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원전대로 읽는 세계문학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영귀 옮김 / 새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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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그레고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한 마리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글 시작이 아닌가 싶다. 기출 지문으로 고등학교 때 많이 봤던 글이었는데 돌이켜보니 해충으로 변했다는 것만 알았지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했고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저 작품이 의미하는 것,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애만 썼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처음으로 오롯이 마주한 #프란츠카프카 의 #변신 (#새움 출판)은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쉽지않았다. 함의적인 문장도 사용되지 않고 절대적 분량도 적었는데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나는 것이 과장을 조금 더해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끝을 향해 다가갈 때 글 속 인물들의 갈등은 커져감에도 오히려 글을 읽는 내 마음은 편안해뎌갔다. 책을 덮고 나서야 어느정도 내 마음이 그랬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레고어가 겪고있는 상황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레고어는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을 넓은 집에서 부족함없이 보살피기 위해 기꺼이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외부로 돌아다녀야 하는 출장 영업사원을 수년동안 계속 해왔다.
집에서 돈을 벌고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사업을 말아먹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레고어였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그레고어가 어느날 잠에서 깨어나니 해충으로 변해있었다는 설정보다, 벌레가 되었음에도 출근해야한다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는 모습과 결국 달라진 그를 보았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참 가슴아팠다.

벌레가 된 자신을 보고 당황스러워하고 두려워해야하는 것이 정상인데 아무렇지않게 일어나 출근하려고 하는 그레고어에서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짐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았고, 유일하게 날 어떻게 볼까 걱정하는 것도 가족 뿐이었다.

그레고어만 바라보며 돈을 벌 수 없을거라 여겼던 나머지 세가족이 각자의 방식으로 돈을 벌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레고어의 소외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유일하게 해충이 된 그레고어를 살뜰히 챙기던 여동생도 점점 오빠의 케어에 시큰둥해져간다.

그러다 결국 그레고어는 없는 무언가로 인식되고, 그의 방은 당장 버릴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무언가들을 쳐박아두는 곳으로 바뀌고 그레고어가 바닥과 벽 천장을 기어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된 방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아버지가 그에게 던진 사과가 박혀있는 등은 썩어가는 모습에 화가났다.

그럼에도 그레고어는 끝까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사랑했다. 결국 그레고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지못하는 ‘저것’이 되어버렸고, 잠과 같은 마지막 숨을 뱉어냈지만, 그레고어가 살아있을 때의 문장과 그레고어가 죽은 뒤 문장의 서술자가 여전히 그레고어인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큰 차이가 없다. 이미 그레고어는 인간의 형상, 해충의 형상 무엇이든 상관없는 해탈의 경지에 올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죽어서야 비로소 세 가족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며 희망찬 미래를 그려나가는 모습을 그레고어는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젊은 그레고어를 보면서 퇴직 후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하던 아버지 세대들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평생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제2의 인생을 기대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
집에서 밥 세끼 다먹으면 삼식이 라는 우스갯 소리도 있던데, 그 희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결국 그 희생의 무게는 점점 바래져간다. 그것이 희생의 덕을 본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고. 그레고어만큼의 큰 짐을 떠안고 있지는 않지만 K장남의 입장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록 해충이 되어버렸지만 그렇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레고어는 모든 짐에서 벗어나 본능에 따라 여기저기 기어다니며 하고싶은대로 했고 그때서야 스스로를 조망했다라는 사실도 씁슬했다.

이렇게 다들 오롯이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기는 힘든 세상이다.
책임지는 이도, 책임져지는 이도 살기퍽퍽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필요없는 해충같은 존재는 없다.
모두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어의 특징인 수많은 쉼표를 최대한 살리면서 원문의 뉘앙스를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한 새움 출판사 버전으로 나의 첫 <변신>을 경험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카프카의 복잡한 심정이, 알다가도 모를 인간군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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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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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벗어나자는 말이구나. 라며 막연하게 종교가 곧 진리였던 시절의 종말을 고하는 말이라고 이해했었다.

하지만 철학책을 몇권 읽고 나서는 저 말이 대변하는 니힐리즘(허무주의)가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그 어떤 삶의 목적이나 가치도 존재하지 않고, 이 세계 역시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존재하며, 그저 무의미한 생성, 변화, 소멸만이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힘든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방법이 바로 이 세상에 의미를 하나 둘씩 부여하며 나에게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인데 저렇게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면 삶을 살아가기가 너무 재미없고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두발 붙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입장에서 공감하기 힘들었다(아니 하기 싫었다)

하지만 #니힐리스트로사는법 (#문성훈 씀 #이소노미아 출판)에서는 니힐리즘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의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은 종교적 신이 아니고 이 세상의 다수들이 모여 옳다고 만들어놓은 ‘절대적으로 보이는’것들을 의미한다며, 그러니 세상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스스로가 납득하고 소중히 여길만한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허무주의, 니힐리즘이라 말한다.

그래서 니힐리스트란, 세상만사가 다 허무하다고 보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허무함을 강하게 긍정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를 자기 창조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며, 세상만사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는 고귀한 사람인 것이다.

철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왜?’라는 끝없는 물음이었다. 소크라테스도 하루종일 답보다는 ‘질문’을 하는데에 시간을 뷰냈다. 단 하나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철학도 이 세상에 ‘원래 그랬어’라는 이유로 막연하게 진리라 여겨졌던 것들에 왜?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점점 발전해 나갔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면 니체뿐만 아니라 철학의 다양한 학자와 이론들이 이렇게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내며 세상을 재창조해내는 니힐리즘에 준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은 그래서 니체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마르크스, 사르트르 같은 서양철학자 뿐만 아니라 공자, 장자, 노자 등 동양의 철학자들도 가져와서 실제 우리 삶을 스스로 규정하는 것들에 대해, 니힐리스트로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방법들을 알려준다.

특히나 문학 작품들의 예를 보여주면서 ‘허무’가 삶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우리가 예술에 열광하는 이유도 아마 우리의 삶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한 예술가의 삶에 대한 철학이 담겨져있다.
어떤 사건이 인생에서 벌어지면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번역한다. 그리고 그 번역한 것을 예술로 만들어낸다. 그 예술은 당연하게도 기존과 다르다.
그럼에도 수십년 수백년을 살아남아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공감받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나만의 기준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세상에 두발을 딱 붙이고 걸어나갈 수 있는 힘이 되도록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내는 것.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예술가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의 미학이자 니힐리스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어느정도 세상을 인식하고 기억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경쟁해온 우리다.
나도 덧셈, 뺄셈을 배우면서 엄마에게 꿀밤을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상대적으로 빠른 암산 속도를 가지기 되었지만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다 널위해서 그런거다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지 확실치 않은 것들이 제법 떠오른다.

이 책은 그런 것들을 명확하게 구분할 기준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그로인해 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배우고 깨닫는데에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눈 뜬 모든 순간을 내 기준으로 나에게 유의미한 것으로 꽉 채우게 해주는 가이드라인 같은 책이다.

앞으로의 인생 예술처럼 멋지게(죽이게)살고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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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구애
이나영 지음 / 자상한시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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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낀다.
그 외로움은 보통 삶이 버겁거나 힘겨울때 우리를 더욱 잠식한다. 그래서 우린 그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를 찾는다.
그렇게 한참 연락처 목록을 살펴보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터놓을 사람이 없다라는 것을 느끼고는 더욱 더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대부분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도 있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감히 이것은 잘못되었노라고 말하고싶다. 외로움을 느꼈을 때 찾아야할 대상이 잘 못되었다.
내가 느끼는 그 외로움, 고독함을 위로해 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의외로 자기 스스로를 강인한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들일수록 약한모습, 상대방에게 싫은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주는게 싫어(민폐라고 생각한다)오히려 스스로를 더 외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강할수록 더 약하고 잘못된 경우가 많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사랑하며, 격려를 받을 때 내가 가장 위안이 되는 존재는 바로 ‘나’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할 때 겪어봤듯이, 위로해줄 사람의 마인드에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의 힘듦이 보이고,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위로와 격려의 순간에 ‘나 자신’이 적절하게 나를 달래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보듬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를향한구애 (#이나영 씀 #자상한시간 출판)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나를 아껴주고 오롯이 나로 있게 해줄 가장 든든한 나의 파트너 ‘나’를 응원하는 일상 속 몇가지 방법들을 소개해준다.

혼자 자취하는 스스로에게 직접 만든 끼니를 제공하고, 취미를 가지고, 글을 쓰는 혼자 무언가를 해보는 것부터, 가족과의 여행같은 어색한 시간도 기꺼이 보내보고, 사는게 바빠서라는 이유로 스스로 잃어버렸던 소소한 감정들을 손에 쥐어 놓지 말라는, 세상에서 다양한 자극을 받아들이라 한다.

그리고 작가 스스로가 위의 경험들을 스스로에게 제공하며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자, 혼자서도 잘 살기위해 했던 것들이 다른 사람과의 사랑까지 불러들였음을 고백하기까지, 총 4장의 챕터가 언제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농후하게 흘러간다.

사이사이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 속 좋은 문장들이 함께 곁들여져있어서 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두번, 세번 곱씹게 하고,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잠시 누르고 곰곰히 생각에 잠기게 한다. 한권의 책을 읽을 뿐인데 수십권의 책을 읽는 것 같은 귀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책이다.

인생에 파도가 찾아왔다고 하면 보통 그 파도는 나를 넘어뜨리고 좌절케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를 향한 구애>에서의 파도는 그렇게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닌, 스스로가 멋지게 올라타 나를 더 빠르게 가슴후련하게 이끌어주는, 내가 삶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올라타 스스로 단단히 서 있을 수 있게 발판이 되어주는 무언가로 그려지는 것 같아 참 인상적이었다.

나를 사랑하자.
정말 많이 들어온 말이다. 좋은 말인 것도 알고 맞는 말인 것도 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가장 어려운 문장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인색하게 구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평생을 입력받고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백점을 주는 것은 나르시시스트,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등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남들이 나에게 백점을 주는 세상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남을 까내리는 것도 우리가 평생토록 받아온 입력값 중 하나이다.

결국 내가 스스로 백점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도 나에게 100점을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꼭 백점을 맞아야 성공인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누구보다 아껴줘야할 필요가 있다는 뜻일테다.

이 책은 간단하게 보이지만 그렇게나 어려워보였던 나를 사랑하는 방법들을 다정한 글로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
꼭 저자가 보여주는 방법이 아니어도 괜찮다.
저자가 책 본문과 함께 옮겨놓은 다양한 책 속의 문장들을 보며 스스로가 느껴지는대로 해도 물론 성공이다.

어떤 방법이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일 것이다.
기꺼이 ‘나’라는 시험지에 동그라미만 그려낼 멋진 색연필을 손에 쥐길, 그렇게 백점짜리 인생을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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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브 오브 본즈 - 호모 날레디, 인류 진화사를 뒤흔든 신인류의 발견과 다시 읽는 인류의 기원
리 버거.존 호크스 지음, 김정아 옮김 / 알레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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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인류의 기원이라 평가받은 고대 호미닌(사람족)들의 흔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류의 요람이라 불리는 지역들에는 기껏해야 1미터 남짓되는 동굴들이 많다.
일반인들이 본다면 그냥 구멍처럼 보이겠지만 인류학자들에게는 보물창고이다.
1미터 남짓 크기의 이 동굴들은 수직 깊이로는 40미터, 총 길이 4km나 되는 복잡하고 을씨년스러운 동굴이다.
이곳에서 각종 다양한 생물체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그 중 우리와 비슷한 새로운 호미닌이 발견된다.
‘별’을 뜻한다는 날레디, 이 호모 날레디는 뇌의 크기가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는 호미닌, 우리(호모 사피엔스, 또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구분되는 특징은 죽음을 인식하고 죽음을 기리는 장례 또는 매장의 습관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으로 인해 뇌가 작음에도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으로 부상한다.
그 깊은 동굴에서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저 깊은 곳에 한 종의 시신들이(화석들이) 무더기로 놓여져있다.
그냥 죽어서 우연히 모여있는 것이 아니다. 일관된 형식으로 매장되어있음으로 의심받는다.

게다가 동굴 입구 돌에 새겨진 표지, 벽과 천장의 그을음, 불을 피운 흔적인 재, 숯 조각, 난로, 불에 탄 작은 동물의 뼈 등이 발견되며 뇌의 크기가 인류의 기원를 말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뒤흔들 생활 패턴들이 발견된다.

우리의 인간의 유전자는 게놈프로젝트로 인해 샅샅이 밝혀졌지만 아직 우리 스스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
수많은 외적 요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보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것은 우리, 나 자신에 대한 질문들이다. 그 질문의 끝은 당연하게도 ‘근원’, 뿌리라고도 표현되는 그것이다.

우주와 에베레스트산 높이보다 깊은 심해를 탐험하는 것도 결국 우리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호모 날레디가 발견된 라이징스타 동굴계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수직40미터를 4km가 넘는 구조로 일직선이지 않고 굉장히 복잡한 미로처럼 얽히고 섥혀있다.

자연사 박물관이나 책들을 보면 ‘진보의 행진’이라 불리는, 등이 굽고 털이 가득한 유인원의 형태에서 점점 털이 사라지고 직립보행을 하고, 도구를 들고 마침내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수컷들이 일직선으로 나열되어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화가 일직선으로 진행되어 온 것 처럼 보이지만 호미닌의 진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DNA조사로 인해 우리 호모 사피엔스와 공동조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종은 침팬지와 보노보인데 엄연히 우리와 다름을 알고있지 않나? 그런데 그 공동조상의 흔적은 발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무려 800만년 전이란다.
800만년동안 이 호모사피엔스, 침팬지, 보노보는 얼마나 다양하게, 나무에서 뻗어나가는 뿌리와 가지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해 나갔는지 알 방법이 없다.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만큼 우리도 직선이 아닌 구불구불하게 그 모든 끝을 확인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진화되고 사라져갔다.

라이징 스타 동굴계의 모습이 구불구불한 것이, 이러한 우리의 복잡한 기원을 알려주는 것 같다.

호모 날레디에 대해 수록되어 있는 #케이브오브본즈 (#리버거 #존호크스 지음 #알레 출판)은 호모 날레디를 직접 두눈으로 보기위해 25키로그램을 감량한 57세의 인류학자의 생생한 동굴탐험기와 다양한 사진과 도표들을 보여주며 오래전 살았다가 사라진 한 종에 대한 어찌보면 지루한 이야기를 끝까지 관심있게 볼 수 있도록 생생하게 담고있다.

여전히 우리의 종의 기원에 대한 ‘가계도’는 여기저기 비어있다.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위해 두 발을 땅에 더 잘 붙여놓고 살기위해서는 기댈 곳이 필요하다.
이제 이 가족이라는 단어는 더이상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법적 제도로 묶이는 것만이 아닌 그 이상의 유대를 가진 무언가로 인식된다.
그들을 보며, 그들과 관계맺으며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시작으로, 근원으로 회귀하여 우리 스스로를 더 강한 존재로 만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침팬지만한 뇌 사이즈를 가진 새로운 호미닌이 우리 종의 기원에 포함되었다고 우리가 더 저급해 지는 것이 아니다.
진화는 더 좋다라는 뜻이 절대아니다. 각자 주어진 환경이 달랐고 운좋게 거기에 맞춰온 것이다.
우리의 가능성이 확장된 것이다.
호모 날레디의 발견으로, 그렇게, 우린 더욱 우리다워지고 , 인간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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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제물포, 인천 2
복거일 지음 / 무블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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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의 도서제공으로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한 집안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남들처럼 똑같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유복한 환경은 아닌듯 하지만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요즘은 구경만해도 눈살을 찌푸리는 곳이 많은데 기꺼이 떡을 모녀에게 먹인다.
끊임없이 떡을 바라보다 나누어주는 떡을 제일 먼저 받았던 여자 아이는 수십년의 세월을 역사처럼 보낸다.
떡을 나눠받던 아이는 떡을 만드는 공장의 역사가 되었다.

그 일상적인 한사람의 역사에 우리나라의, 제물포의, 인천의 역사가 한장씩 끼워진다.
#미추홀제물포인천2 (#복거일 씀 #무블 출판)을 덮는 순간까지도 이 책은 소설이라는 느낌이 잘 들지않는다.
학교를 다니면서, 취업준비를 하면서 익혔던 사실들이 콕콕 박혀있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허구라는 이미지가 굉장히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한두줄로 교과서에는 적혀있어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던 하나의 역사적 사건의 다른 일면들을 볼 수 도 있어 근현대사를 공부하기위해 만들어진 교재같은 느낌도 있다.
(을미사변으로 일어난 의병들의 실제 모습이나 기능과 같은 부분들이 흥미로웠다)
그러면서도 한 가족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이 동시에 진행이 되니 이 사람들의 선택과 겪는 일들에 소개되어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미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글을 읽는 재미도 있었다.
마치 딱딱한 신문 사이에 있는 따뜻한 사람냄새가 나는 글하나를 발견해 읽은 기분이다.

아픈 역사를 겪으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외세를 받아들였던 제물포와 외세의 침략을 한사람의 물러남도 없이 외세의 침략을 막았던 강화도가 합쳐져 지금의 인천이 되었듯 희,노,애,락 그리고 한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오만것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이되고 그 각자의 인생이 모여 역사가 되었다.

그 역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지도, 지극히 범용적일지도.

그러나 결국 한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추홀-제물포-인천>에서 지난한 역사를 가로지르는 동안 ‘인천’은 하나의 물리적 영토를 뛰어넘는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나고 자란 고향일 수 있고, 누군가는 성공을 위해 홀로 기회를 잡으러 올라온 낯선 곳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 모르는 사람에게 받았던 떡 하나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지구 반대편에서 가족을 위해 돈 벌러 갔다가 평생을 돌아가지 못한 ‘집’이기도 한다.

물론 인천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몰입이 되지 않는 것은 분명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천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곳이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존재하니 말이다.

사실상 ‘사실’이기 힘들어보이는 이천년전의 전설부터 시작되는 유구한 역사를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봐 보니 역사 라는 것이 다르게 보였다.

역사라 하면 교과목의 그것으로 딱딱하고 이미 지난 일이라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 속에서 일기, 아니 잡기장이 후대에 전해서 비로소 한 가족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역사가 이런 것이 아닐까. 여러가지 제약으로 인해 전해지지 못했던 진심과 현실이 시대를 넘어 겨우 전해져서 현실을 완전한 것으로 완성 시키는 것.
그렇게 완성된 현실로 미래를 꿈꾸고 나아가고, 누군가에겐 과거일 우리의 현실을 후대에 잘 전해지도록 일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

그것이 계속 전해지면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비록 얼굴한번 보지 못한 미래의 누군가의 후손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기와 같은 민족의 선조의 삶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그 안에서 사람다움이나 가치있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그 먼 후손은 조금 더 삶이 완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절 발음그대로 적혀져있어 점점 내가 사는 시대의 내가 배운 우리말과 같아지는 것을 읽으면서 새대간의 동화도 느껴졌다.
그렇게 다르고 알아듣기 힘든 하나하나의 과거들이 모여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간에 좀 더 나은 미래쪽으로 다정히 이끌어 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한반도의 역사가 궁금한 사람뿐만 아니라, 누가 알아보지않아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의미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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