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주 이종락(李種洛, 1939~현재) 선생은 재야 한학자이다. 오랫동안 공주, 대전 등지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춘추좌씨전 두주』, 『논어강설』 등 묵직한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최근에 제자와 자녀들이 『병주집(屛洲集)』을 간행했는데, 오래전 선생께 1년 동안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 이 책을 남다른 느낌으로 읽었다(나도 제자라면 제자랄 수 있는데, 오랫동안 선생께 연락을 하지 않아 기억하실는지도 모르겠기에, 감히 제자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선생은 초려 이유태(우암 송시열과 동문인 분이다)의 후손으로 이른바 명문가 자손이지만 일제강점기 일제에 저항하는 집안의 가풍 때문에 신학문을 접하지 못하고 한학만을 하셨다. 일제에 토지도 강탈당해 극빈한 생활을 했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며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다. 선생을 생각할 때면 이런 재야 한학자들이 정식으로 대학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선생의 문집을 숙독하며 그분의 내면세계(여기서는 내면세계 관점 생각 등을 같은 의미로 뒤섞어 사용한다)를 음미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글을 써 남기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단상을 써본다. 전통학문을 한 분에 대한 일 증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여기서는 전통학문 구학문 한학 등을 같은 의미로 뒤섞어 사용한다). 선생을 긍정 혹은 부정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포폄(褒貶)은 지양하고 되도록 객관적 시각으로만 선생을 보려 한다.
전통학문은 문·사·철(文·史·哲)이 종합된 학문이다. 선생의 내면세계도 문·사·철이 종합된 세계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이들을 분류하여 살펴볼 생각이다. 한 가지 더 첨언할 것은 선생의 내면세계를 살피는데 주 자료가 시(詩)라는 점이다. 전통문학을 대표하는 시는 ‘언지(言志)’라 하여 의사를 표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시에는 일상의 잡사에서부터 형이상학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선인들의 문집에 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병주집』도 마찬가지이다. 1책이 7권으로 돼있는데, 이중 1~4권이 시이다. 시에는 단순히 문학적 감수성만 담긴 것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에 대한 생각도 내포돼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를 주 자료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굳이 또 하나 이유를 들자면 역사와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의론을 펼친 산문이『병주집』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선생의 생각부터 살펴본다. 대개 문집 서문에는 저자의 문학 성향에 대한 압축된 평이 등장한다. 『병주집』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평이 등장하는데, 선생의 조카 되는 분이 쓴 것이다. 선생의 조카는 선생의 문학 경향, 좀 더 정확하게는 시풍에 대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시문(詩文)은 담백하면서 법도가 있고 우아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나 이는 계부(季父)의 허드레 일이지 경중을 논할 중요한 일은 아니다. 至於詩文之沖澹典雅 自成一家文氣 然季父之餘事 不足爲輕重. (「서(序)」,『병주집』 건(乾) 6쪽)
선생의 시풍을 ‘담백하면서 법도가 있고 우아하다’란 말로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이는 선생의 시풍이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내는데 치중하지 않고 수양된 내면의 도덕적 면모를 드러내는데 치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카 되는 분의 언급에서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대목이다. 선생에게 있어서 시 창작은 ‘허드레 일’에 불과한 것이지 전력을 기울인 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통 성리학자들이 갖는 시에 대한 관점인 ‘여기(餘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인데, 선생도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생은 시인을 지향하기보다는 도학자를 지향했던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를 ‘여기’로 여기는 선생의 시작 태도를 선생의 직접 언급을 통해 다시 한번 살필 수 있다.
시를 짓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오 / 그저 상황에 맞는 뜻이 생길 때 옮겨 쓸 뿐. 屛洲非是愛吟詩 詩是屛洲取適時. (「화요부수미음(和堯夫首尾吟)」,『병주집』 건, 238쪽)
이쯤에서 선생의 시를 한 편 직접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해설은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군더더기가 되어 선생의 시 감상에 되려 누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찬찬히 되씹어 읽어보면 왜 선생의 시를 ‘담백하면서 법도가 있고 우아하다’란 평을 했는지 느낄 수 있을 성싶다. 시제는 ‘그림자를 아낀다[愛影]’이다(여기 ‘아낀다’란 번역은 ‘절약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사랑한다’의 의미이다. 전통적으로 사랑의 감정은 ‘사랑한다’는 표현보다 ‘아낀다’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기에, 선생도 이런 의미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아낀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相隨不去有何情 무슨 정이 있기에 늘 따라다니며
動止於吾效作程 앉으나 서나 똑같이 행동하는지
燃燭對書動靜坐 등 밝히고 책 읽을 땐 가만히 앉아있고
淸宵步月共閑行 맑은 달 밤 소요할 땐 조용히 따라오네
屈伸只可任舒捲 구부렸다 펴는 것 또한 똑같이 하나니
用舍偏憐識晦明 그저 아쉬워하는 건 어둡고 밝은 것뿐
愼獨工夫由爾戒 신독(愼獨) 공부 너로 하여 살피니
爾雖無語喚余醒 너는 말없이 나를 일깨우는구나
(「애영(愛影)」, 『병주집』 건, 49쪽)
역사에 대한 선생의 관점을 살펴본다. 앞서 선생이 추구한 삶은 도학자의 삶이라고 했다. 도학자의 역사관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통론’이다. 주자가 삼국시대의 정통을 위나라에 두지 않고 촉에 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조선조 사대부들도 역사에 있어 정통론을 중시했다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도학자의 삶을 추구했던 선생 역시도 이런 정통론 중시의 역사관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시는 현대의 대통령들을 비판한 내용인데, 그 관점은 정통론에 입각해 있다. 이 역시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 그 자체로 선생의 역사관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며, 설명이 되려 사족이 되어 시 감상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이다.
光復伊來七大統 광복이래 일곱 대통령
歷數無人合正統 헤아려보니 정통에 맞는 이 하나도 없네
桀驁不良李大統 더럽고 오만한 이대통령
戕賢庇逆曷云統 어진 이 죽이고 사악한 자 비호했으니 어이 대통령이라 할 수 있나
安坐得志尹大統 편안히 앉아 대통령 된 윤대통령
責在內閣無所統 책임을 내각에 맡겼으니 할 일이 없었네
經國濟民朴大統 경국제민 박대통령
民國史中惟此統 유일하게 대통령다운 대통령이었네
胡不再任遜大統 어이 재임 시 대통령 직을 양보하지 아니하고
畢竟維新失體統 끝내 유신 펼쳐 체통을 잃었던가
危疑攝居崔大統 어려운 때 책임 맡은 최대통령
低回不敢言治統 머리 숙이고 딴짓하며 아무 말도 못 했네
威權擅用全大統 제멋대로 권세 부린 전대통령
誅求無厭盧大統 가렴주구 노대통령
賈勇蓄財兩大統 위세 팔아 축재한 두 대통령
後先囹圄一系統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영어의 몸 되었네
野合先任金大統 야합하여 대통령 된 김대통령
用奸用術有傳統 간교한 계책 내력이 있구나
蔑視法統豈大統 법통을 무시한 이가 어찌 대통령이리
自誇文民笑厥統 문민 대통령이라 자랑 타니 웃기기도 웃길사
而今不見國論統 국론통일 지금까지 안 보이니
南北何時至統一 남북은 어느 때나 통일이 될는지
(「대통사(大統詞)」, 『병주집』 건, 259쪽)
철학에 대한 선생의 관점을 살펴본다. 선생의 역사관이 도학의 ‘정통론’을 계승한 것이라면 선생의 철학적 입장은 당연히 성리학(도학)적 관점일 것이고, 그중에서도 조선철학사를 관통한 이기철학의 어느 한 관점일 터이다. 선생의 철학적 관점은 다음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栗翁曾闡道 율곡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네
氣局理相通 기에는 막힘 있어 차이가 나지만 이는 하나로 통한다고
此意誰同照 이 뜻을 뉘와 함께 알릴꼬
火輪出海東 붉은 해가 동해에서 떠오르네
(「모춘감흥십육수(暮春感興十六首)」, 『병주집』 건, 327쪽)
선생의 철학적 관점은 기호학파의 거두인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은 보편적 이(理)를 중시하면서도 현실적 문제와 연관된 기(氣) 또한 중요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이(理)와 기(氣)의 우열구분을 중시하는 영남학파의 거두 퇴계 이황과 다른 점이다. 선생이 이통기국의 관점을 따르는 것은 선조의 학통을 계승한 것도 있지만(초려 이유태도 기호학파이다) 현실적 궁핍을 감내한 삶에서 체득하게 된 관점이 아닐까 한다.
선생이 삶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며 사명을 가지고 한 일은 ‘교육’이었다. 선생은 50세 되던 해(1985)부터 교육을 시작했는데(屛洲先生略歷, 『병주집』 곤(坤), 590쪽), 이로부터 20년 이상을 교육에 일로매진했다. 선생이 교육에 몰두한 것은 ‘전도(傳道)’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다음 글에서 선생의 이러한 점을 간취해 볼 수 있다.
세상이 나를 허여 해주지 않아 도를 펼칠 수 없다면 세상을 피해 살뿐 번민하지 않으며, 세상의 지지를 받지 못해도 번민하지 않는다. 하늘을 생각하며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다듬어 후대에 가르침을 전수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태도로, 이 점은 요순보다도 훌륭한 점이라 평가할 만하다. 世不我與 道不得行 則遯世無憫 不見是而無憫 太上立言 垂敎來世者 實吾夫子之賢於堯舜者也. (「점화상익박사논문(點化相益博士論文)」,『병주집』 곤, 120쪽)
공자의 훌륭한 면모를 그의 교육에 두고 언급한 대목인데, 이는 바로 선생 자신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선생은 자신이 배우고 찾은 진리를 후대에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기에 강학에 매진했던 것이다. 이런 사명감이 없었다면, 별반 경제도 혜택도 없는 강학을 그 오랜 세월 지속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선생은 공자가 그토록 자부심을 드러내어 말했던 ‘배우는데 싫증을 내지 않고 가르치는데 게으르지 않는다[學不厭 敎不倦].’를 그대로 실천했다고 평할 만하다.
이상 간단히 선생의 내면세계를 살펴봤는데, 과연 첫머리에 언급했던 것처럼 구학문을 한 분에 대한 일증언의로서의 가치가 있는 글이 됐는지 좀 회의적이다. 아무래도 부족한 실력으로 탄탄한 내공을 지닌 분을 평하려니 필력이 딸려 그렇지 않았나 싶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에게 송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선생께도 당연히! 끝으로 선생의 삶에 대한 자세를 잘 표현했다고 여겨지는 시 한 편을 소개하며 마칠까 한다. 이 역시 군더더기 설명은 덧붙이지 않는다.
滄茫歲暮天 푸르고 아득한 세모(歲暮)의 하늘
滿地堆新雪 온 대지엔 하얗게 눈이 내렸네
世界淨琉璃 온 세상 깨끗하기가 유리와 같아
渾忘孰優劣 우열을 잊어버렸네
且莫勤除治 두어라 눈 쓰는 일
我願如斯潔 나도 저같이 깨끗하고 지고
梅笑暎朝暾 밝은 햇살에 매화 웃음 지으니
氣香眼欲纈 은은한 향기 눈에 감기네
芸窓坐兀然 창가에 단정히 앉아
舊句加塗乙 옛 시구를 만지며
遙憶孤舟翁 찬 강에 홀로 낚시하던 노인을 생각노니
徒然慕淸絶 그 맑고 곧은 절개를 사모하노라
人各爲吾爲 사람은 제각기 자신의 일을 하면 될 뿐
不須論得失 이해득실을 따져 무엇하리오
(「설중작(雪中作)」, 『병주집』 건, 285쪽)
*한문 실력이 부족해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너른 이해 부탁드리고, 눈 밝은 분들의 바로잡음을 요청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