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내일의 고전
신종원 지음, 한규현 그림 / 소전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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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이른바 명작(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의 첫 경험이라면 떠오르는 것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전쟁>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겨울 외삼촌이 서점에 날 데리고 가서 직접 골라준 책이다. 심지어 앞장에 움베르트 에코에 대해, 장미의 이름이라는 작품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추천하는지가 담겨있는 편지까지 써서 주었다.

자취를 일찍 시작해 여러번의 이사를 하면서 무게 및 공간 이슈로 인해 많은 책들을 처분했지만(많이 아깝다 지금 생각하면)삼촌이 선물해준 장미의 이름 상,하권은 아직까지 생존해있다.

이런 특별함이 담긴 책이라 열심히 읽었다.
말 그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읽어야 겨우겨우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책이었다. 라틴어부터 시작해 많은 기호학적 해석들과 수도원이라는 공간에서 오는 종교적 언어와 문체들, 수백년 전의 문화 등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정말 읽기 힘들었다.
그때는 페이지를 온전히 이해해야 넘기는 못된(?)버릇이 있었어서 더 걸렸다 정말 3개월은 걸린 듯 하다 두권 읽는데🤣

하지만 이 노력(?)과 선물받은 추억으로 인해 움베르트 에코는 나의 최애 작가가 되었고, 왠지 참고문헌을 보지않고 머리속에서 바로 꺼내 옮겨놓았음직하게 보이는 하나의 문장에 여러개의 여러학문의 지식이 동시에 담겨있는 그런 문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글을 써보기도 했지만 엄청난 재능의 영역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신종원 작가 의 #불새 (#소전서가 출판)을 읽고 떠올랐던 책이 바로 <장미의 이름>이었다.
종교적 사상과 문체가 가득담겨있고, 이천년이라는 천주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득 담겨있는 팩트들이 <불새>가 페이지터너가 아님을 말해주지만 그래도 소설을 팩트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마 현실같아 더 페이지는 넘기기 힘들었던 것도 같다)

적절한 순간에 수록되어있는 삽화가 페이지를 넘기는데 도움이 된다. 마치 마라톤대회 곳곳에 위치한 급수터 같은 역할이랄까.
<불새>에서는 삽화가 아주 중요하니 꼭 자세히 보는 것을 추천한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신부, 바오로는 그의 아버지 신부 베드로의 추천으로 인해 그만두기전에 최후의 만찬에 쓰인 성배를 보고나서 결정하기로 하며 길을 떠난다.

성배가 있다는 스페인에 도착하였으나 성배는 도난당하고
성배를 찾아 나서는 광신도와 유력용의자, 전직 테러리스트 페트리와 만나게 되면서 이천년이라는 종교의 모든 역사에서 성배의 역사를 마주하면서 ‘최초의 신학자’바오로라는 이름을 가진 것처럼 진실을 깨닫고 탐구해나간다.

대의에 의한 소수의 희생.
세상이 바뀌어도 소수=사회적약자=등한시 여겨지는 것=희생될 수 밖에 없는 존재 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양 존재해왔다.

그와 나란히 공존해온 권력과 힘에대한 동경으로 인한 힘싸움, 전쟁도 함께 역사에 남아있다.

신종원 작가의 <불새>에는 이 두가지 모두가 담겨있다.

성배를 둘러싼 전쟁과, 종교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신도를 팽개치는 아이러니함, 반복되는 역사에서 항상 불새가 나타났다.
그 불새는 현실일 수 도있고 환각 일 수 도 있다.

현실이라면 세상을 수호하는 가디언, 영웅일테고
환각이라면 옳은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 신념일테다.

삶은 모습만 다를뿐, 인류가 정해놓은 문명의 시작과 끝이 있을뿐 끝없는 소멸과 탄생의 반복이다.

0과 1 그 무한의 반복 속에서 각 시대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성배들을 주인공과 함께 찾아나서면서 독자인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 신과 종교를 수천년의 세월동안 만들고 지키고 유지해온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자기도 모르게 계속 상기시키면서 책을 읽어 나간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이 더뎌지는 것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나면 후련한 스스로를 발견하게된다.
머리속에서 계속 따라다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린 순간의 후련함. 그것이 <불새>를 읽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참고서’도 존재한다

신종원 작가의 인터뷰와 평론가들의 <불새>에 대한 서평이 실린 <불새 : 인터뷰와 서평들>이 함께 증정되어 스스로가 간구해낸 답이 공감할만한 것인가 정답인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런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불새>같은 책은
읽어본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해보는 것이 책을 정리하기에도 오롯이 기억하기에도 좋은 방법이다.

얇은 검은책이 좋은 말벗이 되어 줄것이다.
깊은 사유와 그에 대한 대화를 좋아한다면, <불새>를 봐보길.
다음 원소시리즈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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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 상식과 통념을 부수는 60개의 역설들
조지 G. 슈피로 지음, 이혜경 옮김 / 현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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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어느정도 물러서면 이 지구의 모든 종들 중에서 가장 진리에 근접하였다고 스스로를 믿는다.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것은 인간뿐이니 다른 종들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불러주지는 않지 않았을까.

그렇게 지구에서 경쟁할 종 없이 지배한다해도 무방한 인류는 수백년동안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당당하게도 자기들이 믿는 보편적인 질서에 도그마Dogma(교리)라고 이름 붙인다.
(생물학에서 DNA-RNA-PROTEIN 의 과정으로 형질발현이 된다는 원리를 센트럴도그마 Central Dogma라 부른다)

과연 정말 모든것을 알고있고, 이미 알려진 것에는 틈이없을까?
그렇게 믿고싶은(아무생각 없이 그런가보다~라고)것은 아닐까.

그러한 진리라 믿는 것들의 틈을 우리는 역설이라 부른다.

#현암사 가 출판한 #보이는모든것을 의심하라 (#조지G슈피로 지음)에서는 이러한 역설을 다섯가지 분야에서 12개씩, 총 60개를 담고있다.

저자가 수학자 이지만 수학에만 국한 되지않고 언어,물리,철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역설들을 이야기하고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두 봉투의 역설, 이발사의 역설, 난수의 역설, 비극의 역설 등 평소에 잘 들어보지도 못한 역설들이 수두루빽빽하다(사투라인가? 아 몰랑😅)

이름이 낯설뿐,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되는(거창하진 않다)것들 예를들어 ‘내가 타려는 엘리베이터는 꼭 늦게온다’모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심지어 급할때 더 그렇다)것들이 엘리베이터의 역설로 봤을때는 아~무 문제없다(왜 문제가 없는지는 읽어보길 바란다)

또 ‘최고의 행복과 재미를 인생의 1번으로 두는 사람들, 쾌락주의자들은 매순간 도파민이 터져나와 행복에 겨워있어야 하지만 오히려 행복하지않고 불행해 한다’라는 명제도 오~ 맞아 라며 신통방통하다 생각하겠지만 쾌락주의의 역설로 살펴보면 또 아~무 문제없다.

이러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60개가 꽉 채워져있다.

이러한 역설들을 가득담아 무슨 말을 하고픈 것일까?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밝혀져있고 더이상 틈이 없다면, 이 세상은 더이상 발전하지못하고 재미없을 것이며 삶이 지루해 질 것이다. 따분한 것이다.

이러한 법칙들을 발견하기위해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내가 낄(설) 자리는 없다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련이 닥치는 매순간마다 생각한다.
입시, 취업, 연애같은 순간 좌절할 때마다 세상이 다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X같은 세상이라 욕하며 세상이 잘 못되었다 소리 칠것이다(나도 물론 그러한 사람 중 하나이다 po당당wer)

하지만 이러한 역설들로, 보편진리적이라 믿어왔던, 교리라 교만학게도 이름 지었던 것들이 허망하게도 허물어 지는 것들을 지켜보면 이 세상도 온전한 형태가 아니구나, 틈이 있구나, 아직 가능성이 있구나라고 위안을 받는다.

위안을 받으면 다시한번 일어설 수 있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용기내서 발을 디딜 수 있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용기나게 하고, 즐겁고 짜릿하게 만드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확실성 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미래, 능력의 한계를 속단하지 말자.

보편진리가 믿어오는 것들도 일정 크기의 표본집단을 가지고 노사한 하나의 조사값일 뿐이다.
그것에 나를 끼워넣어 답은 정해져있으니 될대로 되라라는 식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지금당장 거울을 보라. 이룬것 없이 나이만 들어있는 예전에는 썩 괜찮았던 내가 보이는가?
의심하라. 분명 멋진 내가 ‘당연하게’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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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보는 그림 - 매일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이는 명화의 힘
이원율 지음 / 빅피시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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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누구나 어렸을적(십대부터)에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을것이다. 몇살즈음에는 어떤 직업을 가져 몇살에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멋진 차를 타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갖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맘껏 여행도 떠나고 하는 행복한 상상.

그러한 상상을 40까지 해본 적은 굉장히 드물 것 같다.
(나나 내 친구들을 회상해보면 최대가 “40전에 ~해야지”식이었다)

그만큼 40이라는 나이는 뭔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상상도 못할만큼 먼 숫자이기도 했다.
당장 20,30(!)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40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었을까.

게다가 우리 부모님의 세대에는 40대는 정말로 뭔가 인생이 안정된 변화보다는 지켜냄, 유지와 같은 나이였으니 말이다.
부모님을 보고 자란 우리는 그러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세대가 급변하고 기대수명이 증가하면서, 생물학적 나이에 0.8을 곱한게 ‘실제나이’라고 다들 말한다.
큰 차이가 나지않는 것 같지만 40이라면 32살에 해당하는 것이다. 엄청난 차이가 아닌가.

실제로 지금의 40은 안정이라기보다는
계속해서 달려나가고 더 성장해야하는 시기인 것 같다.
남자라면 군대에 대학에 취준생(혹은 대학원)시기를 거쳐 취업하면 이십대 후반을 넘고, 바로 결혼을 했다고 해도 아이가 니제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이니 적어도 돈을 더 벌 궁리를 해야하는(실제로 굉장한 스트레스이다)때인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에서 32살로 인정받아 이직이 쉬운 것도 아니다.
실제 32살들이 존재하고 취직 1,2년차에 이직을 하는 MZ들이 워낙많기에 경쟁력이 떨어진다(경기가 어려워 경력있는 신입?을 뽑는 시기라 40의 이직이유와는 맞지않다)

그렇게 사회에서 어중간 위치가 되는 것이다.
불혹, 어떠한 유혹에서 흔들리지않고 단단하고 안정된 시기는 이제 옛말이다. 50은 되야 ‘불혹’같은 느낌이 들지않을까.

아직 한창 흔들리는 40을 위해
#이원율 작가가 지은 #마흔에보는그림 (#빅피시 출판)이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들로 인생의 격려를 보낸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 용기가 필요한 순간, 버텨야 하는 순간, 홀로 서야 하는 순간 이 4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이미 그 순간을 ‘살아낸’예술가들의 삶을 들려준다.

내가 좋아하는 앙리 마티스, 마크 로스코, 프리다 칼로, 에곤 실레, 클로드 모네, 알폰스 무하 등 기라성같은 작가들이 있다.

흔들림 하나 없이 불세출의 명작들을 떡하니 그려낸 넘사벽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더라.
<마흔에 보는 그림>을 보고나니 이들도 보통의 사람들로 보였다. 위대한 작가들을 동정해보는 귀한(?)기회도 얻었다🤣

여하튼, 좋아하는 그림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내마음이 이러하다!라고 느끼는 순간에 소개된 화가를 이야기 하자면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구스타프 클림트에게 할당된 순간은,
버텨야하는 순간 중 ‘말이 아닌 삶으로 증명한다면’이다.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중 한명이자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에곤 실레의 존경을 받은(제자를 존경하기도했던 스승인) 화가에게 말이 아닌 삶으로 증명이라니.

빈 대학에서 의뢰받아 그린 ‘철학’‘의학’‘법학’이 여론의 뭇매를 맞아 의뢰비를 환불해주는 와중에도 떳떳할 수 있던 이유이다.

위의 일화를 시작으로 클림트의 눈치보지않는 대범한 화풍으로 클림트는 매장되다시피 하였지만 그럴수록 그가 쥐고있던 기성의 명예와 부를 내던지며 결국 위대한 역작 ‘키스’로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그 이후 뇌출혈 합병증으로 숨질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붓을 들어 그림그리는데 바쳤다.

지금의 대중들에, 분위기에 흔들리지말고 행동을 확신할 실력과 열정을 가져라는 챕터가 참으로 와닿았다.

이와같은 18가지의 고뇌의 순간들이 책 속에 있다.
불안함과 고뇌를 안고있다는 것은 40언저리에겐 모두 같다.

이책은 아마 살아생전 중 가장 고독하다고 느낄 40언저리들에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유대감이라는 묘한 소속감을 안겨준다.

삶이 당신을 쓰러트릴때, 당신을 일으켜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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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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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거장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일이다.
많은 이들이 알아서 생면부지인 사람들도 애도를 표하기도 해서 떠나는길이 다른 사람들보다 덜 외로운것은 위안이 되지만, 그래도 떠나보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장이든 아니든 실제로 알고 지내는 사이든 아니든, 나에게 적지않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똑같이 힘든 일이다.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그러했고, 티켓팅까지 성공했으나 공연 취소로 결국 만나지못했던 마우리치오 폴리니, 류이치 사카모토 등이 그러하다.
그들의 작품을 좋아했을뿐 개인사를 빠싹하게 알고있지는 않았지만 며칠동안은 참 슬펐었다.

그런 슬픔이 최근 1년에 두번이나 더 있었다.
뉴욕삼부작으로 글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충격을 준 #폴오스터 와 야매(?)신도 이지만 그래도 내 종교의 대표자 교황 포프 프란치스코님 까지.

믿기지 않게 떠나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게 소식이 들려오지않으면 내가 기억하고 상상하던대로 잘 살고 있겠지 라는 먹연함때문에 생겼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 무책임한 막연함에서 오는 충격과 슬픔은 더 무책임하게도 아프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이 편안했기를 바라고 스스로를 돌아볼만큼 너무 갑작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전날인 부활절을 맞이하여
전 인류의 행복을 축언하시고 떠나셨고, 폴 오스터는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는 듯한 소설도 안녕을 고했다.

심리치료방법 중에 자기의 괴로웠던 일들을 글로 적어보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어디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일들을 글로 적어냄으로써 감정을 분출하고 그때의 나쁜 감정들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상기하기에 너무나 끔찍하다면 방어기제로 주인공을 자신과 다르게 설정한다고, 성별 나이를 바꾸거나 내가 동쪽에 산다면 글 속 주인공은 서쪽끝에 산다거나 하는 식으로.
올해를 뜨겁게 달구고있는 ‘나의 작은 무법자’또한 작가가 그러한 방법으로 쓴 책이다.

#바움가트너 (#열린책들 출판 #폴오스터 지음)도 일종의 자화상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퇴를 앞둔 노교수가 자신의 인생을 총 망라하는 글을 쓴다는 설정도 폴 오스터가 <바움 가트너>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미국땅에서 살아가며 겪은 유년시절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사랑하는 아내(아내의 사망유무나 시점이 다르긴 하지만/ 폴오스터의 아내는 꾸준히 글을 발표하는 시인이다, 바움 가트너의 아내는 평생을 바쳐 쓴 글이 있으나 발표하지 못했다. 그 글을 읽으며 바움 가트너는 일생을 돌아본다)가 비슷한 인생의 시기를 맞이한 바움 가트너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특별한 소재에서 특별한 감정을 뽑아내던 폴 오스터가 말년의 말년이 되어서 특별하다 할 것 없는 바움 가트너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쓴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글로 적어보니 위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특별하네)

가트너 라는 성이 정원사 라는 뜻이란다.
얼기설기 얽혀서 원래의 모양이 알지못할 정도로 원래의 형태를 잊어버린 나무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원래모습으로 생생하게 만드는 것처럼 가트너는 잊고있던 케케묵은 기억들을 다시한번 들춰내서 잃어버렸던 회색빛 삶을 생생한 천연색으로 돌려나간다. 그 힘으로 노년임에도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응 시작한다.

<바움가트너>를 통해서 폴 오스터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게 아닐까. 신변을 정리한다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고 끝을 준비하는게 아니라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얼마남았을지조차 확실하지않은 ‘내일’을 귀하게 여길 마음 가짐을 갖는 것이라고.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마지막을 앞둔 당사자나 그 당사자옆을 지키는 주변인들에게 그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소설의 특징은 스스럼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전지적인 시점으로, 또는 1인칭의 시점으로 기꺼이 경험하게 하고 그로 강한 몰입을,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장르소설의 대표인 가상공간물 같은 느낌이랄까.
캡슐 같은 첨단 과학의 힘을 빌리지않아도 누구나 강력하게 다른이의 삶을 강하게 경험하도록 하는것. 그렇게 내 삶에 다른 삶에서 배운 것을 새기는 것.

그것이 소설이고, 소설이 가진 힘이라는 것을,
폴 오스틴의 <바움 가트너>를 통해 다시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소설은 쓸모없는 것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이던 나를 반성하며. R.I.P. 폴 오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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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 소크라테스의 변론
플라톤.소크라테스 지음, 정상희 엮음 / 페이지2(page2)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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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여전히 인류에겐 철학과 사상은 되게 중요한 학문이자,
배부른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비하를 받기도한다.
그만큼 매 순간 사유해야하는 학문이라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사유라는 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이며, 그 역사가 유구하며, 철학사상들을 모르는 사람들도 철학이라는 학문은 누구나 알고(들어왔고) 철학자 한명씩은 이름을 알고있다.

기원전 시대의 사상가이며 철학자들이
상식처럼 이름이 머리속에 박혀있으니 말 다 했지.

수천년동안 인간 스스로도 예상치못한 속도로 진화해 오면서
마찬가지로 그와 비슷한 속도로 발전해왔을 철학에서도, 그 뿌리가 되는 원류격인 철학자와 그의 이론들은 꾸준히 회자된다.

#나는내가모른다는것을안다 (#포레스트북스 출판)의 저자도 스승 #소크라테스 와 제자 #플라톤 이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누구나 이름은 알고있는 유명인사이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같은 명언도 그들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하다.

저자가 둘인 이유는 그들의 대화를 기반으로 한 책이기 때문이고, 소크라테스의 철학들은 대화를 기반해서 꽃피웠다 라는 것늘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책으로 엮은 저자는 플라톤이 분명하고
그가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 세 편이 이 책에 담겨있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이는 자신이라는 신탁을 듣고 신탁의 진실됨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과 거리에서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함께 대화를 나눈 이들도 무지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로인해 진정한 지혜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즉 무지의 자각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이런 깨달음은 당시 기득권자들에게 자신들이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누명을 씌워 사형을 내린다.

형 집행전에 크리톤이 찾아와 대화를 한 것이 <크리톤>인데, 탈옥을 하자며 크리톤이 말하니 악법도 법이라며 지켜야한다며 거절한다.
하지만 불복하고 날뛰지 않으며, 생존보다 그릇된 행동으로 영혼이 타락하는 것을 더 나쁘다고 말하며 침착하게 순순히 형을 받아들인다.

이후 사형이 집행되어 독을 마시기 직전 제자들과의 대화가 담긴 <파이돈>에서는 그는 죽음이후에 영혼이 더 나은 세계로 갈 것이라고 믿는다며, 그 올바른 영혼을 위해 삶을 살아왔다고 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은 무지함을 깨닫기 위한 과정이며, 영혼은 육체보다 값지고, 죽음은 끝이아니라 오롯이 나를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

어쩌다보니 요즘 자기계발이나 행복에 관한 책들을 많이 보게 되어서 그런지 그런 책들에서 하는 말들과 소크라테스의 말이 합쳐져서 생각이 되더라.

무지함을 깨달으면, 삶에서 선택하는데에 있어 틀려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부담을 덜며 선택하고, 실패에서 겸허히 배우며 나아가면 되고 그러한 일말의 과정들이 기쁨이자 행복이라고.
어차피 우리의 모든 선택의 결과는 죽음이라며,
(삶은 B'birth' 와 D‘death'사이의 C'choice'이다 라고 하지않나)그러니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삶에서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깨닫고 최선을 다하는 과정들이 행복이니 매순간 행복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행복도 습관을 들여야한단다.
작은 것에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실패도 깨달음을 느낄 수 있게 해 감사한 것이고, 최선을 다한 그 경험도 값지고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물리적,금전적,사회적 성공이 행복이 아님을.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아끼고 노력하고 성실하며, 감사히 나아가는 것. 얻은 것을 기꺼이 나누고 다른사람에게도 배우는 것.
’삶‘이라고 느껴지는 이러한 생각이 ’행복‘과 동일한 것이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책들을 읽다보면 집중하는 부분들은 다를지언정
크게 공유하는 부분들은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물론 객관적으로 많지도, 다양하지도 않지만
읽었던 내용을 기록하니 좀 더 머리에 남고, 이 책을 읽다보면 저책에서 했던 비슷한 말이 떠오르고 나름대로 통합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몹시 즐거운 경험이었다.

책의 내용이 나의 인생의 한 모습과 닮았을 수도 있고, 내가 읽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했던 것과 닮았을 수도 있다. 그런것들을 발견해나가면 독서의 재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적극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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