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kalsanja/220949136884>

 

필사는 정독중의 정독입니다.”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에 들렸을 때 보았던 문구예요. 이 문구가 있는 공간에는 조정래 씨의 작품 『태백산맥』을 필사한 독자들의 원고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더군요. 대단한 열성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혹자는 필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눈으로만 읽는 것 하고 직접 써가며 온 몸으로 읽는 것 하고는 확실히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내용은 눈으로 보고 지나치기보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이런 마음을 확대하여 전(全) 내용을 필사한다면 그 충족감은 배가(培加)될 것이 틀림없어요.

 

사진은 명필로 알려진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 )의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이에요. 인터넷을 뒤적이다 우연히 얻었어요. 명첩을 임서한 것이 아니고, 타인의 시를 자신의 필체로 작품화한 것이에요. 시 내용에 공감 가는 바 있어 쓴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어요. 무슨 내용의 시 일까요?

 

小苑花開爛熳通   소원화개란만통      작은 동산 꽃 피어 찬란하게 빛나는데

後門前檻思無窮   후문전함사무궁      후문 난간 앞에 서니 생각이 새록새록

宓妃細腰難勝露   복비세요난승로      복비처럼 가는 허리 이슬조차 무거울 듯

陳后身輕欲倚風   진후신경욕의풍      진후처럼 가벼운 몸 바람에 하늘거리네

紅壁寂寥崖蜜暗   홍벽적요애밀암      고요한 홍벽 석청 말라가고

碧簾迢遞霧巢空   벽렴초체무소공      아득한 숲속 안개 집(벌집을 비유) 비어있네

青陵粉蝶休離恨   청릉분접휴리한      푸른 언덕 흰 나비야 이별 아쉬워 마렴

定是相逢五月中   정시상봉오월중      오월 중엔 반드시 서로 만나리니

   

이 시는 이상은(李商隱, 813-858)이 벌[蜂]을 두고 지은 영물시예요두구(頭句)에서는 벌을 바라보는 장소를, 함구(頷)에서는 벌의 외형적 특징을, 경구(頸句)에서는 벌의 생태를, 미구(尾句)에서는 벌의 말[言]을 빌어 시인의 마음을 가탁했어요. 전고(典故)를 통해 벌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하고 벌의 생태를 화려한 색감의 시어를 동원해 그린 것이 특징이에요.

 

표면적으론 벌의 외형과 생태를 그렸지만 은연중 자신의 처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어요. 이슬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가는 허리나 바람에 하늘거리는 몸매는 시인의 어려운 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보여요. 말라가는 석청과 비어있는 벌집 역시 시인의 힘든 상황을 가탁한 것이라 볼 수 있고요.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단서는 두구에 있어요. 난만하게 피어있는 정원의 꽃들을 바라보며 기쁨을 느끼기보다 복잡한 생각으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힘든 처지 때문이지요. 하지만 시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요. 미구에서 벌의 입을 빌어 나비에게 하는 말은 바로 시인 자신에게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예요. 이상은은 정치적 좌절과 생활고를 많이 겪었던 사람이에요. 이 시를 그의 삶과 연계해 이해하는 것이 단순한 영물시로 이해하는 것 보다 심도 있는 이해일거라 생각해요.

 

이런 시를 작품화한 안평대군도 상기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거라고 추정해 볼 수 있어요. 화려한 왕실 생활이지만 정치적으로 곤경 형 수양대군과의 갈등 에 처한 자신의 처지가 오버랩되어 작품화한 것이 아닐까, 싶은 거죠. 당연히 그러한 곤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도 가탁 했을 테구요. 이 작품의 창작 연대는 언제인지 알려져 있지 않아요. 추정이 틀리지 않다면 이 작품의 창작 연대는 그의 생애 후반기가 될 거예요.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爛은 火(불 화)와 闌(가로막을 란)의 합자예요. 익히다란 뜻이에요. 火로 뜻을 표현했어요. 闌은 음을 담당해요. 익힐 란. 빛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빛날 란. 爛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燦爛(찬란), 爛熟(난숙)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檻은 木(나무 목)과 監(살필 감)의 합자예요. 짐승을 가둬놓은 우리란 뜻이에요. 木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監은 음을 담당하면서(감→함)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우리란 가둬놓고 살펴보기 위해 설치한 구조물이란 의미로요. 우리 함. 난간이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난간 함. 檻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檻車(함거, 죄인을 호송하는 수레), 檻欄(함란, 난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倚는 人(사람 인)과 奇(기이할 기)의 합자예요. 타인에게 의지한다는 뜻이에요. 人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奇는 음을 담당하면서(기→의)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의지는 보통 특별한 사람에게 한다는 의미로요. 의지할 의. 倚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倚子(의자), 寄倚(寄依와 동일, 의지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寥는 원래 廖로 표기했어요. 廖는 广(큰집 엄)과 膠(학교 교)의 약자가 합쳐진 거예요. 비어있다란 뜻이에요. 广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膠는 음을 담당하면서(교→료)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膠는 옛날의 대학 이름이었어요. 대학은 많은 학생을 수용해야 하기에 크게 비워둔다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하고 있어요. 비어있을 료. 쓸쓸하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寥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寂寥(적요), 寥落(요락, 쓸쓸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迢는 辶(걸을 착)과 召(부를 소)의 합자예요. 멀다란 뜻이에요.  辶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召는 음을 담당하면서(소→초)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소리쳐 불러야 할 정도로 거리가 멀다란 뜻으로요. 멀 소. 迢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迢遙(초요, 멀어 아득함), 迢(초초, 먼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遞는 辶(걸을 착)과 虒(뿔범 사)의 합자예요. 오고 간다란 뜻이에요. 辶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虒는 음을 담당하면서(사→체)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虒는 상상의 동물로 수륙(水陸)을 병행하는 동물이에요. 그같이 양쪽에서 오고간다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해주고 있어요. 갈마들 체. 遞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遞信(체신, 우편이나 전신, 전화 등의 일을 통틀어 이르는 말), 郵遞局(우체국)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蝶은 나비란 뜻이에요. 虫(벌레 충)으로 뜻을 나타냈고,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 음을 나타내는 글자는 얇은 나무 조각이란 뜻이에요. 이 뜻으로 본 뜻을 보충해주고 있어요. 그같이 얇은 날개를 가진 곤충이 나비란 뜻으로요. 나비 접. 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胡蝶夢(호접몽, 물아의 분별을 잊음), 蜂蝶(봉접, 벌과 나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蜂은 虫(벌레 충)과 夆(逢의 약자, 맞이할 봉)의 합자예요. 벌이란 뜻이에요. 虫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夆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이 벌의 특성이란 의미로요. 벌 봉. 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蜂蜜(봉밀, 벌꿀), 蜂起(봉기, 벌떼같이 일어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작품의 글씨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어 인용 자료로 대신해요. 국보 제238. 세로 26.5, 가로 16.5. 견본(絹本). 56자를 행서로 썼으며, 필치는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핍진(逼眞: 실물과 아주 비슷함)하면서도 웅혼(雄渾)하고 활달하여 개성이 잘 나타나 있다. 소품이면서도 작품에서 우러나는 기품은 안평대군 글씨의 특징을 대표하고 있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늠연함이 엿보이는 대작이다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수장되어 있는몽유도원도발(夢遊桃源圖跋)과 더불어 소원화개첩은 행서를 대표할 뿐 아니라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진본이다. 소원화개첩의 원시(原詩)는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봉시(蜂詩)로 원문과 대조하였을 때 여덟 곳이 다르다. 2001년 도난당해 현재는 소원화개첩의 진적을 볼 수 없다(인용 출처: 다음(Daum) 백과).

 

여담 둘. 위에서 소원화개첩은 원시와 여덟 곳이 다르다고 했는데, 원시는 다음과 같아요. 대구(對句)는 원시가 좋으나, 시의(詩意)는 개작시가 더 나은 듯 해요.

 

 

小苑華池爛熳通  소원화지난만통      작은 동산 화려한 연못 찬란하게 빛나는데

後門前檻思無窮  후문전함사무궁      후문 난간 앞에 서니 생각이 새록새록

宓妃腰細才勝露  복비요세재승로      복비같은 가는 허리 이슬 겨우 견딜 듯

趙後身輕欲倚風  조후신경욕의풍      조비연같은 가벼운 몸 바람에 하늘거리네

紅壁寂寥崖蜜盡  홍벽적요애밀진      고요한 홍벽 석청은 말라가고

碧簾迢遞霧巢空  벽렴초체무소공      아득한 숲속 안개 집(벌집을 비유) 비어있네

青陵粉蝶休離恨  청릉분접휴리한      푸른 언덕 흰 나비야 이별 아쉬워 마렴

長定相逢二月中  장정상봉이월중      이월 중엔 반드시 서로 만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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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은퇴자들이 독서를 취미로 꼽았다. 좀 더 다양한.”

 

언젠가 읽었던 신문 기사의 한 대목이에요. 은퇴자들의 취미가 너무 획일적이며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이 기사를 접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옛 사대부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전통 사회의 지식인이었던 사대부의 일은 출사(出仕)와 독서였죠. 둘은 상보 관계를 이뤘어요. 독서를 해야 출사할 수 있었고 출사 후 역량을 발휘하려면 독서가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이를 방증하죠. 이런 사대부들에게 독서의 가치를 폄훼하는 듯한 저 말은 틀림없이 공분을 샀을 거예요.

 

하지만 저 기사를 쓴 분이 비판한 독서는 전통 사회의 지식인들이 했던 독서와는 다른 독서일거예요. 생산적 독서이기 보다는 비생산적 독서를 염두에 두고 비판한 것이라 생각해요. 그저 소일거리 시간 때우기 식의 독서 말이지요. 공분하는 옛 사대부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말한다면 화를 풀 것 같아요. “그렇구먼. 그런 독서는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하지 않을까요?

 

독서와 짝을 이룬 것이 출사라고 했는데, 출사의 핵심은 문장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보국(輔國)할 수 있는 문장을 쓰는 거였지요. 여기 문장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 관련 심미적 글이 아니고 전고와 설득력이 겸비된 실용적인 글이에요. 이런 문장보국의 대표적인 글은 외교 관련 문서지요. 삼국사기』「열전강수(强首) 편을 보면 문무왕이 강수의 업적을 치하하며 전쟁에서 실제 전투를 했던 장수 못지않은 공이 있다고 평가하는 내용이 나와요. 그가 작성했던 외교 문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요. 강수의 경우가 문장보국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사진은 정사문웅진세명 만고처사강성청(精舍文雄振世名 萬古處士講聲淸)’이라고 읽어요. ‘정사(학문을 연마하는 곳, 여기서는 조정의 의미로 봐도 무방할 듯)의 문호 되어선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만고의 처사되니 강경 소리 청아하네라고 풀이해요. 앞은 출사하여 문명을 날리는 모습을, 뒤는 은둔 수양하며 독서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얼핏 보면 양자의 다른 면모를 부각시킨 것 같지만 실제는 사대부의 둘이면서 하나인 모습을 그렸어요. 출사해서는 문장보국으로 문명을 날리고, 퇴사해서는 수양 독서하는 사대부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은퇴한 분들이 옛 사대부의 전통을 되살려 생산적인 독서를 한다면 본인도 좋고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낯선 자를 좀 자세히 살펴볼까요?

 

(새 추)와 厷(팔뚝 굉)의 합자예요. 厷에는 힘이 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요. 암컷에 비해 힘이 센 수컷 새란 뜻이에요. 수컷 웅. 뛰어나다란 의미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뛰어날 웅.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雌雄(자웅), 雄壯(웅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변형, 손 수)(의 약자, 벼락 진)의 합자예요. 타인을 구해준다는 의미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타인을 구해주려면 벼락이 치듯 용기와 힘을 내야 가능하다는 의미로요. 구할 진. 떨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타인을 구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란 의미로요. 떨칠진.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不振(부진), 振興(진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뒤져올 치)(안석 궤)(범 호)의 합자예요. 두 다리를 오므리고 안석에 앉는다는 뜻이에요. 는 음을 담당해요(). 머무를 처. 곳이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앉는 이란 뜻으로요. 곳 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處理(처리), 處所(처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말씀 언)(얽을 구)의 합자예요. 화해시킨다는 의미예요. 화해시킬 때는 좋은 말이 우선이기에 으로 뜻을 삼았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튼튼하게 얽어놓은 목재처럼 둘 사이를 튼실하게 만드는 것이 화해시키는 것이란 의미로요. 화할 강. ()하다란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강할 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講解(강해), 講和(강화)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귀 이)磬(경쇠 경) 약자의 합자예요. 소리라는 뜻이에요. 소리는 귀에 가장 민감하게 접수되기에 로 뜻을 표현했어요. 磬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귀에 잘 포착되는 소리는 경쇠같이 크고 맑은 소리라는 의미로요. 소리 성.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音聲(음성), 聲量(성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사진은 한 식당에서 찍었는데 식당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에요(게다가 대구 내용도 약간 미흡하고 어휘나 문법도 어색해요). 타산지석으로 사용하라고 걸어놓은 것은 아닐 테고. 식당 주인 분께 미운 소리 하려다, 그만 뒀어요. 괜스레 주인 마음 상하게 할까 봐서요. 한자() 문맹이 많아지다 보니 이따금 장소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액자를 걸어놓는 경우를 봐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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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cik22&logNo=221091709390>

 

 

 

주량에 한계가 없으셨지만 난잡한 행동은 없으셨다(唯酒無量 不及亂).”

 

『논어』에 나온 공자의 음주 습관이에요.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여기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으로 남겼어요. 이 기록도 그 중의 하나지요. 이 기록을 남기며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말 특별한 분이다. 보통은 만취하면 말이든 행동이든 어느 하나는 실수하는 법인데….'

 

확실히 일반인들은 술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말이든 행동이든 실수를 하지요. 그런데 그 실수가 의도였든 그렇지 않든간에 상대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어요. 이른바 추태지요. 특히 이성에게 보이는 추태는 대부분 성추행 성폭행이지요. 최근 미투 운동으로 곤욕을 치르는 인사들의 추태도 대부분 주석에서 발단이 됐지요.

 

문제는 타인과 함께 술을 마시는데서 비롯된다는 거예요. 혼자서 마신다면 아무 문제 없겠죠. 당연히 타인에게 폐를 끼칠 일도 없구요.

 

사진은 어느 중국 음식점 인테리어예요. 이백(李白, 701-762)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에요. 그런데 순서도 맞지 않고 빠진 내용도 있어요. 순서를 바로 잡고 빠진 내용도 보충하여 읽어 볼까요?

 

 

花間一壺酒   화간일호주      꽃 사이 한 동이 술

獨酌無相親   독작무상친      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시네.

擧盃邀明月   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 맞이하고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그림자 대하여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월기불해음      달은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는 그저 나만 따를 뿐.

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 벗하나니

行樂須及春   행락수급춘      때는 봄 행락 철.

我歌月徘徊   아가월배회      내 노래하니 달은 배회하고

我舞影凌亂   아무영능란      내 춤추니 그림자는 어지러워.

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깨어선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한 뒤는 제각기.

永結無情遊   영결무정유      길이 무정한 사귐을 맺어

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달과 자신의 그림자를 벗하여 술 마시는 풍경을 그렸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혼자서 마시는 것이죠. 시인은 혼자 취하여 노래하며 춤추고 있어요. 추태를 부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추태는 추해 보이지 않아요. 외려 고아한 느낌마저 줘요. 게다가 타인에게 폐도 끼치지 않고요. 이런 추태라면 아무리 부려도 문제가 될 것 없지요. 이백의 음주 습관은 공자의 저 '유주무량 불급난'의 도가적 변용이라고 평가할 만 해요(실제 이백은 도가 사상에 심취했었어요).

 

음식점 주인과 인테리어 하는 분은 하고 많은 시중에 왜 하필 이백의 「월하독작」을 택했을까요? 혹 조용히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리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바램을 담은 것은 아닌지…. 꿈보다 해몽이 좋은가요?

 

 

낯선 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는 병의 모양을 그린 거예요. 윗부분은 뚜껑, 아랫부분은 몸체예요. 병 호.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投壺(투호), 壺中物(호중물, )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옛 글자, 술 주)(구기 작)의 합자예요. 상대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마시기를 권유한다는 뜻이에요. 따를 작.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對酌(대작), 添酌(첨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착)敫(부를 교)의 합자예요. 오라고 요청하다, 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상대를 불러 오게 한다는 의미로요. 맞이할 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招邀(초요, 불러서 맞이함), 邀擊(요격, 맞이하여 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착)(와 통용, 떨어질 타)의 합자예요. 따라가다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떨어지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것이듯, 따라가는 것도 뒷 사람이 앞 사람을 자연스럽게 좇아가는 것이란 의미로요. 따를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隨筆(수필), 隨行(수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날 일)(벨 참)의 합자예요. 잠시, 잠깐이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물건을 벨 때 단박에 베듯 그같이 짧은 시간이 잠시, 잠깐이란 의미로요. 잠시(깐) 잠.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暫時(잠시) 暫定(잠정)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척)(아닐 비) 합자예요. 천천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제대로 걷는 것[직진]이 아니란 의미로요. 노닐 배.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徘徊(배회)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척)(돌 회)의 합자예요. 제자리에서 맴도는 물처럼 한 곳에서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에요. 노닐 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彽徊(저회, 머뭇거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옛 글자, 술 주)(별 성)의 합자예요. 술이 깨다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밝고 분명한 빛을 발하는 별처럼 술이 깨면 그같이 정신이 맑고 분명하다는 의미로요. 술깰 성.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覺醒(각성), 醒寤(성오, 잠이 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착)(모양 모)의 합자예요. 왕래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멀다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멀 막.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邈然(막연, 근심하는 모양 혹은 아득한 모양), 邈志(막지, 원대한 뜻)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문인들의 주사는 관대하게 보는 것이 그간의 우리 정서였죠. 외려 주사를 부려야 문인답다는 생각까지 했지요. 하지만 미투 운동 후로는 이런 정서도 많이 변한 것 같아요. ‘괜찮다보다는 추하다고 보는 경향으로. 고은 시인의 거대한 문학적 성과가 성추문 폭로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죠. 현대 문학사에서 고은 시인을 뺀다면 과연 남는게 무엇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도 말이지요.

 

 

여담 둘. 한 때 이백의 「월하독작」을 흉내 내느라 달밤에 산 정상에 올라가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어요. 그러나 말 그대로 흉내만 냈을 뿐 이백의 시에서 느껴지는 고아한 감흥까지는 이르지 못했어요. 월하독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만 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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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 그러시구나 …."

 

아내의 병실을 찾아 온 로봇 수술 코디네이터. 로봇 수술을 택해서 고맙다며 수술 경과는 어떤지 어떻게 로봇 수술을 택하게 됐는지 등을 물었어요. 깔끔한 마스크에 단정한 옷차림의 코디네이터는 대화의 법칙 - 공감 표현과 긍정 리액션 - 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어요. 대화는 순탄하게 진행됐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어요. '얼른 마무리를 하고 가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자꾸 피어 오르더군요.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인간관계 또한 복잡해져 사람을 대하는 여러 방법들이 횡행하고 있어요. 대화법만 해도 여러가지가 있지요. 그런데 그런 방법들 바탕에 진심이 깔려있지 않으면 제 아무리 좋은 방법도 무의미하지 않나 싶어요. 상대가 신뢰하지 않으니까요.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지 위선으로 대하는지는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지요. 로봇 수술 코디네이터를 불편하게 여긴 건 그의 말에서 진솔함을 느끼기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건조한 사무적 친절만을 느꼈던 거지요. 이런 친절 보다는 차라리 솔직함이 묻어나는 불친절을 받는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해봤어요.

 

사진은 진수무향(眞水無香)이라고 읽어요. 참물은 향기가 없다, 란 뜻이에요. 가식없는 소박함이야말로 참된 것이며 수식과 번화함은 거짓된 것이다, 란 의미지요. 소나무 전지와 소독을 해줬던 정원관리사 분의 명함 뒷 면에 있던 글귀예요. 명함에 새기는 글귀는 그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하지요. 이 정원관리사 분은 거의 진수무향에 가까운 분이에요. 투박한 말과 행동은 당연지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신뢰가 가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지와 소독비가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 안했어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어제 이 분이 화분을 두 개 보내 왔어요. 대금이 좀 비싸긴 했나봐요. 미안해서 보낸 것으로 생각되더군요. 이 역시 그다운 행동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眞과 香 두 자만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眞은 匕(化의 변형, 화할 화)와 目(눈 목)과 ㄴ(隱의 옛 글자, 숨을 은)과 八(기초의 의미로 쓴 글자)의 합자예요. 눈에 보이는 기본적인 모습을 변화시켜 하늘로 숨어버린 사람이란 의미예요. 신선이란 의미예요. 신선을 진인(眞人)이라고도 하지요, 주로 '참되다'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육신의 거짓된 모습을 벗어 버려야 참된 사람[신선, 진인]이 된다는 의미로요. 참 진. 眞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眞珠(진주), 眞善美(진선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香은 禾(黍의 약자, 기장 서)와 曰(甘의 약자, 달 감)의 합자예요. 향기롭다란 의미예요. 오곡중 가장 향기가 좋은 禾로 뜻을 표현했고 甘으로 뜻을 보충했어요. 향기로운 것은 좋다는 의미로요(甘에는 좋다란 의미가 내포돼 있어요). 향기 향. 香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香水(향수), 芳香(방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진수무향을 대하니 문득 조재도 시인의 '아름다운 사람'이란 시가 생각 나더군요. 진솔한 사람 덕에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는 내용인데, 서로 잘 어울려요. 같이 한 번 읽어 보실까요?

 

 

공기같은 사람이 있다. / 편안히 숨쉴 땐 알지 못하다가 / 숨막혀 질식할 때 절실한 사람이 있다. / 나무그늘 같은 사람이 있다. / 그 그늘  아래 쉬고 있을 땐 모르다가 / 그가 떠난 후 / 그늘의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 이런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 매일 같이 만나고 부딪는 사람이지만 / 위안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 아름다운 사람은 몇 안된다. / 세상은 이들에 의해 맑아진다. / 메마른 민둥산이 / 돌틈에 흐르는 물에 의해 윤택해지듯 / 잿빛 수평선이 / 띠처럼 걸린 노을에 아름다워지듯 / 이들이 세상을 사랑하기에 / 사람들은 세상을 덜 무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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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통하라! 온통(溫通) 겨울 여행!"

"히든 제품과 맛! 온통(溫通) 희망해!"

"유스데이 가족 체험 활동 온동(溫通) FAM"

 

인터넷에서 '온통(溫通)'이란 단어로 검색해 발견한 문구들이에요. '있는대로 전부'의 의미를 갖는 '온통'과 '따뜻하게 통한다' 로 풀이할 수 있는'溫通(온통)'을 결합시켜 이중 의미를 표현하고 있어요. 사진의 '온통(溫通)'도 마찬가지예요. 음식 메뉴가 전부 고기 구이란 의미도 되고, 따뜻하게 정이 통하는 고기집이란 의미도 돼요. 재미난 표현이에요.

 

그런데 이 간판을 보면서 문득 정조(正祖, 1752-1800) 임금이 떠오르더군요. 그가 이 간판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싶었어요. 정조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개혁 군주로 알려져 있죠. 개혁 군주인만큼 제반 문물을 새롭게 고쳤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의외의 개혁도 있어요. 문체반정(文體反正)이 그것이에요.

 

문체반정은 당시 유행하던 패사소품(稗史小品)류의 문체를 순정(醇正)한 고문체로 되돌리려 한 정책이에요. 이유는 패사소품류의 문체가 부박(浮薄)한 풍속을 조장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에요. 정조는 성리학적 사고, 흔히 말하는 규범적이고 격식에 맞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 임금이었어요. 이런 경향을 갖고 있었던만큼 문체도 재도(載道) 문학관에 입각한 장중한 문체를 선호했지요. 이런 그의 기준에 당시 유행하던 패사소품류의 문체는 다분히 경박하고 산만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이는 시대의 기풍을 흐리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여겼고요. 성군(聖君)을 꿈꿨던 그에겐 당연히 바로잡아야할 개혁 과제였지요.

 

정조 임금의 문체반정을 보면, 개혁이란 그 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돼요. 새롭게 고침이 아니라 과거로의 회귀도 개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요. (이것은 개악이라고 해야 더 적당한 표현일까요?)

 

당시 유행하던 패사소품류의 문체는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한 문체였어요. 중국에서 유입된 이 문체는 본디 인간 욕망을 긍정한 양명학의 강한 영향을 받은 문체예요. 해학적이고 우언적이며 구어나 비속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한 점이나 생활에서 주 소재를 찾고 단문(短文)을 즐긴 것은 그런 영향 때문이지요. 비록 조선에서 양명학이 유행한 적은 없지만 시대의 조류상 조선에서도 인간 욕망을 긍정하는 기풍이 형성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예민한 촉수를 가진 문인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변화를 담아낼 수 있는 패사소품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구요. 정조 임금의 문체반정은 이를 막으려 했던 것이죠.

 

자, 이런 정조 임금이 저 '온통(溫通)'이란 표기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한글로 그냥 '온통'이라고 표기하던가 아니면 한자로 '溫通'이라고만 표기할 것이지 왜 음이 같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을 함께 표기했냐고 따지지 않았을까요?

 

사진의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溫은 氵(水의 변형, 물 수)와 昷(어질 온)의 합자예요. 본래 물이름이에요. 물이름 온. 후에 따뜻하다란 의미가 추가되었어요. 동음을 빌미로 차용된 것이지요. 따뜻할 온. 溫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溫突(온돌), 溫水(온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通은 辶(걸을 착)과 甬(湧의 약자, 샘솟을 용)의 합자예요. 솟아오르듯이 거침없이 간다란 의미예요. 통할 통. 通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疏通(소통), 通過(통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사진의 표기를 보면서, 비록 유희적인 표현으로 한자를 사용했지만, 우리 의식 속에는 여전히 한자에 대한 관심과 존중 의식이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굳이 저런 표기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엔 한자 문맹이 너무 많아요. 溫과 通의 뜻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요. 한자 문맹은 과도한 한글 전용 주장과 한자 교육 경시가 빚은 기형아라고 생각해요. 뒤늦게라도 바로 잡아야 더 이상 기형아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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