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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물론 뭔가를 공부하고 싶어한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고등학생이 그렇듯 사회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당연하게도 지금도 잘 모른다.) 처음에 가고 싶었던 과는 신문방송학과였는데, 그건 왠지 더 자유분방한 학생들이 가는 과라고 생각했고, 가장 무엇보다도 점수가 모잘랐다. 그래서 사회학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문학 쪽은 원래 잘하는 편이 못되었고, 사학과 같은 쪽은 재미있어 보이나 취직이 잘 안된다 그러고, 심리학 쪽은 취향이 아니고, 경제학이나 경영학 쪽은 평소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뭐 사회학이 괜찮겠네,라고 생각했다. 뭐 잘 모르지만, 사회에 대해서 일단 전반적으로 어느정도 알게되지 않겠어, 나중에 신문방송학 쪽과도 연계해서 공부할 여지도 있을테고. 그래서 점수가 커트라인에 대롱대롱 걸렸지만, 호기있게 원서접수 첫째날 '사회학과'라고 쓰여진 원서를 들고 갔다. 그러나 이미 첫째날 사회학과는 경쟁률 1이 넘어 있었고, 나는 그만 자신감을 잃고는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사회학과'를 벅벅 지우고는 다른 과를 적어넣었다. 아직 1이 넘지 않은 조금은 더 만만해 보이는 과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마지막날 최종 확인한 경쟁률은 사회학과는 그 숫자에서 크게 변동이 없었고, 내가 지원한 과는 6대1이 넘어 있었다. 모두들 나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인생에서 사회학이 거론될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노 사회학자의 유머스러운 지적 모험의 여정이라니. 사회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될 뿐만이 아니라, 뭐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유머러스한 글쓰기에 대해서 배우게 되겠지.

 

그러나 이것도 오판이었다. 일단 이 책에 나온 것만 보자면 사회학이 어떤 학문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의 저자 피터 버거가 책 중간중간에 늘어놓는 사회학에 대한 단편적인 부분들이 있다. "사회학자는 어떤 종교적인 현상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 현상의 실증적인 양상은 탐구할 수 있다.(p.91)""사회학의 분석적인 부분은 당연히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제 적용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이런 부분만 놓고 보면 사회학의 임무는 어떤 사회현상이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을 가지지 않고, 그 현상만을 탐구하되, 다만 그에 대한 적용, 즉 그 사회현상을 이야기하는데는 인간주의적 관점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 '인간주의'라는 말이 가지는 허구성을 우리는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다. '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은 대체로 어느 특정의 관점을 정당화시키는 수사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모든 대선 후보들이 내미는 '인간 중심'이라는 슬로건 말이다.) 책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어보면 그는 그의 책 <현실의 사회적 구성>에 나오는 부분들과 구성주의의 영향에 대해 밝히며 자신은 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때의 시대정신이나 분위기, 실제로 일어난 경향을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음 집필의도를 봐줄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런 사회적 사실들은 우리의 바람과 무관하게 발견될 수 있는 확고한 현실성을 가진다.(p.126)" 즉, 사회학적으로 봤을 때는 중요한 것은 그의 본래의도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은 것처럼 보이는 그 사실 자체일 것이다.

 

물론 그가 사회학자로서 그런 의도(입장)와 사실의 문제를 구별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도 당연히 어떤 것에 대해 입장을 가지고(그것이 설혹 '인간적'이라는 모호한 입장이라도), 모든 사실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사회과학자는 두 개의 모자를 쓴다. 그는 특정 분석 규준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도덕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 두 모자는 상당히 다르다. 특정 진술을 할 때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서 정직하게 알려줘야 한다. (p.281)"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맞는 말은 본인은 잘 지키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잘 알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때로는 일부러 모자를 바꿔서 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성장의 신화(자본주의)'와 '혁명의 신화(사회주의)'를 모두 거부한다고 주장하였다가, 동아시아를 보고 나서는 그 생각을 바꿔 '성장의 신화'는 지지하되 '혁명의 신화'는 거부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달리 말해 성장의 신화는 대체로 경험적으로 타당한 약속을 제시한다. 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은 약속을 이행하는 법이 없다.(p.176)" 반박할 수도 있는 주장이나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질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이것이 동아시아 사회를 정말 면밀히 관찰한 후에 나온 지적인지, 또 하나 성장의 신화가 경험적으로 타당한 약속을 제시한다고 했는데, 이 '경험적으로'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만 그의 이런 주장이 과연 사회학자로서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지지하는 개인적 신념에 따른 정치적인 주장인 것일까,라는 것이 궁금할 뿐이다. 그는 이것을 사회학적인 연구로 인해 도달한 결론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가 가진 그간의 개인적 신념을 보면 그 개인적 신념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과연 어떤 현상에 대한 탐구로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설혹 그렇다고 해도, 책에 나온 논거들로는 이는 너무 재빠른 단정이 아닌가. (그가 책에서 사회학 입문 과정에서 암기한다고 말한 유명한 '토머스의 금언'이 떠오른다.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이 실재한다고 규정하면, 그 때문에 그 상황은 실재하게 된다.')

 

잘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는 어떤 오해인지도 모르겠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생각을 자세히 들어보고 싶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의 대부분은 그가 지은 저술을 짧게 요약하고,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과 자신의 관계와 그들의 간단한 약력을 늘어놓는 것으로 채워지고, 뭔가 생각이 좀 나온다 싶으면, 그가 재미있다고 주장하는 유머들 혹은 일화들로 모호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 유머들은 참 재미가 없다. 그는 심지어 유머에 관련한 책도 저술했으니 그 이유를 잘 알 것이다. 그에 따른다면, 우리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의 나이든 사회학자가 내뱉는 유머를 재미있어한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이 책은 피터 버거의 책으로 쓰는 긴 이력서 같다. 책을 통해서 그가 저술한 책의 목록들과 그가 여행한 나라들, 그의 동료 연구자들, 그리고 그의 대학 재직이력은 자세히 알게 되지만, 그것 뿐이다. 이력서는 말 그대로 저자의 이력을 말해줄 뿐, 그의 생각까지 말해 주지는 못한다. 즉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게 되지만, 사회학에 대해서는 알게 되는 것이 거의 없다. 물론 어떤 한 사람의 이력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대로 그것이 어떤 '지적 모험'이라면 더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지적 모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모험을 할 마음 같은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모험이란 무릇, 여기저기 깨질 각오를 하고 이곳저곳에 부딪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처음부터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디에 심하게 부딪힌 적도 없고, 그러므로 깨진 적도 없다. 물론 깨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입장이 욕먹을 것은 아니며 중도 보수라는 그의 입장이 비판을 받을 이유는 없다. (보수 반동이라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겠지만.) 다만 자신의 반대입장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계속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이것이 사회학에서의 올바른 태도라고, 사회학적 당의를 씌울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이 두 가지 관점, 그러니까 정치적인 관점과 사회학적인 관점을 시종일관 흩트려 놓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과 보스턴과 미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회학자로서 유럽과 중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그곳의 사태를 보고 있는 것이지, 그가 말한대로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 때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정말 아이러니한 점 중에 하나는 그가 사회학자이면서도 사회운동에 알레르기를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연 운동이나 페미니즘 혹은 대중집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애정을 보내는 자본주의라는 것도 어찌 보면 거대한 사회운동 중의 하나가 아닐까. 즉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회운동과 아닌 사회운동을 구분하여 그것에 애정어린 분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요이상으로 비판이 길어진 듯 하다. (날씨와 LG야구 때문이다.) 피터 버거는 자신의 책에 달린 서평을 꼼꼼이 들여다보는 편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가 어느 촌구석 인터넷서점에 달린 이 글까지 읽어볼 확률, 그리고 그것을 읽고 어떤 나이든 사회학자가 자신의 입장을 수정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하므로 조금 더 생산적인 얘기로 글을 끝내도록 하자. 사회학을 지망하고자 했으나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체육관 바닥에서 지망하는 과를 바꿔야 했던 사람, 그래서 사회학에 대해 뭔가 알고자 했던 사람, 혹은 최소한 뭔가 유머러스한 글쓰기에 대해 배우고자 했던 사람에게는 비추. 대신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미국에서 대학교수, 학자라는 지식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곳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 혹은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학자인 척하고 싶은 사람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보고서는 된다. 다만, 하나 주의할 점은 이 책은 진짜 학자가 되는 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진짜 학자가 될 수 있도록 생각하는 법 대신에 자신의 저술과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자신의 뛰어난 동료들과 자신의 훌륭한 박사과정 학생들을 독자들에게 최대한 거부감을 덜 느끼게 하며 나열하는 법 정도는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정도면 학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어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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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7-2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기다려주신 알라딘관계자분과 가연님께 감사드립니다.;; 발암야구 LG야구 때문에 생각보다 비판적인 글이 되었네요..(5회 역전당한 후 TV끄고 빡쳐서 쓴 글..;;)

아이리시스 2012-07-2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구나. 그럼 일반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유익하지 못한 책이네요. 사실 사회학자(라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가 사회학을 공부해야만 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원래 그 분야가 이것저것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 하고 관심 가져야 하고 그러니까.. 법대 나온 친구가 있는데 친구는 항상 공부를 잘했으니까 당연했거든요. 법대나 의대는..근데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막상 들어가보니까 난 법대말고 사회학과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고. 거기 더 관심이 많더라고.

맥거핀님도 사회학과..라니.. 제 인생의 최대 반전은 제가 이과반이어서 화학공학과에 갈 수도 있었다는 거예요, 푸핫 :) 당시엔 교차지원이란 게 있었고 저는 이과,문과 구분없이 막 지원했었어요. 내가 잘하는 거나 체질은 문과쪽이 맞는데 전 이과반에서 '글 잘쓰고 말 잘 하는 공대생'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ㅋ

LG는 맨날 지고있나봐요ㅋㅋㅋ

맥거핀 2012-07-26 02:20   좋아요 0 | URL
화학공학과라고 하시니, 뜬금없이 배수아씨가 생각이 나네요. (제가 알기로는 이대 화학과 나오신걸로..) 글잘쓰는 공대생 그거 괜찮겠네요. 영화 <은교>에서 서지우가 공대생이라는 게 일종의 컴플렉스처럼 작용을 한 것도 생각이 나구요.

근데 예나 지금이나 사실 뭘 공부하고 싶은지 거의 잘 모르는 상태에서 대학에 가지 않나요? 막상 공부해보면 이게 아니다 싶은 경우들도 참 많고..요새는 뭐 어렸을 때부터 많이 준비하고 간다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하긴 그래도 뭔가를 '공부하러' 간다는 것은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 같기도 하구요.

LG는요. 유명한 말이 있어요. DTD라고.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뜻인데, 즉 초반에 순위가 높아도 언젠가 꼴찌 근처에서 놀게 된다 이말이죠. 근데요. 요새는 한 게임 내에서도 DTD를 실천해요. 역전당하기 위해 초반에 점수를 따요.ㅠㅠ 늘 재미있는 야구를 하기는 합니다. 근데 문제는 우리편보다 상대편이 늘 더 재밌다는 게 문제죠.


Arch 2012-07-25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은건 제목과 카피에 낚여 실망한 흔하디 흔한 경우 중 하나예요. 머릿말은 재미있었는데 50쪽까지 읽다가 지쳐버렸어요. 혹시나해서 다른쪽도 읽어봤는데 역시나. 작가가 어떤 성향이고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맘도 안 생기더라구요. 이야기는 단편적이고 유머도 없었으며 말 그대로 '긴 이력서'에 그치고 말았어요.

사회학에 관심이 있다면 '상식의 배반'을 추천합니다.

맥거핀 2012-07-26 02:25   좋아요 0 | URL
아..Arch 님도 비슷한 감상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사실 리뷰들보면 이 책에 대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아요. 근데 저도 초반보고 조금 마음이 상해서, 뒷부분을 읽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어요. 때려치고 싶었지만, 머 그래도 명색이 서평단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데, 다는 읽어야 할 것 같아서..그러길래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셨는지..쩝.

말씀하신 책 읽어봐야 겠군요. 저랑 비슷한 감상이신데 추천을 해주시니 더 신뢰가 가네요.

Shining 2012-07-29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이 리뷰. 가독성도 높고 내용도 탄탄하고. 역시 맥거핀님의 글쓰기는...-_ㅠ

저는 신방과에요, 더 자유분방한 사람은 아니지만ㅎㅎ 별 생각없이 택했는데 다니는내내 이보다 더 (제게) 맞는 과를 찾았다는 느낌음 없어서 그럭저럭 잘 다녔던 것 같아요. 과 생활은 안했지만 학과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굉장히 재밌었어요.

그래서, 맥거핀님은 무슨 과였는지 물어도 됩니까?+_+ (저렇게 말씀하시니 궁금해서요!)

맥거핀 2012-07-30 22:41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신방과. 저는 아직도 신방과에 대해서는 똑똑하고 샤프하고, 반질반질한(?) 이미지가 있어요. 뭐 당연히 신방과에도 이런저런 사람이 있겠습니다만, 사람은 아무래도 자기가 하려다 못한 것에 대해서는 환상이 있는 법이긴 한 모양.

저는 교육학 전공입니다. 늘상 이렇게 말하곤 하죠. XX교육과 아니구요, 그냥 '교육학과'요. (뭐 그런건 현재의 저에 대해서 하나도 말해주지 못하니까요.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죠.^^)

꽃도둑 2012-07-3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글쓰기가 일대 전환을 맞으신 것 같은데요....
너무 까셨어요... 어디 두고보자 하고 쓰신 글 같아요.,ㅋㅋㅋ
(물론 원인제공은 날씨와 야구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회학의 또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정량적인 방법론에서 조금 비껴나 있어 한결 부드럽고 유연했거든요. 이런 사회학자도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데 맥거핀 님 리뷰 읽으면서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다시 책을 후벼파야 될 것 같은 우울한 예감이 드네요.,ㅡ.ㅡ

맥거핀 2012-07-30 22:47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꾸준히 까왔..(...)
글쎄요. 뭐 모든 게 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도 있으면 저런 시각도 있는 법이니까요.^^ 저는 사실 사회학에 대한 기초가 거의 없는 편이라 정량적인 방법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대충 통계적인 방법을 쓰는 것으로 이해하긴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그의 반대편에 있을 정성적인 방법이 궁금한데 그에 대해서도 책에 제대로 설명이 나온 것인지 좀 의문이에요. 저자의 시각이나 방법론을 좀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데 뭐 좀 얘기할라치면 일화나 유머로 빠지는 통에 저자의 생각이 뭔지 어렴풋해요. 단지 그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중도 보수주의자이다..정도? 사회학에 대해서 그가 추구하는 방법론이나 시각을 잘 알 수가 없어서 비판적이 된 부분도 있구요.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날씨와 야구 때문입니다.^^ 날씨가 진짜 덥기는 많이 덥죠? 여기도 심한데, 남녘은 더 심할 것 같기는 하네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사키 아타루(와 그가 논거로 삼는 학자들)에 따르면, 역사 이래로 서구에는 여섯 번의 혁명이 있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교황 혁명), 대혁명(루터의 종교개혁),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모 당의 대선후보가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은 애석하게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 중에 사사키 아타루가 주목하여 보는 것은 초반의 두 혁명,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인데, 이 두 혁명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혁명들과 달리 이 두 가지의 혁명은 읽기와 쓰기로서 이루어진 혁명이라는 점이다. 대혁명, 즉 흔히 말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일례로 이 책에서는 루터가 등장하기 전인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단 40종이었으나, 루터가 등장하자마자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르렀고, 그 중 418종은 루터와 그의 적대자에 의해 간행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설교도 설교지만 또 한편으로는 읽기와 쓰기의 방법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어떤가. 이 혁명은 역사상으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그리스도교 개혁 작업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법문을 번역하고, 편찬하고, 제본하고, 주석을 달고, 수정하고, 색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정보 혁명이자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르장드르는 이를 "문법학자의 혁명"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두 가지의 혁명 모두 새로운 법을 만드는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대혁명은 종래의 교회법을 부정하고, 모든 법을 '십계명'에 명시적으로 준거하게 하고, '양심'을 강조하는 등의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중세 해석자 혁명은 그 자체가 교회법을 고쳐쓰는 혁명으로, 이 혁명으로 인해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러한 읽기와 쓰기의 혁명,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새로운 법은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것인가.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이 새로운 법은 단지 교회 안의 내규만이 아니며, 형벌을 내리기 위한 법이 아니다. 이는 살기 위한 법이며,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번식을 위한 법이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말이 조금 불편하다면 이렇게 바꿔도 좋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자유롭게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혁명 이전의 법들은 그것을 보증하지 못했다. 그 교회법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즉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즉 번식을 한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서는 인류라는 존재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반(反)종말론의 개념이 출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라는 존재가 절멸을 피하게 해준 것, 종말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은 번식을 가능하게 해 준, 두 사건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었다. 그러니 그 두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종말론이라는 것은 언젠가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도 아마도 언젠가 있을 끝, 절멸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생물학자들이 말하는대로 한 생물 종의 평균수명은 400만 년이고, 인류가 출현한지는 고작 20만 년정도이므로 380만년 정도 이후에 인류가 어떤 사건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종말론은 그 종말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이 곧, 그러니까 내가 있을 때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이고,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엄청나게 유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치한 사고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같이 죽자는 식의 나치나 옴진리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류는 역사가 기록된 지난 이천 년 동안만 해도, 곧 종말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그야말로 밥먹듯이 해왔고, 그 예상은 매번 어김없이 빗나갔다.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는 이제 그만두자는 것이고, 종말이 오도록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버리자는 것이다. 왜? 유치하니까. 20만 년 대 400만 년. 그것은 다르게 보면, 4살 짜리 아이가, 80살 먹은 노인에게 이제 곧 같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사키 아타루 식의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드처럼 사사키 아타루는 나쁜 종말론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즉 모두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세계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해 매일 밤 우리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 다섯 밤 동안, 첫째 날 밤에는 문학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둘째 날 밤에는 루터의 대혁명에 대해, 셋째 날 밤에는 그 역시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던,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슬람 혁명)에 대해, 넷째 날 밤에는 중세 해석자 혁명에 대해, 다섯 째 날 밤에는 고작 20만 년 살고도 종말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간의 우스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럼 이 다섯 째 밤이 지났으므로 우리에게 종말이 올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라비안 나이트>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 결말은 그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니까.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해보면 그것은 '380만 년의 영원'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읽고 쓰는 것 뿐이다. 매번 반복되는 문학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하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아닌게 아니라 어떤 문예지들은 매 1년마다 같은 특집을 반복하는 것 같다. "매번 반복되는 것이지만, 문학이 위기에 빠져.."로 시작되는 그 특집들 말이다), '미래의 문헌학'을 하는 것. 인간의 삶을 지속시켜 줄 힘을 내재하고 있는 문학에, 그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0.1%도 안되어도 '읽는다'라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 것이나 '무조건 읽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혹은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를 읽는 것이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 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바야흐로 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고, 근대문학은 죽었으며, 애초에 문학 같은 건 끝이라는 치사한 말을 한 번이라도 공언한 적이 있는 사람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합니다. (p. 250)

 

 

상당히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저자의 독특한 문체나 이야기 방식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투는 단호하고,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선언적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보자면 뭔가 어려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쉽게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듯이) 가끔 논리의 비약이 일어나며 그 논리의 중간과정은 믿음과 반복과 구호와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즉 이것은 나름 잘 쌓아올린 성이긴 한데, 그 중간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성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중간의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논증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야 한다. 이 성의 받침대와 그 꼭대기의 첨탑이 이어져있다는 믿음에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대단함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니 아마도 끊임없이 '왜'를 묻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돌아 처음으로 갈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문학은 '종말론에 반한다'는 주장에, 어떤 문학은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사실 알고보면 종말을 반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도 이 책은 한 가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기는 했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란 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완벽히 이해하게 된다면 완전히 발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읽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 서서히 미쳐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광하지 않으려 발광하며, 동시에 혁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읽을 수밖에, 그리고 되지도 않는 리뷰를 쓸 수밖에. 이 책은 매일 밤 거의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름 날씨, 가끔 쏟아지는 비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 이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은 이유가 있다. 아마도 이 다섯 째 밤이 지난 후에도 여름날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므로. 최소한 380만 년의 여름이 말이다. 영겁의 여름은 지속되고, 우리는 읽고, 쓰고, 혁명한다.

 

 

 

덧.

읽다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세계공화국으로> 같은 책이 생각나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초반에 정보를 끌어모으는 사람들, 전문가나 비평가를 비판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로운데, 그럼 전문가도 비평가도 될 수 없다면 무엇이 되야하지,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또 그렇게 말할테지.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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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2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일야화와 이 책을 비교한 문단은 참 절묘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12-07-24 23:1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일개미님. 다 쓰고 다른분들 리뷰를 읽어봤는데(물론 일개미님 글 포함해서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글들이 꽤 있었는데 코멘트를 남기지 못하겠더라구요.^^) 천일야화 얘기는 가연님이 먼저 하셨더라구요.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7-2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이거 재밌네요. 리뷰.. 좀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더우니까 눈팅도 힘들지만 일단 읽은 티를 낼려고(!) 댓글 먼저 쓰고ㅎㅎ 인문쪽 책은 왜 이렇게 다들 학자 같은 책만 되지.. 담번엔 정치얘기 쏟아져나온 정치인들책이나 사회학쪽 책이 됐음 좋겠어요. 리뷰가 버거워요ㅜㅜ

맥거핀님 <공산당 선언> 읽으셨어요? 저 그저께 멘붕 왔거든요. 저는 그게..그런 건줄 전혀 몰랐어요. 어쨌거나 어렵더라도 읽으면 이해는 가겠지 했는데..그게 아니..


근데 [제노사이드]는 진짜 재밌어요! (주말에 지옥과 천국을 오간 기분)

맥거핀 2012-07-26 02:32   좋아요 0 | URL
아..콩사탕 선언...그거 머 저도 잘 모르지만, 선배들과 토론하면서 억지로 좀 보기는 했습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긴 내용이 아닌데도, 그에 대해서 관련하여 공부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거의 반포기했지요. (선배들에게 이상한 뻘질문도 많이 하구요.) 특히 경제학 쪽을 상당히 공부하지 않는한 거의 피상적인 이해밖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근데 한편으로 보면 또 그건 '선언'이니까요. 그 내용의 세세한 부분을 이해하진 못해도, 그 대의에 동의할 수는 있죠. (뭐 우리가 언제는 자본주의에 대해 잘 이해해서, 자본주의 사회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번 책도 선정이 이미 되었는데, 많은 분들의 추천을 받은 책이 아니라, 의외의 책이 되었더군요. 하나는 상당히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이긴 한데, 하나는 의외로 뱀파이어 이야기..저는 사실 왜 뱀파이어 따위에 그렇게 열광하지,가 의문인 사람이라 책을 읽으면 뭔가 해답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제노사이드>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일단 보관함에 담아둘께요.^^

Shining 2012-07-29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처음 본 건 지난번 다녀온 국제도서전에서였어요. 자음과모음 출판사 섹션에서 봤는데 제목이 강렬해서 기억이 나요. 훨씬 규모도 크고 인지도도 높은 어느 출판사보다 이 출판사가 훨씬 좋은, 다양한 책을 가져왔다는 생각에 이 섹션 유심히 봤습니다.

근데 전 이 책 소개 읽어도 당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요_- 그래서 오기 생겨서 읽고 싶어집니다ㅎㅎ

저 내일 <도둑들> 보러 갑니다!!

맥거핀 2012-07-30 22:51   좋아요 0 | URL
아..자음과 모음 출판사였군요. 어디 출판사인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요즘에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도 그렇고, 계간지 내는 것도 그렇고, 나름 의미있는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뭐 아무튼 무슨 내용이신지 잘 모르겠는건, 다 제 글이 번다한 탓. 저자는 명쾌한 편이니까요, 이 리뷰를 읽으시는 것 보다 책을 직접 보시는 게 훨씬 나으실 겁니다.

아..<도둑들>은 그래서 잘 보고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저도 이미 봤어요. 감상에 대해서는 딱히 코멘트할 게 없어서..(그 얘기는 뭐 그렇게 맘에 들지는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두 개의 문, 김일란, 홍지유, 2012. 

 

 

 

영화 <두 개의 문>을 본 것이 일주일도 더 넘었는데, 여전히 몇 개의 단상들이 머리속을 떠돌고 있다. 여전히 주저되지만,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나을 듯 하다.

 

1.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 용산참사의 본질이 국가폭력이며, 일종의 '본보기'로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속 제시되는 몇 개의 근거들이 있다. 이 용산 사건의 경우 다른 시위나 농성의 경우와 다르게 점거 25시간만에 경찰, 그것도 특공대의 투입이 실시되었고, 이것은 몇 가지의 이상한 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나중에 경찰의 주장대로라면 도심 한가운데에서 화염병을 사용하는 등의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에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특공대 투입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사실 점거 현장에 화염병이 등장하기 2시간 전에 이미 전화로 특공대의 투입이 결정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찰이 그러한 폭력을 유도한 정황에 대해서도 영화는 밝히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그토록 신속하고 위험한 작전이었음에도, 경찰은 건물에 몇 명의 사람이 있고,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기는 커녕, 건물의 내부구조도 모르는 상황에서 투입이 결정되고 시행되었다는 점, 즉 건물안 사람들의 안전은 둘째치고, 그들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기이한 작전이었다는 점. (이는 이 영화의 제목 '두 개의 문'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의 배경에는 MB의 '불관용 원칙'이 있다. 폭력시위에 대해 '좌시'하지 않겠다던 그 이야기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MB 정부는 이 사건을 하나의 본보기로 쓰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부가 원했던 것은 아마도 일종의 '경고'선일 것이다. 즉 원했던 것은 신속한 진압으로 앞으로 이어질 다른 수많은 (재개발 등의) 사례에서 일종의 겁을 주려던 것이지, 수많은 죽음들까지 원했던 것일 리는 없다. 물론 그러한 죽음들을 결코 원치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MB 정부가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있는 정부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부가 그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그 죽음 자체에 대한 윤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할 경우 정권 유지에 큰 타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사건을 처리하는 사법부의 태도가 말해주는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보여진 대로 결국 중요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사건에 대한 진술들도 한쪽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만약 최소한도의 상식이 있는 사법부라면 백번양보하여, 경찰과 철거민의 공동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떻게 결론이 지어졌는가.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부여되었으며, 당시 경찰 책임자는 그 이후에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고, 판단을 내려준 사법부는 영전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2.

다만 이 영화의 형식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조금은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거리들이 있다. 먼저 영화의 감독이 새롭게 찍은 어떤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화면들을 재구성하는 이 다큐의 방식에 대해 논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씨네 21> 859호에서 한국 다큐씬에서 오랫동안 활약해 온 홍형숙 감독과 김동원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놓고 벌이는 논쟁들도 그러한 부분과 조금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동원 감독은 "기록의 힘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입장에서 보면, <두 개의 문>은 노력을 안 하고 만든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지적하며, "발가락으로 찍었어도 찍어야 할 장면을 찍었다면 거기서 엄청난 가치가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동원 감독의 지적이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의 힘이 도리어 거기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의 관객들은 매끄러운 화면보다 도리어 화질이 나쁘고 흐릿하고 흔들리는 화면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TV 뉴스를 믿는가, 몰카를 믿는가. 요즘의 관객들은 매끄러운 편집으로 만들어진 몰카에 대해서 단박에 알아차린다. 이거 홍보네.) 이것은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찍히는 피사체가 이것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촬영되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자꾸 일종의 '만들어진 이미지' 그러니까 '거짓에 가까운 이미지'라는 인식을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찍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미리 의도를 가지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의 다른 의도로 촬영된 화면(예를 들어 이 영화라면 경찰의 채증 영상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요즘 관객들의 정보수집의 자세와 더 비슷한 형태가 된다는 점이다. 즉 요즘은 어떻게 보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중요한 결정적인 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여러 정보의 재배열이다. 즉 최근의 관객들은 하나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정보들을 취합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배열하려 하고, 그 어딘가에 진실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이 영화 <두 개의 문>은 그런 관객들의 정보배열 형식을 닮아 있다. 칼라TV, 사자후TV 등 인터넷 매체에서 촬영한 화면, 경찰의 채증 영상, 법정진술, 인터뷰, 재연 화면 등이 어지러이 얽혀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중 어느 하나의 '결정적인 정보'가 아니라, '정보의 재배열'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조심할 점 중의 하나는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판단의 권한, 정보의 재배열의 권한을 관객에게 넘겨준다는 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우리는 영화를 봄으로써 정보를 재배열하는 누군가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3.

그보다는 도리어 나의 관심은 조금 다른 쪽이다.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는 이 영화의 어떤 비어있는 부분에 대해서이다. <시사인> 248호에서 김세윤은 이 영화가 다른 여러 다큐들처럼 피해자의 삶과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간극장'이 아니라 진실을 쫓는 '그것이 알고싶다'라고 말하며 "냉정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범죄의 재구성'에만 집중하는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이야기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의아한 점 중의 하나는 그러한 형식을 취하기에는 이 영화가 한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 몇 가지가 이 사건에는 누락되어 있으며, 영화도 끝내 그것을 찾아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사라진 3천쪽에 달하는 초동 수사 기록(후반에 부분적으로 나오기는 한다)과 사라진 경찰의 채증 영상들을 이 영화는 공백으로 비워두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중요한 순간에 다다라서는 한 불친절한 메시지와 만나게 된다. 'No Signal',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채증 영상. 이는 과연 정말 촬영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 주장을 설혹 인정한다고 해도, 이 순간을 알지 못하고도 우리는 진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씨네 21> 862호에서 정한석이 훌륭한 글로 이미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덧붙일 말은 특별히 없다. 정한석에 따르면, <두 개의 문>이 원했던 것 혹은 그것의 운명은 결국 '증거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가 되기'였다. 이는 정한석이 글에서 인용한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다시 재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즉 "증거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절멸해버렸다는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비정상적 학살이 실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사건의 경우로 말하자면, 결정적인 증거가 그것을 가졌던 측(그러니까 국가)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 용산에서 국가폭력이 실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를 사법부의 측면에서도 말할 수 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는 조금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된다. 여러 정황 증거들, 그리고 여러 경찰의 증언들이 이 참사가 모두 철거민이 잘못임을 증거하지 않는데, 왜 모든 책임이 철거민들에게만 부여되었는가. 그 정황 증거들과 경찰 증언들과 최종적인 사법부의 판단 사이에 있는 빈공간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빈공간, 그 초반의 여러 증거들에서 최종의 판단으로 넘어가는 중간의 연결고리가 비어있음을 보여주는 '이 공백들'은 무엇을 최종적으로 의미하고 있는가.

 

4.

다른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조금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음을 느낀다. 위에서 나는 이 영화가 '인간극장'이 아니라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화의 주제적인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TV에서 하는 '그것이 알고싶다'의 경우 상당수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시작부분에 가장 충격적인 영상을 제시하고, 보는 이에게 그 이유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다시 사건의 처음으로 돌아가 배경에서부터 차례로 그 뒤를 밟아나가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초반부의 그 영상, 그러니까 보는 이가 기다리고 있던 결정적인 사건에 이른다. 이 영화도 비슷한 형식이다. 처음에 우리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 즉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 아침과 만난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그러니까 MB 정부의 불관용 선언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영화는 점증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영화는 배경에서 시작하여 그 전날, 그 밤, 그 새벽을 거쳐 최종적으로 화재가 일어났던 아침에 이르며, 우리는 그것을 스릴러 영화에서 많이 활용되는 둥둥대는 음악을 들으며 보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화재 발생 2분전'이라는 자막과 만나 그 2분이라는 시간을 지속하여야만 한다.

 

나는 이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다. 즉 처음의 그 사건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 구조. 그 둥둥대는 음악을 들으며 두근두근 버텨야하는 시간들과 최종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 사건. (여기에 효과를 더하는 것은 그 재연이다. 방송에서 사건사고를 다루는 다큐들이 가장 흔히 활용하는 부분인 바로 그 재연말이다.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경찰들의 증언을 바로 영상으로 눈앞에서 리플레이하며 보게 된다. 이는 물론 관객들에게 사건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하기는 하지만, 부수적으로 어떤 효과들을 낳게 하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사건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윤리적인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윤리적인가'라고 묻는 것은 조금 지나치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남는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쾌감을 (때로는) 느낀다. 그러나 이 다큐에서마저 뭔가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예를 들어 이것을 이와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큐 <아르마딜로> 같은 것에서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 그러니까 전투를 기다리게 만드는 그 영화의 구조에 대해서도 말이다. <두 개의 문>이 이와 다른 점은 <두 개의 문>은 그 결정적인 영상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이는 정한석이 위의 글에서 영화 <쇼아>를 놓고 말한 대로 이를 '반드시 보아야 하는 이미지와 보아서는 안되는 이미지를 사이에 둔 윤리적 쟁점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는 조금은 다르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는 경찰의 'No Signal' 때문에, 혹은 파란 슬레이트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지만, 과연 그 영상이 실재했다면 이 영화는 그 영상을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 영상이 실재했다면 이 영화가 그런 구조, 일종의 점증의 구조를 택했을까, 택하지 않았을까.)

 

5.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알고싶다'를 소비하는 방식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를 둘러싼 어떤 기이한 현상을 보며 느끼는 우려에 대해서 말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종종 물음이 올라오는 경우들이 있다. 가장 레전드 편이 뭔가요? 여기에서 레전드라는 것은 자극적인 측면, 미스테리적인 측면에서 가장 강도가 높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쉽게 얘기해서 가장 재미있게, 혹은 공포스럽게 볼 수 있는 편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이 프로그램은 그 요구들에 발맞추듯 어떤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보다는 특정의 사건, 예를 들어 자극적인 살인사건들로 소재가 미묘하게 달라져가고 있다.) 먼저 간단하게는 실제의 사건, 누군가의 죽음을 일종의 자극, 재미, 미스테리적인 일종의 장르물로서 소비하게 되는 것의 불편함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한편으로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키게 되는가,라는 것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고 가지게 되는 것은 공포 혹은 분노에 가깝지 않을까. 즉 우리도 저런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다시 말해서 하나의 '본보기'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위의 '본보기'와 달라지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와 그 사건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양산되게 된다. 그리고 보는 이들은 그 '분노'를 어느정도 즐긴다.

 

<두 개의 문>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국가폭력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용산의 그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이었으며, 바로 지금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아버지이며, 아들이었다. (실제로 그 건물 안에는 한 부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은 수감되었다. 즉 경찰의 논리대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그런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영화에서 말한대로 철거민과 경찰 모두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분노일까. 예를 들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것처럼 괴물을 점점 걸러내게 하는 것, 그에 대한 분노에 매주 에너지를 쏟아붓게 만드는 것만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6.

왜냐하면 이 용산 사건에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두 가지의 문제, 즉 욕망과 폭력의 구조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먼저 발전과 재개발의 욕망,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 욕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무엇인가를 부수고, 새롭게 지으려는 욕망, 그것이 국가의 발전이고, 개인의 발전이라고 믿었고, 그 발전이 자신에게도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현 정부에 표를 주었고(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재개발을 내심 반겼고), 그 욕망에 기꺼이 몸을 실었다. 재개발의 욕망, 철거의 문화에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는 많은 국가폭력을 방조해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폭력에 깊숙이 동참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폭력이란 사회와 동떨어진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에 둔감해진 사회에서 작은 폭력을 용인하게 되는 것, 혹은 그 작은 폭력에 참여하는 것이 점점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결국에는 국가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쌍용차 사태에서의 진압을 보며, 쌍용차는 회생불가능하기 때문에 저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게시판에서 말하는 것, 그것과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는 전경의 방패는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쉽게 대응하는 것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방식대로 자꾸만 괴물을 양산하는 것이다. 혹은 무엇인가를 자꾸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위 진보정권 때도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자. 실제로 대추리나 기륭전자의 예에서 보듯이 진보정권에도 국가폭력의 양상들이 있었다. 여기에 쉽게 말하는 것은 그 정권이 가짜 진보, 잘못된 진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진보의 탈을 쓴 다른 무엇인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숨어있다고 해도, 이 대답이 무엇인가 꺼림칙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그런 것일까, 어쩌면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무거운 것이 여기에는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아서 괴롭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그들을 가짜라고 규정지음으로서 남게 되는 '진짜 나, 선한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그 선한 나는 여기에서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가해자, 즉 현장에 투입된 경찰도 또 하나의 피해자임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넘어선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넘어섰는지는 의문이 든다. 영화 속에서 여전히 적은 어딘가(예를 들어 출동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전화기 바깥)에 있다고 믿어지며,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시간을 영화는 주지 않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포와 분노보다는, (자기반성과 맞닿아 있는) 성찰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성찰이 부족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영화는 나쁘게 말하면 재미와 자극을 느끼게 하고, 그것이 너무 가혹한 평가라고 해도,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국 공포와 분노의 지점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국가폭력의 역사성을 파고들었던 문정현의 <용산>이나, 현장의 자료화면이나 사진들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관련자들의 회상만으로 영화를 이끌며 관객을 결국 현재라는 시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김응수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 등과 비교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또 한편으로는 철거의 문제를 오랜시간 그 철거의 공간에 살아온 사람들을 비추는(그리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정재훈의 <호수길>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물론 성찰이란 결국은 관객의 몫이며, 강제로 이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당연히 저절로, 혹은 영화적 처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최종의 판단은 결국 관객이 하는 것이며, 영화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두 개의 문일뿐. 그 문으로 한걸음 들어설 수 있게 하는 자는 문을 만든 자가 아니라, 그 문 앞에 선 오로지 자신일 뿐이다.

 

 

 

 

덧.

몇 개의 단상들과 몇 개의 질문들이 어지러이 떠도는 탓에 하나의 글이 되지 못하고, 조각보같은 누더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몇 개의 질문들은 하기가 어렵고 조심스럽다. (특히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저 잘 기억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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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7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8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2-07-1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두개의 문>을 읽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맥거핀 2012-07-18 21:43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글 읽어주셔서 고맙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지루한 내용인데..

감은빛 2012-07-1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만, 말씀하신 부분들에 대해 공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2-07-18 21:4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이 영화를 보시면 어떤 감상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여름은 많은 것의 계절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독서의 계절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그렇건 아니건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있고, 내 책상은 읽지도 않은 책들과 반쯤 읽은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과 각종 주간지가 누적 각축을 벌이고 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월초가 돌아왔으며, 나는 새로운 책들을 추천해야만 한다. 6월 인문/사회/과학/예술 추천도서들.

 

 

 

학살, 그 이후 - 1968년 베트남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인류학 / 권헌익 / 아카이브

 

이 책은 1968년 베트남전 당시 하미와 미라이에서 외국군에 의해 이루어졌던 민간인 학살과 그 이후의 일들을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살펴본 기록이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권헌익은 이 책의 집필 동기를 '동일한 지정학적 양극화에 사로잡힌 다른 사회의 파괴와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경제적 번영을 이룬 냉전 사회에서 자라난 나의 유년 시절을 둘러싸고 도덕적 궁지에 몰린 개인적인 경험이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도덕적 궁지'에 어떤 우리도 그다지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넘버 미스터리 / 마커스 드 사토이 / 승산

 

지난 번 서평단 활동에서 이 저자의 <대칭>이라는 책을 보며, 어려운 이야기를 참 쉽게 풀어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이번에는 일상의 사소한 여러 일들에 내재된 수학을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결국에는 클레이 수학 연구소가 제시한 수학의 21세기 미해결 7대 문제에까지 우리를 이끈다.

 

 

나의 행복한 물리학 특강 / 월터 르윈 / 김영사

 

우리 대장님 추천도서를 밀어드리는 차원에서 그 중 한 권 골라서 선정....은 반농담이고, 이번 달에 물리학을 쉽게 풀어쓴 책들이 <물리학을 낳은 위대한 질문들>, <보이지 않는 세계> 등 여럿 출간되었는데 그 중 나아보여서 선정. (<진화심리학>을 밀어드릴까 하다가, 아무래도 이 책은 서평단 용으로 후다닥 읽기는 아닌 것 같아서 이 책을 밀어드린다.)

 

 

전쟁과 인민 -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인민의 탄생 / 한성훈 / 돌베개

 

요즘 '종북주의 까기'가 대세인데, 막상 그 중심에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리는 흐릿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북한에 대한 이해는 '통일전망대'식의 체제선전을 뒤집어보는 내용들과 보수신문들의 선정적, 호전적 보도에 기반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이 (권력과 군사력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북한사회의 형성과 그 안의 인민들의 생각에 대해 살펴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영화 이론 - 영화는 육체와 어떠한 관계인가? / 토마스 엘새서, 말테 하게너 / 커뮤니케이션북스

 

많은 영화이론서들이 단지 이론의 역사를 개괄하는 것으로 머물고 있지만,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인간의 감각과 영화이론을 연결지으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의 목차는 눈으로서의 영화, 피부와 접촉으로서의 영화, 귀로서의 영화, 뇌로서의 영화 등으로 이어진다.) 무릇 영화란 눈으로 보고 귀로서 듣는 것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지각하고 육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덧.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닐지 몰라도, 많은 것의 계절이기도 한데, 그 중의 하나는 락페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락페의 이야기를 하는 건, 올해 펜타포트의 헤드라이너가 매닉스라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 아, 나도 '당신이 이를 참는다면, 당신의 아이들이 다음 제물들이 될 거야'라고 떼창하고 싶다.

 

Manic Street Preachers - If you tolerate this your children will be next

(Glastonbur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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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6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이론, 관심 가네요. 락페는 가보고 싶지만 제겐 너무 멀어요.^^
딸은 갈 거라고 친구들이랑 논의중이더라구요.ㅎㅎ

맥거핀 2012-07-07 12:09   좋아요 0 | URL
저도 가볼 계획을 세우고 있기는 한데, 과연 실현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락페 같은데 가면 망가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직 망가질 각오가.^^
그래도 매닉스는 가줘야하기는 하는데..

주말 잘 보내세요.^^

노이에자이트 2012-07-0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쟁이나 북한은 독서시장에서 별 재미를 못보는 분야죠.저런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더군다나 하미는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곳이라서...

맥거핀 2012-07-07 12:1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하미가 그랬군요. 근데 하미가 아니더라도 우리군이 또 다른 곳에서도 못할 짓을 많이 했겠죠. 참 우리 역사로 보면 지우고 싶은 기억입니다만, 뭐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권헌익 선생의 책이 제목에서 얘기한대로 추모의 논의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정 안되더라도 읽어봐야겠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아이리시스 2012-07-12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물리학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거예요? 과학이랑은 당최 거리가 멀어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사촌동생(걔도 저를 좋아해요ㅋㅋ)이 포항공대 물리학과거든요. 가까운 사람 중에 제일 공부를 잘하는 동생이죠. 동생 중에는... 걔는 정말로 물리학이 재밌다고 했어요. 이런 게 진정한 멘붕....( '')

뭐 걔와 저의 길은 다르니까요ㅜㅜ 다른 책은 전부 제 관심사도 돼요! 이번에도 보편적 인문분야 책들은 아닌 것 같아요.하하.

맥거핀 2012-07-14 16:13   좋아요 0 | URL
사람이 읽을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그 내용들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준 위와 같은 책이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고딩 때 과학 분야를 잘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중 물리가 좋았어요. 화학은 젤 싫었고. 화학은 그 화학식이 너무 짜증나서..ㅋ 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죠.ㅋ

뭐 항상 마이웨이를 지향합니다. 근데 위에 저 책들 다 진짜 괜찮은 거 같은데. 아..내가 찍어서 그러나..

2012-07-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의 책을 진짜 여름에 읽을 수 있다는 겁니까?!
헉. 책상 위에 저 책들이 있으면 왠지 숨이 막혀올 것 같아요..ㅎ

그나마 물리학 특강이 젤 떙기네요. (아이님과는 달리 아직 자기 능력 파악을 못한...) 과학에 대한 숨은 로망이 있어서요..ㅎㅎ

맥거핀 2012-07-14 16:17   좋아요 0 | URL
네..그래도 저 정도면 읽을만 하지 않을까요. 이번달 무시무시한 책이 선정될 거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네요. (예를 들어 <진화심리학> 같은 거 말이죠. 여러 많은 분들이 추천한 책이라 좋은 책임은 확실한 듯 한데, 그 두께도 두께려니와 내용이 그리 휘리릭 읽을 책은 아닌 것 같은데..)

뭐 하긴 인문학 독서라는 게 요새 뭐 말랑한 인문학을 많이 추구하는 듯 싶습니다만, 사실 치열한 자기반성과 깨달음이 병행되(어야 하)는 일이죠.
 

 

 

 

 

화차, 변영주, 2012

 

 

 

(글에 영화의 내용 및 결말과 관련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뒤늦게 본 영화 <화차>는 예상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였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스토리와 결말을 알고 영화를 봤음에도, 영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막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철저히 영화에 기반한 글이다. 소설과의 비교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른 글을 읽으시길.) 아마도 이는 변영주 감독의 선택일 것이다. 처음 변영주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약간 고개를 갸웃했는데,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이 감독의 흥미를 끌었을지 대략 상상이 간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리뷰들을 보면 소설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말그대로 추리적인, 미스터리와 관련된 지점에 상당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미스터리적인 부분이 상당히 걷어내어져 있고, 그 나머지 부분들을 어떤 정서적인 부분이 메우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의외로 상당히 잉여적인 씬들이 많이 보인다. 즉 영화의 흐름상 전체 구도와 크게 관계가 없는 부분인데도, 짚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다. 만약 이것이 추리물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 부분들이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추리물들에서 단서들은 이런 부분에 숨겨져 있었으니까. (반면 최근에는 이를 역이용하여 도리어 이 부분에 맥거핀을 심어놓는 경우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잉여적인 부분들은 대체로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자주인공 문호(이선균)가 동물들을 진료하고 수술하는 모습이나, 문호의 사촌형이자 차경선(김민희)의 뒤를 쫓는 종근(조성하)과 관련된 부분들은 걷어낸다 해도 전체 흐름과 크게 관계가 없으며, 그게 단서나 맥거핀의 기능을 하지도 않는다. (예외적으로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이 영화의 정서적인 부분을 이끌어가는데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물로 보게 되면 리듬이 자꾸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이를 추리물로 보면 필요할 때마다 알아서 단서가 주어지는, 말 그대로 관객의 '추리'가 필요하지 않은 기이한 추리극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그 잘짜여진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버리고, 어떤 정서적인 세태극으로 가려는 것일까. 변영주 감독을 위해 한가지 변명을 해주자면, 원작 소설 <화차>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20년 전의 일본과 사회적 배경과 사회적 정서도 많이 달라졌을 뿐더러, 단순히 스토리만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이미 읽을 사람은 어느 정도 읽은, 사건도 범인도 어느정도는 예상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즉 이것이 소설과 동일하게 미스터리로 갔을 경우에는 원작의 팬들은 그 재현을 환영할지 몰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뭔가 뻔한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는 영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마도 감독은 이 소설을 가지고 지금의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원작의 활용, 혹은 리메이크는 과거 그 원작이 탄생한 시점이 아니라,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 현재에 재현되는 그 원작의 의미이다. 즉 왜 하필이면 지금 2012년에 이 <화차>의 이야기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 현재에 근거하지 않는 과거의 단순 재현은 그저 회고적 취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이 영화로 이야기하고 싶은 현재적 시간들일 것이다.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떤 곳인가. 그것은 이미 얘기한대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의 경우 그 영어제목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영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완득이'나 '은교' 같은 경우는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경우이면서, 그 고유명사인 제목들은 영화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추측도 제공하지 못하지만, 그 영어제목인 'Punch'나 'Muse'같은 경우에는 그 내용이나 주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다가가 있다. 이 영화는 조금 케이스는 다르지만,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화차'라는 제목보다 그 영어제목인 'Helpless'가 조금 더 가까이 가있지 않나 싶다. 즉 신용사회의 이면에 있는 숨겨진 낭떠러지로 어떠한 제어도 없이 달리는 '화차', 그 욕망이 촉발한 작은 불씨의 무서움과 관련된 제목인 '화차'와 달리 이 영화 <화차>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속수무책인 세계, 예를 들어 아오야마 신지가 동명의 영화 에서 그려냈던 것처럼 어떠한 도움도 가능하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기어나올 수밖에 없는 세계, 그야말로 'help'가 'less'되어 있는 세계다.  

 

 

마지막에 문호는 경선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를 다시 보내준다. 아니 고쳐서 말하면 그녀를 보내준다기 보다는 그녀를 감당할 재간도 의지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비겁해보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보는 관객은 아마도 문호를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정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문호는 경선의 전남편과 동일한 선택을 했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일종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인이 지옥으로 달리는 불수레이자,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태워 달리는 시한폭탄이다. 즉 그러므로 이러한 문호의 행위는 일종의 폭탄돌리기가 된다. 그러니 문호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었냐고 묻고, 경선이 아니라고 답하자 그녀를 놔주는 것은 일종의 거짓된, 비겁한 퍼포먼스(이나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마도 문호의 죄책감은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를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녀의 (적어도) 그곳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뒤에 문호의 품에 있는 경선의 모습을 돌려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그런 부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신 문호는 묻는다. "니가 사람이야?" 여러 리뷰들에서 보면 이 우문이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터뜨리게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다지 웃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 그것 중의 하나는 물론 파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강현이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파산한 자는 일종의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은 상당수 정당화되며(이 영화에서도 사채꾼(조폭)이 경찰을 부르라며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TV에 나와 돈을 다 갚고 다시 보통인의 지위를 회복할 것을 간증한다. 그리고 경선은 대답한다.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 이 대답이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청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인간쓰레기가 잉여인간이 되려다 그나마도 실패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경선이 타겟으로 삼았던 강선영은 종근이 말한대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해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차경선에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없다. (뒤에 나오는 선택지들도 그렇게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뒤를 쫓고 있는 종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한대로 이 영화에는 잉여적인 씬들이 상당히 나오고, 그것의 대부분은 종근의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왜 이 영화에는 그토록 종근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근의 삶 역시, 그 자신이 말한대로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잉여의 삶이니까.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어떤 비정함일 것이다. 즉 변영주가 보는, 그려내는 이 세계는 한 인간쓰레기가 그보다 겨우(이 단어를 쓰는 것을 용서하시길) 한 단계 위인 것처럼 보이는 잉여인간이 되려다 다른 잉여인간의 추적으로 인해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이 무섭고도, 막막한 세계에는 어떤 엘리베이터도 어떤 에스컬레이터도 어떤 출구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어디론가로 가려다 결국 막다른 낭떠러지에 몰리게 되는 이 마지막은 아마도 예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에스컬레이터의 중간에는 그 에스컬레이터에 어쩌면 같이 올라타 줄 수도 있는 문호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놔버렸고, 그녀는 끝까지 올라가버렸다. 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낭떠러지로 그녀를 보냈고, 스스로 청소하도록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가 처음 사라진 장소는 고속도로 휴게소였고, 다시 나타난 곳은 역의 대합실이었다. 역과 고속도로 휴게소. 끊임없이 이동하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공간. 유목하는 자들은 늘 정주하는 꿈을 꾸고, 그 정주의 시도는 늘 한낱 꿈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아마도 경선은 모델하우스를 찍은 사진을 그렇게 몰래 끼워두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주에 실패했고, 그녀의 시체는 여전히 기차길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아마도 그 이후에 문호도 꿈을 꿀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꿈. 그녀의 전남편이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덧.

결국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회적인 안전망이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종교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이 사회가 무엇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사회를 꿈꾸는 감독 변영주가 2012년의 한국사회에 다시 이 이야기를 끌고 들어온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우리는 이 사회에서 기껏 폭탄돌리기나 하고 있어도 좋습니까, 라는 물음. (물론 세상은 늘 반대로 가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종교가 버리기 전에 늘 먼저 나서는 것은 사회이니까. 폭탄을 안전하게 제거할 사회적 안전망은 커녕, 폭탄의 세기만 점점 커진다.)

 

미스터리물의 껍질을 벗겨내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전히 문호의 캐릭터와 관련된 부분이다. 정서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영화라면 어떤 심리적인 요인, 동기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일 텐데, 문호가 그녀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동기는 여전히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난 후에도 그녀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고, 수술하는 잉여적인 씬들과 이러한 부분들이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단순히 로맨스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조성하 씨는 예전에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다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아저씨가 꽤 연기를 하는 편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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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2-07-04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영주가 8년만에 작정한 영화치곤 조금은 시시하군요 ㅋ

맥거핀 2012-07-05 13:38   좋아요 0 | URL
아..<발레교습소> 이후에 8년만인가요..뭐 저는 <발레교습소>도 괜찮았고, 이 영화도 괜찮았어요.

이진 2012-07-0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화차>를 보며 단 한번도 웃은 적이, 실소를 지은 적도 없는데, 이 영화를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게 부러울 따름입니다. 영화 <화차>는 매우 신선하고 과장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네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이 "이 영화, 참 잘 만들었다." 은교와 화차 두 작품 모두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차례로 읽었는데요, 은교는 소설의 퀄리티가 훠얼씬 뛰어났다고 생각되는 반면 화차는 소설과 영화의 퀄리티 갭이 거의 없다고 봐요. 아니 소설 영화 따지는 것 필요없이 소설과 영화는 거의 다른 이야기. 어쨌든 배우들의 연기보다 영화 자체가 좋았달까요. 그렇다면 변영주 감독이 좋은 거군요. ^__^

한 가지 제 시점에서 아쉬운점을 꼽자면 영화를 다 보고나서 생각해보건대 개인 파산의 이야기가 홀라당 해 버린거 같아요. 내가 놓친건가...음.

맥거핀 2012-07-05 13:46   좋아요 0 | URL
저는 위 글에 쓴대로 소설을 읽지 않아서 소설은 어떤 정도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뭐 아무튼 그렇게 스테디셀러인 소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있겠죠. 당연히 어느 정도 퀄리티도 될테고..변영주 감독은 방송에서 나와서 하는 말이나, 여러 참여하는 활동들을 봐도 상당히 사회적 의식이 강한 감독이지요. (가끔 그런게 도리어 창작활동에는 독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저는 변영주 감독이 그런 것에서 약간 깎아먹는 게 있기는 하지만, 능력이 기본적으로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른 리뷰에 보니 경선에게 너무 가혹한 지위를 부여한 것, 차라리 선영같은 정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더군요. 확실히 경선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캐릭터니까. 연민은 되지만, 또 쉽게 공감이 가기 어려운 캐릭터인 것은 사실이죠. 개인 파산과 관련된 기본소설의 메시지와도 상당히 달라지는 부분이 여기에 있는 것 같고..

프레이야 2012-07-05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화차의 영어제목이 와닿네요. 잘 지은 것 같아요.
원작과 내용상 말하고자 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전, 원작의 결말이 좀 더 마음에 들었어요. ^^
변영주가 고른 여주인공은 역할에 잘 맞는다는 느낌도 들었구요.
맥거핀님의 리뷰는 늘 참 좋습니다. 다시 영화와 원작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맥거핀 2012-07-05 13:53   좋아요 0 | URL
원작은 더 모호한 결말이라고 하죠? 저도 사족이라고 느껴지는 장면도 있고, 이런건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괜찮은데..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도 있었어요. 그러나 용산역 시퀀스만큼은 꽤 전체 구축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지막에서 끊어버린 것도 좋았구요. 파토스가 기본적으로 꽤 센 영화입니다만, 그 파토스의 강도를 그렇게 한 것은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희는 조금 한계가 있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그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잘 맞으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배우라고 봅니다.(그런 면에서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캐릭터를 시나리오에서 잘 고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이번 영화에서의 연기를 폄하할 이유는 없구요. 용산역 장면들은 김민희 커리어 최고의 연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 에스컬레이터씬 같은 것은 정말 좋았어요.

Shining 2012-07-0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차>는 제가 처음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었어요. 그때는 지금만큼은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죠(물론 자국에서야 이미 입지가 굳었지만 국내시장에서는 아직). 놀랍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어요. 마쓰모토 세이초의 (문학적) 장녀라고 부르는 부분이 맞구나 싶은 놀라움과 문학적으로도 글을 잘 쓰는구나 싶은 감탄 말이죠. 게다가 이 책의 출간년도가 90년대 후반인 것에 가장 그랬죠.

그래서 변영주 감독이 이 책을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지레 염려와 불안이 생기더군요. 하지만 <화차>가 감독님이 여태껏 만든 영화 다 합친 것보다 더 흥행이 잘 됐다고 하니ㅎㅎ 아직은 볼 계획이 없지만 언젠가는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이선균의 근래작이 분명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그의 연기 커리어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주관적 생각... 이건 사족입니다^^;

2012-07-08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7-09 18:35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말해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있지만, 왠지 끌리지 않는달까..아님, 제가 아직도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약간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것에 대한 어떤 의구심을 조금은 가지고 있어요. 이 소설 국내출간이 90년대 후반이던가요? 그럼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그런 신용사회가 구축된 것이겠군요. IMF 이후니까.

뭐 상당수의 리뷰들을 보면 원작보다 못하다는 의견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흥미롭게 보았습니다만, 돌이켜보면 볼수록 뭔가 안타까운 이야기인것 만큼은 틀림이 없어요. (뭐 현실에는 더한 케이스들도 있겠지만.)

이선균에 대한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2012-07-09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07-10 11:24   좋아요 0 | URL
90년대 후반, 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롭고 그런데 변영주 감독이 그 이야기를 '지금에야' 하겠다는 점에서 좀 의아했어요. (당연한 말이지만)이건 시대를 안고 있는 이야기인데다, 작금의 현실에선 이정도 이야기 혹은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심지어 익숙하다고 느낄 정도인데 말이죠. 때문에 원작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뉴스를 통해 관객들은 이런 일들에 대해 아니까요. 불이해와 연민, 어느 정도의 공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무서운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하, 저 영화도 안 봐놓고 말은 참 잘하네요^^

2012-07-10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7-11 23:06   좋아요 0 | URL
아마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사회가 그 정도의 사회겠죠. 좀 다른 얘기겠습니다만, 최근의 한국영화들의 어떤 가혹함, 혹은 적당한 체념 같은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정치적인 인식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MB정권 5년간의 한국영화들을 분석해보면 재밌는 양상이 나올 것 같아요.) 근데 이것이 일본의 20년 전의 이야기라는 것은 어찌보면 좀 슬프네요.

<다크나이즈 라이즈>는 저도 보고싶기는 한데, 초반에 너무 열기가 엄청나다보니 괜히 반감이 생기네요. (이상심리) 천천히 보려고 생각중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7-12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성하 아저씨 원래 되게 좋은데..성균관 스캔들에서도..영화는 기억이 안나요! 예전에 아침연속극을 본 적 있는데 저는 그때 첨 알아서 드라마에서만 기억이 많이 남아있어요.

근데 맥거핀님이 맥거핀을 심어놓는다고 쓰니까 어쩐지 맥거핀님이 심기는 것 같..(죄송해요, 아침부터ㅋㅋㅋ 빨리 아침을 먹어야겠어요!)

근데 질문!
저 비밀 댓글 속엔 뭐가 있는 겁니까? 연애합니까?ㅋㅋㅋ

맥거핀 2012-07-14 16:04   좋아요 0 | URL
아..아이리시스님 도대체 잠수했다고, 빨리 안오신다고 험담중이었습니다.ㅋ 조성하씨는 성균관스캔들은 아니고 다른 독립영화에서 처음봤었는데요. 이상하게 예전부터 특유의 발성이 약간 거시기했어요. 그랬는데 이번에는 몸에 잘맞는 배역을 만난듯한 느낌. 이분은 꽃중년 이런 거 말고, 이렇게 꾸질꾸질한 배역을 맡아야..

맥거핀이 맥거핀을 심어놓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맥거핀이라고 말하는 게 맥거핀이죠.^^

2012-07-1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여씬들이 미스터리보다 정서를 지향한다는 해석에 끄덕끄덕.
저ㅡㄴ <발레교습소> 보고 좀 시시해졌다, 이랬는데, 이 영화 보고 우왕~ 역시 변감독님~! ㅇ.ㅇ 이렇게 눈이 바꼈죠. 원작 이하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있던데, 저는 이 영화 참 좋았어요.
그리고 이 글은 대체로 아, 맞아. 이러면서 읽었네요.

그나저나 늦게도 보셨구만요. 극장에서 보셨어야 진짠데, 그러셨을라나?!

맥거핀 2012-07-14 16:08   좋아요 0 | URL
집에서 뒹굴뒹굴 보기 시작했습니다만, 보다가 보니 괜찮아서 나중에 자세를 고쳐앉고는 열심히 봤어요.

변영주 감독이 오랫동안 안찍기는 했지만, 이번 영화는 좋더군요. 특히 마지막 용산씬 같은 것은 영화의 주제를 공간과 잘 합치시킨, 최근 메이저 한국영화중 좋은 장면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