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호형사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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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자신이 소설속 등장인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이가 있다니, 넌 대체 누구냐. 경부가 사건 설명을 하다가 의자를 돌려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도 있으니, 가만히 앉아 책장만 넘기던 독자들은 긴장하며 책을 읽어야겠다. 쓰쓰이 야스타카는 미스터리 소설을 쓰면서 이것, 저것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건의 흐름을 섞어 놓아 독자들이 편리한대로 읽으라 한다거나, 등장인물들이 동시간에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쓰면 어떨까 상상을 넘어서 이를 행동으로 옮기니 작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독자들은 그저 작가가 하는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쓰쓰이 야스타카는 작가라기 보다는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 같다.

 

네 편의 단편들의 형식은 비슷하다. 돈이 많은 아버지를 둔 다이스케는 인력 부족과 자금부족으로 사건 해결의 어려움을 겪는 동료 경찰들에게 자금을 지원한다. 온갖 나쁜 짓으로, 심지어는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던 다이스케의 아버지 간베 기쿠에몬은 아들이 자신의 돈을 정의롭게 쓰는 것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단편마다 사건은 다르지만 각 단편들의 첫 시작은 대개 이렇게 비슷하다. 간베 기쿠에몬의 비서이며 다이스케를 사랑하는 스즈에가 사건마다 중요 인물로 도움을 주는 설정 또한 빠지지 않는다. 다이스케는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한 사건에 노출이 된다는 것이 불안하지만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성격도 좋고,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그는 실력도 출중한 경찰이라 그녀를 절대 위험속에 빠뜨리지 않는다.

 

책을 읽기 전 '부호형사'의 내용이 실력이 없어 돈으로 사건을 해결해 버리는 유쾌한 이야기일 것이라 예측했었는데 조심스럽게 동료 경찰들에게 자금력을 동원해 사건 해결을 이렇게, 저렇게 해 보자고 의견을 제시하는 돈 많은 형사의 이야기였다. 실력도 뛰어나고 돈도 많은 다이스케가 나서니 해결 못하는 사건이 없다. 중소기업 회사의 사장이 밀실 살인으로 죽으니 회사를 떡 하니 하나 차려서 범인이 다시 살인 사건을 저지르게 유도하질 않나, 거기다 그 회사를 또 크게 키우내고, 유괴당한 아이를 위해 유괴범에게 넘길 돈을 직접 마련해 빌려 주고, 야쿠자들을 감시하려면 너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하여 야쿠자들이 숙박할 장소로 아버지가 오너로 있는 호텔 전체를 제공하질 않나, 그야말로 부호형사 다이스케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렇게 아버지 못지 않은 재력과 능력을 보여주며 사건을 해결하지만 사랑하는 연인 스즈에 앞에서는 고백 한 번 제대로 못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다이스케의 아버지가 부호형사가 되었다면 이야기는 더 재밌었을 것이다. 다이스케 혼자서는 사건을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에게 이런, 저런 도움을 받아 처리했기에 사실 간베 기쿠에몬도 사건의 핵심에서 활약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간베 기쿠에몬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조건으로 사건에 뛰어 들었다면 감정적으로 잔인하게 처리하거나 결과가 달라지는 사건도 있었겠지만 다이스케 보다는 훨씬 더 유쾌하게 사건을 해결했을 것이라는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호형사, 라는 소재로 유쾌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독자들을 유혹하고 있으니 독자들을 더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시간이 없어 몇 몇 등장인물의 활약을 들려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며 독자들을 약올리는 것은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글을 쓰다 보니 화가 나는군. 하루 빨리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부호형사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보여주길 바란다. 생략한 이야기들 모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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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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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있나. 용의자로 의심을 받고 있는 류헤이가 그렇고 류헤이의 전 매형인 탐정 우카이 모리오가 그렇다. 탐정 우카이 모리오야 밀실 살인사건을 풀고 싶다는 의욕에서 그랬다고 치자, 그런데 류헤이 넌 왜 이렇게 한가한거냐. 선배 모로가 죽었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지. 증거를 없애고, 지문을 지우고 탐정인 전 매형 우카이 모리오를 찾아가다니, 이 사건이 해결되었으니 망정이지 류헤이, 네가 딱 이번 살인사건들의 범인 같이 보이거든? 진짜 현실에서였다면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서 썩게 되었을 거다. 아, 내가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이러지. 사람이 죽었는데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 뒀다는 게 화가 나서 그런다. 모로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모두 풀리니 류헤이도 피해자라는 생각보다는 그가 경찰서에 바로 신고하지 않은 것에 더 화가 난다.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리 밀실 사건이라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당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탐정과 함께 모로의 집으로 다시 찾아가 모로가 어떻게 죽었는지 추리만 하고 있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는 류헤이의 전 여자친구 곤노 유키와 모로 고사쿠가 죽은 지 삼일 째 되는 날 사건이 해결되어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서에 가기 보단 스스로 사건을 해결해 보겠다고 탐정을 찾아나선 류헤이로 인해 긴장감이 떨어져 사건은 지루하게 전개된다. 물론 화자는 류헤이가 겪은 일과,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스나가와 경부, 시키 형사의 동선이 겹쳐져 지루할 수 있다고 미리 말해두긴 했지만 영화 감독 같이 설명하는 화자 덕택에 조금 지루한 정도는 참아줄 수 있는 것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사건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탐정 덕분에 더 지루해졌다.

 

두 살인 사건이 해결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있다면 스나가와 경부일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해결될 수 없는 사건이었고, 우연에 기대어 우카이 모리오가 모로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내면서 이 사건은 완벽하게 해결된다. 시키 형사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류헤이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을 것이다. 스나가와 경부가 평소에 해파리 숫자나 헤아리고 있다고 해도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데 탁월한 실력이 있다고 하니 자질이 떨어지는 경찰은 아닌 셈이다.

 

모로가 밀실에서 살해 되었기에 그간 내출혈 밀실설, 창 밀실설, 니모미야 아케미 범인설까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가설들이 많았다. 그동안 내가 생각해 놓은 추리를 내어 놓자면 '살인자가 모로의 집에 계속 있었을 것이다'인데, 류헤이가 집안 곳곳을 찾아 보았기에 처음부터 나의 가설은 바로 깨진다. 모로의 시체를 보고 기절한 류헤이가 충격을 받아 단순 기절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류헤이를 기절시켰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없어 보여서 나는 계속 류헤이가 모로의 집을 나설 때까지도 범인이 모로의 집에 있었다는 가설을 포기하지 않는다. 뭐 이 가설을 스나가와 경부가 확실히 깨주긴 했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현실에서라면 이렇게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져 사건이 해결되진 않는다. 영화나 소설속이기에 가능한 얘기란 말이다. 소설속이니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수긍할 수 있어 류헤이의 행동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살인 사건이 류헤이와 우카이 모리오때문에 가벼워진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금세 잊혀지게 되니까. 가장 큰 공포는 내가 류헤이처럼 살인 사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뭐 이런 공포를 찾아다니며 느낄 필요는 없겠지. 그저 이렇게 밀실 사건 트릭을 풀면서 나와는 상관 없는 일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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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 다이어리 - 나만의 아지트를 꿈꾸는 청춘들을 위한 카툰 에세이
다카기 나오코 글.그림, 박승희 옮김 / 인디고(글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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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살아보고 싶다는 것은 결혼 전에 몇 번 생각해 본적 있는데 결혼 후에는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지금은 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미혼일 때 부모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 했으나 잠깐동안의 자유로움을 위해 외로움을 감내하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 더 컸었다. 도쿄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해 무작정 상경했다는 '독립생활 다이어리'의 저자 다카기 나오코처럼 확고한 목표와 꿈이 있다면 아무리 부모님이 반대해도 자신의 주장을 밀어 붙일만 하다. 그러나 아주 아주 강경하게 반대하는 부모님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홀로 생활할 때 아프면 제일 서럽다. 돈이 떨어져서 배가 고파도 서럽겠지만 아플 때가 제일 서럽다. 그런데 이건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마찬가지로 아플 때 똑같이 서럽다. 가족이 옆에 있으면 아프니까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밥을 챙겨주거나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지만 역시 아프다는 것은 정말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12년째 독립 생활을 해 오신 다카기 나오코, 이제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 자신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홀로 살아가는 데 문제점은 몇 가지 있을 것이다. 아프면 여전히 외롭지? 그지? 아, 이러니 꼭 상처를 후벼 파는 것 같군. 미안.

 

'독립생활 다이어리'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애를 엿볼 수 있는데 저자가 꿋꿋하게 꿈을 향해 나아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보다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더 부각되는 책이다. 일기장 같아서 비밀스러운 부분을 엿보는 설레임을 느끼게 하기 보다 처절한 모습을 볼 때면 웃음이 나는 부분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슬픈 모습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의 여부를 떠나 그녀가 만들어 놓은 음식은 왜 이렇게 먹고 싶은 것인지.

 

혼자 살아가면 먹는 것이 가장 문제다.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예쁘게 만든 음식을 앞에 두고 우아하게 먹는 상상을 하며 독립을 꿈꾸었겠지만 혼자서 끼니 해결하며 사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 질보다는 양을 따지게 되고 좀 더 싼 재료를 선호해서 거기에 맞춰 음식을 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던 음식 따윈 머릿속에서나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좋아해서 사온 음식이 상했을 때를 상상해 보라. 저자가 혼자 산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통기한 지난 멸치들 보며 울었다. 훗날 이 기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겠지만 그 때 상황만큼은 독자인 나에게도 슬픔이 전해져 올 정도로 그 마음이 처절하게 느껴진다. "수많은 멸치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다니~!!"하며 절규하는 모습이라니, 이건 전쟁터에서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그렇다. 독립생활이란 이런 것이다. 엄마가 해 주는 음식이 그립고, 먹고 싶어서 사 놓은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억울하고 분한 그 심정, 독립해서 살아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나도 그 심정 모르지. 혼자 안살아 봐서. 그냥 추측할 뿐.

 

'독립생활 다이어리'는 독립해서 홀로 살아가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다카기 나오코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우습게 그리긴 했지만 혼자서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꿋꿋함과 용기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외로울지라도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리운 게 있으면 그리워 하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 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겨낸다. 역시 젊다는 건 좋다. 24살이니 이렇게 소소하게 살아가지, 30대, 40대라면 너무 우중충할 것이다. 거기다 쓸쓸해 보일 것이고. 왜 갑자기 투덜거리냐고?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하니까 부러워서 말이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어 하지 못했거든. 20대에도 도저히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 청춘이란 참 아름다워. 멋지게 만든 여행서 못지 않게 자신의 삶을 이렇게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해 낼까. 좋아하는 일고 꿈이 있다면 못해낼 게 없지. 그래서 그녀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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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역사, 박물관에 간 명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술관에 간 역사 박물관에 간 명화 - 명화가 된 역사의 명장면 이야기
박수현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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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책 제목이 길어 책 표지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가만히 책 표지를 바라보며 읊조려 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래야 이 책을 오롯이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간......역사 박물관에 간.....명화" 아, 이제서야 이 책 속에 담긴 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었구나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그래, 원래 미술관에는 명화가 있고, 박물관에는 역사가 있지. 그런데 이렇게 거꾸로 표현을 해 놓으니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구나. 우리들 삶에 역사가 녹아 있듯이 미술 작품마다 사람들의 삶이 더 큰 의미의 역사까지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작품들 중에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솔직히 생소한 것들더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알고 있는 역사라도 그림을 통해 배우니 그 느낌이 새롭다. 사람들이 살아온 환경은 물론 그 시대의 그림을 통해 그 때 유행한 미술 기법들까지 알 수 있으니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러나 대작들 중 대부분의 작품들이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의외다. 슬픔, 원통함, 비극적인 것을 표현한 그림들이 많은데 특히 전쟁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3천 년 전 트로이의 비극'편에서는 아킬레우스와 대결을 했지만 싸움에 져서 죽게 된 헥토르와 그의 부인 안드로마케, 아들 아스티아낙스가 이 전쟁으로 얼마나 큰 슬픔을 겪게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야 당연히 슬플텐데 왜 이제서야 알았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승자인 아킬레우스만을 기억했었다.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아스티아낙스의 손들이 닿아 있는 그림은 헥토르의 죽음으로 얼마나 큰 슬픔에 빠졌는지 절절한 느낌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그나마 내가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정도 아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누가 자세하게 해 주겠나. 직접 눈으로 봤다면 "와, 잘 그렸다" 하고 지나간 후 잊어버리고 말 것을, 역시 아는만큼 보이는 것이다. 이제 이 그림을 다시 본다면 다른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헥토르와 안드로마케'를 표현한 다른 작품인 이탈리아의 화가 키리코의 그림은 같은 헥토르와 안드로마케를 그리고 있어도 앞서 설명한 그림과 느낌이 다르다. 미래를 표현한 것 같다고 할까. 그냥 봐서는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인지 알 수도 없다. 설명해주니 그런갑다 한다. 꼭 로보트를 보는 듯 하지만 자세히 설명하는 글을 보니 얼굴에 반쯤 드리워진 그림자를 통해 그들의 슬픔이 전해져 와, 애틋해진다. 그림으로 어떻게 감정을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다.  

 

안토니우스를 만난 클레오파트라가 진주 귀고리 하나를 빼 식초에 녹여 마신 그림 "클레오파트라의 연회"는 역사를 통해 이를 알고 있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내가 모르니 다들 모른다 생각하는 거 맞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는 이들이 많으나 이집트의 부유함을 과시하고 자신과 손을 잡자는 뜻을 담아 진주 귀고리 하나를 식초에 녹여 마셨다는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는 이 그림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집트를 강하게 만들고 싶었던 한 여인을 잘 표현한 그림이라고 한다.

 

알트도르퍼의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 전투'는 어마어마한 수의 군사들을 그려 놓아 그 장엄함에 놀라게 되는데 화가의 정성이 대단해 보인다. 군사들의 복색, 그들이 들고 있는 창, 깃발 등을 자세하게 그려 놓아 그 방대함에 더 놀라게 된다. 고대 도시 폼페이에 묻혀 있던 작품 '이수스 전투'와 다르게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 전투'는 색감의 선명함과 정교한 기법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날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150만개의 작은 타일 조각을 붙여 만든 모자이크 작품인 '이수스 전투'는 2000년이 지난 후에야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이렇듯 나의 기억속에 강렬하게 자리잡은 작품들이 대부분 전쟁을 표현한 그림들이다.

 

"미술관에 간 역사 박물관에 간 명화'에는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등장해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차다. 불면 날아갈까 호흡조차 멈추고 대작들을 감상하고 있으니 내가 아주 하찮게 느껴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림 속에 표현된 것들만이 역사는 아닐 것인데 왜 이렇게 나의 삶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발품을 팔아야만이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한 작품만이 아니라 같은 주제를 표현한 다른 화가의 그림도 함께 볼 수 있어 귀한 선물을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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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3 아서 왕 연대기 3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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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계로 떠난 이들을 뒤로한 채 산쉼 주교가 있는 수도원에서 데르벨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고통스런 기억이며 왕이며 평생의 친구였던 아서에 대한 이야기다. 현존하는 사람들에게 '아서'는 영웅으로 기억되며 지금까지도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으나 아서의 곁에서 목숨을 걸고 적들을 베어 넘겼던 데르벨에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케인윈이 준 금 브로치 뿐이다. 이마저도 산쉼 주교의 눈에 띈다면 당장 빼앗기고 말 물건이다. 금 브로치를 제외하고는 데르벨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죽기 전에 아서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글이 온전하게 세상에 빛을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그레인의 명으로 다비드가 멋지게 각색할 것이므로. 다행한 일이라면 조그만 땅을 일구며 가족들과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했던 아서에 대한 이야기는 이그레인을 제외하고 우리들만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모르는 산쉼 주교가 데르벨이 아서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지 계속 의심하지만 알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우리들은 데르벨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으로 왜 데르벨이 선택되었을까. 색슨족이지만 브리튼 사람이 되어 서약에 따라 브리튼을 수호하게 된 데르벨, 그 자신은 평범한 전사였으나 아서와 약혼했던 포위스의 공주 케인윈과 부부가 된 행운의 사나이다. 아서 못지 않게 굴곡 많은 인생을 산 데르벨이기에 그냥 역사 속에 묻히기엔 아까운 존재이긴 하지만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출생의 비밀 같은게 드러나는 것은 좀 의외였다. 앵글인의 왕 '엘레'가 아버지라니,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칼을 맞대고 싸웠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서늘하게 했을까. 케인윈이 데르벨을 '왕자'라고 부르니 갑자기 동화 속처럼 왕자와 공주가 부부가 된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색슨족과 브리튼족 사이에 놓인 데르벨의 처지는 꽤 외로웠을 것이다. 엘레 곁에서 자랐다면 아서의 반대편에서 그에게 칼 끝을 내밀었을테지만 운명은 그를 아서의 곁에서 아버지에게 칼 끝을 겨누게 만든다. 아니 아서가 데르벨을 선택하고, 곁에 둔 것이라 하는 게 맞겠으나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홀로 과거를 회상하며 아서의 이야기를 쓰는 그의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산쉼 주교 밑에 있으니 더 외로워 보인다.

 

모드레드가 아닌 아서가 둠노니아의 왕좌에 앉았다면 지금과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산쉼 주교가 모드레드 왕을 부추겨 아서와 데르벨을 위험속에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데르벨의 딸 디안이 죽지 않고 가족 곁에서 좀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모드레드 왕에 대한 서약, 둠노니아를 지키겠다는 서약, 서약, 서약, 서약. 그놈의 서약을 지키자고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트리스탄과 이죌트 역시 아서가 그렇게나 강조하는 서약때문에 희생되었지만 작위 없는 유서의 서자 아서에게는 왕좌에 앉아야겠다는 욕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법이요, 정의였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아서에게 진정 왕좌에 대한 욕심이 없었을까 의심이 가지만 귀니비어를 사랑한 그에게 다른 마음은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권력과 왕좌에 욕심을 낸 귀니비어가 아서를 버리고 란슬롯을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왕'의 자리때문이었으니까.

 

멀린과 니무에가 브리튼의 열세 가지 보물을 모아 신들을 소환했다면 브리튼에 평화가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멀린의 말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브리튼 사람들에게 다른 삶이 주어졌을 것이다. 아니 아서의 삶이 달라졌을지도. 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마이 뒨에서의 의식을 끝까지 마쳤다면 이교도들에게 희망이라도 주었을 것인데 의식을 깨뜨린 아서는 기독교도들뿐 아니라 이교도들에게까지 적이 되었다. 브리튼 보물을 향한 니무에의 광기, 모드레드의 음모, 색슨족과의 전투 등 이 모든 것이 아서가 더이상 소박한 꿈마저 꿀 수 없게 해 버렸다. 전투에서는 물러섬이 없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여 서약을 지키고자 노력 했으며 목숨을 바쳐 함께 싸운 동료들을 아낀 아서, 이제 역사속에서 그 이름을 남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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