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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평점 :
자전 신화. 오드리 로드의 조어라고 한다. ‘집’(캐리아쿠)에서부터 ‘아프리케테’에 이르는 여정이라는 책 소개가 알려주듯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닌 본인 정체성의 기원을 찾는 탐구기록이다. 그런 면에서 더욱 다채롭게 읽힌다. 오드리 로드의 섹슈얼리티에 매료되며 읽을 수(내 케이스)도 있겠고 혼란과 자기 부정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만들며 대차게 걸어나가는 주인공의 성장소설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나 들여다 보는 렌즈가 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흔적을 남긴 여자들을 복기하며 그들과 스스로를 자미로 호명하는 신화적 여성 영웅 서사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 의식의 가장자리 어딘가에는 신화적 규범이라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그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이런 기준은 보통 백인에, 날씬하고 남성적이며, 젊고 이성애적이고, 기독교적인,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라는 뜻이다. 권력은 이런 신화적 기준들을 활용해 사회 내부에 온갖 덫을 놓는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그래서 로드는 몸소 신화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분열과 자아 혼란은 1950년대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의 파장과 함께 소용돌이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만나는 ‘아프리케테’와의 화합은 경이롭기까지 한데 그간의 난관을 온몸으로 통과한 로드에게 주어지는 온당한 자격이자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눈이 안좋고 호기심많은 이 소녀를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나는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만난 셈이다. 오드리 로드 너무 좋아서 중심을 못잡는다. 언니 다 가져요.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우리가 의지하는 진리들이 있다. 여름철엔 해가 북쪽으로 움직인다는 것, 얼음은 녹으면 작아진다는 것, 휘어진 바나나가 더 달다는 것. 아프리케테는 나에게 나의 뿌리를 우리가 가진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가르쳐주었고, 여태까지 나는 그 정의를 배우기 위한 훈련을 해왔을 따름이었다.”432
로드는 내면의 분노와 혐오를 구분하고 스스로가 직시할 것을 늘 강조했다. 그런 깨달음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의 언어에 힘을 부여했는지 <자미>를 읽음으로 해서 구체화된다.
“우리의 역사가 가르쳐 준 게 있다면,억압의 외적 조건만을 변화시키는 걸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려면, 억압이 개개인의 마음에 심어 둔 절망을 인식해야 한다. … 우리는 각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이 혐오를 우리 손으로 끄집어내, 그것이 누구를 멸시하게 부추기는지 직시해야 한다. “251 <시스터 아웃사이더>
“자아 존중감은 이론적으로 말해 봐야 별 효과가 없다. 그런 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 나는 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현재의 내가 아닌 것을 경험하는 고통을 무릅쓰며, 현재의 내 모습이 선사하는 달콤함을 맛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335 <시스터 아웃사이더>
“나를 혹독하게 들쑤셔대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감히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314 <자미>
자미 아름답다고 깨방정과 주책 떨며 신봉하고 있지만ㅋㅋ 억울하고 비통한 에피소드가 그득한 이 책을 읽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더 있다. 페이지(생각나는대로 사건과 트라우마를 나열해본다)마다 트라우마 생존자만이 지닌 강단과 여유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제네비브, 유도라, 키티, 진저, 엠마, 비, 뮤리엘
-엄마
-학교
-인종차별, 성차별과 정체성 고민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조차 느낀 분열과 고독
-불법 낙태 수술
-열악하고 부당한 노동환경, 시대의 정치적 혼돈과 가난
-멕시코와 워싱턴 견학, 할렘에서의 어린시절
김애령의 책 <듣기의 윤리>에서 저자는 아렌트를 인용하며 불멸성을 획득한 이야기의 조건을 짚는다.
“그렇다면 불멸할 삶, 시와 역사로 기록되는 이야기는 곧 영웅들의 이야기뿐인가? 영웅들의 이야기만이 불멸할 가치가 있는가? 아렌트가 그것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이야기가 드러내는 주인공은 어떤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고 부연한다.”오히려 그녀는 불멸성을 획득할 위대함은 용기와 대담성, “기꺼이 행위하고 말하려는 의지”에 있다고 지적한다. .. 그렇다면 이야기하기 자체가 곧 용기와 대담성의 표출이며, 세계에서의 출현 자체가 곧 가치 있는 삶, 한정된 사적 필멸성의 영역을 벗어나는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40 <듣기의 윤리>
로드는 피해자 혹은 승리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로서 모든 것을 재정의했다. 고통스럽고 불완전한 스스로를 드러내며 자미는 온전한 연대기가 되고 로드의 자전신화는 마침표를 찍었다.
마무리 못하겠어. 마냥 벅차. 오드리 로드 사랑해요. 사우스와 절구, 11챕터의 모든 문장도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