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시고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난 문득 소순((1009~1066)의 '목가산기(木假山記)'가 생각났다.
산 모양으로 된 나무(일종의 분재)를 '목가산'이라 하는데, 소순은 중심이 높고 주변의 두 봉오리(가지)가 중심을 향하는 형태의 목가산을 얻었다. 소순은 목가산을 보면서 나무의 일생을 먼저 말한다. 싹이 나자 바로 죽는 것이 있고, 조금 자라다 죽는 것이 있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재목으로 잘려 죽고, 그렇지 않으면 풍우에 시달려 쓰러지거나 썩어서 죽는 것이 대부분 나무의 생이다. 그러나 목가산 나무는 여울진 물속에서 성장하여 이런 나무의 불우한 생을 피하기에 온전히 살아남아, 호사가의 눈에 띄어 산 모양으로 다듬어져 남은 생을 온전히 누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호사가의 눈에 띄지 못하면 초부들에게 땔감으로 전락될 수 있다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목가산은 그야말로 나무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나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목가산이 단순히 이렇게 살아남았기에 대견한 것만이 아니고 중심은 의연하고 주변의 두 봉오리(가지)는 근엄한 자세로 중심을 섬기는 듯하면서도 자신의 주견을 뚜렷이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소순과 그의 두 아들 소식과 소철은 이른바 당송팔대가에 들어가는 명문장가였다. 목가산의 세 봉우리는 자신과 두 아들을 빗댄 말이기도 하다).
물속에 잠긴 나무를 바라보며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할 것 같다. 혹자는 수몰민을 생각하며 실향의 슬픔을 생각키도 할 것이고, 혹자는 무슨 공포나 괴물 영화를 연상하기도 할 터이고... 내가 목가산기를 떠올린 건 아무래도 내가 가진 배경 지식 때문일 터이다.
세상을 편견 없이 보라고 많이들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외려 편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편견 없이 세상을 보라는 건, 내게는, 몹시 위험한 주장으로 들린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를 전쟁터에 내놓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편견을 가져야만 한다. 다만 편견을 갖되, 자기 만을 생각하는 편견보다는 상생을 위한 편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경험도 많이 쌓아야 한다. 목하 윤 대통령이 사람들의 질타를 받는 건 상생보다 위아(爲我)의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게다가 공부도 경험도 미흡하다). 그렇지 않은가?
한 장의 사진을 놓고 다양한 편견이 있을 수 있지만, 단순한 감상의 편견을 넘어 옛과 지금을 연결하며 삶의 가치와 세상사를 판단하는 편견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편견이 더 높은 편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본의 아니게 자랑하는 말이 됐다. 용서하시라). 하물며 세상의 큰 일을 대하는 편견에 있어서야 어떤 편견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는 말해 무엇하랴.
하여, 결론을 내리면(?), '우리 모두 편견을 갖자! 그리고 '당신의 편견을 응원해요!'가 되시겠다. 다만 전제가 있다. '상생을 위한'을 편견 앞에 꼭 놓아야 한다는 점. 때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편견을 갖자!' '편견을 응원해요!'에는 이 보이지 않는 전제가 매우 중요하다.
사진은 태안의 파도리 어은돌 저수지에서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