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째서 어머니가 매년 일기장을 한 권 한 권 사 놓고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 물려주었는지 알지 못한다.앞으로도 알 길이 없으리라.백지 일기장이 안긴 충격은 두 번째 죽음이 되었다.어머니의 일기장은 종이 묘석이다.나는 54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이다. 20대 여성이던 시절에는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질문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젊은지 깨닫지 못했지만, 그게 어머니들의 자부심 아닌가? 자신의 젊음을 숨기고 아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말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로 괴로워하지 않는 것은 어머니들의 전문 분야다. 자신의 문제에 면역이 된 어머니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위기만을 짊어진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욕구를 다른 사람의 욕구로 덮는다. 그늘이 없는 이야기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식일것이다. 여성으로서 우리는 직사광 안에서만 존재한다는.여자들이 새였을 때, 우리가 아는 것은 달랐다. - P11
"당신은 구제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나를 설득하는 얘기가 대부분이었어요."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것이 충격적이다. 일말의 자기애가 나를 이끌어 그를 만나러 갔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코올은, 그리고 알코올로 인한 피로와 자포자기는 나를 탈진시켜 더 이상 싸울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 P92
어떤 책일지. 로더 멍크.
그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책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허공을 응시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글이었다. 뼈대는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지적이었지만, 그 뼈대 바로 위에 입혀진 육체는 시적인 지성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작가는 권위와 인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 평범한 여성이 매일 하는 경험을 소재로 끌어왔다. 그 은유는 놀라웠다. 로더가 사용한 병치 기법의 독창성 덕분에 독자는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과 성장을 거부하고자 하는 욕망이, 세상에서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과 세상에서 존재를 인정받아야 하는 일에 대한 적대감이, 자기창조에 대한 열망과 증오가 권위라는 장치의 내부에 한데 엮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권위의 역사에는 정확히 모든 여성의 삶이 그렇듯 유년기가 연장되면서 생기는 타락의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분열의 이야기였다.통렬하고 심오하며 입속에서 쇠처럼 쓰디쓴 맛을 느끼면서 써낸 이야기. - P128
재밌게 읽었다. 이런 이야기, 이런 그림책 더 없나, 찾게 된다. 아이가 (자발적으로) 책 읽는 것에 의욕이 없어서 참으로 힘빠지는 나날. 뭐, 그래 책 안 읽으면 좀 어떠냐 하는 마음도 있는데 이제까지 읽어온 것에 보상받고 싶은 쫌스러운 심보가 내게도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