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Shop Boys - Elysium
팻 샵 보이스 (Pet Shop Boys) 노래 / 워너뮤직(팔로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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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차분하게 돌아온 그들. 이만한 신경안정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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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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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먼저 두 가지 정도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 책에 나온 시기 구분과 그에 따른 명칭들이다. 이 책 <코뮤니스트>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것이 10월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이기 때문이다)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기원'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체제를 '실험'으로 명명한다. 이 코뮤니스트들이 '도약'을 시작하는 것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밀어내고 집권을 확고히하는 1929년부터이다. 이 '도약기'는 소비에트 정권과 소비에트 블록 건설의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1947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코민포름의 결성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마셜플랜의 대응으로 만들어진 냉전체제인 '확산'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소련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미소냉전의 축에서 소련이 소비에트 블록 안에 어떻게 보면 갇혀있던 시점이라 확산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북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공산주의의 '확산'의 시점으로 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1957년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변형'되기 시작한다. 데탕트가 일어났고, 쿠바, 중남미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며, 마르쿠제, 알튀세르, 사르트르 등이 맑시즘의 방향을 새롭게 잡으려고 하였다. 이 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고 '종언'으로 들어가는 것은 1980년 레이건이 미국에서 정권을 잡으면서부터이다. 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 등의 당시의 소련 서기장들은 레이건 이후의 미 행정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그 가느다란 생명줄을 거의 끊어버렸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은 책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고, 나름의 답을 내리고 있다(그 답은 마지막 40장에 정리되어 있다). 1부 '기원'에서는 소련 체제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나, 당 독재였나, (공산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나라가 아닌, 왜 가장 가난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는가 등의 질문을 한다. 2부 '도약'에서 묻는 것은 왜 소련은 공산주의 확산의 길이 아니라, 일국공산주의의 길을 갔는가, 주변국, 미국 등에서의 국제적인 봉기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등의 물음이다. 3부 '도약'에서는 권력 투쟁 중에서 어떻게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지, 소비에트는 나치즘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왜 그토록 커다란 억압의 체제가 필요했는지 등에 대해 묻는다. 4부 '확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냉전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냉전 체제가 왜 스탈린에게 필요했는지, 그리고 작은 조직에 불과했던 마오쩌둥이 어떻게 거대한 장제스 군대를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5부 '변형'에서는 왜 모든 공산주의가 변형되며, 동일한 실패의 길을 걷는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모색한 탈출구는 왜 결국 실패로 가는 출구였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 6부 '종언'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개혁이 어떻게 달랐으며, 왜 중국은 성공하고, 소련을 실패하였는지, 그리고 공산주의는 왜 그토록 허망하고 급속하게 붕괴되었는지 돌아본다.

 

로버트 서비스의 이 책 <코뮤니스트>는 이 많은 질문들에 대해 나름 성실히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단편적인 사실이나, 의견의 제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과 풍부한 사료의 제시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되도록 여러 정황들을 제시하여 독자의 판단을 이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질문 자체가 그렇게 신선하지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뒤에 옮긴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파 역사가들에 의해 이 질문들의 상당수는 거의 결론이 내려진 이후이고, 로버트 서비스가 다른 점은 보다 성실한 자료조사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더 많이 확보했다는 것 뿐이며, 그 답 자체는 예전의 역사가들과 동일하게 상당히 편향적이다. 사실 이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답을 뭉뚱그려 보자면, 결국 로버트 서비스가 보는 최종의 답은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 체제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이나 생존욕과 결합하여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괴물의 체제였다는 것이 로버트 서비스가 내놓은 최종의 답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무너질 것이라고 계속 오판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묘한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부터 당의 독재는 시작되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 체제에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차우세스쿠나 폴 포트 등의 잔악한 폭군들이 등장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감시와 억압으로 기능하는 체제이고(그것은 거의 모든 공산주의 체제가 비슷한 형태를 가진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생존이 가능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 즉 소비에트 모델은 결국 실패했지만, 그나마 그 모델이 일시적인 유지라도 가능케했다), 그런 체제라면 감시와 억압과 폭력을 가장 잘 수행해낼 자, 그러니까 가장 잔악하고 폭력적이며, 교활한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것은 그가 말 그대로 '강철'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가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코뮤니즘의 역사에서 코뮤니즘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를 사상의 흐름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으로 치환하고, 모든 '주의'의 개념들을 독자의 머리 속에서 효과적으로 제거한다. 이 책에는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주의'들의 명칭이 나온다. 공산주의, 맑시즘, 사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아나키즘, 나로드주의, 아나르코생디칼리즘, 사파티즘, 카스트로주의 등등 거의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대체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모르거나 귀찮아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위주의나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각각 한 챕터를 할애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코뮤니스트들을 탈코뮤니즘화하는 것은 이들 코뮤니스트들을 자신들의 이익이나 정권을 잡기 위한 정복욕의 화신, 혹은 쓸데없는 투쟁에 골몰하는 골치아픈 종자들, 혹은 죽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독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카우츠키의 맑시즘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맑시즘은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맑시즘이고, 무엇을 위한 수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단지 권력에 목마른 멍청한 꼭두각시들로 보인다.) 이는 책의 내용 전체를 지루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저 이들이 결국은 사라질 권력을 잡기 위해 각종 잔악한 일을 저질렀던 그야말로 오류로 가득찬 인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같이 읽을 책으로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추천.)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수많은 폭력과 학살, 기근, 감시와 억압이 실제로 있었고, 공산주의는 현재 거의 종적을 감춰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책 역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며, 그 질문에 담긴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의 희망은 왜 절망이 되었나?" 즉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은 다르다. 자본주의는 이미 그 태동에서부터 그 잔악성을 수많은 사람들이 감지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출현하였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안고 탄생하였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것이 잔인한 뒷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많은 이들은 그래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 희망이 절망이 된 것일까. 로버트 서비스의 이에 대한 답은 예스다. 즉 공산주의의 희망이라고 믿어졌던 요소들, 그것들은 이미 잘못 만들어진 뿌리에서 길러졌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는 자연스럽게 절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보면 농업의 국유화는 생산성 저하와 마치 직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즉 땅이 내 소유가 아니면 모두 생산을 할 생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요소는 이미 공산주의 그 자체에 들어있었으며, 미국이 조바심을 내지 않았어도 이 소비에트 체제는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이 질문에 내린 답이다. 즉 희망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은 절망이었다는 것. (이의 반대편, 그러니까 수정주의적, 좌파적인 시각에 물론 다른 해석이 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정치형식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고, 동시에 독재나 전제정치와도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산주의의 경우 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과 도리어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중들이 분배하여 나눠같자는 공산주의의 이상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공산주의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교묘한 용어를 내세워 어느 틈엔가 그것을 당 독재로 교묘하게 치환하였으며, 그런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절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교묘하게 변질시킨 레닌 등의 인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그리 고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도 있다. 그것은 그 희망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열광적인 찬성을 보내고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그 오류를, 오류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바보들이었는가, 단지 멍청한 꼭두각시들에 불과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희망을 보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어떻게든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의 폭력적인 현실들이 드러나고 그것이 거의 종말에 다다른 지금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내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내재된 가능성들이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도 책의 뒤편에서 쥐꼬리만큼 밝히기는 했지만, 자본주의가 저지른 폭력들도 결코 공산주의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더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공산주의의 완전한 종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책을 보며 저자의 시각과 다르게 사실 역으로 놀랐던 것은 온 세계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렇게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공산당을 콩사탕으로 말해야만 했던 우리의 시각에서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의 등장과 스러짐을 보며, 도리어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살아있는 한.

 

 

덧.

그러므로 사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은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나 비우호적인 사람이나 어딘가모르게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면 공산주의의 피의 역사만을 줄기차게 서술한 부분이 마음에 걸릴 것이고, 비우호적인 사람이면 도대체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를 찾기 못할 테니. (시작부터 망가져서 어차피 언젠가 당연하게도 끝날 운명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읽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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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2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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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올까, 생각했는데 아무튼 마지막이 왔다. (그러나 사실 실질적으로 아직도 써야하는 리뷰들이 5편이 남았으므로, 실질적인 마지막은 조금 후에 보게 될 것 같다.) 내가 하는 상당수의 일들이 그렇듯 의욕적으로 출발했으나 마지막은 역시 '의욕적'이란 게 그런 뜻이었나,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리뷰들은 거의 제 때 올리지 못했고, 매번 대장님에게 민망한 메일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고도 심지어는 그 메일의 기한마저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 글도 보시게 될 대장님에게 송구할 뿐이다. <코뮤니스트> 리뷰는 빠르면 오늘 중,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꼭 올릴께요.-_-) 내가 앞으로 서평단을 하려는 생각을 접는다면 그것의 8할은 이 민망함 때문이다. (나머지 2할은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을 견디게 해준 박하사탕 값?) 예전에 알라딘 측에 직접 양해를 구할 때에는 솔직히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같이 리뷰를 쓰는 입장에서 말하자니...(아마도 알라딘에서 노린 것이 이것인듯.)

 

아무튼 하나 확실한 것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좋아보이는 책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는 사실이고, 이게 착각인지 아니면 9월에 유달리 내 입맛에 맞는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분명 다음 서평단의 책들을 보면서 울분을 토하겠지.) 그러니까 뭐든지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들을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법이다.

 

 

 

약탈적 금융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 제윤경, 이헌욱 / 부키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는 공산주의 사회가 그 인민들을 폭력과 억압, 감시와 상호고발로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그 국민들을 어떻게 지배할까. 그 지배전략 중의 하나는 그들을 빚지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한 번 빚을 지기 시작하면, 직접적인 폭력 혹은 효과적인 수사 따위는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빚을 갚기 위해 뼈가 부서져라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채무자들은 2등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빚을 지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이 책은 왜 빚을 지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지, 이 사회의 효율적인 메커니즘을 알게 해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겨레21>에서 제윤경 씨의 칼럼들을 재미있게, 그러나 등줄기의 서늘함을 때로 느끼며 읽었다.)

 

 

게임, 게이머, 플레이 -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 / 이상우 / 자음과모음

 

여전히 (컴퓨터) 게임은 (특히 모든 부모들에게) 악의 근원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후 시기에 다시 중세와 같은 거대한 암흑이 도래하고, 인간의 7대악을 초래하는 수많은 물건들이 화형당한다면 아마도 (야동이 가득찬 하드들과 함께) 수많은 게임 소프트웨어가 기꺼이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게임 애니팡이나 앵그리버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번도 게임을 안해본 자, 여기에 성냥불을 당기거라,라고 하면 쉽게 성냥개비를 집어들 만한 사람이 있을까. (물론 야동도 마찬가지.) 그러니 우리는 싫든 좋든 그 이후에도 여전히 '게임과의 전쟁'을 계속해야 할 것이고, 그 게임들을 정벌할 십자군 기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거나, 기꺼이 수많은 정령들과 수도사와 마법사들과 함께 그 십자군에 맞설 사람들(그대가 레벨1일지라도 말이다) 모두 한번쯤 읽어볼 책이 아닐까 싶다.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 루이자 길더 / 부키

양자 불가사의 - 물리학과 의식의 만남 / 브루스 로젠블룸 외 / 지양사

 

이번 달은 흥미롭게도 양자역학에 다룬 두 권의 책이 눈에 띈다. 한 권은 양자역학 중에서도 특히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해, 대화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양자이론의 주요 내용들에 대한 교양강좌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튼 '쉽게 썼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책들의 쉽게 썼다는 말에는 함정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최근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책 뒤편의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고 명쾌한 수식으로 풀어냈다'고 문구가 쓰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자. "하지만 물질의 특성에 대한 응력 성분의 의존성을 나타내는 방정식에 불변성이 있는지 조사하고, 이 불변성 조건을 바탕으로 압축성 점액에 관한 방정식을 작성하는 것이 좋다."와 같은 문장은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축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대중'이 그 '대중'이 아니란 얘기다.) 그게 걱정되어 서점에서 두 책에 대해 꼼꼼이 살펴보았는데, 앞의 한 챕터 정도까지는 적어도 욱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꽤 재미가 있었다.

 

 

죽음 / 임철규 / 한길사

 

마지막 추천의 마지막 책에 어떤 책을 넣을까 고민했다. 유홍준, 김윤식, 강준만, 진중권, 강상중 등 쟁쟁한 필자들의 책들이 나온 9월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보고서는 이 책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한 노학자의 평생에 걸친 '죽음'에 대한 성찰. 저자 임철규는 그리스 로마 문학 등의 문학 연구와 비평에 평생을 천착해 온 학자로,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형벌인 죽음을 맞닥뜨리고자 한다. 이 책은 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철학 등에 나타난 여러 다양한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 '살자'는 당위의 문제가 아닌 '죽음'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자 하는데(물론 이들 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은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고찰을 통해서 우리가 죽음 전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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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5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 담아둡니다^^

맥거핀 2012-10-05 23:19   좋아요 0 | URL
서점에서 봤는데, 책 자체가 뭔가 묵직한 느낌이 있어요.

2012-10-0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에세이 분야인 저도 근근히 했고, 막달이라 안도하고 있는데, 인문사회분야인 맥거핀님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 저도 다음달에 울분을 토하고 있겠지요.

저는 성냥불을 댕길 수 있는 사람인데.. 하드에 야동도 없고, 국민 게임조차도 손끝 하나 안 대본~~.ㅋㅋ 제가 안 좋아하는 두 가지는 게임, 윈도우 쇼핑입니다. 왜냐면, 둘 다 실질적으로 남는 게 없어서.. 전 가상 세계에 혹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

그나저나 전 이미 약탈적 금융사회의 명백한 2등민이라, 약간의 소개글만 읽어도 등골이 서늘하네요. 읽고 나면 섬뜩하겠죠~

맥거핀 2012-10-05 23:24   좋아요 0 | URL
근데 정말 이상해요. 할 때는 이것도 그렇고 저것도 그렇고 툴툴대는데, 막상 끝날 때가 되면 그 '툴툴대기'자체가 너무 그리워져요. 아..그래도 저거라도 할 수 있는 때가 좋았어 그러고 있지요.

아..진짜요? 그건 믿기어려운데요. 어렸을 때 오락실 너구리는 해보시지 않았을까..(그것도 컴퓨터 게임입니다요. 야동은 믿습니다만.) 저는 하루에 컴퓨터를 끼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긴 인간이라서요. 좀 줄이기는 해야하는데. 근데 저도 인터넷쇼핑은 잘 안해요. 돈이 없어서...;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우리모두는 빚진 사람이죠. 제윤경 씨는 늘 모든 신용카드를 어서빨리 잘라버려라..하고 주장하지만.

2012-10-06 08:57   좋아요 0 | URL
ㅋ 죄송~ 성냥불 못 댕기겠군요. 현재만 생각했어요. (국민게임에 손끝 하나 안 댔다는 건, 위에 언급된 두 개에 대한 이야기..^^)
-과거엔 1943,1942에 동전 많이 바쳤었네요. PC로 헥사 하느라 눈알 빠진 적도 있고, 테트리스야 뭐 당연히.. 지금은 아무도 안하는 폭탄게임도 PC로 무진장 했었구만요.ㅋ (근데 아무튼 쓰고 보니 정말 조잡한 게임만 했었구나, 싶네요.)
근데 언제부턴가 모든 게임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지용...

맥거핀 2012-10-08 12:01   좋아요 0 | URL
오..1942. 그거 재미있죠. 가끔 폭탄을 날릴때의 쾌감! 저는 어렸을 때 스포츠게임에 좀 미쳐있었죠. 신야구, 세이부축구, 버추어스트라이커..요즘에도 술마시고 어쩌다 오락실에 가는 때가 있어요. 술깨는 데는 그런 게임들이 가끔 도움을 주죠. 헥사..오랜만에 듣는 추억의 이름이네요. 요즘에도 헥사게임이 있나..(애니팡의 선조격?) 찾아봐야지.

가연 2012-10-05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파트장이라서.. 아무래도 우수리뷰 선정도 있고 그러다보니 공정성(?)을 위해서 일부러 평가단하시는 분들 글에는 잘 댓글을 달지 않는데, 혹은 모든 분들께(너무 바빠서 달지 못할 때도 있지만) 다 달거나.. ㅋㅋ 첫 문단을 읽으니 안달수가 없네요. 저는 리뷰 안올리신 분들 서재에 재촉 댓글 쓸 때가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재촉 댓글 달아도 되나, 이런 기분도 마구 들고.. 물론 이 댓글은 재촉 댓글이 아니랍니다, ㅋㅋ

맥거핀 2012-10-05 23:27   좋아요 0 | URL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방금 리뷰를 올리고 이 댓글을 봤다는 사실이네요. (너그러이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말이죠. 파트장 본인도 좀 늦고 그러면 별로 민망하지 않는데(원래 회사에서도 같이 지각하는 상사가 뭐라하면 별 신경 안쓰잖아요), 워낙 항상 빨리 하셔서..아무튼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리뷰 빨리 쓰는 비결 좀..

아무튼 이제 거의 마지막이네요. 그간 수고 많으셨어요.^^
 

 

 

1. 충고

 

(아마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선배들의 충고란 별 가치가 없을 경우가 많다. 물론 충고도 충고 나름이어서, 실제적인 방법들 - 예를 들어 부장이 시킨 무가치한 일과 과장이 시킨 가치있어 보이는 일 중 어떠한 것을 먼저 해야하는가 - 같은 것은 꽤나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실제적인 충고들은 점점 몸 안의 수분 농도처럼 옅어지고, 뜬구름잡는 이야기들, 두루뭉술한 인생의 비결들은 가득 쌓인 담배 연기만큼 짙어지고 만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00만명의 인생에는 100만개의 개똥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의 개똥(철학)을 내 인생에 발라 약으로 만들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이다.

 

반면 후배들의 충고는 대체로 가치가 있다. 물론 후배들의 충고란 평소에는 거의 듣기 힘들다. 그들에게 충고를 듣기 위해서는 밥을 사준다고 꼬셔서 싼 술집으로 데려간 다음, 그들에게 각종 폭탄주 레시피를 1번에서 마지막 번호까지 차례로 실험해보아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엔가 그들에게 이런 충고가 튀어 나온다. "형은 왜 그렇게 살아?!" (물론 이 말은 절대 이렇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 말은 대체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본인의 혀에 대한 타박처럼도 들린다. "혀는 왜에 구러케 솨라?!") 그리고 그런 충고를 듣고 나면 정중히, 그러나 꽤나 난폭하게 후배를 화장실 변기와 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던져둔 다음,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아, 뭔가 문제가 있긴 있구나.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기는 있어. 그리고 그 '문제'라는 녀석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충고가 어찌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2. 다크나이트 라이즈

 

그 문제 중에 하나는 물론 게으름에 관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본 후 바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결국 쓸 수 없는 글들에 대한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약간 경외감이 든다.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고, 눈 뒤에 숨어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이렇게 미적거리게 되는데,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글 속에 새겨 남겨놓다니. 아무튼 늘 메모들은 키워드들로만 남아 있고, 그 키워드들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도대체 그 처음의 형태들을 복구해낼 수가 없다.

 

복구해낼 수가 없는 메모 중의 하나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것이다. (뭐 사실 모든 게 다 그렇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메모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거리와 그다지 재미없는 이야기거리가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좀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거리에는 베인과 조커의 공통점 같은 것들이 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악의 중심인 베인과 <다크나이트>의 악의 중심인 조커는 악당들이란 점 이외에도 한 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모두 망가진 입의 소유자라는 것인데, 조커는 잘 알려져있듯이 웃는 얼굴이 극도로 강조된, 양 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의 소유자이고, 베인의 입은 영화 내내 마스크에 의해 가려져 있다. 하여튼 간에 두 사람 모두 불구의 입, 뭔가 비정상적인 입의 소유자이다. 물론 이는 별 것 아닌 공통점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숙적인 '다크나이트' 배트맨과 연결지으면 조금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배트맨의 신체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직접 마주하게 되는 부위는 그의 입이기 때문이다. 즉 배트맨의 모든 신체는 최신의 슈트로 가려져 있는 반면에 거의 유일하게 그 입만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입을 가진 자와 입을 가지지 못한 자의 대결.

 

이야기가 막 나가는 김에 조금 더 생각을 연장해 본다면 아마 이 입과 연관지어 두 가지 정도를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입이라는 것은 우리의 얼굴에서 무엇을 담당하는가,라는 부분이다. 신체상으로 볼 때는 입은 물론 먹는 일을 담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밀접하게 표정이라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주 간단하게 사람의 웃는 얼굴을 표현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렇게 하면 된다. :-) 반면, 그 사람의 화난 모습을 표현하고 싶다면 이렇게 한다. :-( 즉 입은 그의 겉으로 드러난 표정을 읽게 하는 지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커나 베인을 보며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이 표정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베인은 실제의 마스크를, 그리고 조커는 웃는 얼굴이라는(그러나 사실은 웃지 않는- 이 부분과 관련지어서 조커가 자신이 웃는 표정을 가지게 된 이유를 술회하는 믿을 수 없는 진술을 떠올려보라)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물론 도둑이나 강도들도 대체로 입을 가린 마스크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입 그리고 표정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어떤 묘한 부분들과 연관이 되는데, 그것은 이 영화에 떠돌고 있는 무산혁명의 이미지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벌이는 공포스러운 혁명의 모습들,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 사형과 추방, 미친 혁명가의 선동, 그리고 그 선동에 호응을 보내는 사람들. 무산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입이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그 입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아무 것도 말할 수도 없었고, 동시에 그들에게는 어떠한 표정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입을 가지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입을 드러낸 어둠의 기사, 배트맨과 복구된 경찰력에 의해 퇴치되고, 고담 시에는 평화가, 그러나 어쩌면 그들만의 평화가 찾아온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겨야하는 것은 다크나이트고, 미치광이에 의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베인의 망가진 입을 보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 꽤나 비싸보이는 찻집에서 커피를 입에 가져가는 고담 시의 수호자이자, (한때) 억만장자 기업인 브루스 웨인을 보며 약간 입맛이 썼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어둠의 기사의 마스크는 입은 드러내 보이되, 반대로 그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입은 웃고 있되,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자들, 이 현실을 수호(한다고 말)하는 자들도 그런 자들이다.)

 

3. 상상

 

아무래도 여기서 조금 더 길어지면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리뷰가 될 것 같고, 이 글은 그저 잠이 안와서 쓰는 글일 뿐이니 이쯤에서 끊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다크나이트>와 다른 부분에서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이 이야기는 전작과 다르게 어딘지모르게 헐거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곳이 꽉 짜여져 있어 거의 물샐틈 없는 공간처럼 느껴졌던 그 전작과 달리 이 이야기 속에는 어떤 빈 공간이 있고, 그 빈 공간을 우리의 어떤 상상으로 채워넣어야만 완전한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채워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지난 연휴에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넝굴당' 재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장면 중에 시어머니인 윤여정이 예전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주위의 반응을 회상하며 울부짖으면서 억울해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흥미롭고 윤여정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 장면에서 어떠한 실제의 회상씬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가슴을 쥐어 뜯는 연기를 보는 우리들은 그녀가 받았을 예전의 상처의 정도를 상상하고, 그 크기를 짐작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그 크기는 그 답답한 흑백의 회상씬에 갇혀 있지 않다. 그 크기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보는 이들의 머리 속에서 부풀어 올라, 각자의 머리 속에서 커다란 흑백의 회상씬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 상상만으로 우리는 그녀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보게 되며, 그 억울함에 공감하고, 그 상처의 크기를 되레 짐작하게 된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예전에 왕가위의 <타락천사> DVD에 실려있는 정성일의 코멘터리 중에 그가 지나가며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자신을 찍지 말라고 화내는 아버지 자신을 찍은 화면을 보고 있는 아버지를 금성무가 보고 있는 장면에 흐르는 금성무의 독백. 이 독백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그 장면에서 이 독백이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그 아버지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 회상하는 것,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에 동반되는 그리움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가지 알 수 없는 것 속에서도 하나 유일하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신에게 아무 것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혹은 다른 어떤 것이라도)는 (적어도 당신에게 있어서는) 고급의 쓰레기일 뿐이라는 것. 그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쓰레기더미 속에 자신을 방치해두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는 것.

 

4. 위험

 

가끔 뭔가를 끄적거리다 보면 저절로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고 여겨지는 때가 있다. 줄줄이 손 끝에서 튀어나오는 문장들, 어느 틈에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쓰여져 있는 긴 문단, 이미 내려져 있는 스크롤바. 솔직히 그런 때가 항상 오기를 바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런 때가 가장 위험한 때가 아닌가 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손 끝에 있지 않으니까. 손 끝에서 끄집어내는 이야기들은 다른 이야기를(그러니까 예전의 그 '문제'라는 녀석같은 것) 튀어나오지 못하게 하니까.

 

그런데, 그런데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참으로 웃긴 것이어서 그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할 때마다 달콤한 무엇인가를 내보내 잠을 자라고 한다. 졸립다. 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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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3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0-0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제가 좋아하는(또는 기다리는?) 맥거핀님의 잠이 안와 쓰는 글, 새 페이퍼군요(그렇다면 저는 맥거핀님의 불면을 좋아하는.. 기다리는?_-). 충고, 에 대한 이야기 저도 비슷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어요. 대체 왜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는가 하는 이야기_-(명절의 여파인가봐요)

날씨가 좋군요, 자전거 타고 달려야할 날씨에요. 명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

맥거핀 2012-10-05 02:22   좋아요 0 | URL
명절은 사실 전혀 특별한 게 없었어요. 누군가에게 그렇게 (충고를 가장한) 앞담화를 듣지도 않았구요. 평온하고,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그렇게 몸이 편해지니까 정신이 확 이완이 되어서 책들도 눈에 잘 안들어오더라구요. 예전에는 연휴 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래야지..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아주 무계획적으로 보냈습니다.

예전에 다운 받아 놓고 못 본 영화들도 몇 개를 봤어요. 옛날 일본영화들 몇 개를 봤는데 좋았어요.

그래서 자전거는 좀 타셨는지...
 
[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소설)의 묘미, 혹은 쾌락은 대체로 전복에서 나온다. 현실을 뒤집는 것,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이 책 <가족 기담>에서도 '기담' 중의 하나로 소개된 <홍길동전>의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일종의 즐거움을 주며 널리 읽혔던 것은 그것이 결국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서자인 홍길동이 적서차별의 굴레를 넘어 한 나라의 왕이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상당수 이야기의 원천이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원천일 것이 분명한 복수극이 만연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소개된 <장화홍련전> 같은 것. 그것은 현실에서는 그러한 복수가 결코 쉽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복수가 그렇게나 쉽고,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이라면 누가 복수극 따위를 읽겠는가. <장화홍련전>에서 귀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생각한다고 해도, 조선시대와 같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죽은 전처의 딸들이 가부장의 위세를 등에 업은 계모에게 복수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듣는 자와 말하는 자 모두에게 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혹은 밀려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이야기(소설)는 패배자의 기록이라는 단적인 말을 굳이 가지고 오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이야기 속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읽는다. (그래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새드 엔딩은 해피 엔딩보다 사랑받지 못할 운명에 있다.) 하물며 조선시대와 같이 엄격한 신분질서가 짜여진 폐쇄적인 사회, 가부장적 질서가 사회의 기초에서부터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으랴. 평생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 벼슬길이 애초에 막혀있던 (서자와 얼자를 포함한) 수많은 양반들이 그나마 합법적으로 기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 뿐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마저도 완전히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다. 모여서 무엇인가를 쑥덕쑥덕 이야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권장되는 행위는 아니었다. 책에 보면 실상 비참한 이야기를 모여서 웃으면서 즐기는 부분을 부정적으로 보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자조적인 웃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자조적인 웃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와 같이 신분차별이 공고한 사회에서 이야기는 대체로 두 가지 것을 담는다. 하나는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꿈이다. 그러니까 "그리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결말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결말에는 수상쩍은 무엇인가가 남는다. 그것은 그 결말이란 너무도 간단하고 덧없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결말에는 "그들이 그래서 정말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을까?"와 같은 질문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두 번째 것, 그러니까 결국에는 한계가 있는 승리, 결국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담는다. 위에서 예로 든 <홍길동전>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홍길동은 결국 가상의 나라, 율도국의 왕이 된다. 조선이라는 거대한 신분제적 봉건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며, 홍길동 역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 그 우두머리가 될 뿐이다. <구운몽>이나 <옥루몽>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말해주듯 한낱의 꿈일 뿐,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가 개입될 것 같다. 그 하나는 조선과 같이 공고한 봉건 신분제의 사회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몸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으로 남기는 방각본이나 필사 형식의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단지 구술로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일지라도 이야기에는 적절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결국 이 이야기들은 창작자의 내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어하나 당대의 현실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어느정도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것은 묘한 시기와 질시를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소설의 창작자들, 그리고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기를 바라면서도, 그 완전한 성공의 모습을 보는 것을 불편해하며, 그가 결국 어떤 한계를 가지게 되었을 때만이 가까스로 안도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그것을 보는 현재 자신의 처지를 은연중에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 <가족기담>에서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은 결국 이 두 번째이다. 그들이 이루어낸 무엇인가가 아니라, 결국 이루어내지 못한 무엇인가를 볼 것. 그것은 그러므로 이야기의 판타지를 모두 걷어내고, 그 이야기 내면에 담긴 당대의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무엇이 이야기 속 그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어내고 듣는 모든 이들을 어떤 한계에 가로막히게 하는가? 저자 유광수는 옷고름을 들춰내고 이야기의 속살을 드러내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저자는 꽤 집요하다. 저자는 단지 뽀얀 속살,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저자는 집요하게 살과 핏줄을 발라내고 그 뼈 속까지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기담이 된다. 단지 뼈가 드러나서 기담이 아니라, 우리는 그 뼈 속에 사무친 무엇인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과 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유교 이데올로기와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상 그 이데올로기가 뒷받침해주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의 기담들이다. 부모에게 희생당하는 아이, 반대로 아이에게 희생당하는 부모, 정절과 포르노그래피를 동시에 꿈꾸는 남자들, 무능한 가장들이 벌이는 타자화, 근친상간,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죽기를 바라는 열녀 만들기 등등.

 

뭐 그러므로 사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텍스트는 그 이면을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에서 겉으로 드러난 교훈과 하등 상관이 없이) 텍스트들은 자발적,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당시의 세계관을 담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는 무의식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또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는 (특히 유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은) 여러 번 행해지기도 했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다시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와 부모의 상호희생 강요, 정절과 포르노그래피의 이상공존, 타자화 같은 것은 우리에게도 낯선 키워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낯설다기 보다는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야기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뉴스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현재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텍스트들도 이 키워드들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아마도 먼 훗날 후세인이 우리시대의 텍스트들을 본다면 그 기괴함에 분명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들을 곱씹는 것은 단지 유교 이데올로기를 욕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무엇인가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즉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새로운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책 <가족 기담>은 그만 이 부분에서 주춤하고 만다. 책 전반에 주로 흐르고 있는 약간은 과감한 성 담론들을 보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기대했나 보다. (물론 예전 고려가요나 향가의 후렴구들을 성행위의 열락의 언어들로 보는 해석들에 탐닉했던 내 전력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책 전체 내내 각종 다양한 가족에 대한 기담들을 보여주던 이 책은 결말부에 이르러 다시 가족주의로 돌아온다. 이는 예를 들어 극 내내 잔인한 복수극의 전말을 보여주던 영화가 결말부에 이르러 "사실 복수는 나쁜거야. 그러니까 복수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말고 용서를 하렴."이라고 말하는 격이랄까. 상처에서 고름을 짜내고, 그 빈공간을 보게 해주었으면, 이제 약을 발라아먄 한다. 그 공간에 그 고름을 소독해 다시 집어넣으면 다시 곧 곪을 뿐이다. 예를 들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베트남 공항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족들을 이야기하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들에게서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새롭게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론 그들 자신의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가족주의적인 각성의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시에 필요한 것은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어(붙들어) 줄 시스템이다. 즉 유교 이데올로기를 걷어냈으면 무엇인가 다른 시스템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입을 다문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며 얼버무리는 책 속 이야기들과 비슷해진다.) 뭐 꼭 저자에게 묻는 질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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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9-26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상이라니까 생각난 건데 학교다닐 때 문예비평론이란 과목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블로그에 쓰는 글은 거의(맥거핀님은 제 이웃 중 유일하게 벗어나시는 것 같지만) 인상비평이잖아요. 좋게 말하면 감상문(느낌글) 나쁘게 말하면 잡글. 무언가를 보고 쓸 때 격식을 갖추면 절대 하면 안되는 것이기도한데, 이 책이 <홍길동전>이나 <구운몽> 같은 걸 시대상으로 풀어 가족을 얘기하는 것에서 뭔가가 (저 스스로에게) 환기됩니다..

토론시간에는 제일 먼저 분석하는 게 작가도 아니고 내용도 아니고 소설이 씌어진 시대상이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거든요. 저 요즘 글도 침체기..(쓸 욕망이 생기질 않..) 댓글은 쓰고나서 돌아서면 허무해져요ㅠ.ㅠ

뭘 보고 읽는데 도무지 느껴지는 것도, 지적욕망을 채우고픈 마음도 잃어버린 가을의 시작!

일어나요, 맥거핀님!!! (여기서 또..)

2012-09-27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8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