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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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의 머리가 황갈색 낙엽 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아몬드 모양의 눈은 차양처럼 우거진 단풍 나무와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뭇가지 사이를 머뭇머뭇 뚫고 숲속 땅바닥 위로 금가루를 뿌리는 햇살을 쳐다보는 건 아니었다.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딱정벌레들이 동공 위에서 종종걸음 쳐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어둠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P.9) 

 

 

그때 나는 처음으로 모든 게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게 한순간에 날아 가버릴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걸 들고 왔는지 모른다. 뭐라도 붙잡고 싶어서. 그걸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서. 아무튼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속으로 하는 중얼거림이 그렇듯 어쩌면 구리구리한 개똥구리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p.29)

 

 

오늘 아침에 받은 봉투를 열어서 그 안에 든 종이를 다시 한번 꺼낸다. 글씨는 없다. 하지만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다. 막대행맨이 올가미를 두르고 있다. 크레용으로 그려졌다는 게 잘못된 부분이다. 그래서일까, 편지를 보낸 사람이 기억을 환기하려는 듯 추가로 뭘 하나 더 넣었다. 내가 봉투를 기울이자 그것이 조그만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책상 위로 떨어진다. 흰색 분필 조각이다. (p.69)

 

 

우리가 예단을 하는 이유는 그게 좀 더 쉽고 게으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들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단은 다른 방향의 실수를 유도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상대방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기존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P.375)

 

 

화창한 어느 토요일, 주인공 에디와 뚱뚱이 개브, 메탈 미키, 호포 그리고 니키는 다 같이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거의 매주 토요일에 만나서 서로의 집에 번갈아 놀러가거나 놀이터에 가거나 가끔 숲에서 노는 그들이지만 그 주 토요일은 축제 때문에 다른 날과 달랐다. 그해 처음으로 어른 없이 아이들끼리 축제에 다녀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디와 친구들은 포스터가 동네 여기저기 나붙기 시작한 몇 주 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축제 당일, 에디와 친구들은 범퍼카, 별똥별, 해적선, 회전바구니 등 놀이기구에 달려들어 흥분과 설렘으로 서로 깔깔대고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날이 제법 저물었다. 이제 남은 돈으로 놀이기구나 두세 번 더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에디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즐거웠던 하루를 이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던 에디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으려 홀로 왔던 길을 되짚으며 바닥을 훑기 시작하지만 지갑은 없었다. 그러던 중 얼굴이 새하얀 남자를 발견하고 그가 쳐다보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그 소녀를 보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도록 예쁜 얼굴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얼굴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얼굴이 에디의 눈 앞에 있었는데 귀청을 찢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놀이기구의 축에 달린 회전 링이 부러지며 은색의 무언가가 소녀의 얼굴을 덮쳤다. 축제장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이 가득한 가운데 에디와 아까 그 새하얀 남자는 소녀를 구해 영웅이 되지만, 극적으로 살아난 소녀는 숲속에서 머리 없는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머리 없는 소녀의 시체, 분필로 그린 섬뜩한 그림, 그리고 소름 끼치는 살인. 한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한 그 날 이후 30년이 지난 어느 날, 에디에게 올가미를 두르고 있는 막대인간의 그림과 흰색 분필 조각이 담긴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글씨는 없다. 하지만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사건은 다시 시작되었다. 

1986년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열두 살의 에디와 친구들. 그들이 저지르는 가장 짖굳은 장난이라고 해보아야 분필로 친구의 집 앞에 막대인간을 그려서 자기들만 아는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초크맨이 등장할 때마다 섬뜩한 사건이 벌어지고 급기에 초크맨의 인도에 따라 숲속으로 들어간 에디와 친구들 앞에 토막 난 시신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일상은 모든 게 달라져버린다. 새까만 길바닥과 새하얀 색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길바닥에 그려진 초크맨! 처음에는 다른 친구가 그림을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뚱뚱이 개브나 호포가 그렸을 거라고. 못된 장난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들에겐 각자 정해진 분필 색이 있었다. 뚱뚱이 개브는 빨간색, 메탈 미키는 파란색, 호포는 초록색, 니키는 노란색, 에디는 주황색. 그들 중에 하얀색을 쓰는 아이는 없었다. 시간은 흘러 2016년.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을 지키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에디에게 어느날 하얀 분필 조각과 초크맨이 그려진 편지가 배달되어지고 예전에 시신을 같이 발견했던 친구 중 한 명이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과거가 다시 눈앞으로 펼쳐진다.

출간되자마자 스티븐 킹, 리 차일드 등 장르문학의 대가들과 가디언, 타임즈 등 유수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2018년 상반기 가장 강렬한 데뷔작으로 자리매김한 <초크맨>. 스티븐 킹은 “내 스타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작품도 좋아할 것이다.”라며 공식적으로 자신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알렸고, 가디언 역시 “이 자신감 넘치는 데뷔작에는 스티븐 킹의 피가 흐르고 있다.”라고 평했다. 리 차일드는 “서늘한 칼날이 내 뒷덜미를 누르는 듯 제대로 섬뜩하다,”며 압도적 신인의 탄생을 반겼다.
이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딸아이가 두 살 때 생일선물로 받은 분필 덕분이었다. 딸과 함께 오후 내내 차고 진입로에 온갖 막대인간을 그려놓고 밤에 현관문을 열었는데, 방범등 불빛에 비친 그 막대인간들이 그렇게 섬뜩해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그 길로 당장 집필에 들어갔고 그렇게 탄생된 원고가 바로 <초크맨>이다.

책은 일인칭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박진감 넘치게 이어진다. 스티븐 킹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극찬한 만큼 초반부터 흡입력이 엄청나다.
지루해 할 겨를이 없다. 과연 초크맨은 누구일까?! 결코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사건이 일어나는 곳마다 등장하는 초크맨, 이 초크맨이 등장할 때마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온 마을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그 사건이 이대로 점점 잊혀지는가 싶었는데 미지의 인물이 보낸 익명의 편지 한 통으로 과거의 사건들이 생생하게 다시 되살아나고 주인공 에디를 중심으로 해결되지 못한 그 사건들을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보며 뒤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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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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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집에서 받은 인상은 단순히 멋지다는 것만은 아니에요. 이 집에 얼마나 헌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까 그건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인정사정없기도 해요. 하지만 이 건축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백 퍼센트 구현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의 열정을 있는 대로 다 쏟아부은 사람이에요. 여기에는 ······ 음, 가식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행위에는 진실함이 있어요.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이 집에서 살면서 따라야 할 생활방식을 자신처럼 솔직하게 대할 준비가 된 사람을 찾는 것 같아요.” (p.34)  

 

 

그 집은 죽음과 함께 잉태되었다.
엄밀히 말해 두 개의 죽음. 즉, 이중의 사별.
그래서 내가 그 집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걸까?
그곳의 금욕적인 공간과 내 개인적인 상실 사이에
어떤 종류의 동질성이라도 있는 걸까? (p.46)

 

 

“다른 사람들이라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는 나를 보며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미소를 짓는다. “오, 그 사람이 말 안 했나요? 당신 전에 살았던 사람들 말이에요. 아무도 영원히 남지는 못했어요. 아시다시피, 그게 바로 핵심이죠.” (p.212)

 

 

이 집은 내가 진실을 알아내기를 원한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벽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말해줄 것이다.
내 호기심을 만족시키자. 나는 이렇게 결심한다. 단 은밀하게. 그리고 이 혼령들을 영면에 들게 하면 다시는 깨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알아낸 사실을 절대 그 사람에게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p.280)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 분명 이 집 자체는 너무나 근사하고 좋다. 당장이라도 들어와 살고 싶을 만큼! 하지만 이 집은 살면서 지켜야 할 조항들이 엄청나다. 반년 마다 방문객들에게 집을 개방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사전 약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종류의 변경도 할 수 없다. 러그나 양탄자를 깔아서도 안되고, 그림도 안되고, 화분도 금지. 장식품도 금지. 책도 금지. 쓰레기통 금지. 흡연 금지. 컵받침과 식탁용 매트 금지. 쿠션도, 작은 장식품도, 조립시 가구도 금지! 언제 어느 때고 바닥에 물건이 놓여 있으면 안 된다. 이런 조항은 전부 이백 개가량으로 주로 안 되는 일 투성이다. 이렇게 제약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곳에 들어와 살겠다는 사람은 줄을 섰다. 하지만 무작정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집 주인인 건축가가 세입자를 승인해야 한다. 그 단계까지 가기 위해서는 먼저 기다란 신청서 양식을 작성해야 한다. 신청서를 다 읽고 규칙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서류가 통과되면 건축가가 어디에 있건 그곳에서 일대일 면접을 보고 통과해야만 그 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감수하고도 이 집에 살고싶은 제인과 엠마.

책은 완벽하지만 많은 것을 감수해야만 살 수 있는 집,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두 여자 과거의 에마와 현재 제인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이어진다. 집주인이자 건축가인 밍크퍼드의 면접을 통과한 후 제인이 이사를 온 첫날부터 현관에 놓여 있던 커다란 백합 꽃다발. 따로 메모가 없어 입주자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꽃을 선물하는거라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고 전과 똑같은 꽃다발이 또 도착했다. 자신에게 온 건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이 집에서 살해된 에마를 추모하고자 그녀를 사랑했던 누군가가 두고 간 꽃다발이었다. 완벽하기만한 이 집에서 도데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책을 읽다보면 제인 위로 에마가 겹쳐진다. 다른 듯 하지만 서로 닮은 두 사람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사랑한 남자 밍크퍼드. 제인은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만 그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호기심을 선뜻 버릴 수가 없다. 결국 제인은 충족되지 못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그의 과거를 쫓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덮여있던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침없이 뒤얽히기 시작하는 두 여자의 삶,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커져가는 긴장감! 벽돌책임에도 스토리 자체가 너무 탄탄해서 읽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론 하워드 감독이 영화화 하기로 했다는데 책의 내용을 영화로 어떻게 그려낼지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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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우 길들이기
리 앨런 듀가킨.류드밀라 트루트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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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랴예프와 류드밀라는 푸신카가 류드밀라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개들이 인간과 맺는 것과 같은 특별한 유대 관계를 발전시킬지 확인하고 싶었다. 애완동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축화된 동물들은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지금까지 가장 강한 애착과 충성심은 주인과 개 사이에서 나타났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걸까? 인간과 동물 사이의 깊은 유대감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했을까? 아니면 류드밀라와 벨랴예프가 이미 여우들에게서 보았던 수많은 다른 변화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친밀함은 금세 드러날 수 있는 변화였을까?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길들인 여우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P.9)

 

 

 

드미트리의 실험은 유전학 연구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실시된 적 없는 규모였다. 지금까지는 주로 아주 작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혹은 빠르게 번식하는 파리와 쥐를 대상으로 실험했지, 1년에 딱 한 번 짝짓기를 하는 여우와 같은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한 적은 없었다. 새끼 여우들을 각 세대마다 교배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실험이 결과를 얻기까지는 몇 년, 어쩌면 몇십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이 걸릴지 몰랐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장기간의 헌신과 위험을 모두 감수할 가치가 있는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실험 결과가 나오면 틀림없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었다. (P.16)

 

 

 

1950년대 옛 소련 시절, 모피 동물 품종개량 연구를 위해 모스크바의 여우농장을 둘러보던 유전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는 어떤 여우들이 유난히 차분하고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을 발견한다. 농장에서 사육되는 여우는 대부분 사람에게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온순한 여우들은 시선을 끌었고, 벨랴예프는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혹시 여우를 길들일 수도 있을까? 벨랴예프가 처음 은여우 가축화 실험을 기획하던 시기는 소련이 유전학을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하던 시절이었다. 가축화의 유전학에 관한 진지한 실험을 하는 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벨랴예프는 이 실험이 가축화의 본질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결국 표면적으로는 ‘모피 품종개량’이라는 이유를 내걸고 실제로는 여우를 개로 길들이기 위한 목적의 실험을 감행했다. 유전학을 '부르주아 과학'이라고 탄압한 옛 소련 정부의 눈을 피해 시베리아 외딴 여우농장에서 비밀리에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류드밀라 트루트는 여우들을 직접 돌보고 관찰했던 실험의 또 다른 주축이었다. 트루트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여우들이 점차 인간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며 마치 개들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 길들인 동물을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냈다. 이 같은 성과를 거둔 시간은 6년이 채 안 되었는데, 우리 선조들이 늑대를 개로 길들이기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진화적인 시간으로 눈 한번 깜박거리는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영하 40도라는, 보통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운 시베리아에서 이 연구를 진행했다. 이곳에서 류드밀라와 그녀보다 먼저 연구를 시작한 드미트리는 동물의 행동과 진화에 관해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실험들을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실시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얼굴을 핥으며 심장을 녹일 만큼 귀엽고 순한 여우를 탄생시켰다. 은여우 길들이기 실험은 지금도 이어지며 동물들이 어떻게 인간과 살아가게 됐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이 책은 40년 전 유전학계를 뒤흔들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던 은여우 가축화 실험에 얽힌 모든 이야기를 소개한다. 구소련 시절 스탈린의 눈을 피해 외딴 여우 농장에서 비밀리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이 실험은 개의 진화를 연구한 가장 유명한 실험이다. 유전학적으로 늑대와 가장 가까운 은여우, 그중에서도 가장 온순한 여우들만을 골라 교배하고 6년 만에 귀엽고 순한 여우로 가축화시킴으로써 늑대가 개로 진화한 과정을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은여우 가축화 실험이 전 세계에 알려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실험에 얽힌 모든 이야기를 자세히 알린 글은 이 책이 처음이다. 사랑스러운 여우들, 과학자들, 여우를 돌본 사람들, 실험들, 정치적 음모, 거의 비극이라고 할 만한 사건과 정말 비극적인 사건, 러브 스토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우러진 일 등, 모든 이야기가 이 책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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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좀 쉬며 살아볼까 합니다
스즈키 다이스케 지음, 이정환 옮김 / 푸른숲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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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는데······ 정말 그런 날이 왔다. 말을 할 수 없고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다. 시야는 흐물흐물 일그러져 보인다. 보행에는 지장이 없는 듯하다. 아, 이건 분명 뇌의 문제다. 젠장,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지 않았던 정형외과 의사는 틀림없이 오진을 한 것이다. 아니, 애당초 며칠 전부터 편두통 때문에 두통약을 먹고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뇌질환이야’ 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p.27)

 

골치 아픈 스위치가 켜졌다. 뇌경색 이후 나에게는 손가락 마비와 인지 장애 외에 ‘감정실금’이라는 장애가 남았다. 뇌에는 감정 억제를 담당하는 부위가 있는데 이 부위에 충격을 받아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는 증상을 ‘감정실금’이라고 한다. 실금은 제어하는 기능을 잃은 상태를 뜻한다. (p.98)

 

2015년 초여름, 마흔한 살 젊은 나이에 우뇌 뇌경색이 발병하여 후유증은 심하지 않았지만 몇 가지 고차뇌기능장애를 얻은 저자. 이 책은 저자가 스스로를 취재한 것이다. 자신의 글이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당사자에게, 부모 형제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한 감각과 고통, 생생한 느낌을 최대한 언어로 표현해놓았다. 단순한 투병기가 아니다. 뇌의 변화 때문에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충실하고 처절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에세이다. 뇌경색이 발병한 시점에서 시작해 6개월의 입원생활, 그리고 퇴원 후 일상까지, 불편한 뇌와 손으로 그날그날 자신의 상태와 심리를 자세히 취재하고 기록했다. 

마흔한 살 젊은 나이에 뇌경색으로 고차뇌기능장애를 얻은 저자는 감각과 행동의 변화를 겪는다. 감정실금(희로애락을 격렬하게 드러냄), 반측공간무시, 주의결함 등 겉으로 보았을 때 남들이 쉽게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장애’, ‘알아보기 어려운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고차뇌기능장애는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 의사조차도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심지어 본인이 병에 걸렸음을 알지 못하거나 주변 사람들도 장애가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단순히 행동이 이상해졌다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저자 또한 마찬가지, 발병 이후, 반년 동안 재활치료를 했음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가벼운 주의력 결핍, 공황과 더불어 ‘어눌한 말투’ 같은 장애가 남았다. 건강할 때는 모른다.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병실 침대에서, 퇴원 이후의 일상생활에서, 취재기자인 저자가 할 수 없게 된 일과 겪어온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통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고통이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경험이라니 얼마나 잔혹하고 괴로울까. 저자도 당사자가 되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취재를 하며 짐작했던 고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건강할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지난날의 취재 대상을 떠올리면 강렬한 후회가 밀려왔다. 저자가 경험한 고통은 건강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오래 갔다. 그동안 기자로 살아오면서 나름 그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들의 고통을 단지 이해하는 척했을 뿐이었다. 당사자가 겪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이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알면 알수록, 조사하면 할수록 이 고차뇌기능장애가 왜 보이지 않는 장애로 불리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는 ‘말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고통을 혼자 감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서 정말 불편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이를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으면 맨 먼저 초초함을 느낀다. 그런데 초조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끼고 피해버린다. 씁쓸한 뒷맛이 남을 뿐이다. (p.92)

 

흔히 볼 수 있는 질병인 뇌경색과 다소 생소한 고차뇌기능장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고통이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는 게 얼마나 괴롭고 억울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처음 뇌경색에 걸렸을 때 저자는 “차라리 발병했을 때 죽어버렸어야 했어”라고 할 정도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재활치료를 받으며 상태가 점점 나아지지만 뇌경색이 발병한 이후부터 매일 풀리지 않는 의문에 시달렸다. 일상생활에서 절제하며 자기 관리를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 내가? 운동을 좋아하고, 제때 밥 먹고, 규칙적으로 살아온 내가 왜?” 퇴원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완벽주의에 집안일은 혼자 다 짊어진 채 하루에 단 30분도 쉬지 않았던 자신이 얼마나 숨 막히는 인생을 살아왔는지 깨닫는다. “뇌경색에 걸리기를 잘했다”라며 질병을 계기 삼아 ‘인생 개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책은 병에 관한 이야기들임에도 재활치료를 과자 뽑기에 비유하는 등 이야기들이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이어져 쉽게 읽힌다. 정말 건강은 자만하지 않아야 하고,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병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지지 않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병을 이겨내려는 저자의 모습에서 그 어떤 것에도 더 이상 지지 않겠다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무엇을 하더라도 내가 건강하지 않다면 뭔들 할 수 있을까. 역시 건강이 최우선! 자기가 병에 걸렸다고 알게 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약해진다. 병이 가볍고 중한게 문제가 아니라 병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기를 꺾어놓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겨내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을 서서히 내려놓기 시작하는 저자의 모습은 결국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나를 위해 또는 가족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뇌경색을 계기로 하여 새롭게 태어난 저자. 저자가 이 책을 쓴 진짜 이유는 인생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루하루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 바쁜 일상에 쫓겨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삶,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저자의 삶을 바라보며 이내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된다. 돈이 많다 한들 무엇하리오. 건강하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질병에 걸리면 인생이 불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행복은 다시 찾아온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으니까.
- 스즈키의 아내가 독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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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질 때
투에고 지음 / 자화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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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은 사람인 줄 알았으나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나 상처를 입곤 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늘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으나 무심결에 상처를 입히곤 했다. (p.27)

 

 

언제부터인가 과거의 불행을 일일이 늘어놓지 않는다. 어떤 이는 현재의 모습에 지난날을 대입하여 나를 단정 지어버리니까. 이 세상이 자기 의지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닌데, 그런 오해를 하는 이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심지어 그렇게 생긴 편견은 생각보다 견고하여 쉽게 깨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현재를 산다.
누군가의 과거에 어떤 불행이 있었던 간에 크게 연연하지 말자.
무엇보다도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중요하니까. (p71)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좀 더 모두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위로가 필요하지도 않을 텐데, 간혹 버티는 삶을 만든 세상이 미울 때도 있다. 그래도 절망에 빠져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온갖 사념을 떨쳐내기 위해,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는 위로가 필요하다. (p.154)

 

10만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 투에고 두번째 에세이 <익숙해질 때>
SNS를 통해 일부 선공개한 글을 포함해 70여 편의 글이 담긴 책은 조금씩 야금야금 아껴서 읽고 싶을 만큼 한 번에 다 읽어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화려한 수식어 하나 없이 그저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이 마음에 잔잔히 스며든다. 어루만져 준다고 해야할까. 감성 천재, 인생 교과서라는 평을 듣고 있는 저자답게 책은 인생 선배가 후배에게 전해주는 조언처럼 솔직하고 담백한 글들로 가득하다. 관계와 삶, 사랑에 관한 성찰과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이 곳곳에 담겨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 가슴에 가득 고여 흘러 넘칠 때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싶은데 이 책이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 혹은 내가 전하고 싶었던 말들로 과하지 않게 담담히 마음속으로 들어와 어느샌가 글로 위로의 손길을 건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이 아닌 꼭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 마냥 진심을 담은 말로 지친 마음을 살살 달래가며 위로해준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인데, 알고 있는 그 말이 하나같이 가슴을 툭툭 건드린다. 이러니 많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밖에, 토닥토닥 어깨를 다독이는 글에 무장해제되어 오늘 하루 동안 힘들었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위로를 담아간다. 마음에 하나하나 다 담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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