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2012

 

 

 

(영화의 전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내용을 보니, 원주율이 주소명인 사이트가 있다. 일본의 한 기업에서 만든 '3.1415926535898.com'이라는 주소를 가진 이 사이트는 외계인에게 지구를 홍보하는 사이트인데, 다른 건 몰라도 그 주소의 발상이 재미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적어도 원주율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는 것. 다시 말해서 비록 숫자라는 제한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값 만큼은 우주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일종의 우주의 소통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미지와의 조우>에서 '화음'이 일종의 언어였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1977년 쏘아 올려져 하염없이 외계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호에는 55개의 언어로 된 인사말과 함께 아름다운 화음이 담긴 여러 음악과 원주율(파이)을 포함한 수학기호들이 실려있었고, 외계의 지적인 신호를 찾는 SETI 프로젝트 같은 것에서도 원주율은 일종의 소통언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수라즈 샤르마)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의 어떤 아름다운 수영장에서 수학기호 파이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하게 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심지어 외계인도 알고 있는 보통의 언어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서 외계인에게 보내는 우리가 당신들과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던 원주율(파이)로 그의 이름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이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제 '리처드 파커'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호랑이에 대해서 말해보자.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이 '리처드 파커'라는 이 이름은 원래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외계인도 알 수 있는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가진 한 소년과 어떤 고유의 내막을 가지고 있는 특정의 이름을 가진 호랑이가 같이 지내는 227일 간의 공존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만을 놓고 보면 사실 이 두 개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이 두 개체가 사실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호랑이는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사실은 '호랑이'와 같은 보통명사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는 이성에 바탕을 둔 메시지, 즉 인간과 짐승은 다르다는 메시지와 조금은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던 것은 일종의 동물의 생존본능이다. 즉 호랑이가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이는 종교나 인간의 감성으로 재단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을 아버지는 이야기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생태계라는 큰 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가 된다. 더 힘이 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으며, 대신에 약한 동물은 왕성한 번식력에 따른 많은 개체수로 보상받고, 또 먹이사슬의 구조에 의해 그 개체수는 일정하게 유지가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수없이 많은 날치떼가 더 큰 고래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바다는 곧 날치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 반례가 영화 속 미어캣으로 뒤덮인 섬이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그 섬이 식인의 섬, 죽음의 섬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그것은 미어캣의 존재로도 설명이 된다. 그 수많은 미어캣의 존재는 그곳이 생태의 섬이 아님을, 생태계의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곳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것에는 영역의 문제가 있다. 이런 수많은 힘이 다른 동물들이 이 지구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게는 배 위에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공존하기 위해 각자의 영역이 필요했음을 통해서 볼 수 있기도 하고, 크게는 바다 위에 던져진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존재로도 알 수 있다. 즉 바다라는 짠물은 그들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다라는 지금까지 지냈던 곳과 전혀 다른 영역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어야만 했다 

 

 

즉 이 파이라는 인간과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의 바다 위의 227일은 다른 여러 가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공존의 원리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에는 생태계의 균형과 영역의 확보가 들어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호랑이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성적인 믿음으로 생각해보면 둘 중의 하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라졌어야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래서 이야기를 들은 이성적인 일본인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파이에게 다른 이야기를 요청한다. (예를 들어 그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지적했듯이 사실은 두 이야기는 형태는 같다.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에는 종의 차이가 있었고, 두 번째에는 같은 인간 종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긍한 것은 결국 두 번째 이야기이다. 즉 같은 종 사이에서 벌어진 지극히 배타적인 이야기가 사실은 이성적인 그들이, 어쩌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태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사실은 다른 종이 다른 종을 잡아먹는, 공격하는 이 첫 번째 이야기가 실제 생태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아주 지극히 특수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그로테스크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므로 사실 첫 번째의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본 이야기는 지구에서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이에나는 오랑우탄이나 얼룩말을 공격하며, 물론 그런 하이에나는 호랑이 앞에서 꼼짝을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즉 개체가 멸종하고 있지 않는 것은 이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것에는 위에서 말한 절묘한 생태계의 공존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생태계는 너무나도 절묘하게 짜여져 있어 그것에서 우리는 그것을 관장하는 어떤 다른 존재, 예를 들어 신을 상상하게 된다. 이 신이 정해준, 각자의 영역에서 적절한 숫자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커다란 동물원, 그것이 어쩌면 배, 혹은 지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이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 둘의 기적적인 생존에도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물에서 건져주었고, 파이는 그가 되뇌이듯 리처드 파커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또한 파이가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큰 배에서 살아남은 것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선상으로 나왔기 때문이며, 그가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을 때 신은 그에게 떠다니는 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계속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공존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신 외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공존이라는 것에는 '매우 다름' 혹은 '차이'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것. 우리가 '호랑이와 인간의 공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둘이 이미 매우 다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즉 공존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것은 물론 호랑이와 인간만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파이 안의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종교의 공존, 혹은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와의 공존 같은 경우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흔히 공존보다는 비공존을 믿는다. 즉 서로 다른, 그것도 아주 이질적인 호랑이와 인간이 공존했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지만, 같은 종인 인간 끼리 비공존했다는 이야기를 결국에는 믿으며, 절대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믿을 수 없는 공존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는 벌어지고 있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계에서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그러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말이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잘짜여진 계라 가끔은 우리는 그 계 위의 어떤 것, 그 계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아의 방주' 같은 이야기들. 그 비가 쏟아지는 동안 노아의 방주 속 한쌍의 동물들은 어떻게 서로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버텼을까,라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다른 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시 결국 믿음의 문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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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3D로 감상하였기에, 몇 가지의 이야기를 붙여둔다. 3D는 영화라는 매체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사실 이 3D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물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기술상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3D의 형태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면 3D는 두 대의 카메라의 2D 이미지를 붙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이 붙여진 두 개의 2D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컴퓨터의 계산이 메꾸고 있다. 그러나 이 컴퓨터의 계산이 아무리 빨라도, 즉 아무리 사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도,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계산, 눈이 실제로 지각하는 이미지의 층을 완벽하게 메우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종종 3D 영화에서 인물이나 물체는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일종의 포토샵에서 사용되는 레이어와 같은 것이랄까. 여기에는 몇 개의 층이 있어서 인물이나 물체는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입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순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놀랍게도 이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는 이상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떠 있음'이 만들어내는 이중의 부력은 이 영화의 3D를 종래의 다른 3D와 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의 3D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안 감독의 이 3D 영화가 가장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영화는 그것을 보는 자에게 종종 3D임을 잊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못 만들어진 3D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란, 어쩌면 역으로 그것이 3D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런 영화들에서는 종종 3D의 효과를 과시하듯 내보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끼어드는 그런 장면들이 3D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나, 동시에 그것은 영화의 이야기를 종종 잊게 만든다. 즉 이 장면을 3D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넣었군, 이라고 관객이 생각하는 순간 관객은 그 영화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에서 처음 소리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 혹은 음악이 거슬릴 때와 비슷하다. 지금의 우리는 영화에서 소리(음성)가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하지 않는다. '..지금 배우의 목소리가 나오는군'이라고 (당연히)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처음 소리가 등장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에는 한편으로 영화에 소리를 통합하는 영화적 문법이(기술이 아니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영화에서 음악이 계속 거슬린다면 그것은 감독이 영화에 음악을 넣는 문법을 잘못 적용한 탓이다.) 3D가 완전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아..이거 3D효과군,을 더 이상 인식하지 않는 미래의 어느 때, 당연히 3D안경도 필요없는 미래의 어느 날이다.

 

그런 면에서 이안 감독의 이 3D영화가 3D영화로서 좋은 점은 그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는 지금부터 3D가 나와요, 그 효과를 만끽하세요,라는 과시의 장면이 없다. 3D효과는 상당부분 이야기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종종 나는 이것이 3D영화임을 잊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예전 안경을 쓸 때의 버릇처럼 코를 계속 문질렀지만 어느틈에 나는 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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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1-1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 감독은 참 신비한 사람이에요. 타이완 사람인데 서양의 냄새가 가득한 영화도 잘 만들고 그렇다고 동양적인 영화를 못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 양반은 지리적, 심리적, 인종적인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니까요. (하지만 헐크는 빼고요.)

맥거핀 2013-01-11 14:28   좋아요 0 | URL
아..이안의 헐크는 별로였나요? 저는 다른 버전의 헐크, <인크레더블 헐크>를 봤습니다. 그렇죠. 필모를 보면 참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취향의 영화를 만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영화들이 모두 일정 수준에 올라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러면서도 이 영화들에는 이안 감독 특유의 인장, 특유의 영상미가 또 나름 살아있어요. 예를 들어 <색,계>의 정사씬이나,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에서의 결투 같은 것..<음식남녀>의 그 음식들의 비주얼은 또 어떻구요.

Mephistopheles 2013-01-11 15:1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전 역시나 "음식남녀"가 제일 좋았던 기억,,,
(서기(과연?)때문이 아니라 먹을 것에 약하다는..)

맥거핀 2013-01-12 00:58   좋아요 0 | URL
한때 서기가 남자들의 로망(노망이 아니라..)인 때가 있었죠. 근데 <음식남녀>는 오천련이 아닌가요? 근데 오천련은 요새 뭐하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Mephistopheles 2013-01-13 12:04   좋아요 0 | URL
어라..오천련이었는데 전 어디서 서기라는 착각을...뭔가 다른 영화와 혼선을 빚었나 봅니다..

맥거핀 2013-01-14 00:06   좋아요 0 | URL
어..근데 서기하고 오천련이 이미지가 좀 통하는 데가 있기는 해요. 오천련도 한 때는 인기가 쩔었는데...

마녀고양이 2013-01-1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 싶은데, 아이맥스 밖에 개봉을 안 한거예요.
그런데 코알라가 아이맥스는 싫다고 버티고 있어서, 아이맥스 3D를 보고나면 머리가 너무 아프거든요.... 아흑, 정말 고민스럽네요. 영화 너무 괜찮다면서요..... ㅠㅠㅠㅠ

맥거핀 2013-01-15 01:20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아이맥스 3D를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근데 저도 사실 3D를 왠만하면 피하려고 하거든요. 3D가 비싸고 그런 것 보담도 그 안경이 너무 신경쓰여서, 영화감상에 계속 방해가 되더라구요. 아무튼 안좋은 환경이네요. 보는 사람에게 선택권을 줘야지 아이맥스 밖에 개봉이 안하면 곤란하죠.

Shining 2013-01-14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건 무얼 말할지보다 무얼 말하지 않는지이고, 뭘 집어넣을지가 아니라 뭘 뺄 것 인가라는 생각이 요새 자주 듭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꾸 설명하고 부연하고 집어넣고 그러면서 필연적으로 길어지고 늘어지는데 진짜 예술가들은 과감하게 빼고 현명하게 배치한다는 생각이요.

이안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아주 깔끔한 백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려하고 다양한 기술과 시각영상이 있지만 멋을 부리거나 뽐을 내는 게 아니라 능숙한 손길로 단단하게 다듬어진 예쁜 백자, 라는 느낌이요. 3D 측면에서 재밌는 게 많았어요, 저는 :)

맥거핀 2013-01-15 01:26   좋아요 0 | URL
근데 사실 빼는 게 무척이나 어렵잖아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 빼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구요. 어떤 부분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대체로 구조가 앙상하기 때문에 뭔가를 가리려는 시도인 경우가 많죠. 아무튼 선택과 집중이, 영화에서도 중요하죠. (물론 리뷰를 쓰는 것에도 중요하구요.)

암튼 스튜디오의 요청이 아니라 본인이 3D로 찍겠다고 나섰다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명확한 직조의 자신감이 있었겠죠.

Arch 2013-01-2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읽으면 확 와닿을 것 같아요.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자꾸 이 영화에 다른 이야기가 있다고 강조하는 바람에 '어떨까'에서 '보고 싶다'로 바뀌었어요. 이안 감독 영화는 헐크 빼고 다 봤어요. <색,계>가 참 좋았어요.

맥거핀 2013-01-22 15:56   좋아요 0 | URL
늘 영화소개프로그램을 보다보면은 양가적인 감정, 그만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와 더 보고 싶다,의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도 이안의 <와호장룡>이 제일 좋아요.

영화 보시고 글 읽어주시면 더 고맙구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탐 후퍼, 2012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펙터클(spectacle), 즉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관, 혹은 볼거리라는 것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특히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쪽에 가깝지만, 이 영화 <레미제라블>의 스펙터클은 확실히 인상적인 데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스펙터클이라 불릴 수 있는 장면은 특이하게도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 두 군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두 장면의 스펙터클은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된 씬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실 내용상으로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첫 장면의 스펙터클은 대규모의 죄수들이 큰 배를 독으로 끌어당기는 장면이다. 돛이 부러지고, 거의 침몰 직전의 배는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의 스펙터클은 광장에 드넓게 펼쳐진 바리케이트와 그 바리케이트 위와 뒤편의 군중들이다. 그 바리케이트의 재료들, 그러니까 가득 쌓아올려진 각종 가구들은 이것이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 만들어진 바리케이트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한 가지의 공통 요소가 있다. 그것은 대규모의 인력이다. 이 대규모의 인력이 만들어내는 어떤 거대한 힘은 분명 보는 이를 압도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이 두 장면은 반대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첫 장면의 죄수들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 그들의 육체는 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머리속은 모두 어떻게든 이 지옥같은 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반면 마지막 장면의 군중은 누군가 시켜서 그곳에 나와 바리케이트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이의 대비는 이것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장면에 바닥에 끌리는 프랑스 국기와 마지막 장면의 바리케이트 위에서 나부끼는 프랑스 국기의 차이. 즉 이 두 장면은 일종의 대구이다.

 

이 스펙터클은 혁명이라는 것의 어떤 보이지 않는 것, 말로만 이야기 되는 그 실체의 어떤 실루엣을 아주 조금은 드러내보인다. 이를 이런 질문으로 바꿔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영화를 보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여 대답하면 그것은 그러니까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다. 영화의 중간,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와 일단의 청년들이 만든 집 앞에 존재하는 바리케이트와 그 마지막 바리케이트를 비교하여 보자. 마지막 장발장(휴 잭맨)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혹은 천국에서 존재하는 그 거대한 바리케이트와 실제의 봉기 - 뭐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혁명'과 '봉기'의 용어상의 차이에 대한 논의들이 있지만, 솔직히 그 간극이 그렇게 넓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에서 만들어진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가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즉 혁명은 직관적으로는 크기의 문제이다. 포악한 제정, 혹은 독재 정권은 거리에 쏟아진 수많은 시민들의 '크기'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겁을 집어 먹는다. 그러나 마리우스와 일단의 공화파 청년들이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계획한 영화 속 봉기 - 역사적으로는 1832년 6월의 봉기 - 는 영화 속에서 이야기하듯이 그 크기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즉 민중들의 호응을 불러오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 실패와 성공을 이 영화는 직관적인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 '민중'이라는 존재에 대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민중'이라는 용어는 단일한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지만, 그 민중이란 사실 수많은 욕망들의 집합이다. 이 영화는 그런 수많은 욕망들의 집합이 움직이는 양상을 때로는 약간 부정적으로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예가 판틴(앤 헤서웨이)이 공장에서 쫓겨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결국 겉으로 보여지는 판틴을 공장 밖으로 내보내는 존재들은 판틴과 공장 안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여공들, 그러니까 민중들이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판틴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는 것에는 물론 동료 여공들의 시기심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이 트리거가 동료 여공들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판틴이 거리의 여자가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동정과 시기심과 체념과 질투와 같은 것들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이러한 민중이라는 존재의 어떤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두 갈래가 나오는데, 하나는 여관을 운영하는 부부이고, 하나는 자베르 경감(러셀 크로우)이다.

 

여관을 운영하는 부부는 이런 민중의 욕망이 극대화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주위 사람을 등쳐먹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물론 이들의 주위 사람들이란 같은 민중들이다. 자베르 경감은 보다 복잡한 캐릭터인데, 자베르 경감은 이 <레미제라블>의 전체 구도 속에서 장발장의 거울상이다. 자베르 경감이 법의 영역을 상징한다면, 장발장은 그 법의 이면에 있는 휴머니즘(인간)의 영역을 상징하는데, 이 둘이 거울상임은 예를 들어 이 두 인물이 모두 영화상에서 한번의 기회를 얻지만 그 기회를 배반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장발장은 신부님이 재워주고 먹을 것을 주지만 성당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며, 자베르는 장발장이 죽이지 않고 살려주지만, 다시 그런 장발장을 잡으러 나타난다. 그러나 무릇 거울상이라는 것이 그렇듯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점이다. 자베르 경감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감옥에서 자라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자베르 경감이 자라나 결국 장발장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민중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인데, 자베르 경감은 자본주의적으로 말하면 중간관리자이고, 봉건주의적으로 말하면 마름이다. 중세의 지배계층은 이 봉건제도를 만들어 내며, 또하나 결정적인 것, 후세에도 계속 영향을 미칠 어떤 것을 발명해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마름의 존재이다. 영화 <정복자 펠레> 등에서도 잘 보여지듯이 이 마름, 중간관리자는 그들 역시 지배 계층이 아니면서도 거의 대부분 지배 계층보다 훨씬 더한 잔학성을 보여주며, 이것에는 물론 마름들 자신의 지배계층을 향한 욕망, 그리고 작은 권력의 쾌감이 작용을 한다. 즉 지배계층은 결국 뒤에 멀찍이 서서 손안대고 코를 풀게 되는 것은 마름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이 마름의 활용은 그 이후에도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까지 지배의 한 원리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에게 곤봉을 날리던 전경, 혹은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르고 건물에 오르던 경찰 특공대원, 아니면 그것을 지시한 한 기업의 중간관리자 출신인 MB의 경우라면 어떨까.

 

그런 자베르 경감이 결국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은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다시 '민중'이라는 것. 그런 자베르, 즉 민중이 민중을 괴롭히던 것의 상징인 자베르가 강물에 몸을 던질 때 결국은 던져지는 (낯간지럽지만) 메시지 같은 것.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리케이트의 크기와 통한다. 왜냐하면 결국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런 나쁜 민중일지라도, 즉 판틴을 내쫓고, 숙박자들의 몸을 털고, 설혹 자베르와 같은 민중일지라도, 그런 모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가는 청년들 앞에서 문을 닫고 그들을 외면하는 민중들이 바로 동시에 혁명의 주역들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베르 경감의 죽음이, 그리고 그 거대한 상상의 혹은 천국의 바리케이트가 보여준다. 그 거대한 가재도구의 집합이 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불변성'을 거의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든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그의 믿음.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장발장의 믿음이 있고, 그것을 장발장은 단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런 원칙의 상징인 자베르가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질 때, 이는 그 원칙이 깨질 수 있음을 장발장과 동일하게 단지 믿음이 아니라 어떤 삶으로서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이 두 가지는 연결된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은 이 민중들이 변할 수 있다는 점, 그 불가능성을 믿어야 한다는 것. 그것의 불가능성을 어떻게든 믿으려 애써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민중들을 믿어야만, 그들이 무엇인가를 위하여 공동으로 움직일 때에만 무엇인가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금 2013년에 <레미제라블>이 필요하다면 그런 이유다. 그 '고통받는 사람들', 그렇게 고통받으면서도 때로는 같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한 고통을 안겨주는 그 사람들을 왜 끌어안아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그건 <레미제라블>이고 '장발장'이다. 새벽 5시에 투표장에 나와서 투표하고, 고엽제로 고통받으면서도 그 고엽제를 뿌리는 곳으로 보낸 사람의 딸을 지지하고, 방이 추워서 어쩔 수 없이 탑골공원에 나오면서도 그 방값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멍청해서, 혹은 콘크리트라서, 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베르 경감의 다른 버전이다. <레미제라블>의 숭고함은 그러니까 절대 변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변할 수 있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믿음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숭고함이다. 그것을 영화는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 바리케이트로서 말이다. 그들이 없으면 바리케이트를 만들 수 없다.

 

 

덧.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이 글은 <레미제라블> 영화만을 본 이후에 썼으며, 원작은 참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작과 비교해서 뭔가 잘못 쓴 부분이 있다면 아직 원작을 보지 못한 내 게으름과 우둔함 탓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이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가는 관심이 없으며, 또한 사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를 얼마나 스크린에서 잘 보이고 있는가가 아니라, 왜 이 이야기가 2013년인 지금에 필요한가, 영화는 어떤 부분에서 이 이야기의 방점을 찍는가, 어떻게 재해석을 하고 있는가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새롭게 재해석해도, 무엇인가 끄집어낼 것이 있는 것, 그것이 고전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가 보다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직접적인 메시지의 힘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그 대사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나마 노래이기 때문인데 - 그 노래가사들을 직접 대사로 한다고 생각해보라 - 뮤지컬 혹은 오페라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영화화했을 때의 장점 역시도 놓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이야기한 대규모 스펙터클은 물론이고, 여관에서 부부가 등쳐먹을 때 이어지는 그 현란한 편집은 쾌감이 느껴질 정도. 평론가 듀나 씨는 이 영화의 영화로서의 힘을 도리어 빈번한 클로즈업에서 찾던데 그건 생각해 볼만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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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8분...꼬리뼈가 부실해진 요즘 저에겐 꽤나 부담스런 시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맥거핀 2013-01-04 13:26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 꼬리뼈가 점점 자라고 있어서 힘들어요. 그래도 생각보다는 시간이 빨리 가는 편이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01-02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미제라블 보고 싶어요, 흑.....

저는 민중이란게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민중, 민중, 과연 그런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집합체가 있을까요. 그건 가끔 이루어지는 우연 아닐까요. 모두의 욕망은 다르지만, 가끔 너무나 구석으로 몰리게 되면 함께 뭉칠 수 밖에 없는 그 순간, 그게 민중이고, 그것은 찰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함께 누군가를 지지해도,
끝나고 나니 동상이몽이구나 싶은 이런 때는 더욱 그렇네요.

하지만 자베르와 장발장이 거울상이라는 표현, 인상깊고 그렇구나 공감하게 됩니다.

맥거핀님, 편안하고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한 새해 되셔요.

맥거핀 2013-01-04 13:38   좋아요 0 | URL
역사적으로 봐도 민중이라는 존재는 참 알 수가 없는 존재지요. 결정적일 때 이상한 선택을 한다거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행동을 한다거나 하죠. 말씀하신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집합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정적인 오류를 낳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혁명, 그리고 혁명의 다른 버전인 선거 같은 데에서도 믿지 않으면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저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그러니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 해나가는 거겠죠. 특히 소위 진보라고 불리는 진영에서는요. 소위 말하는 활동가들이 그걸 믿지 못하는 순간, 그 활동가는 끝장나는거겠죠.

저는 그래도 우리 사회가 조금은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대선들만 보아두요. 김대중이 김종필이라는 극보수 세력을 끌어들이고 겨우 승리했고, 노무현은 정몽준이라는 매우 다른 세력(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통했지만요)과 연합하고 이인제가 상대방 표를 깎아먹어주었음에도 겨우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문재인은 48%를 얻었죠. 그건 숫자상으로보면 노무현이 얻은표보다 200만표나 더 많았습니다. 그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겠지요. 저는 느리게 무엇인가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해 정초부터 잡설을 늘어놓았군요. 달여우님도 행복한 새해 되시고,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시길 바랍니다.^^

차좋아 2013-01-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걸레처럼 끌리던 프랑스 국기를 보며 설핏, 뭘까? 생각을 했는데 명쾌하네요. 정답은 아닐지라도 제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최고의 해석인 듯 합니다. 이야기에 깊이 빠져 보지못한 이미지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 기쁘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3-01-04 13:38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 안녕하세요. 아마도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보며 처음의 그 장면을 떠올리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글 좋게 봐주셔서 매우 감사드리구요. 저번에 차좋아님이 선거 끝나고 썼던 글 인상깊게 봤습니다. 뒤늦게나마 말씀드리네요.^^

프레이야 2013-01-0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새롭게 재해석해도, 무엇인가 끄집어낼 것이 있는 것, 그것이 고전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 이 문장 동감합니다.
맥거핀님, 저는 이 영화 보며 장발장이 풀어준 쟈베르가 강에 투신하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이 영화를 대선 다음 날 본 후 티비에서 리암닐슨이 장발장으로 나온 97년 영화를 하던데 거기선 장발장이 좀더 인간적(^^)으로 나오더군요. 휴 잭맨보다 좀더 사람(^^)에 가깝게요.리암 닐슨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요.
사람에겐 선과 악의 양면성이 공존하고, 어느 쪽을 더 발현하고 살 것인가의 태도에 삶의 성패가 달렸을까요? 이런 점 이외에도 많은 생각이 든 영화에요.
전 원작을 사서 읽을 참이에요. ^^

맥거핀 2013-01-04 13:43   좋아요 0 | URL
아..티비에서 했었군요. 하는 줄 알았으면 저도 챙겨보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 영화를 보지 않아서 인간적이라는 게 정확히 감이 오지 않지만 리암 니슨도 나름 잘 어울렸을 듯 합니다. (<쉰들러리스트>의 이미지랑 겹치기도 하구요.)

<레미제라블>은 첫 장면에서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괜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장발장은 신부가 그렇게 호의를 보여줬음에도 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을까요. 그리고 신부는 어떻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줄 수 있었을까요. 인간 악에 대한 고찰, 그리고 결국 그럼에도 인간을 다시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야기해주는 이 작품을 저도 책으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이 되다보니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왔나를 생각하게 된다. 책을 펴들면 올 한 해 동안 나는 무엇을 읽어왔나를 생각하게 되고, 책상 앞에 앉으면 나는 이 책상에서 올해 무엇을 해왔나를 생각하게 되고, 사람의 얼굴을 보면 올해 나는 이 사람과 무엇을 하고 있었나를 생각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 무엇인가를 남기려 블로그에서 하얀 빈 창을 열게 되니 나는 이 블로그라는 공간에서 무엇을 도대체 써왔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 그러므로 다른 정리는 다른 곳에서 하고 이곳 블로그에서는 그간 이야기했던 영화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올해의 영화를 이야기하려면 싫어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늘 어느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2012년은 대선이 있었고, 거의 1년 내내 정치를 이야기하던 지극히 정치적인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정치적인 대중들과 분리되어 이야기할 수 없는 지극히 대중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1년 내내 이어진 이야기들 속에 과연 '정치'라는 것이 있었나를 되새겨보게 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대선 이후에 벌어진 몇몇 이상한 이야기들, 누군가를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한다거나, 혹은 어떤 집단을 몰아세운다거나, 누군가를 비웃고, 조롱하는 이야기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월드컵 경기에서 누군가의 실수가 있었을 때 그를 패배의 원흉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은 것. 그러니까, 이것에는 정치는 없고 스포츠만 있다. 중대한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 승리하게 되면 누군가를 추켜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배했을 때에는 누군가를 희생양을 삼는 것. 왜? 그렇게 해야, 자신은 승리자로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 패배자는 다른 누군가이니까.

 

그러나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다. 정치가 스포츠와 가장 다른 점은 정치는 그 정치의 과정,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스포츠라고 해서 그 결과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정치를 스포츠를 응원하듯이 소비했다. 그것도 가장 나쁜 방식으로 소비했다. 그것은 투표 이전부터 이미 강하게 드러났다. 예를 들어 TV토론 같은 것에서부터 말이다. 스포츠관람자들이 관심을 둔 것은 오로지 어떻게 이길 것인가의 문제였고, 어떻게 토론에서 상대방을 '바를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런 스포츠관람자들 자신도 사실은 잘 알고 있듯이 TV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엇이 이야기되고 있는가'이지, '누가 더 잘 이야기하는가'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도 이야기의 화제에 주로 오른 것은 누가 더 나았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후 그런 스포츠관람자들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사실 누군가 때문에 졌다고 말하는 것은 '패배를 내 안에서 다른 곳으로 내보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누군가 때문에 졌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혜경(김정은)은 연습경기에서 진게 너 때문이라고 한 선수를 몰아세우는 코치에게 되묻는다. "그런 말이 어딨어? 그럼 이겼을 때는 누구 때문에 이겼다고 할 거예요?" 승패를 중시하는 스포츠에서도 승리하면 모두 때문에 승리한 것이듯이, 패배하면 모두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하물며 정치에서 더 말할 것이 있을까. 아니 굳이 패배의 원흉을 찾자면, 아마도 그 패배의 원흉을 찾는 생각 그 자체가 바로 패배의 원흉일 것이다.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번 만큼은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영화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고 비난받는 어떤 영화제의 심사위원장과 비슷한 심정이라고 허세를 떨어보자. 아마도 나는 이 인물들이 2012년이 아니라 다른 때 나타났으면 이 인물들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영화가 2012년이 아니라 다른 때 개봉했으면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마지막에서 떠오르는 것은 이 인물들과 이 영화들이다. 영화는, 그리고 그 영화를 본 몇몇 사람들만이라도 이들을, 이 영화들을 기억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몇 표현과 형식은 S님을 참고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데헷.) 

 

 

올해의 남자 : <토리노의 말>의 마부(야노스 데르즈시)

 

마지막 여섯번째 날, 마부와 딸은 '소멸'된다. 그렇다. 나는 그것을 소멸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것이라기 보다는 예정된 것이며, 파괴라기 보다는 소멸이다. 그리고 영화는 완벽한 무(無)가 남는다. 그것의 영화적인 형태는 그러니까 검은 스크린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마지막 영화를 찍는 감독의 완전한 종결의 선언인걸까, 혹은 그것을 넘어선 한 세계의 종결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러나 하느님이 육일동안 세상을 만든 후 일곱번째 날 쉬시고는 그 일곱날은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 나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검정색 스크린을 딱 두 번 본다. 한번은 영화가 완전히 종료될 때에, 다른 한 번은 영화가 시작하려 할 때에. 한 영화가 완전히 종료되어야만 다음 영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어보자).

 

 

올해의 여자 : <화차>의 차경선(김민희)

 

<화차>의 세계는 부루마블 게임과 같다. 우리는 싫든 좋든 주사위를 굴려야만 하고, 우리는 싫든 좋든 그 판을 빙글빙글 돌아야만 한다. 부루마블 게임에서 아이러니한 점은 때로는 무인도나 감옥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아, 그 영화에서 깡패도 "나도 차라리 빵이 더 편해!"라고 소리를 질렀던가. 우리가 그 게임에서 떠나려면 파산을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딱 두 가지의 선택지, 하나는 어떻게든 빙글빙글 돌던가, 아니면 파산해서 영원히 게임에서 떠나든가 하는 딱 두가지의 선택지만 남아있다. 그나마 우리는 파산하게 되면 길 위에서 말을 치울 수 있지만, 불쌍한 차경선은 여전히 기차길 위에 누워 있다. 누군가는 이제 그 말을 치워주어야만 하고, 다른 많은 차경선들을 어떻게 뛰어내리지 않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두가 파산하게 되고 승자 하나만 남으면 결국 게임은 '완전히 끝난다'. 즉 다른 방식으로 모두가 '소멸'된다.

 

 

올해의 영화 : 김일란, 홍지유 감독의 <두 개의 문>

 

나는 사실 이전의 글에서 이 영화의 몇몇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고, 그 의문에 대해 마땅한 답을 여전히 찾지 못하였으므로, 이 영화가 그다지 좋은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튼 올해의 대선에서 박근혜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은 집권여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기록하여, 그들, 그러니까 최소한의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그 곳에 올라간 다섯 명의 죽은 철거민들과 어떤 사건인지도 정확히 모른채, 심지어는 그 곳에 두 개의 문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그곳에 올라간 한 명의 죽은 경찰 특공대원, 그리고 졸지에 범법자가 된 수많은 다른 철거민들과 이상한 기억에 시달릴 수많은 다른 경찰대원들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다른 많은 매체에서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꼽은 것은 이 대선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2012년의 영화에서는 나는 적어도 9명의 사라진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이겼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나, 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나, 이기고 짐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이 9명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더불어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의 놓친 영화들을 언젠가 보기 위해 기록해둔다. (순서는 없음)

 

1.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2. 밍크코트, 신아가, 이상철

 

 

 

 

 

 

 

 

 

 

 

3. 휴고, 마틴 스콜세지

 

 

 

 

 

 

 

 

 

 

 

4. 크레이지 호스, 프레데릭 와이즈먼

 

 

 

 

 

 

 

 

 

 

 

5.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랭 레네

 

 

 

 

 

 

 

 

 

 

 

6. 어머니, 태준식

 

 

 

 

 

 

 

 

 

 

 

7, 도주왕, 알랭 기로디

 

 

 

 

 

 

 

 

 

 

 

8. 레드 마리아, 경순

 

 

 

 

 

 

 

 

 

 

 

9. 파우스트, 알렉산더 소쿠로프

 

 

 

 

 

 

 

 

 

 

 

10. 신의 소녀들, 크리스티안 문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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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12-31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이 이 페이퍼를 쓰실줄 알았어요.

영화관 옆 미니 상영관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보고 있는데 자꾸 바람 소리가 들리는거에요. 영화에서 나는 소리인줄 알았는데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소리였더라구요. 그 영화가 '토리노의 말'이었어요.

맥거핀 2012-12-31 17:40   좋아요 0 | URL
진짜 마치 쓸 걸 안 것처럼 바로 읽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바람 소리..보고 나면 집에 와서도 바람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면이 자꾸만 눈 앞에서 자동 리플레이가 되더군요.

Arch님과 올해 여러모로 영화 이야기, 책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남은 몇 시간 잘 챙기시고, 즐거운 일 빵빵 터지는 새해 되세요.^^ (저는 오늘도 추운 어딘가에 앉아서 술을..;)

프레이야 2012-12-3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영화결산 은근 기다렸어요. 저도 올해 쓰고 싶은 영화이야기가 많은데
너무 밀려버려서 감당이 안 되네요. 뭐든 미뤄두는 건 좋지않은 것 같아요.^^
저, 신의 소녀들, 봤어요. 문쥬 감독의 전작도 봤었지요.
여전히 쉽지는 않은 영화였어요.
종교와 신, 그리고 믿음과 의지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었답니다.
정리해야할 생각들이에요.
화차의 경선을 올해의 여자로 꼽으셨네요. ^^
두개의문도 정말이지 대단했어요. 분노하고 경악하며 봤습니다.

새해에도 맥님의 알찬 영화이야기 즐감할게요.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3-01-01 16:39   좋아요 0 | URL
크리스티안 문쥬의 영화는 그것을 보는 자들의 윤리라는 것을 늘 되묻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럴까, 가끔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영화밖으로 내보내는 듯한 인상마저도 있어요. 여기 앉아서 영화나 보고 있어도 좋아?하고 물으면서요.

올해에는 사람짐으로써 기억되(어야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화차의 경선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아마도 그 비슷한 인물들이 분명히 실제로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결코 가볍지가 않네요.

저도 내년에도 프레이야님의 영화이야기, 그리고 인생이야기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늘 들러주셔서 감사드리구요.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소망 모두 이루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랄께요.^^

아이리시스 2012-12-31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 레네(전때 말씀하신 그 노장감독이잖아요, 그쵸?) 저 영화 부산에서 개봉을 기다렸는데 상영안한 것 같아요. 신의 소녀들, 제가 부산영화제 예매할 때만 해도 영어제목 [비욘드 더 힐즈]였는데ㅎㅎ 제가 그때 못 가서 표를 환불하러 갔거든요. 제가 표를 샀는데 같이 갈 사람이 아무도 없;; 혼자가기에는 너무 멀고 너무 늦은 시간이었어요ㅠ.ㅠ

영화이야기는 이상하게 쓰는 것보다 남의 것 읽을 때 신나요. 왜 그러지???

네, 성의있게 100줄 이상의 새해인사 해주시면 화풀게요.(아, 저 화 안났었죠?)

맥거핀 2013-01-01 16:48   좋아요 0 | URL
알랭 레네가 1922년생이니까요. 양차세계대전을 10대, 20대때 겪은 이 영화감독이 무슨 얘기를 들려주는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90이 넘은 영화감독이 찍은 이 영화는 실험정신이 가득한 영화라고 하니까요. 단순히 노장의 영화라서가 아니라 새로운 실험으로 가득한 영화라서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인 듯 싶습니다.

하하. 거 말만 들어도 참 아쉽군요. 저도 어렸을 때는 부산영화제 같은 데 가면 밤새 찜질방에 대강 있기도 하고, 새벽 늦게까지 바닷가에 있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쿨럭쿨럭 힘들어요. 그래도 아무튼 아쉽네요. 저라도 같이 봐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저도 다른 분이 쓴 영화이야기를 읽을 때 더 신납니다. 쓸 때는 사실 힘들어요.ㅠㅠ 그러니 자주 좀 쓰시라는...응?하고 새해땡강을 부려봅니다.

기억의집 2012-12-3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본 게 하나도 없어요. 쿵=;;

맥거핀 2013-01-01 16:50   좋아요 0 | URL
올해에는 좋은 영화 많이 보세요. 행복한 새해 되시고, 원하는 일이 모두 성취되는 새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Shining 2013-01-0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리노의 말, 과 알랭 레네 영화는 저도 정말 보고 싶었는데ㅠ 저는 '올해의 놓친 영화'에 넣어야겠어요ㅠ 신의 소녀들,은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에요 :)

2013년도 라인업이 아주 화려하더군요. 아이언맨, 토르, 슈퍼맨, 킥애스, 스타트렉, 헝거게임, 씬시티, 몬스터 주식회사, 다이하드 등등 속편도 완전 많구요. 엄청 많아서 다 꼽기 힘들 정도인데 우선은(가장 짧은 기다림만 고르자면) 2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3월 <장고>와 <스토커>를 가장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질문. 작년에 쓰신 '올해의 놓친 영화'는 많이 보셨나요?(너무 잔인한(...)질문인가요^^; 정말 궁금해서요ㅠ)

Shining 2013-01-01 23:12   좋아요 0 | URL
어머, 그런데 혹시 S님은 저인가요.....?(아니면 어쩌지;) 대체 어떤 부분을 빌려오신 겁니까ㅎㅎ 저보다 훨씬 잘 쓰시니 말씀하시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에요....

아니, 말씀하셔도 모르겠는데.....

맥거핀 2013-01-02 18:40   좋아요 0 | URL
잘 모르시나본데 S님이라고 글 되게 잘 쓰시는 분 계세요. 아이리시스님과 친한 걸로 알고 있으니 물어보세요.^^

저는 사실 무슨 맨들 나오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맨 씨리즈 나와도 속편들은 패스할 것 같지만, 다이하드는 아마 확실히 볼 것 같군요. 저는 다이하드 씨리즈가 이상하게 너무 좋아요. 다이하드 3편 같은 것은 한 30번 봤을 정도..

저는 말씀하신 영화들도 그렇고(특히 홍상수 감독 영화), 이번에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가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들은 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는 전주나 부산 영화제 중에 하나는 가야지,하고 생각을 하고 있구요.^^

아..그 질문만은 안 하시길 바랬건만..은 아니고, 사실 누군가가 물어볼 것 같아서 미리 세봤음.-_- 3편 봤군요.-_-; 그 중에 한편은 그걸 세본날 하나라도 늘리려고 봤어요. -_-;;

2013-01-0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부분의 정치이야기 공감이 가네요. 이기고 지고로 소비해 버리는 것, 누군가를 욕함으로써 나를 '패배'에서 분리시키는 것.. - 여튼 외면하고 싶은 결과이긴 해요. 시민사회가 이 정부의 감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일단 말이 서로 안 통할 듯한 진한 예감이...
올해의 영화에 대해서 엄청 정치적인 선택을 하셨군요. 토리노의 말은 안 봐서 모르겠고, 화차의 차경선(김민희)가 올해의 여자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맥거핀 2013-01-02 18:44   좋아요 0 | URL
아무튼 저는 박근혜 정부가 성공한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혹 그것으로 인해 다음 정권에서 새누리당이 또 집권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실상으로는 MB정부가 저질러놓은 일들을 치우기에도 벅찰 것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네..위에도 그런 개드립을 쓰기는 했지만, 왜 가끔 특정 영화제들이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오 2013-01-02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알라딘 서재에 글을 쓰면서 인사를 안드릴수 없겠던군요(사실 정말 댓글 글씨체가 맘에 안들어서 쓰기가 싫던구요;;),,새해 복 많미 받으시구요,,베스트 영화10을 저도 선정했으므로 언급을 하고 싶던군요,,저의 작년의 최고의 영화는 <파우스트>였습니다,,이유는 그냥 그냥 확 들어오던군요,,물론 그 지루함을 버텨내는 시간은 당연히 저에게도 있었습니다만,,괴테의 팬이기도 하거니와 소크로프의 미학, 윤리, 정치 의식들을 모두는 아니더라도 동의는 하는걸요!! 소크로프는 내가 원하는 워너비의 이상향을 잘 나타내는 것 같아서 좋아요,,그 놈의 제국,제국 주의,,그 권력에 대한 숨길수 없는 그 야욕이 전 좋아요,,아주 많이요^^

맥거핀 2013-01-04 13:48   좋아요 0 | URL
네오님 오랜만이예요. 네오님은 댓글 글씨체에서도 일종의 미학을 찾으시는군요. 댓글 글씨체가 마음에 안들어서 쓰기가 싫으시다니. 저는 위에도 이야기했듯이 <파우스트>를 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파우스트>는 제가 고전을 읽은 몇 안되는 책 중에 하나라 이 영화가 매우 궁금하기는 하고, 여러 다른 평에서도 상당히 걸작으로 꼽던데 보고 싶군요.

뭐 역시 영화가 좋은 데에는 이유가 없죠. 저도 리뷰를 쓰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그 '확 좋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어요. 이 영화가 좋다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는 것은 사실 사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고 볼 때는 이거 좋은데, 하는 생각밖에는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암튼 네오님도 새해 즐겁고 행복한 한해 되시고, 좋은 영화도 많이 보시는 한해 되세요. (알라딘에서 이제 서평단을 하시니 종종 글은 보겠군요.^^)
 

 

 

1.

느지막이 투표를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을 갔다. 중고서점은 동선상 늘 종로점을 갔었는데, 아무래도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신촌점에 더 구미에 맞는 책들이 많이 있는 듯하여 일부러 신촌점까지 찾아갔다. 아무래도 알라딘 중고서점은 지점별로 책의 회전 속도가 다른 모양이다.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확인한 몇몇 책은 이미 팔렸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예상 외의 신간들을 꽤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며칠 전에 S님의 서재에서 본 미치오 슈스케의 <광매화> 같은 책이 떡 하니 있다거나 하는 정겨운 풍경을 본다거나 하는 등의. 정겨운 풍경에 이것저것 화답하다보니 어느덧 그리 정겹지 않은 시간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른바 '내려놓음의 시간'.

 

중고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것은 과거의 아주 오랜 기억들을 상기시킨다. 1990년대의 어느날 몇몇 레코드점에서 마주해야했던 반갑지 않은 시간들. 나는 그 때 문제집을 산다는 명목으로 흥겹게 삥땅친 만원 짜리 한 장이 생길 때마다 우리동네 사거리에 있던 레코드점, 혹은 큰 마음 먹고 종로나 명동, 때로는 압구정이나 노량진까지 원정을 가곤 했다. 레코드점을 A에서 Z까지 뒤지며 새로나온 신보들의 따끈따끈한 냄새에 황홀하게 취하는 것도 잠시, 주머니에 넣어둔 꼬깃한 만원 짜리 한 장은 늘 내가 이제 '내려놓음의 시간'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켰고, 나는 많은 뮤지션들과 원치 않은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제기랄, 왜 그렇게 전설들은 많고, 그 전설들의 숨겨진 명반들은 불쑥불쑥 나타나는지. 나는 그 '내려놓음의 시간'을 만날 때마다 애꿎은 '핫뮤직' 기자에게 욕을 퍼부었고, 용기가 없어 만원짜리 두 장을 삥땅치지 못한 내 소심함을 자책하곤 했다.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떤 게 명반인지를? 아니. 이 중에 어떤 걸 들고가야 내일 뒷자리 H 녀석의 부러움에 목마른 얼굴을 확실히 볼 수 있을지를. 

 

2.

그리고 서울아트시네마로 가서 가와세 나오미의 초기의 두 단편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를 보았다. (네이버 필모에는 각각 <따뜻한 포옹>과 <달팽이: 나의 할머니>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맞는 제목 같지만, 시네마테크 데이터베이스에는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써도 크게 무리는 없으리라.)

 

시간이 꽤 남은 상태에서 도착한 터라, 출구조사 결과도 보고, 사온 책들도 들여다보고, 인증샷도 찍어 알라딘 스마트폰 편집기의 능력도 확인해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맞은 편에 앉은 어떤 중년여성이 아들과 통화하는 게 귀에 들어온다. 아마도 영화를 혼자보러 나온 엄마가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어린 아들이 밥 챙겨먹을 것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아들에게 국은 어떻게 데워먹고, 반찬은 뭘 꺼내먹고, 라면 끓여먹지 말고 등등을 이야기하는데, 아들의 심드렁한 대답은 들리지 않지만 익히 연상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많이 그래봤으니...)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것이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빠 오시면 엄마 6시 넘어서 극장 갔다고 해줘, 2시에 극장갔다고 하지 말고, 알았지, 아들? 그러니까 이 엄마는 이곳 아트시네마에서 오늘자 3시 타임 영화인 레나토 카스텔라니 감독의 1961년작 <산적>을 본 다음, 이제 7시 타임의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게 무슨 영화광 엄마와 그런 영화광 엄마 때문에 혼자 국을 데워야 하는 아들의 훈훈한 대화, 영화 <레인보우>의 현실 버전이란 말인가.

 

그래도 영화 보느라 애들 밥 안 챙겨주는 건 괜찮은 거 아닌가요,는 나만의 생각인가.

 

3.

오늘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이곳 시네마테크 측의 계획된 아이러니일까.

 

가와세 나오미의 초기의 두 단편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는 지극히 사적인 영화이고, 일본 사(私)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듯한 작품이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태어남과 거의 동시에 아버지에게 버려졌고, 어머니마저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그녀를 자기의 친정어머니, 그러니까 감독의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가버렸다. 그런 가와세 나오미 감독을 불쌍히 여긴 그녀의 외할머니가 그녀를 자신의 호적에 딸로 입적시켰고, 그렇게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홀로 외롭게 카메라를 벗삼아 자라난 아이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는 이야기가 <내 아버지>이고, 그런 자신을 힘들게 키워준 할머니를 그린 영화가 <내 할머니>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이 영화가 기록하는 시간에 대한 태도와 다른 하나는 카메라 뒤에 숨어 이 영화를 찍고 있는 가와세 나오미라는 개인, 이 두 가지. 이 영화들에서 시간은 어떤 이벤트로서 기록되거나 분절되어 기록되지 않는다. 시간은 어떤 사건들로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 그 자체로서 남아있고, 과거의 작은 소녀는 어느틈에 점점 자라 스물세살의 어른이 된다. 그리고 이제 그 스물세살의 어른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과거를 현재 속에서 복원시킨다. 예를 들어 사진 속에만 남아있는 어떤 풍경은 현재의 촬영된 화면과 겹쳐지며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고, 단지 호적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아버지는 전화상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인물이 되어 시간을 거슬로 올라가 우리 앞에 선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편으로 이것은 온전히 극복될 수도 없다. 어떤 영화적 처치에도 그들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온전히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전화속 현재의 아버지, 어머니, 감독 그리고 그와 분리된 과거의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결국 영화가 어떤 처치를 해도 영화의 시간은 완성될 수 없고, 사실 영화라는 매체는 그 시간을 결국 온전하게 담아낼 수는 없는 불완전한 매체다. 예를 들어 그녀의 스물 세 해의 시간을 영화라는 이 제한된 기록도구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그러나 가와세 나오미에게는 16mm 카메라라는 불완전한 매체 밖에는 그것을 기록할 도구가 없었고, 그것은 사실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한편 우리는 이 영화들을 보며, 감독의 아버지 찾기와 그녀의 할머니를 보지만, 동시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존재를 매순간 매장면에서 환기한다. 예를 들어 <내 할머니>에서 주인공인 할머니가 그렇게 자주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그녀의 손녀이자 딸인 감독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할머니와 감독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 것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매순간 관객들에게 깨닫게 만든다. 카메라 안의 존재가 카메라 밖의 존재를 환기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카메라 밖의 존재인 관객은 동시에 각자 나름의 카메라 안의 존재를 예기치않게 불러온다. 자신의 할머니, 혹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자신의 다른 누군가. 어떤 영화는 그렇게 끊임없이 스크린 밖의 환영들을 불러온다. 

 

4.

내가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것은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조마조마하게 무엇인가를 보게 되는 오늘 같은 날에, '모두를 위한', '새시대', '새로운 국가', '새로운 미래' 같은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늘 같은 날에, 아주 지극히 내밀한 한 개인의 사적기록을 보게 된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로운 미래, 위대한 시작, 힘찬 첫 발걸음 같은 것을 나는 잘 믿지 않는다. 그건 누군가가 당선되었거나, 누군가가 당선되지 못했거나 하는 등의 문제와 하등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래도 누군가는 아버지에 의해 버려지고, 할머니와 힘들지만, 또 즐겁게 버티며 살아가고, 그런 할머니를 삼각대가 없어 흔들리는 화면으로 기록하거나,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언젠가 통화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아니 나는 정치에 대한 냉소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미래가 오든 개인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무엇이 있더라도, 그 내부에서 개인들은 또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므로 그분이 이야기하는 '하나되는 국민'은 즐. 하나되는 국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이 영화들에는 어떤 긍정적이면서도 단호한 기운이 숨어들어가 있다. 삶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그 삶 앞에서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랄까. 할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카메라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새로운 미래, 위대한 시작, 힘찬 첫 발걸음 같은 것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쓰라린 패배, 절망스러운 미래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누군가가 이겼다고 해서, 희망찬 내일이 갑자기 시작될 수도 없고, 다른 누군가가 이겼다고 해서 절망의 나날들이 갑자기 시작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절망이나 희망같은 것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본인이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모든 개인은 각자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그것을 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들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우둔한 걸까. 그리고 결국 시간이란 과거로 흐르는 듯 보여도, 결코 과거로 흐를 수는 없다는 것을 이 영화들은 또한 보여주니까. 결국 시간이라는 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 에둘러 돌아갈 수는 있지만...(이라고 말한 것은 역사가 서중석 선생이던가.)

 

5.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나도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 하나 올리고 잔다. 사실은 이게 원래 목적. 이런 얘기 쓰려던 게 아니라 그저 투표 인증+오늘 산 책 인증하려던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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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2-12-2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셨군요.(어..어..아닌가?)

맥거핀 2012-12-20 12:54   좋아요 0 | URL
어머 언니 왜 그래요...으걀걀

기억의집 2012-12-2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소리만 들어도...격하게 혐오감이 올라와요.

맥거핀 2012-12-20 12:55   좋아요 0 | URL
그래도 세상에는 좋은 할머니가 더 많죠.^^

Arch 2012-12-2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대선은 심드렁했는데 이번엔 후보 토론이며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다보니 어떤 열망 같은게 막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맥거핀님 글을 보니 너무 쉽게 절망하거나 기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미래가 오든.

참, 손이 많은걸 얘기하는데요 ^^

2012-12-20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0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1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0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0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12-2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손등에다가 저렇게 찍어서 알라딘에 인증샷 보냈었는데. 찌찌뽕이요. ㅎㅎ

맥거핀 2012-12-21 02:08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손등 인증샷이 대세죠^^ 제가 손가락이 이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손가락을 다펴고 찍으려 했는데 특정 후보 지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락방 2012-12-21 12:21   좋아요 0 | URL
이제 선거 끝났으니 손가락 사진 좀 올려주면 안돼요? 네?

맥거핀 2012-12-23 21:30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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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보고 급촬영..
하하 별로 특별할 건 없는 손이에요(급 자신감하락).

일이 있어 댓글이 좀 늦었네요.^^


다락방 2012-12-23 23:32   좋아요 0 | URL
우앗 하하. 잠이 안와서 와봤는데 맥거핀님 손가락이. 희희. 이뻐요. 손가락도 댓글보고 급촬영하는 맥거핀님도. 자신감 그대로 붙들어 매두어도 될만큼 이뻐요. 흣

맥거핀 2012-12-26 21:05   좋아요 0 | URL
손가락 보여드리는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급촬영해야죠.^^ 덕분에 저도 간만에 제 손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봤습니다.

2012-12-2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긍정적이고도 단호한 기운'. 오늘부터 필요한 것입니다요. 그나저나 영화광 엄마의 통화, 재밌네요. 그 엄마, 10년 전엔 아마 풋풋한 젊은 여자로 같은 시네마테크 로비에 표 들고 계셨었겠지요.
'내려놓음의 시간'이 그런 것이었군요. 이제는 자금 압박보다 공간 압박 땜에 내려놓는 이유가 더 크지 않나요?ㅎㅎ

맥거핀 2012-12-21 02:14   좋아요 0 | URL
저는 여전히 자금압박도 있고 공간압박도 있구요. 주위에서 왜 읽지도 않는 책을 사냐는 압박도 있구요.^^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해 잠시 가족의 밥걱정일랑은 잊는 어머니를 지지합니다!

정말 영화만 보고 책만 아무걱정 없이 읽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왜 우리나라 앞날까지 걱정을 해야하냐고...

아이리시스 2012-12-21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투표인증이라기에 얼굴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요.................에잇 바보.

맥거핀 2012-12-23 21:27   좋아요 0 | URL
신성한 투표 인증은 얼굴이 중요한게 아님니...ㅋㅋ
아이리시스님이 인증하시면 생각해보겠음.ㅋ

아이리시스 2012-12-29 01:28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네가 해야 나도 한다..라는 자세는 나빠요ㅠ.ㅠ
그리고 인증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 제 서재에는 여전히 제 사진이 있다는ㅎㅎ
그럼 이제 생각해보는 거 맞죠? 히힛

맥거핀 2012-12-31 17:41   좋아요 0 | URL
새해 인사 전하는 걸로 대신하면 안될까요?
새해 인사를 전하러 가겠음~!

카스피 2012-12-2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저렇게 인증 샷 올릴걸 그랬네요.

맥거핀 2012-12-23 21:28   좋아요 0 | URL
...에효..사실 이제 인증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튼 카스피님도 투표하시느라 수고하셨어요.

마녀고양이 2012-12-2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가끔 신촌 중고점에 들리는데,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한 공간에 있을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니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삶이 아닐까 싶어지구요.

손 이쁘네요, 인증 도장두요.
자그마한 희망같아서 참 좋네요. 즐거운 연말되셔요.

맥거핀 2012-12-26 21: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같은 카페에 있거나 지하철에서 지나쳤거나, 같은 극장에 앉아있거나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아무튼 달여우님과 저는, 그리고 수많은 우리들은 각자 개인이면서도,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그다지 넓지 않은 땅에 같이 살고 있으니까요. '개인인 동시에 우리'라는 말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달여우님도 가끔은 휴식도 취하시면서 좋은 연말 보내세요.^^
 
거꾸로 보는 고대사 -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한반도 고대사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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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는 한국사회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고, 한국에 귀화하여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아니라, 한국인 '박노자'가 된 그의 이력도 그러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 직격으로 쏟아내는 비판들을 통해서도 그러하다. 박노자는 항상 우리에게 고정관념을 탈피할 것을, 우리를 둘러싼 몇 겹의 사회적 장벽들을 뛰어넘어 사고하기를 강변한다. 그의 발언들은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적 제도의 문제, 지식인 사회의 문제, 스포츠나 생활 습관을 대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국의 전 사회에 걸쳐져 있다.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때로는 가끔 지나치다 싶은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는 한국 사회에 분명히 필요한 존재이며, 의견이 존중되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한국인이면서도, 진정한 외부자의 시선을 자처하며,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새로운 각도에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그보다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그의 주종목인 고대사에서 '다르게 보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로, 그는 한국 고대사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주간 <한겨레 21>에 꾸준히 연재해온 "거꾸로 보는 고대사"라는 칼럼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번에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이 칼럼들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사실 이 제목에 농축되어 있다. 즉,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대사에 대한 여러 지식들에 의문을 가져보자는 것. 학교 교육을 통해 가져온 고대사에 대한 어떤 인식들을 이번에 '거꾸로 보는' 작업들을 통해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간 다른 시각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살펴보자는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특히 기존의 주류 학계의 사관, 혹은 식민주의적 사관을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시각들을 기반으로 한 논의들이 그렇다. 그러나 박노자는 여기에 일침을 가한다.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적 사학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근현대사를 서술할 때 '우리들의 피해'를 강조하여 민족/국민의 상(像)을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피해자'로 그리면서, 고대사의 상(像)은 '우리들의 위대성' 위주로 그린다는 점이다.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타자를 침략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로 인식되지만, 고대사에서는 위대한 정복군주들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곤 한다. (p. 10)

 

그러나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박노자의 이런 논의가 어떤 재야사학자들의 민족주의적 사관을 공격하고, 올바름을 가장한 '우리 역사 깎아내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노자의 논의는 그보다는 어떤 제3의 시각을 향해 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고대사를 바라보는 해석의 시각이 미래의 시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고대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지배계급 중심적인 시각이 반영된,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표출하여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각은 우리의 고대사를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한 기초를 닦아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지배계급의 팽창적 야망이 아닌 다수 한반도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에 맞는 고대사를 지향한다. (중략) 지금 우리의 과제는, 지역 내의 이웃나라들과 보다 잘 어울리고,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성숙한 동북아시아의 사회민주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한 마디로,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고대 국가들의 위대성'이 아니다. 고대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에서 벌어지는 물적, 인적, 사상적 흐름, 국가가 아닌 민중을 비롯한 한반도 주민의 다양한 계층, 집단이 서술 대상이다. (p. 13-15)

 

우리가 가진 고대사에 대한 기존의 지식들을 깨뜨리기 위해 박노자는 계속 묻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1부에서는 "우리는 만주의 주인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조선이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음을 밝히며, 따라서 고조선에 의한 만주의 영토적 지배는 일종의 오해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낙랑 및 한사군을 일종의 침략 세력으로 보거나, 고구려를 강대한 제국으로만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기도 한다. 2부에서는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시각의 위험성을 보여주며, 그 당시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두며 당과 발해 등의 주변국가까지 포괄하여 전체 구도를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즉 이러한 박노자의 시각으로 보면 통일 신라 역시도 단일민족이나 종족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3부에서는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임나 일본부설이나, 왜와 백제의 관계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이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식민주의적 관점이나,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른 시각, 즉 후대의 역사로 비롯된 일종의 콤플렉스적 시각들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 당시의 맥락을 살펴볼 것을 주문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고대의 성(性)문화나 민중의 생활사를 살펴보는 글들을 통하여, 기존의 고대국가를 살펴보는 시선들이 후대의 시각들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된 것임을 밝히면서, 고대 국가가 단순히 종교와 전제정치의 억압만이 존재하던 곳이 아니라, 사적 소유와 정치적 발언이 허용되던 활력의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위의 내용들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부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도 있다. 그것은 고대사 연구, 그 자체에 대한 박노자의 시각을 생각해봄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고대사 연구란 '사실'의 문제라기 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가깝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역사쓰기는 늘 취사선택의 과정이고, 늘 서술 주체의 시각이 개입하게 돼 있다"라고 말하며, 머리말을 통해 자신이 고대사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며,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상당수의 본문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이러한 방향으로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독자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고대사 논의들은 그렇지 않다. 그 논의들은 자신들의 '해석의 시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숨기며, 마치 명확한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자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명확한 사실이란, 사실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고대사의 많은 자료들은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져 있으며, 혹여 베일을 벗었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후대의 다른 시각들이 새롭게 덧붙여진 경우들이 많다. 또한 그 당시의 명확한 사실을 기술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떠한 시각에서 기술했는가에 따라서 해석의 여지란 무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기술한 몇 개의 글들만이 1000년후의 사람들에게 공개된다면, 그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혹자는 촛불 시위를 예로 들며, 한국과 미국이 적대적이었다고 할 것이며, 혹자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들며,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였다고 밝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박노자처럼 조심스럽게, 또한 자신의 해석 의도를 밝히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박노자 역시 대다수의 고대사학자들처럼 일부의 자료들을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박노자 글들은 앞에서도 논의하였지만,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최근 며칠간의 아시안게임으로 촉발된 대만의 반한 시위와 그에 대한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경멸적인 대응을 보며, 이러한 것의 이면에 들어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것들에는 분명히 그간 우리의 역사교육이 초래한 일말의 사고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의 민족적 자긍심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역사교육을 받아온 대다수들이(우리 및 대만 모두) 그런 일방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을 도리란 없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박노자와 같은 미래 지향적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적어도 당신이 그런 대만의 시위에 맞서서, 우리도 대만의 국기를 불태우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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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가 사라진다길래 예전에 리브로에 작성한 리뷰를 가져옴.

처음 작성일: 201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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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과 울나라에 대한 예시를 논거로 하니, 확 다가오네요..

맥거핀 2012-12-19 18:44   좋아요 0 | URL
박노자님 시각이 비판을 많이 받는 것으로도 알고 있는데 아무튼 책은 재미있었던 것 같은...(2년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