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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우주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평점 :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아내로부터 3만 킬로미터씩 멀어진다
영웅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사랑과 야망에 관한 우주 오디세이
보헤미아 우주인
정반대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는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것은 잃어보아야 가치를 알 수 있다. (p.41)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당신과 나는 이 일을 함께 해야만 합니다. 당신 아버지는 부역자이자 범죄자, 오늘날까지 우리 나라를 괴롭히는 것들의 상징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의 아들로서 움직이고 전진하며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야쿠프 프로하스카,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의 아들, 개혁을 거친 공산주의자의 빛나는 본보기인 거죠. 부모의 죽음을 슬픔으로 견뎠고 조부모의 변변치 않은 퇴직연금에 의지해 변변잖은 동네에서 자랐지만 온갖 고난에도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세계에 명석함을 떨쳤죠. 시민의 겸손한 종복이자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인 동시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화신이며 과학자이기도 하고요. 나는 우주에 체코인을 보내고 싶고, 그 체코인은 당신이 될거요. (p.79)
지구는 이제 하늘 깊은 곳에서 빛나는 점이었고, 한 개의 구두 점처럼 작아진 집이었다. 하루에 한 번 나는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파랗고 하얀 행성, 나와 내가 아는 이들을 지탱해줄 그곳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내 고향 행성에 대한 찬사와 비교해보면 금성은 상당히 칙칙했고, 끊임없는 폭풍우와 화산 폭발로 더할 나위 없이 적대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표면의 모래와 바위는 잔잔한 엿기름처럼 사람을 현혹하는 모습이었다. 초프라 구름은 아직 2주일은 더 있어야 도착할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매일 수집한 측정치는 구름이 계속 스스로 붕괴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p.120)
나는 이제 유령이었다. 과거, 미래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관문의 조각들이었다. 나는 초프라의 중심부가 뱉어낸 일련의 알갱이들이었다. 내 유일한 운명은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플젠에서 달아났다. 렌카는 내가 잊지 못하던 것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켰다. 그녀는 계속 자유로울 터였다. (p.356)
거의 1년 반 전에, 예전에는 관측된 적 없는 혜성 하나가 우리 은하로 진입하면서 은하계 사이에 우주 먼지 모래 폭풍이 일었고, 태양계를 휩쓸었다. 이로 인해 금성과 지구 사이에 구름이 형성되었는데, 뉴델리에서 처음 이 특이한 현상을 관측한 사람들은 ‘초프라’ 라는 이름을 붙였다. 초프라는 자주색 황도광으로 지구의 밤을 물들였고, 인류 탄생 이후 우리가 알던 하늘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초프라의 구름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자리를 잡았고 즉각적인 위험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구름의 냉정한 모습은 상상력을 자극하며 여러 끔찍한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에 세계 각국은 불가사의한 초프라의 입자를 채취해 다른 세계에서 온 이 미세한 조각들의 화학적 성질과 생명 징후를 연구하기위해 서둘러 탐사 임무 계획을 수립하지만 모두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고 마침내 인구 천만의 작은 나라 체코에도 기회가 주어진다. 그 주인공은 바로 카렐대학교 천체물리학과의 종신 교수이자 우수한 우주 먼지 연구자인 야쿠프. 조국인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데 일조했던 아버지 때문에 가족 전체가 빨갱이로 몰려 어린 시절부터 이웃들에게 눈총과 따돌림을 받으며 자라온 야쿠프에게 세계의 이목이 쏠린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죄도 씻어내고 무너진 집안도 다시 일으켜 세우며 영웅이 될 수 있는 크나큰 기회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아내와 당분간 헤어져야만 했는데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야쿠프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책은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작가의 데뷔작이자 출간 즉시 아마존 화제의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으로 한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무너져버린 집안을 일으키고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우주비행사를 지원하여 우주에서 홀로 생활하며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으면서 제한된 공간에서 극한의 고독감과 외로움 그리고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결혼 생활에 대한 후회 등, 사랑과 야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성의 심리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보통 SF소설이라고 하면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 작가가 독자들에게 과학적 지식과 재미를 전하기 위해 그 만큼 많은 공부를 하기 마련인데 독특하게도 이 작품을 쓴 저자는 15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독학으로 영어를 배우고, 뉴욕대학교에서 창작문예를 공부한 것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책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나 물리학 공식 대신에 우주라는 넓은 공간에서 극한의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 야쿠프의 내면의 모습이 좀 더 크게 부각되어있다. 광활한 우주에서 일어난 사고로 혼자 고립되어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서서히 상황을 인지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려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안타까워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한 순간이다. 그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자신들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기도 하는 등 이야기 자체가 탄탄하고 과학적 지식보다는 인간에 대한 성찰에 중심을 두고 있어서 과학에 흥미가 없더라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