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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아버님께 ㅣ 진경문고 1
안소영 지음, 이승민 그림 / 보림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들 이야기한다. 다산 정약용은 말년에 18년간 유배생활을 했었다고. 아주 먼 옛날 사람이기에 18년이란 기간이 얼마만한 시간인지 헤아리지 않고 쉽게 이야기한다. 즉 그 시간의 길이를 지금 내가 사용하는 시간의 길이와 같다고 보지 않는다. 그 시간에 나를 대입하거나 같은 선상에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냥 긴 인생에서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도 그렇게 보았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약용이 유배를 간 것은 반대 세력들의 견제 때문이었으며 18년 있다가 풀려났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시간이라는 것이 단순히 숫자로만 나타낼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워낙 역사서를 읽다 보면 유배 가는 경우가 많아서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실은 본인 한 명 한 명에게 결코 쉬운 생활은 아니었을 게다. 어디선가 다산의 경우 유배지에서도 아들을 불러 공부를 가르쳤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걸 보며 자식에 대한 가르침이 대단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부분은 딱 거기까지였다. 물론 가장이 유배를 갔으니 형편이 힘들고 사람들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웠을 거라는 것은 짐작이 가지만 그들의 삶으로서의 고민에 대해, 가족으로서의 고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질 않았던 것이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풀려 난 것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리고 결코 세월이 가서 풀려난 것은 아니었구나를 새삼 느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남의 일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을 그러한 일들이 지금도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착잡하다.
다산의 둘째 아들인 학유의 입을 통해 정약용을 다각도로 알아가는 좋은 기회였다. 특히 당연하게 생각했던 유배지에서의 생활이나 풀려나는 계기 등을 그저 남 얘기가 아닌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접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차갑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학유가 된 것처럼 분개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다산에게 화도 내 가면서 그렇게 책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단순히 편지를 주고 받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다산의 생활이나 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인간 정약용과 그 가족들을 만나는 좋은 기회였다. 아, 정말 당시 잘 나가다가 차갑게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분노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몰락한 가정에서 기 못 펴고 살면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 자식이 얼마나 될까. 그런 모든 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과연 어디까지가 작가의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정학유의 생각이었을까 궁금할 정도로...
작가가 철학을 전공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사색을 많이 한 탓인지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치 시 같았으며 한 귀퉁이에 써 놓고 다짐해볼 그런 말들이었다. 단순히 유배 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자식으로서의 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애환이 있고 개인의 고민이 있으며 세상의 부당함을 혼자 어쩌지 못해 좌절하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굴한 속내가 보이기도 한다. 사실상 정조가 죽음으로써 예정된 수순인 내리막길을 걷게 된 정약용의 인간적인 면을 만나는 기회였으며 유배지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만나는 기회였다.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과 그 아들이 아니라 인간 정약용과 그 아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초당으로 찾아가는 길을 읽는데 왜 자꾸 서애가 후학을 가르치던 병산서원 갔던 길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둘의 처지가 확연히 달랐겠지만 제자를 대하는 태도와 학문을 대하는 모습만은 같았을 것이다. 해남 대흥사(대둔사)의 초의 선사와 김정희의 일화가 생각나기도하며 언젠가는 꼭 해남을 돌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