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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잠시 멈춤 - 나를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 여자들을 위하여
마리나 벤저민 지음, 이은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사물의 이름이 빠져나가는 것을 또 다른 뺄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혼란뿐이었다. 뭔가가 자꾸만 한계에 이르러 허물어지고 없어지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불안감이 갈수록 커진다. 이론적으로는 폐경기를 엄청난 마이너스 부호로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리튬이나 나트륨 알갱이를 물속에 떨어뜨렸을 때, 즉시 결합물이 쉭쉭거리며 반응하고, 그것이 용해되며 격렬하게 입자가 튕겨 나가고, 온갖 색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거품이 마구 생겼다가 터지고 또다시 형성되는 화학 반응과 더 비슷하다. 그러고는 끝이다. 한순간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온전히 존재하지만, 다음 순간 기운이 빠져 피곤함을 느끼면서 그 세상에서 밀려나온다. (P.40)
누구도 자신의 삶 전체를 뒤돌아볼 수는 없다. 단지 부분부분만을 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참고하거나 가설 혹은 까다로운 질문을 바탕으로 우리 삶 전체를 상상해본다. 예를 들면 10년 뒤나 20년 뒤에 우리 삶이 어떨지 상상하면서 머릿속으로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또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어떤 패턴을 조금이나마 알아낼 수 있다면, 앞으로 이어질 삶을 좀 더 잘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기도 한다. 높이 솟은 정점의 위치에서라면 남은 생을 어렵지 않게 내려다볼 수 있으리라 확신하면서 우리 삶에서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P.82)
삶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아버지의 분노에 나도 어느 정도 공감 한다. 이제 중년이 된 나도 해마다 시간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반박할 수 없는 놀랍고도 확실한 증거가 거울 속에 여실히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1년이 되면서 시간이 급물살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갈수록 빨라지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마치 만화책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것처럼. 나는, 마지막 장에 다다름으로써 나라는 인간의 결론에 이르기 전까지 주변을 살펴볼 겨를도 없을 만큼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겨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 존재다. 아버지에게는 맹렬하게 인생의 페달을 거꾸로 밟아 속도를 늦추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P.120)
이 책은 저자가 마흔아홉의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처럼 찾아온 폐경과 갱년기를 겪으며 느꼈던 혼란과 나이듦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쉰을 바라보며 중년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솔직하게 담아낸다. 여자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지만 누구도 깊이 있게 거론하지 않았던 중년 여성의 불안과 고통, 주변의 무관심,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는 감정 등 사오십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일상 속의 에피소드와 다양한 고전 문학 작품, 주옥같은 인용구와 문헌 자료를 예로 들며 앞서 자신이 걸어가며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젊음, 에너지, 성욕, 외모, 부모님, 미래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솔직히 내 나이가 중년에 가까워진다는데 어느 누가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중년이 인생의 내리막이 아닌 나를 향한 생의 반환점이라며 어깨를 토닥인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찾아가며 자신의 내면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라고 말이다.
쉰을 앞둔 나이에 잃게 된 것들과 중년의 고민들로 인해 인생의 전환기에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불안감과 자꾸 내리막 길을 향해 달리는 자존감, 무력해져가는 자신과 수없이 부딪히기 때문. 폐경기와 호르몬 변화, 널뛰는 감정 앞에서 내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한 나이 드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서른에서 마흔으로, 마흔에서 쉰으로, 예순으로 우리는 쉼없이 나이 들어 간다. 어떻게 중년을 맞이할 것인가. 저자의 말에 따르면 나이 든다는 것은 심신 상관적이다. 몸과 마음 모두에서 나이 드는 것을 느낀다. 몸이 알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나이 듦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 몸이 스스로 나이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꼭 중년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나중에 맞이하게 될 나의 중년은 어떠할까. 그때의 내가 지금 이 글을 본다면 뭐라고 이야기 할까.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물론 스스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 두려움이 앞서겠지만 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을 비관하며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쓰기보다는 여유있게, 얼마 전에 읽은 책제목처럼 곱게 늙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