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 이야기 인물로 보는 우리 역사 2
박윤규 지음 / 보물창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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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정치란 비슷한 모양새를 띄나보다. 임금이든 대통령이든 우선 통치자의 자질이 중요하고 그 이상으로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가끔은 통치자가 유능한 인재를 썼기 때문에 정치가 안정된 것인지 아니면 통치자가 유능했기 때문에 인재를 쓸 수 있었던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물론 어느 한쪽만 이루어졌다면 결코 성공적인 정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정답일 테지만. 특히 황희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지금도 누구나 서슴없이 최고의 성군으로 꼽는 세종이 있었기 때문에 황희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일 테고, 반대로 황희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세종이 더 힘을 받고 소신대로 통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리 절대 군주라도 자신의 뜻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도 대통령 혼자만 아무리 열심히 무언가를 하려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실무를 담당할 사람을 누구를 쓰느냐, 어떤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을 기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현저하게 차이를 보이곤한다. 그 옛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점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통치자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재상 중에서도 잘 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처음엔 인물 위주로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시대별로 연결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이름은 들어 보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고 있으나 정확히 어떻게 행동했는지 소신은 어땠는지는 모르고 있는, 그야말로 아주 대표적인 것만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황희에 대해서도 대충은 알고 있었으나 그의 인물 됨됨이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세종과 황희가 있었기에 당시 문화와 과학이 상당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또한 마찬가지로 정조 시대엔 채제공이 있었기에 문화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면 성군 뒤에는 반드시 이런 유능한 재상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면 유능한 재상이 있었기에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최명길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유능한 최명길(물론 일부에서는 비판한다고는 하지만)이 있었다고 해도 유능하지 못했던 인조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했으니까.

시대별로 유능했던 재상들에 대한 것을 읽으며 대부분의 인물들은 상당한 인품과 학식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사대정신을 갖고 있어서 주체성을 갖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삼국사기>의 저자로 알고 있는 김부식도 그렇고 정몽주도 그렇고... 과연 그런 것들을 지난 역사라고만 단순하게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지금은 어떤지 대입해 보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각 시대에는 언제나 당파 싸움이나 계파간 싸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살다 보면 모든 사람이 한 길로 마음이 모아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상대를 인정해 주는 기본적인 자질은 갖추어야 할 텐데 그런 면을 갖고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를 인정해 준 후 싸움을 할 때만이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 또한 현재의 상황과 전혀 달라진 바가 없다. 어찌되었든 되도록이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작가의 노력 덕분에 독자도 치우치지 않는 눈으로 인물을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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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로즈의 아주 특별한 일 년 스콜라 모던클래식 4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이승숙 옮김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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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아니 무엇이든지 단순히 텍스트만을 읽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작가가 놓여 있는(그러나 뒤에 숨기고 있는) 현실을 볼 줄 알아야 하며 당시 시대가 어땠는지도 감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순수하게 책만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거야 문학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겠지만 여하튼 나는 하나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쪽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책이라는 것은 작가가 수정해 나가는 것이 아닌데 시대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때론 정반대로 흘러가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예전에 획기적이었던 것이라도 지금은 지극히 평범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되도록이면 책을 읽을 때 책에 서술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항상 그렇게 되진 않는다. 때론 읽고 나서 뭐 이런 이야기가 있나 하고 한심해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잠시 떨어져서 바라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렇듯 책 내용과는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이 책이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소녀시절 한창 재미있게 읽었던 소공녀류의 이야기와 비슷(절대 같은 종류는 아닌다.)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졸지에 고아가 되지만 워낙에 물려받은 유산이 많아서 지내는데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어린 소녀에 대한 이야기. 그 소녀는 항상 발랄하고 총명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그런 존재다. 게다가 마음까지 착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안다. 바로 여기 나오는 로즈가 그렇다. 물론 로즈도 처음에는 자신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해 항상 우울해 하고 병자처럼 지낸다. 주위에는 고모도 많고 할머니들도 많지만 로즈를 위로해 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렉 삼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로즈가 위험이나 위기에 처하는 것도 아닌 부유한 로즈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지내는 유쾌한 일 년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지만 동시대의 다른 책들과는 약간 다른 면이 나타난다. 바로 주체적인 여인상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많은 부분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당시 시대 분위기대로라면 부유한 집 딸들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지식 외에는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였으며 모름지기 여자란 사교계에서 뭇 남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지내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삼촌인 알렉은 그런 여자들을 한심하게 치부하며(심지어는 자신의 누이마저도) 로즈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하녀와 한 두 가지 물건을 나눠 갖는다고 해서 진정 자매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는 것은 짐작할 만하다. 아마도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로망처럼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고 실컷 놀 수도 있고. 그러나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한 데에는 분명 뒤에서 그 일들을 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 더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거기까지 의도하진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유명한 작품인 <작은 아씨들>을 읽었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아마도 당시는 나를 그 자매들에게 대입했을 것이다. 지금은 딸을 대입하며 읽겠지. 그녀는 당시 소로우와 한 동네에 살며 그와 함께 산으로 강으로 다니며 자연과 더불어 교감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물론 그때 루이자는 어린 소녀였다. 항상 주체적인 여자를 작품 속에 등장시키며 시대를 벗어나고자 했던 그녀는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도 했단다. 작품만 읽어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책 한 권을 읽으며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도 겹쳐졌고 소로우도 겹쳐졌으며 당연히 그 위엔 로즈의 생활도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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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알렝 -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에 살았던 프랑스 소년 이야기, 물구나무 그림책 67 파랑새 그림책 68
이방 포모 글 그림, 니콜 포모 채색, 김홍중 옮김 / 파랑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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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다른 나라로 가서 살면서 자신들의 전통을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이 어렸을 때 살았던 마을이나 동네 사람들에 대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일종의 옛이야기인 동시에 역사인 셈이다. 후에라도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후손들이 낯선 나라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이다. 그와 전혀 상관없는 이 책을 보고 문득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생활이 생각났다. 왜 일까?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들의 생활을 후에 누군가에게 알려주기 위해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든 생활 속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지금의 아이들과 똑같은 마음을 갖고 지낼 것이다.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은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그래서 그 아이들이 여덟 살이 되었을 즈음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며 노는지, 혹은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알렝의 모습을 따라가며 알려준다. 아직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어야 하고 차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우리 어른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 '내가 어렸을 때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에서는 항상 장난감도 만들어서 사용했고 학원 같은 것도 없어서 학교 갔다오면 노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비록 지금의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할 것 같지만 그 안에 있으면 당연하게 여겨지듯 불편함을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가끔 외출하는 극장 구경이나 외식을 하기도 하는 속에서 행복을 맛본다. 10킬로미터도 거뜬히 걸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때도 미운 사람은 있게 마련인지 알렝도 얄미운 친구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해서 크게 혼나기도 한다. 이렇듯 이야기 자체가 커다란 사건이 있거나 굴곡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아이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문화가 달라서일까. 책을 덮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 별 기억이 안난다. 그냥 알렝이라는 아이가 있었고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된 모습을 이야기하며 끝냈구나 라는 것 정도? 하지만 글이 꽤 많이 있는데도 만화 같은 그림을 보느라 재미있어서 책장이 잘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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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 - 고전시가로 만나는 조선의 풍경
김용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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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문학, 특히 시와 그 비슷한 장르와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기에 내겐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나마도 씌어져 있는 것을 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들이라곤 모두 학교 다닐 때 어쩔 수 없이 외웠던 것들이다. 그러니 내가 쉽게 이 책을 시작하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고전시가를 특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아마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내겐 아직도 머나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시조를 인용하며 그에 대한 해석을 하고 그것을 읊조렸던 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방식을 취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강호시조들이다. 아니,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한적한 곳에 들어가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기에 다른 여러 주제들이 있었음에도 책을 덮고 난 지금 마음에 남는 것은 그런 것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가 한번쯤은 소망했을 법한 그런 유유자적한 삶, 내지는 은둔자의 삶. 문득 한여름에 찾아갔던 계곡 물소리 요란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가 서늘했던 소쇄원이 생각난다.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쇄원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도 같다.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던 곳이었는데...

그러나 저자도 지적했듯이 그건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었던 양반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기에 잠깐 농사를 '체험'하는 그들의 시가에서는 기분 좋은 낭만만 느껴질 뿐 노동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조선 후반기에는 신분제의 붕괴로 인해 궁핍한 삶을 살았던 양반들도 있었다지만 양반이 읊었던 시조와, 양반이 아니었을 것 같은 작자미상의 작품을 읽을 때는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렇듯 글이라는 것은 아무리 포장을 한다해도 자신의 생각과 활동의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는가보다. 그래서인지 관념적인 사대부들의 시가를 읽을 때보다 작자미상의 사설시조를 읽을 때가 훨씬 마음이 편했고 한편으론 통쾌했다. 이 즈음이면 강호시가보다는 현실을 풍자한 글들이 더욱 마음에 남는다. 그럼 뭐지. 모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란 얘긴가.

많은 시조를 읽는데 해석해 주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모를 것들이 많아 참으로 난감했다. 해석해 놓은 글을 읽으면 당연해 보이는데 왜 전엔 암호처럼 보였을까. 마치 외국어를 접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물론 한자로 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끊임없이 변하는 언어의 특성상 남아 있는 말이 거의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들의 시조를 통해서 단순히 해석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교감하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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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과학 - 미인 불패, 새로운 권력의 발견 과학전람회 9
울리히 렌츠 지음, 박승재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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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며칠전에 사람들과 이야기 도중 외모에 대한 것이 화제로 떠올랐다.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살도 빼고 성형수술을 했기에 가능했다는 어느 '여자'의 이야기였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외모를 직접 거론하며 연구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면 논문으로 발표되었으나 드러나지 않아서일수도 있겠다. 어쨌든 요즘은 오히려 사원을 채용할 때 외모로 판단할 근거를 적시하는 걸 비판하며 그런 것들을 제외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더 많이 들린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 외모는 전혀 고려되지 않을까. 글쎄... 그렇다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나운서는 미운 얼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런지.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아름다운 여성이 더 똑똑하기 때문일까. 연예인들이야 외모가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되니 그들은 차치한다해도 실력으로 뽑는 아나운서도 미운 사람을 보질 못했다.

아름다움의 과학. 단순히 아름다우면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을 것이다라는 추측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던 책이다. 과학적으로 접근해서인지 중반까지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기 보다 보편적인 동물, 본성으로서의 동물을 주로 다룬다. 생물학에서 사용하는 이론이 많이 나와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 이론이 정말 인정받은 이론인지 아니면 그저 연구 과제로써 붙여진 이름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게다가 역자가 생물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쉽게 설명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이쪽에 대해 잘 몰라서인지 이해하는데 애 먹었다. 그다지 매끄러운 번역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이유다. 중반까지는 책장 넘기기 힘들게 읽어갔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라 비교적 잘 넘어갔다.

분명 아름다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훨씬 많은 호감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그런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이 그저 놀랍다. 아무리 말로는 성격 좋은 사람이 좋으며 성실한 사람이 좋다는 등 외모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이성이라는 것으로 억압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처음 보았을 때의 이미지는 외모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연구 이야기도 이 책에 나와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처음의 이야기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 다음에는 외모보다 다른 요소들이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기에 결혼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 만났을 때 바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담보로 하는 것일 게다. 또 그러기에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유효한 것일 테고.

외모에 무척 신경쓰는 딸에게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줄기차게 이야기하면서도 그런 내 모습이 어느 정도 위선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기에 어린이들조차 예쁜 아이가 훨씬 많은 관심을 받고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실험결과가 내심 못마땅하고 불만이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행복과는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실험이 보여주듯 아름다움이란 남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자존감. 여기서는 다분히 페미니스트적인 사람들에겐 분명 불편할 만한 진실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론에 가서는 외모가 약간의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사람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다. 결론은 하나다(내 임의대로의 결론). 나를 인정하자. 대신 다른 사람도 인정해 주자. 그래야 설령 아름다운 것에 잠시 넘어갈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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