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kmdb.or.kr/indie/board/column_list.asp?seq=83&GotoPage=1

 

언제나 윤리의 편에서서

 

- 글: 김종관 (영화감독)

 

 

프로파간다는 상업영화의 전략이 되었다. 잔혹한 살인과 인신매매를 일삼는 악한의 내장을 뜯고 눈알을 파내는 잘 생긴 남자가 나오는 영웅담이 흥행이 된 것처럼 (동시에 개봉했던 두 개의 잔혹한 액션 영화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잔혹성에도 확실한 주적이 있는 아저씨는 흥행했고 주적을 찾을 수 없는 악마를 보았다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사회의 모순과 무조건적인 악의를 겨냥한 호전적인 영화들이 상업영화의 진영에서 달려들고 있다. 그들은 우라까이 액션영화처럼 단순하고 저돌적인 힘을 추구하기 위해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사회 저편의 절대적인 악을 설정해 놓고 그들과 치열하게 싸운다. 타깃화 된 이념, 그룹, 종교는 단순화되고 그 특징적인 단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케 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뜨겁게 움직인다. 아무도 영화에서 이성적인 균형감을 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화를 내고 있다. SNS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의 분노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 분노는 일리 있고 현명할 때도 있지만 상당수는 그렇지 못하다. 커다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트윗의 타임라인에서 사람들은 분노에 가장 많이 모여든다. 어떤 범죄, 어떤 진영, 어리석은 식견과 아둔한 실언들은 공분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 중 누군가는 연대하기 위해, 한편의 무리에 섞이기 위해 분노를 이용한다. 또 누군가는 자기 안의 결함을 사회적인 분노로 치환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노의 뇌선을 건드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중들이 확보된 셈이다. 사회의 의식을 겨냥한 영화, 특히 화를 내는 방식의 영화는 대중영화로써 요소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독립영화는 그보다 현명하고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영화도 심심치 않게 본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라는 굳건한 범주 안에서 화를 내고 논쟁하며 연대를 만들어 간다. 어찌 보면 많은 창작자들도 창작물들로 열심히 싸우고 있다. 여기까지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새 많은 이들 그중에 창작자들이 윤리의 편에 서고 있다. 자기 혹은 자기를 지탱하는 테두리의 사람들을 선한 위치에 두고 저 건너에 비판을 둔다. 그들은 저 멀리의 괴물을 본다. 스스로의 괴물, 스스로의 모순에는 눈을 두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돼 버렸다. 상업영화는 대중을 위해 화를 내고 몇몇의 독립영화를 포함한 작가주의 영화들은 예술적 보상을 위해 무척 단순한 방식으로 화를 낸다. 상업영화가 애초에 대중적 기호에 맞춰간다 판단을 하더라도, 균형 없는 독립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더욱더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좋은 예술가는 자기 안의 모순을 응시하면서 성장하고 성취한다. 가면을 걷어내고 옷을 벗고 자기 안의 추醜를 꺼내어 해부해야 한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부 마쓰모토 세이초는 매우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둔 소설을 쓰지만, 그가 메스를 들고 도려내는 것은 그 스스로의 개인적 욕망에서 반추한 인간의 속성들이다. 그는 악인의 범행을 차갑게 기술하지만 욕망을 자기 안에서 찾고 대입하기에 세월이 지나도 그 이해의 깊이가 훼손되지 않는다.

그처럼 창작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균형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예술적 가치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 대한 응시 없이 비판의 날만 휘두르는 창작자들을 많아지는 것은 하품만 나오는 일이다. 오늘날 정의롭지만 비겁한 문학과 영화들이 종종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편협한 속성에 이질감을 느낀다. 그런 창작물들이 피곤하다. 창작자가 윤리의 편에 서서 악을 단순화하는 것도 재미없거니와 모든 개인의 악행 이면에 사회적인 현상이 있더라는 식의 시류 적이며 쉬운 결론도 재미없다. 조직이 아니라 사람,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를 자각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나 스스로도 그러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세월이 지나 이 재미없는 시류에 돋보이는 창작물들이,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결국은 세상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독립영화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연인들>, <조금만 더 가까이> 등의 영화로 주목받았던 김종관 감독의 글. 요즘 우리 영화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분노의 유령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아니 분노보다 기이한 것은, 대부분 이 분노의 유령들은 결국 깊은 허무와 승리의 (혹은 패배의) 자기기만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분노로 시작되어 허무로 끝나는 lose-lose 게임들. 이 글의 제목은 최근 개봉하는 어떤 영화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데, 그 영화는 정말 '분노의 윤리학'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rch 2013-02-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나 예나 영화를 많이 보진 않지만 요새 언뜻 보는 한국 영화들은 노골적으로 사회적인 분노를 표출해요.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사회의식이 있네란 생각이 반복될수록 영화에서 받은 감흥이랄까 문제의식이 조금씩 희석되는 것 같기도 하구요. 마지막 문단이 참 좋은데요.

맥거핀 2013-02-13 00:21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단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정의롭지만 비겁하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문제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의로운 내용을 표방하고 있지만, 정의롭지 않은, 비겁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요. 가끔 조금 이상한 이물감이 들때가 있어요. 그렇게 영화에서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어 존재할 때.

창작자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도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찌를 수가 있어야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위에서 얘기한 대로 쉬운 결론을 피하는 것이기도 할테지요.

2013-02-1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뭐라 덧붙일 말 없이 공감! / 김종관 감독이 최근에(?) 책 낸 거 같던데, 읽어보셨남요?

맥거핀 2013-02-14 13:27   좋아요 0 | URL
아..책을 내셨는지 몰랐는데, 찾아보니 있군요. 이 글에서도 느껴지지만 좋은 생각을 하시는 분 같은데,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Mephistopheles 2013-02-1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정당한 분노"와 "확고한 도덕심" 마저도 깊이 없이 쌈마이화 되가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맥거핀 2013-02-14 13:30   좋아요 0 | URL
사실 영화라는 것은 어떤 사회의 무의식의 총체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 영화에서 깊은 성찰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겠죠. 물론 좋은 예술가는 그 와중에서도 그 물결을 거스르려는 사람일테고요.
 

 

 

 

 

 

 

 

 

 

 

베를린, 류승완, 2013

 

 


(영화의 내용이 약간 들어 있습니다.)


 


액션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액션이 좋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액션'만' 좋아도 된다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액션 영화는 액션 영화이기 이전에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이 액션들은 액션이기는 하되 이야기로 이어지는 액션이어야만 하고, 2시간 동안 그것을 앉아서 볼 동력을 제공해주는 액션이어야 한다. 단절적인 액션만이 중요한 것이라면 굳이 그것을 2시간이라는 긴 시간으로 묶어서 영화로 볼 이유가 있는가. 상당수의 평들에서 지적하듯이 영화 <베를린>이 아쉬움을 주는 부분은 액션이 아니라, 액션 이외의 나머지 부분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많은 평들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전달하는 북한 리학수 대사(이경영)의 대사가 잘 안들렸다, 발음이 좋지 않았다, 사투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발음이나 사투리가 아니라, 그것을 굳이 설명하는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한다는 점이다. 설명을 특정전략으로 구사한다면 모를까, 대체로 이야기의 이러한 기본 구조를 한 인물의 대사로 풀어낸다는 것은 감독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낼 자신이 없거나(즉 이야기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후적 처치이자 고백이거나), 혹은 사실은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류승완의 선택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이야기를 복잡한 것처럼 보이려 할까.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를 잘 풀어내려 했지만, 그것에 실패한 것일까.

도리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것처럼 꾸며낼 이유가 있을까. 좋은 액션 영화에서 이야기는 도리어 상당히 간결하다. 이 영화와 자주 비교되는 '본 씨리즈'의 핵심도 사실은 간단한, 그러니까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본 요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러니까 아이덴티티를 찾아나가는 이야기이다. 그 주 플롯은 영화의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제시되며, 세부적인 다른 플롯은 본 요원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익스큐즈'된다. 즉 (영리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처음부터 관객은 본 요원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보게 된다. 이 영화 <베를린>의 주 플롯은 뭘까. 처음에 얽혀 있는 여러 개의 플롯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는 플롯은, 그러니까 일종의 주 플롯은 북한 내부의 권력 암투와 그것이 주독 북한 대사관의 요원들의 시효 만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 플롯은 영화의 중반부까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통상 액션 영화가 아니라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가 쓰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베를린>은 액션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 같은데, 이상하게도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인 척 한다. 물론 그럼으로써 어떤 이야기에서 얻게 되는 쾌감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잃는 것은 캐릭터를 구체화할 시간이다. 영화의 중반부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과 남한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서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니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이 일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문제는 그게 서로 모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마저도 잘 모르게 된다는 데에 있다. 즉 이야기를 설명하느라 영화의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캐릭터를 구축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따라서 그럴 수록 캐릭터는 평면화된다. 한석규나 하정우가 좋은 배우들이고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기는 하나, 그들에게 자주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캐릭터를 관객 안에 구축시킬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다보니 관객은 그 캐릭터를 자기 스스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들에게서 비슷한 과거의 캐릭터들을, 그러니까 한석규에게는 <쉬리>의 요원이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형사, 하정우에게는 <황해>의 조선족 남자 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한편으로 그 '중요하게 보이려는' 액션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액션 영화에서 액션의 합 못지 않게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액션을 행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액션을 하는가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누가' 액션을 하는가이며 그 '누가'라는 캐릭터는 액션의 형태와 관객의 쾌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에게 바라는 액션과 <스카이 폴>의 '제임스 본드'에게 바라는 액션은 다르며, 그것은 그동안 충분히 구축된 캐릭터의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것처럼 꾸며낼 이유가 있을까.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감독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야기보다는 액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내내 비장하게 깔리는 배경음악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이 비장한 배경음악은 유독 액션씬이 등장할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우리에게 이 액션씬을 비장한 어떤 것으로, 예를 들어 오우삼 영화 속의 어떤 비장함처럼 보아주길 바라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캐릭터들이, 즉 성냥개비를 잘근잘근 씹는 그 쌍권총의 사나이들이 없으니 어쩌나. 즉 이상하게도 이 비장한 음악이 깔리는 액션씬들은 영화의 이야기들과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애써 설명하려던 이야기들은 이것이 사실 그저 소모품 버리기임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사실적으로'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액션씬에서 이것은 갑자기 비장한 생존투쟁이 된다. 지금까지 이 생존투쟁이 비장한 것이 아니었음을 애써 설명한 다음, 다시 그것이 비장하게 등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차피 많은 액션 영화에서 이야기는 브릿지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 된다. 그러므로 이 필요 이상의 많은 이야기가 붙은 이 이야기에서 남는 것은 잉여적인 몇 가지의 질문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스파이 첩보 영화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베를린이라는 분단의 상징과 같은 도시를 배경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없을까. 아니 어쩌면 (사실은 아니지만) 남북한이 얽힌 복잡한 스파이 영화인 척 하는 것, 바로 이것에 정성일의 말대로 무의식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일까.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rch 2013-02-0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당거래의 연속선상에서 이 영화를 봤어요. 권력 때문에 희생되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캐릭터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어요. 영화는 짧고 담을 이야기는 많기 때문에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려지는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이야기를 간소화하자니 애초의 의도를 못살릴 것 같고. 감독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저는 그게 과히 나쁘지 않았어요.

맥거핀 2013-02-07 01:0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대로 <부당거래>와 연관지어보면 조직과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생존투쟁 같은 측면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는 <부당거래>와 장르적인 위치가 좀 다르니까요. 장르가 다르면 어느정도 접근방식이 달라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류승완 감독이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했다고 생각해요. 제작사나 투자사의 입김인지도 모르지만, 휘뚜루마뚜루 해치우려는 느낌이랄까. 저는 류승완 감독이 잘하는 걸 좀 더 살리면 좋을 것 같아요. 잘하는 게 커지면 못하는 건 자연히 줄어들어 보이게 마련이죠.

Arch 2013-02-07 09:36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봤는데요. 분명히 괜찮은 소재인데 너무 뻔하게 풀어낸게 안타까웠어요.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은 아쉬움이 막 남더라구요. 분명히 베를린도 그런 아쉬움이 남는데 저는 그냥 류승완 감독이라니까 그래도 괜찮다가 돼버렸어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감독은 잘 모르지만 베를린의 감독은 잘 안다, 이런거? 좋은 선입관은 아니죠.

휘뚜루마뚜루는 처음 들어본 말인데 막 활용하고 싶어요. 이 말의 연관검색어는 하춘화이던데요.


맥거핀 2013-02-07 14:30   좋아요 0 | URL
아..저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봤어요. 뭐 거의 내용을 다 보여줘서 안 봐도 될 정도.

하춘화씨 최근 발표곡이죠, 아마? 하춘화 씨 얘기하니까 갑자기 한가지 일이 떠오르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그냥 적어볼께요. 제가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를 했거든요. 장교들은 돌아가며 당직을 서는데, 하루는 한 병사가 오더니, 오늘 하루만 밤에 TV볼 게 있는데 여기 당직사관실에서 보면 안되겠냐고 간청하는거예요.(원래 병들은 10시 이후에는 취침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게 도대체 뭔데?,그랬더니 하춘화 디너쇼라고 자기는 하춘화 팬이라는거예요. 한 21살이나 22살 정도 되었을까 한 친구가, 소녀시대도 아니고 하춘화라니..이게 뭔가 싶어서 벙쪘죠. 벙쪄서 그래 뭐 봐라, 하고 틀어줬더니 신나서 열심히 보더군요. 막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그 친구와 그 밤에 하춘화 디너쇼를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로 구라 아니고, 그냥 하춘화 얘기하시니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봤어요. 하춘화 좋아하던 그 친구는 잘 살고 있는지...

Mephistopheles 2013-02-07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짝패 이후에는 본것이 없다보니 (아 다찌마와 리 빼고) 뭐라 평가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간간히 그냥 아무생각없이 봐도 무방한 다찌마와 리 같은 영화가 가장 류승완다운 영화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맥거핀 2013-02-07 14:33   좋아요 0 | URL
다찌마와 리 같은 영화야 말로 아이러니하게도 류승완의 어떤 작가적 자의식이랄까, 같은 게 잘 드러난 작품이었죠. 이 영화 <베를린>은 어떤 공산품 같은 느낌 같은 게 있어요. 최근 CJ표 영화들에서 어떤 공산품들 냄새가 좀 나는데, 위험해 보여요.

Mephistopheles 2013-02-07 20:53   좋아요 0 | URL
조만간 한계가 분명 오겠죠.

맥거핀 2013-02-08 13:11   좋아요 0 | URL
영화와 자본을 분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CJ가 꼭 자본주의적으로 굴러가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예를 들어 저는 이번에 <타워>의 감독이 김지훈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김지훈 감독의 밥줄을 끊어야 된다, 그런게 아니라 <7광구>같은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영화에서 완전한 실패를 보여줬는데, 또 그런 큰 돈을 덥썩 맡기다니..일반 회사에서도 좀 큰 프로젝트 실패하면 맡게되는 프로젝트 크기가 줄어들고 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말이죠. CJ에 다른 감독이 없는 것도 아니고...

2013-02-07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2-07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본' 시리즈의 원작소설인 로버트 러들럼,<잃어버린 얼굴>은 국제물 첩보물 소설 특유의 분위기가 있죠.이 분야가 국제분쟁이나 외교 등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다루잖아요.두툼한 소설이니까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만 영화화하려니 그걸 빼고 액션 위주로 만들었죠.그래서 스파이물이라기 보다는 재밌는 활극영화가 되었고요.
맥거핀 님의 평을 읽으니 '베를린'은 액션물에 스파이물 특유의 고뇌를 다 담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맥거핀 2013-02-08 13:19   좋아요 0 | URL
네..본 시리즈의 영리한 부분이 아마도 그런 부분이겠죠. 그리고 많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부분도 이야기보다는 액션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촬영 스타일 같은 부분이 더 컷구요. 이 <베를린>에서도 예를 들어 유리천장으로 추락하는 씬 같은 부분에서 본 씨리즈를 상당히 벤치마킹한 듯이 보이더군요.

근데 사실 <베를린>은 첩보물인 척 하지만, 저는 첩보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배경만 따고, 그저 액션물로 스트레이트하게 밀어붙이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그리고 이 영화가 최근 톰 롭 스미스의 소설 <차일드44>와 이야기가 너무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더군요. 혹시 그 소설은 보셨는지..

노이에자이트 2013-02-09 17:53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도 <차일드 44>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3-02-0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군요.
엄청난 예산을 받고도 자유롭게 자기 스타일을 살리면서 그 예산을 감당해내는 감독은 잘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치면 엄청난 예산 자체가 족쇄 혹은 걸림돌...

맥거핀 2013-02-11 22:07   좋아요 0 | URL
섬님, 설은 잘 보내셨어요? 제가 댓글이 좀 늦었네요.

그렇죠. 영화에서 자본과의 결합은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할까, 아무튼 많은 예산을 준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이지만, 그만큼 감독에게는 큰 위험부담이 되기는 하죠. 그런 면에서 큰 예산으로 아주 재미있는, 그러면서도 좋은 영화를 뽑는 스필버그 감독 같은 사람이 대단해보이기는 하죠.

노이에자이트 2013-02-0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춘화 씨는 젊은 연예인 많이 나오는 오락프로그램에서도 잘 하더라고요.함께 어울리는 느낌...이번에 엠넷 채널의 <비틀즈 코드>에 소녀시대와 함께 나오는데 주거니 받거니 잘해요.예순이 내일 모레인데도...한 번 다시보기로 보세요.웃음 폭발입니다.

맥거핀 2013-02-11 22:08   좋아요 0 | URL
네..노이에자이트님도 좋은 설 보내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저도 예전에 다른 오락프로그램에서 하춘화 씨가 나오는 것 보고, 젊은 감각에 비교적 잘 맞춘다 싶었어요. 말씀해주신 것 못봤는데 챙겨보겠습니다. 소녀시대도 볼겸..^^
 

 

 

 

 

 

 

 

 

 

 

범죄소년, 강이관, 2012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강이관의 <범죄소년>은 영화적 화면 구성의 측면에서 흥미로운데, 그것은 영화의 내내 인물의 곁에 카메라가 바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즉 <범죄소년>은 다른 어느 샷보다도 인물의 어깨나 가슴께에서 머리끝까지를 찍는 미디엄 클로즈업샷으로 주로 영화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통상 인물의 얼굴을 드러내며 그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관객이 읽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는데, 일반적인 클로즈업샷과 다른 점은 인물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당겨서 찍는, 그럼으로써 인물의 아주 미세한 감정을 잡아내는 클로즈업샷과 달리 인물의 신체 언어가 가지는 의미를 드러내게 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강이관의 <범죄소년>은 인물들의 눈빛을 주의깊게 보되, 그 눈빛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체가 이야기하는 것, 그러니까 그들의 어깨도 보아줄 것을 요구하는 영화다. 미디엄 클로즈업샷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어깨로 말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이, 그들의 표정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종종 어깨는 미세하게 움직이며, 우리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아줄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범죄소년 장지구(서영주)의 어린엄마 효승(이정현)이 노래방에서 업주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양을 떨며 "언니~"라고 부르기 전의 미세한 어깨의 멈칫거림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그 미세한 멈칫거림 앞에서 그녀에게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음을, 그래서 그녀가 왜 아양을 떠는 목소리를 꾸며내야 하는지 대략 짐작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범죄소년'들의 표정을 우리는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부 인물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들의 눈빛을 보여주는 카메라에서 우리는 그들의 무엇인가를 읽어내고 싶어한다. 그들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그리고 범죄로 처벌을 받았음에도 왜 다시 범죄를 반복하는가? 우리는 혹시라도 그들의 눈빛에 어떤 답이 들어있지 않은가 해서 그들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눈에서 무엇인가를, 그러니까 반성하는 눈빛이라든가, 사회와 어른들에 대한 경멸이라든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라든가, 아무튼 무엇인가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표정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범죄소년들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범죄소년이 되고, 범죄소년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내몰리고, 또 내몰렸기 때문에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어깨라도 보여줄 수밖에. 범죄자라는 낙인을 받은 채, 움츠러들어 있는 그들의 어깨, 그리고 그 어깨가 다른 범죄에 빠져들기 전에 아주 잠깐 멈칫거리지만, 다시 새로운 범죄로 나아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물론 미디엄 클로즈업샷이 클로즈업샷, 익스트림 클로즈업샷과 갈라지는 지점은 이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인물의 배경마저도 동시에 어느정도 담는다는 점이다. 즉 한편으로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일반적인 클로즈업과 다르게 배경을 담으며, 동시에 그럼으로써 보는 우리와 인물과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즉 우리는 범죄소년과 약간의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도 함께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범죄소년들은 그 배경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문제를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 놓을 수 없고,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사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다. (어려운 위치에 처했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많은 소년이 있다.) 아무튼 개인적 문제이건, 사회적 문제이건 간에 범죄를 저지르면 그들은 사회와 분리되어 갇히지만, 다시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는 그들을 맞이할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혹 그들이 사회와 격리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변했더라도, 그들이 다시 돌아가는 사회는 예전과 그대로인 채로, 즉 예를 들어 범죄소년들에 신경쓰지 않는 어머니도 그대로이고, 범죄소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도 그대로인 그런 상태, 아니 이제 그것을 넘어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소년원에 다녀온 자식을 외면하고, 예전에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이 이제 그를 멀리하는 그런 상태의 한가운데로 되돌려진다는 점이다. 그런 상태로 돌아간 범죄소년들이 어떻게 되는가, 이 영화 <범죄소년>은 그 메커니즘을 일종의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영화다.

통시적 관점이라는 것은, 결국 이 영화에서 장지구의 엄마 효승의 현재 모습은 장지구의 여자친구 새롬의 미래 버전 중의 하나로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즉 장지구의 아이를 가진 채 가족과 학교에서 모두 떨려나가는 새롬은 효승의 과거의 반복이며, 효승의 현재 모습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새롬의 미래의 여러 모습 중의 하나이다. 즉 강이관은 여기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범죄소년이 대를 이어 재생산되기까지, 즉 범죄소년이 또다른 범죄소년을 만들어내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 그런데 보다 문제는 이것이 그리 나쁜 케이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는 그럴듯한 악인을 별로 찾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중간에 효승과 같이 사는 효승의 후배나 효승이 만나는 여관의 주인이나 식당의 여주인 같은 사람들을 보면, 일견 야멸차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결코 나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니 임시로나마 효승과 지구에게 살 거처를 제공하고, 여관비를 깎아주는 모습 등을 보면 도리어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문제는 개인적 호의라는 것이 한계가 있고, 오로지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개인적 호의나 범죄밖에 없도록 이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며, 그 구조는 상당히 단단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마 이 영화가 이렇게 툭 잘라내는듯이 끝나는, 아주 불안하고 미세한 희망을,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할 정도인 그런 것을 애써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며 끝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물의 눈을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하되, 그 눈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그 인물의 눈에서 어떤 미세한 반성이라도 읽어낸다면, 우리는 혹시 그것을 조금은 오해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범죄를 오로지 개인의 악의 산물로서 읽어내는 오류같은 것 말이다. 저 눈을 보니 틀려먹었어, 그들은 또 범죄를 저지를거야, 혹은 반성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잘 살게 될 것 같군, 이라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희망 같은 것. 그러나 그런 희망이란 없다. 우리는 어떠한 희망도 제공되지 않은 이 이야기에, 이 불안한 결말에 스스로 이야기를 붙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영화에 어떠한 추가적인 희망도, 혹은 절망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추가적인 이야기가 좋아지려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든 변화시켜 나갈 도리밖에 없다.

 

 

덧.
강이관은 좋은 감독이다. 보통의 감독은 하나의 씬에서 한가지를 전달하는 감독이다. (물론 이런 보통의 감독도 그렇게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씬은 인물의 캐릭터를 잘 설명하거나, 혹은 인물들 간의 관계를 잘 그려내 보여줄 수 있다. 좋은 감독은 하나의 씬에서 두 가지를 전달한다. (물론 아주 좋은, 그러니까 위대한 감독들도 있다. 그런 감독들은 하나의 씬에서 서너가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넣는다. 그러나 대체로 그 서너가지가 무엇인가가 생각할 틈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동시에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숨을 못쉬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씬이 인물의 캐릭터와 인물들 간의 관계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잡아내고 있다면 그 장면은 좋은 장면이고, 그러한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감독은 좋은 감독이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처음에 지구가 보호관찰 전화를 받는 장면을 보면, 보호관찰이라는 것의 어떤 서늘한 방식, 그것의 기계화되고 무책임한 구조를 보여주면서도, 할아버지의 병든 숨소리를 넣고, 그 병든 숨소리를 무심히 보는 지구를 보여줌으로써 그 캐릭터를 구체화시켜 나가고 있다. 즉 적어도 관객은 이 장면에서 지구가 보호관찰을 받고 있기는 하나 아주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미용실에서 효승이 효승의 후배의 지시를 받는 짧은 씬에서도 이것이 드러나는데 효승이 후배에게 대하는 비굴한 뉘앙스를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도 잘 드러내면서 효승이라는 캐릭터의 위치나 성격 역시도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효승은 지금까지 저런 것을 얼마나 반복해왔을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견뎌내야 하나,라고 관객에게 익히 짐작하게 한다. 그런 좋은 감독이 만들어낸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그렇게 생각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02-04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미디엄 클로즈업샷의 촬영기법을 주로 쓰는 영화에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기본사항이겠구나 싶군요. (세월이 흘렀어도 이정현이란 배우라면 그 섬세함이 왠지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 이런 기법을 쓴 영화 중 대표적인 건 뭐가 있을까요??

맥거핀 2013-02-04 13:26   좋아요 0 | URL
저도 이정현이라는 배우가 상당히 좋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왜 자주 연기를 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가수보다는 연기자로서 훨씬 낫다고 보는데..

글쎄요. 통상 미디엄 클로즈업도 클로즈업의 일종이고, 그런 만큼 클로즈업을 남발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답답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죠. (즉 아시겠지만 미디엄 클로즈업은 다른 샷과 섞여야만 그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니까..) 간혹 가다가 인물의 감정을 중점적으로 표현해야할 영화의 경우 그런 샷이 의도적으로 많이 쓰이기도 합니다. 제가 본 것 중에서 생각나는 건 <블랙 스완>이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같은 것..두 영화 모두 미세한 감정을 잡아내는 게 상당히 중요한 영화이고, 특히 <블랙 스완>은 신체나 표정의 미묘한 움직임 같은 것이 중요한 영화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발레 공연을 잡는 몇몇 씬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미디엄 클로즈업이 상당히 많이 나왔던 영화로 기억해요.

책에 보니 차이밍량 감독의 <다크 서클스> 같은 영화를 미디엄 클로즈업이 잘 사용된 영화로 꼽고 있던데, 제가 보질 않아서..^^;

Shining 2013-02-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현 씨의 연기는 확실히 과소평가 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 영화에 대해서는, 언제가 되든 보고 난 후 다시 댓글 달게요 :)

이 영화도 그렇고 <신의 소녀들>과 <더 헌트>도 결국 못 봤네요. 아직 1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놓친 영화가 넘치는 씁쓸함ㅠ 사람을 보러 간 건지 팀 버튼을 보러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녀왔습니다, 팀 버튼 전(웃음). 가면서 신년 통합본(?) 씨네21을 샀는데 신형철 씨가 쓴 <라이프 오브 파이>글은 정말 멋지더군요. 신형철 씨의 글은 정말.... 오직 글로만 사람에게 이만큼 반하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맥거핀 2013-02-06 15:59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팀 버튼을 그렇게 좋아하지를 않아서, 팀 버튼 전이 해도 가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뭔가 기괴한 이미지로 가득해서 나름 재미는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사람이 많은 것은 저도 참 그렇습니다만...팀 버튼 영화 중에서 마지막으로 본 게 <스위니 토드>였고, 그것도 약간 앉아있는게 괴로웠습니다.

근데 말이죠. 이번호 <씨네21>이 조인성 브로마이드를 부록으로 주던데, 그것 때문에 산 거 아닙니까? 으걀걀.

Shining 2013-02-07 11:25   좋아요 0 | URL
얼마 전 일말의 기대를 갖고 (<앨리스>때 하도 실망해서) <다크섀도우>보다 졸 뻔 했어요. 재미가 없다 없어 짜증낼 뻔 했다는_- 인산인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인구밀도였어요....

가는 길에 베를린 표지가 붙은 씨네21이 걸려있길래 저 씨네21 주세요, 했더니 아저씨께서 꺼내시다말고 오늘 나온 거 줄까? 라고 속삭이시길래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하도 말투가 은밀해서 누가보면 암표상인줄 알았겠다는...). 알고보니 그게 신년통합본인가 되더라구요. 그렇게 얻은 조인성 씨입니다ㅎㅎ

...그 안에 부록이 있었나요?ㅎㅎ 전 인터뷰도 제대로 안 읽었어서...훗, 미남스타나 그들의 부록에 집착하지 않아요_-(으쓱)........원빈이라면 약간 고민은 했을거에요.....

맥거핀 2013-02-07 14:43   좋아요 0 | URL
왜 조인성 때문에 샀다고 말을 못하니..흑흑흑..이 아니고, 그런 연유로 사게 되었군요. 저는 씨네21 정기구독 중인데, 정기구독자들의 상당수가 그러듯이 일단 뜯어보고 한 1분간 휘리릭 넘겨본다음, 나중에 자세히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는 다음주 책이 올 때까지 잊어버려요.; 그래서 맨날 휴일 같은 때 몰아서 보게 되요. 이번 설에도 밀린 씨네21이나...

근데 주간지 같은 거는 신년통합본 이런 거는 씨네21 아니더라도 자주 구매해요. 값은 똑같은데 더 두꺼워서 좋고, 중간에 특집퀴즈 같은 게 들어있어서 문제푸는 재미도 쏠쏠. 작년 추석 때 씨네21이랑 한겨레21 두 개 응모했는데, 다 국물도 없더라는...
 

 

1.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결국 우리가 보는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대로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최근 이 영화와 관련한 여러 리뷰들, 이야기들을 보면 이 '믿는대로 보는 것'이라는 믿음의 한 형태가 그 담론들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를 확장하여 파이가 식인을 했다고 생각하는 관점들 같은 것 말이다. 이 관점들에서는 파이가 말한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사건이며, 파이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 식인을 하게 되며, 호랑이는 단지 그의 종교적인 자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몇몇 증거들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 제시된 증거로는, 식인섬이 등장하고(그러니까 실제로 이것은 식인섬의 등장 시점부터 파이가 배에서 식인을 했음을 의미하고), 그것의 형상은 사람의 형태(혹은 힌두교의 비슈누 신의 형태)이며, 사람의 이빨이 꽃 속에 들어 있으며, 난파되면서 갑자기 주방장이 얼룩말로 대치되며, (심지어는) 마지막 해변에서 호랑이의 발자국이 모래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을 말할 수 있다. 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 바깥에서 찾은 증거이다. 영화 속에서는 건너 뛰는 부분이지만, 소설 <파이 이야기>에는 실제로 파이의 식인행위를 묘사하는 구절이 있으며, 1884년 영국의 미뇨넷 호가 난파하여 18일만에 음식이 떨어지자 결국 한 소년 선원을 죽여 그 고기를 나눠먹고 살아남아 구조되었는데, 그 소년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였다는 사실 같은 것.

 

결국 이 관점들의 출발은 파이의 마지막 이야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들려준 다른 버전의 이야기말이다. 소설을 보지는 않았지만, 이 <파이 이야기> 소설에도 등장하고, <라이프 오브 파이>에도 등장하는 이 결말은 조금 이상해 보이기는 한다. 순전히 영화의 어떤 완결적인 구조만을 놓고 말하자면, 이 마지막은 그 완결적인 구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이상한 사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 마지막이 없어도 이야기의 완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그 구조 자체에도 흔들리는 부분이 없다. 아니 도리어 이 마지막은 이 구조를 스스로 흔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이상한 마지막이 영화에 슬며시 붙었을 때 흔히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러한 관점이 조금 기이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지 않은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두 시간 가까이 본 파이와 리처드 파커와의 동거를 환상이라 생각하고, 영화 속에서 전혀 보여지지 않는 인간 사이의 살육에 이 관점은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에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것은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영화 속에서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 암시된 증거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보는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대로 보는 것이다. 암시된 증거들은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만이 그 구조를 우리앞에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영화 외부의 증거들을 영화로 가져올 때의 어떤 위험한 부분에 대해 재론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의 상징을 다룰 때, 그리고 그것을 해석할 때 외부의 구조를 가져오는 것, 그에 더 나아가 상징과 해석을 다룰 때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밤을 새야할지도 모른다.) 

 

2.

'믿는대로 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로 하면, 내가 '본다'라는 사실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맹신이 아니라 믿음의 한 종류가 될 수 있으려면 그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무엇인가의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인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예를 들어 정성일 평론가의 다음의 말과도 통한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즉 여기서의 '보는 것'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착란 상태에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회의하면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얘기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가 식인을 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해석을 하는 것이 기이한 방식으로 돌아가기는 했어도, 심지어 식인섬의 미어캣이 시체에 꼬이는 구더기라는 이야기까지 나아가기는 했어도, 결국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적 맹신에 대한 위험성'이라고 결론을 맺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그 맹신에서 벗어났을 때만이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 해석을 하든 간에 그 돌아오는 지점이 그렇게 크게 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종교적 맹신을 경계하자'는 것은, 사실 '(제대로된) 믿음을 가지자'는 말의 다른 버전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된 믿음'이라는 것은 맹신이 제거된 믿음, 회의라는 것이 포함된 믿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험해 보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본 것이 아니라 보지 않은 것에 기초하여 쓴 것처럼 보이는 그런 해석의 글들보다는 그 해석 밑에 붙은 여러 기이한 댓글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화에 찜찜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해석을 읽고 의문이 풀렸다는 식의 그런 댓글들. 그것이 위험한 것은 그것은 마치 어떤 정답지를 대하는 듯한 태도, 혹은 맹신을 하지 말자는 취지의 글을 맹신하는 듯한 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찜찜한 부분'이 아닐까. 영화의 어떤 찜찜한 부분이 눅진하게 남아 건드리는 것, 즉 당신에게 던지는 계속적인 질문, 당신이 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들, 그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찜찜한 의문을 풀기 위해 어떤 해석을, 혹은 어떤 글들을 정답지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영화를, 그리고 그 영화에 혹시 들어있을지도 모를 어떤 질문들에 대한 사고를 정지하는 것이며, 그 영화를 자신의 안에서 내치는 것이며, 동시에 어떤 기이한 믿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감독의 인터뷰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대해 다루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글들은, 아니 (이렇게 얘기하면 니 글은 어떻고,라는 얘기가 쏟아질 것 같으므로 이렇게 바꿔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글들은 질문을 풍성하게 만드는 글이다. 즉 우리가 영화가 끝났을 때 한 두 가지의 질문 밖에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질문을 두 배, 세 배로 늘려주는 글들. 다시 말해서 찜찜한 영화를 더 찜찜하게 만드는 글들. 그리고 그 찜찜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금 영화를 보게 만드는 글들.

 

3.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영화를 다루는 어떤 태도에 대한 것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최근에 모 영화를 다룬 글들을 보러 한 사이트에 들렀다가 가득 쏟아지는 비평가들의 별점에 대한 조롱들을 보고 기분이 아득해져 (트위터에 글을 안올리게 된지 오래지만) <씨네21>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다.  '<씨네21>의 애독자로서 하나 묻습니다. 포탈의 영화 별점을 들여다보면 때로 기분이 참 안좋아집니다. 별점제도에 대한 오해, 전문가평들에 대한 오해가 난무한달까요. 이것에 대한 부분에는 여러 영화를 다루는 매체들의 책임이 있으며, 영화를 다루는 주간지로서 <씨네21>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입장에서 지금이라도 <씨네21>이 영화별점을 다루는 부분을 없앨 생각은 없는지, 왜 아직도 이러한 오해를 (본의 아니게) 조장하고 있는지 생각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은 답멘션을 보내왔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영화에 대해 간단하게 식별할 수 있는 한 방법 중에 하나가 별점이 아닌가 싶어요.. 주신 의견 관련부서에 전달해 드릴께요~  ^^' 뭐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만 우리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끄세요'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내가 트윗에서 이야기한 '전문가평들에 대한 오해'라는 것은 전문가들, 그러니까 영화비평가들이 매기는 별점이라는 것을 재미에 대한 척도로 여기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즉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비평가들이 재미없는 영화만 좋아한다, 재미없는 영화에만 높은 평점을 준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러나 이런 비평가들의 영화에 대한 별점은 '재미의 척도'가 아니라 '예술성의 척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즉 비평가들이 어떤 영화에 대해 좋은 점수를 준다면 그것은 그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짧은 문장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담는다. 그것은 비평가들이라는 집단이 균일하지도 않거니와 그렇다면 과연 '예술'이라는 것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것은 '재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재미'와 '예술'을 구분해야 하는가)라는 기나긴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그저 별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즉 제대로된 비평가라면 '이 영화가 재미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보다는 '이 영화가 영화라는 예술의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며, 그 기준에 따라 점수를 주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리어 이렇게 묻고 싶다. 영화비평가가 일반인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그들이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그들의 눈과 일반인의 눈이 같아지는 순간, 그들은 소멸될 것, 혹은 소멸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정성일 평론가의 트윗 "인과관계_ 평론가들이 감독을 예술가 대접하며 그들의 영화를 비판하자 죽일듯이 미워하며 왜 그렇게 심각하냐고 욕을 했다. 소원대로 비평이 몰락하자 감독들은 장삿꾼들에게 무자비하게 잘려나가고 있다. 우리들이 당신들의 방어선이라는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아마도 그것은 별점이라는 것, 그리고 20자평(혹은 100자평)이라는 것의 어떤 폭력적인 부분과 연관되는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의 줄세우기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批評)이라는 한자에 견줄 비(比)자가 들어있는 것처럼 비평이란 결국 견주어서 평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왜 예술이고 어떤 것이 왜 예술이 아닌지 보여주는 것은 비평가들의 임무이다. 그러나 다만 그것이 긴 담론과 여러 의미를 고려한 견줌이 아닌, 별의 숫자와 트윗보다도 짧은 글로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의도를 넘어서 때로 폭력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짧은 20자평이 때로는 촌철살인의 문구라고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나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화는 '촌철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4.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에서 시간을 다루는 태도 같은 것이다. 며칠 전 일요일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론 셰르픽 감독의 <원데이>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이지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시간에 대한 태도이다. 이 영화는 1988년 7월 15일 엠마(앤 해서웨이)와 덱스터(짐 스터게스)의 하루에서 시작하여 그 이후의 20년 동안의 7월 15일을 이어붙이는 영화다. 즉 이 영화는 순간의 집적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영화다. 물론 순간의 집적이 영화가 될 수는 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란 순간의 집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집적이 영화라는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매년의 동일한 날이라는 시간이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의 매년 동일한 날에는 어떤 극적인 순간들만이 집적된다. 김혜리도 이러한 것을 지적했는데, 김혜리는 "그러나 론 셰르픽은 야심이 없고 <원데이>의 매년 7월 15일에는 우리가 기존 연애서사에서 익히 보아온 사건에 해당하는 일들이 꼬박꼬박 일어나 구태여 택한 형식의 의미를 미궁에 빠뜨린다." -<씨네21> 888호-라며 이 점을 꼬집고 있다.

 

즉 이 영화는 매년의 동일한 날이라는 시간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도, 그것을 극적인 사건의 집적들로만 채움으로써 그저 뻔한, 다시 말해서 감수성이 민감한 17세 소녀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연애 스토리를 집약함으로써, 이 영화에 대한 악평에 어떤 내용이 쓰여질 것인지조차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된다. 예를 들어 이것은 웨인 왕의 <스모크>에서 13년 동안 매일같이 아침마다 같은 장면을 사진에 담는 사내의 모습과 비견된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13년 동안의 그 사진에서 극적인 순간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매년이 아니라, 심지어 매일의 같은 날에서도 극적인 순간은 거의 없으며, 삶이란 그런 비(非)극적인 순간의 집적이다. 그리고 극적인 순간이 빛나는 것은 그런 비(非)극적인 순간의 집적 사이에 극적인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시간을 다루는 예술인 영화는 그런 비(非)극적인 순간 속에서 극적인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혹은 극적인 순간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묵묵히 필름을 돌린다.

 

5.

그런 영화의 시간에 대한 익스트림한 한 형태는 2003년 만들어진 왕빙 감독의 디지털 영화 <철서구>이다. 철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폐쇄가 결정된 중국의 도시 센양에 카메라를 한 대 가지고 들어간 왕빙 감독이 3년 반 동안 그곳에 기거하며 만들어낸 9시간 11분짜리의 이 영화는 사라져가는 도시, 사라져 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라는 예술의 대답이다. 보지도 않은 영화에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못할 짓이고,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트위터에 이 왕빙 감독의 인터뷰 몇 구절이 올라왔고, 그것이 상당히 인상깊었기에 하는 말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철서구>를 21세기 영화 30편 중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외로움_ 영화를 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속물들이죠. 그들은 돈과 대중의 소란 속에서 외롭죠. 다른 하나는 예술가들이죠. 이들은 자기 혼자서 견디면서 적막하게 외롭죠. 어떤 외로움을 택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왕빙과의 인터뷰"

 

"안마_ 우리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게 아니라 예술가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없어요.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안마를 받으러 가면 되요. 그런데 어떤 감독들은 자기가 안마시술사인줄 알고 있어요.. 왕빙과의 인터뷰"

 

"조건_ 모든 것이 불리할 때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들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다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왕빙과의 인터뷰"

 

이런 인터뷰를 하는 감독의 영화가 궁금하지 않는가?

 

6.

그래도 알라딘이니 마지막으로 책 얘기.

 

이사를 하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몰랐던 오래전의 책 몇 권, 그러니까 중고등학교 때 둔촌동의 작은 서점들에서 산, 여러 권의 책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대다수는 세계문학전집들인데, 그 중의 몇 권을 어쩌다보니 조금씩 읽게 되었다. 며칠 전에 조금만 읽자고 시작해서 끝까지 다시 읽은 것은 1992년 출간된 중앙출판사의 'GOLDEN 世界文學選 31권'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인데, 다시 읽어보니 어떤 구절은 새롭게 인상적이고, 어떤 구절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고, 어떤 구절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조금 별로다. 아무튼 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좋은 소설이다.

 

새롭게 인상적인 구절의 인용. 톰이라는 가족의 차남이 어떤 폐차장에 차를 고치러 가서 그곳의 외눈을 가진 점원과 나누는 대화인데 그의 성격의 일면이 잘 드러난다.

 

톰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이것 봐, 친구. 당신은 과연 한 눈이 뻥 뚫렸어. 그리고 때투성이고 몸에선 구린내가 나고. 그런데 당신은 그걸 자청하고 있는 거야. 그게 좋다 이 말이지? 자기 신세를 일부러 한탄하는 셈이지. 하긴 그렇게 눈구멍이 뻥 뚫려 가지고야 여자가 생길 리 없지. 그러니까 말요, 뭘로 그걸 가려 봐요. 세수도 좀 하고. 그러면 스패너로 사람을 칠 생각은 없어질 거야."

"모르는 소리지. 외눈 신세는 따분한 거요." 그 사나이가 말했다. "성한 사람처럼 보질 못하거든. 얼마나 먼 데 있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모조리 다 평면으로 보이니까."

톰이 말했다. "그러면 안된다니까. 내가 한때 외다리 갈보를 하나 알게 됐는데, 그게 골목에서 한 판에 25센트쯤 받고 일을 치르는 줄 알아? 천만에. 남보다 20센트 씩 더 받아내던데. 그 말이 이렇거든. ......'외다리 여자를 데리고 몇 번 자봤수? 처음이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거든. '당신 오늘은 특제를 만났으니 50센트는 더 내야겠어요.' 이러거든. 아닌게아니라 손님들이 그렇게들 더 주거든. 그리고 모두들 나오면서 그날 재수가 좋다고들 생각하는 거야. 그 계집 말이 자기하고 놀면 누구나 재수가 붙는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내가 살던 고장에......꼽추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 글쎄 자기 잔등을 만지면 재수가 붙는다고 사람들에게 모두 한 번씩 그 잔등을 만져 보게 하는 거야. 그런데 당신은 기껏해야 눈알 하나만 없다뿐이잖아?"

그 사나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남이 슬슬 나한테서 물러서는걸 보면 속이 뒤집힌단 말이야."

"제길, 그럼 뭘로 덮어놓으면 되지. 암소 엉덩이처럼 그걸 드러내 놓고 있으니까 그렇지. 자기 신세를 일부러 한탄하고 싶은 거지 뭐야. 당신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데 뭘 그래? 말쑥한 흰 바지를 한 벌 사 입어 보란 말야. 그러면 얼근히 취해서 이불 속에서 헉헉거리며 기분을 내게 될걸. 거들어 줄까, 앨?"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01-2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춘수시인 이야기가 떠올라요. 그의 대표작인 "꽃"은 교과서에도 실리기도 했잖아요. 그런데 각종 참고서에서 나와있는 "꽃"에 대한 해석을 보고 정작 시인은 혀를 내둘렀다고 하더군요.

맥거핀 2013-01-22 17:22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저는 "꽃"이 그렇게 좋은 시인지 잘 모르겠어요.ㅠㅠ 근데 우리는 별표 띵야띵야 해가면서, 그런 해석 참 열심히도 외웠죠. 근데 해석은 기억에 남아있는데, 정작 시는 잘 기억이 안나는...

마녀고양이 2013-01-2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라이프오브파이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이후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모든 감상을 미룬 상태입니다.
작가가 왜 마지막 이야기를 덧붙였는가에 대해서, 여러 생각이 혼란스럽답니다.
저희 딸두요.....

나중에 저도 한번 페이퍼에 다루고 싶은 영화더군요. ^^

맥거핀 2013-01-22 17:26   좋아요 0 | URL
한마디로 떡밥이 좀 많은 영화죠. 그리고 그 떡밥을 기꺼이 물만큼 떡밥들이 매력적인 영화이기도 하구요.(이안 감독님, 그리고 마텔 작가님 만선하셨어요~) 따님과 이야기해보시면서 각자 나름으로 생각해보면 되죠.

달여우님 요즘에도 바쁘게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어요. 글 읽으러 갈께요.

프레이야 2013-01-22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다시 봤어요. 잠이 와서 쓰는 글이네요. 안 와서가 아니고.ㅎㅎ
저랑 비슷한 시각에 '라이프 오브 파이'를 생각했네요.^^
다소 꿈 같기도 한 이야기였는데.. 우리가 믿는 대로 본다,라는 말에 동감해요.
마음에서 원하는 걸 믿고 싶어하겠지요.
'원데이'는 저도 시간을 작위적으로 나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꼭 그날짜에 그렇게 결정적인 일들이 일어날 확률은 몇일까요?
앤의 수수한 모습이 좋아보이긴 했어요.^^

맥거핀 2013-01-23 16:10   좋아요 0 | URL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증거가 명확하고, 모든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순리 혹은 당연한 것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근거가 불확실하고, 입증할 방법이 없지만 믿는 것이 믿음이죠. 물론 그것은 프레이야님도 글에서 쓰셨지만 계속적인 의심과 회의가 뒤따라야 할 것이겠구요.

아..<원데이>도 보셨군요. 저도 앤 헤서웨이가 참 여러 캐릭터에도 비교적 잘 어울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이 조금만 신경써서 몇 가지 이야기를 쳐냈으면 조금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감은빛 2013-01-2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이 오는 와중에도 이런 훌륭한 글을 쓰시다니!

영화에 대한 좋은 글은 '질문을 풍성하게 만드는 글'이라는 점에 대해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글은 딱 그런 글인 듯 합니다.
항상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맥거핀 2013-01-23 16:13   좋아요 0 | URL
아..제 글이 그런 글이라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평가란 해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이에게 질문을 전가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그런 의견에 동의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자신이 해야죠.

비도 오고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Shining 2013-01-26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호하게 편을 들어주는 것, 이 오히려 관건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전반적으로 리처드 파커 님(ㅋ)의 이야기가 사실인걸로 추측되지만 이야기와 사실 사이에 경계를 흐트리는 것, 그게 오히려 이 영화 혹은 원작이 던지는 강점이라고 여겼거든요. 아무튼 리처드 파커님의 발자국이 남지 않으셨다니 저는 거기까지는.......

이 글을 쓰고 계신 즈음 저는 기억의 불분명함, 에 대해서 끄적거리고 있었어요; 뭔가 신기해요. 충고하지 않은 삶,도 비슷한 시기에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오만년만에 일을 해치우고 글을 써보려는 의욕에 탔는데 도서정가제 때문에 영 분위기가 숭숭하네요. 결국 책을 읽는 사람들만이 토의한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대다수의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논쟁에 관심이 없다는 것. 그런 점들이 씁쓸할 따름입니다. 바람이 차군요, 주말 잘 보내세요 :)

맥거핀 2013-01-28 14:05   좋아요 0 | URL
주말 잘 보내셨나요?

아무튼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 같은 것을 보았으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그런 의미에서 이안 감독의 낚시질은 아무튼 성공입니다. 같은 것을 보았어도, 결국 당신들이 본 것은 당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무엇인가라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니까요. 제가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불교에서도 그런 비슷한 말을 들어본 것 같고..

도서정가제에 대해서는 그간 잊고 있었던 책이라는 상품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더 좋은 논의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양상이 좋지 않은 국면으로 흘러서 별로 끼고 싶지 않은 단계에 이르는 것 같군요.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대다수는 이것에 또한 관심이 없다는 사실도 저도 마찬가지로 씁쓸하구요. 도리어 이런 배타적인 논쟁이 관심을 좀 가지려는 사람들도 밀어내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그리고 언젠가는 기억의 불분명함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되겠군요.

2013-01-31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파이이야기를 또 다르게 보았어요. 역시 떡밥이 풍부한 영화가 맞군요.ㅎㅎ (원작을 읽으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못 읽고 넘어갈 것 같고~)
원데이, 재밌게 봤는데, 이런 비판의 요소가 있군요. 비(非)극적인 순간의 집적 속에서 극적인 순간을 이뤄내는 것이 영화다, 그를 위해 묵묵히 필름을 돌린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근데, 이런 거랑 별개로 원데이는 앤 헤서웨이가 참 좋았어요. 이런 역할도 잘 할 수 있구나~하면서,,.
그리고 왕빙의 인터뷰 좋아요. 특히 마지막 말. 어차피 철서구는 또 못 보고 넘어가겠지만~ㅠ

맥거핀 2013-02-01 01:12   좋아요 0 | URL
섬님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여행 다녀오시면서도 챙겨볼 만한 영화는 또 잘 챙겨 보셨네요.

암튼 이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모험 이야기는 참 재밌어요. 이 영화의 리뷰를 여러 개 찾아보았는데 참 놀라운 것은 그 리뷰들 모두 각각 나름의 해석, 또는 나름의 믿음을 주장하더라구요. 모두들 각자가 발견한 새로운 증거를 예시하면서 말이죠. 참 재밌어요.

<철서구>는 저도 아직 보지 못했어요.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잘 모르겠네요. 전주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9시간 11분짜리 영화이니 하루에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하기는 요새 3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예를 들어 <클라우드 아틀라스> 같은 것)들도 볼까말까 고민이 되는 걸요.
 

 

 

 

 

 

 

텔레비전,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 2012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한 시골마을. 촌장의 절대권력이 작용하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은 급기야 매스컴의 주목까지 받게 된다. 그 이상한 일이란, 이곳은 모든 이미지가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 이슬람 율법의 철저한 신봉자인 촌장은 영혼이 없는 것을 보고 그것을 우상화하여 따르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일체의 영혼없는 이미지를 금지시킨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영혼없는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다. 그곳에서는 반입되는 신문의 모든 사진은 하얀 종이로 가려지고, 텔레비전 시청은 금지되며, 사진찍기는 금기시되고, 컴퓨터, 노트북과 얼굴책('페이스북'을 촌장은 그렇게 부른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휴대폰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고, 그것의 공습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 그리고 또한 정신적으로 막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떤 소동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영화는 그런 소동을 유쾌한 터치로 다룬다. 물론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미지로 보고 있다는 것. 즉 영화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혼없는 이미지에 기꺼이 영혼을 내맡긴 가련한 상태에서 이 영혼의 수호를 위한 어떤 예정된 패배의 사투를 보고 있는 것.

 

물론 이것 중에 가장 핵심에 놓여진 것은 영화의 제목으로도 제시된 '텔레비전'이다. 이 영혼없는 이미지들의 총체인 텔레비전의 공습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이슬람교가 아닌 힌두교 신자라서 어쩔 수 없이 허용해준 바부 선생의 텔레비전에 곧 온마을 사람들이 그 영혼을 기꺼이 가져다 바친다. 바부 선생의 집에는 온마을 사람들이 몰려들며, 마을의 어린아이들은 수학 선생인 그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다른 수학선생님들이 실력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의 집에 수학 과외를 받으러 간다. 촌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를 막기 위해 텔레비전을 강물에 내던지지만, 텔레비전의 위력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급기야 일종의 혁명이 일어나는 등 소동은 끊이지 않는다. 모스타파 파루키의 영화 <텔레비전>은 이 소동극을 유쾌한 유머와 풍자를 섞어 결코 무겁지 않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눈앞에 드러나는 사건들 이외에도 이 소동들이 어떤 이미지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로서, 혹은 그런 이미지들의 마치 일종의 작동방식인 것처럼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은 세상의 재현 혹은 어떤 시뮬라크르의 총체이다. 그것은 어떤 기술(技術)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동시에 기술(記述)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즉 촌장의 말대로 현재 TV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미지는 당연히 그 인물 자신이 아니고, 그 인물의 어떤 기술(技術)적인 모사물이다. 동시에 TV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재현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영화 같은 것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에서 그 인물은 기술(記述)되는 그 인물이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촌장'역을 연기한 그 배우는 그 촌장이라는 가상의 혹은 실제의 인물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인물 자신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을 대체할 만한 오락거리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마을의 일종의 극장 - 이것의 무대는 실제의 텔레비전처럼 만들어져 있다 - 에서 이것을 지적해낸다. 즉 역사극에서 역사속 인물을 재현하는 것은 결국 결과적으로 영혼이 없는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바가 없으며 엄격한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텔레비전은, 특히 마을 사람들이 환장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영화는, 이중의 기술적인 시뮬라크르라는 기술(奇術)이다.

 

이 영화가 독특해지는 지점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촌장이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여권이 필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어야할 때 그 곤경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촌장과 그의 수하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촌장의 쌍둥이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개발해낸다. 즉 촌장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촌장의 쌍둥이형이 사진을 찍는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 이것은 이중의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영화와 사실 그다지 차이가 없다. 아니면 촌장의 아들이 연애를 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재미있는 것은 이 연애에도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실제와 실제의 모사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술(技術)적인 것이 두 사람이 몰래 숨겨둔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그 목소리만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라면, 기술(記述)적인 것은 여기에도 두 명의 인물, 즉 촌장의 아들과 그 아들의 수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실제 연애를 하는 것은 촌장의 아들이지만, 이 연애를 작동시키는 것, 즉 두 사람을 노트북 화상채팅을 통해 몰래만나게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촌장아들의 매우 코믹하게 등장하는 수하의 몫이다. 이 연애에서 촌장아들의 수하는 촌장아들의 거의 모든 연애를 대신해주며, 심지어는 그가 실연했을 때 그 실연의 아픔까지도 대신해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수하가 실제로 그 촌장아들의 연애 상대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촌장아들이라는 원본과 촌장아들의 수하라는 시뮬라크르는 동일한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적어도 여기에서는 원본과 복제물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감독은 이를 조금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 소동극을 마치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이 영화는 몇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부 선생의 학생이 불어나는 장면을 음성과 시각으로 연결하는 것이나, 휴대폰 음성만으로 이미지를 상상할 때 카메라를 360도 회전시키면서 실제의 이미지로 변하게 하는 등의 장면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정의 장면 외에도 영화는 유독 인물들을 어떤 창이나 틀 안에 배치시키는 것을 자주 활용함으로써 마치 이것이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즉 이 영화 <텔레비전>의 이 소동이 일어나는 폐쇄된 마을에서 이 마을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소동극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이 원본인지, 복제물인지 모른채, 때로는 진심을 다하여 일상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 시뮬라시옹은 때로는 너무나도 정교해 자기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들을 속인다. 다시 말해서 소동이 일어나는 이 마을은 현대사회의 작은 축소된 복제물이다. 이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연기하며, 그것은 이미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 그것은 물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것을 구별해내는 것, 즉 원본이 복제물이 되고, 복제물이 원본이 되는 시대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이 혹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것을 어쩌면 이 마지막은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사기를 당해 성지순례를 가지못한 촌장은 끙끙 앓아눕다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성지순례 중계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내내 텔레비전을 배척하던 촌장은 그제서야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라고 반복하며 말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내내 독선적이고 독단적이었던 촌장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다르게 읽혔다. 결국 얼마나 진심을 다하여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인 것. 결국 성지순례라는 것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지 않을까. 아무리 현재의 성지를 지금 순례해도 그곳은 옛날의 성인이 있던 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과거의 성지의 일종의 모사물이다. 그러나 그곳을 정말 성지라고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서 참배하는 것, 그 모사물을 원본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에 중요한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 마지막에 터져나오던 애타는 울부짖음처럼 말이다. 그것이 복제물인지 원본인지를 가려내는 눈은 결국 자신의 안에 있다. 시뮬라크르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영화라는 환상을 더 이상 환상이 아니게 하는 것,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Use your illusion.

 

 

.

'ACF 쇼케이스 2013' 영화제에서 관람. 좋은 영화를 볼 기회를 주신 <씨네21>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1-15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6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3-01-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플갱어 소동 한마당이군요.

맥거핀 2013-01-16 14:33   좋아요 0 | URL
재미있네요. 이 세상에는 도플갱어가 사실 너무 많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