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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벤트 ㅣ 높새바람 24
유은실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눈물을 흘리면서 웃을 수 있을까(너무 웃겨서 눈물 흘리는 거 빼고). 내 경험상으론 '그렇다'다.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랬다. 이 작가의 책 <만국기 소년>과 <멀쩡한 이유정>을 읽고 단편의 맛을 알았으며 시침 뚝 떼고 아이들의 생활을 재치있게 그리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던 터라 이번 책도 나오자마자 읽었다. 그리고 또 감탄했다. 동화에서 죽음을 다룬 책들은 많지만 대개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죽음을 겪고 난 후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장례식의 모습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솔직히 나도 문상을 갈 때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의 소재가 독특하면서도 너무 나아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읽다 보면 우리가 본모습을 숨긴 채 얼마나 가식적으로 살아가는가를 새삼 느낀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독특하다. 모두라고 하기엔 약간 억지가 있지만 여하튼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물론 작가가 그런 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겠지만. 이벤트를 준비하는 당사자인 영욱이 할아버지는 고집이 세고 상당히 가부장적이며 남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전형적인 우리 시대의 노인이다. 그러나 핸드폰을 잘 다루고 포토샵도 할 줄 알 정도로 현대적이다. 대개 이런 어른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라면 같은 며느리 입장에서 참 안됐다. 그러나 이야기는 영욱이 입장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오히려 며느리, 그러니까 영욱이 엄마가 좀 심한 듯 느껴진다. 어디 영욱이 엄마 뿐인가. 영욱이 아빠는 본인은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말도 살갑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영욱이에게 아버지로서 대접받고 싶어한다(솔직히 이 부분에서 엄청 찔렸다. 우리도 결코 잘하는 편이 아니기에). 영욱이 누나는 또 어떻고. 할아버지가 냄새 나고 지저분하다고 말도 잘 안하려 한다. 음, 이렇게 보니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이다.
그러나 장례식장 가는 게 무서워 6학년짜리 딸을 보내고 자신은 차에서 기다리는 김보람 아버지나, 자식이 그런 남편처럼 될까봐 아이들을 아예 어려서부터 장례식장에 데리고 다니는 김보람 엄마는 결코 평범하다고 볼 수 없다. 뽀샵한 영정사진을 보고 조문하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는 석원이 아버지, 또 할아버지와 이혼하고 일본 남자와 재혼해서 사는 할머니도 그렇다. 이렇게 적고 보니 그 외에는 평범해 보이는데 왜 모두 이상하게 느껴졌을까. 그건 아마도 인물 때문이 아니라 상황을 설정하고 이끌어가는 작가 때문일 게다.
아빠를 포함한 할아버지의 자식들을 끝까지 '다'들이라고 표현해서 그들 사이가 그다지 돈독하지 않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독자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실제로는 상당히 밀접한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친구 보람이도 꼭 성까지 붙여서 이야기한다. 석원이는 그냥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여자 아이는 성까지 붙인다. 실제로 아이들은 이런 식(동성은 이름만, 이성은 성까지)으로 말하는데 작가는 그걸 정확히 간파했다. 하긴 이런 식의 화법이 이 작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형식이기도 하고.
영욱이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할아버지에게 나쁜 영향을 받았을 거라 의심하며 추궁하지만 작은고모부의 도움으로 결국 할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되는 장면도 어찌나 재미있던지. 엄마와 작은고모, 작은고모부가 짧게 대화하지만 그 사이에는 설명하지 못할, 아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유머와 위트가 있다. 또 나중에 부의금을 정산하며 큰고모부와 작은고모부가 하는 얘기는 거의 뒤집어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가면 속에 가린 인간의 본모습을 슬쩍 보여준다.
장례식장에 가면 상주와 슬픈 얼굴로 인사 나누고 건너가 바로 밥을 먹으며 가족들과 때로는 웃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고인을 생각하며 울먹이다가 금방 어떤 이야기로 웃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누군가 조문오면 다시 가서 우는 모습. 어른인 나도 이런 것이 이상해 보였는데 어린 영욱이 눈에는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또, 가족들은 슬퍼서 밥도 못 먹을 것 같지만 사실은 수시로 먹으며 그래야 버틸 수 있다고 위로한다. 여기서 그러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또 자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힘겨워하는 아이 모습도 고스란히 나온다. 지금은 손자에게 한없이 자상한 할아버지가 예전에는 괴팍한 아버지였다는 충격적인 소리를 듣고 영욱이는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 접는다. 나중에는 할아버지처럼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겠지. 그러면서 영욱이는 그런 시기가 조금 앞당겨지길 바란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건 작가가 경험한 게 아닐까하고. 역시 그랬다. 두 해에 할머니 두 분을 잃었단다. 그럼 그렇지. 이 책은 두 할머니가 주신 선물이란다. 특히 외할머니가 준비했던 '장엄하고 통쾌한 수의'에서 모티브를 얻었나 보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길래. 혹시 영욱이 할아버지처럼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