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포함해서 연말에 며칠 쉬는 동안, 몇 편의 영화를 보았다. 시간은 부족하고, 보아야 할 영화는 많았기에 가이드를 따르기로 했다. 가이드는 <씨네21>에서 선정한 '올해의 영화'(이제는 '작년의 영화')들. 리스트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영화라는 것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아주 은밀한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적어도 올해 나보다 영화를 훨씬 많이 본 평론가들이 선정한 리스트이므로 믿어보기로 했다.


그 중의 한 영화 신동석의 <살아남은 아이>. 영화를 보고 감독의 인터뷰 등을 읽어보니 감독은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어느 한 사건의 짙은 그림자를 느낄 수밖에 없다. 세월호 사건 말이다. 비어 있는 상태로, 아니 비어 있는 대신 다른 무엇인가가 채워져 있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아이의 방, 물에 빠져 죽은 아이, 그리고 빠졌지만 살아남은 아이, 보상금을 이야기하거나, 이제는 그만하자는 어떤 이들, 그러나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내가 세월호 사건의 짙은 그림자를 느낀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어떤 것이 바로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


신동석 감독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물론 가장 쉬운 길은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가 죽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을 보여주는 것. 그러나 그것은 당연하게도 영화적인 마술이고, 부려서는 안되는 마술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것을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고, 더 나아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아마도 영화는 이른바 '진실'을 이야기하는 기현(성유빈)의 진술을 그렇게 잘 들리지 않게 웅얼대는 톤으로 제시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불명확한 진술을 믿어야 할까? (영화 속에서 사실 기현의 말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아니, 나는 믿고 안믿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가 어떤 공백에 놓여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도 영화라는 것을 보는 한 우리는 결코 완전한 공백에 놓여질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가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도 수많은 말들 속에서도 어떤 부분은 여전히 그렇게 공백 속에 놓여져 있다. 그 공백 속에서 아이들 혹은 가족들을 놓아주어야 했던 이들에게 이 사회는 무엇이라고 답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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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1-0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그 맥거핀님인 거야요@0@! 선물처럼 반갑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맥거핀 2019-01-02 16:59   좋아요 1 | URL
저에게는 이 댓글이 선물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그나저나 벌써 2019년이라니...

2019-01-03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4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9-01-09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지났지만 맥거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직 음력으로는 새해가 아니니, 아주 늦었다고 말할 수도 없겠죠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는 감기 심하다고 해도 잘 걸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감기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많이 아팠던 건 이틀쯤이지만, 제가 어디 아파도 책은 읽는데 그때는 앉아있기도 힘들만큼 아팠어요 그런 게 며칠 갔어요 기침은 한주 넘게 하고... 기침을 오래해서 안 낫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기침하지만 심하게 할 때보다는 괜찮아요 지난달에 기분이 아주 안 좋아서 감기에 걸린 게 아닌가 싶어요

몸뿐 아니라 마음도 잘 챙기세요


희선

맥거핀 2019-01-09 10:58   좋아요 1 | URL
네 희선님 저도 인사가 늦었습니다. 좋은 일 많이 있는 새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프시지도 말구요. 사람이 아프다보면 우울해지고 부정적인 생각 하게되고 그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최근에 감기가 심하지는 않는데 꾸준히(?) 낫지가 않네요. 희선님은 그러는 일 없이 평안한 날들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좋은 책 많이 보시고 좋은 생각도 많이 하시고, 좋은 글도 많이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https://seojae.com/web/cine21/cine21-546.htm

 

영화 <스윙걸즈>를 다룬 정성일의 10년도 더 된 이 글에서 몇 가지를 적당히 빼거나 넣으면 드라마 <땐뽀걸즈>의 평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땐뽀걸즈>는 <스윙걸즈>와 '걸즈'라는 공통점을 빼면 사실 그다지 비슷하지 않고, 정성일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에서 이 드라마는 꽤 벗어나 있기도 하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에는 동의할 수 있는데, 교복이라는 기호 혹은 안전장치를 끌어들임으로서 이러한 청춘영화나 청춘드라마는 이른바 (정성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가 말을 해야 하지만 멈추어도 괜찮은 장르'가 되었다는 점이고,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그런 것을 즐기는 핵심이라는 점이다.

 

다만, 이 드라마는 기존의 청춘드라마와 다르게 미세하게 더 나아가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제대로 한다면 소위 말하는 '모종의 성취'겠지만, 여전히 그 모종의 성취는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므로(더더구나 공영방송의 드라마라면) 어설픈 '반쪽짜리 성취'가 되고 만다.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스윙키즈>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종의 성취로 나아가려는 순간 무엇이 작동했는지 약간 이상한게 끼얹어지고 그만 반쪽자리 성취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 반쪽짜리 성취마저도 불편하다고들 하니, 모종의 성취가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

 

어쩌면 단지 스윙걸즈-땐뽀걸즈-스윙키즈의 이상한 끝말잇기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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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8-12-2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글 오랜만에 읽네요.

스윙키즈는 오래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집에 티비가 없어 저 드라마를 볼 수 없으니,
어떤 드라마일지 살짝 궁금하네요.

맥거핀 2018-12-28 10:44   좋아요 0 | URL
아..감은빛님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뵈니까 반갑네요.^^

드라마 종영했어요. 저는 나름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종영도 빨리하고
시청률도 별로 안나와서 아쉽더라구요.

cyrus 2018-12-2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이 너무 뜸해서 일 년에 글 한 두 편 쓰는 컨셉으로 활동하는 줄 알겠어요.. ㅎㅎㅎㅎ

맥거핀 2019-01-01 16:48   좋아요 0 | URL
cyrus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컨셉은 아니고..이제 글쓰기에 미련은 버리고 여유 생길 때 조금씩이라도 끄적거릴려구요.^^
 

 

 

비교적 최근에 보게 된(이라고 밖에 쓸 수 없는 게 슬프다) 두 편의 영화는 아주 묘하게도 비슷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놓고 경쟁한 이창동의 <버닝>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긴장. 혹은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내 안에서) 빚어내는 충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 <어느 가족>에서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그렇게나 믿고 있는, 혹은 제대로 본다고 생각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 혹은 더 나아가 삶이란 것이 무엇인가요? 인물을 마주 대하게 만드는 후반부의 몇몇 신들은 (역설적으로 카메라의 존재를 드러내보이면서) 보는 이들에게 카메라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라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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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3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

영화를 잘 보지 않지만, 맥거핀님의 영화리뷰를 자주 읽어보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맥거핀님의 영화리뷰의 매력은 ‘진지한 분석‘이에요. 8년 전, 영화리뷰가 활성화된 시절에 맥거핀님처럼 영화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너무 뜸하신 거 아니에요? ‘이달의 영화리뷰‘가 폐지된 이후로는 수준 있는 영화리뷰를 만나기가 어려워졌어요. 특히 맥거핀님의 빈 자리가 너무 큽니다.

맥거핀 2018-08-01 15:24   좋아요 0 | URL
cyrus님도 잘 지내시나요? 이렇게 오랜만에 흔적 남겼는데도,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cyrus님이 책에 집중하셔서 그렇지, 영화 리뷰도 마음먹고 쓰시면 잘 쓰실텐데요. 저는 사실 요새 영화를 많이 못봐서 쓰기가 힘들어요. 아니, 뭐 출퇴근 하면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뭔가를 작은 화면으로 보기는 하는데, 그거는 또 ‘영화‘라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내용은 영화지만, 작게 끊어서 보는 것들은 또 영화라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결국 큰 화면으로 2시간 정도 ‘견디면서‘ 보는 것이 영화가 아닐까요?

저는 ‘수준있는 영화리뷰‘는 못 쓰지만, 예전에는 그런 영화리뷰를 쓰시는 분들이 조금 계시기는 했지요. 제가 알라딘에 이끌려 들어온 것도 그런 분들의 리뷰를 훔쳐보다가 그렇게 된 건데...그래도 책에서는 알라딘에 아직 좋은 리뷰 쓰시는 분들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cyrus님도 그 중에 한 분이구요. 저도 책을 살 때는 아직 알라딘의 리뷰를 많이 참고하고는 있답니다.^^

2018-08-04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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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소설들에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을 곱씹는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씬짜오, 씬짜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쇼코의 미소>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먼 곳에서 온 노래>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한지와 영주> 별 다른 문장들은 아니다. 어떤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담고 있지도 않고,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과거의 일임을 알리는,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님을, 혹은 그러하지 않음을 알리는 문장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문장들을 읽을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문장 그 자체가 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그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 문장은 그 할아버지가 적어도 지금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 문장을 뒤늦게 술회하는 '나'가 그것이 그렇게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 '생각'만 할 필요는 없을테니. 아니면 다른 문장.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이 문장은 그저 이 방이 현재는 미진의 방이 아님을, 미진이라 불리는 누군가는 적어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그 혹은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최은영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구조로만 봤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설들이 어떤 회고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쇼코의 미소>의 세 번째 문장.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말했다,가 아니라 말했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좋은 문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문장은 쇼코가 그렇게 말한 시점이 단순한 (소설적인) 과거가 아닌 그 이전 시점의 과거임을, 그렇게 회상하는 '나'는 현재 다른 시점에 와 있으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과거와는 어느 정도 단절된 시점에 서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즉 <쇼코의 미소>는 그 모든 사건을 지나온 '나'(소유)가 전체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들을 회고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쇼코가 해변에 선 느낌을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쇼코와 소유가 처음 만난 어느 시점일 것이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것을 회고하는 나는, 쇼코가 없는, 혹은 쇼코와 감정적으로 단절된 채로 지금 어느 순간에 그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쇼코의 미소> 뿐만이 아니다. <씬짜오, 씬짜오>의 기본적인 구조도 독일에서의 호 아저씨네와의 일들을 회고하고 기록하는 형식이며,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액자가 소설의 앞 뒤에 덧붙여져 있으며, <한지와 영주>도 노트를 전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나'가 소설의 앞 뒤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액자들이 왜 필요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액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란, 모든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것을 여기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가상의 누군가(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라도)는 우리가 굳이 그 존재를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고 있을 것이므로. 즉 회고적인 의미에서의 액자, 그러니까 자, 이제 내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줄께, 라는 식의 액자는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어떤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흔히 이야기되는 후일담 문학에서, 사적 체험의 강조를 위해, 혹은 과거의 패배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현재의 상처들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했던 액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최은영 소설에서의 회고적인 액자는 조금 달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누군가가 겪었던 일들의 의미 혹은 과거의 누군가라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현재의 '나'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겪었던 일들, 그들이 받은 상처들. 그들이 겪었던 사적인, 그러나 단지 사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모든 일들은, 현재 이 이야기를 덤덤하게 술회하는, 혹은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노력하는 '나'와 그 '나'의 자리에 서서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어떤 모종의 회한을 남긴다.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할아버지의 어떤 것. 왜 그것을 '나'는 그가 존재하고 있었을 그 때는 알지 못했을까. 왜 모든 회한은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만 남는 것일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것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 과거를 어떻게든 회고하는 '나'라는 존재가 소설을 통해 가로놓여져 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어떤 비슷한 형태의 화자들이 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엄마의 그런 반응이 놀랍고 한편으로 무서워서 그 일에 대해서 더 듣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이야기를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화자 '나'.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었다."라고 술회하는 <쇼코의 미소>의 '나'. 아니면,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던 <미카엘라>의 '그녀'. 그러나 회고를 하는 이 시점에서의 그(녀)들은 과거의 그(녀)들하고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지금 이 시점에 쓸 수는 없을테니까.

 

다시 말해서 최은영의 소설들이 과거의 후일담 문학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즉 과거의 일명 '후일담 문학'들의 현재에는 모종의 패배 의식과 쓸쓸함이 감돌았다면, 최은영 소설들의 현재에는 그 과거를 품에 껴안고 나아가려는 묘한 의지가 감돈다. 예를 들어 <쇼코의 미소>에서의 마지막.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아니면 <먼 곳에서 온 노래>의 마지막. "그건 율랴와 나의 첫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 쇼코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보는 나, 혹은 율랴와의 첫번째 여행을 떠나는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그 모든 일들을 겪어내고 그것을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나'다. 최은영의 소설들은 거의 매 순간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딛고 현재로 혹은 가까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의 '나'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씬짜오, 씬짜오>에서 응웬 아줌마에게 연락을 해 몇 번이나 다른 말을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씬짜오, 씬짜오를 반복하는 모습일 수 있고, 지민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어떻게든 써서 보내는 말자의 모습일 수 있다. 

 

과거를 회고하는 사람에게는 그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이야기라는 형태로 만들어서 나와 분리시켜 두고 싶은 것. 그러나 내 속의 분리하고 싶은 의지를 만들어낸 무엇인가도, 결국 그 '과거'가 낳은 무엇일지 모른다. 그것은 이 책의 표지를 닮았다. 단절하고 싶은 과거에 그 누군가는 고개를 돌린 채지만, 여전히 그 귀만큼은 우리를 향해 열려져 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   

 

아침 8시, 지하철 1호선에서 2호선으로 연결되는 신도림 역에서 곧 들어올 잠실방향 열차를 기다리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애써 자리를 잡고, 작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어 이 책의 몇 개의 문장들을 보았다. 아니 대부분의 날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스마트폰을 열어 지난밤 사이 올라온 기사를 보거나,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출입문 닫겠습니다'라는 저 기계음이 다섯번 연속으로 울리다 못해, 급기야는 '출입문 닫을테니, 그만좀 타라구요!!'라는 바뀐 기계음으로 바뀐 채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혹은 나빠지러 가고 있다,고.

 

어떤 책을 읽으면 무엇인가가 급격히 바뀐다거나, 어떤 영화를 보면 인생의 무엇인가가 달라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어떤 책이나 영화들은 아주 조금, 그러니까, 0.00000001% 정도는 나아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출근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것이 물리적인 피곤함을 가중시켜서가 아니라, 사실 생각의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할수록 점점 출근 이후 생각해야 할 것들을 밀어내게 되고, 급기야는 출근 자체를 밀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가끔 어쩔 수 없이 책들을 읽어야만 하는 때가 있다.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주 조금씩 나를 끌어당겨 지탱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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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0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1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3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6 0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 대한 스포 있음)

 

  

   

연휴 기간 2편의 영화를 다시 보았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두 영화 모두 극장에서 개봉할 때 보았지만, 한 편은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다시 보았고, 한 편은 TV에서 하길래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극장에서 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2편의 영화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한편으로 송강호라는 출중한 배우가 두 영화 모두 극의 중심에서 거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두 명의 (이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약간의 허구가 가미된 실존 인물들, 그 인물들은 송강호라는 육신을 입고, 거의 다시 스크린에서 걸어나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두 영화가 '상당히 닮았다'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송강호라는 배우의 절대적인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가장 크게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영화가 끝난 후 남아있는 어떤 묘한 '석연치 않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 영화가 그리고 있는 스크린 안의 두 인물, 그러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과 <변호인>의 송우석이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두 영화는 초반부, 코믹한 터치로 두 인물의 소박한 속물성, 혹은 속물성 속에 드러나는 인간미 같은 것들을 그려낸다. 그것은 가벼운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그들을 영화의 마지막까지 움직이게 하는 동력 같은 것들이 들어있으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에게 그것이 가족, 특히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변호인>의 송우석에게 그것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끝까지 무엇인가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다. 중반부의 큰 사건, 즉 <택시운전사>에서는 광주에서의 일들, <변호인>에서는 '부림 사건'이 그 인물들을 크게 변화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음이나 의지와 같은 것들이다.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은 광주로 돌아가기 위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딸과 전화통화를 하며, <변호인>의 송우석은 계속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불어 넣는다. 

 

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그 사건들에서 살짝 비껴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두 영화의 애초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말하기 위해 김사복이라는 인물을 빌려왔다면, <변호인>은 송우석(노무현)을 말하기 위해 '부림 사건'이라는 사건을 빌려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 사건에서 두 인물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건에 비껴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사복은 택시 운전사, 그것도 광주 택시 운전사가 아닌 서울 택시 운전사이고, 송우석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선 단골국밥집 아들을 변호하는 변호사이다. 즉 어쩌면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라 한 걸음 비껴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엇인가, 그러니까 마음이나 의지 같은 것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고약한 질문이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그들이 지켜낼 수 있었던 무엇인가, 그리고 누군가가 지켜낼 수 없었던 무엇인가는 선명해진다. <택시운전사>에서 김사복과 독일 기자를 끝까지 도와주는 광주 택시 운전사 태술(유해진)이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김사복이 딸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적었을까, 아니면 <변호인>에서 송우석이 고문받는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의 위치에 서 있었다면 그의 의지는 산산이 부서졌을까, 아닐까. 

 

영화는 물론 고약한 질문을 할 틈 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 조용히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이 부여하고 있는 그 역할로서의 자세. 그렇다. 여기 두 영화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택시기사나 변호사가 아닌,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단순히 직업명 그 이상의 무엇을 이 제목은 함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각각의 영화가 키포인트로 내세우는 장면, 혹은 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가면서 딸에게 하는 대사, 손님을 두고왔다,고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송우석이 국가는 국민이라고 재판정에서 일갈하는 장면. 즉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 장면들은 이들에게 표면적으로는 직업인의 윤리에 가까운 것이다. 김사복은 광주에서 서울로 손님을 데려다주어야 하는 택시운전사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만 하며, 송우석은 변호인으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의뢰인이 무죄라는 것을 입증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국가가 국민이 아닌, 단지 쿠데타권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갈한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송우석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김사복에게는 더 가혹한 것 같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간 것은 단지 택시운전사의 직업윤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데 직업윤리 이외의 어떤 것, 이라고만 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않다. 그렇다면 물어볼 필요는 있겠다. 김사복은 왜 광주로 돌아갔을까. (사실 마찬가지로 <변호인>의 송우석에게도 물어볼 필요는 있다. 그는 왜 진우를 변호하기로 결심했을까. 사무장의 말대로 앞에 놓인 편한 삶을 스스로 걷어차면서 말이다.) 독일기자를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쳐 나왔다는 죄책감? 사람들, 특히 대학생 재식(류준열)을 버려두고 나왔다는 부채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재식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돌아간 직후이다.) 어떻게든 바깥에 제대로된 소식을 알려야한다는 사명감? 아니면 흔히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니면 이 모든 것의 총체? 이 중 어떤 것이 답이 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화 속에서 묘하게 눙쳐지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김사복이 운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제3한강교'를 따라부르다가 울면서 핸들을 꺾는다. 혹은 송우석이 부르르 떨면서 국가권력의 하수인에게 소리친다. 국가는 국민입니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각각 기억에 남을 한 장면, 혹은 송강호의 두 개의 명연기. 아니 나는 냉소적으로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송강호가 복잡한 얼굴로 울 때, 나도 곧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고, 송강호가 그렇게 법정에서 소리칠 때 나도 같이 소리를 지르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사실 모든 영화는 고도의 속임수라는 것. 송강호 정도 되는 마법사가 나를 속인다면 나는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어떤 석연치않음이 여기에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 장면들은 이 영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지만, 중요한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눙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예를 들어 김사복이 기어코 핸들을 꺾는 순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왜 핸들을 꺾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잡한 답이 아니라, 그가 그 순간 핸들을 꺾어 돌아갔다는 (허구적) 사실, 송강호가 그 순간 보여준 명연기이다. 

 

그 명연기를 보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복잡한, 사실은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는 것은 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혹은 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쩌면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답이 없는 복잡한 질문을 생각해보는 것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말할 수 있는 다른 케이스. (뭐 여러가지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영화 <택시운전사>와 같은 사건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광주를 말하고 있지만, 광주 그 이상을 궁극적으로는 말하고자 하며, 그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겹겹이 쌓인 물음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혹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숭고해질 수 있는가, 혹은 이렇게 숭고해질수도, 잔인해질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숭고한 인간과 잔인한 인간은 분리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가,라는 등의 질문들. 그것은 분명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해보고 답을 찾아보려는 그 자세는 중요하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을 생각해보는 그 인간을 어쩌면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택시운전사>는, 혹은 영화 <변호인>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틈을 주지 않는다. 겨우 질문을 했다하더라도, 답을 찾을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영화는 조용히 작은 승리로 나아간다. 그 작은 승리, 혹은 불완전한 승리는 묘하게도 직업인의 윤리와 맞닿아 있다. 택시운전사는 결국 손님을 태우고 나와 정해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변호인은 완전한 무죄는 아니지만, 불완전한 승리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그들에게 개인적인 에필로그까지 기꺼이 부여해준다. 그것은 (그가 아주 조금이라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는) 발전된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 따뜻한 택시운전사로 살고 있는 모습이거나, 동료들에게 변호사 취급도 못받던 송우석이 변호사 99명의 변호를 받는 모습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작은 승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작은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그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들과 인물들을 분리하지 않은 채, 인간 존재 일반에 대한 어떤 물음들을 할 틈은 영화는 끝내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은 급격하게 주인공 개인적인 차원으로 재빨리 자리매김되며, 관객의 빈 마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뿐이다.

 

그것이 최근의 영화들, 특히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취하는 전략은 아닐까. 사건보다는 인물을 내세우는 것. 그 인물을 관객들로 하여금 재빨리 동일시하게 만든 다음, 그들에게 '불완전한 승리', 혹은 '작은 승리'를 부여하는 것. (물론 관객은 승리를 더 좋아하므로, 영화의 결말은 매우 불완전할지언정 어떻게든 승리의 구조가 된다. 어떤 것을 승리의 지점으로 두는가의 차이만 있을뿐.) 그리고 우리는 인물의 편에 서서 그 '불완전한 승리'에 안도하면서 오로지 그 불완전한 승리밖에 거두지 못한, 혹은 설령 패배했을지라도 스크린 속에서 장렬하게 부활한 그들을 기억하겠노라고, 기억해서 언젠가는 '완전한 승리'를 얻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몇가지는 장담해도 좋다. 영화가 당신에게 주인공의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줄 때 영화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특히 송강호 같은 배우가 스크린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면 말이다.) 그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주려고 엄청나게 애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현실에서는 애쓰는 누군가, 스크린 안에 숨겨진 누군가는 없다는 것. 그 때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질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신'밖에는 없다는 것.  

 

    

 

덧.  

영화관에서 나는 이 두 편의 영화를 분명히 좋게 보았다. 그것을 감흥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런데 두 번째 볼 때에는 그런 감흥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 급격한 감흥과 급격한 무감함은 무엇으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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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0-09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고 이렇게 글을 보니 반갑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다니... 제가 생각한 건 좀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좋게 흐르고 좋아 보여도 꼭 그것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을 때도 있더군요 그게 어떤 거였는지 잊어버리고 그런 느낌만 남아있습니다 그건 잘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고, 이긴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하는 생각일지도 모르죠 이런 생각은 책을 볼 때도 하는군요

책은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괜찮지만 영화는 그러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생각할 틈을 주는 영화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영화도 흘러가는 대로 보여주는 것만 보기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좋겠지요


희선

맥거핀 2017-10-10 23:32   좋아요 3 | URL
네. 저도 희선님 댓글을 보니 좋네요.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 영화를 볼 때는 거의 아무 생각없이, 연기에 감탄하거나, 저게 말이 되나..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봐요. 특히 요즘에는요. 사실 위의 영화들도 본문에 썼듯이 ‘두 번째‘ 보지 않았다면 이런 글을 남길 생각을 안했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뭐랄까요. 뭔가 찌리릿 전기가 오는 때가 있어요. 살짝 소름이 돋는달까. 아니면 반대로 위에 영화처럼 뭔가 꺼림칙한 무엇인가가 남을 때도 있구요. 그럴 때 그게 뭐일까, 뭐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를 다 본 후 천천히요. 가끔 영화를 보고 나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요. 아무리 말도 안되는 생각 같은 거라도..그게 결국에는 아무 생각도 안하게 하는 영화보다는 좋은 것 같습니다.

요새 글도 댓글도 뜸하지요? 희선님 이렇게 바로 찾아와서 읽어주시는데..죄송하네요. 좋은 날들 보내세요. 아직 가을이 그래도 조금은 남은 것 같으니..

2017-10-09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0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10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맥거핀님의 글을 보게 되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 알라딘 서재에 맥거핀님처럼 정성 있게 영화 리뷰를 쓰는 분들을 만나기 어려워졌어요.

맥거핀 2017-10-10 23:38   좋아요 0 | URL
정성 있는 영화글 cyrus님이 쓰시면 되죠.^^ 뭐 하긴 이렇게 얘기 안해도 정성있게 이런저런 글 쓰실 분이라는 걸 알지만요.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알라딘 들러서 반가운 아이디들 보니까 좋네요. cyrus님도 특히 그렇구요. 좋은 날들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7-10-17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