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에 존재하는 사람이 딸과 나 두 사람뿐일 리 없었다. - P1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의 쓸모 -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
박산호 지음 / ㅁ(미음)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의 쓸모는 나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쓸모를 논할 일도 아니고, 없어도 상관 없다는 걸 안다. 한 시절을 나게 해주었던 가슴 속 소설 한 권이라면, 그 이상 말이 필요할까. 
이걸 제목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다. 어디서든 효율, 동선, 능률, 가성비와 최적화를 찾는 세태라서 그럴지 작가가 이 독후 에세이에서 얘기하는 소설의 쓸모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저자는 스릴러를 전문으로 번역하시는 분인데 나는 저자가 번역한 책 중 스릴러는 아닌, <자기만의 산책>을 재밌게 읽고 나서 이 번역가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아직 목록에만 올려 둔 <토니와 수잔>도 좋아했던 영화의 원작이 된 책인 줄 여기서 알았네.) 코르셋과 치마 입고 하루 종일 걷고 산을 오르던 빅토리아 시대 여자들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그 책을 읽는 게 그렇게 짜릿했고 그 덕에 번역가의 다른 책들도 따라 다녔다. 지금은 연재를 쉬고 계신 (듯한) 모 포탈의 연재 콘텐츠도 재밌게 읽었고, 여러가지 이유로 이 책 나왔을 때 반갑게 집어들었다. 

즐겁게 책 읽어 본지가 언제인지. 
물론 요즘의 나도 좋은 책들, 가슴과 머리를 열어주는 책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치만 책을 처음 펼치는 마음이 일견 비장한데다 읽다 보면 자주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생긴다. 활자와 멀어지는 일상에 대한 보복심리로 겨우 몸을 일으켜 책을 어기적어기적 고르는 상황이라 즐거운 읽기와는 다소 멀다. 그런 내가 예전엔 책을 어떤 마음으로 봤더라..하는 게 이 책을 읽을수록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소개하는 책들 중 읽지 못한 소설에까지 공명하게 된다. 소개하는 책이 재밌을 거 같아서, 좋은 리뷰라서, 혹은 소설의 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 읽는 독자의 재미 자체에 이입하게 되기에. 

읽는 동안 시간이 얼마 흐른지도 모르다가 고개를 들고서야 목이 뻐근하다는 걸 안다. 읽으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구경하고 조금씩 그를 알아가며 어떨 때는 아주 속을 모를 사람 누구를 닮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들기도 하고. 실제로는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일지라도 소설에서 만나면 내키지 않아도 이이를 따라간다. 그 시절엔 이렇게 살아도 됐다고? 무해하고 결백한(ㅋㅋ) 편견과 사생활 침해를 통해 다른 이를 이해할 구석, 나 역시 이해받을 구석을 하나씩 마련해 갔던 읽기. 읽는 이 각자가 생각하는 소설의 쓸모를 겹쳐보게 하는 에세이다. 

AI가 대체할 직업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게 번역가라지만, 글쎄.. AI가 독자마저 대체할 게 아니라면야.(다 해처먹??!!) 어떤 번역가들은 대체불가능하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수님의 번역가(편애라도) 찐사랑....소설 찐사랑... 나는 소설 사랑한다면서 바깥으로 나도는 나쁜 독자... 읽어도 꼭 도망칠 소설만 읽고 내상으로 피토하는 독자... 나두 이렇게 맑고 가만하게 독후감 쓰고 싶지만 이번 생은 어렵겠음...(자꾸 순화하게 되네요 성지라 댓글마저 ㅋㅋㅋ)

유수 2023-07-14 10:55   좋아요 2 | URL
사드 읽으심??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1:01   좋아요 2 | URL
네 권을 끝으로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 보지 말자... 근데 마저 읽을 게 칠조어론이라 그놈이 그놈...

유수 2023-07-14 11:13   좋아요 2 | URL
으샤샤 반님 올해는 치우는 해인가 봅니다. 체하지 마소서…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1:45   좋아요 2 | URL
알라딘이 적립금 너무 안 뽑아줘서(리뷰 월17편 썼음 참가상이라도 좀 주라구) 우씨 이달엔 책 거의 안 살거야(거의 는 보험으로 붙이는...) 이러고 집에 쌓인 거나 치우자! 하는데 자꾸 고전 명작 명저 냅두고 그래버렸네요... ㅋㅋㅋ

난티나무 2023-07-14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사지….

유수 2023-07-15 10:48   좋아요 0 | URL
전자책도 중고도 기약이 없어보이죠? 세일즈포인트 슬펐음.

서곡 2023-07-14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의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그 에세이 잘 읽었답니다 ‘자기만의 산책‘ 재미 있어 보이네요 기억해둬야겠어요 굿나잇요!

유수 2023-07-15 10:46   좋아요 1 | URL
제가 그 책 재밌다고 한마디도 적은 적이 없더라고요. 페이퍼 기원! 셀프 기원!
 

한 줄도 읽기 힘든 날은 얇은 책 아무거나 집어 한 페이지를 사진 찍기로 한다. 그러면 그 문단, 그 꼭지. 조금은 읽게 되네. 찍고 공유만 할 거야, 같은 생각도 유용해지게.

쌤소나이트 가방에서 꺼낸 웨딩드레스는 의외로 멀쩡했다. 변색된 부분도 없었고 구김도 심하지 않았다. 청담동의 어느 웨딩 부자재 가게에서 구입한 가장자리에 레이스를 돌린 3단 베일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어디서 본 건있어서 이 드레스를 사진으로 남긴 다음 작별 인사를 고한뒤 비닐에 싸서 다른 버릴 물건들과 100리터짜리 종량제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아이를 갖지 않았으니 대를 이어 물줄 일도 없다. 딸을 가졌다고 해도 물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아이에게 물려줄 것보다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가득한 것 같다. 깨끗하고 검소하고 상냥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부지런하고 현명하며 맑은 피부와 적당한 몸매를 유지하는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나아가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마흔두 살의 봄, 스물넷의 웨딩드레스와 함께 나는 이 모든 것을 차곡차곡 봉투에 담아 폐기했다. - P3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3-07-12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봐!!! 당근마켓이 있다규!!!! 지구를
사랑한다는 그짓말

유수 2023-07-12 21:13   좋아요 2 | URL
그래서 당근마켓 나오는 챕터도 있어욬ㅋㅋㅋ 도사님
 

밑줄

….알게 모르게 착한 아이로 살아가길 강요당했던 분들도 이렇게 일기를 써보시길 바란다. 인간은 원래 사소한 것 때문에 마음을 다치고, 유치한 것에 분노한다. 그런 마음을 자각하고 자신을 위로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 마음이 흘러가는 방향을 아주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기쓰기보다 더 좋은 방법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아무래도 온라인 일기보다는 종이에 쓰는 일기를 더욱 추천한다.
그리고 종이 일기장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곳에 숨길 것! - P64

내 직업을 번역가라고 밝히면 집에서 일하니 아이도 살뜰하게 챙겨주고 얼마나 좋아요? 하며 아주 부러워하는 남자들의 생각과 달리 따뜻한 집밥도 그리 열심히 차려주지 못했다. 장을 보고, 그렇게 사온 식료품을 정리해서 냉장고와 찬장에 넣었다가 요리하고,식탁 위에 차리고, 설거지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 P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주는 유난히 버거웠다. 둘째 아이의 고열이 며칠 내내 잡히지 않아 입원했고 초등학생 첫째 아이는 전학을 앞두고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있었다. 병원 밥을 안먹어서 피골이 상접한 지경인 둘째만큼 첫째의 속 시끄러움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어떤 (불유쾌한) 외부 자극도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첫번째로 보이는 반응인 아이니 더욱이 그러했다. 적응해서 잘 지내는 곳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떠나야 한다는 게 세계의 첫 지각 변동일 거고, 그저 내 기우거나 지나친 노파심이라면 좋을 텐데. 이사가 구체적으로 정해지고 나서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이 아이를 안심시켜야 하니 시간과 공을 들여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판단했다.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주 아이는 전에 없이 악몽을 꾸고, 잠결에 하소연했다. 평소에 내가 들어본 말은 응, 엄마, 알았어, 그래, 좋아가 다였는데. 어둠 속에서 내 품에 안긴 아이는 전혀 다른 말을 하며 울먹였고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뜬 눈으로 밤을 보낸 게 무색하리만치. 어제 밤에 무슨 말했는지 기억나?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피로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 머릿속이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기분 전환은 혼자 읽는 것으로 하는 편인데 아무것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짬이 난다고 해도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고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하는 볼멘 상태로 보냈던 것 같다. 그 시간들이 나를 좀먹고 있음을 알면서도 도리 없이 자신을 내어주면서.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서점에서 책을 몇권 샀다. 주문하고 보니 동네 서점의 책들은 배송이 걸리기 마련이라 온라인에서도 샀다. 바뀐 온라인 서점의 상자포장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책 크기에 맞추어 박스가 재조립(?)된 형태였고 비닐테이프를 뗄 필요도 없었다. 사소한 것들에 감명씩이나 받으며 배송 온 박스들을 접어 분리수거하고 책들을 차곡차곡 쌓고 꽂으면서 정신 차릴 때쯤 모님이 선물을 보내주셨다. 아. 여기서 솔직해도 된다면 기쁜 마음보다 앞서 나가는 내 호기심. 뭐 고르셨을까? 이미 여기저기서 책을 사댄 내 허기와 보복심리의 연장선에서 급하게 링크를 열었을 때 본 책은, 내가 고른 것과 같은 책. 내 몸은 입원실 보호자 자리에 있는데 마음은 같은 책이 두권인 책상 위(아직 두번째 책이 도착하기도 전인데 망상)에서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날 위해 고른 것과 친구가 날 위해 고른 것이 일치한다는 것의 뭉클함. 그대로 말하는 것 이상 바람직한 표현을 못찾겠다. 그렇게 좋았고, 유월 내내 계속 덧났던 내 마음이 일순 달래졌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7-10 0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0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0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1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3-07-10 0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마음과 마음이 포개지는 그런 순간이 있더라고요. 유수님에게 그런 순간이 있으셨다니 다행이고 또 그 순간을 엿보는 저도 마음이 너무 좋네요.

꿀꿀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날씨인데.... 아이들과 씨름하는 중간 중간 시원한 바람이(에어컨 바람이더라도 그런 시원한 바람이) 유수님에게 불어오기를....

2023-07-10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두 권이야 인싸는 좋은 책들이 막 한 번에 온니 좋아요 이러고 몰려오는 군요… 한 어린이는 몸이 아프구 한 어린이는 맘이랑 뜰 자리가 아프구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이런 생각도 나구 나는 안 아픈데 환자고 혼자 태평해서 미안한 여름이에요… 내 새끼 하나는 헛기침하는 틱이 생겼는데 나는 다들 모르는 척 냅두면 낫고 거기에 대해 자꾸 뭐라 하면 몇 년 간대 ㅋㅋㅋ하면서 혼자 (지가 오은영이야) 진단 내리고 방치하구, 또 한 새끼는 오늘 공부 다 했니? 게임 시간 안 남겼니? 성의 없이 체크하고 아이스크림 먹고 싶음 먹어라…하고 방치하고 에미는 7월에만 벌써 9권을 쳐 보고 있대요… 그냥 나쁜 새끼 여기 있다고 일러봤습니다….힘 내라고 안 할게! 애기들은 힘내서 얼른 나으렴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ㅋㅋㅋ(지극히 엄마 중심적 관점)

유수 2023-07-10 12:0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우리의 새끼들.. 너네는 힘내고.. 엄마들은 좀 더 널부러져서 책이나 볼게.. 7월 9권 뭔일이에요. 너무 좋다. 더 달려요. 전 동시대 과학책 별로 관심 없는데 ”과학책으로 힐링하신다는“ 글 써놓으신 거 보고 또 드릉드릉하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2:04   좋아요 2 | URL
일단 힐링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내는 나새끼는…사드의 ‘악덕의 번영’과 박상륭의 ’칠조어론3‘-마을놈들이 스님 산 채로 석굴암 같은 데 묻었고 책은 600쪽 넘게 남아서 나 진짜 큰일 났다고 한다… 하여간에 그런 병행 독서 하면서 좀 얇은 책들이랑 다음 힐링은 뭘로 할까 힐끔힐끔 하고 있습니다… 달리다 지치면 수1 쎈부터 다시 걸음마 하는 걸로 ㅋㅋㅋㅋㅋ

유수 2023-07-10 12:23   좋아요 1 | URL
칠조어론 나는 정말 모르는 세계.. 예전에 댓글 달렸을 때 아주 얼벙했던 스스로가 생각나네요. 수1쎈 크.. 추억 돋구요 ㅋㅋ

수이 2023-07-10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겠다 유수님!! 부럽다 부러워!!!! 나 책 안 읽고 막 놀고 있다가 유수님 책 자랑 인증샷 보니까 책 읽어야겠다 싶습니다.

유수 2023-07-10 12:25   좋아요 0 | URL
잉! 저는 매번 수이님 포스트 보면서 한결같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진짜로..
왕림&댓글 달아주셔서 넘 좋아요. 제가 로또를 사야대나..ㅋㅋ

2023-07-11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6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