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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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추리 장르에 발을 내딛고 말았다. 호러 소설은 언제나 즐겨왔지만 범죄 소설이나 추리 소설 쪽에는 딱히 매력을 못 느꼈던 나였는데, 얼마 전 우연히 호러 소설인 줄 알고 집어 들었던 추리 소설 한 권이 꽤 괜찮았고 이 참에 이쪽에도 손을 대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알라딘을 뒤적거리다가 배너에서 이 책의 광고를 우연히 보게 됐다. 많은 추천사들, 골드 대거 상 수상작, 드라마화 제작 확정이라는 화려한 홍보 문구들 속에서 나에게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시리즈의 시작' 이라는 점이었다. 추리 소설 장르에 쉽사리 손을 뻗지 못하던 이유 중 하나가 방대한 시리즈화였지만 어차피 발을 들이기로 결심한 거, 시작부터 함께 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눈 딱 감고 구매해버렸다.


  며칠 뒤 받아 든 책의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강렬한 붉은 색의 표지, 호러물을 연상케 하는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그때까지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다 타버린 다섯 개의 성냥개비까지. '이멀레이션(Immolation)'이라는 처음 듣는 단어의 정의를 소개해주는 책 날개 또한 흥미를 북돋아 주었다.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살상하는 행위, 그것도 주로 불로 태워서 죽이는 행위를 뜻한다는 그 소개를 통해 표지 속의 성냥개비들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책 속 내용이 대충 어떤 사건일지 감을 잡을 수 있었고 안 그래도 마녀사냥이나 인신공양 등의 소재에 흥미를 지니고 있던 나는 지체 없이 작품을 시작했다.   


  그렇게 약 6시간 동안, 정말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겨 댔다.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끔찍한 살인 사건, 그것도 고문하여 신체를 훼손하고 불로 태워 죽이고는 이를 전시해두는 자극적이고 잔인한 범죄 방식,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알 수 없는 피해자들의 연관 관계와 패턴을 밝혀 나아가는 중범죄분석섹션 팀의 수사는 흥미를 끝까지 지속시키기에 충분했고, 개성 강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케미는 빠르게 전개되는 무거운 사건 진행 속에서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과 감동을 주기도 했다. 특히 주인공인 경사 워싱턴 포와 그의 동료인 신입 틸리 브래드쇼 조합은 읽는 내내 미소를 짓게 했는데, 단순한 수사 듀오로서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서로의 인간적인 성장에도 영향을 주는 모습 덕에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특히 틸리 브래드쇼는 최근 크게 유행했던 드라마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떠올리게 하는 천재 캐릭터로, 어린 시절부터 통계와 수학, 프로그래밍, 그리고 기억력에 있어 뛰어난 두뇌 능력을 보여주었기에 사회성을 익힐 틈이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분석가로 일하게 된 캐릭터이다. 능력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세상과 타인에 대해서는 마음을 굳게 닫고 살던 틸리가 약자가 괴롭힘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캐릭터인 워싱턴 포의 도움으로 점점 변화해나가는 과정은 그 둘의 놀라운 추리 과정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요소였다. 순수함을 잃지 않은 틸리의 엉뚱함과 냉소적인 포가 주고받는 대화 속의 재치 있는 대사와 상황들은 전개 속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에 적절하게 이용되어 그 둘의 조합과 작품 모두를 더욱 더 살려주었다. 또, 틸리만큼은 아니어도 플린 경위 또한 때때로 절차 상의 문제로 부딪히는 한이 있더라도 실마리가 보이면 앞뒤 가리지 않으려 하는 포를 어느 정도 제어하고 눌러줄 수 있는 캐릭터로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돋보였던 것은 비단 등장인물 뿐만이 아니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영국의 컴브리아 지역 또한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으로 분위기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해주었다. 처음 듣는 지역임에도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특색 있는 공간인데, 작가가 실제로 살던 고향이어서인지 지역적 특징을 잘 살려서 같은 장소임에도 평안한 분위기, 신비로운 분위기, 기묘한 분위기 등등 여러가지 느낌을 살려주었다. 특히 작품 내에서 범죄의 장소로 이용되는 '환상열석'들은 컴브리아 지역에 많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스톤 헨지'의 형태로 익숙한, 거대한 돌들이 원형으로 나열되어 있는 곳을 말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컴브리아 지역 내 여기저기에 다양한 크기로 63곳이나 있다고 하니 참 신기한데, 최소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데 아직까지도 어떤 이유로 만들어진 지를 모르는 장소인지라 잔혹한 범죄에 더욱 더 미스테리함을 더해주었다. 또, 포의 거주지이자 중범죄분석섹션의 임시 수사 본부로 쓰이기도 한 허드윅 농장은 황무지로 둘러싸인 곳으로,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가도 황량하고 쓸쓸한, 음울한 분위기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마찬가지로 임시 수사 본부로 이용되는 번화가의 호텔 방과는 다른 느낌을 보여주며 작품 속 분위기를 조절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준다. 이렇게 작품 속의 배경들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만큼 매력적이었고 작가도 이런 지역적 특성을 묘사함에 있어서 꽤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인 덕분에 읽는 동안 한층 더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꺼운 분량에도 끝까지 몰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알 수 없던 피해자들 사이의 연관 관계와 살인의 패턴이 점점 풀리고 실마리들이 구체화 되어가는 후반부로 갈 수록 점점 더 사건의 규모가 커져 감에도 연출의 짜임새와 개연성은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추리 소설에 발을 들이기 쉽지 않았던 이유 중 또 하나는 몰입해서 읽다가도 조금이라도 억지스럽게 느껴지거나 개연성에 구멍이 뚫리는가 싶으면 바로 모든 것이 깨져 버리기 때문인데, 규모가 커진다고 해도 빈틈 없이 짜여있는 구성과 독자들에게 던져진 아주 작은 단서 하나 하나도 놓치지 않는 빌드 업은 결말에 다가갈 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리고 그런 단서와 구성 속에 실제 사건들이 시대 배경에 반영되거나 등장인물들의 배경 설정 등에 디테일 하게 녹아 들어가 작품이 좀 더 생동감 넘치고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꽤 두꺼운 분량임에도 페이지가 그칠 줄 모르게 넘어갔고, 결말과 범인이 엄청나게 궁금하면서도 끝을 향해 갈수록 작품이 끝나간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결국 마주한 결말은 역시나 실망 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등장인물들의 성격답게, 그들이 낼 수 있는 가장 최적의 결말로 이끌어내며 최종적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독자들에게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서의 역할과 사건의 해결이라는 추리 장르로서의 역할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모두 훌륭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엮어서 달성해 낸 작품이었다. 독자들에게 주어졌던 모든 의문점들과 소위 말해 '떡밥'을 회수하는 것에 완벽하게 성공적이었고, 심지어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쳤던 사소한 것들이 뒤에 가서 작품 서사의 한 부분이 되기도 했다. 묘사와 연출 면에서도 드라마 화가 결정됐다는 점이 놀랍지 않을 정도로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모든 장면들이 그려졌고, 긴장감 넘치는 수사 과정과 속도감 있는 진행은 잠시라도 책을 내려놓기가 싫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왜 추리 소설을 읽는지, 왜 사람들이 그 길고 방대하게 진행되는 시리즈화에도 열광하는지를 알게 해준 작품이었다. 어느 한편으로는 추리 장르의 시작을 이렇게 해버렸으니 다른 작품들을 읽고 만족하지 못할까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할 정도다. 현재 5편까지 출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이 빠르게 이루어지길 바라는 바이다. 포와 틸리의 여정에 하루 빨리 다시 동참하고 싶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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