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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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책방 / 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 C.J. 튜더 장편소설

2016년 4월 11일 월요일. M1 북쪽 방향.

게이브는 오늘만큼은 늦어선 안됐다. 아내인 제니와 6시 30분까지 집에 도착하겠노라 약속을 했기에. 제니의 서늘한 눈빛에서 이번만큼은 절대 늦어선 안된다는 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길은 신경질적으로 막혔고 이대로라면 늦는 것이 확실했기에 게이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막힌 도로에서 앞차를 노려보던 게이브는 말도 안 되게 지저분한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인 앞차에서 딸 이지를 보게 된다.

'아니야 잘못 봤겠지. 이지는 지금 제니와 있을 시간인데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하면서도 앞차를 따라가던 게이브, 그러면서 집으로 전화를 해보지만 제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휴대폰 배터리까지 나가면서 게이브는 앞차에 탄 게 이지일리 없다며 따라가던 길에서 빠져 휴게소에 들러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하지만 당연히 거기에 있을 제니 대신 경찰이 전화를 받아 집에 일이 생긴 것임을 알리는데.....

그날 휴게소로 빠져 집에 전화하지 않고 앞차를 따라갔더라면, 빌어먹을 충전용 배터리가 있었더라면....

게이브는 그날 이후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속도로 위에 있는 휴게소란 휴게소를 모조리 뒤지기 시작한다. 더럽고 말도 안 되는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그 차를 찾기 위해, 차 뒷좌석에서 얼굴을 비췄던 이지를 찾기 위해....

그러느라 게이브는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직장도 집도 없이 휴게소를 뒤지는 생활을 이어간다.

오로지 이지를 찾기 위해, 범인을 잡기 위해....

게이브가 들르는 휴게소 중 한 곳의 카페에서 일하는 케이티, 누군가에게 쫓겨 정처 없이 이동하는 프랜과 앨리스,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게이브와 가끔씩 만나는 사마리아인, 딸을 찾아 휴게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이브와 함께 이들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난다.

모녀는 아니지만 앨리스를 책임지고 도망치는 프랜, 거울만 보면 기면증에 빠지는 앨리스, 휴게소 카페에서 게이브가 꺼낸 수첩에서 '디 아더 피플'이란 글씨의 정체를 알지만 말하지 않는 케이티. '디 아더 피플'이 이지와 범인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이란 걸 알지만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는 게이브.

이들의 엇갈린 이야기만큼이나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이번 작품에서도 나는 좀처럼 무엇 하나 예상할 수 없어 답답했고 그래서 더 책을 덮을 수 없었다. 그리고 '디 아더 피플'이 살인도 마다 않고 대신해 주는 심부름 업체 또는 청부업체 같은 존재로 부탁에 대한 대가가 반드시 따르는데.....

'디 아더 피플', 게이브, 케이트, 프랜과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앨리스의 이야기는 어떤 결말을 가져올까?

다크웹이라는 무거운 주제보다 앨리스에게 기면증을 불러오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함께 소재로 등장해 더 흥미로웠던 소설 <디 아더 피플>, 무엇보다 다른 영미소설과 달리 장황하지 않은 심리묘사가 더 돋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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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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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책방 /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작가의 소설은 처음인 줄 알았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은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연작소설인데 중반쯤 수록되어 있는 '누구세요?'를 읽다가 <새벽의 방문자들>에 실려 있던 단편이란 게 떠올랐다. 그때도 참 분통터지게 하는 극중 재영의 발언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간신히 눌러야 했는데 두 번째도 역시 책을 잠깐씩 덮으며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였으나 현실에서 어렵지 볼 수 있는 재영의 탈을 쓴 남자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무더위를 날려줄 그 어떤 호러보다 더 무섭게 다가왔다.

8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는 처참하고 궁상맞아 호흡이 가빠 올 만큼 분노와 짜증을 유발하는데 드라마의 단골 소재나 심지어 아는 지인 중 비슷한 경험을 하소연하던 일과 겹치면서 참 절묘하게 현실적인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알지 못했거나 상대방이 무안해할 거란 배려심으로 또는 언어 체계가 달라 상호 소통에서 오는 동상이몽으로 여자와 남자의 생각과 소통은 극단적인 결과를 낳는다. 생각과 다른 남자의 행동에 대처하는 여자와 다 알면서 그러지 않았느냐는 남자의 발언은 너무 뻔해서 기가 질릴 정도지만 상처와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언제나 오롯이 여자를 향했었다. 그렇고 그런 얘기,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해 기시감마저 드는 이야기들, 그런 기시감이 무엇인가 생각하다 보면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들었던 얘기라 결국은 갑자기 머리가 쭈뼛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고시원에 틀어박힌 7년 동안 뒷바라지를 했지만 사법고시를 패스하자마자 뻥 차인 여자 이야기, 매너 좋고 무엇 하나 빠지지 않게 자신에게 잘해주는 거래처 직장남이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에 상처받는 이야기, 5년을 사귀고 결혼에 대한 미래를 그리며 요즘 세상에 맞벌이는 당연하며 아이를 낳는 모성은 버리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요 자신의 어머니보다 장모가 될 분이 더 기력이 좋고 가까운데 사니 아이를 낳으면 육아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되먹지 못한 생각을 하는 남자에게 상사가 자신의 손목과 어깨를 주무르고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중심 부분을 부비대 회사에 고발했으나 어이없게 잘렸더라는 하소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에만 격분하는 남자.....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뻔함 앞에서도 공감과 화가 나는 게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란 데 더 화가 나는 건 왜일까....

이 책은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여자들도 많이 읽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라는 이유로 모른 척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무서워서 어디 여자들에게 말이나 제대로 하겠냐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지만 그런 남자들도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모두에게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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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사이드 클럽 스토리콜렉터 83
레이철 헹 지음, 김은영 옮김 / 북로드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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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로드 / 수이사이드 클럽 / 레이철 헹 장편소설

인간의 마지막 욕망인 수명 연장 시대가 열리며 지금보다 훨씬 오래사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미래의 모습을 그린 <수이사이드 클럽>


말끔하게 차려입은 영상 속 남자는 처음부터 눈길을 끌지 못했다.

평범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영상 속 남자는 자신이 이름과 나이를 말하며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시간을 고민했고 앞으로 200년을 더 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병에 있던 검붉은 내용물을 들이킨 후 불꽃을 일으키며 일그러져버린 남자...


<수이사이드 클럽>은 범상치 않은 시작을 알리며 인간의 불로장생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덧없는지 예고한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레아는 100살이 되기 전 사내의 첫 라이퍼로써 임원자리에 오르며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받는 듯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142살을 살았던 엄마 유주도, 자신과 다른 비라이퍼의 삶을 살았던 오빠 새뮤얼도, 새뮤얼이 죽자 집을 나가 88년동안 보지 못한 아빠도 곁에 없다. 위안이라면 자신 곁에서 한결같은 애정을 보이는 토드랄까....


그러던 어느 날 레아는 출근하던 중 88년만에 아버지를 길에서 발견하게되고 놓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차선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다행이 레아는 큰 부상없이 깨어날 수 있었지만 감시당국에선 레아가 직장과 반대 방향을 무리하게 건너려고 한 정황을 수상히 여겨 레아에게 감시를 붙이기에 이르고 이들은 레아의 직장은 물론 토드와 함께 사는 집까지 들이닥쳐 레아를 미치기 일보 직전으로 몰고 간다.


힘들게 쌓은 커리어가 날아갈 위기에 처해있지만 레아는 당국에 아버지를 쫓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의심에도 변명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큰 빚을 지고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당국이 아직까지 쫓고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인데 그런 연유로 레아는 일부러 차에 뛰어든 것으로 오해받아 감시가 붙은 것과 정신 치료를 받을 것을 종용받는 불편함 속에서도 입을 열 수가 없다.


평탄했던 생활 패턴이 깨지며 혼란스러운 현재를 맞이한 레아에게 며칠 전 눈앞에서 놓쳐버린 아버지가 찾아오고 그동안 아버지가 어디에 살았으며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듣게 된다.


한편 북유럽에서 유명한 음악가였던 엄마와 안야는 제법 잘 살았지만 생명 연장을 위해 더 강한 심장으로 탈바꿈하던 엄마의 집착으로 많던 재산을 다 날리게 되고 급기야 심장은 뛰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누워있는 엄마로 인해 줄리어드 음대에 합격해놓고도 다닐 수가 없다. 절망적인 나날 속에 당국의 지시에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레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삶에 환멸을 느낀 라이퍼들의 만든 '수이사이드 클럽'에 대해 알게 되는데....


100년이 아닌 300년을 살아야하는 라이퍼들의 삶.

고밀도 리포단백질을 두고 벌이는 경쟁과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동물성 음식 금지는 물론 정부의 지침대로 금욕적인 삶에 지친 라이퍼들이 만든 '수이사이드 클럽'은 정부의 지침에서 벗어나 라이브 음악을 듣거나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전통 음식을 진탕 먹어제끼는 등의 일탈을 삼는데 인간 최대 목표인 불로장생의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나조차도 온몸으로 부정하고 싶어질 것 같다.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재산이 많냐 적냐의 계급이 라이퍼와 비라이퍼로 이동하면서 과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며 오래 살기 위해 심장을 바꾸며 가산을 탕진하는 삶이 행복한 삶인지, 당국의 감시와 수없는 지침에 따라야하는 투명 쇠창살에 갇혀버린 삶이 과연 우리가 바라던 삶이었는지 소설은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다.


어떤 이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원래부터 오래사는 삶을 선호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300년이나 수명을 살아내야하는 라이퍼들의 삶이 끔찍하게 다가왔는데 100살, 200살은 예사로 표기되는 숫자 앞에서도 숨이 턱턱 막혔던 것은 나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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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천천히 안녕
나카지마 교코 지음, 이수미 옮김 / 엔케이컨텐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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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케이컨텐츠 / 조금씩, 천천히 안녕 / 나카지마 쿄코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에게 치매가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노희경 작가의 21년 전 작품이 리메이크 되며 화제를 모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속 시어머니가 치매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어머니는 그런 시어머니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점점 지쳐간다. 원하지 않았지만 찾아온 불치병은 나의 존재를 앗아가는 한편 가족에게도 그 힘듦이 전가되기에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고통 앞에서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더랬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우리나라와는 정서가 다른 일본에서 비슷한 주제로 소설이나 드라마를 다룬다면 어떤 느낌일까 꽤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확실히 한국과는 다른 일본 특유의 정서가 느껴져 슬프지만 한편으론 유쾌하고 그러면서도 가슴 따뜻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었다.

 

 

중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다 은퇴한 '쇼헤이'와 그의 아내 '요코',

이제는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을 하며 편하게 지내도 되겠다 싶은 찰나 쇼헤이에게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이 찾아온다.

겉으로 보면 멀쩡해서 쇼헤이의 학교 친구들이나 이웃 주민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고 어쩌다 엄마의 성화를 못 이겨 집을 찾는 딸들의 눈에도 아버지의 인지증은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아버지가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에 걸린 지 3년 차 되던 해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알츠하이머형 인지증, 원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고 약을 복용해 진행 속도를 늦춰주는 것이 최선인 상황에서 3년 차가 지나면 그때까지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가족들은 아버지의 상태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요코는 생물학자인 남편을 따라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큰 딸 '마리'와 가정주부인 둘째 딸 '나나', 푸드 스타일리스트인 막내 '후미'를 집으로 소환하여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게 한다.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에 걸린 아버지가 조금씩 기억을 잃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곁에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점잖고 누가 말을 걸어도 응대를 잘해주는 통에 쇼헤이가 인지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가족이 아닌 사람들은 눈치채기 어려웠지만 점점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자고 보채거나 미국의 큰 딸 집을 방문할 때 창밖으로 보이는 해변을 자신이 자랐던 곳이라 생각하는 등 점점 단어와 장소의 혼동이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누군가 집에 아픈 사람이 있다.

그것도 자신의 일생과 몇십 년을 함께한 가족의 기억을 잃어가는 누군가가 집에 있다면 지금까지 누렸던 편안했던 삶은 되돌릴 수 없는 먼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러하기에 이런 주제의 소설이나 드라마는 우울하고 슬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다 우울증이 오거나 정신착란이 왔다는 이야기도 봤던 터라 주제 자체가 주는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는데 그럼에도 이 소설은 유쾌하다. 어떻게 인지증이란 주제로 이런 유쾌한 소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한국인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 놀라웠던 것 같다.

사실 인지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로 인해 곁에 있는 어머니가 제일 힘든 상황에서 아버지가 사라질 때마다 급한 맘에 딸들과의 전화 통화가 자주 등장하는데 다급한 감정들이 티격태격하는 대화로 이어지는 와중에도 무거움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딸들은 아버지를 걱정하기는 하지만 애를 태우며 속상해하는 등의 모습은 지나치지 않는다. 역시 정서가 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텐데 나는 그런 모습들이 오히려 더 좋게 보였던 것 같다.

이런 글을 보면 누군가는 직접 겪어보지 못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같은 상황에서 가족이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건 또 다른 면에서는 한번 고려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던 건 소설 속에서는 인지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 쇼헤이 곁에 아내인 요코와 세 딸들이 있지만 나의 경우엔 부모를 책임질 사람이 나밖에 없기에 앞으로 발생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는데 그래서 인지증 환자 이야기에도 이런 유쾌함이 있다는 것에 뭔가 깨달음을 얻게 됐던 것 같다.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는 것은 물론 가족과 함께했던 기억도 잃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도움은커녕 폐만 끼칠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라도 자신들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를 기억하고 오히려 오래전 기억을 꺼내 아버지를 다시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따뜻하고 잔잔하게 다가왔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해 더 기대를 모았던 영화 소식을 들었지만 원작을 읽은 후 보려고 아껴두었는데 원작이 예상외로 너무 재밌어서 영화는 또 얼마나 잔잔한 감동을 줄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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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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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 라이팅 클럽 / 강영숙 장편소설

중요한 건 의지가 아니라 테크닉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테크닉이 부족했다.

그런 걸 키워주는 약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 내 몸을 팔아서라도

그 약을 사 먹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인생은 좀 더 흥미진진해졌을지도 모른다.

친모가 있었지만 얼굴 한번 본 적 없이 중2가 되도록 친엄마란 사람의 친구 집에서 객식구처럼 자란 영인.

친모의 친구란 사람들이 영인에게 모질게 대하진 않았지만 영인은 그들 속에 속하지 못한 채 고독과 외로움을 안고 자라난다.

그리고 중2가 되던 해 친모라는 김작가가 찾아와 영인과 함께 살기 시작한다.

중2까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엄마란 소릴 차마 할 수 없었던 영인은 김작가라는 호칭으로 그녀를 대했고 영인을 낳은 엄마지만 이웃집 아줌마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녀의 태도는 십몇 년 만에 만난 모녀 상봉의 애틋함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들 모녀가 자리를 잡은 계동의 글쓰기 교실, 이름도 없는 문예지 당선을 부풀리며 김작가는 아이들을 상대로 글쓰기 연습을 시작하고 조금씩 계동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십몇 년 만에 영인과 함께 살게 된 김작가는 영인에게 밥을 차려주거나 옷을 사주는 등의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애틋해도 모자람이 없을 테지만 김작가는 사회통념에 갇힌 모성애에서 크게 벗어나는 인물이다. 왜 엄마는 다른 엄마와 다를까란 생각에 외로움과 자기 연민이 온몸을 강타했던 영인조차 점점 김작가와 함께 사는 삶에서 모성애로 점철된 엄마의 이미지를 버리기 시작한다. 그런 영인의 결핍은 이성에게 향하지만 누군가 다가오기엔 쉽지 않은 외모 때문에 남자와의 연애조차 쉽지 않다. 그리고 영인은 획기적이게도 남자가 아니라면 여자에게서 만족함을 찾기 시작하고 학교에서 날라리로 소문난 J에게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동성 친구인 J에게조차 관심을 못 받은 영인, 그리고 나타난 아담한 체구의 K는 영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고 그녀들의 관계는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던 와중에 김작가의 글쓰기 교실에 근처 고등학교 선생님인 장이 등장하면서 영인의 관심은 장에게 쏠리게 되고 그에게 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전달하지만 그런 영인의 감정과 상관없이 장은 김작가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저 누군가 자신의 곁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지만 그런 일은 영인에게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고 김작가 또한 자신이 좋아하던 장과 한살림을 차리게 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의 장벽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그런 영인의 결핍은 글쓰기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고 20대와 30대를 지나며 글쓰기가 그녀에게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여준다.

문학작품을 읽는 행위는 침대 위에 엎드려 다디단 과자를 먹으며,

전쟁에 참가해 팔다리가 잘리는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쓴 어느 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백열등을 매단 시장 골목 안은 튜브 속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슬리퍼를 끌고 뒷짐을 진 채 질척거리는 시장 바닥을 천천히 걸었다.

평생 시장 골목을 방황할 것 같은 느낌,

더럽고 냄새나는 물고기 내장 속 같은 현실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불안했다.

묘사는 배워서 할 수도 있어.

작가의 사고 과정이 소설에 드러나려면 공부를 해야 해.

많이 읽어야 한다구.

글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줄 모를 거야.

작가들이 진실한 문장 하나를 가지려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는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라이팅 클럽>은 영인과 김작가를 통해 보여준다.

기가 막힌 작품 하나를 뽑아냈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절묘한 표현이 생각났어도 그것이 뱅뱅 돌기만 할 뿐 좀처럼 문장으로 탄생하지 못할 땐 얼마나 분통이 터질까.

글을 쓰기 위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단 한 문장도 뽑아내지 못했다는 작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건 그만큼 글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영인이 자신이 쓴 소설을 유명한 작가에게 보여줬을 때 작가가 했던 말은 글 쓰는 것이, 작가란 직업이 겉으로 보이는 우아함, 고상함과는 얼마나 다른지 잘 보여준다.

어쩌면 글쓰기란 천직이 아니라 숙명이고 오기이며 자신의 과업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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