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그림책 보물창고 44
에마 치체스터 클락 글.그림,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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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서 참 낯익다고 생각했다. 분명 작가 이름은 낯선데 말이다. 특히 뒷부분에 나오는 할머니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작가 소개를 보고 알았다. 이 책의 작가는 퀸틴 블레이크로부터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웠단다. 즉 퀸틴 블레이크와 그림 풍이 비슷해서 낯익었던 것이다. 어쩐지.

강아지 파이퍼는 엄마를 떠나 새주인을 따라 언덕 위의 집으로 간다. 항상 엄마로부터 주인 말을 잘 들으라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파이퍼는 주인의 말을 잘 듣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파이퍼의 생각이다. 주인은 토끼를 혼내주라는 의미였는데 파이퍼는 말 그대로 토끼를 잘 봐 주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첫 번째 주인인 존스 씨네 집에서 탈출한 파이퍼는 거리를 배회하다 차에 치일 뻔한 어느 할머니를 구해준다. 사람들은 쓰러진 할머니에게 신경쓰느라 파이퍼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렇게 파이퍼는 다시 떠돌아다니게 되는구나. 처음에 할머니가 파이퍼에게 호감을 보일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말이다.

전에는 이런 강아지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았는데 직접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우리 강아지를 대입하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강아지를 엄청 예뻐하느냐면 그건 아니다. 그냥 가끔 귀엽긴 해도 아직 귀찮은 면이 훨씬 많다. 하지만 어쩌다가 강아지만 두고 나가려고 하면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그 때만은 정이 새록새록 든다. 이런 강아지를 길에 내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다. 그러니 파이퍼가 혼자 떠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하지만 마음씨 착한 할머니가 파이퍼를 찾아내 함께 살면서 걱정했던 마음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들에게 또 한번의 시련이 닥친다. 바로 전 주인인 존스 씨가 자신의 개라는 전화를 한 것이다. 이제 정말로 마음씨 고약한 존스 씨가 파이퍼를 데려가겠구나.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읽는 이를 안심시키다 못해 기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멋진 황혼녘의 뒷모습은 행복감마저 느끼게 한다. 파이퍼는 이제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이 된 것이다.

윤곽선만 대충 그린 듯한 인물들과 중간중간 나타나는 화려한 색상의 그림들을 보노라면 밋밋한 느낌도 있으나 자연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배우면 그 사람의 화풍을 닮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퀸틴 블레이크를 연상시키는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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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쟁이 왕털이 사계절 저학년문고 40
김나무 지음, 윤봉선 그림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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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아이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거짓말이 나쁜 것이긴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그런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혹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해하고 넘어갔다. 물론 큰 거짓말이 아니기에 가능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아이들 마음을 잘 이해해준다는 뿌듯함 때문에.

그런데 바로 오늘 그런 내 뿌듯함에 재를 뿌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잠깐 나간 사이 아이가 몰래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놀라서 얼른 컴퓨터를 끄는 모습을 보았다. 그야말로 딱 걸린 것이다. 지금까지 약속 잘 지키고 자기가 할 일은 스스로 잘 한다고 굳게 믿었던 아이였기에 더 화가 났다. 결국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화를 냈다. 아이도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기에 계속 눈치만 보고 웃질 않았다.

아무리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과는 별개다. 하물며 어른도 그런데 어린아이들이야 오죽할까.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내 아이만은 안 그럴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산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지금까지 감추었던 자신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오늘의 나처럼. 그 일을 생각하자니 이 책이 생각났다.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어떤 잘못이든 잘못을 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며 너그러운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막상 내 아이가 잘못을 하자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다. 

왕털이도 분명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계속 거짓말을 하고 만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되어 아이들과 헤어진다. 그래도 나중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친구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더 이상의 잘못은 저지르지 않는다. 왕털이는 친구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것이 뻔하지만 용기를 내서 진실을 말한 것이다. 할머니도 처음에는 왕털이를 보호할 욕심에 거짓말에 장단을 맞추지만 결국에는 왕털이 혼자 해결하도록 놔둔다. 그럼으로써 왕털이는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다.

내 아이도 이제 자신의 잘못을 알았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씩 성장할까. 글쎄, 현실이 꼭 동화처럼 되는 것은 아니니 두고 봐야겠지. 돌이켜보면 아이의 마음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닌데 순간적인 실망감과 배신감 때문에 과민반응을 보였던 면도 없지 않다. 왕털이 할머니가 왕털이에게 기회를 주었듯 나도 아이에게 기회를 주어야겠지. 자기가 자초한 일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말이다.

옛이야기에서 흔히 나오는 둔갑하는 여우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끌어 나간다. 여우가 굳이 사람의 습성대로 살도록 설정한 것이 아니라 여우는 여우처럼 살고 사람은 사람처럼 살도록 설정한 면도 자연스럽다. 만약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해서 사람과 함께 살았다면 재미가 훨씬 덜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가 재미있다. 또 그렇게 사투리를 쓰게 된 연유까지 나와있어 억지스럽다고 생각하던 마음을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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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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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자신없어 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미술이다. 워낙 그쪽엔 소질도 없거니와 관심도 없어서 그냥 나와 상관없는 부분이려니 하며 살았다. 몰라도 지금까진 별 무리 없이 잘 살았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 그림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 많은 책들을 보다 보니-특히 외국책-미술을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떤 책을 읽든 서로 연관된 지식의 고리가 있어서 그 고리 중 하나만 몰라도 서로 이어지질 않아 애먹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선 깨달았다. 학교 다니면서 배웠던 이런 것들이 다 필요한 것이구나. 그렇게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알고부터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혀 몰랐던 것을 한꺼번에 다 익힐 수는 없는 일이다. 조금씩 이 책 저 책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모호한 이야기들로 가득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여전했다. 게다가 그림이라는 것, 명화라는 것이 어디 그 그림 하나만 본다고 되는 것이던가. 서양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결국 세계사다. 그런데 불행히도 난 이과라서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 문학을 알아야 하며(나와 관계없었던 분야 중 하나다.) 성서를 알아야 했다(당연히 종교를 믿지 않는다. 이로써 악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다). 그 중 나는 어느 것에도 해당사항이 없었으니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용어들 중 내가 모르는 것도 많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는 기초 지식을 얻었으니까. 처음 서양의 그림을 접할 때 단순히 보여지는 것만 보던 것에서 조금씩 뒤에 있는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난 뒤에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전에는 굉장히 어렵고 뛰어 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안다. 지금이야 원근법이라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생각되고 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발견된 것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시점이라는 것도 문외한인 내가 느끼기에 감상에 크게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은데 설명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읽다 보니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알고 볼 때와 모르고 볼 때 느낌이 다르고 감동이 다른 것인가 보다.

예전에 <천천히 그림 읽기>라는 책을 읽었었다. 그때까지 저자의 이름을 진보적 성향의 매체에서 더 많이 보아왔던 터라 그가 미학자라는 것을 몰랐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을 때 이 이름을 왜 여기서 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도 참 무식했지. 사실 요즘에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역시 저자는 미학자다.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나간 것을 보며 뭘 모르는 대중을 위해 이런 책을 쓴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 그림을 단순히 뭉뚱그려진 하나의 작품으로만 감상하던 것에서 선과 형 색으로 분리해서 감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서양 미술에서 양식의 변화를 조금은 감지할 수 있었으며(이건 매번 들어도 잊어버린다.) 왜 그런 변화가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법은 없으니까. 아, 벌써부터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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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곰팡이와 여행하다 집요한 과학씨, 웅진 사이언스빅 13
오치 노리코.유재일 지음, 김주영 옮김, 정하진 그림, 아자와 마사나 사진, 김완규 감수 / 웅진주니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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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과학 특히 세균에 대해 관심이 많은 둘째 때문에 본의 아니게 거기에 대해 책을 보게 되었고 덩달아 아는 것도 조금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큰 명제는 잊지 않았다. 바로 곰팡이가 없었다면 지구는 죽은 생물들로 넘쳐 났을 것이라는 것, 따라서 곰팡이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점.

곰팡이 쿠가 나와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글이 많은 듯 하지만 천천히 읽다 보면 금방 끝난다. 그만큼 흥미롭기 때문이다. 또한 생생한 사진자료가 많아서 그것을 보는 재미도 한몫한다. 현미경 사진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곰팡이 사진까지 보여주고 있어서 가끔은 지저분하고 징그럽다고 느끼면서도 자꾸 들여다보곤 한다. 특히 식물에 핀 곰팡이균은 그동안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화분 식물에 피는 허연 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보니 그것도 일종의 곰팡이였다. 물론 어떻게 없애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는 언제 어디서나 있는 곰팡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곰팡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곰팡이 쿠와의 여행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인 곰팡이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거기에 있는 지식도 만만치 않다. 또한 마지막에 과학과 역사라고 해서 역사 속에서 곰팡이와 관련된 사건을 다룬 부분은 흥미로웠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곰팡이의 실체를 알지 못했을 때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지나치게 과학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보여줘서 더욱 흥미로웠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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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들어주는 카드 뉴베리 수상작 시리즈 (주니어김영사) 1
빌 브리튼 지음, 김선희 옮김, 이선민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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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동화책을 읽다가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 작가가 없을까하는 생각 때문에. 물론 내가 우리 동화책을 모두 읽은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판단한다는 것이 오만일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어린이책과 관련해서 꾸준히 활동을 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굉장한 책을 못 보고 지나칠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뭐가 특별한 것일까 곰곰 생각에 들어갔다.

이 책에는 네 명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한 명은 서술자로 등장하니 세 명의 아이들(본인들은 아이들이길 거부하고 청소년이길 바라지만)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세 아이들은 한 마을에서 살며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셋을 모두 한꺼번에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 명씩 다루기에 처음에는 서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하'라는 감탄사와 함께 그동안 각기 떨어져서 생각되었던 세 아이들이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구조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데도 참 신선하다. 판타지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중간에 마법이라는 말이 나오고 소원을 빈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게다가 각각의 소원들이 차라리 이루어지기 전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읽기에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로 합쳐지는 이야기는 그동안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간 이야기를 순식간에 마무리한다. 그렇다고 서둘러 봉합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력감에 빠질 정도로 이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뉴베리 아너상을 받았다는 타이틀 때문에? 그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혹 유명한 상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는 이야기일 경우 몰입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을 받은 책을 봐왔다. 그렇다면 뭘까. 나름대로 내린 결론에 의하면 현재 우리의 동화책들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면만을 다루거나(특히 요즘 그런 경향을 보인다.) 판타지의 경우 현실적인 요소는 없이 판타지에 모든 것을 할애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아직 판타지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상태도 아니고. 하지만 이 책은 판타지를 이용하고 있음에도 현실적인 장치들을 적절히 배치해서 둘을 뚜렷하게 구별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책에 더욱 빠져들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메시지가 없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라도 때로는 현재가 좋을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고 소원이라는 것은 단순히 뭉뚱그려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씩 되새겨야 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메시지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부주의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헐레벌떡 쫓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테니까. 우리의 상상력은 무엇 때문에 벽을 뚫고 나가지 못하는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경직된 사고를 하도록 훈련받은 교육 때문은 아닐런지. 동화책 한 권 읽고 어쩌다 교육문제로까지 나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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