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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살아보기 - 가장 프랑스다운 동네 파리 16구, 본격 적응기
제인 페이크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일상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되 곧 돌아와야하는 여행자는 어디서 무엇을 보던 간에 놀라고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지만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일구어나가야 할 사람은 그보다는 덜 감정적이게 마련이다. 호주의 농장에서 자라 간호사로 살던 여인이 다국적 회사에 근무하는 남편의 새로운 부임지인 파리로 왔다. '프랑스 문화에 매료되어 있고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제인 페이크가 남편과 아이들 둘과 함께 파리에 적응하는 이야기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 만만하지도 않았고, 향기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물론 시작이 그랬다는 이야기다.

 

 

 

엄청난 양의 서류 장벽을 넘어 이주 허가는 받았지만 취업허가는 받지 못했기에 파리에서 간호사로 일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음식과 여행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좇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그녀가 하는 말,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게 마련이다' .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열린 듯한 문이 닫힌 걸 확인하면 다른 문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한 여인이 6년 동안 파리에서 산 기록이다.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고, 가구를 들이는 일 -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아이가 다닐 학교를 정하는 일, 호주에서와는 전혀 다른 교육방식에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들을 다독이는 일은 어렵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투명하되 높고 단단해서 매일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지지만 '실크처럼 부드러우면서 용암처럼 진하고 뜨거운 쇼콜라가 은주전자에서 예쁜 컵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기쁨에 사로잡혀' 새로운 하루에 다시 도전할 용기를 얻곤 한다. 시장에 가고 요리를 하면서 프랑스어를 익히고, 은행과 우체국에서 프랑스의 관료주의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던 그녀가 결국 호주의 미식잡지 '오스트레일리안 구어메이 트레블러'에 정기적으로 글을 싣는 작가가 되자 그동안 열리지 않던 그 많은 문들이 마법처럼 부드럽게 열린다. 그들은 파리에서 6년을 살았다. 호주로 돌아가서 다시 파리를 찾은 건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였다. 이제 열여섯살이 된 딸과 함께 다시 파리를 찾은 그녀가 하는 말, 파리는 그동안 별로 변한 것이 없는 듯 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아름다워서 꿈을 꾸기에 부족함이 없고, 여행자가 아니라 파리지엥처럼 인사하고 쇼핑하고 먹고 마시며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필요한 것들에 관한 조언이 빛난다. 책 중간중간에 본문에 등장하는 맛집, 서점이나 빵집, 시장,  박물관, 공원, 우체국 등 파리의 구석구석에 관한 정보가 알차보인다.

 

 


 

어쩌면 파리에는 영영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이 책의 저자처럼 보통의 여행자들은 꿈을 꿀 수 없을만큼 파리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파리를 즐기기 위해서는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기간도 넉넉해야 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감당하기에 버거울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꿈 꾸는 것마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낯선 곳에서 생활자로 살아보는 것을 꿈꾸고, 닫힌 문 앞에서 의기소침한 이들에게 그리고 파리를 향한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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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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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서 거실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얼핏 엄마 뭐하냐고 묻는 소리, 남편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제 일어나야지 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의자에 걸쳐져 있던 마른 빨래 두어개를 접고 다시 누운 기억은 있지만 지금이 밤 두시라니 어이없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늦잠을 잘거고 하루가 짧아질지도 모르겠다. 날도 더운데 말이지.

그래도 뭐 괜찮을거다. 사는 게 뭐라고!


 

 

여기 암에 걸린 할머니가 있다.

의사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물으니 2년, 돈은 얼마나 드느냐 물으니 천만 엔이란다. 항암제는 주지 말고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달라는 주문을 의사에게 한 후 스스로 럭키하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다. 왜냐하면 프리랜서 작가라 연금이 없어서 아흔살까지 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그동안 악착같이 저금을 했는데 살 날이 이년밖에 안 남았으니 더 이상 돈을 벌 필요도 없고 아낄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대리점에 들어가서 잉글리시 그린의 재규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저거 주세요."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 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물건을 쓰고 싶어서 갖고 싶었던 접시를 주문한 후 예쁘고 세련된 잠옷을 잔뜩 사고, 보고 싶은 DVD도 착착 사들인다.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해서 읽고 난 후에 죽기 전에 읽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던 그녀, 사노 요코는 2010년에 죽었다.


 

어느날 갑자기 살 날이 2년 남았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잠시 생각해봤다.

저금은 하나도 없으니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재규어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몇 권 정도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책을 읽는 대신 시간이 없음을 탓하면서 옷장을 정리하고 안 신는 신발들을 내다 버리고 주방 선반을 닦아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내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인가. 겨우 그것 뿐일까. 이루지 못한 꿈이나 해 보지 못한 근사한 일들을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게 부질없다는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내일은 책상 정리라도 하고 어떻게 하면 나만의 저금을 할 수 있을지 궁리를 해보기로 한다. 그래서 정말 죽는 것 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거나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나도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갖고 싶은 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결국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책을 읽고 나서 죽는다는 것도 결코 무서운 것만은 아니며, 지금의 날들을 더욱 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할머니다. 무섭군요. 요코상!

 


죽음을 앞두고 혼자 사는 할머니의 책이지만 어둡고 우울하지 않다.

읽다 보면 살고 죽는게 참 화사한 일이구나 싶은 생각까지 하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몇번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에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한 번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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