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이상우, 2012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싸늘하게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히는 것은 아귀의 말이나 화투장 뿐만은 아니다. 가끔 어떤 영화들은 눈과 귀와 머리를 통과하여 그대로 가슴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나는 물론 영화의 우열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들이 어디에 머물러있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가 눈이나 귀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도 없고, 가슴에 머무른다고 해서 그렇게 인상적일 것도 없다. 다만, 어떤 영화들은 이상하게 밀고 들어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밀고 들어오는 영화들은 눈이나 귀에서 특정의 장면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나, 가슴을 가지고 심장을 가지고 숨쉬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예를 들어 <바비>와 같은 영화. 마지막 순자(김아론)가 공항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 때, 그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순자는 누구에게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가. 그것의 어떤 상징적인 것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장면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국 무력한 우리를 자각하도록 이 영화는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부, 우리는 한 작은 중소도시 공항에 도착하는 미국인 부녀를 본다. 그리고 곧 그들이 이곳에 한 소녀의 입양을 위해 왔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좀 이상하다. 입양을 위해 이 초라해보이는 도시에 잘 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왔다는 설정도 이상하거니와 조금은 사려깊어 보이는 딸 바비와 달리 아버지 스티브는 입양하려는 순영(김새론)의 가족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언행을 서슴치 않는다. 더구나 입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순영의 작은아버지(이천희)와 달리 순영과 순영의 아픈 동생 순자, 그리고 장애를 가져서 어린아이와 같은 그들의 친아버지는 이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원하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비밀은 이들 미국인 부녀가 데려오지 않았던 또다른 딸에게 있다. 그 딸은 심장에 문제가 있었던 것.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순영이 혹은 순자가 필요했다. 새로운 딸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심장으로서 말이다. 

이 사실을 애초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미국인 아버지 스티브와 작은아버지 뿐이다(딸 바비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물론 순영과 순자와 그들의 아버지는 모른다. 아니 이 사실을 중간에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은 한 명 더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이라는 존재 말이다. 그러므로 순자를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되어서(원래 미국에 보내려고 했던 것은 순영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미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순자가 결국 가게 된다) 슬퍼서 우는 순영과 친아버지에게 순자가 몇 번 반복하여 내뱉는 "내가 미국에 죽으러 가? 울긴 왜 울어!"와 같은 대사들은 그들에게 하는 대사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일깨우기 위해 하는 말들처럼 들린다. 그것을 보는 우리들은 망연해지기 때문이며, 아득해지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영화에서 관객은 실제로 물러나 있으며, 관객이 물리적으로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그러므로 '관객'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는 그 물리적인 불가능성과는 별개로 동시에 이야기와 미장센을 구축하며 관객과의 거리설정을 하며 관객은 때로 주인공이 되거나, 주인공의 곁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상당히 먼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 <바비>에서 이상우 감독이 택한 것은 관객이 한층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에 순영이 낯선 남자로 인해 위기에 빠지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 있으며, 이 물러난 위치에서 카메라와 그 뒤의 관객들은 지켜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영이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어서 단지 불안한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위치에 처하게 된다(그러므로 조마조마하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 이상우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상우 감독은 <엄마는 창녀다>, <아버지는 개다>와 같은, 제목으로 한 번 놀랐다가, 영화 내용으로 더 놀라게 되는 단지 제목만 도발적이 아닌 영화들을 찍었다. 이 중 내가 본 것은 <아버지는 개다>인데, 이 영화를 보면, 카메라는 이들 형제에게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관찰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관음의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일종의 사육의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는 어떤 날 것의 어떤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초기의 김기덕 영화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으나, 그 영화들과의 차이점을 한편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즉 이미지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는 김기덕의 초기작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인물들의 가까이에서 보는 이를 한껏 불편하게 만들었던 김기덕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보기에 보다 덜 불편하며, 그것은 사육자나 관찰자의 위치에 관객을 머무르도록 하는 이 영화의 거리설정에 그 하나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바비>에서의 가족관계를 전작의 기묘한 가족들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바비>에서의 아이들과 어른들은 뒤바뀌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애를 가져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친아버지와 돈을 받고 아이를 팔아넘기려는 작은아버지는 어른이라 볼 수 없으며, 꼬박꼬박 극존칭의 존대말을 쓰고, 다른 두 가족을 건사하는 순영과 일반적인 어른보다 훨씬 영악하게 행동하는 순자는 어린아이의 몸을 가진 어른과 같다. 아무도 어른이 되줄 수 없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 어른이 된다.) 

즉 우리가 이 영화 <바비>에서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딸 바비가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태에서 이들을 멀리서 관찰하는 우리들은 유일하게 미국인 부녀의 딸 바비에게 희망을 걸게 된다. 그러나 그 바비가 괴로워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뜻을 뒤늦게 추인했을 때, 우리의 기대는 헛되이 무너지게 되며, 영화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는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상우 감독은 관객과 이들 자매의 사이에 거리를 만들지만, 전작과 다른 점은 그 거리의 길이를 관객에게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거리의 길이는 마지막의 에스컬레이터의 길이만큼의 길이이다. 공항의 출국 게이트가 있는 이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의 끝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순자와 그 에스컬레이터의 밑에서 그 인사를 받고 있는 우리와의 거리. 즉 이 마지막에서 우리는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바비가 기꺼이 공범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순자를 미국으로 보낸 공범이 된다. 무력한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무력한 우리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느낌으로써 말이다. (물론 이를 정치적인 어떤 것으로 치환하여 말할 수도 있다. 미국이라는 아버지는 그들의 약한 딸, 그러니까 그들의 취약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 이 작은 땅에서 무엇인가를 도려내간다. 물론 도려내는 지점은 늘 그렇듯이 가장 약한 지점이다- 나는 FTA가 결국 서민에게 피해가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더 나아가면 이런 얘기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가 그들을 돈을 받고 팔아넘겼기 때문인가. 그것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때로 영화의 순자와 같이 기꺼이 미국인이 되고싶어 하니까(혹은 미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을 지지하니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바비인형이 그려진 가방, 그러니까 맨 처음 딸 바비가 들고왔던 가방에 이제 순자의 이름표가 붙은 것을 본다. 그렇게 순자는 스스로 바비인형이 되었다. 물론 인형에게는 심장이 필요가 없으며, 혹은 심장을 도려내어도 그 바비인형들은 여전히 웃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제 가장 어렵고 큰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그렇다면 그 무력한 자신으로 남아 순자의 인사를 받는 것, 그 구원불가, 구조불가의 거리를 느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할 수 있는 답은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말은 때로 영화의 윤리는 가장 비윤리적인 것을 '보는' 순간에 작동한다는 것. 그 영화의 윤리라는 것이 이 현실에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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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2-11-05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의 힘이 우리도 공모자며 무기력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거 같아요.
김소영 감독의 <나무 없는 산>(보셨는지?)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데 <바비>보다는 좀 따스하지만 근본적으로 당사자가 아니면 인척도 친척도 다 영화 관객과 같은 처지를 이해시켜요. 그래서 더더욱 누군가를 비난하는 게 쉽지 않고 그렇다고 앞장 서서 칸트식 선행을 베풀기는 더 어려운, 뭐 그런 상황이 벌어지니, 그저 눈 질끈 감는 비겁한 어른이 돼 버려서 기분이 영 찝찔해요.

맥거핀 2012-11-06 14:38   좋아요 0 | URL
<나무 없는 산> 오래전에 보기는 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아이들이 밥먹는 장면이었던가..기억에 조금 남아있습니다. 뭐 결국 무기력한 것을 보게 하는 것은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니까요. 자신이 비겁한 어른임을 자각하는 것은 적어도 비겁하지 않을 희망이 남아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천희 씨는 확실히 독한 연기를 해도 그렇게 독해보이지 않더군요.)

Arch 2012-11-0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내용과 상관이 없지만 저는 자꾸 이 구절이 떠오르네요.

'영화에서 그 무엇인가를 볼 때 사실 그것은 거기 없는 것이다... 영화는 우리들의 자발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재의 상대방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 상대를 성립시키기 위해 영화 안의 대상과 그 대상의 대상으로서의 영화 대신 그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절차로 발전하였다. 영화는 언제나 그것을 비판하려 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을 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을 익힌 예술이다.'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중에서>

저는 이 감독의 전작을 휙휙 돌려서 본 터라, 휙휙 돌려본 와중에 뭔가 좀 뻔하다는, 제대로 보지 않은 사람이 가질만한 생각을 했어요. 영화에 대해 말할 때면 자꾸 정성일씨의 말들과 음성이 생각나요.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한걸까.

댓글을 안 다는게 가장 좋은 방법같은데 맥거핀님의 글을 읽고 있다는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맥거핀 2012-11-06 20:55   좋아요 0 | URL
인용하신 그 부분 아마 김선일 씨 비디오 관련하여 나온 이야기 중에 한 부분이었죠?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노무현 정부의 다른 모든 것, 비정규직이나 FTA 같은 것을 이제는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해도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 정부를 지지할 수가 없어요.) 영화는 결국 누군가가 그것을 '본다'고 전제하여 만들어진 것일테니..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물론 정성일 씨가 말한대로 영화가 그것을 어떻게 구축해내느냐 같은 거도 중요하구요.

(아마도 이 책에도 쇼트에 대한 부분이 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예를 들어 숏을 나누는 것 같은거요. 숏을 나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을 보는 사람을 이 영화에 참여시키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숏과 그것에 대한 반응숏이라고 할 때 그 숏은 반응숏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객의 반응'이라는 것도 불러오니까요. (감독의 전작 얘기를 하셨는데, 저는 그 <아버지는 개다>에서 식탁숏이 생각이나요. 마주 앉은 네 가족을 잡은 초반의 숏-그 옆모습을 그대로 고정해놓고 지속시키는 그 장면의 어떤 무서움.)

정성일 씨의 글은 가끔 무엇인가(예를 들어 자의식)가 과잉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걸 쉽게 비판할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그 과잉된 부분만큼 묻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투로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아마도 제가) 이야기한다면 욕을 먹겠죠.

댓글 달 수 있으면 달아주시면 좋죠.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11-0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낮 보려고 찜한 영환데 아직입니다. 다음주에 봐야될 거 같아요. 영화의 윤리는 가장 비윤리적인 걸 보는 순간 작동한다ᆢ 자꾸 이 문장이 맴도네요. 영화보고 저도 생각 정리 좀 해봐야겠어요.

맥거핀 2012-11-06 20:53   좋아요 0 | URL
아..그러고보니 영화를 안 본 분들에게는 제가 너무 줄거리를 많이 늘어놓았군요. (경고문을 써놓기는 했지만요.) 근데 사실 그 비밀(?)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니까..영화 전단지에 줄거리 소개글에도 사실 영화의 거의 모든 줄거리가 들어있더군요. 보시고 나서 마지막에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실지 궁금합니다. (그러니 후에 글을 남겨주세요.^^)

그리고 그 옆에 포스터 반갑네요. 서칭 포 슈가맨! 저도 볼려고 마음만(?) 먹고 있는 영화입니다.

프레이야 2012-11-07 20:13   좋아요 0 | URL
네, 전 줄거리 다 알고 봐도 전혀 제 감동과는 무관하니 상관 없어요.^^
슈가맨,은 한 번 더 볼까 합니다. 참 좋아요.
음악이 너무 좋아 음반 구매했어요. 좀전에 도착해서 지금 플레이중입니다.^^

2012-11-0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해서나 영화에 대해서나 늘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글이 흥미롭네요. 늘 그런 글 쓰시지만.^^)

맥거핀 2012-11-11 13:04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늘 공감과 공감에 따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글을 흥미롭게 읽어주시는 것은 섬님이 그만큼 풍성하게 읽으시기 때문이죠. 기회 되시면 영화도 꼭 한 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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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들을 열어보기 위해서 먼저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는 것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 '유동하는(liquid)' 근대 세계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끊임없이 액체가 흐르는 것처럼 유동하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다. 미디어, 유행, 자본, 사조, 국가, 주권, 관계, 회사, 문화 등등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고, 동시에 그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개인도 당연히 역시 같이 유동하게 된다. 즉 개인들은 변화하고, 변화할 수 밖에 없으며, 전혀 원치 않더라도 변화를 강요당한다. 예를 들어 요즘에 가장 각광받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유연성(flexible)인데, 이는 유동하는 세계에 맞춰 자신을 유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이 갖춰지지 않았을 경우 개인은 그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흐름에 떠밀려 가라앉는다(고 위협당한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그렇고(생각의 유연성),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그렇다(자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는가). 막연한 얘기 같으니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급격히 녹아들어가는 극 지방의 빙하들을 생각해보라. 예전에는 하나의 커다란 대륙이었던 극 지방의 빙하는 이제 여러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의 집합체로 변모하고 있다. 즉 거대한 바다 위에서 수많은 얼음조각들은 말 그대로 유동한다. 그러므로 그곳에 살고 있던 북극곰들은 그 빙하들을 넘나드는 능력이라는 예전에 그리 필요하지 않았고, 유용하지도 않았던 능력들을 새롭게 갖추어야만 한다.

물론 이는 바우만이 지적하듯이 최근에 새롭게 재편된 세계이다. 예전의 세계에는 개인이 흘러다니지 않도록 하는 몇 가지의 보호막들(동시에 굴레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가부장이 지배하는 가정, 혹은 끈끈한 마을공동체, 혹은 안정적인 고용구조를 갖추는 있는 회사, 거대한 지배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 신의 가호를 받는 종교공동체 등등.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것이 거의 해체되었고, 모든 권위와 그러므로 동시에 그 권위로 지속되던 모든 보호막은 거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바우만의 표현대로 국가의 지배권력적으로 말하면 공위시대(한 국왕이 사망하고, 다음의 국왕이 즉위하기 전까지의 공백사태)이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정치를 닮아가는 종교(동시에 종교를 닮아가는 정치)'이다. 즉 최근에는 종교인은 점점 정치적으로 변해가고, 정치인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일단 저를 믿으세요."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의 불길한 초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단 믿으라는 이 시대에,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언술들이 잘 먹혀들어가는 이 시대에는 개인들은 무엇인가 붙잡으려 한다. 그러니까 북극곰이 떠다니는 해빙들에 어떻게든 매달려 있기 위해 꽉 붙들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뭐 트위터일수도 있고, 페이스북일 수도 있고, 쇼핑일 수도 있고, 인스턴트 섹스일 수도 있으며. 유행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물론 알라딘 서재일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것들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것은 점점 사람들을 각각의 벽 속의 한정된 구획 안으로 몰아넣고, 그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갇혀있도록 만들며, 동시에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극명한 하나의 예(아마도 바우만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 풍경을 본다면 이 책에 하나의 사례로 쓸 것이라 생각하는데)를 들어보자. 어떤 젊은 남녀가 커피숍에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오랜시간 그들은 그저 서로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대화는 트위터에 누가 이런 글을 올렸다느니, 카카오톡으로 누가 말을 걸었다느니 이런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무엇인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하나의 커다란 빙하가 아닌 현재와 같이 나뉘어진 유빙(流氷)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구획된 질서라는 커다란 빙하 속에 존재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존재증명의 한 방식이었지만, 현재 세계에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의 역할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그 매달려있는 세계가 떠밀려가버리면 끝이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존재증명의 가장 유용한 방식은 나를 수없이 다른 나로 쪼개는 것이다. 나를 나뉘어진 모든 유빙들에 최대한 많이 쪼개서 보내는 것. 예를 들어 트위터 속의 나, 페이스북 속의 나, 혹은 파워블로거로서의 나, 쇼핑몰 VIP 고객으로서의 나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벤치마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가장 유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가장 자신을 많이 쪼갤 수 있는 사람이 그 세계에서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최근에 가장 잘나가는 연예인을 어떻게 선정하는가. 물론 그것은 TV에,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가장 많이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다. 가끔 TV에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이 수없이 갈라진 자신을 어떻게 견뎌내지).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을 이들처럼 최대한 많이 쪼개고 싶어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디스토피아에 44개의 편지를 띄운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44개의 부표라든가, 구명보트라든가, 구명조끼, 혹은 우리들에게 보내는 동정을 가득담은 연서(戀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근대 세계의 근대인, 즉 우리들이 특별히 무엇인가를 엄청나게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 세계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극의 빙하들이 점차 부스러져 떠내려가게 된 것이 북극곰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국가가, 자본이, 종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아왔으며, 우리는 그저 보통의 인간들로 보통의 삶을 영위해 왔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어떤 특정한 특성을 기준으로 분포도를 그려보면 그것은 대체로 가운데가 불룩한 '종'의 형태를 가진 가우스 곡선(정규분포곡선)이 되며, 우리들 대다수는 그 불룩한 가운데에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우만은 묻는다. 어쩌면 그 가운데가 불룩한 정규분포라는 것, 그 정상성의 범주에 우리들 대부분이 들어간다는 것이 혹시 문제는 아닐까. 책에도 나오지만, 이라크 포로수용소나 히틀러의 수용소에서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가우스 곡선에서 가운데 불룩한 부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만한 아주 '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웃에게 친절하고, 가족을 잘 돌보며, 주어진 일을 성심성의껏 해내는,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요구하는 최선의 인물(그러므로 아마도 상당히 유연한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요구하는 것은 도리어 그 이상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성격을 가다듬는 것(여기서의 성격이란 '성격 좋다'고 할 때의 그 성격이라기 보다는 개성이나 결단성, 저항성 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이며, 또는 반항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요구하는 것들, 유연해질 것, 자신을 쪼갤 것, 무엇인가를 구매하고 소비할 것, 사이버 세계로 빠져들 것 등등의 수많은 유형의 무형의 규칙들에 대한 반항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는 그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싫어도 따라야 한다며 몇 가지 규칙을 내밀었고, 그 규칙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둘 빙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은 44개의 부표를 던져주며 말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규칙, 새로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생활방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까.

그것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생각하기'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있다. 몇 개의 편지들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역설적인 것들을 요구하고 있고(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기,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기.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을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역설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는 이곳이 유동하는 근대이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모두스 비벤디는 점점 의미가 없어지며, 유동하는 근대에서 만들어지는 메시지들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우리의 유동을 도리어 더 강화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쇼핑하라!'는 메시지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내부의 신호가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그 메시지를 내보내는 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 메시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뒤떨어진 적이 없었고, 그것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따라잡기 위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라는 메시지는 어떨까.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그에 따른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새로운 것들을 따라잡는 사이에 그보다 더 훨씬 새로운 것들이 몇 배는 더 만들어진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영원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외에도 쏟아지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그러므로 단지 '고독을 되찾으라'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을 되찾는 것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필요한 경계를 긋는 것이다(경계는 동시에 접속 지점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지적에 따르면 벽은 동시에 이곳이 통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행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벽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고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를 되살리는 첫 시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수없이 쪼개진 자신을 다시 조용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상이라고 규정되는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며, 이 유동하는 근대는 우리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면, 그러니까 떠다니는 유빙들을 꽉 붙잡지 않으면 우리가 차가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도 있다. 우리가 그 유빙들을 아무리 꽉 붙잡아도 그 유빙들은 언젠가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리고 당연하게도 더 꽉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녹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작은 유빙에서 더 큰 유빙으로 옮겨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빙들을 결합시키는 것, 더 이상 각자가 외로운 섬으로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시 역설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우리가 유빙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어느 정도는 녹여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역설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상이 되기 위해 정상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삶의 태도를 모방하기 위해서 특정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하며, 안전해지기 위해서 안전한 울타리를 없애고,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 고독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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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0-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쪼개기를 잘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이 힘들지만, 불필요한 일을 복잡한 사회에 살기 때문에 해야 하긴 하지만, 예를들면, 그런 배우가 현명한 것 같고요. 그게 아니라면 그 유명세를 얼만큼 힘들게 치러야 하며, 또 세상에서 자기 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걸 유명배우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서 어떤 '잘나가는'배우가 그런 걸 이미 알고있다는 듯 태연히 말을 하면 얼마나 기특해보이는지 모르겠어요. 포커페이스. 그 속이 어떤지와는 관련없이..

이 책이 편지글이었어요? 예전에 박범신 작가는 이 사회에 흑백 말고 회색지대를 허용하는 시선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기 주장을 뚜렷이 해서 남에게 휩쓸리지 말라고 하는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거냐,하면서 저 좀 방방 뛰었거든요. 그런데 두 가지가 결국 같은 말이었더라고요. 그러고 저는 한동안 침묵..

고독해질래요. 주말 잘 보내세요, 꾸벅.

맥거핀 2012-10-27 23:23   좋아요 0 | URL
그런데 확실히 자신을 쪼개다보면 가끔 어리둥절해지기는 하거든요. 어디가, 어떤 부분에서의 내가 진짜 내 모습이지 하면서요. (왜 광고 중에 그런 거 있었죠. 직장에서의 친절한 모습과 집에서의 화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집에서도 친절하세요..하는 거. 저는 그걸 보면서 집에서마저도 저렇게 회사처럼 생글거려야하나..싶어서 뭔가 좀 아득해졌거든요.) 하기는 몇 명 안되는 회사에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도 피곤한데,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잘 만들어서 보여줘야 하는 배우들은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맞는 말이죠. 요즘에는 회색지대를 보여주는 게 도리어 꽤나 용감한 선택의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어요. 요즘에는 대부분 흑백을 극명하게 보여주기를 원하죠. (그러니까 말씀하신게 결국은 같은 말이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데..그러면 곧 넌 우리편이 아니야, 이런 취급을 받으니까. (근데 가끔 궁금하기는 해요. 양비론, 양시론은 거의 항상 쓰레기 취급을 받는데, 그런데, 진짜 둘 다 옳거나, 둘 다 틀릴 때는 어떻게 해야하죠?)

그래요. 주말만이라도 고독하게 보내야죠.

Shining 2012-10-2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랑 뷔페를 갔는데 옆 테이블 여자애 둘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각자 핸드폰만 보면서 밥을 먹는 걸 본 적 있어요. 결코 가격이 싼 곳도 아니었는데 대체 왜 왔을까 궁금하더군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실컷 대화(수다와 토론과 진지함이 섞인..)만 하다 왔는데 말이죠. 저흰 둘 다 스마트폰도 없고_- SNS도 게임도 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요. 요새는 그게 일반적인 것 같더군요. 사랑에 풍덩 빠진 연애 초창기 남녀도 서로 손 잡고 눈만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습디다(말투가 왜 이래;).

각자 다른 장소, 다른 사람 앞에서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건 그러니까 적절히 쪼개져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현대인들은 참 외로움에 약하구나, 연약한 존재군, 싶습니다.

사람의 고독이란 필요선,이라고 여깁니다. 법정 스님말씀처럼 고독과 고립은 다른거니까요, 뭣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니까요.

맥거핀 2012-10-27 23:35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그런 게 흔한 풍경이죠. 가끔 오후 시간에 패스트푸드점 같은 데를 가면 잔뜩 앉아있는 중고생들이 각자 열심히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더라구요. (예전처럼 수다를 하느라 정신없거나 하는 것은 훨씬 덜하죠. 물론 중고생들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구요. 점심시간 회사구내식당은 또 어떻구요.)

근데 뭐 그런 휴대폰 중독자(?)만 뭐라 할 수 없는게 생각해보면 바우만의 말대로 대부분 현대인들은 뭐 한가지에 빠져있기는 하거든요. 동시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흔한 일이구요.(저도 지금 알라딘 서재를 둘러보며, TV로 축구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안하면 못 버티는 거죠. 물론 저도 그렇구요. 근데 문제는 점점 그런게 자기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술 권하는 사회라고 했지만, 이제는 중독을 권하는 사회랄까. 조용히 고독을 즐기는 것을 요새는 주위에서 거의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가만히 있는 것을 죄악시하는 이상한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죠.

암튼 제정신을 가지고 사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이상한 사회가 되고 있어요.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무엇이 제정신인지 점점 알수가 없어진다는 거죠.

아..근데 정말 보기드문 자매군요.(이번에 개봉한다는 모 영화가 살짝 연상이..)

Shining 2012-10-28 00:05   좋아요 0 | URL
수다 떠는 건 그거대로 비생산적일 때도 많고 시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같이 앉아서 핸드폰만 보는 아이들(또는 어른들)보면 왠지 씁쓸하더군요. 나이 든걸까요?

하긴, 주변에서 보면 대화를 하다보면 무슨 말이든 우선 검색하고 보더군요_- 전 검색을 못 하니 혼자 울그락불그락하며 기억해냅니다;;(지난번에 허우 샤오시엔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머리카락이 다섯 개는 뽑혔어요) 고민도 하고 떠올리기도 해야는데, 말만 막히면 바로 네이버를 두드리는 친구 모습에 혀를 끌끌 차는 노인네스러운 모습을...

그렇군요. 제정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둘 다 비문명인이라?-_ㅠ 어느 쪽의 보기드뭄입니까ㅋ

덧) 젖은 밤에 듣는 유재하의 음악은, 최고군요. 언제든 그는 최고지만요.

맥거핀 2012-10-29 17:44   좋아요 0 | URL
댓글을 읽다가 보니 얼굴이 붉었다, 파래졌다가, 머리를 쥐어뜯다가 하는 모습을 상상해버렸습니다.ㅎ 그런 것과 꼭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암튼 살짝이라도 잘못말하면 엄청 공격이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블로그에 글 하나 쓸때도 별 사소한 사항이라도 검색을 하게되요.(문제는 그러고도 늘 틀린다는 겁니다만...) 근데 사실 뭐 이게 무슨 외교협정문도 아니고, 몇 개 틀리면 어떻다고...

...원래 나이든 걸까요?라고 물어보는 게 나이들었다는 증거입니다.ㅋ

저도 요새 옛날 음악을 듣게 됩니다만, 그 중에 특히 들국화를 열심히 듣고 있어요. 물론 유재하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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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음식, 식품과 관련된 몇 가지 상식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요구르트는 장에 좋은, 심지어는 수명을 늘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식품이다, 가공식품에 들어간 첨가물들은 유해하며, 그러므로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규제에 언급되지 않은 첨가물은 안전하다),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는 그렇지 않은 채소보다 좋다, 비타민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하며, 비타민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포화지방, 트랜스지방 등은 우리 몸에 유해하며, 따라서 섭취를 극도로 제한하여야 한다 등등. 이 책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는 이러한 식품에 대한 상식들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 왔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추적하고자 하며, 그 중의 상당수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상식일 수도 있음을 밝히는 책이다. '어느 정도'를 강조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곧 만만치 않은 벽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구르트가 장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인가(어제 밤에 요구르트를 먹고 폭풍적으로 변비를 해결한 난 뭐지?), 비타민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비타민을 까드시고 갑자기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늘 점심에 밥 두공기를 해치우는 우리 회사 김과장님은 뭐지?),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와 일반 채소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건가(유기농 마니아로 유기농 채소가 암을 낫게 해주었다는 옆 503호 아줌마는 그럼 뭐지?) 등등.

 

물론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위의 상식들은 모두 과장된 것이며, 그것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하비 리벤스테인은 역사학자로서 이러한 주장들이 처음 어떤 식으로 생겨났고, 무엇으로 인해 강화되거나 버려졌으며, 현재는 어떤 위치에 와 있는지 여러 사례와 일화들을 통해 추적해 나가고 있다. 즉 이 주장들의 상당수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발표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지방과 콜레스테롤의 경우만 하더라도, 처음 주목을 받았던 것은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이었지만, 콜레스테롤의 경우 고밀도 지단백(HDL) 콜레스테롤과 저밀도 지단백(LDL) 콜레스테롤을 구분하여 봐야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고, 또 포화지방보다는 최근 트랜스지방의 존재가 새롭게 알려지면서 건강을 해치는 주범의 지위를 트랜스지방이 새롭게 물려받게 되었다. 즉 이 책에서 실질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주장이 거짓인가, 사실인가, 어떠한 식품이 몸에 좋고 나쁜가가 아니라, 식품에 관련한 어떠한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일종의 상식으로 굳어지기까지 개입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에 거대자본들과 학자들과 여러 이해관계자들은 어떤식으로 결합하게 되는지, 그래서 결국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자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지에 대한 경과들이다.

 

그 경과들에는 우리가 보다 예상하기 쉬운 것과 보다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메치니코프의 장에 대한 혁신적인 주장과 불가리아 목동들이 주로 마시던 요구르트에서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이 대형 식품회사들에게 어떠한 환호성을 올리게 해주었는지를 보는 것이 보다 쉬운 예라면, 식품에 대한 특정의 첨가물을 규제하는 것이 식품 회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인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보다 복잡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식품에 대한 특정(화학)첨가물을 규제하는 것은 식품회사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식품회사들은 이러한 첨가물에 대한 규제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했고, 실제로 이런 첨가물에 대한 규제는 특정회사의 제품이 유리해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예를 들어 케첩 생산에 있어서 벤조산나트륨에 대한 규제는 벤조산나트륨 없이도 케첩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하인즈와 같은 업체에게는 득이 되었지만, 아직 그러한 기술력을 갖추지 못한 경쟁업체들에게는 독으로 작용했고, 동시에 첨가물이 들어간 경우라고 해도, 기준치를 적용함으로서 기준치 이내에서 첨가물을 사용한 제품은 마치 정부의 공인을 얻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도록 해주었다. 또한 식품회사와 같은 거대자본만이 이러한 이해 메커니즘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AHA(미국 심장 협회)의 경우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고, 조직의 세를 키우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심장병에 대해 위협이 되는 식이지방의 위험성에 대해 관심을 높이는 방법을 택했고, 이는 식이 지방, 식이 콜레스테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이것이 콜레스테롤의 비중이 낮다고 광고하는 수많은 식품들의 판매에 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포화지방이 몸에 좋지 않은 것인가, 혹은 트랜스지방이 그야말로 모든 성인병의 적인가, 비타민의 효과가 실제로 미미한 것인가 등등의 식품의 안전성, 유해성에 대한 논쟁의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보다 넓게는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마케팅, 혹은 이와 관련하여 파생되는 여러 사회적인 문제에서도 그렇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예를 들어 요즘 방송에서 새로운 금맥으로 각광받고 있는 소비자고발 류의 프로그램들에서도 그렇다. 특히 종편 등에서 요즘 킬러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음식점 고발, 소비자 고발 류의 프로그램들인데,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소비자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목적하에 음식점들, 혹은 특정 식품들의 점검에 나선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특정의 제품들, 특정의 음식들을 잘못된 먹거리로 소개하기도 하고, 이에 더 나아가 특정 식당, 특정 제품들을 거의 반홍보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착한 식당'이라고 이름을 달아주며 말이다. 이 식당들은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착해서' 미칠 지경일 것이다). 물론 이는 저자가 논했듯이 최근의 현상만은 아니다. 계속 새로운 이슈들은 출현하고 있으며, 우리는 새로운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특정 식품을 먹지 않거나, 혹은 광적으로 먹는다. 그 누구도 자신의 건강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식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공포 마케팅이 잘 먹혀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건강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 외에도, 아마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저자의 논의대로 음식의 생산과 유통 과정이 점차 거대화되고 산업화되면서 그 음식을 섭취하게 되는 사람들과 이 과정들이 분리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먹을 거리를 자신의 주위에서 찾아야만 했던 과거, 혹은 자신이 재배한 작물들만 섭취해야 했던 과거에 비해, 현재는 수많은 음식들이 만들어진 완제품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배달되고, 거의 모든 소비자들은 그 제품이 어떤 식으로 재배되고, 유통되고, 무엇이 첨가되고, 무엇이 제거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간에 가지고 있지 않던 식품에 대한 공포가 새롭게 고개를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음식의 맛이나, 혹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식사를 한다는 개념이 점차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즉 요즘 사람들은 그저 배를 채울 것이 있음을 감사했던 과거와 달리 먹을 것이 건강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며,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으로 음식을 대한다. 즉 맛있고 싼 음식보다는 몸에 좋은 음식, 일일 권장량, 칼로리 따위가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건강에 대한 판단 권한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건강에 대한 담론, 몸에 좋은 음식을 판정하는 기준은 아직도 소위 '전문가'들의 손에 놓여져 있고 앞으로도 그들 손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의학적 발견이니 성분의 분석이니 하는 것은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고, 그러한 담론의 개발과 유통은 항상 ('내'가 아닌) 전문가의 손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사, 영양학 전문가들의 한마디가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여담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이것은 다른 상당수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교육학 같은 분야를 보면, 여러 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들을 어떤 식으로 팔아먹는가를 보면 이 책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특히 아동교육 분야에서 이러한 산업은 번창하고 있는데, 감성지능(EQ), 다중지능, 몰입, 피아제, 몬테소리의 뭐니 하는 것은 그 효용과 별개로 여전히 잘 팔리는 상품이다.)

 

그러므로 사실 맥이 빠지는 것은 이 마지막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들을 사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콜레스테롤의 어떠한 부분이 정말 유해한지를 밝혀내고, 비타민이 실제로 우리 몸에 큰 효과를 미치는지 스스로 밝혀낼 수 있으면야 좋겠지만, 그건 우리 몫이 아니다. 집앞에 커다란 밭을 만들어 거기에서 나오는 음식들만 섭취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더구나, 그 밭을 어떤 식으로 경작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참고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기서 어떤 영양소가 파괴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마지막에 내놓고 있는 조언, 즉 식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표될 때 '누가 이익을 얻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라든가, 혹은 다양한 음식을 먹되 과식하지는 말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라, 모든 음식은 '적당히' 먹어라 등의 이야기를 보면 '이러한 당연한 얘기 할려고 지금까지 이 긴 얘기하셨쎄요?'라고 묻고 싶지만, 뭐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무엇인가를, 그것도 뒤에 식품첨가물의 목록이 잔뜩 나와있는 가공식품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두 배 더 비싼 유기농 식품 코너를 기웃거리거나, 비타민 정제 같은 것은 안 살 것 같기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비타민 정제를 먹으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오줌줄기의 색깔 외에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어떤 신화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방식은 흥미로웠고, 그것의 쇠퇴를 보는 과정도 꽤나 재미있었다. 또한 그것은 현재의 어떤 음식이나 건강 문제를 둘러싼 신화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생명 연장의 꿈을 꾸었고, 140세까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71세에 사망함으로써 그 자신이 몸소 반증을 보여준 메치니코프 박사에게는 명복을 빌어 드릴 뿐이다. (광고 속 사진은 거의 100세 넘은 산신령처럼 보였는데...)

 

 

덧.

아..하나 덧붙이자면, 저자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O157균'을 '0157균'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자꾸 걸렸다. 여기서의 O(알파벳 오)는 균체항원(O항원)을 말한다(고 백과사전에서 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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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0-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변비폭풍해결이랑 비타민까드시고 밥두그릇과장님 읽다가 뒷걸음질친 끝에 머그잔 커피 쏟을 뻔(!) 했어요. 홀랑 차버렸어요-_- 저기까지 날아갔는데, 쏟았으면 맥거핀님 욕하면서 치웠을 거예요ㅎㅎㅎ

음식은 어쨌거나 좋아하는 걸 좋은 마음으로 먹으면 큰병은 안걸리는 거라고 믿고 싶은데, 저는 술담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경험반 생각반. 근데 그것보다 더 안 좋은 게 스트레스.. 저는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둔한 편이라 그냥 맘편히 살아요. 적당한 게 좋은 거죠, 적당한 게.

오늘 저녁 메뉴는 뭡니까?(이런 리뷰에 이런 댓글..이라 미안합니다..)

맥거핀 2012-10-23 14:04   좋아요 0 | URL
어제 저녁 뭘 먹었더라...나물 잔뜩 들어간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채소가 몸에 좋으니까 먹자 그런건 아니고, 마땅히 땡기는게 없어서..말씀드렸듯이 저는 애기입맛이라 나물류는 별로 좋아하지를 않아요.

요즘에 보면 먹는 것의 문제가 정말 자주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것 같아요. 방송에서도 먹는 것 관련한 것을 정말 많이 하구요. 근데 그런게 너무 많다보니 요새는 뭐 어떻다 그래도 대강 그러려니 합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가끔 그런 맛집 관련한 프로그램 보면서 밥을 먹고 있으면 이게 바로 현대판 자린고비구나..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늘 사실 없어서 못먹죠. 있으면 대체로 따지지 않고 잘 먹습니다.^^

Shining 2012-10-2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맥거핀님은 책 내용을 쓰실 때, 이해하고 기억하고 쓰시는겁니까? 설마설마..
페이지 기억해뒀다 옮기는거 맞죠? 제발제발..

마치 책내용을 몽땅 기억했다가 이런 내용도 있었지, 싶은 이 여유로운 글쓰기는 뭐죠_- (이런 리뷰에 애먼 시비..라 죄송합니다..)

맥거핀 2012-10-23 14:12   좋아요 0 | URL
어제 저녁에 뭐 먹었는지도 가물거리는데, 그럴리가요. 뭐 대체로 그렇듯이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는 더 기억이 잘 나는 것 같아요. 소설이나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을 기억하기 때문에 디테일을 살리는데 별 문제가 없지만, 이런 책은 사실 뭐 기억이 토막토막 나죠. 별로 아니다 싶은 부분은 기억에서 자체적으로 소거합니다. (뭐 그러니 리뷰를 쓸 때는 책을 참고할 밖에요.)^^

뭐 근데 Shining님도 그러겠지만, 뭔가를 쓸 때는 책을 덮고 다시 책을 안 편 상태에서 휘리릭 나오는 리뷰가 훨씬 더 좋은 리뷰가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뭐였더라..하면서 기억을 짜내는(그래서 결국 다시 책을 찾아보는) 리뷰는 대체로 엉망이죠.

감은빛 2012-10-2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았다면 절대 관심갖지 않았을텐데,
맥거핀님의 글을 보니 관심이 갑니다.
다만 맥거핀님이 언급하셨듯이,
굳이 읽지 않아도 될 책이다 싶은 생각도 드네요.
게다가 출판사가 왠지 맘에 들지 않아서요.

맥거핀 2012-10-25 21:14   좋아요 0 | URL
아마 저도 서평단 도서가 아니었으면 읽지 않았을 겁니다. (출판사도 저도 좀 그렇고요. 저도 무의식적으로 몇 개 피하는 출판사가 있죠.^^;)

마지막 결론이 좀 맥빠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들이 많아요. 현재 우리나라의 식품, 음식에 대한 담론들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있나를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도 하구요. (예를 들어, 주로 공격받는 식품들의 상당수에 대기업 제품들은 종종 제외되기도 하구요. 식품, 의학 등의 분야에서 종편 방송 같은 것을 보면 예능 같기도 하고, 홍보 같기도 하고, 교양 같기도 한 모호한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의 출판사는 좀 난센스네요.)
 

 

심연 속으로 (Into the Abyss), 베르너 헤어조그, 2011

리스트 (LIST), 홍상수, 2011

잿가루 (Ashes), 아피찻퐁 위타세라쿨, 2012

샤크다 (Sakda), 아피찻퐁 위타세라쿨, 2012

일장춘몽 (Dream is Awakening), 궈펑 허, 위에 첸, 2011

 

 

미국의 어떤 사형수를 근접하여 보여주며 사형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여러 것들에 대해 묻는 베르너 헤어조그의 다큐 <심연 속으로>는 정공법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런 영화에서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그 사형수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너 헤어조그와 같이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그는 영화 시작 부분에 자신이 사형제도를 반대한다고 밝힌다), 보다 쉬운 방법은 조금은 논쟁이 될 수 있는 사건, 혹은 그래도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사형수를 선택하여 그를 조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누군가. <아귀레, 신의 분노> 등에서 정면돌파를 선택했던 베르너 헤어조그가 아닌가. 그가 선택한 두 명의 범죄자, 이제 스무살을 갓 넘은 것으로 보이는 마이클과 그의 공모자 제이슨은 거의 구원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고작 차 한대를 훔치려고 세 사람을 죽였고, 도주하다가 잡혔다. 이들은 게다가 이어지는 인터뷰들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듯이 보인다. 모두가 상대방이 더 큰 잘못을 저질렀고, 자신은 단지 상대방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항변한다.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더 기분이 묘해진다. 이들이 그 세 사람을 죽이고, 그 멋드러진 차를 몬 시각은 고작 72시간이 채 안되었고(그러니까 이들은 단지 3일간의 어떤 '즐거움' 을 위해서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었다), 40년 형을 선고받은 제이슨(제이슨은 마이클의 종범이라는 것이 인정되어 형이 감형되었다. 마이클은 사형선고를 받았다)의 아버지는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며, 자신이 제이슨을 잘못 키웠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감옥 안에서, 자신도 예전의 어떤 범죄 때문에 아들과 동일하게 40년 형을 받아 복역하는 와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제목에서와 같이 관객을 깊은 '심연 속으로' 빠뜨리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저와 같은 자들에게 구원이란 불가한 것이 아닌가. 저들은 그야말로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저들을 사형시키는 것이 바로 공정한 사회정의의 실현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죽일만한 사람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동시에 다른 질문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경우(그러니까 살려둘만한 경우)가 있을까. 예를 들어 어떤 중대한 이유 때문에 세 사람을 죽였다면, 그는 살려둘만한 여지가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도 제이슨의 경우 마이클의 지시를 받고 행동했다는 이유로 사형대신 40년 징역형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온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이런 영화의 정공법은 결국 이러한 질문이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우리는 무슨 기준에 의거하여 결정하는가. 그 기준들이란 과연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정도로 정당한가. 그 기준을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즉 살려둘만한 사람과 죽일만한 사람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반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물론 이의 반대편에서의 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다른 한 인간을 죽인 인간은 이미 다른 인간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가 판단하여 결정하였으므로, 그 스스로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논리.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부분은 남는다. 과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사형제'라는 제도로 인해 허용되어야 하는가.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닌가.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다른 인간을 죽여야만 하는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사형제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인간을 죽이는 것을 허용한다는 이 모순된 질문에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겠고, 동시에 사형제와 범죄율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끔 그렇다면 당신의 부모나 자식이 죽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누군가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된다면, 나도 분명 그 누군가가 대신해 죽기를 바랄 것이며, 분노에 몸서리칠 것이며 그를 내가 죽이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것을 제도로 만드는 것과는 이미 별개의 위치에 와있다. 법이라는 것은 그런 사적복수를 가능하게 하지 않기 위해 탄생된 것이며, 법은 그런 사적복수의 집합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적복수의 집합이 법이라면 법률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법은 가장 이성적인 판단의 집합체로서 존재해야 하며, 가족을 잃은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일 것이므로.)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아주 오랜기간 사형집행인으로 살아오다가 한 사형수가 죽는 것을 보고 갑자기 충격을 받아 연금을 포기하고 사형집행인의 길에서 벗어난 한 남자의 케이스. 사형인을 사형집행 침대에 데려가고 그를 침대에 묶고, 약물을 주입하고, 죽은 시체를 시체보관소에 옮기는 등의 합법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이 사형집행인을 그렇다면 그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다른 하나는 사형 집행 과정에 대한 정밀한 묘사 중 사형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면 실시될 수 없다는 규정에 대해서. 예를 들어 사형수의 질병과 같은 심각한 신체적 문제로 사형이 집행될 수 없다면 사형이 연기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 살려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기 위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는 바로 그 순간'을 보기 위해 사형을 집행한다.

 

 

                                                   (<샤크다>의 한 장면)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몇 가지의 단편들이다. 아피찻퐁 위타세라쿨의 두 단편 <잿가루>와 <샤크다>는 형식상의 실험이 인상적이다. <잿가루>는 흔들리는 이미지들을 연속하여 이어붙임으로써 꿈을 효과적으로 우리의 눈앞에서 재현한다. <샤크다>는 마치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의 메시지대로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육체에 혹은 기계에 갇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거나 가난한 자가 되거나 단지 목소리가 된다. 장률 감독의 <중경>에도 나왔던 배우이자 음악가인 궈펑 허가 그의 연인(이자 역시 음악가인) 위에 첸과 만든 <일장춘몽>은 옛 카바레의 전통을 계승하는 듯한 그림자극의 형식도 인상적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 감독의 말도 인상적이다. 나와 너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는 '내가 보는 나, 내가 보는 너, 네가 보는 나, 네가 보는 너'라는 네 가지가 늘 존재하며, 이 네 가지는 매우 다른 것이다.

 

물론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홍상수의 단편 <리스트>이다. <리스트>에는 다시 한 모녀가 등장한다. 딸 정유미와 어머니 윤여정. 이 조합을 아마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의 바로 그 딸과 그 어머니다. 배경은 <다른 나라에서>와 같다. 딸과 어머니는 바로 그 펜션에 갇혀 있으며, 이유도 동일하다(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장면을 그대로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누군가의 사업실패로 이 펜션에 갇혀 있으며 무료해 미칠 것 같은 상태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와 차이점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의 딸이 시나리오를 썼다면, 여기서의 딸은 리스트를 쓴다. 자신이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 그런니까 리스트를 쓰는 것과 이야기를 쓰는 것의 차이다(또 '차이'인가,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다음 문장이 기억이 났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내가 여기서 써 보일 수 있는 것은 단지 리스트다. 소설도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꿔 말해, 그것은 패스티쉬(pastiche)이다." - 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p.164).

 

 

뭐 아무튼 그러므로 리스트는 시나리오, 즉 이야기라는 것과 미묘하게 달라진다.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안느는 자유롭게 움직였지만, 리스트는 제약이 따른다. '실현가능성'이라는 제약이 말이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에서는 안느와 교수는 맛집에서 회를 먹지만, 이 리스트는 '맛집에 가서 먹는다'가 아니라 '맛집을 찾아본다'가 되며(즉 '맛집'이라는 것은 여기에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배드민턴을 친다'가 아니라 '배드민턴을 칠 사람을 찾아본다'가 된다. 그리고 딸과 어머니는 이 리스트를 하나하나 처리하려고, 아니 사실은 정말 무료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영화가 꽤나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딸과 어머니는 한 남자(유준상-그는 이 영화에서는 구조대원이 아니라 유명 영화감독으로 나온다)를 만나며 이 리스트에 있는 10가지가 넘는 모든 항목은 점차 현실이 된다. 물론 영화가 마무리로 가까워질수록 관객은 이 마지막을 대략 짐작한다. 실현되는 리스트, 그것은 분명 꿈일 것이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딸은 리스트를 쓴 테이블에서 엎드려 자고 있으며(<다른 나라에서>에서 앉아서 시나리오를 썼던 바로 그 테이블이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깨워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리스트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꿈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루고 싶은 것과 그러나 이뤄지지 않는 것. 꿈이라는 말에는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희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그 꿈이라는 말은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아주 꿈을 꾸고 있구나. 꿈 깨."할 때의 그 꿈 말이다. 이는 이 영화와 <다른 나라에서>를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다른 나라에서>는 화려하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세 층위를 거치며 점점 현실과 비슷해지며, 결국에는 희망에서 꿈을 거쳐 현실의 어떤 것과 비슷해졌다. 반면 리스트에서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리스트'가 점점 실현이 되어가는 꿈이 되었다가 그것은 중의적인 다른 꿈, 그러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한낱 꿈으로 되돌아온다. 즉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나오는 것과 꿈에서 현실로 빠져나오는 것의 차이. 이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속성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꿈은 꿈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서 존재하는 이 영화라는 것.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가 알고 있지만, 영화관에서는 누구나 꿈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러 영화관에 간다. 꿈을 꾸는 것은 언젠가 꿈에서 깰 것을 각오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의 꿈도, 혹은 누구의 리스트도 실현불가능하다고 욕할 수 없다. 우리는 그 각오를 존중해주어여만 한다.

 

이번 CINDI의 주제말이 'CINDI is not Digital'이던가. 그러므로 그건 디지털이 아니다. 그건 꿈이다. 혹은 그건 누군가의 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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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0-19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달에 본 영화를 9월달에 쓰고, 10월달에 쓰고...아주 막장이구나.

아이리시스 2012-10-19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두 번 읽었어요. 잘 모르면서 영화평론가들이 쓴 책을 하나씩 사들이는데 비슷한 느낌에서 맥거핀님 글은 두 번 읽고싶게 해요. 뉴스 간만에 보니까 사형제에 관해선 사회면이 떠들썩하던데, 살인하고 사형선고 받기도 꽤 어려운 모양입니다(농담이 아니에요ㅠ) 기본적으로 저도 사형제에 관해선 같은 생각. 우리 가족 건드리면(강아지까지도) 다 죽여버릴 거예요,이런 마음가짐.

근데 단편들이 좋네요. <일장춘몽> 감독의 말. 그럼 저는 요즘 '내가 보는 나'에 대해 많이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창피해서 글로는 못쓰고 쓸까봐 글을 자꾸 걸러내는 중인 것 같아요. 그러면 11월에도 뭐가 나오겠네요. (좋아요 좋아)

맥거핀 2012-10-22 16:07   좋아요 0 | URL
그 <일장춘몽>이라는 작품에 보면 인형이 나오는데, 그 머리에 '나'라는 글자와 '너'라는 글자가 붙어있거든요, 아마도 내 안의 많은 문제들이 내가 보는 나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아요. 뭐 아무리 그래도 그 둘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요즘에 뭐 쓸 얘기가 없어서 예전에 본 영화들 재탕하고 있어요. 근데 재탕을 할려고 해도 머리 속에 남아있는게 별로 없어서 힘드네요. 아이리시스님도 그렇고 아주 오랜전에 본 것에 대해 글 쓰시는 분들 보면 대단..

2012-10-2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리스트를 생각해 보게 되는군요..ㅎ 그나저나 위타세라쿤 영화는 평생 한 편도 못 봤고, 홍상수 영화는 6년 내에 한 편도 못 봤어요.. 저의 영화광으로서의 리스트는 홀쭉해져만 가는군요.ㅎ

맥거핀 2012-10-22 16:10   좋아요 0 | URL
저도 뭐 남말할 처지는 아니고, 제 리스트는 요새 빈곤하다못해, 아주 너덜너덜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섬님은 최근에 저보다는 영화를 자주 보시는 것 같기도 한데요?
 

 

 

<씨네21>에서는 매년 가을 즈음에 영화를 이야기하는 책에 대한 기획 기사를 낸다. 이번에는 최근 1~2년 안에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들 중에 읽을만한 몇 권의 책들을 여러 평론가가 각각 1권씩 추천하는 형식이다. 기사의 앞머리에 붙은 정성일 평론가의 글대로,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책)을 읽는 것'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책)들을 읽지 않으며, 영화(책)을 읽는 사람들은 (최근의) 영화들을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몇 가지의 가정들이 맞는 것일까. 최근의 (대중)영화들은 영화에 대한 사유의 지점이 존재할 수 없도록 밀어내고 있으며, 반면 영화에 대한 고루한 이론들은 최근의 영화들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점점 무딘 칼이 되고 있으며, 도리어 그 이해를 방해하는 것일까. (여기에 소개된 상당수의 책들이 이미 자국에서 오래전에 출판된 책들이거나, 고전 영화들을 다루는 책들이라는 점은 하나의 묘한 시사점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대상이 되는 대다수의 영화들이 최소 20년도 더 된 영화들이라는 점.) 정성일 평론가는 약간 다른 시선을 제안한다. 그것은 영화와 책을 억지로 묶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가 다른 꿈이자 다른 욕망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둘을 오가는 발길을 인정하는 것. ("만일 영화가 꿈이라면 그것을 선택한 행위가 당신의 욕망인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욕망인 것이다. 그때 책은 당신의 욕망에 대한 해석의 판본이 아니다. 그건 다른 꿈 안으로 당신을 끌어당기는 다른 욕망이다. (중략) 그래서 영화를 본 내가 더 잘 돌아오기 위해 더 멀어지는 행위이다.")

 

말이 필요 없는 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이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구조주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영화에 대해 기호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이다. (제목인 '에세이'에 속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상당히 난해한 책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자신이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여러 (절망적인)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이 난해한 독서에 대해 겁을 주는 것으로 도전의식을 자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영화 이론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이거나, 기호학을 공부하는 전문적인 아카데미의 학자이거나, 1960년대 구조주의의 한 경향을 연구하는 사상사의 연구자가 아니라면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의 독서를 말리고 싶다.") 나는 이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이 책의 조각난 일부분을 일본어 번역본으로 접해야만 했던 정성일이 처한 상황보다는 조금 좋은 상황에 놓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부산시네마테크의 원장으로 있는 허문영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토마스 엘새서와 말테 하게너가 공저한 <영화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라는 책이다. 허문영 평론가는 좋은 영화개론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이 책과 로버트 스탬의 <영화이론> 두 권의 책을 말하고 있는데, 이 책이 스탬의 그 책보다 확실히 나은 점은 이 책이 제시하는 분류의 방법, 관류하는 질문의 태도라고 말한다. 즉 이 책은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창과 틀', '문과 스크린', '거울과 얼굴', '눈과 시선', '피부와 접촉', '귀와 공간', '뇌와 정신'이라는 창의적인 새로운 분류틀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 새로운 분류틀이 우리의 머리속에서 기존의 영화들을 새롭게 재배열할 수 있게 해준다(그럼으로써 새로운 사유가 출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들에 대한 애정을 늘 드러내는 한창호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현대 영화 이론: 1945~1995년의 영화이론>이다. 이탈리아에 유학했었던 한창호 평론가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탈리아 영화학자가 쓴 이 책에 대한 애정과 공포심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 책은 영화이론의 발달을 연대기순에 의해 세 가지의 패러다임 - 즉, 존재론적 이론, 방법론적 이론, 특수성의 패러다임 - 으로 나눈다. 위의 책과 비교해서 보다 고전적인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라는 시간의 연대기를 차분히 살펴보는 데에는 이런 접근방식이 보다 나을 수도 있다. 다만 번역에 있어서의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므로 그 부분은 주의할 것.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김영진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하시모토 시노부의 <복안複眼의 영상: 나와 구로사와 아키라>이다. 이 책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자였던 하시모토 시노부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의 작업 과정과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인데, 특이한 점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그의 영화들에 대해 냉정하게 비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진 평론가가 인용한 다음의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구로사와는) 좋든 싫든 간에 새로운 작품을 모색하기 위하여 밟지 않으면 안되는 발걸음이라고 생각되어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에, 장인의 작업에는 큰 성공은 없어도 실패는 극히 드물고, 성공과 실패가 항상 종이 한장 차이인 예술가에게는 성패의 운명이 숙명적으로 따라다닌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예술가가 되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니까 구로사와 아키라는 장인의 길에서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나, 그가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가끔 남들이 '예'할 때 '아니오'를 보여주는 신선한 평론가 남다은이 추천한 책은 하워드 휴스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심장을 겨누고 인생을 말하다>이다. 남다은 평론가는 글 내내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길티 플레저'를 고백하고 있는데, 그의 영화 출연작이나 그가 연출한 영화들과 그가 평소에 하는 언행의 사이에 있는 있는듯 없는듯한 간극을 생각해보면 그의 이런 '의심스러운 애정'이 이해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아무튼 나 역시 그가 공화당 어쩌구 할 때마다 그게 뭔소리인가 싶고, '좋은 보수주의자', '진정한 보수주의자'라고 할 때마다 그게 뭐예요, 그거 먹는 거예요?,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그가 앞으로도 오래살아 더 많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 밖에 <씨네21> 자체적으로 추천한 다른 책들은 위에서도 나온 로버트 스탬의 <영화이론>과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자서전 <로저 에버트: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학에서 '이야기'를 건져내려는 노력 <영화 우화>(여기에서의 '우화'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muthos, 즉 이야기를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 필름 영화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디지털 영화 미학>, '느와르'라는 장르인 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은 것의 정체성 찾기 프로젝트, 알랜 실버, 제임스 어시니 공저의 <필름 느와르 리더: 느와르에 관한 모든 것>까지 다섯 권이다.

 

 

 

 

이상 도합 열 권(사실은 11권)의 책. 올해 안에 모두 읽자(는 것은 당연히 꿈, 그러니까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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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1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이라도 거짓말이라도 좋은데요.^^ 별찜해두고 참고하겠습니다.

맥거핀 2012-10-15 12:58   좋아요 0 | URL
막상 써놓고 보니 올해가 별로 안 남았다는...시간이 빠르군요. (근데 사실 별찜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응?했어요. 찾아보고 알았죠. 알라딘 이런 기능도 있었구나..)

넙치 2012-10-15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책에 신경끈 지 너무 오래된 걸 상기시켜 주시네요. 덕분에 저도 한번 뒤적여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2-10-15 12:59   좋아요 0 | URL
네..저도 의지를 다지는 의미로 굳이 이렇게 글로 남깁니다. 좀 가벼운 책보다는 이론서 격의 책들이 많아서 녹록하지는 않겠네요.;

Shining 2012-10-1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 주 씨네21에 이런 내용이 있군요. 저는 기차 타면서 샀는데, 박찬욱-김지운-봉준호 감독들의 이야기가 있던데 그건 지난주 건가요?(기억이 가물;) 영화이론서는, 스물 한두살쯤에 많이 읽고 그 뒤엔... 그것도 아주 전설적인 책들만 읽은 초급수준이에요_-

이렇게 글 읽으니 오랜만에 이론서 읽고 싶네요. 먼저 읽으시면 간단한 단평이라도 남겨 주시와요 :D

맥거핀 2012-10-18 12:45   좋아요 0 | URL
아마 말씀하신 것은 지난주 책인 걸로 사료됩니다. 사실 정성일 평론가의 논의가 어느정도 맞는 말인 것도 같은게, 영화이론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것은 일시적으로 도리어 영화감상을 저해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보면서 자꾸 다른 걸 생각하게 되니까. 그럼에도 결국은 그것이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해준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구요. (근데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무슨 이론이 어떻고 저떻고, 무슨 주의가 어떻고, 하는 것은 뭐 그닥...) 뭐 암튼 그래서 이론서를 안본 것은 아니지만요.^^

시간이 없어서 댓글만 남기고 갑니다.

아이리시스 2012-10-1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역시 로저 에버트..가 제일 보고 싶어요. 그런데 영화이론서를 봐서 맥거핀님 리뷰는 감상리뷰에서 벗어나시잖아요. 저는 그게 좋아요.

저는 시간이 많아서 댓글만 남기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제 갑니다..(안녕!)

맥거핀 2012-10-19 17:05   좋아요 0 | URL
아..근데 저 마지막 문장이 오해의 소지가 있군요. '그래서 안봤다' 그 얘깁니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요.; 로저 에버트 저 책 산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사실 한 장도 안펴봤다는..에버트 씨의 저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민망해 죽겠어요. 빨리 읽어야 하는데.

아니..시간도 많으신 분이 자주 좀 오세요. 오셔서 글도 쓰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