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동서문화사 월드북 86
펄 벅 지음, 홍사중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북부 지역에 사는 가난한 농군인 '왕룽'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변발을 하고 생활을 하던 왕룽이 후에 남쪽 지역으로 갔을 때 그의 머리를 보고 돼지 꼬리와 같다며 놀린 사람들이 있었을 뿐 정확하게 어느 시대인지는 알기가 어렵다. 다만 왕룽이 젊었던 시절에도 남쪽에서는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소설의 1부인 <대지>에서는 중국의 농촌 풍경이 주요 배경이다.


  중학생 때 처음 이 소설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읽은 책은 1부만 있던 책이었나 보다. 워낙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서 『대지』는 한 농군이 그야말로 땅에만 붙어서 사는 이야기였는데 다시 읽고 나니 생각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많이 다룬 소설이어서 놀랐다. 하긴 땅을 파서 농사만 짓고 사는 이야기였으면 펄 벅이 노벨문학상까지 받기는 어려웠겠다. 


  소설의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지』는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다. 다른 게 아니라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헐리웃에서 펄 벅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적이 있는데 그 영화에서는 중국의 정서를 드러내기보다도 당시 미국인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로 색을 입혔다고 한다. 어쩐지 표지 사진에 있는 왕룽의 부인인 '오란'은 그렇게 추녀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다 헐리웃에서 나온 영화의 한 장면을 표지 사진으로 갖다 쓰게 되었을까. 


  왕룽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오란은 흙과 아주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아무래도 옛 사람들은 현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더욱 흙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대체 흙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에서 예전에는 집 안의 곳곳마다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게 다 흙이나 지푸라기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죽고 나면 대지(자연, 흙)로 돌아가고 썩고 난 뒤에도 몸을 이루던 원자는 분해되지 않고 흩어져서 다른 물질이나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는데, 흙과 지푸라기로 집을 지으면 자기 아닌 다른 존재가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고 여길 만하다. 흙은 그야말로 모든 생명체의 원천이고 또 생명체를 살게 하는 곡식과 채소, 나무 등도 땅에 뿌리를 박고 산다. 땅이 있어야만 생명들은 살 수가 있다. 


  류츠신의 소설 『삼체』에서는 지구인이 삼체 문명에게 끔찍한 공격을 당한다. 그리고 자기가 살던 땅에 발을 붙이고 살기가 어려워지는 내용이 이어진다. 삼체 문명의 '지자'가 지구인에게 모든 인류가 전부 호주 땅으로 넘어가서 살 것을 명령하자 그때부터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그때는 발 붙이고 살 땅은 있었기에 희망이 있었다. 인류에게 중요한 건 다른 무엇보다도 땅이었다. 


  왕룽의 장남은 집안이 부자가 된 이후로 남에게 보이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 집안의 모든 살림을 부자라는 칭호에 맞게 바꾸고 꾸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왕룽은 그보다도 항상 땅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땅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요, 아래(땅)를 보는 자세는 겸손함 그 자체다. 왕룽이 겸손한 자세를 평생 일관된 모습으로 유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도 가난했을 적에는 소박하고 겸손했으나 부의 맛을 보고 난 이후에는 허세도 들어가고 애욕에 눈이 멀기도 하고, 하여간에 땅이 아닌 다른 것들에 눈을 여러 번 돌리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이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처한 현실에 따라서 바뀌기 마련이고 그게 바로 삶에 대처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왕룽은 다른 누구보다도 평생 땅을 사랑했다. 


  그에게 자식과 손자들을 안겨준 것은 다 땅 덕분이었다. 왕룽이 젊은 시절, 그러니까 부자가 되기 전에는 흉년이 들면 사람이 굶어 죽어나가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 괴소문까지 돌았다. 땅에게서 아무것도 거두어 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땅을 믿었고 그리하여 돈이 없던 시절에도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 처자식과 아버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남쪽 땅으로 가서 인력거를 끌 때에도 고향의 땅을 잊지 않았다. 


  책의 1부를 다 읽고 책장을 잠시 덮으면서 뒤에 남은 이야기가 아직도 많다는 게 기쁘기보다 걱정이 되었다. 왕룽과 칭서방,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이야기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는데 뒤에는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 때문에. 하지만 하는 수 없다. 펄 벅이 천 쪽이 넘어가는 소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끝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을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부조리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생명보다 돈이 우선하는 곳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가치가 전락해버린 생명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다. 부조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부조리에 대해서 쓴 소설가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소설가는 프란츠 카프카인데 한국 소설가 중에서는 편혜영 소설가가 쉽게 떠오른다. 두 분 다 좋아하는 소설가다. 


2. 


  메디컬 드라마에는 히어로가 등장한다. 어떤 경우보다 환자의 생명이 우선이고, 결코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며, 어둠의 세력(?)과 결탁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는 히어로, 히로인이니까. 『죽은 자로 하여금』에도 히어로가 등장한다. 그런데 보다 현실적인 히어로다. 부족한 부분이 많고 한순간 어둠에 물든 적도 있고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자 앞에서 주눅 든 적도 수차례다. 


  히어로의 이름은 '무주'이고, 이인시(市)의 선도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으로 학력이고 능력이고 보잘것없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권력에, 관행에 순응하기보다 자기 목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인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특히 선도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안다. 모를 수가 없다. 


3.


  이인시는 유령 도시다. 호황이던 조선소가 폐쇄한 뒤부터 도시는 활력을 잃었다. 거리를 배회하는 무직자가 늘고 인구는 날이 갈수록 감소한다. 문을 닫은 상가와 세입자가 들지 않는 다세대주택이 즐비하다. 선도병원도 장사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도시에 생기가 없고 희망이 없다. 정부도 죽어가는 도시를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선도병원에서 먹고 살기 위해, 추락하지 않기 위해 타락을 선택한 이들이 여럿이다. 이직을 하고 싶어도 받아줄 곳이 있을지 의문이며, 들키지 않고 관행을 따르면 어쨌든 먹고 살 수는 있고, 작든 크든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나지도 못한다. 


  이곳에서 근무하던 무주는 실체를 아니까 외부에 알리고 싶은 생각이 크겠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더라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걸로 예상이 간다. 모두들 자신의 고민을 떠안고 살기에도 버겁기 때문이다. 무주는 아마 그 사실이 제일 무서웠을 것이다. 억울한 일에 외부 사람들은 생각보다 관심이 적거나 없다는 사실.


4. 


  그래도 이 소설은 카프카의 소설보다는 밝은 편이다. 희미하더라도 무주라는 아주 작은 빛이 있는데, 그 빛을 꺼버리는 건 세상의 무관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다음(Daum)에 접속했을 때 어떤 책 한 권을 추천하는 글을 읽었다. 책을 추천하는 글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홍보성 글일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에), 글이 담백했으며 그저 순수하게 재밌어서 올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에 관심이 갔다. 그렇게 추천 받은 책이 정해연 소설가의 『홍학의 자리』였다. 기억하기로 글쓴이는 결말을 읽은 다음에 믿을 수 없어서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런 다음 처음 장면을 다시 읽었다고 했나?


  2. 


  18세의 고등학생을 사랑하는 40대의 남(男) 교사가 있다. 고등학생의 이름은 '채다현'이고 교사의 이름은 '김준후'다. 준후에게는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완벽주의자인 아내에게 질렸고 더 이상 사랑하는 감정도 없다. 반면 다현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다. 다만 미성년자와의 만남이고 자신에겐 아내와 아이도 있어서 주변에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비밀 연애를 한다.


  소설에서 다현이가 일찍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은 초반부터 나오기 때문에 소설에 대한 스포가 될 수는 없다. 다현이의 가슴 아픈 가정사는 그 아이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고 쓸쓸하게 만든다. 다현이의 죽음 앞에서 그 아이의 담임이자 애인이었던 김준후는 어떤 행동과 감정을 드러냈나? 그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평판이 더 중요했기에 아이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형사들이 아이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성년자를 상대로 만남을 지속한 사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 했다. 그래서 아이의 죽음에 속임수를 끼얹기로 했다. 이야기는 그렇게 전개된다. 형사들이 그의 속임수를 파헤쳐 나가고 다현이의 개인적인 사정, 그리고 김준후의 비밀까지 알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이야기는 매끄럽고 군더더기 없이 진행된다. 


  추리 소설, 장르 소설로서 이 소설은 그야말로 '재밌었다.' 느슨해지는 부분이 없었으며 문장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반전은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 반전은 읽다 보면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고 두 번째 반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두 번째 반전 때문에 나도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갔다. 한두 장 정도 소설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추천한 글쓴이와 마찬가지의 행동을 나도 하고 있었다. 


3. 


  준후는 달려들듯 캐리어를 잡고 바닥에 눕혔다. 한쪽 면에 붙은 두 개의 검은 버튼을 양손으로 누르자 덜컥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비밀번호는 걸려 있지 않았다. 캐리어를 열고 깔끔하게 개켜진 옷가지들을 성마르게 헤쳤다. 뭘 찾으려는 뚜렷한 목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들여다 보려 생각한 적 없던 영주를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본문 236쪽)


  여기서 말하는 영주는 준후의 부인이다. 그가 들여다 보려 생각한 적이 없던 이유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의심 때문에 그녀의 물건을, 그녀를 제대로 확인하려고 한다. 추리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관심을 줄 일이 없었거나, 관심이 없어졌던 인물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의 비밀을 파헤치려 한다는 점. 


  어쩐지 스탠드 조명의 불빛,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물체에 그런 불빛들이 환히 비추면서 물체의 정체를 알게 되는 과정까지도. 추리 소설에서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의심스럽다. 모두가 다 의미심장한 사람이고 그의 말도 그렇다. 그렇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작은 것들의 신'은 역사라는 거대한 물살을 바라보며 그것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길 수밖에 없는 개인, 한 사람에 깃든 신을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안전하게 어느 곳에 안착하든지, 온몸이 부서져서 발견되든지. 그저 그렇게 되는 대로 되어질 수밖에 없는 몸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신(神).


2. 


  "암무, 꿈속에서 행복했다면 그것도 인정돼요?" 에스타가 물었다. 

  "인정되다니?"

  "그 행복이요, 그것도 인정되는 거냐고요?"

  앞머리가 흐트러진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는 잘 알았다. 왜냐하면 진실은 인정되는 것만 인정되니까.(본문 304-305쪽)


  꿈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작은 것이며, 나만의 것이다. 꿈 속에서 이룬 행복은 어딘가 불완전한 행복처럼 느껴진다. 때때로 행복은 나 혼자서 인정했다고 완벽해지지 않으며 그 완벽하지 않음이 못마땅하고 속상하기까지 하다. 커다랗게 보이는(완전해 보이는) 행복은 타인, 집단에게서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사소한 행복은 너무 작아서 가치가 별로 없다고 평가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개인의 마음은 어떠할까?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을 읽으면 그 마음에 대해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다.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매우 가깝게 이해할 수 있다. 벨루타와 암무의 사랑은 꿈에서, 가장 개인적인 선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꿈 밖(사회)에서, 집단에서 인정 받으려면 혁명이 필요했다.


  벨루타와 암무는 인도라는 커다란 집단에서 불가촉민과 가촉민이라는 신분으로 나뉘었고 그래서 서로를 사랑했지만 서로를 마음껏 만질 수 없었다. 그들은 견고한 질서를 따라야만 했고 거부하면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했다. 거대한 신 앞에서 작은 것들의 신은 너무 무력했다. 처절하게 맞선다 해도 힘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났다. 


3. 


  거대한 세계관, 거대한 질서, 거대한 희망 아래에서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암무와 벨루타는 그저 작은 것에 희망을 걸고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자기 자신(상대를 사랑하는 하나의 몸)을 믿고, 사랑이라는 감정(나만의 것, 작은 것)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희망은 너무 커서 붙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잡기에는 너무 작았다. 


4.


  아룬다티 로이가 이 소설을 쓸 때 몸속에 신이 들어앉지 않았을까? 소설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미어지는 상태에 접어들었고 조금 진정이 되면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판본 프랑켄슈타인 - 181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메리 셸리 지음, 구자언 옮김 / 더스토리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는 북극해를 탐험하던 왈튼 선장에게 어느 이방인 혹은 방랑자가 자신이 겪은 불행에 대해서 들려 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정확하게 빅터 프랑켄슈타인)이고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시종일관 주인공은 괴물을 '그놈'이나 '악마'로 부르고 한번도 이름을 붙여준 적이 없는데 이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부르는 이름이지만 괴물의 사정을 알게 된다면 그를 마냥 그런 식으로 부를 수는 없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의 외형은 2.5 미터에 달하는 거구에 시체를 되살려 놓았기 때문에 섬뜩하고 혐오스럽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지능이 낮지는 않다. 이건 내가 가진 그에 대한 편견이었다. 말을 어눌하게 하면서 이상한 자세로 걸어 다닐 거란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지능이 높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으며 말로 생각과 감정을 묘사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체력은 인간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다. 


  한 가지 더 의외의 사실을 덧붙이자면 작품의 주요 배경이 스위스라는 점이었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잘 알려진 스위스에서 괴물이 탄생하고 그곳에서 주인공과 괴물이 대립하는 장면이 나오는 게 의외였다고 느낀 게 이상한 걸까. 프랑켄슈타인은 자연철학과 화학 분야에 몰두한 과학자였는데 죽은 물체에 생명을 불어 넣어 창조주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 "FRANKENSTEIN ; OR THE MODERN PROMETHEUS"인 이유가 뭘까.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동생과 함께 최초로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에게 불을 전해 주었다. 아마도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를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든 최초의 인간이기 때문에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이 지어졌나 보다. 비록 괴물, 그러니까 그의 외형은 끔찍함 자체였으나 성정이 착하고 배움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다. 그는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을 통해 언어와 지식을 습득했는데 그러면서 자신의 외모와 비참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배우고 생각할수록 절망에 빠지게 되는 슬픈 아이러니. 산속에 은둔하면서 살았으면 몰랐을 자신의 처지를 그는 세상에 나가 지식을 습득하면서 절절히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배움을 통해 짐승에서 인간이 되었으나 막상 인간들에게서 천대를 받았기에 착한 성정은 점점 변해갔다. 사람들은 그를 겪어보기도 전에 외모로만 판단을 했다. 모두들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고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의 말을 듣기조차 싫어했다. 


  외형만 괴물이었지 심성은 오히려 웬만한 사람보다 착했던 그는 성정까지 괴물로 변해갔다. 생명을 낳기만 하고 사랑과 책임감을 쏟아 붓지 않은 빅터에게 그는 처절하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편이 있었다면 그는 진짜 괴물까지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슬픔을 낳을 수 있다"는 그의 절규가 더욱 안타깝게 들렸다. 슬픔과 원망을 모르고 가질 생각조차 없었던 그가 복수를 결심하면서 슬픔을 낳을 수 있다고 외쳤다. 


  그는 나중에 이르러 빅터에게 자신과 처지가 같은 여자를 한 명 더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녀와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서로 의지하고 인간 세상에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전에는 빅터에게 자신이 빅터의 실험실에서 나와 세상에 나가 살면서 겪었던 불행을 바르고 섬세한 언변으로 들려 준다. 빅터는 그의 주장에 설득 당해 한때는 괴물이 될 여자를 한 명 더 만들려고 마음 먹고 실행에 옮겼으나 더 이상의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중단한다. 


  이야기는 비극의 연속이다. 시체를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 주인공의 호기심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괴물의 비참함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며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었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도 만들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게 때로는 더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보이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의 추함은 극도의 비참함을 낳기도 했으며 그는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에 동정을 느끼지 못한다며 두 손으로 빅터의 두 눈을 가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알프스 산맥의 황량한 산과 거친 빙하를 가까이 할 수 없는 머나먼 대상으로 여긴 만큼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을 멀리 했다. 하지만 그에게 산과 빙하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저자가 작품의 주요 배경을 거칠고 황량한 자연으로 택한 이유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에게 그런 곳들이야말로 마음의 안식처이기 때문이었음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스위스는 의외외 장소가 아니라 적절한 장소였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