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이야기 - 시와 그림으로 보는 백 년의 역사 Dear 그림책
존 패트릭 루이스 글, 백계문 옮김,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 사계절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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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든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 자체는 명백하다. 모 시트콤에서 잠깐 나왔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 작가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예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 전부터 인노첸티의 그림에 반해서 그의 책을 모으고 있었다.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좁은 땅덩어리에서 많은 사람이 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집은 주거의 개념보다 재태크의 개념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런 개념에서 벗어나 순수한 기능인 주거에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해도 예전의 집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평생을 살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개념이 강하다. 아무래도 아파트의 수명이 길지 않다 보니 그러한 생각이 더 만연해 있는 듯하다. 또 한 가지는 점점 넓혀 가야 하는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한 집에서 애착을 가지고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의 집에 대한 이런 개념 때문에 이 책을 보며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아주 오래 전에 지어졌지만 한동안 사람이 살고 있지 않던 집이 우연히 산으로 모험을 나온 아이들에게 발견되어 다시 '집'의 기능을 하게 된 집 이야기다. 그와 동시에 한 세기에 걸쳐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보여준다. 동일한 장소를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질곡 많은 현대사를 이야기한다. 묵묵하게 서 있는 집 한 채를 통해 20세기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집이 백 년'밖에' 안되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656년에 지어져서 20세기를 보내고 있다니 족히 몇 백 년은 되었다.  

그러나 지난 시기와 이 책의 마지막인 1999년의 모습을 보면 뭔가 다르다. 지금까지는 집의 외형은 그대로 둔 채 필요에 의해 조금씩 넓히거나 보수를 하는 수준이었다면 마지막은 완전히 리모델링을 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던 모습이 아니라 자연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불과 30 여년 사이에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이 이처럼 변한 것일까. 기본 골격은 그대로지만 완전히 변해 버린 마지막 집을 보며 쓸쓸함을 느낀 이유다.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집을 통해, 사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사실 처음에는 멋진 그림에 빠져 이처럼 조용하고 아늑한 산에서 살면 얼마나 마음이 평화로울까에 집중하며 읽었다. 식구가 늘어나자 조금씩 집을 증축하는 모습을 보며 예전 우리 부모들이 시골에 살면서 집을 수리하던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게 된다. 정지된 그림을 통해 그들의 역동적인 삶을 만나는 신기한 경험도 한다. 그냥 산속의 집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특정 번지로 표시되는 것을 보며 이때부터 관리 시스템이 변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처럼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수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계속 똑같은 집을 보여주지만 같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그게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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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7번째 일요일 소담 팝스 1
자비네 루드비히 지음, 함미라 옮김 / 소담주니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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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A를 선택했을 때의 삶과 B를 선택했을 때의 삶을 보여주던 게 생각난다. 살아가면서 중대한 결정을 해야하지만 어느 것으로 해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두 가지를 다 살아보고 결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요즘 어느 개그 프로에서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보며 아이디어가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하다. 두 가지 삶을 살아볼 때는 다른 삶에 대해 전혀 개입을 못하는 반면 시간을 되돌리는 이야기에서는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 책도 시간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가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대개는 일이 크게 잘못되었거나 큰 실수를 했을 때다. 둘째는 일요일 저녁만 되면 무척 아쉬워하며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단다.편안한 일요일이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긴 나도 예전에 그랬다. 여기서 내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과 둘째가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을 통제하고 싶다는 생각은 같다. 시간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적어도 아직까지는) 사실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에 은근히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진짜로 시간이 되풀이되고 있다면 어떨까. 프레디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일요일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방학 마지막날이라면 누구라도 다음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프레디는 우연히 계속 일요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고, 그것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혼자만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도 함께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냥 휴가와 같은 날을 보내면 되는데 프레디 혼자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기껏 청소하고 성적표에 사인 받아놓고 보고 싶지 않은 편지를 버려도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있다니,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겠다. 

그러나 반복되는 프레디의 일요일은 똑같은 날이 하나도 없다. 전날 실수한 부분을 만회하거나 미리 사건을 예방하려고 하지만 결국 다른 사건을 만들고 만다. 물론 그 다음 날이 되면 결론적으로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똑같은 시간의 띠를 혼자만 맴돌고 있다. 왜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프레디 혼자만 그걸 느끼는 것일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시간의 뫼비우스 띠를 끊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것은 당연히 주인공인 프레디였다. 그러니까 작가가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장치였던 셈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반복되는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과연 프레디는 똑같지만 새로운 날을 어떻게 맞이할까에만 신경썼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프레디뿐만 아니라 가족이 안고 있던 문제가 드러나고 조금씩 해결되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언니와 사사건건 부딪치자 언니를 미워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 일요일이 반복될수록 언니와의 추억을 생각해낸다. 그러면서 언니가 일방적으로 화나게 만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 아빠와의 관계도 그렇고 요양병원에 있는 할머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시간만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프레디의 성장이 들어 있다. 그리고 가족의 화해와 타인에 대한 이해가 들어있다. 단순한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고 이처럼 주인공의 변화가 들어있는 진정한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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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식 2016-12-20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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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 왕 커드
앨런 길리랜드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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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때보다 특히 이럴 때 영어를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동화책 이야기하는데 웬 영어 타령이냐고? 만약 이 책을 원서로 읽으면 번역된 것보다 훨씬 맛이 살지 않을까 해서 하는 얘기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분명 이게 언어유희 같긴 한데 옮긴이의 설명으로는 아주 세세한 느낌까지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원서로 읽으면 어떨까를 내내 생각했다. 또 하나. 이 책을 읽다가 그동안 대충 읽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시 읽었다. 둘이 뭔가 비슷한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이 책은 어른의 기준으로 보면 객관적으로 설명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아니, 하나 있긴 하다. 엄마와 쌍둥이 형제에 관한 이야기. 그 외에는 모두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은근히 매력있다. 내용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헨리와 헨리에타의 장난감 인형들이 브로치를 찾으러 가는 도중 만나는 갖가지 모험담이다. 헌데 넷이 함께 떠나지만 그 안에서 패가 나뉜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듯 그러한 갈등은 나오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를 보면 끈끈한 정이 있는 듯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쿨하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스위니와 오플래터리가 대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았을 때 기존의 대장과 한판 승부가 벌어지리라 예상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커드의 경우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한데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필그림은 정확히 중간에서 상황을 잘 조율하는데 그 능력이 대단하다. 

서로의 이야기가 약간씩 어긋나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은 만나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도대체 얘네들이 이러다 브로치를 찾으러 갈 수는 있을까 잔뜩 걱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듯이 우연히 간 길이 제대로 간 길이고, 수수께끼 내기에 휘말렸어도 어찌어찌 하다보니 정답을 맞췄단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게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진짜 수수께끼를 못 푼 것인지. 하지만 이러한 것을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작위적인 게 아니라 풍자와 위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속성을 은근히 꼬집는다. 갑옷을 벗은 미노보어는 아기에 불과하지만 갑옷을 입고 자신의 정체를 숨겼을 때는 무시무시한 미노보어로 돌변한다. 가면을 썼을 때와 벗었을 때의 상반된 모습은 가면 뒤에 숨어서 악한 짓을 하고자 하는 인간을 그린 듯하다. 그 밖에도 풍자와 위트가 많이 나온다. 오죽했으면 원서에는 뭐라고 써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고 싶었을까. 

벌루나퍼스는 또 어떻고. 분명 달이라고 했는데 이들 모험에 합류할 때 보면 절대 달이 아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풍선이다. 하긴 등장인물 소개에서 연못에 빠진 달 그림자가 열기구로 떠올랐다니 달은 아닌가 보다. 객관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냥 다 이해가 간다. 그런데 벌루나퍼스가 하는 이야기도 상당히 재치있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상당히 많은 의미가 숨겨 있곤 한다. 여기서는 올드 코비가 가장 못된 역인데 그렇다고 아주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다. 스위니와 오플래터리를 몰래 꾀는 장면에서는 교활하게 느껴지지만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원래 성격이 그래서인지 판타지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정신없는 이 책을 읽으니 처음에는 더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도 되지 않아 헷갈렸다. 그러나 읽다 보니 언어유희가 상당하고 재치가 있어서 은근한 매력이 느껴졌다.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는 이런 식의 풍자와 유머에 익숙하지 않고, 이 나라의 문화와 언어습관을 잘 모르기 때문에 풍자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가끔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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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이라던가 보수적이라고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물론 사전적 의미를 들이밀 수는 있겠지만 정형화된 틀을 싫어하는 관계로 그 보다는 내가 느끼는 대로 이야기하고 싶다. 역사를 보면 언제 어디서나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가치관이 대립하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일 수 없고, 또 그래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그토록 치열하게 대립하는 것일까. 뭐, 그건 내가 걱정하거나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그냥 넘어가야겠다.

가끔 생각한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일까. 성공을 위해서, 혹은 더 근사한 말로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고 싶어서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주류가 되고 싶어서가 아닐런지. 그렇다면 나는? 글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주류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 자신도 능력도 없거니와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그냥 마음 편하게(비록 속은 끓을지라도) 비주류로 살기로 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니 대개 비주류였던 사람들이다. 체 게바라, 노무현 그리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 또 그들의 공통점은 제 명대로 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죽은 원인은 제각기 다 다르지만. 소로는 젊은 나이였더라도 병으로 떠났지만 나머지 둘은 자살(노무현)과 타살(체 게바라)이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난 권위적인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크면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어렸을 때는 시골에서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꾸려가는 가정의 맏딸이라는 제약 때문이었는지 모범생으로 '생활'했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선생님한테 인정받는 그런 학생이었다. 집에서는 집안일 잘 도와주고 공부도 알아서 잘 하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알려주는 대로만 했으니 어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정된 공부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부모님이 모두 권위적이거나 억지로 내 삶을 조종하는 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신기하다. 만약 부모님이 권위적인 것을 앞세우는 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렇게 고분고분한 모범생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모르긴 해도 엄청난 반감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동생도 나와 비슷한 성향인데 의견 일치를 보는 부분이 바로 그거다. 권위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잘 자랐다는 것.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다른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업한다고 열심일 때 난 일부러 중소기업을 기웃거렸다. 대기업의 그 권위적인 분위기가 정말 싫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여하튼 그 정도로 난 권위적인 것을 싫어했고 여전히 싫어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유교의 가부장적인 문화로 어디서나 권위주의가 득실거린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엄연히 다르다. '아버지는 권위가 있다'는 말과 '아버지가 권위주의적이다'라는 말은 의미가 전혀 다르다. 권위는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하지만 권위주의는 그다지(전혀 필요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권위주의가 도처에 깔려있으니 내가 현실에 품는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러던 차에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아니, 무너뜨리려고 노력했다. 비록 권위까지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본인이 피해를 보았지만. 나는 그의 시도에 박수를 보냈고 그 한 가지로도 좋아할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줄곧 비주류 인생을 살다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 되면 약간은 주류 흉내라도 내고자 할 텐데 그는 안 그랬다. 오로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옳다고 생각하는 길만을 고집했다. 여기서 대통령으로서 그의 공과를 평가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그를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좋다. 신념을 지키고자 애썼고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그런 마음이 좋았다. 비주류로서 자신이 겪은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기에. 그러나 지금 그는 없다.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던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슬펐다. 

<체 게바라 평전>

 맨 처음 어떻게 체 게바라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워낙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은연중에 이름이 낯익었는지도 모르지. 그보다 먼저 차(茶)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언젠가 남편이 회사에서 누가 줬다며 티백으로 된 차를 가지고 왔다. '마테 차'란다. 향이 어찌나 진하던지 가뭄에 콩 나듯이 먹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바로 그 마테 차가 나오는 것이다. 어찌나 기쁘던지. 체 게바라가 천식 때문에 마테 차를 즐겨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괜히 반가웠다.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연결시킨다고 할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체를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의사였지만 여행 도중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외면할 수 없어 혁명의 길로 뛰어든 체. 그 정도는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다. 그렇게 혁명을 해서 정권을 잡는 사람들이 있지 않던가. 정권을 잡지는 않더라도 모종의 역할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많다. 물론 체 게바라도 처음에는 혁명 정부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일을 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란 권력에 한번 맛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든 게 대부분이다. 또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순순히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예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생각이 달랐을 것이라는 점은 안 봐도 뻔하다. 결국 체 게바라는 누릴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하고 그를 필요로 하는 민중에게 돌아갔다. 어찌 보면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그 길을 택하다니...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가 보다. 

체 게바라가 비주류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의사로 살았다면 주류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길을 버리고 험난한 혁명가의 길을 걸었으니 비주류라고 해도 되지 않을런지. 내가 체 게바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끝까지 걸었다는 점이다. 마치 노무현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잘 생긴 외모를 마케팅에 이용한다지.

<월든>

 내 고향은 아주 한적한 시골이다. 지역적으로는 용인이지만 강원도 오지 보다 더 심하다. 그 곳에 저수지가 두 곳 있는데 한 쪽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으슥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곳이 좋았다. 해도 일찍 지기 때문에 산책하기도 안성맞춤이었다. 

이 책 <월든>을 읽으며 그 저수지가 떠올랐다. 물론 월든 호수와 우리 동네 저수지는 크기부터 비교가 안 되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 저수지가 연상됐다. 오죽하면 그 곳에서 소로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뭐, 실제로 그렇게 살라면 자신은 없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자신도 없거니와 거기서 혼자 지낼 자신도 없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버거울 때 어딘가로(그 저수지가 가장 먼저 생각나긴 한다.)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소로도 분명 비주류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단다. 대학을 졸업했으면 근사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다닐 것이지 왜 직접 만든 초라한 옷을 입고 다니느냐며 외면받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숲에 가서 이야기를 해줄라치면 부모들이 아이를 못 나가게 했다지. 그러나 그가 살던 동네에는 훗날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이 살고 있었단다. 그녀는 소로우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았을 게다.

시민불복종이라고 이름 붙여진 연설을 하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한참 후에야 인정받았고 지금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거론한다. 소로는 체제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반대하지 않는다. 옳은 것은 지지하되 잘못된 것은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문득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을 짧고 굵게 살았던 비주류들. 왜 나는 그들에게 이토록 끌리는 것일까. 아마도 옳은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지만 그들처럼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경하는 것은 아닐런지. 또는 그들도 분명 비주류지만 그것을 핑계로 안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경심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난 뛰어난 인품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단지 비주류라는 이유 때문에 주류로부터 배척받는 사람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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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입니까 사계절 1318 문고 62
창신강 지음, 전수정 옮김 / 사계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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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안 좋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이성이 끼어들 틈도 없이 먼저 느껴지는 게 바로 이것들이다. 지금까지 중국 청소년 소설을 몇 권 읽었지만 딱히 감동적이라거나 부지불식간에 생각나는 그런 작품은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전반적인 청소년 소설이 우리보다 조금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겨우 몇 권 읽고 이런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그야말로 고정관념과 선입견이라는 건 알지만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이 책은 약간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물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었지만 아주 뛰어난 작품(재미와는 상관없이)이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아동 청소년 문학에서 개를 소재로 한 책이 많다. 또한 개가 사람과 생활하며 개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그런 책도 있다. 사람의 보살핌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겠다는 그런 식의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이 책도 그런 책의 일종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짐작했다시피-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할 때는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이다-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설정은 판타지 같은데 판타지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 묘한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속물적인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수구에서 사는 어느 개의 가족을 보면 개로 이야기될 뿐 하는 행동과 생활모습은 인간과 똑같다.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적인 아빠 개와 남편 눈치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사는 엄마 개는 인간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마 중국과 우리가 같은 문화권이라 그러한 불합리한 모습에 눈길이 갔고 또 그 상황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러한 가족의 모습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며 산다. 하지만 주인공과 그의 형은 가족의 품을 떠난다. 아버지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 나가고 싶어서 개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 세상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렇게 본성은 개에 가깝지만 외모가 사람인 주인공이 인간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와중에 인간의 치사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모습이라던가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면 믿음까지도 바로 거둬들이는 모습 등이 나타난다. 그래도 자신을 그냥 믿어줬던 누나를 만나지만 인간이 되기 위해 누나는 말을 포기했다. 헌데 이건 좀 그렇다. 작가가 인어공주에서 영감을 얻었나? 다른 개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심지어 지렁이도 별다른 댓가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누나만 그런 이유가 뭘까. 읽은 지가 좀 오래되어서 그런지 작가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작은 형을 마지막에 만나는 장면은 가슴 뭉클하다. 사실 후셩이 작은 형이 아닐까 계속 의심했던 참이다. 인간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니, 사실적이다. 인간들 속에 인간으로 변한 누군가가 함께 살아가지만 진짜 인간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이 시점에서는 내가 어렸을 때 푹 빠져보았던 '브이'라는 외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의 비열함을 풍자할 때는 괜히 내가 통쾌했다. 나도 인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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