하는 헬스케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AI로 인해 인간이 대량으로 일자리를 잃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중요한 것은 AI로 인해 인간이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보다 상위 1%에 몰려 있는 부의 재분배가 더 시급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보편적 기본 소득보다는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만 지원될 수 있도록 AI가 많이 활동하는 분야인 헬스케어와 개인 돌봄 서비스 분야에 인력이 더 많이 투입될 수 있도록 급여 체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쨌거나 폴 크루그먼 교수 이외에 경제학자들은 양적 완화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트럼프의 행동이 미국의 입장을 대변한다기보다 트럼프 개인의 행위로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무역 전쟁의 승자는 아무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수입하는 기계에 스파이웨이가 설치되어 있는 사실과 지적 재산권과 강제 기술 이전하는 반칙 행위에 있어서 트럼프의 강경한 자세는 한 번쯤은 걸고 넘어가야 할 액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리러니하게도 미국의 대중 무역 적자 대부분은 대일 무역 적자라는 점은 또 다른 점을 시사하고 있다.

8인의 석학은 인간의 노동, 데이터 자본주의, 기본 소득 등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현재 일어나는 수많은 폐해의 대부분이 지나친 소득의 불균형에 있고 그것을 재분배하기 위해선 국가마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이것은 경제보단 정치 이야기라고 꼬집는다.

강대국이란 쓸데없는 자만심과 자국의 이익만을 도모하기 보다 2008 미국발 글로벌 위기와 현재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서로 연대하여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점에 처해있는지 8인의 경제학자들은 <거대한 분기점>에서 한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어 상생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이상은 간과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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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이별입니다
나가쓰키 아마네 지음, 이선희 옮김 / 해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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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냄 /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 나가쓰키 아마네 장편소설

대학 막바지, 구직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합격을 알리며 '미소라'를 찾는 회사는 없다.

구직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미소라는 6개월 전부터 장례식장 아르바이트도 그만뒀지만 계속되는 불합격 통보에 너덜너덜해질 즘 그녀가 일했던 반도회관의 '요코' 선배에게서 일을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게 된다.

계속되는 불합격에 자신감을 잃은 미소라를 본 부모님은 구직활동을 잠시 미루고 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하고 마침 그녀에게 도와달라는 요코 선배의 제의도 있어 구직을 미룬 채 아르바이트 생활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장례식장에서의 아르바이트는 정신없을 만큼 바빴지만 미소라로서는 잡생각에 빠질 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해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시간이었고 그런 나날 속에 아르바이트할 때 보지 못했던 외부 장례 디렉터 '우루시바라'와 추모식을 진행하는 스님 '사토미'를 만나게 된다.

키도 크고 훤칠하며 다른 장례 디렉터들보다 젊은 우루시바라와 그에 못지않게 젊은 사토미, 그리고 자기가 태어나기 전날 죽은 언니가 꿈에 나온 날은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되는 미소라가 장례식장인 반도회관에서 일하며 만나게 되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영혼들과 죽은 자를 보내기 힘들어하는 남은 자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이로써 서로 편하게 보내줄 수 있는 내용을 담은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소설의 장소가 장례식장이라는 것도 생소했지만 영혼을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스님 사토미와 영혼을 볼 수는 없지만 남은 이들에게 더 이상 마음 아프지 않게 죽은 이의 마음을 전하는 우루시바라, 사토미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죽은 령을 느낄 수 있는 미소라의 캐릭터도 생소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렇게 케미가 맞는 세 사람은 그들의 능력에 맞게 평범하지 않은 죽음을 의뢰받아 죽은 이들의 억울함을 다독거려주고 남아있는 자들의 아픈 마음을 보듬으며 죽은 자를 편히 보내줄 수 있도록 노력한다.

소설에서는 세 가지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출산을 앞두고 사고를 당한 임산부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병원 생활이 잦았던 어린 소녀, 결혼할 사람에게 악성 종양이 발견되면서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부모와의 연을 끊고 도망쳤지만 결국 병으로 남편을 잃고 못 잊어했던 여자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어느 날 갑자기 알고 지내던 사람이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리는 것은 남겨진 이들에겐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봐왔던 가족이거나 애인, 부부라면 그 상실감과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을 텐데 실제로 아꼈던 사람이 죽고 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이를 따라가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 생과 사를 단순히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머지않아 이별입니다>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세 사람이 그들의 능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삶과 죽음을 담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슬픔과 상실감 이외에 이제 살아있지 않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공포감으로 서로 상이한 감정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이제 더 이상 곁에 없다는 감정으로 생각하기엔 죽음이란 단어에 응축되어 있는 힘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것 같다.

살아있는 자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재미있게도 인간은 죽은 후 소멸되기보다 환생을 통해 다시 태어나거나 신을 돕는 일을 하거나 등의 믿음으로 인간에게 다가온 것을 보면 사후세계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죽음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중에 차마 이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령을 위해 애쓰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죽은 이에게, 남겨진 이에게 죽음이 어쩌면 또 다른 도약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서 특히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죽은 이와 남겨진 이의 슬픔은 서로를 향한 신뢰감과 사랑으로 마음 따뜻하게 되돌아온다. 비록 곁에 없지만 죽었다고 죽은 이를 잊은 것이 아니며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살아갈 이들이게 상실보다는 행복한 기억들을 그러모아 남은 날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준다. 갑자기 애통하게 떠나버린 이들의 이야기엔 눈시울이 붉혀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가슴속에 잔잔하고 따뜻하게 다가와 그 온기만으로도 충분히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후 작가의 소개를 다시 살펴본다면 이토록 따뜻한 소설이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바로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작가에게도 같은 아픔이 있었기에 그토록 진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장례 디렉터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미소라와 그녀의 사수 우루시바라, 사토미의 이어질 다음 이야기도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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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역사여행
유정호 지음 / 믹스커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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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커피 / 방구석 역사여행 / 유정호 지음

한국은 볼 곳이 너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속상해질 때가 있다.

우리나라도 볼 곳이 얼마나 많으며 역사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걸 알려고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꺼내도 정작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울분과 억압의 역사가 싫은 탓이리라.

아마 역사에 관심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텐데 해외여행지를 다녀왔다며 자랑삼아 말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역사 유적지는 다녀왔냐고 물어보면 거의 그곳이 어떤 곳인지조차 몰라 한다.

그런 차이 때문에 언젠가부터 타인에게 문화 유적지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방구석 역사여행>을 쓴 유정호 선생님이 도입 부분에 쓰신 글을 보면서 공감이 많이 갔다.

나라고 역사 인물, 역사적 사건에 대해 많이 알겠는가, 그저 사람마다의 관심의 차이일 텐데 역사는 그저 지루하고 그렇고 그런 분야로 생각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안타깝고 씁쓸하다.

이 책은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제주도로 나눠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는 곳과 유적지 탐방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생소하게 다가오는 곳들이 소개되어 있다.

평소 역사 책을 자주 보는 사람들이라면, 혹은 목차를 보고 '에이 이런 책 너무 뻔한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소개된 지역의 이야기 한 개씩만 제대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역까지 갈 것도 없이 펼쳐 본 곳에 관한 이야기 하나만 제대로 읽어봐도 이 책이 그동안 읽었던 책과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서울과 가까운 수도권에 살기에 아이와 서울 곳곳을 많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도 처음 등장한 '옥천암'은 그 어느 책에서도 본 적이 없는 곳이라 꽤나 생소하게 다가왔는데 조선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 한 사찰이라 유서가 깊은 곳이어야 하지만 정작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그 앞을 흐르는 맑고 깨끗한 홍제천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더럽고 냄새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백 년 전 병자호란 때문에 잡혀간 수많은 처자들이 그곳에서 정절을 잃은 자신의 몸을 씻어냈음에도 뿌리박힌 유교 사상 때문에 그 어느 곳에도 돌아갈 수 없었더라는 이야기는 역사적 아픔을 더해주고 있다.

유럽의 유명한 유적지를 다녀온 사람들은 한국의 유적지는 단조롭고 시시하다며 실망스럽다는 기색을 내비칠 때가 많은데 나는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의 태도보다 그런 부모의 태도를 보고 자라나는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역사인식이 더 우려스럽다. 재미있게도 아이와 한국의 여러 곳들을 둘러본 부모들보다 주로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본 부모들에게서 그런 리액션을 많이 보게 되는데 사이즈만 놓고 그것을 편애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긴 하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에게 일단 읽어보고 판단하라고 싶어진 책이었는데 지역마다 알차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좋았지만 이미 많이 알려진 곳임에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 즐거운 방구석 역사여행을 제대로 즐긴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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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러시아 고전산책 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김영란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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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 / 파우스트 /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

이름은 익히 알고 있지만 앞선 두 작가와 달리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은 풋내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기에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 그렇기에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작품에 들어가기에 앞서 훑어본 이반 투르게네프의 생애는 세 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실제로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에게 다양한 언어와 성장기에는 독일로의 유학을 떠나 방대한 지식을 흡수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한마디로 금수저로 태어나 돈 걱정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건데 일반인 눈엔 부족함 없는 귀족의 삶이 마냥 부럽게만 다가올 수도 있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귀족들의 모습은 척박한 생활을 하는 서민들의 메마른 감성과 달리 섬세하고도 가슴 아린 감수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에 서민들의 현실에 비춰볼 때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여름 땡볕 아래 이토록 가슴 시린 애잔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읽어본 이들이 이반 투르게네프의 섬세함을 왜 그렇게 극찬했는지 책을 덮으며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세 번의 만남', '파우스트', '이상한 이야기'라는 세 편의 단편을 담고 있는데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면서도 각기 다른 강렬함으로 다가와 사랑에 대한 순수함을, 때로는 인간 내면에 대한 끈질긴 집념을 담아내고 있다.

<세 번째 만남>에서 주인공은 이탈리아의 어느 저택에서 아리따운 여자가 노래 부르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 창밖으로 비친 찰나의 모습에서 주인공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것은 강렬함으로 남게 된다. 이후 러시아로 되돌아와 한적한 시골에서 사냥을 즐기던 주인공은 몇 년 전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여성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탈리아에서도 그랬지만 이후 두 번째 만남에서도 여성 옆엔 자신이 대적할 수 없을 만큼 유려한 신사가 있어 주인공은 여성에게 다가설 수 없다. 그렇게 꿈같은 두 번째 만남 이후 시간이 흘러 어느 파티장에서 주인공은 그 여성과 다시금 만나게 되는데 그제서야 주인공은 여성과 신사가 함께 있을 수 없는 사이이며 자신의 감정 따윈 상관없이 여성의 관심은 오로지 남성에게만 향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그들의 세 번의 만남은 끝이 난다.

<파우스트>의 주인공 파벨은 오랜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대학 동창을 만나게 되었고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아내가 파벨이 유학을 떠나기 전 마음에 품었던 베라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학을 앞두고 만난 베라와 그의 어머니는 파벨에게는 꽤 독특하고도 주관이 확고한 인물들이었는데 베라의 어머니는 파벨을 마음에 들어 해 잦은 만남이 이어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베라에게 마음이 가지만 베라의 어머니가 떠날 것을 종용하면서 그렇게 베라는 파벨의 마음 한구석에 아련함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그랬던 베라가 대학 동창의 아내가 되어있었고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파벨은 그들의 초대에 응하게 되면서 잦은 왕래가 시작된다. 워낙 어릴 때부터 엄한 어머니로부터 소설이나 시보다 냉철함을 요구하는 학문을 배웠기에 파벨은 자신이 푹 빠져있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베라에게 낭독해 주며 시를 알려주기 시작한다.

파벨이 자신과 베라의 만남에 대해 친구에게 편지 형식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에 중반부가 치닫기도 전에 독자는 왠지 이들의 결말이 어떻게 다가올지 예감할 수 있는데 이미 예상했음에도 뭔가 푹 꺼져버리는 듯한 느낌에 한동안 가시지 않는 얼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실린 <이상한 이야기>는 직장일 때문에 T 시에 머물게 된 주인공이 호텔 종업원으로부터 기이한 마력을 지닌 인물을 소개받아 신비한 경험을 한 것과 그곳에 사는 아버지의 오랜 지인의 딸을 만났던 이야기가 함께 소개되는데 괴이하면서도 신비스러운 힘을 지닌 인물과 보통의 처자들과 다른 확고한 주관을 지닌 아버지 지인의 딸은 몇 년이 지난 후 순례자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인데 풍족함을 누리면서 그것을 다 버리고 마치 인간의 온갖 죄를 자신이 짊어진 채 죗값을 받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는 좀처럼 이해되지도, 그렇다고 뭔가 공감이 되지도 않지만 그래서 제목처럼 이상한 이야기처럼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연민,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고난 등을 담아 각각의 이야기가 꽤 강렬하게 다가오는데 그런 기묘하고도 강렬한 느낌만큼이나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답기에 느껴지는 감정의 섬세함은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고통이 이것일 만큼 아리게 다가와 기억에 오래 머무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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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그림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9
히사오 주란.마키 이쓰마.하시 몬도 지음, 이선윤 옮김 / 이상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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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 나비 그림 / 히사오 주란. 마키 이쓰마. 하시 몬도

일본 고전 추리 소설 시리즈 9번째 이야기 <나비 그림>

충격적인 반전이나 극적인 전개 구도와는 사뭇 다르지만 고전이란 이름에 걸맞게 당시 시대상과 인간 심연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라 눈여겨보게 되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독자를 속이려는 화려한 기교나 정신없이 몰아치는 전개보다 성실하고 견실한 이미지를 보여주어 오히려 풋풋함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전쟁 중이거나 패전 후의 상황들이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성을 엿보는 것 또한 흥미롭게 다가온다.

<나비 그림>은 히사오 주란, 마키 이쓰마, 하시 몬도란 세 작가의 단편 6편을 싣고 있다.

먼저 히사오 주란의 '호반', '햄릿', '나비 그림'을 차례로 만나게 되는데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부모에게 이렇다 할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주인공이 아버지의 권유로 영국에 건너가 오랫동안 머물다 싫증이 나 일본으로 되돌아와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귀족이란 신분임에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열등감은 자신감 결여로 이어졌고 그것은 끝내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서지 못하고 버림받기 전에 자신이 먼저 포기하고 마는 성격을 낳았는데 그런 이유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한 주인공은 자신의 별장 근처에서 만난 앳된 소녀를 좋아하면서도 냉담하게 대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주인공은 소녀에게 청혼을 하였고 둘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바깥일이 바빠지면서 집에 자주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어느 날 일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간 날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도입 부분부터 '호반'은 아내를 죽인 자신이 실종되기로 마음먹었으며 성년이 된 후 자연스럽게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놨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아직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아내이자 아들이 어머니를 죽인 이야기와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했을 땐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읽어보게 만드는 나름 짜릿한 결말을 선보이고 있어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후 등장하는 마키 이쓰마의 '사라진 남자', '춤추는 말', 하시 몬도의 '감옥방'은 앞선 하시오 주란의 작품보다 분량이 짧아 금세 읽을 수 있는데 비슷한 시대성을 담고 있지만 확실히 개성이 다른 이야기라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현대 추리 소설을 많이 읽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싱거운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고전에서 느껴지는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어 색다름을 느낄 수 있는데 문체는 다르더라도 고전과 현대의 추리 소설 속에 같은 주제로 빠지지 않는 것은 역시 인간 내면의 심오함에 대한 것이었으니 각각의 주인공들이 느낄 심리를 관찰하는 것도 큰 즐거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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