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키호테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8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정우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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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많이 인용되는 책이라 '사실 나 이 책 읽지는 않았다'라고 고백하기가 두려운 책이다. 교과서에 조금 나왔었으니 전혀 안 읽은 것은 아니라고 마음 속으로 우겨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책을 읽고 나니 교과서에서 본 아주 일부를 가지고 '내용을 안다'고 생각했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지한 행동인지 알겠다. 마치 큰 그림을 앞에 놓고 그 중 한 귀퉁이에 있는 사물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유럽의 문화에서 기사라는 것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저 한때의 유행이거나 직업 그 이상인 것 같다. 오죽하면 기사에 관해 다룬 동일 출판사의 <기사 수업>이라는 책도 있을까. 처음에 그 책을 접할 때는 뭔 시덥지 않은 것을 다루는 책도 있나 싶었는데 그들의 문화를 조금은 알고 나니 시덥지 않은 책이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는 전통과 역사에 관해 배우는 것의 일부가 아니었을까싶다.

돈 키호테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이 변했다고 한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그저 흥미거리를 제공해 주는 책으로 여겨졌고 18세기 합리주의자들은 돈 키호테를 이성이 결여된 바보로 보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이상주의자로 평가했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독교의 순수함과 선행을 보았다지.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몰락한 귀족의 대표였으며 실존주의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한 개인으로 보았다고 한다. 어쩌면 이렇게 온 시대를 관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해석을 낫게 했을까. 그들은 각각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해석을 한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엉뚱한 해석도 아니다. 그래서 항상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으로 느껴지는가보다.

망상에 사로잡혀 기이하고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그때를 사는 등장인물도)도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것만 받아들인다. 때로는 미쳤다고 내치다가도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여 자신에게 득이 될 것 같으면 요구를 들어주지 않던가. 아마도 작가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돈 키호테는 주위에 진정한 친구들을 두었다. 돈 키호테를 억지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최대한 인정해 주며 집으로 올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으니까. 어쩌면 노인네의 말도 안 되는 고집과 망령쯤으로 여겨질 수 있는 행동들임에도 돈 키호테를 순수한 이상주의자처럼 생각할 수 있도록 한 원인이 바로 주위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스페인의 현실을 비판하고 싶었을지라도(비록 읽으며 그것을 느낄지라도) 그런 내용보다는 돈 키호테와 산초가 벌이는, 시침 뚝 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웃기는 작가의 재치가 훨씬 크게 느껴진다. 직접 책을 읽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귀중한 경험이다. 왜 최고의 작가들이 그토록 이 작품을 사랑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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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 이슬람은 전쟁과 불관용의 종교인가 고정관념 Q 9
폴 발타 지음, 정혜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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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에 구독하던 주간지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읽을 때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고 왜 그런 문제가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기에 그저 안개 낀 숲속을 걸어가듯 답답한 느낌만 들뿐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비록 내용은 기억이 안 날지라도)그런 기사가 났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걸 보면 꽤나 인상에 남았었나 보다. 당시는 지금처럼 다방면의 책을 읽지 않고 그저 한쪽에만 빠져 있었기에 다른 나라의 문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니 그와 관련된 기사들이 많이 나오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 못하겠기에 약간의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활자화된 문자를 읽은 것일 뿐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막연히 얻은 결론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는 결코 단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며 명쾌한 해결법이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부터 살펴봐야겠다. 처음 유대인에 대해 접하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치에 의한 학살을 당해야했던 불우한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왜 그랬는지를 알기 이전에 그저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을 때 설움을 많이 받았듯 그들도 그랬겠구나라는 일종의 동병상련이랄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교육방법에 관심이 갔다. 아마도 그 시기는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어떻게하면 아이를 똑똑하고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으로 키울까 고민하던 시기와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과연 그들의 그런 육아방법이 우리가 무작정 따라할 정도로 올바른 것일까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는 유대인들이 주변 국가들에 행하는 일련의 행동을 보며 아무리 훌륭한 육아를 하더라도 남을 짓밟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취한다면 과연 그것이 올바른 교육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예전에 핍박을 받았다고 지금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이 얕은 내가 보기에 지금 그들(유대인들)의 행동은 그에 버금간다고 느꼈던 것이다. 거대 권력 미국을 등에 업고 내지는 그들의 뒤에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이 나치에게 그러한 학대를 당했는지는 몰랐다. 땅덩어리가 좁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난히 뒷전으로 밀려났던 지역이 있다. 특별히 어떤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선입견을 갖고 있다. 한편에선 조선시대 때 유배지로 선택될 정도로 소외되었고 그런 탓에 오히려 능력있고 유능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다가 그 지역 대통령이 당선된 후 그나마 여러 방면에서 발전이 되었다. 실제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격차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유대인들은 그렇게 이유없이 학대를 당했을까. 물론 독일이라는 나라는 유난히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해서 자신들의 혈통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단지 그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미 유럽의 많은 나라는 유대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은 그들의 모든 것이었고 정신적 토대였던 카톨릭을 이해한 뒤에야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 없는 선입견에 의거한 것이고 논리적 근거도 없는 것이라지만 이미 굳어진 '믿음'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었다. 단지 예수를 돈 몇 푼에 팔아넘긴 것이 유대인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 때문이란다. 예수도 유대인이었건만 그들에게 그러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수세기에 걸친 유대인에 대한 학대와 핍박에 대해 가해자가 사과하는 것에서 끝났다면 오늘날 이렇게 해법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유럽인들이 사과의 뜻에서 체결한 조약은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을 혼돈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과 아랍 지역, 그리고 나아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본의 아니게 말려들었다. 왜 그들은 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고 이제 다시 분쟁의 불씨를 제공하는가. 그러나 더욱 답답한 것은 그들만을 탓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미 벌어진 상황이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상황이기에 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지난한 삶에 동정이 일고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잘 되길 바란다. 그러나 반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또 그들의 처지가 충분히 이해되고 얼마나 기가 막힐지 공감이 간다. 그러나 현실은 단순히 이해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솔직한 내 생각은 유대인들이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았었더라도 지금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행동은 합리화될 수 없다고 본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에 만족하지 않고 점점 더 욕심을 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영토를 획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그들의 비양심적인 행동은 결코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흔히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종교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당시 그 종교 문제란 바로 카톨릭,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의 종교와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아랍인들의 종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종교가 우월하고 훨씬 인간적이며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여진 의견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별다른 걸름망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러나 점차 이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연 카톨릭은 언제나 합리적이었고 인간적이었을까. 종교가 그들을 지배할 때 벌어졌던 갖가지 악행들을 그들은 정작 잊었단 말인가. 지금의 이슬람이 서양인들이 겪었던 예전의 시행착오를 단지 한참 뒤인 '현재' 겪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이슬람에 대한 지나친 배려일까. 언제 어디에나 '전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현재의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전부 맞는 것도 아니고 전부 틀린 것도 아니다. 간혹 그들 중에는 그것을 자신의 권력에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악한 모습은 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려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이슬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도 아닐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들여다보자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영토의 문제이며 자원의 문제다. 다만 그것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치장을 했을 뿐이다. 

사실 나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서구인들이 씌워준 안경을 아직 완전히 벗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은 한다. 이 세 권의 책(<이슬람>,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읽으며 나 스스로도 많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일례로 팔레스타인인들은 교육열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어도 서로 교류하며 산다고 한다. 며칠 전에 북한에도 과외를 금지하는데도 암암리에 성행한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의아했던 적이 있다. 마치 그곳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해서도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그리고 가장 많은 (잘못된)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이러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그냥 바뀌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도저히 해법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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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그림책 보물창고 43
제임스 럼포드 글.그림, 황윤영 옮김 / 보물창고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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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책을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문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저 이름만 들어보았던 것 같은 이야기, 베오울프. 그 이야기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게다가 멋진 그림책으로... 베오울프는 고대영어로 쓰여진 영웅 서사시라고 한다. 고대 작품들을 보면 대개 영웅 서사시가 많다. 원래 구전되던 것을 어떤 수도사가 기록한 3128행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최대한 원전에 충실하며 읽기 쉽고 재미있게 고쳐 쓴 것이 바로 이 책이란다. 다양한 매체로 나왔지만 원전에 충실했다는 말에 일단 의미를 두고 싶다.

예이츠의 청년인 베오울프는 괴물 때문에 힘들어하는 덴마크의 왕을 돕기 위해 그 나라로 떠난다. 예전에 베오울프의 아버지가 도움을 받았었기에 이번에는 위기에 처한 덴마크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영웅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목숨을 걸고라도 약속을 지키는 모습과 한번 마음을 먹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끝까지 맞서는 모습. 이런 식으로 큰 줄거리는 괴물을 물리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온 베오울프가 왕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단순히 왕이 되고 나서 잘 살았다던가 좋은 나라를 만들었다면 그저 그런 옛이야기 정도로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늙은 나이지만 마지막까지 용기를 보여주고 숭고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진짜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거기에는 베오울프 말고 또 다른 영웅이 등장한다. 바로 마지막까지 베오울프와 함께 싸운 그의 동지 위글라프. 그래서 베오울프는 왕위를 위글라프에게 넘겨준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아마 그래서 베오울프는 끝까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용기와 꿈을 잃지 않았으며 권력에 눈멀지도 않았고 진짜 훌륭한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보는 혜안을 가졌던 것이다. 권력이란 단순히 자신이 누리며 안주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르는 자신의 책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천했을 때에야 비로소 참된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그런 인물이 과연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있을까. 그러기에 베오울프가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 게다. 거친 듯하면서도 섬세한 그림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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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품에 안고 - 우리들의 할머니 이야기 즐거운 동화 여행 10
표시정 지음, 강승원 그림 / 가문비(어린이가문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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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할머니는 그다지 살갑거나 애틋한 정이 생각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유일하게 계셨던 외할머니는 워낙 무뚝뚝하신 분이라 그런 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참 다행스럽게도 외할머니의 정을 듬뿍 받고 자란다. 대개 커갈수록 할머니 집에 가는 걸 내켜하지 않는다는데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두어 주만 안 가도 가자고 난리다. 물론 그 이유가 꼭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서는 아니라지만 딸 말에 의하면 우리집은 삭막한데 할머니집은 편안하단다. 며칠 전에는 또 할머니가 자기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충격적인 발언까지 한 적이 있다. 그 이면에는 할머니와 자기가 텔레비전 취향이 비슷한 원인이 있긴 하지만 내 엄마를 내 아이들이 좋아한다니 기분이 좋다.

오늘날의 할머니, 우리들의 할머니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자식을 애지중지 키웠지만 나몰라라 훌쩍 외국으로 떠나 버린 아들. 그 아들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정신까지 놓아버린 할머니 이야기는 어쩜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현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야기다. 또한 시골에서 살다가 자식을 따라 도시로 오지만 평생을 부지런하게 살던 습관 때문에 동동 거리며 작은 일거리라도 '만드는' 엄마와의 충돌, 그렇지만 결국 엄마의 사랑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딸을 보며 효도란 별 게 아닌데 하는 죄책감마저 든다. 

가족으로서의 할머니든 이웃의 할머니든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라서 그런지 하나같이 잔잔하며 푸근하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면서까지 무조건 웃어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고집을은 부리지는 않는다(이사 가는 날). 어쩌면 그래서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사 가는 날'에서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거울을 면경을 두고 온 사실을 알고 오던 길을 돌려서 갔더라면 글쎄, 현실과 동떨어진, 이중적인 아들 며느리의 모습에 '이건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혹 내가 그런 자식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았다. 자주 간다는 핑계로 전화도 안 하는 무심한 딸... 그런데 나머지 이야기는 전부 '우리들의 할머니 이야기'라는 부제에 맞게 할머니가 등장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다루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가의 말에서는 할머니가 아닌 엄마를 주제로 잡았으니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표지의 부제와는 안 어울린다. 이야기 자체는 감동적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이야기들과 어우러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생각하는 내 사고의 경직성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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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학교에서 생긴 일 작은도서관 30
조영희 외 5인 지음, 신형건 엮음, 임수진 그림 / 푸른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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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던가 '올해의 작가상' 시상식 겸 간담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때 가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수상작들을 모아 펴낸 동화집 <수선된 아이>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그 작가들이 '학교에서 생긴 일들'을 주제로 다시 뭉쳤단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고...

전에는 미처 몰랐다. 단편의 맛을. 그러나 단편이 얼마나 중요하고 작가가 얼마나 고심해서 써낸 작품인지를 알고 난 후(이것도 실은 그때 어느 작가 겸 비평가가 했던 말인데 '문학'이라는 것을 잘몰랐던 내겐 큰 충격이었다.) 단편집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6학년이 된 딸에게 단편에 대한 위의 사실을 이야기해 줬더니 자기는 단편이 싫단다. 그 이유는 재미있을만하면 끝나기 때문이라고. 아마도 그만큼 재미있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싶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무척이나 가고 싶어하는 곳, 그러나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떠날 날만은 기다리는 곳이 학교가 아닐까. 하지만 친구가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청소년기가 되니 학교가 재미있고 가고 싶단다.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고 싶은 곳이든 가기 싫은 곳이든 무조건 가야만 하고 적응해야 하는 학교에서 아이들은 무슨 경험을 할까. 부모가 알고 있는 아이들의 학교 생활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그러기에 보통의 아이들의 모습을 엿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작가들은 어떻게 엿보았을까.

한자 시험을 보는데 책받침이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근데 지금 아이들도 책받침을 쓰던가?) 얄미운 옆짝꿍의 답을 몽땅 가져와 달라고 해서 코를 납작하게 해주지만 시키지 않은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다는 이야기부터 올백을 맞기 위해 시험지를 빼낼 계획을 하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 동자 스님 제자와 선생님의 인간애가 느껴지는 이야기 등 여섯 개의 단편들이 모두 재미있으며 독특한 배경과 전혀 다른 맛을 보여준다. 

흔히 학교를 주제로 한 이야기라면 왕따가 나오고 공부 잘 하지만 얄미운 아이가 나와서 결국은 잘 지내게 된다는 뻔한 이야기가 나오리라고 기대하면 오산이다. 여기서는 그 어느 것도 어른의 입김을 느낄 수가 없다. 그저 아이들은 아이들만큼 생각하고 행동하며 어른은 어른대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험지를 빼내겠다는 당돌한 계획을 세우고 성공했어도(빼내는 데까지만) 그것을 가지고 문제삼지 않는다. 요즘은 점점 더 동화들이 아이들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전개해 나가는 것을 느낀다. 여기 있는 작품들도 대부분, 아니 다 그렇다. 그래서 좋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도 공감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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