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화요일
드디어 금강산을 보게 되는 것이냐. 비록 먼발치로나마. 6시, 몸을 일으켰다. 밤새 비가 왔는지, 몸이 늘어져 진즉에 눈을 떴지만 계속 누워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거의 버스로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서울에서 1박을 할 건지 집으로 내려갈 건지 결정을 못해 머리를 굴리느라 계속 누워 있었다. 두 녀석이 다툰다. 이 사람아, 그간 쓴 돈이 얼만디 또 서울서 1박을 한다는 겨. 그래도 마지막인디 서울서도 한 번 자봐야 되는 거 아녀? 모텔이 거기서 거기지 서울이라고 별 수 있나? 그래도... 둘이 옥신각신하다 결국 첫 번째 녀석이 이겼다. 맞어, 그간 쓴 돈이 얼만디! 커튼을 여니 비가 오고 있었다. 세차진 않지만 밤새 내린 모양으로 정면의 앞산이 흐물흐물해 보였다. 아침 제 의식 행사를 마치고 내려와 안내 프런트에 키를 반납하니, 8시 10분이었다. 어제저녁에 통일 전망대 매표소 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 5분 거리라고 했는데, 너무 일찍 내려왔다. 더구나 매표 시간이 9시라는데. 알고는 있지만, 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려 방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잠자는 건 곰의 유전자를 받고, 행동은 호랑이의 유전자를 받은 것 같다. 비뿌리는 도로를 뚫고 통일전망대 매표소(매점, 교육관 겸용)에 이르렀다. 장장 5분 만에.
수위인듯한 분이 왔다 갔다 한다. ‘왜 이렇게 일찍 왔냐!’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걸어서는 못 가요! 차 타고 가야지!” 한다. 할머니의 여행기를 읽어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고 있는 상태. 할머니는 무슨 협조를 받아 통일 전망대까지 걸어갔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혹시, 나도?’ 하는 막연한 바램을 가지고 왔는데, 이뤄질 수 없는 바램 같다. 버스가 있냐니, 버스는 없고 택시만 있다며 한 5~6만 원 줘야 할 거라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눈알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려고 하는 것을 힘줘서 도로 밀어 넣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왠 후줄근한 차림새의 사내가 힘차게 매표소 근처로 올라오더니 ‘평화의 종’을 ‘땡!’하고 쳤다. 오잉, 저런 게 있었나? 뭔가를 알고 온 모양이다. 그런데 9시에 매표소 문 여는 건 모르는지 잠겨진 매표소 문을 열려고 했다. “9시부터 문을 연답니다.” 하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 쪽으로 온다. 통일 전망대 가는 방법을 말하니, 이 이 역시 몰랐는지 살짝 당황해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제안을 한다. “저하고 반반씩 내고 가시는 건 어떤가요?” 괜찮을 것 같다. “네, 그러시죠.” 사내가 택시 회사인지 개인택시 인지에 전화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바로 이곳까지 택시가 올 수는 없고 제진까지 걸어오면 거기서 타고 갈 수 있단다. 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 일단 가허락을 했다. 매표소 추녀 밑에 두 중늙은이가 우두커니 서 있으니 참 거시기하다. 조금 있다 보니 왠 말끔한 등산복 차림의 중년 부부가 올라와 매표소 문을 열려고 했다. 사정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약간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혹시 태워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차를 가지고 온 것을 봤기 때문). 초면이지만 처량한 상태에 있는 것을 봐서 그런지 흔쾌하게 허락을 했다.
9시가 되어 표를 산 뒤 그렇고 그런 안보 영상을 시청한 후 친절한 두 내외분 차에 올라탔다(후줄근한 차림의 사내도 당연히).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이것저것 물어가며 대화를 했다. 두 내외는 포항 출신인데 근 1년에 걸쳐 동파랑길을 걸었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날씨가 쾌창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소 아쉽다고 했다. 그거야 십분 공감. 동승한 남자분은 이제 동파랑길 시작이라며 어제 부산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아하, 그래서 출발의 의미로 평화의 종을 울렸던 거구나.
차가 통일 전망대 주차장에 섰다. 차에서 내리는데, 감개무량하다. 중간에 차를 타긴 했으나, 어쨌거나 처음 목표했던 대로, 땅끝(마을)에서 이곳까지 오긴 왔구나! 출발 때 날이 흐렸는데, 도착해선 비가 오니, 나름 수미일관한 특별한 날씨다. 전망대 타워에서 금강산 쪽을 바라보는데, 맑은 날씨였으면 분명히 보였을 산들이, 우중이라 모호하다. 현금의 남북관계를 보여주는 듯도 하고, 통일 상황을 보여주는 듯도 하고,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너무 확대 해석?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북한’이다. 이러저러한 편견 없이 그냥 북한 땅 여기저기를 걸어보고 싶은 것. 내 생애 그런 날이 올까? 염원을 담아, 흐릿한 풍경의 금강산을 사진에 담았다.
운전자 분의 배려로 ‘DMZ 박물관’까지 견학을 한 후, 우리는 거진에서 헤어졌다. 친절했던 두 내외 분께 감사를! 함께 했던 후줄근한 사내 분은 무사히 일정 잘 마치시길! (‘후줄근한 사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모욕하는 뜻은 없으니 너른 마음으로 용서하시길!) 거진에서 한 방에 서울 가는 차가 있어(너무 기뻤다!) 표를 끊었다. 12시 15분 행. 차비가 물경 23,300원이다. 3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다. 차를 타기 전 점심을 해결하려 빵집에 들어가 카스텔라와 초코 우유 하나를 샀다. 냠냠 짭짭. 매표소 근처 화장실에서 작은 볼 일을 해결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다, 마침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 풍경 감상하기가 취미인데, 취미 생활을 못하고 거의 졸면서 갔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 중에 거의 취미 생활을 제대로 못했네. 애고, 아쉬워라.
근 4시가 되어 서울에 도착, 지하철을 타고 ‘꿈에 그리던(?)’ 익선동 교동초등학교에 갔다. 당연히 옛 자취는 찾아볼 길이 없다. 학교에서 서성거리는데 학교 보안관께서 오시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일로?” 사정 얘기를 했더니, 반색을 하며 두루두루 보라고 하신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아 편하게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때 타고 놀던 양(석상)이 있었는데 그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했더니, 놀랍게도, 있단다. 안내까지 해주셨다. 정말 정원 속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은 거냐? 그때는 컸던 것 같은데. 보안관께 이 말을 했더니, 웃으면서 자신도 그런 걸 느낀다며, 운동장도 그렇지 않냐고 한다. 운동장을 쳐다보니 진짜 그렇다. 오호,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고? 보안관님과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기념사진을 한 장 같이 찍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찰칵.
내가 다닐 때만 해도 교동초등학교는 지금의 강남 8학군 학교와 같아 학생이 버글버글 했다. 지금은, 보안관님의 말에 따르면, 학생이 없어 한 때 폐교 논의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라는 문화적 가치 때문에 어찌어찌 살렸는데 장래는 그리 밝지 않다고 했다. 또 한 번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실감한다. 난 사실 교동초등학교에 대해 그리 행복한 추억은 없다.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부모님의 무슨 교육 열망 때문에 오게 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익선동에 한복 가게를 내시는 바람에 오게 된 것뿐이다. 학생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그다지 명민하지 않은 나는 선생님의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학교에 다니던 상당수의 학생은 내로라하는 집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선생님의 관심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내노라 하는 집 학생들의 수준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린이 회장 선거를 하는데 후보로 나온 여학생이 자기가 회장이 되면 학교에 시계탑을 건립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었다. 놀랍지 않은가. 1970년대 중반 초등학교에. 4학년 때 시골 고향으로 전학을 왔을 때 당시 학생 중에는 보자기에다 책을 싸 오는 아이도 꽤 있었다. 얼마나 격차가 심한가!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결과적으로 시골에 내려온 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본다. 서울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아이가 시골에 내려오니, 주변 아이들이 워낙 공부에 소홀해, 본의 아니게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게 됐고 자존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자존감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의 자존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깊이 신뢰하고 있다. 그나저나 당시 시골에서 같이 지냈던 친구들은 나와 달리 다 서울로 서울로 도회지로 도회지로 갔고, 나는 더 시골로 시골로 내려갔다. 서울로 도회지로 간 친구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나는 , 만약 내가 서울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진짜 시골에 살게 된 걸 너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럼 시골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찌질하게 산다는(살아야 한다는) 것이냐, 고 물을 수 있겠다. 논리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꼭 논리대로만 되는 것이 세상은 아니잖은가. 시골서조차 주목받지 못했으나 서울로 도회지로 가 주목받고 성공한 친구도 많다. 나는 다만 내 경우만 말한 것이다.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옛적에 다녔던 학교에 오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나저나 시골 고향의 초등학교도 자치하면 폐교가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안타까움의 한숨만 나온다.
학교를 나와, 한 때 살았던 익선동을 찾았다. 그런데, 여기도 왜 이리 좁아터진 거냐. 원래 그랬냐, 아니면 축소된 거냐. 땅과 집이 오무라 들었다 늘었다 할리는 만무. 저 좁은 골목에서 한 때 내가 활보했단 말이지. 하하하. 익선동은 모던 한옥촌이다. 1920년대부터 개발된 곳이다. 짐작컨대 우리나라 학구열상 교동초등학교를 끼고 있어 사람들이 더 몰려들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온갖 음식점과 카페가 즐비한 상가가 되었다. 젊은이들과 외국인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란다. 정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약간 한산한 데를 찾아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가 살던 곳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익선동 주변을 걸어보는데, 그간의 극심한 시대 변화를 생각하면, 의외로 그렇게 변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줬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는데, 이곳에 살 때 있던 그 플라타너스가 아닌가 싶다. 창덕궁이 보인다. 심심하면 놀러갔던 곳이다(당시는 무슨 궁인지도 몰랐다). 한 때 친하게 지냈던 홍ㅇㅇ의 아버지가 운영하셨던 '낙원약국'을 찾아봤는데, 없다. 애고, 나도 60이 다 됐는데 ㅇㅇ이의 아버지가 그 약국을 하고 계시겠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ㅇㅇ이네는 꽤 부유해서 그 집에 놀러 가면 놀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느 하늘에서 잘 살고 있는지?
길을 걷다 아내에게 줄 선물로 작은 모자 하나를 사고 전철을 타러 갔다. 이젠 집에 가야지. 표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예매해 놓았다. 8시 차.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저녁을 먹으러 지하에 있는 신세계 매장으로 갔다. 떨이로 파는 음식을 약간 싼값에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마음으로 온 사람들일까, 매장이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초밥을 하나 사서 푸드코너 매장에서 먹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란한 매장을 나와 서산행 노선 앞 대합실에서 가족 단톡방에 올린 사진들을 정리하고 그간 쓴 비용도 결산해보았다. 20일 동안 쓴 총비용이 1,453,580원이다. 대략 하루에 7만 원가량 쓴 셈이다. 숙박비만 저렴하면 지출이 훨씬 덜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짧은 해외여행 비용과 견줘보면 그렇게 많이 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역시 100만원 넘긴 비용을 20일간 여행 비용으로 썼다고 생각하니, 살짝 부담감이 밀려온다. (다행스럽게도 이 비용은 퇴직 후 받은 전년도 성과급으로 가름할 수 있었다) 이보쇼, 누가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안 할 까봐 여행 막바지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그간 겪고 생각한 게 어딘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고, 돈타령을 하다니. 한심하오! 그렇네요~ 그래도 그런 마음이 드는 걸 어쩐대요? 그리고 제 이름이 '동'에다가 '돈'이잖아유. 이름 값은 해야쥬. 어허, 이 사람이, 갈수록... 수양 좀 더 혀! 아, 네….
7시 50분, 8시 서산행 버스가 터미널에 들어왔다. 이 터미널에서 서산행 버스 탄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오늘처럼 서산행 버스가 정겹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너무도 정겨워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8시 정각에 버스가 출발했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 터미널에서 집까지, 처음처럼 걸어 갈려고 했는데, 처가 만류했다. 마중을 나온단다. 으흠, 역시 헛살진 않았군. 여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