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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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보기왕이라고 했어.”
다음 순간, 교복 안에 받쳐 입은 셔츠 밑에서 팔의 털이 파도치듯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그날이다. 그날 오후에 할머니 집에 찾아온 회색 그림자.
그건 할아버지 고향에 전해 내려오는 보기왕이었을까?
그때 느꼈던 공포와 할머니 말에서 짐작하건대, 할아버지는 그날 온 손님을 보기왕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할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그 손님은 누구였을까. 게다가 그 기묘한 단어······. (p.24)

 

 

“오지마······ 오면 안 돼.”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찌지직 하고 천 찢어지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마코토의 액막이도 효과가 없다. 온다······.
다음 순간, 갑자기 공기가 달라졌다. 집 안에 떠다니던 긴장감도 사라졌다. 딸의 울음소리는 계속됐지만 공포에 떨던 아내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딸을 달랬다. 부적 주머니가 찢어지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마코토가 천천히 자세를 바꾼 뒤,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갔어. 일단 지금은······.” (p.112)

 

 

 

괴물, 즉 보기왕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빈틈을 메운 것만으로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마코토가 그토록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상상을 초월한 힘에 의해 파괴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영매사가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것은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영매사의 팔이 뜯겨나가고,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구급차 안에서 죽었다. 그리고······ 다하라도 죽었다. 머리를 잡아먹히고, 피바다로 변한 거실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p.247)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다하라 히데키와 가나, 어느 날 히데키의 회사에 치사의 일로 볼일이 있다며 손님이 찾아온다. 딸의 일이라고? 혹시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허겁지겁 1층으로 달려가보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걸까. 만일을 위해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펴보지만, 그럴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치사라니? 지금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말하는건가. 무사히 태어난 후에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말하자며 아직 그 누구에게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 순간 그에게 손님의 방문을 알려준 후배 다카나시는 갑자기 팔에서 피가 나더니 원인 불명의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날이 갈수록 점점 상태가 나빠진다. 이후에도 전화나 메일이 오는 등 괴이한 일이 반복되자 히데키는 어렸을 적 자신을 찾아왔던 ‘보기왕’이라는 괴물을 떠올린다. 소름 끼치는 괴물 보기왕. 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 괴물이 왜 이제 와서 자신을 만나러 오는 걸까. 보기왕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하고, 급기야 히데키의 아내와 딸의 이름까지 언급하며 그를 점점 공포의 지옥으로 밀어 넣는다. 이에 히데키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옛친구인 가라쿠사의 도움을 받아 히가 마코토라는 영매사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히데키 부부를 위협해오는 ‘그것’이 끔찍한 존재임을 감지한다.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 내가 좋아하는 미야베 미유키 작가님의 극찬도 있고 해서 정말 기대가 컸지만 무섭다는 이유로 차일 피일 미루다 이제서야 읽어보게 된 <보기왕이 온다>. 누군가 이런 책은 밤에 봐야한다며 해가 지고 난 뒤 펼쳐들었다는데 왕왕왕 겁쟁이인 나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훤한 대낮에 홀로 앉아 책을 읽었더랬다. 그것도 곁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궁시렁거리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집 앞 카페에 자리 잡을 껄 그랬나? 이런 생각도 사실 쬐끔 아니 많이 많이 했음. 그런데 카페에서는 책이 안 읽어지는데 어쩌나. 암튼 결론은 이 책 완전 대박인데?!! 책장이 술술술 넘어간다. 솔직히 읽는데 좀 무섭긴 했다. 잔뜩 예민해져서 평소라면 들리지도 않았을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랬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꼭 읽어봐야한다. 왜? 무서워도 재밌으니까! 심장이 쫄깃쫄깃.

 

책은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흥미롭게도 각 장의 주인공이 모두 다르다. 1장 의 주인공은 평범한 가정의 가장인 히데키로 그가 보기왕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그것으로부터 아내와 아이를 지켜내려는 모습을, 2장 소유자에서는 그의 부인인 가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마지막 3장 제삼자에서는 말 그대로 제삼자인 오컬트 작가 노자키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 모든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 세 개의 이야기는 하나씩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치밀하게 이어져 있어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공포와 반전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게 만들 정도로 흡입력이 상당하다. 사람을 납치해서 산으로 데려가는 괴물. 보기왕.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 깊숙히 자리한 미움과 증오, 나약함과 어리석음 같은 시커먼 마음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교활하고 악독할 수 있을까. 진짜 너무 무섭다. 이놈의 보기왕 ㅠㅠ 그나저나 오늘 밤 잠을 잘 수 있을까? 망했다. 그래도 집에 초인종이 없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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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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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한 발. 칼릴의 몸이 갑자기 홱 틀어졌다. 그의 등에서 피가 튀었다.
칼릴은 몸을 곧게 세우려고 문을 잡았다.
탕!
두 발. 칼릴이 ‘헉’하고 신음을 밷었다.
탕!
세 발. 칼릴이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P.30)

 

“안돼. 안돼.”
그 말 밖에 모르는 한 살짜리가 된 듯 내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누워 있는 바닥 옆으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누가 총에 맞으면 지혈을 하라고 했지만 피가 너무 많이 났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안돼. 안돼.”
칼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몸이 굳어지면서 그는 떠났다. 그가 하나님을 만났기를. 다른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15는 내 친구를 죽인 권총을 날 향해 겨눈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난 손을 들어올렸다. (P.31)

 

그의 입술이 떨렸다. 난 몸이 떨렸다. 그는 흐느낌을 감추려고 입을 막았다. 난 토하지 않으려고 입을 막았다.
“브라이언은 착한 아이 입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들은 그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괴물로 만들고 있어요.”
나와 칼릴이 바라는 게 그건데 당신이 우리를 괴물로 만들고 있다. 난 울지 않으려고 참다가 눈물에 질식된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1-15와 그의 아버지에게 눈물을 보이진 않을 거다. 오늘 밤 그들은 내게도 총을 쏘았다. 그것도 한 번 이상. 그리고 내 일부를 죽였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죽인 건 잠자코 있어야겠다고 주저하던 나의 마음이다. (P.252)

 

잘못된 부분이 어디냐고? 너무 많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바뀔꺼라 생각한다. 어떻게? 나도 모르겠다. 언제? 정말로 모르겠다. 왜? 항상 누군가 싸울 테니까. 어쩌면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도 싸우고 있다. 가든 하이츠에서도 가끔은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은 깨닫고 소리치고 행진하고 요구한다. 그들은 잊지 않는다. 난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절대 칼릴을 잊지 않을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약속한다. (P.450)

 

 

열두 살 때 부모님은 스타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주셨다. 하나는 평범한 성교육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경찰이 불러 세웠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스타,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 손이 보이기 않게 하고 절대로 갑자기 움직여서는 안 돼. 경찰이 너에게 말을 시킬 때만 말하고.”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카릴에게 해주었다면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게 된 스타. 가해자는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눈 경찰. 카릴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그 사건은 다음 날부터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경찰은 평소 착하고 모범적인 인물로 묘사된 반면, 피해자인 칼릴은 마약 거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일며 그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게 그 애 탓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반항도 무장도 하지 않은 그들에게 그저 흑인이라는 이유로 총격을 행한 경찰. 하지만 수사는 사실과는 다르게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결국 가해자인 경찰은 무죄로 풀려난다. 진실을 알고 있는 건 그 날밤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던 스타뿐. 현실과 맞서 싸울 것인가, 안전한 침묵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스타.

 

이 책은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쓰여졌다. 소설 속 주인공 스타의 이야기는 토머스가 대학교 졸업반일 때 탄생했다. 2009년 무장하지 않은 22세 흑인 청년, 오스카 그랜트가 경찰에게 과잉진압으로 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토머스에게 깊숙이 각인됐다. “사람들은 그의 과거를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가 과거에 한 잘못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을 거라는 식으로 말이죠. 너무나 많은 청소년들이 그 사건에 영향을 받았어요. 그들에게서 자신을 봤기 때문이죠. 누구나 오스카가 될 수 있죠.” 이 책이 출간되기 전 그녀는 문학 에이전시에서 60번의 거절을 당했다. 그때 비영리 단체인 ‘위 니드 다이버스 북스’와 만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 단체의 첫 번째 상을 받게 되면서 작가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이 작품은 <해리포터>와 <트와일라잇>을 잇는 영어덜트 장르의 신화가 됐고, 2018년 가을 21세기 폭스에서 제작한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뻔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주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긴 하나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세계 어딘가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인종차별, 누가 만들어 낸 것인가. 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다름 아닌 우리들 인간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편견과 무관심으로 똘똘 뭉쳐 차별하고 혐오하며 그 행동이 지나친 나머지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꺼리낌이 없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반성의 기미는 커녕 자신을 옹호하고 변명하기에 바쁘다. 법은 정당함을 가장하여 그들을 옹호하고 언론도 왜곡되어 이 사건의 진실을 바라보지 않는다. 인종차별. 더 이상은 모두가 침묵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절대 이 폭력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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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고양이는 줄무늬
무레 요코 지음, 스기타 히로미 그림, 김현화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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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년간, ‘시마짱’이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가 찾아오고 있다. 풍채는 요즘 흔히들 말하는 길고양이라기보다 도둑고양이라고 하는 편이 딱 들어맞는다. 몸은 땅딸막하고 짙은 갈색과 검은색의 줄무늬에, 얼굴이 호빵만한 데 비해서 눈은 단춧구멍만하다. 물론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랑이에는 방울이 달려 있다. 모습을 드러낼 때도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안녕들 하쇼?’라는 분위기를 풍긴다. (p.9)

 

 

 

 

 

 

집고양이가 고양이의 신분 제도에 있어서는 꼭대기일지도 모른다. 자유라는 점에서는 길고양이가 제일일지라도, 끼니 걱정이 없고 비를 피하고 싶을 때나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집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게 제일이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고양이라면 이러한 삶을 선택하리라. 하지만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양이의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태어났더니 길고양이라는 입장이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고양이라면 상관없지만, 이런 생활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 고양이는 나름대로 노력을 해서 고양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면 된다. 회갈색 고양이는 참으로 영리해서 책략을 세운 것임이 틀림없다. 또한 그렇지 않으면 길고양이로 살기가 어렵지 않을까. 염원하는 곳을 손에 넣은 회갈색 고양이가 되도록 오래 살아서 가족의 일원이 되어준 부부와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영악한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또다시 웃음 짓고 말았다. (p.169)

 

 

우리 집과 옆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시마짱. 길고양이로 살아가야 하는 힘든 나날 속에서 시마짱에게 조금이라도 편안한 시간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면 기쁠 따름이다. 베란다를 봐도 물론 시마짱의 모습을 찾을 수 없고 찌르레기 부부와 참새 부부는 모습은 커녕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베란다가 묘하게 썰렁했다. 그리고 꿈속의 전혀 어울리지 않던 살구색 턱받이를 한, 난감한 표정의 시마짱을 떠올릴 때마다 무척이나 서글프지만 그 얼빠진 모습에 웃음이 솟구치기도 한다. (p.206)

 

 어느 날 우연히 고양이 시이를 산책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껌딱지처럼 따라와서는 그 이후부터 시시때때로 얼굴을 내밀며 저자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시마짱. 길고양이의 삶이 힘들다고 누가 그래? 시마짱은 예외다. 길고양이 주제에 어서 냉큼 밥을 내놓으라며 당당하게 밥을 요구하질 않나, 먹다 남은 음식에는 입을 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보이며 음식을 외면하여 회를 사료 안에 섞어서 줬더니 회만 후벼 파내 먹어 저자를 기막히게 만들더니, 1년 전부터는 또 어찌나 잘 먹는지 낮이고 저녁이고 찾아와 캔사료를 엄청난 기세로 싹 비워낸다. 덕분에 고양이 음식을 구입하는 사이트 캣푸드에서 1년간 총 구입 금액이 10만 엔을 초과하여 골드 회원으로 승격되었다. 저자의 고양이는 소식묘라서 캣푸드 단가가 높아도 지출이 많지 않은 탓에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데 시마짱이 오고부터는 소비가 잦아져서 빈번하게 구입하게 된 건 사실이지만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길고양이 중에는 유난히 사람을 따르는 아이도 있다지만, 시마짱은 무뚝뚝했다. 이 동네 열 가구 정도가 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서 돌봐주고 있다는데 시시때때로 찾아와서는 밥 달라고 단춧구멍만한 눈으로 레이져를 쏘아대며 뚫어져라 얼굴을 쳐다보는데 이상하게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토실토실 튼실한 줄무늬 고양이 시마짱과 함께 한 소소한 일상을 유쾌하고 솔직하게 그려내며, 길고양이 시마짱의 일생을 통해 삶과 죽음,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깨우침을 전하는 저자 무레 요코. 고양이를 사랑하는 작가로 익히 알려진 만큼 고양이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남다르다. 눈빛만으로 대화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속마음까지 알아채니까 말이다. 진정 그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책에는 고양이 뿐만아니라 무화과를 좋아하는 개, 뒤늦게 나타나 저자를 괴롭히는 모기, 태국 섬에서 만난 원숭이, 목각 곰, 귀여운 생쥐 등 온갖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단연 주인공은 시마짱! 다른 길고양이와는 다르게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가와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며 기여코 밥을 얻어 먹고야마는 당당함에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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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잠시 멈춤 - 나를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 여자들을 위하여
마리나 벤저민 지음, 이은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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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이름이 빠져나가는 것을 또 다른 뺄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혼란뿐이었다. 뭔가가 자꾸만 한계에 이르러 허물어지고 없어지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불안감이 갈수록 커진다. 이론적으로는 폐경기를 엄청난 마이너스 부호로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리튬이나 나트륨 알갱이를 물속에 떨어뜨렸을 때, 즉시 결합물이 쉭쉭거리며 반응하고, 그것이 용해되며 격렬하게 입자가 튕겨 나가고, 온갖 색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거품이 마구 생겼다가 터지고 또다시 형성되는 화학 반응과 더 비슷하다. 그러고는 끝이다. 한순간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온전히 존재하지만, 다음 순간 기운이 빠져 피곤함을 느끼면서 그 세상에서 밀려나온다. (P.40)

 

 

누구도 자신의 삶 전체를 뒤돌아볼 수는 없다. 단지 부분부분만을 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참고하거나 가설 혹은 까다로운 질문을 바탕으로 우리 삶 전체를 상상해본다. 예를 들면 10년 뒤나 20년 뒤에 우리 삶이 어떨지 상상하면서 머릿속으로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또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어떤 패턴을 조금이나마 알아낼 수 있다면, 앞으로 이어질 삶을 좀 더 잘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기도 한다. 높이 솟은 정점의 위치에서라면 남은 생을 어렵지 않게 내려다볼 수 있으리라 확신하면서 우리 삶에서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P.82)

 

 

삶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아버지의 분노에 나도 어느 정도 공감 한다. 이제 중년이 된 나도 해마다 시간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반박할 수 없는 놀랍고도 확실한 증거가 거울 속에 여실히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1년이 되면서 시간이 급물살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갈수록 빨라지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마치 만화책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것처럼. 나는, 마지막 장에 다다름으로써 나라는 인간의 결론에 이르기 전까지 주변을 살펴볼 겨를도 없을 만큼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겨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 존재다. 아버지에게는 맹렬하게 인생의 페달을 거꾸로 밟아 속도를 늦추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P.120)

 

 

이 책은 저자가 마흔아홉의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처럼 찾아온 폐경과 갱년기를 겪으며 느꼈던 혼란과 나이듦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쉰을 바라보며 중년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솔직하게 담아낸다. 여자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지만 누구도 깊이 있게 거론하지 않았던 중년 여성의 불안과 고통, 주변의 무관심,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는 감정 등 사오십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일상 속의 에피소드와 다양한 고전 문학 작품, 주옥같은 인용구와 문헌 자료를 예로 들며 앞서 자신이 걸어가며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젊음, 에너지, 성욕, 외모, 부모님, 미래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솔직히 내 나이가 중년에 가까워진다는데 어느 누가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중년이 인생의 내리막이 아닌 나를 향한 생의 반환점이라며 어깨를 토닥인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찾아가며 자신의 내면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라고 말이다.

 


쉰을 앞둔 나이에 잃게 된 것들과 중년의 고민들로 인해 인생의 전환기에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불안감과 자꾸 내리막 길을 향해 달리는 자존감, 무력해져가는 자신과 수없이 부딪히기 때문. 폐경기와 호르몬 변화, 널뛰는 감정 앞에서 내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한 나이 드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서른에서 마흔으로, 마흔에서 쉰으로, 예순으로 우리는 쉼없이 나이 들어 간다. 어떻게 중년을 맞이할 것인가. 저자의 말에 따르면 나이 든다는 것은 심신 상관적이다. 몸과 마음 모두에서 나이 드는 것을 느낀다. 몸이 알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나이 듦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 몸이 스스로 나이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꼭 중년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나중에 맞이하게 될 나의 중년은 어떠할까. 그때의 내가 지금 이 글을 본다면 뭐라고 이야기 할까.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물론 스스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 두려움이 앞서겠지만 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을 비관하며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쓰기보다는 여유있게, 얼마 전에 읽은 책제목처럼 곱게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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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윤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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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넋을 놓고 거울을 쳐다보고 있던 리호는 왠지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생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여자가 피부 위에서 뒤섞여 있는 지금 이 상태라면 2차 성징을 다시 회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신체발달에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다시 한번 2차 성징을 찾아서 좋아하는 성별을 골라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남녀가 뒤섞여 있는 거울 속 자신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직 성별에 대한 의식조차 없이 남자아이들과 같은 교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던 모습과 겹쳐졌다. (p.26)

 

 

치카코는 솔을 지구에서 가까운 별 하나쯤으로밖에 느끼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는 그 별빛을 기준으로 ‘하루’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보다 훨씬 영원으로 이어지고, 오랫동안 같은 시간 속에 있다는 감각이 더 강하다. 이렇게 회사에 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드디어 하루라는 구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낸다. 혼자 있으면 다시 영원히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돌아가버린다. 다른 사람들처럼 혼자서 아침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우주를 떠도는 별과 별 사이에 영원히 흐르고 있는 시간 속에서 익사해버릴 것 같았다. (p.67)

 

 

 

여자라는 가면을 아무리 벗어버리려고 해도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여자다. 인간으로서의 여성은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내장에 성별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까 했던 섹스에서 피부 안쪽 구석구석까지 리호는 그냥 여자였다. 그것은 샘물처럼 리호에게서 솟아나오고 있었다.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움켜쥔 주먹에 이마를 기대었다. 독서실 바닥이 출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독서실이 배처럼 느껴졌다. 어딘가로 배를 띄우듯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p.165)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주인공 리호는 남자친구와의 성관계가 고통스럽다. 그런데다 아르바이트 중인 레스토랑에서 함께 일하는 메이에게 연정을 느끼기까지 하자 그녀의 성 정체성에 혼란이 일어난다. 어쩌면 자신은 남자가 아닐까, 아니면 성별 없는 섹스를 할 순 없을까, 상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성별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자신이 여자를 좋아하는지 남자를 좋아하는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고민한 끝에 자신에게 맞는 성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남장을 시도한다. 옷을 갈아 입고 가슴에 압박 붕대를 두르고 긴 머리를 숨긴 채 그녀가 찾아간 곳은 다름아닌 독서실. 하지만 그곳에서 레스토랑 단골 손님과 마주친다. 그들은 자신보다 열 살 많은 치카코와 그녀의 단짝 친구 츠바키. 어두운 밤에도 선크림을 발라가며 자신의 몸을 정성스럽게 케어하는 츠바키는 그런 리호의 모호한 태도를 비난하고, 물체 감각으로 살아가는 치카코는 그 어느 쪽도 공감하지 못하고 남자와 자도 인간으로서 육체적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이들의 성은 어디로 다다르게 될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남장을 하는 리호, 여성성에 집착하며 밤에 외출시에도 선크림을 바르고 나가는 츠바키, 물체 감각으로 살아가는 치카코까지, 책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세 여자의 이야기로 각자 고민을 떠안은 세 명의 여자가 독서실 옥상에서 나누는 밤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던 이야기 말이다. 평범한 사람의 시선에서 본다면 이 세 여자는 뭐랄까 좀 거북하고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 성적인 시선을 받고, 얼굴이나 몸매로 가치를 평가 받기도 하고, 당연하게 여성스러움을 강요당하는 등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누가 그러라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을 마치 당연한 듯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그러기를 강요한 것도 아닌데, 언제라도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어도 되었것만 그러질 못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이 불편해서 자신을 더 이쁘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말이다. 그저 스스로에게 당당하면 될 껄.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땐  솔직히 불편했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생각과 행동을 가진 그녀들이라 거부감이 컸다. 하지만 조금씩 읽어 나갈수록 그녀들의 입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가 다 같을 수는 없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이런 점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혼자서 얼마나 불편했을까. 남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본인들에겐 너무나 어렵게 느껴져서 혼자서 마음 고생을 참 많이 했겠구나 싶다. 세상이 정해둔 잣대에서 어긋난 자신을 들여다보며 참 많이 힘들었겠다. 마치 미운오리 새끼처럼 말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모두가 똑같아야만 하는 건 아닌데 우리 세상이, 우리 사회가, 우리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다수의 의견에 소수의 의견이 묻혀버렸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다 다른데 어떻게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 있을까. 나와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 그게 바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모두가 다 같은 필요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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