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여 꿈을 노래하라 2
밀드레드 테일러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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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에서는 대선 열기가 한창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과연 여자 대통령이 탄생하느냐에 관심을 갖더니 이제는 흑인 대통령이 가능한가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물론 이성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야 피부색의 차이가 관심이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는 그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설문조사에서도 나왔다지 않은가.

하물며 지금도 그럴진대 남북전쟁이 끝나고 막 노예해방이 이루어졌을 때는 어땠을까. 굳이 이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그들의 사회가 어떻게 굴러왔는지 익히 알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특별한 내용을(우리가 모르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금서가 되고 어떤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고 하니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긴 하나보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름만 달랐을 뿐이지 똑같은 행동을 했으니까. 다만 이런 시절이 있었음을 알고 지금이라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 책의 임무일 것이다.

폴 로건의 어린 시절부터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 한 마디로 파란만장한 삶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백인 아버지의 배려로 교육을 받고 다른 백인 형제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지만 어느 순간 세상의 부조리를 깨달은 폴은 모든 특권을 버리고 혼자 살아갈 결심을 한다. 어찌보면 특권을 버렸다기 보다 그동안 잠시 빌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특히 아버지가 그것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물론 아버지는 폴을 다른 백인들로부터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예에게 하듯 때렸다지만 그것은 폴을 규정짓는 정확한 선이 되고 만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그 상황에서 폴의 아버지가 취할 행동범위가 그다지 다양해 보이진 않는다. 만약 거기서 폴을 두둔하고 나섰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듣는 것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위기에 몰릴 수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에드워드의 말대로 그게 최선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폴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쩜 이렇게까지 궁지로 내몰리고 고생을 할 수 있을까싶다. 게다가 몇 번이나 부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빼앗길 때는 아무리 소설이라지만(비록 실화에 바탕을 두었더라도) 좀 심하다 생각될 정도다. 그렇다고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났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건 절대 아니다. 이미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특히 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2년간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 일했던 게 백인의 심술로 물거품이 될 때는 나도 같이 좌절했다.(그나마 백인 중에서도 괜찮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1880년대 미국에서만 일어났던 일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지금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안 일어나니 안심해도 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글쎄,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인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제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내용도 대충 짐작은 한다.) 폴이 캐시 로건의 할아버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캐시 로건이 어떻게 그런 운동을 할 수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폴의 명민함과 정의를 위한 의지가 대물림된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환경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가를 자문해본다. 부당한 대우에도 귀찮다는 이유나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슬쩍 넘어가려 했던 적은 없던가를 되돌아본다. 물론 그런 적이 많았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폴 로건에 이어 캐시 로건까지 이어지는 가족사에 관심이 많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반성을 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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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눈물 파랑새 청소년문학 5
안 로르 봉두 지음, 이주영 옮김 / 파랑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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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침 이 책을 읽고 난 다음날 오스트리아의 나타샤 캄푸시가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로 데뷔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물론 전에 나타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은 있었으나 그냥 한번 스쳐지나갔던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쩜 파올로와 똑같다는(약간 다르긴 하지만)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난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한다지. 하지만 그 말에는 역시나 납치된 사람에게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으며 납치범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만약 단순하게 결과만 보도된 사건에서라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처럼 엔젤과 파올로가 어떤 생활을 했으며 안젤이 파올로에게 사랑을 얻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된 뒤에는 차마 그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만큼 안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 것이리라.

물론 안젤은 분명 아무런 죄책감이나 도덕적 갈등 없이 쉽게 살인하는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파올로가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안젤이 대신하는 것을 보며 그가 살인자였다는 것은 그저 지나간 실수로 봐주고 싶을 만큼 그에게 동화된다. 특히 루이스에게 파올로의 관심과 사랑을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나 파올로가 행방불명되자 정신없이 찾아다니는 모습은 여느 부모 못지 않다. 그리고 안젤이 파올로를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게 되고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다.

독자는 안젤과  파올로 입장에서 읽어가기 때문에 내심 함께 잘 살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면 사회적 정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니 어차피 안젤의 최후는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숲속에 있는 리카르도의 집에서 책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해하는 파올로를 보며 노인에게 맡기는 것이 파올로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안젤은 떠날 결심을 한다. 그렇게 안젤이 사라지면 파올로가 리카르도와 잘 살리라 기대했는데... 결국 그들의 운명은 모두 파국을 맞았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파올로에게 스톡홀름 증후군 어쩌구 하며 자기들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그 누구도 파올로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안젤이 파올로와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안젤은 살인자요, 파올로는 희생자일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파올로가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고 다시 예전의 그 집에서 새 삶을 꾸려나간다는 점이다. 루이스도 안젤과의 생활을 그리워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판매한 목재가 결국은 사형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은 리카르도나, 자신이 그 단두대에 희생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아주 성실하게 일한 안젤의 운명이 참 얄궂다. 그래도 루이스가 있어서 파올로의 섬세한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소설이라는 것도 잊은 채 혹 사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그런데 나타샤가 부모의 이혼으로 가정의 따스함이나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납치범과 8년을 살았듯 파올로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안젤의 보호와 사랑을 받았다는 점을 비교해 본다면 충분히 현실에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타샤의 상황과 상당히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시종일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긴박한 서사임에도 상황이나 심리묘사가 충분히 들어있고, 읽고 나서도 여운이 많이 남는 그런 책이다. 심리묘사나 상황묘사가 많아지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데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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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키즈 창비청소년문학 9
카제노 우시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창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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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을 읽으면 저자 소개부터 시작해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모든 글을 꼼꼼하게 읽는 편이다. 일본의 청소년 소설 작가는 잘 모르니 설렁설렁 읽으며 책장을 넘기는데 앗, 서문이 없다. 다짜고짜 본문이 시작된다. 경쾌한 리듬감을 느끼며 요꼬야마의 시선을 따라가기 바쁘다. 하긴 사전 정보 하나 없이 무작정 읽기 시작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문제는 처음에 나오는 용어들이 도통 모르는 단어라는 것이다. 취주부는 대충 짐작이 가고 퍼커션은 뭘까. 근데 계속 요꼬야마와 노조미의 이야기는 줄곧 퍼커션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럴 때는 별 수 없다. 그냥 아는 척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그런데 집에 온 요꼬야마를 따라가다 보면 엄마가 아파서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가녀린데가 몸도 약해서 누워 있는 그런 엄마. 그렇다면 요꼬야마는 참 힘든 삶을 살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대개 청소년 소설에서 집안 환경이 그렇다면 주인공은 엇나가니까. 그러나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런 것은 진짜 선입견이었음을 인정해야한다. 요꼬야마는 비록 아빠가 술을 많이 먹거나 도박에 빠질 때 빼고는 그래도 행복한 보통의 가정이다. 엄마는 단지 약한 데 임신을 해서 조심해야 하는 것 뿐이다.

여하튼 노조미의 권유로 취주부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기로 하고 서로 소개를 하면서 칸노 나나오를 만난다. 실은 이때부터 요꼬야마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칸노 나나오에게 은근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취주부에서 단장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여러 역할을 하고 공부도 잘하고 잘 생기고 어느 정도는 삐딱한 시선을 갖고 있는 나나오. 요꼬야마도 말로는 겸손과는 거리다 멀다는 둥 계속 딴지를 걸지만 그건 그만큼 끌린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게 취주부에서 퍼커션을 맡기로 했다는데... 여기서 요꼬야마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린다. 물론 독자인 나도 궁금했던 것을. "저기... 퍼커션이 뭐야?" 와, 이 한 마디로 인해 그 다음엔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퍼커션이 뭐냐고? 그건 타악기란다. 나만 모르고 있던 건가.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을 뒤로 넘어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요꼬야마 에이지의 대화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쿡쿡 대다가 웃음보를 터트리고 만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꼬야마도 칸노 나나오도. 어쩔 수 없이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요꼬야마는 무책임한 아버지와 유약한 엄마,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병을 앓게 된 동생 때문에 자신도 힘든데 내색 한번 못한다. 아니, 위로받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데 그럴 엄두도 못낸다. 자신이 모두를 책임져야 하니까. 그리고 칸노 나나오는 외적으로는 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실은 입양되어 엄마의 정을 못 느끼고 자랐다. 무엇보다 정을 주지 않는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는 나나오의 말을 읽으며 괜히 가슴이 찡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더욱 나나오가 괜찮은 녀석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나나오는 보통의 사람들이 택하는 길이 아닌 진짜 자신이 원하는 길을 택해서 미국으로 떠나고 요꼬야마는 새로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새로 밴드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간단하게 이렇게 둘은 각자의 길로 잘 갔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그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둘의 우정과 음악에 대한 열정 뿐만 아니라 요꼬야마가 자신을 드러내고 힘들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건강한 청소년으로 돌아간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싶다. 나나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괴로움을 친구에게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드디어 과거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상냥하게 변했다고는 볼 수 없다. 대신 그것을 바라보는 요꼬야마의 마음이 변한 것이겠지. 일본에서는 이 책이 출판되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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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나무 카르페디엠 16
카롤린 필립스 지음, 전은경 옮김 / 양철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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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면이 바다에다 애초부터 국경은 넘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자란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여러 생각이 든다. 사실 어렸을 때는 국경을 넘어간다(걸어서)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다른 나라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던가 배를 타야지, 걸어서 간다는 것은 아예 가능성에 넣지도 않았다. 지금도 가끔 아이들에게 유럽의 예를 들며 옆에 있는 다른 나라로 버스 타고 출근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면 무척 신기해한다. 이게 바로 지리적 환경에 따른 사고과정의 결과일 게다. 애초부터 우리는 위로 국경이 있지만 그건 절대로 다가서면 안되는 것으로 못 박아 놓았으니까. 사실 이 책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런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주위 여건에 따라 사람의 사고가 한정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이 멕시코와의 국경에 시멘트 장벽을 설치한 게 언제더라. 바다 쪽으로 사람들이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회색 장벽을 둘러치고 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후로는 거기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까맣게 잊고 지냈다. 하긴 지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만 해도 벅찬데 나와 상관없는 일까지 모두 신경쓸 수는 없는 법이지. 치사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자기변명을 해본다.

이건 과연 소설일까, 다큐멘터리일까 의아할 정도로 현실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겨우 열두 살 밖에 안된 루카가 혼자 미국으로 가는 과정은 영화 <크로싱>을 생각나게 한다. 오늘 아침에도 북한의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자 아이들이 <크로싱>과 똑같다며 진짜 현실이 저럴까라는 의구심을 품는다. 말로는 그것보다 더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정말 그럴까라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무렴, 설마... 어른인 나도 이러니 아이들은 오죽할까.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도착해서 엄마를 만난 부분까지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쉽게 성공했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중간 부분 밖에 안 된다. 분명 해피엔딩이라면 이 즈음이면 마지막 부분이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루카의 앞날은 우여곡절이 많다는 얘기 아닌가. 역시나 루카의 앞날은 순탄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지내며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지만 언제나 불안에 떤다. 혹시 누가 불법 체류자라고 신고하지 않을까, 언제 경찰이 찾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사는 삶. 어쩌면 가장 두려운 적은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 아닐까.

읽는 동안 독자는 루카의 입장이 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이기적이고 좀 더 관용을 베풀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시종일관 할 것이다. 특히 조지의 행동을 보면서... 하지만 루카는, 아니 독자는 베로니카의 아버지가 조지와 똑같은 말로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을 보며 결국 인간은 모두 똑같구나를 깨닫는다. 어느 상태에서나 무슨 일에나 양면성이 있다. 한 쪽은 완전히 나쁘고 한 쪽은 모두 좋은 경우가 얼마나 될까. 다만 합리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접점을 찾고자 노력하는 게 최선의 길일 것이다. 불법 체류자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이나 미국인들을 바라보는 이민자들의 시각은 모두 맞는 말임과 동시에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다. 어디 이런 문제들이 미국과 멕시코 만의 문제겠나. 현재 우리나라도 큰 문제거리로 대두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이 책이 단순히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이 좀 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현실을 직시해서 그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갈 때 쯤에는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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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수탉 분투기 마음이 자라는 나무 16
창신강 지음, 전수정 옮김, 션위엔위엔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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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서 부모님이 닭을 조금 키운다. 그야말로 토종닭. 처음에는 그냥 두 분이 심심풀이 삼아 몇 마리 길렀는데 봄이면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태어나 조금씩 늘었다. 지금은 계란을 사지 않아도 충분히 먹을 정도가 된다. 가끔 주위 사람들이 토종닭을 사러 오곤 하는데 어떤 때는 밖에 돌아다니는 닭을 알아서 잡아가라고 한다. 몇 년을 키웠어도 우리가 먹기 위해 잡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차마... 그리고 그걸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긴 하다.

가끔 수탉이 많아지면 싸움이 잦아서 엄마가 '처리'하신다. 어떤 수탉은 다혈질인지 사람을 보고 쫓아오기도 해서 아이들이 무서워 밖에 못 나간 경우도 있었다. 엄마 말씀이 닭들도 영역이 있어서 한 수탉이 다른 수탉의 암탉 주변에 가면 서로 싸우고 자기 식구를 엄청 챙긴단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동안 엄마가 하나씩 들려주셨던 닭에 대한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의미있게 다가올 수밖에.

그야말로 살아남는 것이 최대의 목표인 닭들의 생활을 닭의 눈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주인공 수탉은 단지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도 찾아가고 제대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삶에 진작부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이 암탉인줄 알고 그렇게 순응하며 살려고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수탉임을 자각하고 토종닭의 본능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일인자가 되기 위해 싸우는 본능만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무릇 모든 지도자가 그렇듯이 남의 아픔을 볼 줄 알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진정한 일인자가 되고자 노력한다. 아니 어찌보면 그런 일인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기 보다 그런 행동을 하다 보니 저절로 일인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닭들의 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닭이 아니라 사람의 사회를 묘사해 놓은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암투가 있고 권력 다툼이 있으며 강자 앞에서는 강하고 약자 앞에서는 강한 전형적인 비겁한 모습도 있다. 그리고 그처럼 비겁한 사람도 결국 자신의 무리를 떠나서는 그것을 그리워한다는 것조차 똑같다. 결국 수탉은 그 자리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고-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영혼으로 변해 가족을 따라간다.

중국판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다만 여기서는 주인공이 수탉으로 치환된 것일 뿐. 또한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라는 책도 생각이 났다. 수탉의 눈으로 사람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보면 독자는 확실히 수탉의 입장이 되어 읽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나 간혹 과연 지금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게 수탉인지 사람인지 모호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가 완전히 수탉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지 않고 가끔 인간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닭을 감정이 있는 존재로 볼 것 같은데 지금 저녁 메뉴로 삼계탕을 준비하고 있다. 나도 참 어지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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