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토론문화가 낯선 까닭은
각종 차별, 권위주의, 문화적 획일성, 도덕적 능력 부족......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토론문화가 약하다고 안타까워한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토론은 그저 사람들이•모여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횟수로 보자면 우리가 남보다 뒤질 것이 없다. 우리는 오히려약간의 고독이 사치가 될 정도로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살고있지 않은가. 토론을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매우충족시키기 어려운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 전제들을 이해해야, 토론문화라는 것이 우리가 공들이고 노력해야만 향상될 수 있음을 납득하게 된다. 이상적인 토론이라면 ①문제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논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②참여자의 모든 의견이 자유롭게 제시될 수 있어야 하며 ③논의과정에서 의견의 설득력 외
에는 어떤 힘이나 권위도 작용해서는 안 되고 ④ 토론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구속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반대로 합의가되지 않았다면 의견 차이가 존중되어야 한다.
①과 ②는 참여와 개방성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론은 원칙적으로 이해 당사자가 모두 참여하여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경청해야 한다. 아무리 토론에서 만장일치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이해 당사자의 일부가 참여에서 배제되었다면, 또 모두가 참여하였더라도 일부의 목소리가 억눌렸다면 그 합의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③은 논증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이 조건은•토론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전제 위에 서 있는지를잘 보여준다. 제대로 된 토론이라면 논의 과정에서 원칙적으로 의견의 설득력 외에 어떤 권위나 힘도 작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이 도대체 쉬운 일인가? 의견의 설득력이란얼마나 자주 물리적 힘, 문화적 권력, 사회적 지위, 성 역할 구별, 연령 차이에 의해 채색되어 버리는가. 또 상황이 긴박할수록 토론의 여지가 줄어든다. 당장 눈앞에 적이 쳐들어온다면, 또는 오직 생존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라면 한가하게 토론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문화적 획일성도 토론이 자리 잡지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이미 뻔히 알려진 경우 우리는 토론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권위주의, 차별, 긴박성, 문화적 획일성은 토론문화의 뿌
리가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④는 도덕성과 제도의 조건이다. 합의 당사자들은 토론에서 이루어진 합의를 준수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자신의 이익을 조금 침해한다고 해서 합의사항을 성실하게이행하지 않는다면 서로에 대한 신뢰는 금세 깨어지고 토론의 의미가 퇴색한다. 상대가 합의된 사항을 준수할 것이라는기대를 할 수 없다면 누가 진지하게 토론에 임할 것인가. 그런데 이 조건 역시 그렇게 쉽게 충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합의 이후에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닥치면, 합의사항을 지키는 것보다 어기는 것이 나에게 당장 더 큰 이익이 될 것으로 보이면, 합의를 지키려는 우리의 의지는 쉽게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론문화를 위해서는 웬만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합의사항을 준수하고자 하는 도덕적 의지, 그리고 실제로그런 의지를 관철시키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합의사항의 준수를 서로의 도덕적 의지에만 맡겨두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특히 내용이 아주 중대하거나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합의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들은 합의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런 제도적 장치가 있을 때 우리는 설령 상대가 합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줄어든 경우에도 합의사항과 달리 행위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성장 과정에서 합의사항을 준수하려는 도덕적 태도와 용기를 배우는 대신 임기응변을 지혜인 것처럼 배우고, 사회의 제도적 장치가 공정성에 따라서
즐거움 되찾기
철학이 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이무엇일까? 나는 어떤 즐거움, 아주 고급스러운 즐거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많은것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남보다 더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처럼 철학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성철 스님이 준 감동의 정체도 그런 즐거움에있는 것 아니었을까? 그가 고행 끝에 이지러진 얼굴을 보였다면 모두가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았을까? 믿기지 않는 고행을 하고도 해맑게 웃는 표정 때문에 세속의삶들이 그 앞에서 자신의 누추함을 돌아보았던 게 아닐까?
외치고, 비판하고, 투쟁하더라도 바탕에는 즐거움을 느낄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인문학자들이 위기를 얘기하는데, 도와달라고 아우성치기보다 우리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라고 할 자신이 있다면, 인문학의 아우라가 훨씬 커질것 같다. 도와달라고 외치는 녀석은 아무래도 성가실 따름인
데,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는 친구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준비는 표정 관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실실 웃고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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