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가 아닌 누런 종이에 글도 빽빽하지 않고 헐렁하며 그림도 경쾌하게 들어가 있다. 마치 <어린 왕자>를 펼쳤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사랑에 대한 산문시를 읽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한때 유행했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적어 놓은 긴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 어떤 느낌이든 잔잔한 여운을 느낀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발칸반도의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떨어진 하나의 별이 싸냐라는 갓난 아기 무릎에 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침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바냐라는 남자 아이도 태어났다. 둘은 운명처럼 태어나자마자 뭔가 통했는지 서로 행동을 함께 한다. 싸냐가 울면 바냐도 울고 싸냐가 웃으면 바냐도 웃는다. 하지만 둘은 바로 헤어진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세월은 흘러 어린이가 된 둘은 우연히 놀이터에서 만나 다시 예의 그 일체감을 느낀다. 같이 홍역을 앓고 같이 볼거리를 앓으며. 결국 둘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여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싸냐는 바냐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영원히 자신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조건을. 그러면서 바냐가 자신을 사랑하는 그날까지만 살 수 있다는 말도 함께. 사랑. 글쎄 사랑이라는 게 그처럼 무서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바냐는 약속을 했고 둘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식 장에서부터 바냐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다. 단지 속으로만 무심코 생각했던 것으로 인해 싸냐는 조금씩 작아진다. 그 후에도 바냐가 다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싸냐는 점점 작아져서 결국은 작은 인형보다 더 작아지고 만다. 왜 싸냐가 이상한 조건을 내걸었는지 알겠다. 하지만 바냐는 그래도 싸냐를 사랑하고 여전히 함께 있다. 그러나 바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바람에 싸냐는 너무 작아져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그제서야 어느 별 무리는 완전해 졌다지. 바냐는 싸냐를 찾아 땅바닥만을 쳐다보며 다니고... 청소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은 무엇일까. 나도 분명 그 시절을 지났지만 세월의 두께에 밀려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니 이런 사랑은 부담스럽고 위험한 것이라는 '교훈'만 남았지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이라면 충분히 가꾸어갈 만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꼭 이렇게 조건을 걸지 않더라도 어떤 사랑이든 사랑이란 최후까지 버려서는 안 될 가치이긴 하다. 꼭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읽는 이에 따라 '사랑'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지라도 사랑은 소중한 것이며 꼭 있어야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을까.
단순하게 표현된 코끼리와 화사한 주황과 노랑색으로 보아 유아들이 좋아할 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겉표지를 넘겨서 제목이 나오는 부분에 주황색 펜으로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어린 아이들이 흔히 그리는 그림처럼.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볼 때서야 그 그림이 무엇인지 알았다. 과감하게 생략된 배경과 삐뚤빼뚤하게 그린 테두리, 그리고 겉표지에서 짐작했던 화사한 색상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또한 등장하는 동물들도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원숭이는 도형으로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아이들처럼 동그라미와 선으로 대충 그린 듯하지만 척 봐도 원숭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익살스럽고 장난꾸러기인 원숭이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역시나 원숭이는 코끼리 몸에 낙서를 한다. 약간 간지럽긴 해도 낙서를 한 줄은 꿈에도 모르는 코끼리. 그런데 그 낙서가 기묘하고 재미있다. 물론 다른 동물들은 무서워하지만. 심지어는 사자까지도 코끼리를 보고는 힘이 쭉 빠질 정도로 두려워하니 말 다했지. 특히 뒤에서 본 모습은 무시무시함 그 자체다. 악어가 겁을 줘도 도대체 본 척도 안 하니... 아마 원숭이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코끼리는 모두들 도망가자 외로워서 속상하고 슬프다. 아마 자기 모습을 보았다면 왜 그런지 금방 알았을 텐데. 그런데 결자해지라고 했던가. 원숭이는 자기가 한 일을 말끔히 해결해준다. 코끼리는 너무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라지. 페이지를 넘길 때 간혹 두 장을 한꺼번에 넘긴 것은 아닌가해서 다시 앞으로 넘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만큼 이야기가 간략해서 한 장을 넘기는 동안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셈이다. 하나의 사물에 집중하는 유아들의 특성에 맞게 중요한 것만 부각시키는 그림을 보며 어린 아이들 또한 책에 집중할 것이다.
똑같은 책이라도 읽는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당연하다!) 심지어 읽는 계절에 따라서도 느끼는 바가 다르다. 청소년기에 읽었던 많은 고전들을 지금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이렇게 다시 읽어본다. 물론 일부러 찾아서 읽기는 힘든데 우연히 기회가 찾아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학창시절에 읽지는 못한 책이다. 그래도... 만약 읽었다면 그 때와 지금의 느낌이 어떻게 다를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를 배경으로 물질적인 것이 우선시 되는 시대풍조를 은근히 비꼬는 이 작품은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비빌 언덕도 없고 배경도 없어서 어떻게든 상류사회로 편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 개츠비, 처음엔 사랑을 믿는 듯하지만 결국 외적 조건을 따라가고 끝까지 그것에 안주해 버리는 속물 데이지, 특별한 인생의 목표도 없이 그저 현실을 즐기며 세월을 보내는 부유한 한량 톰 등 여기에는 제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이 없어 보인다. 아, 있긴 하다. 바로 화자인 닉. 잠시 여자들이 꿈꾸는, 첫사랑을 못 잊어 혼자 살며 사랑이 돌아오길 바라는 그런 남자인 개츠비가 아름다웠다. 청소년기나 한창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20대였다면 끝까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이 잘못을 뒤집어 쓰는 개츠비가 한없이 멋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런 사랑이 결코 진정한 사랑일까 의심하는 지금 나이에서도 잠시나마 그런 남자가 멋있었으니까. 혹시나 지나가다 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화로운 파티를 자주 여는 개츠비는 일편단심 데이지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끝까지 그녀를 위해 산다. 그러나 그가 톰 앞에서 자신의 사랑과 데이지의 사랑을 확신하는 모습을 보며 뭔가 잘못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게 과연 사랑일까. 집착은 아닐런지. 혼돈의 시대에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가치들이 있다는 명제는 언제나 유효한 것 같다. 1920년대를 바라보는 피츠제럴드도 그 어떤 가치를 이야기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상실했네, 다시 찾아야하네 하며 떠들고 있지 않던가. 마치 어른들이 신세대들을 보고 하는 말('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이란'이러는 것 말이다.)이 세대가 변해도 똑같듯이... 피츠제럴드는 닉의 입을 통해 다른 사람을 다 합쳐도 당신(개츠비)만 못 하다는 말로 개츠비를 칭찬한다. 적어도 개츠비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물질적인 것만 따지지는 않으니까. 뒷부분에 나와 있는 작품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시간이 언제나 흥미롭다.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또한 헤밍웨이를 발굴한 인물이기도 하단다. 그러나 둘은 성격도 문체도 너무나 달라서 서로 사이가 멀어졌단다. 어찌되었든 소설의 위대함이란 당시의 세태와 도덕, 그리고 시대를 잘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단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사랑받는 고전으로 남아 있는 것이고...
이 책의 뒷표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정의로운 말썽꾼 타이크가 끝까지 말썽 부린 이야기'라고. 대개 어린이책에서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결국 말을 '잘 듣게 되었다'고 결론짓게 마련이건만 이 책은 그런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다잡으며 읽었다. 뭐, 나도 아이들 편에 서 있는 작품을 좋아하니까. 처음부터 타이크의 말썽이 전개되지만 개념있는(?) 내가 보자면 결코 말썽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단지 대니를 안 좋은 상황에서 구해주려고 했을 뿐이다. 게다가 남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대니의 말을 타이크는 통역까지 해 주면서 감싸고 있지 않은가. 모든 일을 볼 수 있는 독자는 타이크가 결코 말썽쟁이가 아니며 못된 아이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사건의 한 면만 보는 선생님이나 교장(여기서는 대장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결과만 보기 때문에 타이크를 말썽쟁이로 못 박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대장 선생님도 타이크가 거짓말을 할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 준다는 점이다. 대니는 심각한 언어장애가 있고 지능도 떨어지지만 타이크는 그런 대니를 돌봐주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 보자면 대니는 분명 돌봐주고 이해해줘야 하는 아이지만 타이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환상의 콤비다. 대니가 선생님의 돈을 허락없이 가지고 나온 일이며 타이크가 친구 마틴을 때린 일, 그리고 역시나 타이크가 시험지를 몰래 빼낸 일 등 항상 함께 한다. 그러나 일의 이면을 보면 모두 대니를 위해서 한 행동이다. 상황판단을 잘 못하는 대니가 선생님의 돈을 본의 아니게 훔쳐 오자 원래 자리에 놓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실패한 것이고 대니가 시험에서 낙제할까봐 부정을 저지른 것이니까.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마지막의 말썽은 정말 못 말린다. 이건 순수하게 대니와 상관없이 타이크가 저지른 말썽이었다. 아마 그래서 끝까지 말썽부린 이야기라고 했나보다. 졸업하는 날까지 거대한 사고를 쳤으니까. 이 책은 타이크의 입장에서 쓰이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는 머천트 선생님의 후기로 끝을 맺는다. 어떤 책은 등장인물에 자신도 모르게 나를 대입시켜 읽는 데 반해 이 책은 끝까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다. 내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읽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마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만든 원인 중 하나는 그들만의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꽤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그래서 역자는 빠른 사건 전개라고 했지만 난 줄곧 겉도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읽는 내내 뒷표지에 나오는 '깜짝 놀랄 반전'이 무얼까 기대햇다. 몇 장 남지 않았는데도 반전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김 빠지려고 하는데 드디어 나왔다. 어떻게 하나의 사건도 아니고 단 한 마디로 이렇게 지금까지의 생각을 뒤집을 수가 있을까. 선생님의 말 한 마디로 지금까지 방관자로 타이크를 바라봤던 내가 갑자기 그 안에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그 부분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왜 제목이 이럴 수밖에 없었는지(아직도 타이크와 타일러의 차이는 모르겠다. 짐작만 할 뿐이다.)도 단박에 이해가 간다. 단 한 마디의 위력, 참 대단하다.
내가 첫째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건지 애교가 없다. 그래서일까. 딸 아이도 애교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그런데 이번 겨울방학 때 3주간의 캠프를 갔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하면서 딸이 엄청 울었다. 뭐, 말로는 나중에는 집에 오기 싫어서 울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얘가 엄마인 나를 그리워하긴 하는 건가 의심하곤 했는데 이번에 그 의문이 싹 풀린 셈이다. 이처럼 표현을 별로 하지 않는 우리 딸도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하는데 하물며 엄마가 돌아가신 아이들은 오죽할까. 사실 요즘은 건강에 약간의 의심만 생겨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아이들이다. 반대로 아직도 엄마가 살아계시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나이가 들어도 엄마란 존재는 의지가 되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더 하겠지. 내가 농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읽으면 선뜻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그들의 생활을 잘 모르고 그와 연관된 추억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사실 그래서 더 궁금햇고 약간은 걱정하며 읽은 것이 이 책이다. 그러나 그럴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비록 해녀들의 생활을 전혀 모르고 바닷가 냄새를 음미할 줄 모르지만 안에 들어있는 감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새엄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빈이가 할머니집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결국은 새엄마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밀려온다. 새엄마와의 갈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다빈이 마음속에 있는 그리움과 미움의 싸움이다. 기존의 가정문제를 다룬 동화들이 둘 사이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다면 이것은 한 아이의 내면을 조명한 성장동화인 셈이다. 물론 다빈이가 성장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역시나 새엄마였던 할머니였지만 말이다. 그럼으로써 다빈이는 이제 새로운 생활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읽으면서는 너무 밋밋하고 뻔한 결말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내용을 되새기니 참 잔잔한 맛이 느껴진다. 간혹 억지스러운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눈앞에 파도치는 바다가 펼쳐진 곳에서 자신을 가다듬는 다빈이를 만난 것 같아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