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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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부터 비가 많이 온다. '온다'는 표현보다 퍼붓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빗물이 차고 쪽으로 난 지붕을 쉬지도 않고 때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외할머니 댁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빗물이 양철 지붕을 때리는 소리 때문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한여름의 장마 기간에 그 허술한 집이 비바람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모르겠다.


  아파트에 살 적에는 비가 많이 와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생각도 많아지지 않았다. 빗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부실 공사로 짓는다고 해도 튼튼하기 그지없는 집이었다. 우리 가족의 형편처럼 약한 집에 들어앉아 있으니 빗소리도 잘 들리고 생각도 많아진다. 나는 얼마 전부터 황인찬 시인의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읽었다. 


  시집 중간에 「죄송한 마음」이라는 시가 있다. 오늘 같은 날에 읽으니 명확하게 잘 읽히는 시다. 사람이 슬픔 속에 들어 앉아 있다가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 속에서 슬픔은 불어난다.(빗소리의 한가운데 들어앉아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듯이)  시에서는 물에 불린 미역이나 흰 쌀이 나온다. 그리고 시인은 그것으로 미역국을 만들고, 흰 쌀밥을 지어 먹는다. 사람은 불어난 슬픔을 먹고 더 슬퍼지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 슬픔도 서서히 식는다. 미역국이나 흰 쌀밥도 따뜻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식듯이. 


  슬픔이 식었을 때엔 슬픔을 느끼기가 어렵고 생각도 많이 정리가 된 상태다. 당신을 떠올릴 때 들던 슬픔이나 생각 따위가 마치 뜨거운 미역국과 흰 쌀밥이 식듯이 식어버렸을 때 시인은 죄송하다는 표현을 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쉽고, 또 사람의 인생이 떠오르기도 한다. 온기를 가지고 태어나 사랑을 하는 순간에 몹시 뜨거워지고 열심히 움직일 때(살 때)에도 뜨거워진다. 


 그러다가 나중엔 온기를 잃는다. 온기를 가졌다가 온기를 잃는 과정이 사람의 삶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죄송한 마음」이라는 시는 읽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긴 해도 이 시에서는 찬란한 생애보다 슬픈 생애를 떠올리기가 더 쉽다고 생각한다. 슬픔이 계속 불어나는 이미지가 연상 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러 편의 시를 두고 리뷰를 쓸까 했는데, 좋은 시가 많아서 리뷰도 너무 길어질 것 같고, 또 이 시 한 편만 해도 충분히 좋기 때문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어졌다. 음, 다른 독자 분들도 비가 많이 오는 날이나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이 시를 읽어 보시면 좋겠다. 그런 날에 읽기에 제격인 시다.


  그리고 이전에 읽은 황인찬 시인의 시집에서 동성애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를 읽었을 때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하고 자문한 적이 있었는데,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읽고 나니 잘못 읽은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은 육체를 가진 무엇에라도 줘버리면 된다는 시인의 생각대로 라면 동성애는 사랑의 한 방식일 뿐이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죄가 아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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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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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은 고향이 있으나 온통 아픈 기억 뿐인 고향을 가지고 있고, '자흔'은 고아이며 정확한 고향을 모른다. 자흔은 어려서부터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살았다. 그녀에게 과연 정 붙일 만한 곳과 사람이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정선의 내면에는 고통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자흔이 기댈 곳이 없었다. 정선에게 있어서 집은 쉴 틈도 없이 쓸고 닦아야만 하는 곳이고, 자흔에겐 진득하게 붙어있을 정도로 정을 붙일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둠의 사육제」는 냉혹한 서울살이를 하면서 스스로 척박하고 냉정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주인공의 심리를 세심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기가 제일 힘들었다. 지독하게 아픈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자기 집 하나 장만할 꿈을 가지고 있던 '나'는 친한 언니에게서 금전적으로 상당한 손해를 입었고, 인생에게 등을 돌려버림으로써 마음은 한없이 식어 갔다. 그런 그녀가 친척이 사는 아파트에 머물다가 만난 '명환'이란 사내에겐 다리가 한쪽 없었다.


  교통사고 때문에 아내와 아이, 그리고 자신의 다리 한쪽을 잃은 사내에겐 나와 달리 집이 있었다. 그것도 피의자가 준 위로금으로 마련한 집이었으며, 피의자의 가족이 사는 곳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집이었다. 그는 피의자와 그의 가족 곁을 맴돌며 그들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가했다. 어떤 협박도 없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는 비로소 집과 위로금 따위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한 뒤 주인공에게 집을 양도하려고 마음 먹는다. 나는 그를 미친놈 취급한다. 


  집이 없어서 친척 집의 베란다에서 자는 여자와 널찍한 집이 있으나 사랑하는 가족이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 소설에서 명환은 요즘 젊은이들이 잘 쓰지 않는 말투를 쓴다. 말 끝마다 '~했소.'라는 그의 말은 쓸쓸함과 씁쓸함을 더욱 짙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겼다. 「야간열차」에서 '동걸'은 무거운 책임감을 덮어 씌우는 집에서 탈출할 꿈을 은밀히 꾸며 열심히 생활하는 자다. 그에겐 생계를 책임져야 할 동생들과 어머니가 있다. 


  그와 얼굴이 똑 닮은 동생인 '동주'는 학창 시절 돈을 벌러 나섰다가 몸을 크게 다쳐 장애를 입었다. 동주는 한 자리에 누워서 일어설 수도 없는 몸이었다. 동걸에게는 언제든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나, '나'에게는 떠나는 일과 머무르는 일이 매한가지였다.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에서 멀리 벗어나거나 전혀 떠오르지 않는 곳으로 떠났을 때 불면증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있다. '나'는 형수와 함께 머무는 집이 아닌 동걸의 집에서 비로소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동걸은 아직 떠나지 못했으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질주」에는 이런 문장이 실렸다. <저 병동의 팔층에 어머니가 누워 있으리라. 인규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인생은 그의 상처 난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의 운명도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본문 225쪽) 나는 미신이나 사주 팔자, 민간신앙, 풍수지리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어쩌다 한 번씩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인터넷에 나와 있던 손금에 따른 사람의 성향이나 운세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내가 정말 그렇게 될까?'하고 질문하기도 한다. 안 믿는다고 여기면서도 그쪽에 대한 정보를 들을 때 잠시 귀가 솔깃해진다. 내가 믿든, 안 믿든 그런 것들이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여 떠도는 것 같다. 「진달래 능선」에서 '정환'에게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툭하면 학대를 하는 아버지가 있는 집은 집이 아니었고, 딸아이가 심장병을 앓다가 일찍 세상을 뜨고 남은 처자식마저 떠나가 버린 뒤의 집은 '황씨'에게 있어서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집 아닌 집들이 있다. 그래서 집을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집을 그리워할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붉은 닻」은 한강 소설가의 데뷔작이다. '동식'의 아버지도 동생인 '동영'도 집안에 가만히 붙어 앉아 있지를 못하고 나다녔다. 아버지는 술에 절어 집에 들어오곤 했다. 동식은 아버지의 혼령이라도 찾아올 것만 같은 집(문방구 안쪽)과 동네를 떠나길 간절히 원했으나, 동영이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과연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자문하게 된다. 


  동식은 아버지, 동생과는 다르게 귀소 본능이 유난히 깊었는데, 황혼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만 봐도 불안할 정도였다. 핏줄이면서도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 속에 전혀 다른 꿈을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동식의 집. 마음 붙일 구석이 없는 공간, 잠을 편히 잘 수 없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지독하게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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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수첩 김승옥 소설전집 2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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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렸는데 마지막 두 편은 미완 소설이다. 완성되지 않은 소설에 대한 감상을 적기가 두려워서 앞에 세 편에 대한 감상만 적는다. 김승옥 소설가라면 그를 팬이라고 자처하는 독자도 많고 소설가들 사이에서도 존경 받는 분인 모양이다. 나도 「무진기행」을 참으로 좋아한다. 정말 좋아하는 소설을 떠올리면 몸속이 간지러운 느낌을 받는데 왜 그럴까? 몸속이 간지러운 느낌이 없으면 그 소설은 읽고 나서 그저 그랬다고 기억하게 된다. 


  첫 번째 단편 소설인 「환상수첩」에서는 일생을 걸고 목숨을 걸 단 하나의 얼굴을 갈구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서울대 재학생이다. 김승옥 소설가도 서울대 졸업생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얼굴이란 가면이고 자신의 생활 형태이며 역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자체로 살아지는 것이고 나를 살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감상을 적기 전에 잠깐 떠오르기로는 얼굴이란 남 앞에서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는 내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뭐, 꼭 자신 있다고 까지 할 수 없을지라도 그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모습. 그런데 주인공인 '나'는 문학을 하는 자신의 모습도 상상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서기니 대의원이니 교수니 비행사니, 뭔가 딱 내세울만한 자기 얼굴을 찾기가 어려워서 방황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대학교 학생이면서 그런 걱정을 하는 거냐고, 남의 속도 모르면서 괜히 하고 싶어진다.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 졸업생이면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것만 같은데. 


  '나'는 그러나 무슨 직업을 택해서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보다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게, 깊게 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친구 중에서는 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서 돈을 벌고 착실히 살려는 마음을 먹었다가 뜻밖의 사건으로 목숨을 빼앗긴 이가 있다. 아, '윤수'다. 윤수는 자기의 얼굴을 방황 끝에 찾은 셈이었다. 하지만 신은 야속하기도 하시지. 이 소설은 참으로 우울하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우울함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단 명이 있는 우울함이다. 


  두 번째 단편 소설인 「다산성」이나 세 번째 단편 소설인 「재룡이」를 읽고 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복잡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무어라 정의내릴 수 있는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다산성」에서 어느 연극 연출가는 토끼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잘만 하면 연극에서 토끼를 연기자로도 써먹을 수가 있다고. 소설이든, 연극이든 그것을 읽고 보는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읽고 보게 된다. 


  「재룡이」에서는 전쟁을 겪고 난 이후 순박한 청년에서 백팔십도 인간성이 뒤바뀌어버린 '재룡이'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사람의 성질이라는 것이 주변 환경이 확 바뀌지 않으면 쉽사리 바뀌지 않는데 괴물 같은 시국이 엉망이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을 소설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물론 전쟁이나 무서운 사상이 휩쓸고 가는 시국 정도는 되어야 한다. 마을에서 무슨 싸움이 일어났다고 해서 사람의 성질까지 바뀌진 않는다. '재룡이'가 군인이 되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자기 마을에서 순박함을 그다지 잃지 않고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인간성이 바뀐 '재룡이'의 삶의 방식은 어떻게 변했나? 부지런함에서 게으름으로, 순박함을 잃지 않은 행동들이 천박하고 경박한 행동들로 바뀌었다. '재룡이'의 어머니는 그 점이 지독하게도 슬프다. 나 같아도 그렇겠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가 낯설고 한편으로 무섭기도 하겠다. 예전의 모습이 많이 그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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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1~3 세트 - 전3권 (무선)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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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자의 불확정성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이 확정적이라고 가정할 때, 초기 조건을 안다면 그 후 모든 시간 단면의 상태를 계산해낼 수 있지. 만약 외계의 과학자가 수십억 년 전 지구의 모든 데이터를 갖고 있다면 그는 오늘날 이 사막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측해낼 수 있을까?"

  Ice가 대답했다. 

  "당연히 그럴 수 없죠. 이 사막의 존재는 지구가 자연적으로 진화한 결과가 아니니까요. 사막화를 일으킨 건 인류 문명이고 문명의 행위는 물리학의 법칙으로는 예측할 수 없잖아요."

  "좋아. 그런 우리와 우리 동료들은 어째서 물리학의 법칙만으로 현재 우주의 상태를 해석하고 우주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거지?"

  Ice는 깜짝 놀랐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물리학의 범주를 넘어선 일이 아닐까요? 물리학의 목표는 우주의 기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잖아요. 인류가 지구를 사막화시킨 건 물리학으로 계산해낼 수 없지만 역시 법칙에 따라 진행되었겠죠. 우주의 법칙은 영원히 불변하니까." (『삼체 3부 - 사신의 영생』中)



  『삼체』 마지막 권에 이런 대화가 실렸다. 과학자들의 이 대화를 통해서 독자는 이 책이, 그리고 앞으로 인류가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지 예측할 수 있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이 가능하면서도 모든 걸 제대로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주는 그야말로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영역이라는 게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건 결코 시시한 말이 아니다. 


  이야기의 막바지에 나오는 '질량의 유실'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은 우주에 있는 고도의 문명이 소우주를 창조하면 대우주의 질량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폐쇄 상태의 우주가 열리고 무한히 팽창함을 뜻한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그야말로 우주가 다같이 영원한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말이다. 이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면 우주에는 빅크런치가 일어나지 못한다. 


  빅크런치는 우주 탄생의 대폭발(빅뱅)과 반대로 온 우주가 블랙홀의 특이점과 같이 한 점으로 축소되면서 종말한다는 가설이다. 한 마디로 빅크런치가 있어야만 다음에 우주의 재탄생이 일어날 수 있다. 태양계의 인류는 먼 우주에 존재하는 고도의 문명(삼체 문명도 아니다.) 때문에 멸망하고 우주를 항해하던 은하계의 인류만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게 이 책의 마지막 내용이다. 윈톈밍에게서 별을 선물받았던 청신은 삼체 문명이 만든 소우주에서 관이판과 함께 삶을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소우주의 창조가 대우주의 영원한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관이판과 함께 소우주에서의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게 아니라 다시 대우주로 돌아가 소우주가 대우주에서 가져온 물질을 돌려주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어떤 삶의 방향(행동, 선택)이 엄청난 긍정의 결과 혹은 반대로 엄청난 부정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명의 인간이든, 집단이든 인간의 선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선택이 후세의 환경과 삶을 변화시킨다. 


  인간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드넓은 우주에서 아주 미미한 존재이지만 삼체나, 다른 고도의 문명만큼 혹은 그들보다 더 발전하게 되면 우주의 이야기를 새로 써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그 누가 제대로 예측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지자'조차도 해낼 수 없었던 그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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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3부 : 사신의 영생 - 완결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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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지구에 사는 인류는 문명이 진화하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안락한 삶, 더 자유로운 삶, 더 부유한 삶에 대한 욕망이 커졌다. 원시인이 생존, 그러니까 살아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삶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현대 사회의 인간에겐 더욱 다양한 삶의 목적이 있다. 결국 생존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임에도 인간은 자주 그리고 오랜 시간 그런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당장 먹을 음식이 없어서, 잠 잘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어떤 존재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태라서 생존의 가치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적어졌다. (물론 우리는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런 사실마저도 잊고는 한다.)


  그런데 평온하게 지내던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류츠신의 소설인 『삼체』에서 그 존재는 '삼체'라는 행성에 사는 '삼체인'들로 드러난다. 항성인 세 개의 태양을 돌면서 극한의 자연환경을 견뎌내며 진화한 삼체인은 지구인보다 막강한 힘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 언젠가 항성 때문에 자신들의 별이 멸망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환경이 삼체보다 훨씬 나은 지구를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당연히 인류는 엄청난 위기에 놓이게 된다. 삼체가 지구인들이 물방울이라고 부르게 될 탐측기를 지구의 우주 함대와 지구로 각각 보내고 이후에 전 인류가 삼체 때문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들에 놓이게 되면서 인류는 비로소 절실하게 느낀다. 


  바로 생존의 가치를 말이다. 극한 중에서도 극한의 상황이 살아있음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만든다. 공포와 혼돈, 외로움 속에서 방황하며 지구인들은 깨닫는다. 삶은 끊임없이 힘들지만 분명 소중한 것이라고. 인류는 앞으로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방황하고 절망한다. 그렇지만 아무도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인류는 우주에서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 갈까? 류츠신의 상상력이 바로 그 이야기를 써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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