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분명 대장부(財上分明 大丈夫), 재물에 대해 청명한 태도를 보이는 자, 그가 바로 대장부이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한 구절이에요. 이 말을 뒤집으면 졸장부의 정의가 될 거예요: 재물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자, 그가 바로 졸장부이다. 최근 언론 매체를 도배하는 이명박 전대통령의 다스 및 재산 관련 보도는 이 전대통령이 어떤 인물인가를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지요. 있는 X이 더한다더니, 정말 그런가봐요.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 어찌 그리 재물에 대해 무한 욕심을 부린(리는) 것인지. 적어도 재물에 관한 한 이 전대통령은 졸장부라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이 전대통령 못지않게 평범한 이들도 재물에 관한 한 졸장부를 자처할 때가 있어요. 바로 세금낼 때이죠.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덜 낼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잖아요? 지금이 연말정산 기간이니 직장인들은 여지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겠군요.

 

 

그러나 직장인들이 제 아무리 머리를 굴린들 과연 얼마나 세금을 덜 내게 될까요? 직장인들의 지갑, 특히나 공무원들의 지갑은 유리 지갑이잖아요? 괜시리 졸장부 되려 말고 대장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매일 이런저런 눈치보며 졸장부처럼 지내는데 일년에 한 번 이라도 대장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철없는 소리 말라구요? 죄송합니다~

 

 

사진은 인근의 세무소에 들렸다 찍은 거예요. 읽어 볼까요? 청능유용 인능선단 명불상찰 직불과교(淸能有容 仁能善斷 明不傷察 直不過矯). 이런 뜻이에요: 심성이 맑고 깨끗하면서도 남을 포용할 줄 알고, 마음이 어질면서도 일에 대해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으며, 지혜가 총명하면서도 까다롭게 살피지 않고, 행동은 강직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나치게 따지지 않는다. 『채근담』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사진을 찍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저 액자를 쓴 이는 무슨 마음으로 『채근담의 문구를 인용한 것일까?' 소시민들에게 세무소의 이미지는 긍정적이기 보다 부정적이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겐 악착같이 걷고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들에겐 관대하게 대하는 불공정한 기관, 이게 세무소에 대한 소시민들의 일반적 이미지죠. 이런 기관에 세금을 내려니 아까워 한 푼이라도 덜 내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것 아닌가 싶어요. 만일 세무소가 공정하다는 인식이 있으면 그런 잔머리 굴리는 졸장부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액자를 쓴 이는 세무소가 좀 더 공정한 세무 행정을 펼쳤으면 하는 바램에서 채근담의 문구를 인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겉으로는 중용의 인격 수양을 강조하는 내용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세무 행정의 공정을 지켜달라는 바램으로 말이지요. 꿈보다 해몽이 좋은가요?

 

 

낯선 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能은 본래 곰의 한 종류를 그린 글자예요. 서있는 곰의 측면 모습으로 그린 거예요. 厶는 머리를, 月은 배를, 匕 2개는 다리를 표현한 거예요. 지금은 주로 '능력있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곰'이란 의미로는 거의 사용안해요. 능력있다란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능할 능. 能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賢能(현능), 才能(재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斷은 㡭(絶의 옛 글자, 끊을 절)의 약자와 斤(도끼 근)의 합자예요. 도끼를 사용하여 끊는다는 의미예요. 끊을 단. 斷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斷腸(단장), 斷絶(단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傷은 人(사람 인)과 昜(드러날 양)의 중첩자가 결합된 거예요. 타인에게 가한 상처나 타인에게 입은 상처란 의미예요. 人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昜의 중첩자는 음을 담당하면서(양→상)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상처는 쉽게 눈에 띈다는 의미로요. 상처 상. 傷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外傷(외상), 傷處(상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察은 宀(집 면)과 祭(제사 제)의 합자예요. 위에서 아래를 살펴본다란 의미예요. 宀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祭는 음을 담당하면서(제→찰)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제사를 지낼 때 신중한 태도를 취하듯, 그같이 신중한 태도로 살펴본다는 의미로요. 살필 찰. 察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觀察(관찰), 視察(시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矯는 矢(화살시)와 喬(높을 교)의 합자예요. 굽거나 지나치게 긴[喬] 화살[矢]을 바로잡고 길이를 줄인다는 의미예요. 바로잡을 교. 矯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矯正(교정), 矯角殺牛(교각살우, 결점이나 흠을 고치려다 수단이 지나쳐 도리어 일을 그르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채근담은 菜(나물 채) 根(뿌리 근) 譚(말씀 담)으로, '나물 뿌리같이 담담한 이야기, 혹은 나물 뿌리를 먹고 견딜 각오를 드러낸 이야기' 등으로 풀이할 수 있어요. 평범한 내용인 듯 싶지만 세파를 헤쳐나가는 담대함과 지혜가 담긴 책이란 의미겠지요. 사진의 낙관은 '갑신(甲申, 2004) 추일(秋日, 가을 날)  록채근담구(錄菜根譚拘, 채근담 구절을 쓰다) 일련(一蓮, 연 꽃 한송이. 글씨 쓴 이의 아호)' 이라고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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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8박 9일 일정으로, 예정에(?) 없던, 라오스 여행을 다녀왔어요. 느낀 바가 있어 짤막한(?) 소감을 작성했는데, 한문으로 작성했어요. "짜식, 뭐야 한문으로 소감을 작성하다니…. 덜 떨어진거야 아니면 한문 아는 사람이 적다고 잘난체 하는 거야 뭐야." 이런 오해는 말아 주세요. 나름 이유가 있어 한문으로 작성했어요.

 

 

조동일 교수의동아시아 문명론을 읽다보니, 조교수가 한중일 나아가 한자 문화권 학자들은 논문을 '한문'으로 쓰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한 내용이 나오더군요. 주 이유는 공동학술대회에서 겪는 번역의 어려움 때문인데, 각기 자국어로 논문을 제출하다보니 주최국에서 제출 논문을 주최국어로 번역하기가 힘들고 아울러 저자 입장에서도 자신의 견해가 십분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거예요. 어느 한 나라의 언어만으로 쓰거나 혹은 만국 공통어가 되다시피한 영어로 쓰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어느 한 나라의 언어나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이 용이치도 않거니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 의견을 피력해요. 그러면서 적어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과거 공용문어였던 '한문'으로 논문을 쓰면 상기 난점들이 해소될 것 같다는 주장을 펴요.

 

 

처음에는 좀 황당한(?) 주장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나름 일리가 있는 것 같더군요. 글이라는게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게 주목적이고 나와 타인이 공유하는 익숙한 문자가 있다면 이를 사용하여 글을 쓰는게 상호 편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중국과 일본은 한문 작문이 그다지 어렵지 않겠지만 한글 전용으로 매진해 온 우리에겐 좀 어려운 제안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완전히 한자 한문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기에, 더구나 학자들의 경우는 일반인과 달리 한자 한문에 얼마간 익숙할테니, 조금만 노력하면 중일과 같은 수준이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자, 제가 왜 한문으로 소감문을 작성했는지 조금 오해가 풀리셨는지요? 그래요, 조교수의 견해를 일반인의 입장에서 수용하여 한자 문화권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문으로 작성한 거예요(이 소감문을 한자 문화권 사람들이 볼 일이 거의 없겠지만서도요. 하하). 한문 작문이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건 고문체의 멋진 문장을 상정할 때의 문제이지, 단순 의사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제 소감문이 이를 증명해요.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한자들을 약간의 허사를 이용하여 조합했기에 아주(?) 쉬워요. 읽으면 바로 이해가 되죠. 얼마간의 한자 지식으로 한자 문화권 사람들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한문 작문을 하는 것, 한 번 시도해볼만 한 일인 것 같아요.

 

 

읽으면 바로 이해가 되실 터이지만, 굳이 우리 말 번역을 붙여봐요. 혹 읽기가 어려우실 분들을 위해. 사진은 라오스에서 찍은 건데 소감문의 주제를 잘 반영하는 것 같아 올려 봤어요.

 

 

老撾是東南亞細亞之一國也  太國越南眞臘環繞其國  國力微弱時常常被害於此等國  而且到近代爲佛蘭西所勒絆 卽爲植民國  竊謂老撾之地政及近代狀況  與我國多少恰似  有同病相憐之情 

 

近者吾內外與近隣柳兄內外觀光此國  自萬象經由萬榮到琅勃拉邦以八泊九日間滯留  滯留期間中  攝取現地飮食  體驗冒險活動  訪問有名場所  然未有特別追憶  何也  所以余本是酷好思索觀察而不好運動體驗也  而且今番觀光爲內子所牽 不得已參豫 又有一要因焉  觀光期間中如下之生覺不離於腦裏  這箇思考 今番觀光追憶之追憶也 

 

老撾之貧富隔差極甚 都會生活水準與高山生活水準 天壤之差矣 自萬榮到琅勃拉邦時 處處目睹高山路邊住民生活狀 目不忍見 然而目擊特異點  住民擧皆 表情溫和  余甚怪焉  何以至此 竊謂重要因在於佛敎信仰 老撾國民擧皆深信佛敎  傳言約九十百分點以上信奉佛敎  佛敎强調現實受容[滿足] 此點使此國民甘受貧困現實而別無不滿  蓋發展者  開始於現實不滿  而現實不滿出發於比較他者  萬若無比較他者 將別無不滿于現實矣  吾國內戰以後 飛躍發展 然吾國民果然幸福比老撾國民  余不說確信也  發展刺戟不斷的欲望  不斷的欲望引導不斷的不滿足 不斷的不滿足惹起心的缺乏 心的缺乏招來不幸  余以爲吾國進入如此之惡循環  以老撾爲貧國卑下  此是短見乃至誤解也  觀光客常常掛念於此 是矣 而且深思熟考於發展之價値  發展未必謂之最善價値也  吾不說吾國民可以信奉佛敎乃至中斷發展  但强調反省乃至省察而已矣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이다. 태국과 월남 그리고 캄보디아가 이 나라를 감싸고 있어, 국력이 미약할 때는 항상 이들 나라에게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근대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굴레에 매였으니, 식민지가 되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라오스의 지정과 근대 상황이 우리나라의 과거 상황과 다소 흡사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럴까 동병상련의 정을 갖게 된다.

   

 

근자 우리 내외는 이웃인 류형 내외와 이 나라를 관광했다. 브엔티엔에서부터 방비엥을 경유하여 르왕프라방에 이르렀는데 팔박구일간 체류했다. 체류기간중 현지음식도 먹고 액티브한 활동도 하고 유명 장소도 방문했다. 하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는 추억거리가 없다. 왜일까? 나는 본시 사색하고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액티브한 활동이나 체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관광이 안사람에게 이끌려 부득이 참여한 것도 한 요인이 된다. 관광내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생각이야말로 이번 관광에서 얻은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라오스의 빈부격차는 극심하다. 도회지의 생활 수준과 고산지대의 생활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방비엥에서 르왕프라방에 갈때 곳곳에서 고산 노변 주민들의 생활상을 목도했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매우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주민 거개가 온화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게 심히 의아스러웠다. 어찌 이럴수 있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특이한 점은 불교 신앙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라오스의 국민 거개는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전하기론 약 90%이상이 불교를 신봉한다고 한다. 불교는 현실 수용[만족]을 강조한다. 이 점이 이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빈곤한 현실을 감수하면서 별다른 불만이 없게 만든 것 아닐까 싶다. 대개 발전이라는 것은 현실 불만에서 시작되고, 현실 불만은 타자와의 비교에서 출발한다. 만약 타자와의 비교가 없다면 현실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내전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 국민이 라오스 국민에 비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신하여 말하기 어렵다. 발전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욕망을 자극하고, 끊임없는 욕망은 끊임없는 불만을 인도하며, 끊임없는 불만은 심적 결핍을 야기하고, 심적 결핍은 불행을 초래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라오스를 빈국이라고 비하하는 것은 단견이요 오해다. 관광하는 이들은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울러 발전의 가치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발전이 반드시 최선의 가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 국민이 불교를 신봉해야 한다거나 발전을 중단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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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야금을 배운 지 60여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조금만 연습을 소홀히 하면 모처럼 얻은 성음(聲音)을 놓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황병기, 『논어 백가락』)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은 팔순을 넘긴 나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의 가야금 솜씨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요. 범인이 보기에 그만한 연륜에 그만한 실력이면 더 찾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아직도 만족을 못느껴 부단히 가야금 연습을 한다 하니, 과시 명인은 함부로 얻는 칭호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진은 조선조 18세기 예원(藝苑)의 총수로 불렸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 선생의 난죽도권(蘭竹圖卷) 낙관 부분이에요. 읽어 볼까요? 조송설화후 내감체필난사 가위담여두의 참황살인 경술중춘 표옹서 시년칠십유팔(趙松雪畵後 乃敢泚筆亂寫 可謂膽如斗矣 慙惶殺人 庚戌仲春 豹翁書 時年七十有八). 풀이해 볼까요? "송설 조맹부의 그림 뒤에 감히 붓을 들어 되잖은 그림을 그렸으니 무모하다 이를만 하다. 부끄럽고 두려워 죽을 지경이다. 경술년(1790) 중춘(음력 2월) 표암 늙은이 쓰다. 내 나이 78세 때이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자 당시 예원의 총수로 불렸던 이가 한 말 치고는 너무 겸손하여 읽는 이들이 어리둥절할 지경이에요. 더구나 이 작품이 생을 마감하기 한 해 전에 완성된 것임을 상기할 때 낙관의 내용은 자학에 가까울 정도의 겸사를 사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시원시원한 구성과 완숙한 필력으로 그려졌다. 평생의 필력을 다 쏟아부은 강세황 사군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민길홍)." "습윤한 수묵법의 바위와 속도감있게 처리된 경쾌한 갈필법의 난엽과 댓잎은 농담과 소밀의 대조 만큼이나 정확하고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노숙하면서도 전형화된 필치는 만년기 강세황의 죽석, 난초 그림에 드러나는 특징이다(2013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특별전 해설)." 이런 후대의 평가를 들어보면 선생의 겸사에 대해 갖는 의아스러움은 더욱 증폭되죠.

 

선생은 정말 자신의 말처럼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없었던 걸까요? 객관적 호평과는 달리, 어쩌면 실제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서 보면 말이죠.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자신의 가야금 연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황병기 명인이나 강세황 선생이 훌륭한 예술가라는 점은 바로 이 점에 있는 것 같아요. 범인이라면 만족하고도 남을 경지에 이르렀건만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매진하는 그 열정과 성실 말이죠. 두 예술가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그들의 높은 예술적 성취이겠지만 그보다 그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성실이 우선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泚는 氵(水의 변형, 물 수)와 此(이 차)의 합자예요. 물이 맑다는 뜻이에요. 氵로 뜻을 표현했어요. 此는 음을 담당해요(차→체). 위 낙관에서는 '담그다'란 뜻으로 사용됐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맑을(담글) 체. 泚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泚筆(체필, 붓으로 먹물을 찍음)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亂은 어지럽게 뒤엉킨 실을 양손으로 정리하는 모양을 그린 거예요. 왼쪽 부분이 직접적으로 이 모양을 나타냈고, 오른쪽의 乙(굽을 을)은 실이 뒤엉킨 상태를 강조하기 위하여 덧붙인 거예요. 다스릴 란. 일반적으로 '어지럽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뒤엉킨 실의 상태만을 강조하여 표현한 의미예요. 어지러울 란. 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亂臣(난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신하.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라는 의미로도 사용), 混亂(혼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寫는 宀(집 면)과 舃(신발 석)의 합자예요. 다른 장소에 있는 물건을 현재 장소에 가져다 놓았다란 의미예요. 공간, 장소의 의미를 지닌 宀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舃은 음을 담당하면서(석→사)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신발은 땅 위를 밟는 물건인데, '가져다 놓는 것'은 그같이 다른 물건을 기존의 물건 위에 올려놓는 행위란 의미로요. 놓을 사. 일반적으로 '베낀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베낄 때는 베끼려는 대상 위에 종이나 천을 올려 놓잖아요? 베낄 사. 寫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複寫(복사), 寫本(사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膽은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詹(넉넉할 담)의 합자예요. 쓸개라는 뜻이에요. 月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詹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쓸개는 항시 즙(汁)을 배출한다는 의미로요. 쓸개 담. 담력이라는 의미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담력은 쓸개와 상관이 많기 때문이죠. 담력 담. 膽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膽如斗(담여두, 담(력)이 큰 것을 형용하는 말), 熊膽(웅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慙은 心(마음 심)과 斬(벨 참)의 합자예요. 목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란 의미예요. 부끄러울 참. 慙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慙愧(참괴), 慙悔(참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惶은 忄(心의 변형, 마음 심)과 皇(클 황)의 합자예요. 두렵다란 의미예요.  忄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皇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성대(盛大)한 것 앞에서는 두려움 마음이 든다는 의미로요. 두려울 황. 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惶恐(황공), 惶悚(황송)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豹는 豸(발없는벌레 치)와 勺(구기 작)의 합자예요. 표범이란 뜻이에요. 표범의 허리가 길기에 豸로 뜻을 표현했어요. 勺은 음을 담당해요(작→표). 표범 표. 豹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豹變(표변, 마음과 행동이 갑자기 달라짐), 土豹(토표, 스라소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강세황 선생은 태어날 때 부터 등에 표범 무늬와 같은 문신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자신의 호를 표암이라고 했다는 군요(표암은 표범이 사는 집이란 의미).

 

여담 하나. 아래 그림은 난죽도권 그림 부분이에요. 대나무와 난초를 한 화면에 배치한 것이 특이해요. 대개 사군자는 별개로 그리는데 말이죠.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런 시도는 강세황이 처음 했다고 나오더군요. 영통구도(靈通口圖)」에서 서양의 원근법을 도입하여 산수화를 그리는 실험 정신을 보였던 그였기에 이런 배치의 그림을 시도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배치의 그림이 지금 우리에겐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무척 파격적인 것으로 보였을 거예요. 전통의 답습을 깬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글씨와 그림의 사진은 인천공항에서 찍었어요. 당연히 모사품이고,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요.

 

 

 

 

 

여담 둘. 우리 세대는 중고등학교에서 동양의 전통 그림에 대해 배운 적이 없어요.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뭐 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배운 것 하고 안배운 것은 차이가 있지요. 조금이라도 귀동냥을 했다면 동양의 전통 그림에 대해 좁쌀만한 안목이라도 있을텐데 전혀 배운 적이 없다보니 동양의 전통 그림에 대해 거의 백치 상태예요. 강세황 선생의 묵죽도권에 대해 저의 느낌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타인의 감상평을 빌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예체능 교과가 주지 교과에 밀려 홀대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니, 아니 더 심해졌으니, 별다른 개선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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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http://gotn.tistory.com/390>

 

 

 

  

 

"각자 좋아하는 시를 한 수씩 읊어보면 어떨까?"

 

  

 

 

 

 

교수님이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씀하셨어요. 인근의 산성으로 야외 수업을 빙자한 나들이를 갔을 때 였지요. 그러나 학생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서로 눈짓만 교환할 뿐 아무도 시를 읊지 않았어요(어쩌면 못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암송하는 시가 없어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교수님은 다소 멋적으셨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씀 하셨어요. "아무래도 좀 그렇지? 미리 준비 좀 하라고 일렀으면."

 

 

 

 

30년 전 추억의 한 장면이에요. 당시 교수님의 청(), 솔직히, 너무 어색한 청이었어요모이면 그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잡담 일색인 학생들에게 시를 한 수씩 읊어 보라니.

  

 

 

 

당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옛 풍류 - 경치 좋은 곳을 찾으면 시를 짓거나 읊는 - 를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아울러 현재(당시)의 유희 문화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갖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구요. 당시는 교수님의 청이 너무 생뚱맞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왠지 속 깊은 청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치 좋은 곳에 가면 으레 만나게 되는 건물이 있죠. 누정(樓亭). 그리고 누정에 빠짐없이 붙어있는 것이 있죠. 시문(詩文). 누정에 올라 그저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사만 연발하다 내려오는 건 왠지 좀 아쉬워요. 그곳의 시문 현판을 읽으며 옛 사람과 교감을 나눌 때 보다 의미있는 방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요즘은 한문에 낯선 이들을 위해 한글 번역문도 곁들여 놓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관계 기관의 훌륭한 배려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보고 이렇게 느꼈는데 옛 사람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나 대조하며 경관과 인심(人心)의 변화를 살피는 깊이있는 방문이 될테니까요.

 

 

 

 

사진은 춘천에 있는 소양정(昭陽亭) 시문 현판이에요.

 

 

 

 

 

昭陽亭   소양정

 

松巖 梁大樸   송암   양대박

 

 

遠客惜芳草    원객석방초   나그네 꽃 핀 봄날이 아쉬워
昭陽江上行    소양강상행   소양강가에 나아가네.
高亭臨古渡    고정임고도   높은 정자는 옛 나루를 내려보고
喬木夾飛甍    교목협비맹   교목은 치솟아 처마를 끼고 있어라.   
列峀天邊淡    열수천변담   둘러친 산들은 하늘가에 담박하고
晴波檻外明    청파함외명   안개 걷힌 파도는 난간 너머로 분명하다.
風流堪畫處    풍류감화처   풍류는 그림처럼 빼어나고
漁艇帶烟橫    어정대연횡   고깃배 안개 속을 가로지른다.

 

紹軒   鄭道進      소헌   정도진      소헌 정도진 쓰다

 

  

<번역 출처:http://archive.ccmunhwa.or.kr/archive/item.php?it_id=1482820476&caidc=b1606010>

 

 

소양정을 찾게 된 계기와 소양정의 모습 그리고 소양정에서 바라본 풍경과 소회를 그리고 있어요. 누정의 위치가 대개 배산임수(背山臨水)인 것을 감안하면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풍경이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아요. 하여 이 시에서 눈여겨 볼 것은 첫 구의 '(, 아쉬워 하다)'이 아닐까 싶어요

 

 

 

 

 

떠도는 이가 느끼는 봄은 정착한 이가 느끼는 봄과 차이가 있죠. 정착한 이는 희망이나 소생의 느낌을 갖겠지만 떠도는 이는 비애나 좌절의 느낌을 가질 거예요. 시인은 나그네예요. 떠도는 이죠. 예외없이 비애나 좌절의 느낌을 가졌을 거예요. 그 심사를 ''으로 표현했어요. 시인은 그런 울울한 심사를 달래보려 소양정을 찾았어요. 그런데 이후의 내용에서 그런 울울한 심사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어요.

 

 

 

 

그러나 소양정과 주변의 풍경 묘사를 보면 시인의 심사가 어떻게 됐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곧추 선 나무, 둘러친 산, 안개걷힌 파도는 객관 풍경으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내면풍경으로도 읽힐 수 있어요. 이로 미뤄보면 시인의 울울한 심사가 '해소'됐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요.

 

 

 

 

누군가 답답한 마음으로 소양정을 찾았다 그 심사를 털어 버렸을 때 이 시를 읽는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어요: "허허, 내가 느꼈으나 말하지 못한 것을 잘도 표현하셨네 그려!"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날 일)(부를 소)의 합자예요. 햇살이 밝다는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부르는 것이 소리가 대상에 도달하는 것이듯, 햇살이 밝다는 것은 햇살이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이름이란 의미로요. 밝을 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昭代(소대, 태평한 세상), 昭詳(소상, 분명하고 자세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변형, 물 수)(잴 도)의 합자예요. 물의 깊고 얕은 정도를 헤아려 건넌다란 의미예요. 건널 도.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渡河(도하), 讓渡(양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구부러질 요)(높을 고)의 줄임 글자가 합쳐진 거예요. 높아서 끝 부분이 구부려졌다는 의미예요. 높을 교.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喬木世臣(교목세신, 여러 대를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 喬竦(교송, 높이 솟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큰 대)(사람 인) 2개가 합쳐진 거에요. 는 본래 양팔과 양 다리를 벌린 상태를 그린 거예요. 사람이란 의미였지요. 은 한 사람을 양쪽에서 끼고 부축하여 도와준다는 의미예요. 낄 협.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夾攻(협공), 夾雜物(협잡물, 섞인 물건, 순수하지 않은 물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기와 와)(꿈 몽) 약자가 합쳐진 거예요. 수키와 혹은 대마루(용마루)란 뜻이에요. 건물 바깥쪽을 강조하면 용마루를 덮고있는 '기와'란 뜻으로, 건물 안쪽을 강조하면 기와를 올려놓은 '용마루'란 뜻으로 사용해요. 여기 (덮을 몽)의 의미로 사용됐어요. 수키와(용마루)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甍宇(맹우, 기와집), 甍棟(맹동, 용마루에 얹은 수키와와 마룻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뫼 산)(단지 유)의 합자예요. 주변이 높고 가운데가 움푹한 단지처럼 산의 중앙에 생긴 동굴이란 의미예요. 산굴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岫居(수거, 산의 동굴에서 삶), 岫雲(수운, 산의 암굴에서 일어나는 구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나무 목)(살필 감)의 합자예요. 짐승 등을 가둬놓는 우리라는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가둬놓고 감시하는 장치가 우리란 의미로요. 난간은 우리란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난간 함.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檻獄(함옥, 감옥), 檻欄(함란, 난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흙 토)(심할 심)의 합자예요. 평지에서 돌출한 부위, 둔턱이란 의미예요견디다란 뜻으로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돌출되어 느끼는 불편을 감수한다는 의미로요견딜 감.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堪耐(감내), 勘當(감당)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배 주)(의 약자, 지저깨비(나무조각) )의 합자예요. 소형 배란 의미예요. 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나무 조각처럼 작은 배란 의미로요. 거룻배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救命艇(구명정), 艇子(정자, 뱃사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우리 나라에서 누정 문화의 기원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요. 본래 궁의 부속 건물로 출발했지만 이후 사축(私築, 개인 건축)으로 발달했다는 군요. 소양정은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요. 매우 유서깊은 정자예요(물론 위치와 명칭 및 건축 형태는 변화가 있었지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춘천문화원에서 이 유서 깊은 정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문 현판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보도가 있더군요(번역문도 곁들여 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곳을 찾는 분들이 경치 감상과 더불어 시문 감상도 꼭 했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여담 둘. 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 넓은 들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 나는 이 땅의 시인을 사랑합니다 / 외로우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꽃처럼 / 빛과 향기 조금도 거짓 없길래 / 나는 그들이 읊는 시를 사랑합니다(이하윤, 들국화). 30년전 그 나들이 장소에서 제가 읊고 싶었던 시예요. 그런데 왜 읊지 않았냐구요? 글쎄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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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modum40/221040472717 >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80년 후에는 내가 그이구나

 

한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를 함께보는 단구(短句)예요. 동시성의 통찰이라 평범한 듯 하면서도 비범해요. 지은이는 서산대사로 알려진 휴정(休靜, 1520-1604)이에요. 자신의 영정에 쓴 것으로, 85세에 입적했으니, 생애 말년에 쓴 것이에요.

 

휴정은 승병 지도자 - 임진왜란시 - 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선승이었다는 점에 있어요. 그가 지은『선가귀감(禪家龜鑑)』은 지금도 중요한 선 입문서로 취급되죠. 그가 선에 정통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한 사례라고 할 거예요. 휴정은 선승이긴 했지만 '교(敎)' 또한 중시했어요. 그는 선을 말 없음을 통해 말 없음에 이르는 길로 보았고, 교를 말 있음을 통해 말 없음에 이르는 길로 보았어요. 자신의 영정에서 동시성의 통찰을 보인 것 처럼 수행에서도 동시성을 추구한 것이죠. 이는 그가 남긴 시편에서도 확인돼요.

 

 

사진은 휴정의「독파능엄(讀罷楞嚴, 능엄경을 읽은 후)」이란 시예요(독파를 보통은 '讀破'로 표기하는데, 인터넷 자료에는 '讀罷'로 나오더군요. 인터넷 자료를 따랐어요).

 

 

風靜花猶落   풍정화유락     바람 고요해도 꽃 떨어지고

鳥鳴山更幽   조명산경유     새 울어도 산 고요해

天共白雲曉   천공백운효     하늘은 백운과 함께 밝아오고

水和明月流   수화명월류     물은 명월과 함께 흐르네 

 

* 사진의 번역과 약간 다르게 번역했어요.

 

 

『능엄경(楞嚴經)』은 불성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번뇌가 사라진 자리가 곧 불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번뇌 사르는 것을 주가르침으로 하는 경전이에요. 이를 바탕으로 시를 보면 내용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첫째 구에서, 바람이 고요하건만 꽃이 떨어진다고 했어요. 바람이 고요하지 않다면, 즉 바람이 몰아친다면 꽃이 떨어지는 것을 깊은 울림으로 받아 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바람부니 꽃이 떨어지는거야 당연하지!' 정도로 무심히 인식하겠지요. 그러나 꽃이 떨어질 상황이 아닌데, 즉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상태인데 꽃이 떨어진다면 깊은 울림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바람도 없는데 어떻게 꽃이 떨어지지?' 라며 유심히 인식하겠지요. 첫 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존재의 가치는 타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인식된다'는 점이에요. 둘째 구는 첫 구의 언급을, 소재를 바꾸어, 반복한 거예요.

 

셋째 구는 첫째 구와 둘째 구의 인식관으로 세상을 통찰한 모습이에요. 하늘과 백운은 함께 하기 불편한 존재예요. 하늘은 빛을 발산하려 하고 백운은 빛을 차단하려 하기 때문이죠. 이런 모순된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공간이 바로 세상이에요. 재미있는건(?)  이런 모순된 존재가 서로에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유미의하다는 점이에요. 하늘의 빛은 백운이 가리려 하기에 더 가치가 있고, 백운의 가림은 하늘이 빛이 드러나려 하기에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세상은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 모순은 공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을 지향한다는 것이 휴정이 인식한 세계관이에요. 앞서 언급한 동시성의 통찰과 같은 맥락이지요. 넷째 구는 셋째 구의 내용을, 소재만 바꾸어, 반복한 거예요.

 

위 시는 휴정이 『능엄경(楞嚴經)』을 읽고 난 뒤 지은 시예요.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을 주내용으로 하는 능엄경을 읽고 위와 같은 인식과 통찰의 모습을 보였다면, 그가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 상관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번뇌는 불성의 깨우침으로 가는 길이며, 불성의 깨우침은 번뇌로 부터 시작한다. 번뇌와 불성의 깨우침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이런 인식을 했을 것으로 보여요.

 

낯선 한자를 두어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靜은 청(푸를 청)과 爭(다툴 쟁)의 합자예요. 분명하게 살펴본다는 의미예요. 선명한 색깔을 의미하는 靑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爭은 음을 담당하면서(쟁→정)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분명하게 살펴보려면 요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요. 靜은 보통 '고요하다'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는 靑보다 爭의 의미를 강조하여 사용한 거예요. 고요할 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肅(정숙), 寂寞(적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幽는 山(뫼 산)과 幺(작을 요) 두 개가 합쳐진 글자예요. 작은 것은 그 자체도 알아보기 힘든데, 깊은 산 중에 들어 있어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다는 의미예요. 정체가 모호하여 파악하기 힘들다는 의미의 '그윽하다'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그윽할 유.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靈(유령), 深山曲(심산유곡)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曉는 日(날 일)과 堯(높을 요)의 합자예요. 해가 뜨는 새벽이란 뜻이에요. 日로 뜻을 표현했어요. 堯는 음을 담당하면서(요→효)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새벽은 해가 높이 떠오르려는 시각이란 의미로요. 새벽 효. 曉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曉星(효성), 元曉(원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流는 氵(물 수)와 旒(깃발 류)의 줄임 글자가 합쳐진 거예요. 깃발이 펄럭이듯 물이 흘러간다는 의미지요. 旒의 줄임 글자는 음도 담당해요. 흐를 류. 流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流行(유행), 行雲流水(행운유수, 거리낌 없이 떠돎)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시에 보인 휴정의 동시성의 통찰이나 모순적인 존재의 공존 지향 세계관은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동양의 보편적인 가치관이라고 보는게 더 적확하죠. 오늘 날 세계에 기여할만 한 동양의 가치관을 꼽으라면 바로 이 동시성의 통찰과 모순적인 존재의 공존 지향 가치관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멀리까지 갈 것 없네요. 우리만 해도 당장 이런 가치관이 필요해 보이네요. 온갖 곳에 일방(一方) 생존의 상극(相克)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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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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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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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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