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일(趙東一)이란 분이 있어요.『한국문학통사』의 저자로, 국문학계에서 유명한 분이죠. 국문학에 머물지 않고 동아시아 문학 및 세계 문학 나아가 학문 일반으로 연구의 외연을 넓혀온 것으로도 유명하죠. 대학에서 정년을 한 이후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하시는데, 최근 이 분의 책 - 동아시아 문명론 - 을 읽다가 재미있는(?) 대목을 만났어요. 좀 길지만 인용해보죠.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어느 겨를에 한문을 익히고, 영어 외에 다른 언어도 배운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기술 근대화를 재촉하던 시기와는 달라지고 있어서,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해야 하는 시간은 줄여야 하고, 그 대신에 문화활동을 늘려야 한다. 그래야만 실업자가 줄어들고, 문화생활의 혜택을 고루 나눌수 있다. 그런데 어떤 문화활동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그 해답은 언어 학습이다. 언어 학습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 기여하는 소극적인 의의에서 음식, 관람, 여행, 스포츠 등보다 부작용이 적고 효과가 뛰어나다. 공연히 무엇을 만들어 불필요한 재화를 생산하지 않고, 여가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고, 정신을 윤택하게 하고, 세계를 평화롭게 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하는 문화활동 가운데 언어 학습만 한 것이 없다.

 

 

국문학자이고 교수 출신이기에 하는 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나름 음미할만 한 언급인 것 같아요. 특히 "언어 학습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 기여하는 소극적인 의의에서 음식, 관람, 여행, 스포츠 등보다 부작용이 적고 효과가 뛰어나다. 공연히 무엇을 만들어 불필요한 재화를 생산하지 않고, 여가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고, 정신을 윤택하게 하고, 세계를 평화롭게 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하는 문화활동 가운데 언어 학습만 한 것이 없다."란 대목은 좋은 제안이란 생각이 들어요.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좋은 곳을 가보지 않으면, 몸을 멋지게 가꾸지 않으면 왠지 시대에 뒤떨어진 듯 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요즘 시류에 일침을 가하는 것 같아서요. 제가 그럴 처지나 욕구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요. ^ ^

 

사진은 아내가 인근 홍성의 용봉산(龍鳳山)에 갔다가 찍어 온 거예요. 소나무의 모습이 특별하여 한시를 한 수 지어 봤어요. 운과 평측만 겨우 맞췄을 뿐 시어가 성글고 내용의 함축미도 없어요. 그래도 지어놓고 보니 괜시리 흐뭇해요.

 

 

臥松 와송    누운 소나무

 

 

詰屈橫蒼碧   힐굴횡창벽     이리저리 뒤틀린 모습으로 창공에 누웠나니

危奇未嘗逢   위기미상봉     위태롭고 기이한 모습 일찌기 만나본 적 없어라

潛垂堅拔訓   잠수견발훈     조용히 견인불발의 교훈을 전해주나니

孰對一凡松   숙대일범송     뉘라서 일개 평범한 소나무로 대하리

 

 

한시를 짓는 일도 조동일 교수가 말하는 '의미있는 시간 보내기로서의 외국어 배우기'의 한 행태라고 할 수 있을 듯 해요. '여가 활동으로 한시를 지어봅시다!'라고 하면, 대부분 뜨악한 눈으로 바라볼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그 어려운 한시를..." 이런 생각이 들어서겠지요. 그런데 한시 짓기는, 제 경험으로 봤을 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다만 작품의 수준이 문제일 뿐이지요. 수준을 따지지 않고 일단 한시를 지어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그 생각 자체로 이미 한시 짓기는 50%이상 달성된 거예요. 그 다음 문제는 한자와 평측 및 운을 맞추는 것인데, 꼭 어려운 한자를 사용해야 좋은 시라는 편견을 버린다면 한자 문제는 해결돼요. 평측과 운은 다음 소개하는 싸이트의 '근체시 평측 자동검색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구요(회원 가입해야 다운로드 가능).

 

 

 

 

한 가지 더 문제되는 것이 있다면 어법인데, 한문은 기본적으로 '주술목' 구조란 것을 염두에 두면 돼요. 여기에 5자로 된 구는 2자 3자로 끊어 읽게 리듬을 맞추고, 7자로 된 구는 4자 3자로 끊어 읽게 리듬을 맞추면 금상첨화죠. 이런, 가장 중요한 것을 빠트렸네요. 시상(詩想). 시상을 처음부터 한시로 표현하긴 어려워요. 먼저 한글로 시상을 옮기고 이를 다시 한시로 바꾸는게 편해요.

 

어때요? 한 번 지어볼 만 하겠다는 생각 들지 않으세요? '의미있는 시간 보내기로서의 한시 짓기', 한 번 시도해 볼 만한 취미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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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JTBC 뉴스 2017. 11. 3(금)자 방송 일부 캡쳐)

 

 

"선생님, 정치의 요체는 무엇인지요?" "배부르게 먹이는 것,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 신뢰를 받는 것을 들 수 있겠구나." "부득이 하나를 빼야 한다면 무엇을 빼야 할런지요?"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 그것을 뺄수 있겠구나." "하나를 더 빼야 한다면…." "백성을 배부르게 먹이는 거겠지. 자공아, 백성과의 신뢰는 빼고 더하고의 문제가 아니란다. 그것이 없으면 나라 자체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지."

 

『논어』「안연」편에 나오는 자공과 공자의 대화예요. 공자의 답변을 들어보면 일반 사람과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일반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죠: "국방이 튼튼해야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그래야 나라가 유지될 수 있지. 나라가 유지된 다음에야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신뢰?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이 국방이나 경제 문제보다 우선시되기엔…." 공자는 역시 특별한 사람이에요. 일반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그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일견 나이브해 보이지만 실상과 일치하죠. 공자의 특별함은 그저 남과 다르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다는데에 특별함이 있어요. 꼭 들어맞는 예는 아니지만 최근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봐도 이를 징험할 수 있어요. 두 전임 정부가 끊임없이 추락하는 이유는 바로 '신뢰'의 상실 때문이죠. 이룬 업적도 있으련만 신뢰의 상실때문에 모두 물거품이 되버리잖아요?

 

신뢰의 중요성은 정치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다 필요하죠. 부부사이도 신뢰가 무너지면 파경을 맞잖아요? 그런데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신뢰를 지킨다는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죠.  더구나 우리처럼 굴곡진 현대사를 겪어온 사람들에겐 적당한 배신이 바람직한(?) 처세술처럼 여겨지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신뢰를 지킨 사람들이 있어 감탄과 더불어 시샘을 받죠. 자신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이뤄낸 이에게 보내는 양가의 감정일 거예요.

 

이런 감탄과 시샘을 받는 인물 중에 손석희 씨가 있죠. 그가 이번 제 20회 심산상(心山賞)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수여 이유는  최순실 테블릿 피씨 보도로 촛불 시위를 촉발시킨 공이라는데, 이는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제는 그가 보여준 언론인으로서의 신뢰성에 보내는 치하라고 할 거예요. 그의 대국민 신뢰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최순실 테블릿 피씨 소재처 안내죠. 건물 관리인이 타방송사 기자들에겐 안보여주고 JTBC 기자에게만 보여준 건 순전히 손석희 씨 때문이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손석희 씨가 얻은 신뢰는 하루 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죠. 그가 MBC에 근무하면서 소신있는 방송을 위해 겪었던 어려움은 널리 알려져 있잖아요? 손석희 씨를 대하면 '신뢰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아있는 교과서.

 

사진은 손석희 씨가 수상 기념으로 받은 액자예요. 지주반정(砥柱反正)이라고 읽어요. '굳건한 기개로 (그릇된 길을) 바른 길로 되돌려 놓다'란 뜻이에요. 지주는 '중류지주(中流砥柱)' 혹은 '지주중류(砥柱中流)'의 압축 표현으로 선비의 굳건한 기개를 상징하는 말이에요. 황하 중류 지점인 삼문협(三門峽)은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데 이 중류 지점에 산 모양의 돌출 바위가 기둥처럼 서있어요. 윗 부분이 숫돌처럼 평평해서 이 바위를 '지주'라고 명명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흡사 거대한 불의에 맞서는 선비의 굳센 기개처럼 느껴져, 후일 선비의 굳센 기개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게 됐어요. 액자의 내용이 손석희 씨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손석희 씨의 굳건한 기개가 있었기에 팩트에 충실한 태블릿 피씨 보도가 가능했고 그 방송이 있었기에 촛불 집회가 이어질 수 있었으며 그것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부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만일 최순실 테블릿 피씨가 타방송사에 들어갔다면 JTBC처럼 충실히 보도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는 石(돌 석)과 氐(근본 저)의 합자예요. 숫돌이란 뜻이에요. 石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氐는 음을 담당하면서(저→지)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숫돌은 어떤 물건의 밑에서 갈림을 당한다는 의미로요. 숫돌 지.砥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砥礪(지려, 연마), 金剛砥(금강지, 금강사로 만든 숫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木(나무 목)과 主(주인 주)의 합자예요. 집을 지을 때 핵심이 되는 나무, 즉 기둥이란 뜻이에요. 기둥 주. 柱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支柱(지주), 柱礎(주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손[又, 手(손 수)의 변형]으로 물체를 뒤집어[厂] 놓았다란 뜻이에요. 뒤집을(돌이킬) 반. 反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反省(반성), 背反(배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一(한 일)과 止(그칠 지)의 합자예요. 올바른 곳[一]에 머무른다란 의미예요. 바를 정. 正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正反合(정반합), 正直(정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손석희 씨에게 심산상을 수여한 성균관대는 기분이 좀 멋적었을 것 같아요. 성균관대의 재단은 삼성이에요. 그런데 알다시피 삼성은 손석희 씨 보도로 인해, 속된 말로, 피를 봤어요. 그런데 그 재단의 대학이 피를 보게 만든 이에게 상을 수여했으니 머쓱할 수 밖에요. 짐작컨대, 수상 대상자로 손석희 씨를 선정하기전 꽤 논란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을 수여한 것을 보면, 삼성의 눈치를 안봐도 될 만큼 삼성의 기세가 꺾인 것도 같고 또 그만큼 우리 사회의 풍토가 많이 유연해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권이 바뀐 영향이겠죠? 이런 것을 가능케 한 공이 많은 부분 손석희 씨에게 있다고 하면 지나친 칭찬일까요?

 

여담 둘. 현재 지주는 삼협댐이 들어서서 그 몰골이 초라하다고 해요. 세월의 흐름에 따른 변화지요. 인정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죠. 손석희 씨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죠. 그러나 부디 그런 염려가 기우였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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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오래 전, 문득 떠오른 말이에요. 괜찮은 말인것 같아 친구에게 이 말을 했더니, 돌직구를 던지더군요. "아닌 것 같은데? 별똥별은 제자리를 벗어나기에 더 아름답잖아?" 당시 뭐라고 응수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지금 응수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별똥별의 이탈은 그것 자체가 별똥별의 제자리 아닐까? 그래서 아름다운 것 아닐까?" 너무 억지일까요? ^ ^

 

 아포리즘은, 제 경험으로 보면, 일종의 초월이나 비상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어요.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곰삭혀 생각했던 것들이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나온 것 아닌가 싶은거죠. 그렇기에 아포리즘은 적실(的實, 실상에 잘 들어맞음)한 경우가 많죠(제 경우는 빼고요. ^ ^)

 

 사진은 "욕지미래 선찰이연(欲知未來 先察已然)"이라고 읽어요. "미래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이미 그러한 것[과거]을 살펴보라"는 뜻이에요. 『명심보감』「성심」편에 나오는 아포리즘이에요. 아마도 이 말을 한 이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오랫동안 자신의 내부에서 곰삭혀 왔다가 토설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 말은 본래 아포리즘이 아니라 전후에 어떤 말이 있는데 『명심보감』의 저자가 전후 맥락을 자르고 해당 부분만 인용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긴해도 이 말을 접하는 사람은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없으니, 결국은 이도 아포리즘이 되는 셈이에요.

 

 이 아포리즘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이해의 배후엔 '성공적인 미래'가 상정되어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이 아포리즘엔 '성공적인 미래'가 상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저 냉정히(?) 말하고 있을 뿐이죠. 미래를 알고자 하는가? 과거를 살펴보라!

 

그렇다면 냉정한 이 아포리즘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미래의 성공과 실패를 알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살펴보라. 상황이 유사한데 과거에 성공했다면 미래에도 성공할 것이다. 상황이 유사한데 과거에 실패했다면 미래에도 실패할 것이다." 성공이나 실패는 학습되는 것이기에 과거에 성공한 일은, 유사한 경우, 미래에도 성공할 가능성이 크고, 과거에 실패한 일은, 유사한 경우, 미래에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죠. 이는 개인이나 집단 모두에 적용될 듯 싶어요. 과거의 예를 하나만 들어볼까요?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때 그의 폭정을 만류하던 신하들이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경계한 말이 '은나라의 전대인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桀)을 생각하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결국 주(紂)는 은나라를 망치고 말았어요. 유사한 경우, 전대의 실패는 후대에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사례지요. '욕지미래 선찰이연'은 성공과 실패는 유사하게 재현된다는 것을 냉정하게 알려주는 아포리즘이지 결코 '성공적 미래'를 도와주기 위한 따뜻한 아포리즘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은 欠(빠질 결)과 谷(골짜기 곡)의 합자예요. 채워지지 않은 욕구란 뜻이에요. 欠로 뜻을 표현했어요. 谷은 음을 담당하면서(곡→욕)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물이 쉽게 채워지지 않은 골짜기처럼 쉽게 채워지지 않는 욕구란 의미로요. 하고자할 욕. 欲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欲求(욕구), 欲望(욕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矢(화살 시)와 口(입 구)의 합자예요. 화살처럼 대상에 대해 정확하고 예리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대상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알 지. 知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認知(인지), 知能(지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본래 屮(싹날 철)이 중첩된 글자와 木(나무 목)이 합쳐진 모양이었어요. 오래된 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하다란 의미였지요. 지금은 본래 의미와는 따르게 '아니다'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죠. 동음을 빌미로 뜻을 가탁해 사용하다가 본래의 의미는 상실되고 가탁된 의미가 본의미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아닐 미. 未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未完(미완), 未久(미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본래 보리를 그린 거예요. 그런데 보리는 춘궁기에 요긴한 곡식이었기에 신이 보내온 선물이라 여겨 '오다'란 뜻으로도 사용되다 이 뜻으로 굳어졌어요. 보리를 뜻하는 글자는 來에 夕을 더하여 麥(보리 맥)으로 표기하게 됐지요. 올 래. 來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本來(본래), 去來(거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之(갈 지)의 변형(글자 상단 부분)과 人(사람 인)의 변형(글자 하단 부분)이 합져진 글자예요. 남들보다 앞서 간다란 의미예요. 먼저 선. 先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先頭(선두), 先後(선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宀(집 면)과 祭(제사 제)의 합자예요. 높은 곳에서 살펴 본다란 의미예요. 宀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祭는 음을 담당하면서(제→찰)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제사지낼 때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가지듯이 그런 자세로 살핀다란 의미로요. 살필 찰. 察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觀察(관찰), 警察(경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무릎 꿇은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에요. 여기서 의미가 확장되어 '그치다' '이미' 등의 뜻이 나왔어요. 이미 이, 그칠 이. 已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已往(이왕), 已降(이강, 已後(이후)와 동일 의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犬(개 견)과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灬(火의 변형, 불 화)의 합자예요. 개고기로 번제(燔祭, 태워서 지내는 제사)를 올린다는 의미예요. 지금은 이 의미를 燃으로 표기하고, 然은 주로 '그러하다'란 뜻으로 사용하죠. 이 경우는 동음을 빌미로 뜻을 가탁한 거예요. 불탈 연. 그러할 연. 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自然(자연), 茫然自失(망연자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과거의 실패와 성공이 미래에 동일하게 반복된다면 과거를 알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겠지요. 그러나 알고 맞이하는 것 하고 모르고 맞이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거예요. 이런 차원에서라도 과거를 알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비록 실패가 예견된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알고서 맞이한 실패는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해 아무래도 충격이 덜할테니까요. 그리고 부족하나마 어느 정도 대비도 할 수 있을테니 말이지요.

 

여담 둘. 사진은 인사동에서 찍었어요. 인사동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죠. 높은 임대료로 인한 전통 가게들의 철수와 국적 불명의 값싼 제품의 난무를 주요인으로 들더군요. 이번에 가보니 실감하겠더군요. 인사동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여담 셋. 격언 경구란 말이 식상해서 아포리즘이란 말을 써보았어요. 조금 신선한 맛은 있는데 역시 좀 어색하네요. 다음부터는 격언 경구란 말을 다시 써야 겠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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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어느 시인은 외로움을 삶의 숙명인 양 노래했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열망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싶어요. 외로움이 숙명이고 당연한 것이라면 굳이 그것을 노래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람은 역시 사람과 어울려 지낼 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존재이지 않나 싶어요.

 

당나라 천보(天寶, 현종) 연간에 변방 - 주로 서역 - 의 풍경과 생활 그리고 그곳에서 머무는 군인들의 애환을 주요 시제로 삼는 일군의 시인들이 나타나요. 이른바 변새시파(邊塞詩派)로 불리는 시인들이죠. 고적, 잠삼, 왕지환, 왕한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은 실제 변방에서 근무했던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변방의 풍물과 인정을 핍진하게 그렸어요. 특기할만 한 것은 변방의 풍물과 인정을 그렸지만 시의 정서가 살풍경하지 않고 낭만적 정서가 배어 있다는 점이에요. 천보 연간 이후로 당나라의 국세가 많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이들 시인이 활약하던 시기는 아직 성세에 있었기에 그런 정서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폐색의 시기였다면 그런 정서는 불가능했겠지요.

 

사진의 시는 변새시파의 일원인 잠삼(岑參,715-770)의 '양주사(諒州詞)'란 시예요. 변방 지역의 고적한 분위기를 그린 시로, 앞서 말한 것처럼, 변새시임에도 불구하고 살풍경하지 않고 낭만적인 정서가 배어 있어요.

 

邊城暮雨鴈飛低   변성모우안비저   변성 저물 녘 비내리는데 기러기 낮게 날고

蘆笋初生漸欲齊   노순초생점욕제   갈대 싹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웃자라 버렸네.

無數鈴聲遙過磧   무수영성요과적   방울 소리 울리며 사막 지난 비단 상인들

應駄白練到安西   응태백련도안서   지금 쯤은 안서에 도착했을 듯.

 

시의 화자는 병사인 듯 싶어요. 저녁 불침번 차례가 되어 창을 들고 성 위에 섰어요. 병사를 둘러싼 풍경엔 사람의 인기척이 하나도 없어요. 하늘엔 잿빛 물감만 가득하고 땅엔 웃자란 갈대 밖에 없어요. 움직이는 물체라곤 기러기 뿐인데 이마저도 날개를 늘어 뜨린 채 힘없이 낮게 날고 있어요. 고적한 심사를 달랠 길 없는데 무심한 하늘에선 어느새 추척추적 비가 내리고 있어요. 더없이 인정이 그리운 병사는 문득 성의 관문을 통과해 사막 길을 지나갔던 비단 상(商)들을 생각해요. 통과시 그들과 있었던 인정의 교류를 떠올리며 고적한 심사를 달래는 것이지요. 아무런 친분도 없지만 문득 그들의 안부가 궁금한 건 그들이 자신과 감정이 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병사는 허공을 향해 그리움의 소리를 질렀을 것만 같아요. 어어이~

 

낯선 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은 辶(걸을 착)과 自(부터 자)와 方(旁의 약자, 곁 방)의 합자예요. 자기가 있는 곳에서[自] 걸어서 갈 수 있는[辶] 근방[方]이란 뜻이에요. 의미를 확장하여 국경 지대란 의미로도 사용하죠. 가 변. 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周邊(주변), 邊境(변경)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人(사람 인)과 氐(근본 저)의 합자예요. 氐는 본래 나무 뿌리가 땅[一]으로 곧게 내려갔다란 뜻이에요. 그렇듯 사람이 몸을 아래로 구부려 낮추었다란 뜻이에요. 낮출(을) 저. 低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低價(저가), 低空(저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艹(풀 초)와 盧(밥그릇 로)의 합자예요. 갈대란 뜻이에요. 艹로 뜻을 표현했어요. 盧는 음을 담당해요. 갈대 로. 蘆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蘆岸(노안, 갈대가 우거진 물가의 언덕), 蘆花(노화, 갈꽃)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竹(대 죽)과 尹(맏 윤)의 합자예요. 대나무 순이란 뜻이에요. 竹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尹은 음을 담당해요(윤→순). 대순 순. 笋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竹笋(죽순), 笋籜(순탁, 죽순 껍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위 시에서는 대순의 의미가 아니라 갈대순의 의미로 사용됐어요.

 

은 본래 물이름이에요. 안휘성 이현에서 발원하여 남만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 물이에요. 물이름 점. 후에 '차차'란 의미로 주로 사용하게 됐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점수(漸水)가 서서히 흐른다는 의미로요. 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漸進(점진), 漸層(점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밭 두둑 위에 보리 이삭이 가지런히 핀 모양을 그린 거예요. 가지런할 제. 齊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齊家(제가), 齊整(제정, 정돈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金(쇠 금)과 令(아름다울 령)의 합자예요. 방울이란 뜻이에요. 金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令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방울소리는 듣기 좋다는 의미로요. 방울 령. 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鈴語(영어, 방울 소리), 鈴閤(영합, 장수가 있는 곳)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馬(말 마)와 太(클 태)의 합자예요. 짐을 싣는다는 뜻이에요. 馬로 뜻을 표현했어요. 太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짐을 싣는 짐승은 대개 덩치가 크다는 의미로요. 실을 태. 駄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駄背(태배, 등에 짐), 駄價(태가, 짐을 실어다 준 삯)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糸(실 사)와 柬(가릴 간)의 합자예요. 무명 모시 따위를 잿물에 삶아 물에 빨아 말린다는 의미예요. 糸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柬은 음을 담당하면서(간→련)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삶을 적에 제대로 삶아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로요. 누일 련. 위 시에서는 누인 비단이란 의미로 사용됐어요. 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練囊(연낭, 누인 명주로 만든 주머니), 練帛(연백, 누인 비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멀어서 다니기 쉽지 않다는 뜻이에요. 辶(걸을 착)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멀 요. 遙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遙遠(요원), 遙望(요망, 멀리서 바라 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石(돌 석)과 責(積의 약자, 쌓을 적)의 합자예요. 돌이 쌓여있는 곳, 즉 자갈밭이란 뜻이에요. 자갈밭 적. '모래 벌판'이란 뜻으로도 사용해요. 이 경우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지요. 모래벌판 적. 磧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沙磧(사적, 사막), 石磧(석적, 자갈밭)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사진은 촛불 집회 1주년 기념차 서울에 갔다가 안국역에서 찍었어요. 역사 내 벽에 행인들을 위해 그림들이 전시돼 있더군요. (작가 분들껜 죄송하지만) 전시된 기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그림들이 추레해 보였어요. 그래서 그럴까요? 지나가는 대부분의 행인들이 거의 눈길을 주지 않더군요. 해당 기관에서 다시 한 번 관심있게 살펴보고 정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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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2017-11-09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늦가을에, 작품도 좋고 풀이도 좋습니다.

찔레꽃 2017-11-09 16:04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은근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셨네요. 역시 고수이십니다.
 

                                                           

 <사진 출처: <시사IN> 창간 10주년 기념 특별호(527). 부분 발췌>

 

 

이명박 정부하 국정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취소 청원을 기획했었다죠? 축하하고 또 축하해도 모자랄 경사를 두고 어찌 그런 일을 꾸몄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도 소련 정부하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을 저지당한 일이 있죠. 하지만 수상(솔제니친) 이후 소련 정부가 수상 취소 청원을 기도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노벨상 수상 취소 청원 기도는 아마 노벨상과 관련한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어요.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에요.

 

자랑스러워해야 할 인물이 폄훼된 사례중에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선생이 있죠. 해외에서 20세기 5대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만큼 훌륭한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상찬은 커녕 오랫동안 불온인사로 취급당했죠. 친북 성향을 띈 해외 반체제 인사라는 게 그 죄명(?)이었죠. 동백림 사건으로 무고한 시달림을 받았던 그였기에 반공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남한 정부를 비판한 것은 어찌보면 그로선 당연한 행위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친북 성향도 이런 연장선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남한 정부와 달리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고 포용하려 했던 북한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아니 가질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선생이 친북적인 경향을 띄었다곤 하지만 그가 결코 북한을 추종했던 것은 아니라고 보여요. 해외 범민련 의장직을 사퇴한 것이 그 한 증거이죠. 북한이 범민련을 이용한다라는 게 그의 사퇴 명분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선생은 남 ·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양 체제가 아직도 대립하고 있는 한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내려지기 어려울 듯 싶어요. 통일이 된 이후에나 그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은 이 불행한 예술가의 묘비명이에요. 그의 이름과 함께 그가 생전에 사랑했음직한 말이 함께 새겨져 있어요. 처염상정(處染常淨). 오염된 곳에 처해도 항상 맑다. 연꽃을 말할 때 사용하는 말이죠. 연꽃은, 주지하는 것처럼, 불가에서 초월, 청정등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하는 꽃이죠. 묘비명은 그 사람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 묘비명은 한 불행했던 예술가의 묘비명이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돼요.

 

홍은미씨는 윤이상 선생의 음악 세계를 융합과 조화로 보면서 이런 말을 해요: "120곡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전부 서양의 현대음악 어법으로 씌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나고 자라면서 체험한 한국의 소리가 거의 대부분 작품에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미학적 사상성에 있어서도 동아시아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면서 일례로 윤이상의 출세작 중의 하나인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에 대해 당대 음악인들의 감탄을 두 가지로 설명해요: "하나는 철저히 12음 기법으로 씌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12음 기법을 쓰는 작곡가들의 작품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악보에 난무하는 수많은 음표들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단아함, 즉 정중동의 신비감이다." (인용 출처:http://www.yunfoundation.org/. 일부 내용 요약 인용)

 

요컨대 그의 음악은 이질적인 것의 화해(和諧)가 핵심이라는 것 같아요. 이런 각도에서 그의 묘비명 '처염상청'은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꽃이 아름다운 것은 진흙과 같은 더러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진흙과 같은 더러운 것이 대비되지 않는다면 연꽃의 아름다움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연꽃과 진흙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대비적 관계라기보다는 상보적 관계로 볼 수 있다. 진흙이 상대적으로 연꽃보다 하위에 놓인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연꽃에 비해 드러나보이지 않을 뿐이다. 진흙이라는 영양분이 없으면 연꽃도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진흙의 가치는 결코 연꽃에 비해 뒤지는 것이 아니다. 동양 음악은 서양 음악과 대비될 때 그 특성이 드러나며, 서양 음악 또한 동양 음악과 대비될 때 그 특성이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동양 음악과 서양 음악은 서로 대척점에 놓인 것이 아니라 서로 도와주는 관계에 놓인다고 볼 수 있고, 양자의 화해는 궁극적으로 '음악'이라는 예술을 한층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준다. 바로 이런 음악을 추구한 것이 나(윤이상)의 음악이다."

 

그러나 처염상정을, 일반적 의미(초월, 청정)로 해석하여, 그의 생을 대변하는 말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세상 그 어떤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인생이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실제 그에게는 그런 면모가 있어요. 남북한의 상이한 이데올로기[세속]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과 통일[이상]을 우선시했던 것이 그렇지요. 어떻게 보든 처염상정은 그에게 잘 어울리는 묘비명이란 생각이 들어요.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는 虍(범 호)와 夂(뒤져올 치)와 几(의자 궤)의 합자예요. 뒤에서 힘겹게 좇아와 앞 사람에게 미치듯이 의자에 양 관절이 도달해(?) 머무른다란 의미예요. 머무를 처. 虍는 음을 담당해요(). ‘이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머무르는 곳'이란 의미로요곳 처. 處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處地(처지), 何處(하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木(나무 목)과 氵(물 수)와 九(아홉 구)의 합자예요. 염색 원료[]의 액체[ 氵]를 가지고 여러 번[] 물들인다는 뜻이에요. 물들일 염. 染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染色(염색), 傳染(전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巾(수건 건)과 尙(숭상할 상)의 합자예요. 깃발이란 의미예요. 깃발의 형태가 수건과 흡사하여 巾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尙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常은 천자와 제후들이 사용하던 깃발로 존귀하게 취급되던 깃발이란 의미로요. 깃발 상. '항상'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常은 항상 존귀하게 취급된다는 의미로요. 항상 상. 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恒常(항상), 常備(상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氵 (물 수)와 爭(다툴 쟁)의 합자예요.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에요. 氵로 뜻을 나타냈어요. 爭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깨끗하게 하려면 더러운 것과 다투게 된다란 의미로요. 깨끗할 정. 淨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淨化(정화), 淸淨(청정)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상담 프로그램에서 삶에 대한 각성을 이끌기 위해 미리 쓰는 유서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죠. 옛 분들도 그런 전통이 있었던 듯 해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그것이죠. 생전에 자신의 묘지명을 미리 쓰는 것이죠. 자신의 삶이 후세에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각성을 다짐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죠. 다산 선생도 이런 묘비명을 썼고 퇴계 선생도 이런 묘비명을 썼다고 해요. 죽음은 삶의 이면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미리 쓰는 유서나 자찬묘비명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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