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평전이 나왔다고 한다. 출판사 책 소개를 가져와 보면, 


“평전은 성별, 계급, 인종, 세계평화 문제와 차별에 맞서 싸워 온 정치적 활동에 초점을 두어 생생하게 조명한 것으로, 원제는 ‘애프터 더 미러클(After The Miracle: The Political Crusades of Helen Keller)’이다. 즉 헬렌의 삶을 “영감” “기적”으로 묘사하는 주류화된 이미지와 감상적 서사를 불식하고, 잔인하고도 복잡한 20세기 정치사 속에서 신념을 지닌 인물의 초상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헬렌 켈러가 매카시즘의 광풍 속, 미국시각장애인재단(AFB)의 활동가로 일하는 중에 노골적인 그의 정치적 신념이 그 자신의 평판에 큰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평생을 바쳐 일군 대의를 위태롭게 한다는 강력한 주변의 압박으로 인해, 어떻게 그 자신의 견해를 얼버무리거나 숨기게 되었는지를 ...”


헬렌의 삶을 영감, 기적으로 묘사하는 주류화된 이미지와 감상적 서사를 불식.. 재밌을 거 같아 이 책 신청이다. (오늘 도서관 홈페이지 들락거리는 날. 희망도서 신청이 곧 끝날텐데 될까? 동네 도서관들은 진작 다 마감되었다.) 헬렌 켈러의 삶이 어린이용 위인전에 교묘하게 짜깁기된 바 있고, 어린이 독자들은 반복적으로 그 유년기 해피엔딩과 기적 서사를 주입받고 자라왔다는 지적,  켈러 본인은 누구보다도 신랄한 사회비평가였다는 말을 나는 어디서 들었더라. 아마 처음은 <요술봉과 제복>에서였던 거 같다. 














”반면 ‘구경당하는 사람’인 헬렌은 당연히 정반대 입장을 갖고 있었다. 헬렌의 자서전은 동물원 우리 안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시점, 이야기의 주인공 입장에서 이야기 향유자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서술됐다. 헬렌이 학교 교육에 실망한 일이나 대학 졸업식 보도 내용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대목을 읽어보면 … 헬렌 켈러는 신랄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회비평가였다.“337


“헬렌 켈러는 자신이 성녀화(희화화)되는 과정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 헬렌 켈러만큼 사람들 입에 성녀로서 오르내린 위인은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헬렌만큼 성녀라는 지위의 허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헬렌은 그 실체를 알면서도 성녀를 직업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었을까. 물론 쇼 비즈니스로써 말이다.“


절판된 이 책 재밌었다.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읽는 동안 즐거웠다. 다루는 소재가 세일러문 같은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어린이 전집에 이르기 때문에 울퉁불퉁할 수 밖에 없지, 편드는 마음도 있었다. 이런 책 더 읽고 싶어!하는 기분이 마구마구 들었다. 그런 면에서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도 나한테 너무 소중한 책이야. 작가 신간을 기다립니다.. 이런 책 더 없나? 해시태그 달아서 정리해보면 좋을 거 같은데!
















아무튼,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넘어갔던 헬렌 켈러 이야기를 다시 만난 건 이 책에서였다. M. 리오나 고댕은 시각장애인 공연예술가, 작가라고 한다.

















<거기 눈을 심어라>는 서문에서부터 헬렌 켈러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헬렌 켈러의 자서전은 <헬렌 켈러 자서전>과 <내가 사는 세계>, 두 권이라고 한다. 후자는 절판되어 별로 읽히지도 않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 책이야말로 헬렌 켈러 본인이 어떻게 세상과 화/불화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책이라고. 

“켈러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자신의 지각 작용이 타인이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 감각에 크게 의존한다는 이유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때로는 의혹까지 사고 있다고 좌절감을 표출했다. ”17

여기서 요점은 아주 분명하다. 켈러를 일곱 살 때의 해피 엔딩으로 포장하는 것은 감상적인 어린이책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깔끔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같고, 켈러의 이야기가 비장애인에게 희망과 감사를 느끼게 해주는 역경 극복의 단순한 문제라는 인상을 준다. 그 이야기는 그녀에게 복잡한 성인기가 있었음을 부정한다. ”19 


그 때 다 못읽었던 책인데 오늘 들고 나가야겠다. 램프요정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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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26 1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유수 님 서재에 오면 꼭 읽고 싶은 책을 소개받고 가게 됩니다. 요술봉.. 은 표지가 어쩐지 안읽고싶게 생겼는데 제일 흥미롭네요. 읽어봐야겠어요.

유수 2024-09-26 12:11   좋아요 2 | URL
안 좋아하실 거 같애! 그치만 읽어봐주세요- 하는 저의 오락가락하는 마음ㅋㅋㅋ

다락방 2024-09-26 1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맨 위의 헬렌켈러는 저도 희망도서로 신청하려고 했더니 2024년도 희망도서 신청 마감되었다네요. 휴..

반유행열반인 2024-09-26 11: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애기 때나 본 헬렌켈러 위인전이지만, 볼 때마다 실 제목은 설리번이 아닐까 하는 전개…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9-26 1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난 못한다 난 설리번 못해… 템페스트의 캘리번할래 난… 템테이션의 짐승…(이게 아닌데…)

유수 2024-09-26 12:12   좋아요 3 | URL
캘리번 그게 뭐예요 ㅋㅋㅋ 설명해주세요. 설리번 위인이시죠. 저도 새삼 놀랍다. 물이라고!!! 내가 계속 소리치고 있을거같은데…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9-26 12:24   좋아요 3 | URL
그 캘리번의 마녀의 캘리번이랑도 같다는데 ㅋㅋㅋ 그냥 유럽놈들이 길들이고 지배하려 했지만 끝까지 반항하려는 야성 쯤으로 후려칠게요 ㅋㅋㅋㅋ

유수 2024-09-26 12:27   좋아요 3 | URL
공부해서 오라는 말씀 잘 알겠습니다 셰익스피어라고요?😭😭
 

그래도 그는 시간을 약간 벌었다. 아니, 사실은 시간을 산 셈이었고, 부디 그 대가를 치르다 파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늘 오후를 얻기 위해 남은 삶이라는 동전을 치른 듯이.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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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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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 책이 있다. 짧은 소설이 두드리는 긴긴 노크. 


약속받은 번영과는 달리 쇠락의 기미를 더해가는 동네, 보텀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술라>는 시작한다.  시킨 일을 끝내면 농지를 주겠다 해놓고, 왜 척박한 꼭대기 땅을 주냐는 흑인 노예의 물음에 하나님이 굽어보는 천국의 바닥이 여기 보텀이라는 백인 농부의 생색이 이 동네의 시작이었다. 노예는 그 말을 믿고 언덕에 씨를 뿌렸다. 기묘하고도 자연스럽게 그 후로 타운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면면에도 이 땅의 기운이 감돈다. 보텀이자 보텀이 절대 아닌, 억압과 기만을 품은 땅.

술라와 넬은 분명 대비되는 인물인 것처럼 등장했다. 서로 다른 집안 내력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엄마들의 성격, 거기에 더해 주양육자(를 꼭 짚자면)라 할 수 있는 엄마/할머니들 각자의 굴곡진 서사. 이 조건들이 만들어낸 양육 환경 아래 아이들이 경험하는 집 안의 풍경까지 극단적으로 달랐다. 그때부터 나도 둘을 구분해가며 읽기 시작했을까. 1부 마지막을 지나 술라가 돌아오는 2부로 가면서부터는 앞으론 제각기 평행선을 갈 거라는 게 자명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 날 아무리 영혼의 단짝이었대도 말이다. 그 분기점에서 넬은 주드와 결혼을 결심하고, 술라는 그 결혼식장을 웃으며 떠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10년 동안 목격되지 않는다.   


돌아보면 둘의 서로에 대한 끌림은 필연적이고 남다른 데가 있었다.  소녀들이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에서 으레 그런 것과 다르게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점이 어째 사늘한 관계. 그런데도 술라와 넬의 서로를 향한 맹목과 그게 품고 있는 위태로움을 납득할 수가 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채워주는 동시에 비워버리는 사이도 존재한다. 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오래 남아 회자되는 관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같은 것을 갈망한 적이 있어야 저렇게 휘말리기도, 대립하기도 할테니깐.
그들은 만나면서부터 즉시 서로에게 아주 충실한 친구다. 그 뿐 아니라 우정에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둘은 아주 숙련되었다구 할까.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는 데 어떤 이질감도, 부자연스러움도 없다. 교감과 동질성, 겪어본 적 없는 것에 대한 동일한 열망은 시행착오 한 번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준다. 충격적인 일련의 사건들도 그들의 결속을 은밀하고도 단단하게 해주는 기폭제가 될 뿐이고..


욕망도 삶의 형태도 추구하는 바대로 이룰 수 없을 때는 은폐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해지는 때가 온다. 그래야만 편해진다. 술라는 그렇지 않았던 거고. 구해지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구원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일찍이 예감했던 터였다. 보텀 사람들이 돌아온 술라를 보고 수군대면서 문을 닫아 건 것처럼 나 또한 어느 정도는, 돌아온 후의 술라의 행보를 이질적으로 느꼈다.  그들도 나도,  스스로에게조차 눈을 감기로 선택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그동안 그리워했던 것은 주드가 아니었다는 넬의 울부짖음과 함께 책을 덮고 나서야 내 생각도 거기 가닿는다. 책 초반에 내가 시도했던 어설픈 이분법이 힘을 잃는다. 술라와 넬이 마주했던 불합리와 관습적 억압, 중층으로 퇴적된 불행의 면면을 잠시나마 들여다 보고 온 것이다.  토니 모리슨은 작은 흑인 타운, 보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암암히 그려내는 것만으로 “독자를 충격”한다.(김유태, <나쁜 책>) 작가가 유지하는 거리, 인물 누구에게도 쏠리지 않은 시선, 타운 정경에 대한 담담한 묘사는 그 충격의 시차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내게 계속 돌아오는 노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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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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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08: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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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08: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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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0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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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08: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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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9-11 10: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좋은 글.............. 알라딘 직원으로 비밀리에 영입해서 하루에 글 한 편씩 쥐어 짜내고 싶은 글이에요. 제 댓글이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글에 어울리지 않지만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항상 토니 모리슨이 어렵고 힘들어요. 제게는 안개 같은 분이구요. (사실 그런 분들이 많기는 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에 읽을 때는 유수님의 이 리뷰를 기억하면서 읽어야겠어요. 그럼 조금이라도 수월할 거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듭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세요. 날이 덥다고 합니다^^
 
케냐 니에리 레드 마운틴 AA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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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빠르게 동나는 여름이로다. 배송완료 메시지 보고 뜯으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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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8 2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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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05: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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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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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2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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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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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15년 전 논문 굳이, 보부아르 독법 겨우 따라가면서 엉엉 울어도 되는 건지. 아무려나… 쓰인 지 몇년이 지났든.. 나 스스로가 내 여성성을 어떻게 죽이는지 어떻게 확립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활자가 임명하는 최소한의 과업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자신을 주체로 세우는 과정에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타자성, 즉 여성성을 오직 가상적으로만 죽인다.”

필자는 여성의 완전한 초월이 불가능한 이유가 더 이상 열악한 사회적 조건과 연관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많은 반례가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경제적 수입이 넉넉한 여성도 남편이나 자식에게 강하게 결탁되어 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여성이 초월성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필자는 보부아르와 달리 여성이 단호한 선택을 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이유는 완전한 초월이 결국 원하는 것을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여성들은 부정을 통한 자유의 실현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인정해줄 타자와의 연관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자신을 주체로 세우는 과정에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타자성, 즉 여성성을 오직 가상적으로만 죽인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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