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만나는 중세 이야기 에듀 픽션 시리즈 5
귄터 벤텔레 지음, 박미화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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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역사동화를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딱딱하고 억지로 외워야 하는 역사가 아니라 말랑하고 자연스럽게 연결고리를 찾는 역사라는 생각에 긍정적인 평가를 했었다. 사실 역사란 연속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식처럼 외우려고만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참이었다. 원칙을 지켜야하는 것(사건중심의 역사)도 있어야겠지만 때로는 이렇게 약간 변형해서 아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세계사는 어떨까. 생각해 보니 세계사 관련 책은 하나 같이 지식으로 접근하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단편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어간 책은 있지만(문득 <로마 미스터리>가 생각났다.) 그건 위에서 이야기한 역사동화의 범주하고는 약간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이 책은 세계사를 이야기로 엮어냈다. 그것도 암흑의 시대라고 하는 중세를. 아마도 저자가 교사였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무작정 외우는 것보다 이처럼 이야기를 읽고 나면 당시 상황이 그려지기 때문에 훨씬 이해하기 쉽고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게다. 

그런데 읽으면서 참 어려웠다. 내게 세계사는 잠시 배웠던 과목이고 그나마 아이 키우면서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책을 찾아 읽고 간신히 엮을 정도인데 이처럼 세세하게 옛 지명과 인물들이 나오니 헤맬 수밖에. 지도라도 있었으면 조금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데 이렇게 자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하지만 많이 언급되는 사건과 인물들이다.) 그러면서도 책을 덮지 못하고 조금만 조금만 하며 읽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미있으니까.  

그렇다. 이 책은 확실히 재미있다. 각 사건이나 인물을 이야기할 때 다양한 인물이 나와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각 장이 시작될 때 다루고자 하는 인물과 사건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해놓아서 허구를 분간할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특징이다. 물론 간혹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허구이고 어디까지나 사실인지 여전히 헷갈리는 것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계사에 대해 잘 모르는 딸이 이 책을 읽을까. 아마도 이름도 어렵고 지명도 어디가 어딘지 몰라 헤매다 포기하지 않을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세계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에게 더 접근하기 쉬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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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로 세상을 바꾼 인류역사 이야기 1 - 밀림의 약자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정철 글 그림, 조대연 기획, 이은희 감수 / 바다어린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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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야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개는 인류의 기원부터 이야기하기 때문에 지루한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이름도 비슷비슷해서 어찌나 헷갈리던지.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도구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것도 만화로. 책을 펼치면서 문득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인류가 지구에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던 시기에 과연 언어가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아마도 얼마 전에 읽었던 책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인류와 함께 언어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어쨌든 언어가 필요에 의해 '생겼'으니 언젠가는 언어가 없었던 때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잠깐 과연 이 책은 그 시기를 어떻게 풀었을까 의심하며 책장을 열었는데 어쩜 처음 두 장은 언어가 없이 간단한 의성어만 나오는 것이다. 전에는 이런 책을 봐도 그런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처럼 의심을 하자마자 그것을 미리 알아채기라도 한 양 언어가 없던 때부터 이야기를 한다. 사실 처음엔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가 역사 관련 전공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약간 까칠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처럼 처음부터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다음은 마냥 괜찮아 보인다. 

2편까지는 특정한 언어가 없이 의사소통을 하다가 3편부터는 드디어 말이 나온다. 그러면서 드디어 만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사이가 비록 잠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사실은 몇 십만 년이 흐른 뒤다. 그러므로 갑자기 언어가 생겼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 사이에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을 테니까.(그런데 왜 자꾸 언어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이 책은 도구의 발달을 중심으로 인류의 생활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간단한 도구가 당시에는 엄청나게 획기적인 발명이었다는 점을 독자들도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씨를 뿌린다는 것이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그런 역사가 아니라 도구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역사. 기획의도가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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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다리 기사와 땅딸보 기사 봄봄 아름다운 그림책 16
비네테 슈뢰더 지음, 조국현 옮김 / 봄봄출판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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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에서 흔히 나오는 구조가 바로 대조다. 대조는 확실하게 구별되기 때문에 보여주기 쉽고 느끼기도 쉽다. 또 그만큼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쉽다. 그러나 이 경우 아주 획기적인 방법을 사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소재가 다르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고 (무엇보다)그림이 다르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다른 책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여기서도 꺽다리 기사와 땅딸보 기사가 이웃한 성에 살면서 아주 사이좋게 지낸다. 부부끼리도 서로 친하기 때문에 아예 벽까지 허물 정도다. 그런데 사람이란 욕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나 보다. 이들도 결국 꽃 한 송이 때문에 파국을 맞고 마는 걸 보니. 따지고 보면 두 가족이 꽃을 위해 어느 정도의 일을 했지만 단편적인 부분만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갈등은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아주 단편적인 일부의 오해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 

새싹이 자라는 장면에서는 마치 꽃이 여러 개라고 착각할 뻔했다. 한 페이지에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서 그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글이 따로따로 있어서 시간의 변화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꽃의 표정을 보고도 상황을 알 수 있다. 사이가 좋을 때는 웃는 표정이지만 욕심을 부릴 때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결국 그들의 사이가 갈라졌을 땐 두 성 사이에 두꺼운 얼음벽이 생겼다는 표현으로 그들의 관계가 냉랭해졌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겨울이면 당연히 추울 텐데도 마음까지 추워졌다는 표현으로 그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환상적인 듯하면서도 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그림을 주로 그리는 작가의 특색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글과 그림이 그냥 서로의 이야기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림책 독자는 글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을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탄성을 지르는 법인데 여기서는 거기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그것이 별 네 개를 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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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웃음과 망치와 열정의 책 책 읽는 고래 : 고전 5
진은영 글, 김정진 그림 / 웅진주니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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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철학 관련 책이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즉 나이가 들수록 철학 관련 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절감한다. 어린 시절에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철학적 사고라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든다. 그렇다고 무슨 궤변을 늘어놓는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나를 들여다보는 철학을 의미한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모가 정해 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나중에 정작 스스로 선택해야 할 때 우와좌왕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에게 철학적인 생각을 키워줄 만한 책이 없을까하고 알아보았는데 의외로 많다. 다만 아이들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뿐이지. 헌데 이번에는 철학자의 저작을 들려주는 책이란다. 그것도 니체를. 조금 어렵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며 펼쳐보았는데 의외로 쉽다. 사실 원문을 옮겨 놓은 부분은 어렵지만 그것을 저자가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풀어주고 있어서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어찌보면 니체의 글보다 저자가 하는 말이 훨씬 많아 보인다. 그렇다고 니체의 원문이 많은 것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아서 읽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가며 니체의 생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서 딱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때로는 비판을 하는 부분이 아이들에게 생각의 폭을 넓혀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 책을 읽고 과연 니체의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책을 읽고 더 궁금한 사람은 원문에 더 충실한 책을 찾아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냥 여기서 끝내고 니체의 책을 읽었다고 목에 힘을 줄까 약간 걱정이 된다. 분명한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것을 무턱대고 접하기 보다 이렇게 쉬운 책을 먼저 접해서 관심을 가진 다음 더 깊이가 있는 책을 읽도록 유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이들의 흥미와 궁금증을 이끌어내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러나 역시 내용이 얕아서 뭔가 생각을 이끌어 낼 듯하다가 이야기가 끝나서 아쉽다. 또한 작가의 주관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니체의 책을 읽었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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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엄마! 마음이 자라는 나무 21
유모토 카즈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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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대체로 잔잔하고 내면에 비중을 많이 두는 작품을 쓰는가 보다. 그리고 어찌보면 심리적 접근을 한다고나 할까. 전에 읽었던 이 작가의 책인 <봄의 오르간>과 이 책의 공통점을 생각하다 보니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 말고도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심리적 치유의 과정을 겪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완전한 치유는 아니지만(모르긴 해도 심리학자나 상담자가 보면 주인공을 문제가 많은, 치유할 게 많은 인물로 보지 않을까 싶다.)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고 그럼으로써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성인이 된 치아키가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에 나오는 몇 쪽 안 되는 이야기만 읽어도 치아키의 모습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음, 상당히 내성적이며 여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듯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엄마와 통화를 하는 모습이 어딘지 거리감이 느껴져서일까. 어쨌든 치아키는 6살 때부터 9살 때까지 살았던 집의 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는 도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시자 엄마의 방황은 시작된다. 치아키는 너무 어려서 잘 모르지만 엄마마저 떠날까 두려워 무조건 엄마 뜻을 따른다. 어린 것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괜히 내 마음이 아릿하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나무 하나 보고 살기로 결정한 곳이 바로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포플러장이다.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웃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 할머니와 치아키와의 끈끈한 정은 가장 중심이 된다. 단순히 할머니와 치아키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다. 헌데 여기서는 둘의 만남으로 인해 치아키가 드디어 아빠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내면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간다. 

당시에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지나가는 작은 사건이 나중에 알고 보니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독자는 짧은 탄성을 지른다. 아, 이것은! 이런 식의 구성은 미처 복선이라고 알아채지도 못할만큼 교묘히 숨겨 놓는다. 또한 까딱하면 우연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일이지만 어찌나 교묘하게 엮었는지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든다. 특히 마지막에 할머니가 죽을 때 가지고 가겠다고 받아 놓은 편지가 치아키 것만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 중 동일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심지어 어린 치아키도 똑같이 인격체로 대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치아키도 그것을 알았고.  

사건 전개가 빠른 것도 아니고 커다란 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도 아니지만 읽고 나니 잔잔하면서도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다. 엄마의 상처가 더 커 보여서 자신의 상처는 내면에 꼭꼭 숨겨두어야 했던 어린 치아키가 결국 엄마와 내면으로 화해하기 때문이었을까. 읽는 내내 치아키에게 별 도움이 안 되고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엄마 같아서 미웠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치아키가 살아갈 희망을 준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역시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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