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과 클레어가 상극중에 상극이라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점점 깨닫는다. 인종 뿐만 아니라 온갖 것이 ‘패싱’ 가능한 시대에 사는 탓인지 윤리 의식이나 위기감도 두 여자 따라 금세 흐려지고.. 정작 불가능한 것은 두 여자 사이의 간극을 패싱하는 것. 아이린이 속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클레어보다도 더 자기 욕망에 충실한 걸 보면 이 소설에서 내가 읽고 있는 건 두 여자 얘기가 아니라 한 여자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남편이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만큼 그를 알았다. 혹은 더 잘 알았다. 114

그녀가 말했다.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살아남아서 번성하고자 하는 종족 본능이지."
"말도 안 돼! 생물학적 일반론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는 없어요."
"전적으로 모든 게 그렇게 설명될 수 있고. 백인이라 불리는 작자들을 봐요. 지구 곳곳에 애비 없는 자식들을 만들어 놓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요. 생존하고 번성하고자 하는 종족 본능이란 그런 거요."
그 말에 아이린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 - P110

그리고 두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행복해지기를 원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웠고, 그가 행복해지기를 원하기는 해도, 오로지 그녀의 방식대로만, 그녀가 세워 놓은 계획대로만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은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 P121

클레어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들 관계를 비밀에 부치려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 부분은 아이린도 이해했다. 그녀가 화가 난 것은 클레어가 그녀의 조심성을 의심하고, 답장할 때 충분히 조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 우체국을 지정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늘 자신이 옳은 판단을 한다고 확신했던 아이린은 누군가 자신을 의심하는 듯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클레어 켄드리는 그래서는 안되었다. - P123

정말이지 클레어, 지난 날을 쭉 돌아봐도 네가 모든 비난을 그에게 돌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도 나름의 입장이 있어. 넌 네가 흑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네 남편은 네가 흑인들에 이렇게 연연해하는 걸, 또 흑인들을 검둥이니 검은 악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네가 격분한다는 걸 알 도리가 없는 거야. - P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한계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계몽이든 낭만이든 모든 좋은 것은 언제든 나쁜 것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직시하는 것, 그 분열됨에 머물러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4장을 들어가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철학 사조를 간략하게 짚어주는데, 사회학, 인문학, 철학, 세계사(모르는 것 너무 많아서 무슨 의미가 있지 ㅋㅋ) 베이스가 없는 나로서는 오오 그런거구나 개략적으로 좇아갈 수 있었다. 이 챕터가 제일 문외한에게 읽기 쉬운 듯하다. 정희진 선생님이 추천하셨던, 마셜 맥클루언 인용되기에 그 책 다시 리스트업해둔다.



 













대충 이해한 바대로 요약해보면.. ‘우리는 계몽주의, 낭만주의, 후기 계몽주의, 등등 경합을 거쳐 무엇이 이상이고 추구해야 할 지식인지 짚어내기 어려운 시점에 왔고, 이러한 “공통교양의 상실”로 인한 혼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질문하는데, 이 거대한 질문이 한국 혼돈의 현재상황을 환기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의외로 답은 태도. 그것도 느긋하고 진득하게 검토할 줄 아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한담이다, 사변적이다, 왜 비판받는지 알것만 같은 챕터 ㅋㅋ 그치만 재밌다. 아이러니를 아이러니라 하지 그럼 어쩌냐!



낭만주의가 지닌 의미의 다양성은 그것이 계몽 이후의 사상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온갖 신앙과 미신을 보편타당한 이성의 힘으로 타파하고자 한 것이 계몽주의의 이상이었다면, 계몽 이후의 사상은 바로 이 이성의 보편 타당성에 대한 확신에 도전한다. 보편타당성 혹은 이 정상성이 힘을 잃게 되면 곳곳에서 제어할 수 없는 다양성의 분출에 붙여진 최초의 이름이 낭만주의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 낭만주의의 시조들이 깨달은 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가치란 자연적 본성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사회, 자아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인간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따라서 가치는 역사적이고,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며, 심지어 서로 모순적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이 말하듯 "물고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한 가지는 바로 물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요소를 지각할 수 있는 반()환경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유산이 마치 한류와 난류처럼 따로따로 놓여 있어서 대개 그 존재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특정한 장소에서 한류와 난류가 만날 때와 같이,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유산이 치열하게 대립할 때, "두 세계의 아이들"인 우리는 그 존재를 강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

벌린과 함께 낭만주의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우리의 기원으로서 낭만주의라는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뿌리와 기원을 찾는 이유는 노스탤지어에 젖어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혹과 유혹을 경계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낭만주의적 태도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낭만주의는 우리의 순진성이다."

결국 계몽주의가 추구하는 합리적 보편성과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갈등과 경합의 끊임없는 교차는 한국 사회에서도 우리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아이러니한 조건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라투르가 조언하듯 "너무 성급하게 어느 편에 서지 않으면서 이 모순, 이 이중의 담론을 검토 대상으로" 삼아 볼 필요가 있다. 느긋하게, 진득하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3-02-09 1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수님! 안녕하세요^^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이 부분이 마셜 맥클루언의 말인가요?

유수 2023-02-09 21:5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댓글 주셔서 넘 반갑습니다. 제가 북플 사용이 서툴어서 저만 알아보게 적는 경향이 있어요ㅋㅋ인용구 상자 세번째가 매클루언 인용한 글귀입니다. 첫부분은 저자 인용입니다. 전자책으로 보느라 쪽수가 없어요. 미미님 댓글 보고 맥루언 부분 각주 봤더니 출처는 요 책이더라고요. 복붙해드려요.

존 더럼 피터스, 이희은 옮김, 『자연과 미디어』(컬처룩, 2018), 95쪽에서 재인용. 마셜 매클루언·퀜틴 피오리, 박정순 옮김, 「물고기에게 보내는 메시지」, 『지구촌의 전쟁과 평화』(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참조.

난티나무 2023-02-09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물고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한 가지는 바로 물이다.’!!!
‘분열됨에 머물러 있는 것’… 이거 넘 힘들지 않아요?ㅠㅠ

유수 2023-02-10 09:42   좋아요 0 | URL
우리 맨날 하고 있는거 아닙니까? ㅋㅋㅋ 뭐 그런갑다 합니다….ㅋㅋㅋㅋㅌㅋㅋ
 

날이 풀리면 미세먼지 많은 날. 이제 공식일까. 어제 도서관에 차대고 점심 먹으면서 책봤다. 마음만은 창문 활짝 열고 기분내고 싶은 기온이었다. 다 못보고 갖다주는 책 매번 넘 많아서 이거 병인가? 생각하면서 도서관 들어가고, 그냥 나와도 될 걸 다시 대출 한도 가득 채워서 빌려 나오면서 병 맞네, 납득한다.

오늘 혼자 아이들 봐야해서 미리 부담감 느끼며 어젯밤 술술 읽혀도 부러 중간에 덮었다. 의도하지 않은 쉬는 시간에 내 감상도 여무는 건지, 오전 내내 클레어랑 아이린 생각을 했다. 아이린은 스스로의 감정과 유리돼 있고 클레어는 반대고. 그렇다고 아이린이 위선적이라거나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클레어의 존재로 어떤 파동이 일지 처음부터 너무 잘 감지하고 있으니.
패싱이란 제목이 그래서 절묘하게 느껴진다. 처음엔 인종주의의 자장 안에서 용어를 이해하고 시작하게 되지만 관계 속에서,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행세’들을 기민하게 읽어내도록 독자를 이끈다는 점에서.
책은 안읽고 주절대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다 두어번 !! 터져서 맞은편에서 책 등과 내 얼굴을 지켜보던 딸이 궁금해했다. 훈훈하고 말랑한 감성의, 누가 읽어도 부담없을 책. 출간된 형태의 라이트 노벨/만화 쪽은 처음 읽어 본다. 나는 부담 있는 책을 좋아하지만 냥냥 버튼은 눌리라고 있는 것이고ㅋㅋ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오 2023-02-09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앙 애긔 궁금해하는거 너무귀엽다ㅜ
 

그런 의미에서 자기 서사는 곧 자기 평가의 수행이다.  82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의 이야기이다. 나의 이야기가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시간이 야기하는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간직함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고 내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 P76

우리가 안정적인 자아상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말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적 존재가 된다. … 그 말은 뜻을 이해시키고자 시도하고,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고자 애쓰는 그런 언어이다. 초월과 자유를 표현할 수 있도록 말이 발화될 때, 기억과 의미가 소통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인간이 된다. - P45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오 2023-02-07 0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수님이 다 읽고 평가해주시면 사야겠다 이거!

유수 2023-02-07 17:03   좋아요 1 | URL
저는 왜 알아먹지도 못하는 책을 좋아할까요? ㅎㅎㅎ

은오 2023-02-08 03:06   좋아요 1 | URL
그런 책이 또 지적 쾌락을 주다보니.... 근데 그런 책만 읽으면 머리아파서 저는 항상 머리 식히는 술술 넘어가는 책을 같이 읽어야 합니다 ㅋㅋㅋㅋ

유수 2023-02-09 01:33   좋아요 1 | URL
ㅋㅋ 머리 아파서 굳이 다른 책 넘기는 은오님 대체… 은오님 뇌야 니가 고생이 많다ㅋㅋ

- 2023-02-08 0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 이거 지난 주에 잽싸게 신간코너에서 집어온 책인데!!! 우하하하하하하하!!! 벌써 일주일 넘었네요..(그냥 욕심만 많아서 ㅋㅋ)

유수 2023-02-09 01:31   좋아요 1 | URL
욕심 좋은 거죠. 오 근데 이거 신간이에요? 빌려보는 중인데 사려고요. 철학 문외한이라 저한텐 어렵고 쟝쟝님은 수월하실 듯. 그래도 재밌네요. 쟝쟝님 언어로 풀어주시는 철학/자 페이퍼들 재밌게 읽고 있어요.

- 2023-02-09 12:46   좋아요 1 | URL
저도 철학은 학부시절에 옆 건물에서 수업 열심히 들었던 게 전부예요. 언젠가는 진짜 공부해보고 싶고 ㅎㅎㅎ 알라딘 하지 않았으면 제가 철학을 좋아했다는 것 조차 잊고 살았을 것 같아요. 철학적(전공자들이 와서 욕할 것 같음ㅋㅋ)이지도 엄밀하지도 않지만 제 멋대로 공부하는 페이퍼 좋다고 하시는 분이 많아서 좀 더 잘 읽고 써보겠습니다!!

단발머리 2023-02-08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애령 기억할게요. 우아... 해석학이랑 철학이 전공이네요. 헐 ㅋㅋㅋㅋㅋㅋㅋㅋ

유수 2023-02-09 01:28   좋아요 0 | URL
읽은 부분까지는 아렌트가 가장 많이 인용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