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한계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계몽이든 낭만이든 모든 좋은 것은 언제든 나쁜 것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직시하는 것, 그 분열됨에 머물러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4장을 들어가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철학 사조를 간략하게 짚어주는데, 사회학, 인문학, 철학, 세계사(모르는 것 너무 많아서 무슨 의미가 있지 ㅋㅋ) 베이스가 없는 나로서는 오오 그런거구나 개략적으로 좇아갈 수 있었다. 이 챕터가 제일 문외한에게 읽기 쉬운 듯하다. 정희진 선생님이 추천하셨던, 마셜 맥클루언 인용되기에 그 책 다시 리스트업해둔다.
대충 이해한 바대로 요약해보면.. ‘우리는 계몽주의, 낭만주의, 후기 계몽주의, 등등 경합을 거쳐 무엇이 이상이고 추구해야 할 지식인지 짚어내기 어려운 시점에 왔고, 이러한 “공통교양의 상실”로 인한 혼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질문하는데, 이 거대한 질문이 한국 혼돈의 현재상황을 환기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의외로 답은 태도. 그것도 느긋하고 진득하게 검토할 줄 아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한담이다, 사변적이다, 왜 비판받는지 알것만 같은 챕터 ㅋㅋ 그치만 재밌다. 아이러니를 아이러니라 하지 그럼 어쩌냐!
낭만주의가 지닌 의미의 다양성은 그것이 계몽 이후의 사상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온갖 신앙과 미신을 보편타당한 이성의 힘으로 타파하고자 한 것이 계몽주의의 이상이었다면, 계몽 이후의 사상은 바로 이 이성의 보편 타당성에 대한 확신에 도전한다. 보편타당성 혹은 이 정상성이 힘을 잃게 되면 곳곳에서 제어할 수 없는 다양성의 분출에 붙여진 최초의 이름이 낭만주의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 낭만주의의 시조들이 깨달은 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가치란 자연적 본성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사회, 자아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인간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따라서 가치는 역사적이고,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며, 심지어 서로 모순적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이 말하듯 "물고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한 가지는 바로 물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요소를 지각할 수 있는 반()환경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유산이 마치 한류와 난류처럼 따로따로 놓여 있어서 대개 그 존재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특정한 장소에서 한류와 난류가 만날 때와 같이,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유산이 치열하게 대립할 때, "두 세계의 아이들"인 우리는 그 존재를 강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
벌린과 함께 낭만주의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우리의 기원으로서 낭만주의라는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뿌리와 기원을 찾는 이유는 노스탤지어에 젖어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혹과 유혹을 경계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낭만주의적 태도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낭만주의는 우리의 순진성이다."
결국 계몽주의가 추구하는 합리적 보편성과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갈등과 경합의 끊임없는 교차는 한국 사회에서도 우리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아이러니한 조건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라투르가 조언하듯 "너무 성급하게 어느 편에 서지 않으면서 이 모순, 이 이중의 담론을 검토 대상으로" 삼아 볼 필요가 있다. 느긋하게, 진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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