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다른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할 때 '욕망'이라는 단어는 기피하게 된다. 마치 무슨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받아들일 것 같아서 말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욕망이 드러나지 않도록 무진장 신경을 쓰면서 고상한 척한다. 간혹 다른 사람으로 인해 기분이 언짢거나 화가 날 때 왜 그럴까를 곱씹는다. 처음엔 단순히 상대방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곰곰 생각하고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난 집안을 꾸미는 일에 도통 재주가 없다. 뭐, 관심도 없다. 그런데 만약 집안을 멋지게 꾸며놓고 사는 사람집을 방문하게 되면 불편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왜 이렇게 집안을 치장하는 것에 신경을 쓸까. 가구 배치에 신경쓰고 인테리어 잡지를 보며 소품 정보를 얻는 시간에 훨씬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물론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 괜한 심통이 나는 건 사실이다. 아마도 그 기저에는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욕망은 있으나 실천 불가능하기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일 게다. 이렇듯 모든 것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욕망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천박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강요받았다. 그래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위장해서 다른 말로 표헌한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며 구구절절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행동의 근원에 있는 욕망을 철저하게 폭로하는 작가의 대담성에 가끔은 불편하기도 했다. 이것도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생긴 일종의 가면이다. 어쨌든 작가는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냄으로써 독자도 은연중에 자기의 깊은 속내를 잠시나마 드러내게 한다. 분야를 넘나드는 많은 생각들을 읽으면서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가끔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면도 보이고 가끔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 언저리를 맴도는 듯한 느낌의 글들이 있어서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처럼 책을 놓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느끼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고향이 시골이라 어려서부터 짚으로 만든 물건을 많이 봤다. 겨울이면 아버지가 안 쓰는 방에서 멍석을 만들기도 하고 새끼도 꼬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짚이 귀한 물건이 되었다. 지금은 추수를 할 때 콤바인으로 해서 아예 잘게 잘라서 나오기 때문에 특별히 주문하지 않으면 긴 짚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예전에는 까끌까끌한 짚가리에서 둥지를 만들어 놓고 놀곤 했는데... 아마 남편도 시골이라 그런 기억이 있나보다. 어린이책이 그렇게 많이 와도 여간해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이 이 책을 보더니 아주 열심히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하는 말, 여기 나와 있는 대로 하면 짚신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나. 어려서 아버님이 짚신 만드는 걸 보았단다. 그래서 더욱 책이 의미있게 다가왔나보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그림책을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건 처음 봤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책을 보며 짚신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투박한 할아버지의 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짚신이 손에 들려 있는 듯하다.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시골에 계신 우리네 아버지 모습이다. 특별한 기교 없이 손을 중심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테두리 연필선을 그대로 둔 것이 아닐까. 짚으로 새끼를 꼬고 그것을 가지고 엮어서 만드는 짚신. 지금이야 튼튼하고 편안한 신발에 밀려 골동품이나 장식품으로 전락했지만 그 옛날에는 필수품이었을 게다. 농번기에는 짚신을 만들 시간이 없으니 농한기인 겨울에 왕창 만들어야했겠지. 어디 그 뿐인가. 멍석도 만들어야 했을 테고 가마니도 짜야 할 테고 땔나무도 장만해야 했을 게다. 농한기란 농사에 있어서만 한가할 뿐이지 그 외의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짚을 이용한 물건들이 많았다는 글을 읽으며 조상들의 지혜도 느껴지지만 힘든 그네들의 삶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편으론 잘 되었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전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 남이 하는 것은 좋아보이지만 막상 내가 하려면 싫은 것처럼 농사도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는 우리의 짚문화를 이렇게 책으로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언젠가는 이것도 아주 귀한 자료가 되겠지.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인 우리시그림책 시리즈. 처음 <넉 점 반>을 보면서 그림작가의 상상력에 웃음을 그칠 줄 몰랐고 <영이의 비닐우산>을 보며 감정의 동요를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사실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익숙하지 않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시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만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마찬가지로 어린이책과 관련된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동시건 어린이시건 잘 읽지 않는다. 아니 겁난다. 혹 너무 어렵진 않을까,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 때문에. 그러나 이 시리즈의 책을 보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기에 이 책도 주저하지 않고 집어든다.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보니 시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천정철이라는 시인, 처음 듣는다. 그러나 때론 작가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을 수 있기에 그냥 책장부터 넘기기로 한다. 분명 겉표지에 커다란 그림으로 잠자리가 나왔건만, 그리고 줄곧 잠자리 그림이 돌아다니고 있건만 미처 거기엔 신경쓰질 않았다. 그리고 쨍아가 죽었다는데 그게 무얼까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한 장 더 넘기니 과꽃 밑에서 죽은 잠자리 쨍아의 그림이 나온다. 그제서야 앞에서 보았던 그림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사람은 이렇듯 자기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본다. 개미가 쨍아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모여드는 무수한 개미 그림을 보고 있자니 참 묘한 생각이 든다. 만약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많은 개미들 그림을 보았다면 분명 징그럽다고 생각할텐데 전혀 그렇질 않으니 말이다. 사방에서 수없이 몰려드는 개미 그림을 보고도 오로지 시선은 중간에 자리잡은 잠자리에게서 떠나질 않는다. 점점 잘게 분해되는 잠자리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징그럽다는 생각도, 잠자리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맞다. 잠자리 장례를 치러준다는 개미들의 수많은 모습이 아름답다. 물론 실제로는 먹고 먹히는 관계로 개미는 단지 본능에 따라 자신들의 먹잇감을 운반하는 중이겠지만 그것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그림은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든다. 아, 이래서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한다니까. 이래서 내가 그림책을 못 벗어난다니까. 모노타이프 위에 감자나 무, 지우개를 가지고 찍기 기법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단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흔히 하는 그런 방법을 가지고 이렇게 멋진 그림책을 만들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처음 책장을 넘기며 과꽃을 볼 때부터 화려하지 않으면서 뭔가 아름다운 기운을 느꼈었다. 줄기는 흑백으로 처리하고 오로지 꽃만 화사하게 처리함으로써 강한 대비를 이루는 그림이다. 그리고 개미들이 쨍아를 장사 지내주는 장면, 특히 쨍아의 몸이 점점 작은 알갱이로 분해되었다가 다시 꽃으로 환생하는 장면은 어떤 것을 느낄 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해준다. 잠자리가 죽자 개미가 달려드는 장면을 보고 장례를 치러준다고 생각한 시인도 멋있지만 그것을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한 그림작가의 재해석도 멋있다.
이상하게도 호랑이가 나오는 그림은 우리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아마도 민화에서 호랑이 그림을 많이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외국인이 그린 호랑이 그림이 낯설면서도 특이하게 느껴진다. 그제서야 생각한다. 아, 호랑이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라고. 웃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호랑이 아우구스투스는 웃음을 찾으러 길을 떠난다. 굵은 줄무늬가 호랑이라는 것을 암시하지만 정작 호랑이의 얼굴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대개 얼굴을 그려서 표정을 나타내는 것과 달리 수직으로 내려온 얼굴에 수염이 강조되어 그려졌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있는 숲인 듯 몇 가닥의 선만 나타낸 첫 장면은 하얀 바탕에 강한 줄무늬의 호랑이가 강조되어 나타난다. 덤불 밑도 살펴보고 나무 우듬지에도 올라가 보지만 그 어느 곳에도 웃음은 없다. 그렇게 산, 바다, 사막 등 모든 곳을 떠돌아다녀보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아우구스투스의 웃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러다 비를 맞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다가 물웅덩이를 발견하고는 그곳을 들여다본다. 그리곤 깨닫는다. 웃음이 바로 자기 코밑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제야 독자들은 호랑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앞모습을... 많이 나오는 그런 이야기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보니 결국 행복은 자기 주위에 있더라는 그런 이야기. 여기 이 책의 호랑이 아우구스투스도 웃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미처 몰랐을 뿐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산이나 바다 사막 등 강한 장면에서는 전체를 여백없이 처리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전체에 호랑이와 그 이야기에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배치해서 호랑이를 더욱 크게 보이도록 한 일러스트가 참 멋지다. 만약 호랑이 주변에 많은 사물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호랑이의 모습이 오래도록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가의 책인 <최고의 이야기꾼 구니 버드>를 읽으며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자진해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었다. 긴 책은 아니지만 읽어주는 책으로는 결코 짧지 않은 책을 '알아서 먼저' 읽어줄 정도였으니 이 책도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전편에서 나왔던 아이들이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다. 언제나 슬픈 이야기가 나오면 우는 게이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말콤 등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이솝 우화를 들려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라면 모두 듣고 자랐을 이솝 우화. 그러나 구니 버드네 반 아이들은 새로운 자기만의 우화를 만들기로 한다. 그것도 선생님이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모아진 결론이다. 과제를 스스로 선택했으니 참여율이 당연히 높고 완성도도 높다. 각자 이름의 첫 글자가 들어가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꾸미는 우화를 만든다는데 어른들에게 이런 과제가 주어졌다면 아마도 굉장히 어려워하고 난감해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순수해서인지 아니면 무한한 가능성 때문인지 어떤 과제가 주어져도 별 어려움 없이 한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배리는 우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논픽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고 받아들여 완성하는 것은 모두 아이들이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 나라는 참 좋은 시스템을 가졌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담임 선생님 뿐만 아니라 교장 선생님도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참여하고 대화를 하는 장면은 많은 부러움을 사게 만든다. 이 책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분명 어른인 작가지만 책을 읽다 보면 자꾸 구니 버드와 그 반 아이들이 진짜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모든 아이들은 어른이 만들어 낸 인물일 뿐인데 말이다. 그만큼 책 속 인물에 매료되었다는 이야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