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 박찬욱, 2013

 

 

 

(<스토커>에 대한 전체적인 스포,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박쥐>,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부분적인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들을 보신 분이 읽으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토커. stalker. (그러나 이 영화 <스토커>의 영문 스펠링은 우리가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어떤 이미지와는 달리 'Stoker'이다.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으면 몇 가지의 뜻이 나온다. 명사로는 '남을 괴롭히는 사람', 혹은 '(슬그머니 접근하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익히 알려진 이런 의미 외에도 stalker라는 단어는 다른 것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명사로는 '(식물의) 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동사로는 '몰래 접근하다'는 뜻 외에도 '성큼성큼 걷다' 혹은 '활보하다', '만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영화 <스토커>는 이의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어떤 총체인 것처럼 보인다.

 

1. 괴롭히는 자 혹은 사냥꾼

 

이미 많은 리뷰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먼저 이 영화를 흔히 말하는 '스토킹'으로 생각한다면 그 스토킹은 삼촌 찰리(매튜 구드)에 의해 행해지는 조카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를 향한 행위이다. 그것은 영화 초반부터 여러 결로 반복하여 이루어지는데, 인디아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깜빡이지 않는 시선으로, 혹은 그녀의 뒤를 밟고, 그녀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방식으로,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같은 모양의 구두를 보내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을 예를 들어 인디아의 신체에 달라붙은 거미의 모습으로 보여진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영화의 초반부 인디아의 발목 근처에서 맴돌던 포식자 거미는 점점 그녀의 신체의 은밀한 부위로 조금씩 그 발걸음을 옮긴다. 물론 거미는 모두가 알다시피 기다림의 아이콘이다. 아주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그물을 펼쳐놓고 목표한 무엇인가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거미는 사실 박찬욱 영화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캐릭터다. (앞으로도 종종 이야기할테지만) 박찬욱의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스토커>에서 우리는 수많은 전작의 그림자들,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의 무늬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영화 <스토커>는 그런 박찬욱의 격자무늬들이 촘촘이 수놓아진 영화이고, 오랫동안 특정의 목적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박찬욱의 인물들이 그 영화에는 있었다. 예를 들어 <올드보이>의 무엇인가를 위해 15년간이나 기다린 우진(유지태), 혹은 오랫동안 기꺼이 음식에 락스를 몰래 탔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이영애), 아니면 축축하고 어두운 방에서 핏기하나 없는 얼굴로 죽어가고 있었던 <박쥐>의 태주(김옥빈). 그리고 그 인물은 이 영화 <스토커>에서 삼촌 찰리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삼촌 찰리가 이 집으로 하필이면 인디아의 생일날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되고, 그동안에 그가 그토록 같은 모양의 끈달린 구두를 보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물론 한편으로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박찬욱의 전작 <올드보이>의 그림자를 다시 한번 발견할 수도 있다. 오대수(최민식)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이유가 있으니까.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오대수가 <올드보이>에서 사태를 정확하게 추론하는데 실패한 이유는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오대수가 아니, 우리가 계속 신경써야만 했었던 것은 그 빌어먹을 '이유'가 아니라, '15'이라는 사실이었으며, 그것은 한편으로 어쩌면 이 <스토커>에서도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있을 때 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일단 그 구두에 주목하자. 구두? 그 구두 역시 사실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박쥐>에서 신부 상현(송강호)은 맨발로 거리를 헤매던 태주에게 구두를 신겨주었다. 그리고 그 구두는 <박쥐>에서 태주의 욕망을 깨우는 트리거였다. 그 구두를 신었을 때, 비로소 태주는 그 어둡고 축축한 공간만이 세상을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구두는 결국 그녀를 이상한 욕망의 롤러코스터로 이끌었고, 그 욕망의 롤러코스터는 그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상현에 의해 제어되는데, <박쥐>의 마지막에서 바스러지는 발끝에서 툭 떨어지던 그 한 켤레의 구두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영화 <스토커>에는 중간에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는데, 인디아는 그 가득 놓여진 구두를 이제 벗고, 하이힐로 갈아신는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스토커>는 구두로 시작해서 구두로 끝났던 그 전작을 넘어서, 하이힐로 갈아신는 진화된 캐릭터를 보여준다. 즉 그녀는 제어되지 않고, 다른 다음의 단계로 넘어갔고, 그것을 '사냥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담을 한 마디 붙여두자면, <스토커>에서 그녀의 공격방식을 떠올려보라. 날카로운 물건으로 푹 찌르는 것. , 하이힐을 신은 당신이 적을 만났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인디아의 아버지는 어린 인디아에게 사냥을 가르치면서 말한다. 나쁜 짓을 하게 되어야, 더 나쁜 짓을 안하게 된다고. 물론 이 말을 듣고 일차적으로 관객이 떠올리게 되는 사람은 그녀의 삼촌 찰리지만,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박찬욱의 전작의 캐릭터가 하나 있었다. <박쥐>의 신부 상현은 영화 속에서 한가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것은 그가 신부이면서도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그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의 피를 먹고, 자살하려는 사람의 피를 먹고, 심지어는 인터넷으로 사람을 모집한다는 등의 별별 생각을 하지만, 끝내 이 딜레마를 넘어설 수 없었고, 옆에서 폭주하는 태주를 더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끝내 결단을 내렸고, 그 결단이란 마지막 차의 보닛 위에서 태주를 꽉 껴안은 그의 손이었다. 즉 그에게도 역시 나쁜 짓과 더 나쁜 짓이 있었고,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의 피를 먹거나, 자살하려는 사람의 피를 먹는 것은 더 나쁜 짓을 하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나쁜 짓이었다. 물론 그런 상현이 대단한 것은 그가 나쁜 짓으로 더 나쁜 짓을 멈추려던 그녀의 아버지와 달리(한편으로 그녀의 아버지 역시도 이 집안의 한 사람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쁜 짓마저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인디아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물론 그는 구두로 끝난 캐릭터가 아니라, 구두에서 하이힐로 진화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분명히 상현 같지는 않을 것이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의 삼촌 찰리와 같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성일의 말대로 본편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

 

 

2. 성큼성큼 걷는 혹은 활보하는

 

이 영화의 영화적인 가장 큰 특징은 박찬욱 본인과 많은 리뷰들에서 말한 것처럼 교차편집(네이버 주: 교차편집은 서로 대조적인 독립된 장면을 엇갈리게 보여주는 편집 기술을 가리킨다. 글자 그대로 말해, 동시에 혹은 다른 시간대에 발생하고 있는 서로 다른 행위들 사이의 커팅)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하나의 기교로서가 아니라 영화의 특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이 영화는 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셀 수도 없는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교차편집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장면들 사이의 긴장과 서스펜스, 혹은 묘한 조응을 넘어서 대체로 제3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상상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그것은 영화 속에서 인디아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림을 빠르게 넘겨보는 것과 비슷하다(혹은 영화 속에서 이야기된 자신이 절대 찍을 수 없는 각도에서 찍힌 자신의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림이 겹쳐서 아주 빠르게 번갈아 보여지는 순간 그것은 다른 제3의 무엇인가가 된다(원이 그려진 그림과 역삼각형이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을 아주 빠르게 번갈아 본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역삼각형 위에 원이 있는 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 속 장면을 예로 들어 보자면, 인디아가 엄마의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에서 엄마의 머리가 갈대밭으로 바뀌며 사냥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부분을 말할 수 있는데, 이 장면에서 머리를 빗겨준다는 장면이 사냥하는 장면과 겹치면서 그것은 단지 머리를 빗기고, 사냥하는 것을 넘어서, 서스펜스와 긴장을 낳는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을 관객에게 묻게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어느 것이 나쁜 짓이고, 어느 것이 더 나쁜 짓인가,와 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 질문은 옳은 질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오해한 질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교차편집은 너무 남용되면 관객이 이야기의 전체 구도를 잘 이해할 수 없도록 하거나, 혹은 관객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 수 있는데, 박찬욱이 좋은 감독인 것은 이와 함께 신의 길이와 카메라의 움직임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혹은 몇 번의 재미있는 트릭을 씀으로서 관객의 이해를 돕고, 피로를 중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찰리와 인디아의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만)이 몰래 밤에 처음 밀회를 가지는 장면을 보면 이런 훌륭한 움직임을 잘 볼 수 있는데, 인디아가 문 옆에서 몰래 엿듣다가 밖으로 나가서 창밖에서 몰래 지켜보게 되는 이 장면을 숏의 커팅으로 구성하지 않고, 롱테이크로 가져가면서 카메라를 움직이는 방법을 씀으로써 관객을 새롭게 즐겁게 함과 동시에, 긴장감을 적절하게 구축한다. 또한 반대로 영화의 후반부 이블린과 찰리가 맞서는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캐릭터가 폭발하여 움직이는 이 결정적인 장면을 이번에는 반대로 두 개의 문을 고정하여 놓고 촬영하면서 양 문을 한번씩 여닫는 것으로 각각의 캐릭터만 보여지게 함으로써 그들을 한 번씩 번갈아 주목하게 하면서(아마 연극이라면 양 캐릭터에 한번씩 헤드라이트를 주는 방식을 택했을 것 같다) 동시에 관객을 인디아의 입장에서 번갈아 상상하도록 한다. 즉 이런 간단한 트릭을 통해, 관객은 이 삼각형 구도에서 인디아와 찰리의 관계, 혹은 인디아와 이블린의 관계, 혹은 찰리와 이블린의 관계를 각각의 다른 범주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 스토커라는 가문 혹은 줄기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지금까지 한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스토커란 stalker가 아닌 영어 철자로는 대문자 S를 가진 Stoker이며, 그것은 영화의 시작부 이 가문의 이름으로 설명이 된다는 점. 즉 인디아는 인디아 스토커이며, 찰리는 찰리 스토커이다. 즉 이들은 Stoker라는 거대한 줄기에서 나온 각각의 열매들이고, 그 속에는 비슷한 피가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스토커>는 이 Stoker 가문의 어떤 잔혹한 피의 속성에 대한 일종의 인트로이다. 영화의 마지막부, 인디아는 그 가문을 상징하듯 아버지의 벨트와 어머니의 옷과 이제 그 자신만의 하이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Stoker라는 성을 가지는 유명한 이가 한 사람 더 있다. 1847년 태어나 1897년에 <드라큘라>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해진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이다. 그리고 물론 박찬욱은 이 저주받은 가문의 이름을 그 작가에게서 가지고 왔다.

 

사실 그러므로 <스토커>는 또 하나의 뱀파이어 영화이며, <박쥐>의 후속편이다. (다시 여담, 아까 전에 그녀가 공격하는 방식, 그러니까 푹 찌르는 그 방식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그 부위에 주목하자. 그녀는 마지막 어디를 쏘고 어디를 찌르는가.) 그것은 영화의 설정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는 찰리나 인디아의 모습이나, 두 캐릭터가 모두 비슷하게 공유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는 점은 명백한 뱀파이어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한편으로 자신의 힘을 활용할 줄 모르는(혼자 외롭게 자신만의 내면에서 침잠하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뱀파이어가 다른 뱀파이어에 의해 자신의 힘을 각성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그러므로 이 마지막은 사실 조금은 상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뱀파이어 서사에서 한 뱀파이어를 각성하게 해준 다른 뱀파이어는 이제 주인공 뱀파이어에게는 더 이상 그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피를 놓고 경쟁하여야 한다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그 존재의 무분별한 활동은 자신의 존재를 쉽게 드러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스토커>에서도 찰리는 그렇게 현명한 뱀파이어는 못되었고(그러므로 그는 오랜시간 그가 원하는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인디아라면 보다 다른 방식으로 사냥을 실시했을 것이다.

 

 

4. 오인(誤認) 혹은 오해

 

어쩌면 그것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스토커가 Stoker인가, stalker인가, 혹은 괴롭히는 자인가, 사냥꾼인가, 스토커 가문인가, 혹은 뱀파이어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Stoker가 아니라 stalker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 즉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오해' 혹은 '오인'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혹은 우리가 했었어야 하는 질문. 그 이유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하필이면 왜 그런 긴 시간이어야 했나,라는 것.

 

오인은 박찬욱의 영화에서 그렇게 낯선 키워드는 아니다.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꽤나 흔치 않게 그런 오해들, 오인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런 오인들은 때로는 그 캐릭터들을, 때로는 그 관객들을 이상한 아이러니나 혹은 (심리적인) 파멸로 이끌고 갔다. 그것은 때로는 한 씬에서 나타나고, 전체 영화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기억나는 몇 가지의 씬들이 있다. 예를 들어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한 장면. 청각 장애인 류의 누나가 극심한 병의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를 몰래 벽에 붙어서 듣고 있는 옆 방의 남자들은 자위 행위를 한다. 음성 정보의 오인. 아니면 다음의 장면, 허문영이 말한 <박쥐>에서의 오인. <박쥐>에서 태주를 죽인 상현은 라여사(김해숙)의 눈빛을 본 후 그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린다. 시각 정보의 오인. 이러한 오해 혹은 오인은 박찬욱의 영화들에서는 씬에서만이 아니라 전체 영화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위에서 말한 <올드보이>의 오인 같은 것도 그렇고,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경우에서도 동진(송강호)은 류의 여자친구의 말을 단지 허세 혹은 거짓으로 들음으로써 파멸적인 최후를 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시 반복하자면 이미 영화들은 끝났고, 오해는 모두 영화에서 단지 오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실물로,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에서라면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으로 혹은 <올드보이>에서라면 모든 것이 담긴 보라색 상자로 되돌아온다. 즉 여기에서 오해하거나 오인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오해인가, 오인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오인이 단지 우연이었는가, 혹은 의도된 오인인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이다.

 

<스토커>도 역시 몇 가지의 오인 혹은 오해의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이 저질러진 후 인디아가 샤워를 하는 씬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녀의 어떤 넋이 나간 표정과 이상한 움직임을 보면서 인디아가 어떤 죄책감을 가지거나, 혹은 후회하고 있거나, 혹은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은 살인의 쾌감에 정신을 못차리는 중이다. 중간에 진 할머니가 살해되는 장면도 일종의 오인의 구성인데, 우리는 교차편집과 맞물려 여기에서 이번에는 범인을 오해한다. (이 오인에 교차편집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다. 즉 이 영화에서의 교차편집은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제3의 다른 의미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것을 보는 우리를 오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아니면 (박찬욱의 표현을 빌리자면) 앞과 뒤가 같은 북엔드처럼 동일한 장면이 앞과 뒤에 위치한 서두와 마지막을 보자.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장면을 볼 때는 영화가 시작할 때 보았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가지게 된다. 즉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의 그 장면은 우리의 단순한 오인이거나, 혹은 매우 정교하게 의도된 오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단순한 오인, 혹은 정교하게 의도된 오인은 몇 가지 씬에서만이 아니라 영화의 전체 플롯에서도 드러나는데, 우리는 처음에 이 영화의 어떤 주플롯을 오인한다. 즉 우리는 이것을 어머니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는, 혹은 아버지의 대체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 소녀의 서사와 묘하게 비슷한 것으로 오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까지 우리에게 어떤 무엇인가를 묻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것은 자, 그렇다면 이제 인디아는 누구를 사냥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전작과 다른 점은 이 오해가 실물로서 되돌아왔던 전작과 달리 <스토커>에서 이 오해는 아직 어떠한 것으로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해가 어떤 무엇으로 되돌아왔던 전작들, 그러니까 사건이 돌고돌아 자신에게 돌아왔던, 그래서 그 사건을 스스로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스토커>의 사건은 이제 시작이다. <스토커>의 마지막은 닫힌 파멸만이 있었던 전작들과 달리 이제 넓고 먼 세상으로 나서는 소녀에서 여인이 된 캐릭터의 시작이다. 그 오해가 무엇으로 되돌아올지는 이제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상당히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박찬욱 캐릭터의 다음 진화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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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3-03-1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디아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지 않아요.ㅋ
영화 언어적으로는 깊은 맛의 와인같은 영화지만 저는 캐릭터에 대한 깊이는 느끼지 못하겠더라구요.

맥거핀 2013-03-13 16:30   좋아요 0 | URL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박찬욱의 인물들이 복수 3부작이 시작되면서부터 의도적이랄까 일부러 좀 붕 뜨는 듯한 경향이 있죠. 일종의 만화적인 캐릭터랄까(그러니까 말 그대로 '캐릭터성'이 심하게 강화된).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캐릭터는 사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로 좀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캐릭터의 그 빈 부분을 어떤 상징이나 미장센 같은 걸로 채워넣는 게 박찬욱의 화법이었는데, 그게 사실 이번 영화에서 지나치다는 지적이 많죠. (넙치님도 글에서 지적하셨지만요.) 그래서 박찬욱의 영화는 늘 수많은 분석가, 혹은 상징지상주의자들의 난도질의 현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은 그런 '낚임'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박찬욱 감독이 워낙 훌륭한 강태공인지라, 여지없이 걸려들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3-13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보이 때는 그 혀와 말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게 좋았고 멋졌는데 어쩐지 이 영화를 의무감으로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썩 끌리지가 않은 게 말씀하신 내용들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좀 일러서 박쥐도 안 봤;; 박쥐가 개봉할 때는 제가 영화 자체를 멀리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나저나 니콜 키드먼이 줄리아 로버츠 보다 더 좋아요!! 미아보다 더 예뻐요!! (근데 맥거핀님은 줄리아 로버츠 싫어하잖아요, 좀 좋아해봐요ㅋㅋㅋ)

맥거핀 2013-03-14 21:30   좋아요 0 | URL
음..조금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뭐랄까, 요즘의 영화를 둘러싼 말들이 넘쳐나고 있기는 한데, 정작 영화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말들은 많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 말은 넘쳐나는데, 생각은 줄어드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듯 해요.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무비위크> 폐간이라는 또하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보니..) 혀와 말이라...

니콜 키드먼은 진짜 그 눈을 보면 좀 무서워요. 아쁘기는 참 이쁘다..라는 생각을 하기는 합니다만. 근데 여전히 줄리아 로버츠는 정이 안가요.ㅋ 내가 왠만하면 여배우들 좋아하는데..


Shining 2013-03-18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매끄러운 글이 있으니 저 같은 사람은 기죽어서 못 쓰는 겁니다! 전 스토커, 만으로 단상만 쓰기 잘했네요ㅎㅎ <스토커>, 이상하게 저는 마음에 들더라구요. 쫀쫀한 미장센도 유려한 컷의 진행도 멋지고. 고전영화 같은 아우라 자체가 묘하게 맘에 들었어요_-b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나날이 관심이 가네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때만 해도 쏘쏘였는데(이건 영화가 워낙 별로인 탓...) <레스트리스>도 그렇고 이번엔 무려 <보바리 부인>이라니! 고전적인 느낌이 강한 얼굴이에요, 소녀적이면서도 중성적인 느낌도 들고. 신기하게도 배두나씨 얼굴이 떠오르는 표정이나 장면들이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맥거핀 2013-03-18 17:17   좋아요 0 | URL
엄살은 안 통합니다요.ㅋ 저는 저 배우 '제인 에어'에서 처음 봤었는데요. (그러고보니 고전 전문 배우인가 봅니다.) 그 때도 뭔가 묘한 느낌이 있었고, 이번 영화에서도 어떤 상반되는 이미지를 잘 버무려서 표현해냈다고 봅니다. 확실히 마지막 씬에서 인상적이었어요. 음..생각해보니 배두나와도 뭔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머지 얘기는 Shining님 서재에 가서..
 

 

 

 

 

 

 

 

 

 

 

라스트 스탠드, 김지운, 2013

 

 

 

보안관이 할 일이라고는 길 잃은 고양이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이 다인 국경 근처에 위치한 조용한 시골 마을 섬머튼. 그 곳으로 슈퍼카를 타고 국경을 넘어 탈주하려는 마약왕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온다. 그러나 이 조용한 시골마을에 이들과 대적할 사람들이라곤, 은퇴한 후 조용한 시골마을이 좋아 일부러 이곳을 선택한 이제 다 늙어빠진 보안관과 총조차 제대로 못쏘는 것처럼 보이는 몇 안되는 그의 부하들과 각종 무기를 모으는 것이 취미이나 그 무기를 다룰 수나 있는지 의심스러워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괴짜와 한때 촉망받았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사고를 치고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청년 뿐. 이들이 이에 맞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이쯤되는 이야기라면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이나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많은 서부극, 혹은 현대의 변형된 서부극들에서 익숙한 구도이고, 익숙한 스토리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줄거리가 익숙한 사람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몇몇 숨겨진 사실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사실은 이 늙어빠진 보안관이 사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 마약왕을 뒤쫓기 위해 애쓰는 FBI가 사실은 별로 이 영화에서 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 혹은 이 마약왕이 이 국경 근처의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어떠한 운명을 맞게 된다는 것 쯤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여기에는 소위 B급 무비, 혹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무비 같은 것의 익숙한 클리셰들이 있다. 여기에는 먼저 실패한 자들, 루저들이 벌이는 축제라는 요소가 있다. 즉 예전의 전투에서 부하들을 잃고 낙향한 나이든 보안관과 어떻게든 이 시골마을을 벗어나려 애쓰는, 그러나 그 능력으로 봐서는 이곳을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신참과 좋은 재주를 가졌으나 술과 범죄에 빠져 사랑하는 여자마저 잃어버린 남자와 사회부적응자 밀덕 같은 시골마을의 패잔병들이 모여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동시에 그것들은 감각적이고 말초적이다. 즉 근육이 터질듯한 남성들과 매력적인 여성들, 혹은 강인한 여전사 등을 보여줌과 동시에 기꺼이 그 매혹적인 육체들을 파괴시킴으로써 이같은 목적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에서 사실 개연성을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이 영화 <라스트 스탠드>에서 나이든 보안관은 그렇다 치고, 변변한 경험이 없어 보이는, 시작부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허둥대던 보안관의 부하들이 갑자기 왜 총격전은 그렇게 잘 할 수 있는지, 혹은 그 빗발치는 총알들이 왜 그 보안관과 그의 부하들을 그렇게 잘 비껴나가는지, 왜 뜬금없이 시골마을에 그렇게 또다른 슈퍼카가 떡하니 등장하는지 등등의 질문을 캐묻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질문이 못된다. 그것은 일종의 장르적 전통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뱀파이어 무비에서 뱀파이어가 박쥐로 변할 때 아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박쥐로 변해요,라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도리어 중요한 문제는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라면 더 중요한 것은 그 총기에 장탄이 몇 발이 되는지, 실제 그 슈퍼카가 그런 방식의 이동액션이 가능한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동시에 카덕과 밀덕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즐거워할 부류 중의 하나를 꼽는다면 그런 카덕과 밀덕들이 아닐까 싶은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실제성이 아니라, 무기 혹은 슈퍼카의 실제성이다. 개인적으로도 얼마전 개봉한 영화 <베를린>에 대한 리뷰들 중에서 그 무기와 관련된 문제의 개연성을 지적하는 글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예를 들어 그런 관점에서라면 그 무기들이 과연 요원들이 사용할 만한 무기들인지, 그리고 장탄수를 정확하게 지키고 있는지(화면에 총탄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 갯수를 꼼꼼이 세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것을 감독 김지운은 의식하고 있는지 그것을 노련하게 이용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중간중간 총알이 떨어지거나, 새로 장탄을 하는 장면들이 몇번 의식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본인이 아마도 밀덕이거나 카덕일 듯한 김지운은 물론 이에 대한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개조'라는 무기이다. 즉 그 슈퍼카가 그런 속력을 내거나, 특이한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혹은 그 무기의 장탄수를 지키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해도, 뭐 한 마디면 끝난다. "개조되었으니까."

 

물론 김지운이 노련함을 보여주는 것은 그런 부분에서만은 아니다. 서부극과 B급무비의 결합이라는 틀 안에서 그 장르적 규칙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서 별로 야심을 보여주지 않는 것 같은 김지운은 이야기의 뼈대를 단순하게 구성하면서도 그 안에서 능수능란한 리듬을 보여줌으로써 도리어 그의 야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야기의 전체 구도는 아주 전통적인 구성을 따른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고, 전초전 격인 처음의 대결에서 아군은 상처를 입지만, 그것은 도리어 아군의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더욱 규모가 커진 중간부의 대결에서 아군은 승리를 거두지만, 적의 보스를 놓치는데, 이는 적의 보스와 우리의 영웅 간의 일대일 대결을 위한 익숙한 장치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을에는 평화가 되돌아온다는 식의 이런 단계적 구성의 뼈대는 익숙하지만, 그 안에서 액션과 그 액션의 휴지기에서 액션을 준비하는 과정의 감정과 유머들을 적절히 뒤섞음으로써 영화는 단지 정해진 액션으로만 질주하는 영화 이상의 것이 된다. 또한 김지운은 단지 이야기의 구성에서뿐만이 아니라 액션의 구성에서도 이런 리듬을 적절히 구사하는데, 예를 들어 마을의 도로에서 이루어지는 총격전이 느슨해질 즈음에 그것을 좁은 계단에서의 총격전으로 바꾸고 다시 긴장감을 부여하는 장면 등에서 그가 상당히 세심한 구성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 영화 <라스트 스탠드>가 별로 김지운의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확실히 이 영화에는 예전 김지운의 영화들에서 보여줬던 이상한 서걱거림들, 혹은 잉여처럼 보였던 이상한 이질감, 이물감들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는 그 어떤 불안감이 없다. 심지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조차 있었던 어떤 부조화, 그러니까 이런 것이 왜 여기에, 하는 그 묘한 불안감은 이 영화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이 영화에서 김지운은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선을 그어 놓고, 그 잘할 수 있는 것을 확실히 잘 살려서 보여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터득한 체이싱의 노하우 같은 것이다(물론 말 체이싱과 카 체이싱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리고 여기에는 여전히 김지운 식의 검은 유머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와 살이 터지는 순간들, 혹은 아주 심각한 장면들에서도 싱긋 웃을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을 넣음으로써 영화에 적절한 이완과 활력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서라면 영화 속 괴짜가 총격전 중에서도 사람이름을 붙인 자신의 총기를 애지중지하는 장면이라든가 혹은 <달콤한 인생>에서의 총기 구매씬 같은 것.) 아니 어떻게 보면 그 검은 유머가 거의 한 편의 영화 전체로 보여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보안관 레이로 나오는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한 때 인류의 명운을 걸고 싸웠던 그(<터미네이터>)가 이제 늙고 힘이 빠진 상태에서 한 시골마을에서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무기들을 휘두르며 루저들과 어울려 잘나가는 마약왕과 맞선다는 이 이야기 자체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개인적인 추문과 미국의 총기난사에 대한 불편한 시선 속에서 영화는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이 정도라면 김지운의 할리우드에서의 시작은 꽤 괜찮다고 본다. 물론 그것은 영화가 꽤 괜찮기 때문이다. 스필버그의 초기작 <듀얼>은 별다른 야심 없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갔지만 그 영화에서 우리는 그의 스타일을 봄으로써 대가의 시작을 느껴볼 수 있을 뿐더러, 그럼으로써 그 자체로도 오락영화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 되었다. 이 김지운의 <라스트 스탠드>는 마치 그것을 연상시키는데, 그의 스타일도 약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잘 드러냄으로써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물론 이 자체가 오락영화로도 일정 수준에 올라있다. 자신의 장기를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는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은 즐겁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아직 보여줄 것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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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3-07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생각에) 아직까지는 올해의 과소 평가 영화. 참고로 올해의 (아직까지의) 과대 평가는 '라이프 오브 파이'?

Arch 2013-03-0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커가 남았네요 ^^
저는 신세계 리뷰를 보고 나도 보면 댓글을 달아야겠다 맘 먹었는데 아직도 못봤어요. 영화를 보는데도 품이 많이 든다는걸 새삼 느껴요. 카덕, 밀덕에서 한참 생각했어요. 밀덕은 밀거래에요? 밀수입?

Mephistopheles 2013-03-08 09:41   좋아요 0 | URL
밀리터리 매니아랍니다.(군용물품-무기,군복,기타등등-에 환장하는 사람들)

맥거핀 2013-03-08 14:07   좋아요 0 | URL
밑에 Mephistopheles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밀리터리+오덕후=밀덕'입니다(뭐 사실 그다지 좋은 말 같지는 않지만요. 아..근데 농담하신 것 아닌가..?). 제 가까운 사람 중에도 밀덕이 하나 있는데, 이 세계도 참 넓고 넓어요. 카덕(자동차 덕후)도 그렇구요.

영화를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죠.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스스로가 대하는가의 문제겠습니다만...그곳까지 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뭔가를 집중해서 두 시간 동안 본다는 것도 결코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죠.

Mephistopheles 2013-03-0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운 감독에게나 오랫동안 현역에서 떠나 있었던 아놀드 아저씨나 "첫 술에 배부르겠느냐"가 그대로 도드라진 영화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맥거핀 2013-03-08 14:10   좋아요 0 | URL
근데, 저는 이 영화 아무튼 무척 좋았어요. 영화관에 앉아있는 것이 즐거운 느낌. 아직까지는 올해의 베스트에 넣고 싶을 정도..저는 그래도 아무튼 김지운이 할리우드에서 가장 대박을 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는요.

아이리시스 2013-03-13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뭐 물어봐도 돼요? 맥거핀님은 [하이 눈]이나 [리오 브라보] 같은 오래된 영화들 어디서 어떻게 왜 누구하고 언제 보신 거예요? (리뷰에 이런 질문이나 쓰고..라고 미워해도 어쩔 수 없음..) 저렇게 오래된 영화는 동아리나 동호회에나 들어야..아니..영화전공자라도 보기 힘들 것 같아서요. 정말정말 영화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심심했어요, 그것도 아니면 으흙....... 뭔가 있겠죠. 있을 거야..그럴 거야..

아놀드 아저씨 현장토크쇼 택시에 나오는 거 보고 완전 놀랐어요 :)

맥거핀 2013-03-14 21:37   좋아요 0 | URL
<리오 브라보>는 예전에 아트시네마에서 친구들 영화제 했을 때 봤고, <하이 눈>은 집에서 DVD로 봤습니다. 두 영화 모두 그래도 꽤나 알려진 편이라, DVD도 꽤 있고요, 아마 잘 찾아보시면 파일도 있을..(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하이 눈> 같은 경우에는 알라딘에서 무려 특가로 2,900원에 팔고 있네요. 그것도 존 포드의 걸작 <수색자>하고 묶어서 말입니다. 근데 가격으로 봐서는 아마도 뭔가 출처가 의심스러운 DVD인듯..)

아놀드 씨가 거기도 나왔어요? 그래도 워쇼스키 남매나 성룡은 무릎팍이라도 나왔는데, 급 떨어지게 그런 데에...B급 영화 필을 지향한다고 일부러 그렇게 마케팅하나?

아이리시스 2013-03-16 01:22   좋아요 0 | URL
아..수도권에서는 자주 그런 영화제를 하는 걸 알긴 한데, 지금 당장 극장에 떡 걸려 있어도 보러가기가 쉽지 않은 목록 같아서요. 고전을 오락영화로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고, 저만해도(저 정도로도) 제 친구들은 제가 예술영화 좋아한다 그러는데.. 예술영화'만' 좋아한다던가.. 저는 차라리 예술영화를 보려고 노력하는 편에 속하는데요. 어차피 상대적이니까요. 그래서 맥거핀님은 언제 저런 영화들을 척척 다 보신걸까 궁금해서요. 2900원짜리는 전부 안좋은 거예요? 저는 딱 한 장 사봤어요. 2900원짜리는.. <하이 눈>은 옛날에 '온 에어'인가 거기서 김하늘이 그레이스 켈리처럼 되고 싶다고 하는데서 나왔는데, 그렇다고 해도 저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 하물며 티브이에서 해도 잘 안봐지던데요.. 저는 그런 뜻에서 맥거핀님이 대단해보여서요.

아놀드 아저씨는 미국에는 이런 프로 없다고 하면서 되게 좋아했어요. 제가 택시를 본 건 아니지만....( '') 무릎팍에서 워쇼스키 남매랑 초난강이 나오는 것만 보고 성룡이 나오는 건 못봤거든요. 성룡이 바쁜 권상우 대신 혼자 기자회견인가 하는 게 애처롭고 대단해보였어요. 요즘은 왜 다들 대단해보이지....

맥거핀 2013-03-17 23:58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그렇죠. 사실 좀 이상한 구분이기는 하죠. 예술영화하고 오락영화를 나누는 것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전영화라고 하면, 특히 흑백의 고전영화라고 하면 뭔가 예술적인 영화로만 생각하지만, 사실 그 영화들도 대부분 그 당시에는 흥행을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들이죠. <하이 눈>이나 <리오 브라보> 같은 영화들도 그렇고 (사실 이 영화를 실제로 보면 아실텐데), 당대의 스타들이 나오는, 유머도 많고, 재미있는 영화죠. 고전영화들도 어떤 편견을 지우고 보면 말그대로 재미있는 영화들이 많습니다(예술같은 거 집어치우고서도 말이죠). 물론 고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영화이고, 그 '살아남았다'의 의미는 그만큼 예술성이 있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그런 거 생각하지 않고 보면요.^^

그냥 저는 처음에는 이게 좋은 영화니까 봐야한다 뭐 그런거 보다도, 재미를 기준으로 해서 그냥 보는 게 좋다고 봐요. 아무리 고전이라고 자기가 재미없고 못 보겠으면 그만이죠, 뭐. 그렇게 한편 두편 말그대로 재밌어서 고전에 맛들이다 보면 어느틈에 다른 영화들도 찾아서 보게되는 거구요.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저도 고전영화들 많이 못봐요. 늘 찾아서 좀 봐야되는데..생각하지만, 지금 개봉한 영화들도 잘 못보는 통이니까요. (좀 다른 얘기지만, 저는 동시대의 영화들은 폄하하며 너무 고전에만 열을 올리는 것도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아요. 동시대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동시대인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공기가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현재의 한국영화를 보면서 현재의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그리고 2900원짜리가 전부 안좋다는 건 아니지만, 여기 알라딘도 그렇고, 현재 이상한 경로로 유통되는 저가DVD들이 꽤 많다고 알고 있고, 그 중의 상당수는 영화의 내용이 변형되거나, 혹은 포맷이 다르거나 등등의 문제도 있고, 저작권의 문제도 있고, 디스크 자체의 물리적인 질이 안좋은 경우도 있고, 아무튼 여러 문제가 많다고 알고 있어요. 물론 그것은 그것을 구매하는 사람의 문제라기 보다는, DVD, 블루레이 시장이 상당부분 망가져버린 탓이기도 합니다만...(그런 DVD를 보시느니, 차라리 외국에서 정식출시된 블루레이나 DVD의 릴된 파일로 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적어도 그게 화질면에서는 더 낫지요.)

암튼 아놀드 씨는 안습...적어도 초난강보다는 훨씬 급이 높다고 보는데...
 

 

 

    

 

 

 

 

 

 

 

 

신세계, 박훈정, 2013 

    

 

(글에 영화의 결말에 대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특히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들을 즐겨 보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몇 가지의 참조 목록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위강, 맥조휘의 <무간도> 시리즈,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 코폴라의 <대부>, 두기봉의 <흑사회>,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누아르 영화들.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그런 수많은 영화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으며, 그 몇몇의 설정들과 이야기의 전개 구도, 그리고 씬의 구성에서까지 그 입김들을 드러내 보인다. (<씨네21> 893호 박훈정 인터뷰 "그런 영화들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장르영화라면 어차피 그 장르의 이야기틀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틀 안에서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 영화가 말 그대로 '신세계'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즉 그 영화들과 이 <신세계>가 얼마나 비슷한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가 아니라, 얼마나 그 세계를 잘 그려내고 있는지, 그 신세계가 얼마나 잘 짜여진 세계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아직까지는 영화감독으로서가 아니라,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더 알려진 박훈정 감독은 이 영화 <신세계>에서 예의 그 장기를 잘 펼쳐보인다. 시나리오로서 이 영화가 가지는 몇 가지 강점들이 있다. 먼저 하나는 <부당거래> 등에서도 잘 보여줬듯이 여러 겹의 꼬인 이야기를 상당히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부당거래><신세계>에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은 여러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통상 이런 이야기에서는 둘 중의 하나, 즉 캐릭터나 이야기 중의 하나는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두 영화에서 모두 개별의 캐릭터는 살아 있고, 인물들의 구조화된 관계는 특징적인 씬과 몇 가지 장치들에 의해 훌륭하게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예를 들어 정청(황정민)이 처음 등장하는 씬을 보면, 정청과 이자성(이정재)이라는 캐릭터와 이 두 사람의 역학관계를 동시에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좋은 점은 관객에게 미리 공개를 해야할 패와 숨겨놓아야 할 패를 상당히 영리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서 관객이 이 전체 구도, '신세계' 작전의 전모를 깨닫게 되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가 한참 지나서이다. 시나리오를 하나의 건물이라고 생각해본다면, 관객은 그 건물 안에서 완전히 길을 잃지 않을 일정 정도의 지도를 확보해야 하지만, 건물안에 총 몇 개의 방이 있고, 몇 층 구조로 되어 있는지 알 필요는 없다. 그것마저 다 알게 된다면 관객은 그 건물에 대한 탐험을 중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감독이 이야기를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인다는 점이다. 할 이야기가 많은 영화들에서 때로 보이는 악수 중의 하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초반에 털어내려고 하는 방식이다. 즉 많은 배경과 많은 이야기들을 초반 30-40분 안에 쏟아 부은 후, 나머지 시간들은 그 이야기를 수습하는 데 소모하고, 관객은 그 소모전을 보느라 지쳐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건은 단계적으로 드러나고, 인물들의 숨겨진 역학 관계는 하나씩 차근차근 그 패를 드러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느긋함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박훈정 감독이 이 전체 이야기를 영화에서 보여준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미리 구조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말대로라면 이 <신세계>는 전체 이야기에서 중반부에 해당하며, 속편이 제작된다면 아마 이 앞이나 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즉 이 앞에는 이자성이 정청과 손을 잡고, 정청과 이자성이 이 정도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나름 파란만장한 이야기(그러니까 여기에 '왜 정청이 끝내 이자성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는가'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들어있을 것이다)가 있으며, 이 뒤에는 이자성이라는 새 수장을 맞은 골드문과 경찰의 반격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무간도> 시리즈의 진한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무간도> 시리즈 역시 1탄은 중간의 이야기였으며, 2탄은 그 이전, 3탄은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좋은 이야기를 했으니, 몇 가지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먼저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박훈정이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박훈정. 영화의 어떤 촬영스타일이나 편집으로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도 최근 한국영화들의 어떤 고질병 같은 것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것은 클로즈업의 남발과 필요 이상의 숏나누기인데, 이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상당히 많으며, 때로는 상당히 익스트림한 클로즈업까지 서슴치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액션 영화가 아니라 누아르 영화이고, 이런 누아르 영화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배우의 실제 액션이 아니라, 액션의 전과 후, 그 액션의 전조와 여운을 잡아내는 것이며, 따라서 상당한 클로즈업이 필요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의 클로즈업은 필요 이상이라는 인상을 주며, 화면 구도를 계속 답답하게 느끼게 한다. 모든 장면에 방점을 찍으려는 것은 어떠한 장면에도 방점을 찍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은 최근 영화들의 특유의 숏나누기와 결합되어 조금 더 관객을 몰아붙이는데, 이 영화도 역시 숏을 잘게 나눔으로써 영화의 리듬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어떤 최근의 착시 경향들에 보조를 맞추는 것 같다. 그러나 리듬이 일종의 강박적이고 기계적인 메트로놈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실제로 리듬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영화의 어떤 이상한 소실점. 영화의 시작부, '신세계' 작전에 대해 영화는 배우의 입을 통해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 시나리오가 좋군, 한 번 해봐.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 이 작전에 대해 이제 이야기할 수 있다. 시나리오는 좋았고, 작전은 거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마지막에 결국 이 작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최종적으로 보면 작전은 실패하였고, 그 작전은 실패를 넘어서 그 시나리오를 써내려간 작가, 그러니까 강과장(최민식)을 잡아먹었다. 그것은 어쩌면 시나리오가 너무 잘 짜여졌기 때문이 아닐까. 즉 강과장이나 고국장(주진모)은 그 시나리오의 완벽함에 스스로가 너무 도취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는 단지 '신세계'라는 작전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 자체에 대입해도 그렇게 틀려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거의 완벽하게 짜여져 있지만, 그 완벽한 시나리오가 어딘지 모르게 너무 잘 들어맞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야기가 너무 잘 맞아들어 갔을 때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묻는다. 이거 짜도 너무 짠 거 아냐? 다시 말해서, 이야기에는 하나의 딜레마가 있다. 즉 이야기는 '짠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 짠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 즉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성공하는 순간은 그것이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 순간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우리는 여기에서 '개연성'이라는 하나의 장벽을 만난다. 즉 이야기가 너무 잘 짜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인상을 주는 순간, 그것은 도리어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지 않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너무 잘 짜인 이야기는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도 예를 들어 몇 가지의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세부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보다 큰 부분에서도 그렇다. 보다 큰 부분에서의 질문이라면 이러한 것들일텐데, 이중구(박성웅)는 그 자신이 그것이 독배였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음에도 왜 그 독배를 기꺼이 마셨는가. 혹은, 정청은 왜 이자성의 정체를 끝내 밝히지 않았는가. 아니면, 강과장은 자신이 그토록 몰아치면, 이자성이 어떻게 나올지를 정말 몰랐을까. 강과장 정도의 캐릭터라면, 뭔가 어떤 대비책을 만들어 놓았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질문들. 즉 이 영화는 묘하게도 저건 영화네, 하는 인식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형사들이 몰아닥쳤을 때, 여자의 양수가 터지는 부분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 시나리오에 감독 자신이 너무 취한 결과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좋은 시나리오는 '신세계' 작전처럼 때로 감독 자신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많은 참조목록을 가지고 있는 이 영화 <신세계>는 아쉽게도 그 참조목록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양쪽의 일종의 아버지들을 등장시켜, 마치 거대한 두 세계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던 <무간도>를 넘지 못하고(<신세계>의 강과장과 이자성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기보다는, 사이 엄청 안좋은 직장선후배처럼 보일 뿐), 인간의 정체성, 악의 기원에 대한 탐구, 어떤 종교성에 대한 질문에서는 <이스턴 프라미스>에 미치지 못하고, <대부>의 묘한 숭고함과 절제미나 <흑사회>의 잔인한 비정함에는 꽤나 모자르다. 그러나 뭐 그렇게 실망할 것도 없다. 위에 든 영화들은 누아르의 대표격인 작품들이고, 거장의 작품들이 아닌가. 박훈정 감독은 이제 고작 이 영화로 두 번째 작품을 만들었을 뿐이고, 나는 영화는 찍으면 찍을수록 크게 나아질 수 있으나, 이야기를 직조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어떤 천부적인 능력이 중요하다고 믿는 편이고,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박훈정 감독의 능력은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세계>는 잔재주가 아닌, 이야기의 구조로서 승부하려는 스트레이트한 영화이고, 그 스트레이트한 주먹의 상당 부분은 아직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웃음기 없이 이만한 크기로 직선으로 밀어붙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는 적어도 최근에는 없었다. (감독 말대로 이 영화들이 같이 언급된 자체가 영광이 아닐까?) 감독의 다음 펀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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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2-2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독은 좋겠다, 맥거핀님 칭찬 막 받고 기대까지 받아..@.@ (이제 감독까지 질투함)

그랬구나. [부당거래]는 류승완 감독이 각본을 쓴 게 아니었구나. 뭔가 달랐어. 음, 두 감독이 함께 맞붙어서 비슷하게 가고 있다면 다행일까요. 배우들이 A급이니까 둘 다 평타 이상을 칠 것 같긴 했지만요. 예전에 페이퍼에 베를린 보러 가겠다고 썼을 때 감독이 류승완인 줄 몰랐어요. 네, 저는 대부분 모르고 가요. 언젠가는 그걸 다 꿰고 있을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냥 보는 걸로 벅차요. 일단 양을 넣자는 주의로 변함. 저는 말이죠, 통틀어 류승완 감독 영화가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더 어릴 때는 내가 남자들이 좋아하는 세계를 겉핥기로도 이해를 못하는건가 싶기도 했는데 이제와서 보면 모두의 공감을 자아낼 티끌만큼의 무언가가 류승완에게 늘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냥 내 취향으로 퉁치면 좋겠지만 적어도 항상 오르막에서 확 오르지 못하고 주저앉고마니까 기대치가 높은데 그걸 충족시키지 못하는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무간도]는 함부로 따라하면 안되는 건데, (저 완전 팬이에요ㅠㅠ) 따라하고도 욕 안 먹고 칭찬 받으니까 이 감독의 펀치는 저도 기대돼요. 역시 찍는 것보다는 이야기가 먼저여야 해요. 꼬인 거 보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게 티가 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액션+느와르 리뷰는 어느 경지의 리뷰입니까? 저는 드라마말고는 영화리뷰 거의 다 패스하고 지나가는 게 안쓰는 건 줄 알았는데 못 쓰는 거였어요. 리뷰가 아니라 초딩 감상문 같아서요(눈물난다..)..

2013-02-28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3-03-01 13:14   좋아요 0 | URL
저는 류승완 감독 영화는 나름 좋아하기는 하는데, 뭐랄까 영화들에 매니악한 부분이 있어서, 보다보면 조금 약간 몰입이 안되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죠. 글쎄..아마도 본인이 막 그런 걸 넣고 싶은가봐요. 남들 보기에는 아..이거 아닌데, 싶어도 이 장면은 그래도 넣어야돼 뭐 그런거요. 그런데 사실 보면 그런게 더 매력적이기는 해요. 매끄러운 무엇인가가 있지만, 감독의 특유의 냄새랄까 그런 게 없는 영화들이 요새 많은데(저는 감독의 능력의 문제라기 보다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 보다는 뭔가 껄끄러운 부분이 있는게 낫죠.

저도 <무간도> 엄청 좋아해요. 예전에 <무간도> DVD 박스세트 처음 나왔을 때 돈은 없는데, 그게 막 지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먹을 거 줄여가면서 질렀어요. <무간도> 얘기하니까 아무래도 비교를 조금은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이정재 씨가 양조위보다 너무 연기를 못해요. 물론 이정재 씨도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미안하지만 아직도 약간 발연기를...물론 제가 양조위를 심하게 좋아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요.

리뷰는 그냥 막 쓰세요. 뭐든지 다 쓰다보면 좋아지겠죠, (라고 사실은 저한테 말합니다.)

2013-03-01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난일까 했는데, 다 읽고 보니 칭찬이군요.^^
전 좀 뻔한 영환가 해서 안 볼 뻔.. (근데 시간 없어서 못 볼지도요. 일단 스토커와 라스트 스탠드 먼저 기회를 줘야 하고, 그리고 직장도 다녀야 하니까...-_-)
여튼 리뷰를 읽고 보니, 영화가 보고 싶어집니다.
(디파티드는 보고, 무간도는 아직 안 본 어이없는 이력도 빨리 청산을 해야겠고요~ㅎㅎ)

맥거핀 2013-03-01 13:23   좋아요 0 | URL
디파티드는 무간도를 리메이크 했다고는 하지만, 도리어 설정이 상당히 다른 부분도 있으니까요. 다른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무간도보다 디파티드가 더 좋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열심히 깠는데...일단 글 제목부터가 공격적이잖아요.ㅋ

아카데미도 있고 해서, 원래 2월에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오는 달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한 가락 하는 감독들의 영화가 많이 나오네요. 홍상수와 김지운과 박찬욱의 영화가 거의 동시에 나오는 이런 때는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네오 2013-02-28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훈정 감독의 대해서 그냥 생각나서 하는 말입니다만,,2010년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에 시나리오작가로 처음 접한 뒤,,대한민국의 부조리한 법현실에 대해서 잘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생겼습니다만,,마치 과거의 데이빗 마맷의 초롱초롱한 글빨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만,,류승완의 <부당거래>를 처음보고,,아 이 작가 대단히 영민하다고 생각했어요,,그러나,,그때 류승완의 <짝패>가 저희 거의 홀릭정도의 페어버릿 필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찍지 않는 그에 대해서 맹렬히 비난했지만, ,최근의 다시 <부당거래>를 보고 (이미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법률시스템에 특히 검사에 대해서,,대해서 열렬한 관심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명작에 가까운 냄새를 맡았습니다,,정말 좋던군요,,다시 박훈정으로 돌아와서 그의 데뷔작이 <혈투>였지요,,인기가 거의 없어서 흥행에 참패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이렇게 <신세계>로 각광받다니 어리둥절 하군요,,그는 우리나라 시나리오 작가 중에서 플래쉬 백 효과를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작가 같더군요,,<혈투>의 시대적 배경은 아직도 논란중인 토론거리인 광해군의 북벌파견이라,,관심 있게 지켜보았는데,,사실 지루한 감도 있었죠,,이야기 인물이 세명이니깐요,,아무튼 <신세계>는 황정민의 깡패연기를 다시 볼수 있다니깐,,기대해봅니다,,

맥거핀 2013-03-01 13:33   좋아요 0 | URL
감독의 얘기를 보니까, <혈투>는 여러가지 여건상 하고 싶은 것은 별로 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다른 기사에 보니 <혈투> 때 대기업의 투자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암튼 감독 입장에서는 투자사의 입김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여러모로 예산상에서 아쉬움이 남는 모양입니다. (뭐 모든 영화들이 어느정도는 다 그렇지만)

그래서 제가 알기로는 원래 시나리오에서 영화가 많이 줄어든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더 좁은 공간의 이야기로 축소된 면도 있구요. 영화에서 공간의 문제는 예산상의 문제로 제약을 받을 수 있지만, 말씀하신 플래시백 같은 것은 뭐 감독의 역량이 된다면 저예산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니까요. 플래시백하니까 생각나는데, 이번 영화에 붙은 마지막 사족이 생각이 나는군요. 저는 마지막에 왜 그런 사족이 붙었을까 의아했어요. 감독도 이게 사족이라는 걸 알텐데, 마지막에 그런 걸 붙이는 것은...속편에 대한 의지일까요?

황정민의 연기는 요새 충무로 배우 중에는 거의 원탑급인듯 합니다. 약간 과잉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뭐 그런 건 할 수 있는 때 해야죠. 이 영화는 황정민보고 지르라고 하는 영화니까요. 최민식은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톤을 바꿔서 상당히 절제하는 것 같고...이정재가 상당히 못 받춰주는 와중에서도 연기는 좋았어요.

넙치 2013-03-0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다르시군요.ㅋ
상업영화는 상업영화만의 규율이 있다고 가정해요. 현실감이 없어도 괜찮다,뭐 이런..그래서 맥거핀님이 지적하신 너무 잘짜여진 아귀도 좋아요. 어차피 우연없는 이야기는 없으니까요. 개연성 부족이 과할 정도는 아니게 보여요.
카메라 움직임이나 편집술도 저는 너무 훌륭하게 봤어요.액션씬을 제거한 대신 속도감을 유지한 게 빠른 교차 편집인데 이게 의미없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이 영화에서는 아주아주 유의미한 거 같아요.생략에서 나오는 쇼트간 파생 의미 생산으로 저는 해석. 익스트림 클로즈업도 전 강조로 보지 않았어요. 쓰러져가는 건물 외경 샷 그리고 이어지는 건물 안 벽과 인물만을 확대해서 잡아내는 방식은 인물이 어디에 있는지 있게하는 효과가 있더라구요. 누가 궁금하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저는 왜 제 생각을 길게 쓰고 있는지.쩝. 쓰고나니 뻘쭘.

맥거핀 2013-03-01 13:50   좋아요 0 | URL
생각듣는 거 재밌고 좋은데요. 언제도 좋으니 생각을 많이 나눠주세요.^^

저는 마지막을 맞춰놓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즉 그 마지막을 주기 위해 이야기가 중간에 조금 개연성이 없어진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정청이 이자성을 덮는거나, 강과장이 그대로 당하는 것이 그래서 조금 걸렸어요. 물론 박훈정 감독이 후속작을 꿈꾸는 것 같으니, 그 이야기들이 후속작의 중요한 지점이 될 수도 있겠죠. 즉 정청과 이자성의 덮을 수밖에 없는 숨겨진 관계나 강과장이 마련했던 대비책이 나중에는 중요하게 등장할 수 있겠죠.

저는 속도의 문제는 글쎄요...빠르게 한다고 해서 긴박감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예를 들어 <흑사회> 같은 영화보면 사실 중요부분에서 매우 느리게 숏이 연결되는데, 그 때 엄청난 긴장감이 나오니까요. 어차피 이 영화도 액션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니까요. 중요한 액션을 감독 스스로가 제거할 정도니까.

아..그리고 말씀하신 건물 외경 샷과 인물이 연결되는 씬이 어디서 나왔었죠? 따지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요.ㅋ

넙치 2013-03-02 11:12   좋아요 0 | URL
강과장과 이자성이 접선하는 건물에서요. 두 사람의 만남 중 몇 번째 만남이었는지는 비루한 기억력 탓에 모르겠고, 암튼 두 사람의 접선 중인데요. 외경을 역시나 비스듬한 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가 이자성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면서 카메라가 이자성을 따라들어가고 강과장이 등장하는데 어느 순간, 강과장의 얼굴과 연두색 벽만 잡는 샷에서 저는 감동을.ㅋ 그 뭐랄까, 강과장과 이자성의 정체성 혼돈, 나아가 선과 악의 경계의 모호함까지도 함축하는 느낌까지도 확대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또 하나는, 건물 외경이 아니라 이자성의 집안에서 이자성 아내가 유산 후 아내의 얼굴 잠시 보여주고 이자성의 얼굴이 문을 배경으로 클로즈업된 후 문을 열자 며칠 전 있던 전투의 상흔으로 똘마니들이 얼굴에 반창고를 죄다 붙이고 있는 장면에서 감독의 연출력에 후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더라구요. 문의 본래 기능이 공간 분리인데 문을 열기 전에 이자성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잠깐 집이란 걸 잊고 문을 열면 집 밖이란 걸 알게 하는..내면과 외면, 뭐 이런 함축을 달아 봅니다.하하.

맥거핀 2013-03-03 00:59   좋아요 0 | URL
아..영화를 상당히 세밀하게 보시는군요. 저는 사실 중간부분부터 리듬을 잃고 좀 루즈하게 본 것도 있고, 원래 대강 보는 것도 있고 해서 말씀하신 첫번째 장면은 사실 잘 기억이 안나네요. 아무튼 다른 인터뷰에서도 보니까 감독이 공간의 문제에 많이 신경을 쓴 것 같기는 하더라구요. 예를 들어 강과장에게 낚시터를 부여하고, 접선장소로 바둑교실을 부여하는 것 같은 것 말이죠. 부감 얘기하니까 생각나기는 하는데, 요새 한국영화가 부감을 좀 과하게 쓰는 듯 하는 인상도 있어요. (물론 부감이 잘 쓰면 상당히 좋은 그림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두번째 말씀하신 장면은 생각이 나는데, 아마 그게 마지막 휘몰아치기 직전이었죠. 저는 사실 그 장면에서 아내의 표정이 너무 의미심장해서 공간에 그렇게 주목해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공간을 쓰실 요량이면 좀 클로즈업은 자제하시지, 하고 저는 여전히 투덜투덜...^^ (말씀하신 부분들을 생각해보니 공간의 문제에 주목해서 한 번 더 봤으면 좋겠네요. <파우스트>도 꽤 오래전에 봤는데 공간문제를 주목해서 다시 한 번 봐야겠다..그랬는데, 그것도 못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꽃도둑 2013-03-0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선 진득하니 댓글까지 다 읽었어요,,^^
영화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인지 용어들은 여전히 생소하군요,
하지만 재밌어요,,ㅎ

맥거핀 2013-03-06 15:34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뵈니 반가워요~. 댓글까지 차분하게 읽어주시고..뭐 지식은 없어도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그걸로 좋죠.

이제 봄인데 꽃향기도 맞고, 따스한 햇볕도 느낄 수 있는 좋은 데 많이 가셨으면 좋겠네요. 뭐 이건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또 다른 길>,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1999, 면회>에 대한 약간의 스포 있음)

 

 

최근에 본 영화들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수다성 잡담 혹은 잡담성 수다.

 

 

 

 

 

 

 

 

 

 

 

또 다른 길, 카롤리 마크, 야노스 크산투스, 1982

 

1957, 실질적으로 소련의 지배를 받는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배경으로 오직 자유를 꿈꿨던 한 레즈비언 기자의 이야기를 그린 카롤리 마크와 야노스 크산투스가 만든 헝가리 영화 <또 다른 길>은 두 가지의 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에바와 그 에바에게 이끌린 리비아의 사랑 이야기라는 감성적인 축,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종 검열과 거짓과 프로파간다와 억압이 존재하던 당시 헝가리의 분위기와 특히 언론인들의 진실된 보도를 향한 갈망이라는 이성적인 축. 헝가리 국민들은 스탈린의 충실한 개였던 지도자 라코시를 1956년의 봉기로 끌어내고, 잠깐 '부다페스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그해 11월 소련 지도부는 부다페스트로 전차를 진격시켰고, 새로 지도자가 된 임레 너지는 소련에 반기를 든 대가로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그런 1957년의 헝가리에서 자유로운 보도를 갈망하는 레즈비언 기자인 에바는 영화 속의 표현대로 허리 위에서나 허리 아래에서나 일종의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고, 그러므로 이 영화 속에서 이런 감성과 이성의 문제는 여기자 에바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이것을 일종의 정치적인 멜로라는 하나의 비유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이 에바라는 자유로운 영혼의 바이러스는,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군인 남편과 함께 이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던 리비아, 그러니까 군부를 등에 업은 독재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일반 국민들에게 침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에바와 함께 도피를 꿈꾸던 리비아는 결국 그 군인의 총탄을 받고 살아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며, 이것은 다시 소련의 전차의 침공을 받은 헝가리의 상태를 하나의 비유로서 보여준다. 즉 헝가리의 국민들, 더 나아가 이 헝가리라는 하나의 나라는 존재하고 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련의 지배를 받는 일종의 괴뢰 국가와 마찬가지였던 대외적인 상태로서도 그렇고, 대내적으로도 당시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자유롭게 존재했으나 속으로는 철저하게 자유가 억압된 상태였다. 그것을 영화 속 에바와 리비아가 취재하게 되는 협동농장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자발적인 농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고 선전된 협동 농장이 강요와 억압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그들은 취재하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듯이, 공산주의 사회는 혁명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혁명은 구호로서만 존재하였고, 혁명의 실질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금기되었다. 그러므로 그 혁명의 바이러스를 잔뜩 담고 있던 에바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냈던 많은 혁명가들이 그 공산주의 사회에 의해 제거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두 가지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영화 속 후배 기자들의 갈망과 상부의 억압 속에서 고뇌하는 늙은 편집장과 관련된 일화. 이 편집장은 오래전 어떤 이유로, 아마도 뭔가 정부에 밉보일만한 기사들을 썼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사형 직전에 사형선고는 취소되었고, 그 사형집행인이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고, 죽는 것보다는 농담이 낫잖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회의 어떤 비인간성, 즉 아마 혹 그대로 죽었어도 그것은 그대로 농담으로만 치부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 다른 하나는 진실된 기사를 쓰지 말라고, 그 내용을 듣기 좋은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 실으라고 억압하는 상부의 사람에게 그 편집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 소년이 사소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갔다. 의사는 최면 요법을 통해 그 소년을 치료했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 버릇은 놀랍게도 사라졌다. 그러나 몇 달 후, 그 버릇은 사라졌지만 그 소년에게는 다른 증상이 생겼다. 바로 시도때도 없이 심한 경련을 하는 증상이. 그것은 비단 1957년의 헝가리의 경우만일까. (서울아트시네마)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존 무어, 2013

 

쇠락해가는 시리즈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전작들에게 엿을 먹이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 마지막 작품(그렇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리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조금 나았더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 상태로는 후사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강약, 중강약을 구사하던 전작들의 액션 리듬은 사라졌고(영화의 구조로서 가장 이상해보이는 점은 그나마 가장 매력적이고, 거대한 액션을 영화의 초반부에 배치해놓고, 뒤에는 심심한 잔재주들로 채운다는 부분), 매력적인 악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아니, 알아서 자취를 감춰주신다. 존 맥클레인의 부루퉁한 유머는 약간은 살아있으나, 이제 그는 땀과 피에 절은 러닝셔츠를 입고 뛰기는 힘들어 보이고, 뜀박질은 그 대신 그의 차와 헬리콥터, 혹은 그의 아들이 대신해준다

 

가장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이 영화가 존 맥클레인의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4탄에서 맥클레인은 왜 이렇게 거대한 적에 맞서는지 그냥 도망가자는 제안에 대답한다. 이거는 귀찮고, 힘들고, 한 마디로 할 거 못되는 짜증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되는 거라고. 그게 바로 NYPD 존 맥클레인의 매력이었다. 아이, 정말 하기 싫어 죽겠네,가 얼굴에 가득 쓰여져 있지만(그는 항상 술이 약간 덜 깬듯한 얼굴이다), 그래도 그거 안하면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하니까 해야한다는 뭐 그런 닭살돋는 거.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이 <다이하드> 시리즈의 매력이기도 했다. 아니 고작 너 따위가 내 적수가 되냐는 식의 악당들의 태도, 그리고 그에 맞서는 마누라에게 구박당하고, 상관에게 욕먹는 존 맥클레인,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뛰고, 때로는 권총 한 자루로 맞서는 다른 경찰들. (좀 다른 얘기지만, 드라마 <24>에서 가장 슬펐던 장면 중의 하나는 잭을 도와주던 스쳐 지나가던 어떤 여경찰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존 맥클레인은 그래도 그나마 최대한 시민의 피해를 줄이려 한다. 그것이 경찰의 임무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존 맥클레인은 3탄에서 어쩌다가 같이 임무에 뛰어든 제우스(사무엘 잭슨)가 공중전화를 오래 쓰는 여자에게 강제로 전화를 끊게 하자, 그에게 화를 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부루퉁한 뉴욕경찰 존 맥클레인의 예의있는 매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맥클레인 씨, 이번에는 안면 하나 없는 러시아로 날아가고, 그 덕분에 이제 그는 뉴욕경찰이 아니라 자식새끼 건사하려 애쓰는 휴가나온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의 말마따나 잘 돌아갈 수 있는 작전을 이상하게 망가뜨리는 민폐 캐릭터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달아나는 나쁜놈을 쫓기 위해 시민의 차를 빼앗으면서 그 시민에게 주먹질을 날리는 존 맥클레인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영화 속에서 볼 만한 순간들은 존 맥클레인이 나는 단지 휴가왔을 뿐이라며 징징댈 때와 루시 맥클레인이 특별출연할 때 뿐. 나는 루시 맥클레인으로 나오는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이 배우 좋아한다우.

 

아무튼 맥클레인 씨, 지금까지 수고하셨고, 이제 그만 세 가족 함께 휴가 즐기세요. (CGV 대학로)

 

 

 

 

 

 

 

 

 

 

 

 

1999, 면회, 김태곤, 2013

 

그러니까 1999년에 두 친구가 한 친구의 군대 면회를 가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1999년이라는 시간과 '면회'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그 독특한 공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재수를 하고 있는 친구가 수능을 보았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아마도 98학번 세대이고, 이때는 1999년 초인 듯하다. 이들과 매우 가까이에서 대학을 다닌 내 입장에서 당시 대학에 다녔던, 혹은 대학을 준비했던 젊은이들을 생각해 볼 때, 1997년은 전년의 통칭 '연대사태'와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으로 지도부 구속 및 잠적 등으로 이념이 위태로운 시기였고, 1998년은 1997년말 벌어진 소위 'IMF 사태'로 경제가 위태로운 시기였으며, 1999년은 9라는 숫자가 꽉찬, 그야말로 한 세기가 끝나는 혼돈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세기가 위태로운 시기였다. 우리는 그 이전에는 술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공동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으나, 1998년 이후로는 모두들 1차를 '간단히' 처리한 후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개별의 가상의 적을 맞이하였다. 모두들 2차를 가자고 할 용기는 없었고, 용기는 각자의 PC방 값과 집에 돌아갈 차비만큼만 주머니 속에 남아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오래된 적들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IMF라는 경제적 적은 뉴스에만 존재할 뿐 어디에서도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테란이니, 저그니 하는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전쟁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

 

공간은 어떨까. 영화 속에서도 묘사되는 군인이 외박을 나와서 맞이하는 군대 주변의 공간들(위수 지역이 있으므로 먼 곳으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으니)은 참으로 이상해 보인다. 그곳은 군대의 울타리 밖에 있는 공간이지만, 이상하게도 군대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 곳에서는 백골부대 마크가 선명히 붙어있는 식당에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오바로크'를 칠 수도 있으며, 여전히 선임에게 조인트를 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군인들이 먹여살리는 그곳은 군대가 아님을 애써 항변하고 있지만(예를 들어 '서울다방' 혹은 '부산마트'라는 그 곳의 미스테리한 명칭의 간판들을 보라), 마치 군대의 거대한 일부처럼 보이고, 때로는 강원도 전체가 군대의 거대한 주둔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군대에 간 친구를 만나기 위해 향하는 두 (남자) 친구의 여정은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부 미국영화에서 보이는 중서부의 드넓은 평원이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그물처럼 보일 때처럼 말이다. 하룻밤의 여정을 다루는 이 <1999, 면회>는 그러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여정이 계속되는, 낯선 마을에서 일이 점점 꼬여가는 것처럼 보였던 <유턴>과 같은 영화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두 친구는 친구를 전기가 통하지 않는 철조망안에 되돌려놓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결국 세 친구는 그 곳에서 자의든 타의든 한 가지씩을 잃어버린다. 대학생 친구는 동정을 잃었고, 재수생 친구는 카메라를 잃었고, 군인 친구는 사랑을 잃었다. 그 때는 그렇게 무엇인가를 잃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아니, 이건 허세고, 무엇인가를 잃어야 조금이라도 덜 찌질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때로는 억지로 잃었고, 때로는 기꺼이 버렸다. 그리고 그대신 기꺼이 우정을 얻었다, 라고 쓰고도 싶지만, 대신 그들은 그 이후에 이상한 것들을 얻었다. 그 이상한 것들을 얻게된 2013년의 남자들은 이제 떼를 쓴다. 차라리 찌질한 자신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을까, 이 이상한 것들을 버릴테니, 제발 찌질한 자신으로 되돌려달라고 애타게 울부짖는다. 그것이 어쩌면 <건축학개론>이나 <응답하라 1997>, 혹은 <1999, 면회> 등에 남아있는 밑바닥의 정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실제의 적이 보이지 않으니 가상의 적을 만들어 그들과의 싸움을 했었던 찌질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 지금은 그런 찌질함마저 없어져버렸으니까, 찌질한 자는 콩알만큼이라도 염치가 있으니 찌질해지는 것이니까. 적어도 몰염치, 혹은 파렴치하지는 않으니까.

 

영화적으로 볼 때는 너무 도식적인, 있음직한 사건의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이 영화를 리얼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경험에서 비추어진 리얼함인지, 혹은 들은 리얼함, 만들어진 리얼함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그것이 리얼한 것이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리얼함이 아닐까.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불일치할 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맞춰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조작되지 않은 과거의 나의 어떤 부분을 절실하게 끄집어내는 순간, 그것은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안타깝게도 상당히 어려워보인다.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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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죽는 것보다는 이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고 하는 게 낫다는 얘기. 인상적이네요. 현실사회주의는 그 찬란한 이상과 현실 재현의 간극이 너무도 커서 진짜 차라리 농담같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굿바이 레닌>이 왠지 생각나네요. 물론 다르지만..) 물론 얼굴에 철판을 깐 자본주의는 그런 간극은 없지만, 파국적 비극이지요.

2. 다이하드4 관람기 읽으니, 전작들의 매력이 도리어 확 다가오네요.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다." 피천득의 <인연>, 마지막 문장이 생각나는군요.- 흐흐 근데 이 글 무척 재밌어요!

3. 1999, 면회 관람기. 무척 설득력 있는 글이에요.
무언가를 잃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고, 무언가를 기꺼이 잃으면서 대신 이상한 것을 얻었고, 그런 어른이 된 현재 차라리 무언가를 잃기 전의 찌질이가 되고 싶어한다. -맞는 말 같은데,, 이걸 영화 속에서 도식화하면 또 상투적이다, 이 또한 설득력 있어요. 사람들이 건축학개론과 응답하라1997의 회고주의를 비난했던 게 이런 부분 아닌가 싶네요. 상투적인 구도.
"쉽게 파악되지 않는 과거를 포착할 때,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된다. 그런데 이건 어려워 보인다." 이런 '인식'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이전의 김종관 글 인용과 통하는 면이 있구요.

맥거핀 2013-02-21 14:36   좋아요 0 | URL
장문의 댓글을 보니 좋군요.^^

공산주의 국가에서 어린시절부터 자라난 사람과 또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산권 국가의 작가들의 글이나, 그곳에서 만들어진 영화 등을 보면 어떤 인식 자체가 뼛속깊이 자본주의인 우리와 확실히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상을 꿈꿨던 사람들이 현실 공산주의 사회를 보고 또 한편으로 절망했던 부분들을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제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인 듯 합니다.

<1999, 면회>를 비롯한 예전으로의 타임머신을 보내는 작품들을 보면, 결국 중요한 질문은 '왜' 지금 90년대를 돌아보는가,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때를 돌아봄으로써 현재의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살펴봐야겠지요. 그저 좋았던 옛일..로 끝나는 것은 현재의 나를 기만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소위 '운동권 회고담'을 보는 불편한 시선 같은 것 말이죠.)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교묘하게 분리시키려는 시도들은 위험하죠.

<다이하드>는 이제 그만 나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존 맥클레인을 보고 싶지 맥클레인의 탈을 쓴 다른 인물이 나와서 하는 것은 별로 보고 싶지가 않거든요. 아니면 루시 맥클레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하면...

최근에 1-2 사이에 관심있는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이더군요. 김지운의 <라스트 스탠드>, 박찬욱의 <스토커>, 박훈정의 <신세계>,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분노의 윤리학>이나 임순례 감독 영화도 관심이 있기는 한데..몇 편이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일단 박찬욱의 <스토커>는 어떻게든 보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2013-02-2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장문의 댓글'을 부르는 글을 쓰시니까. + 흠. '또 댓글'을 부르는 긴 답글이군요.

음. 그렇겠군요.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란 사람과 뼛속 깊이 다른 인간, 다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겠어요. (생각 못해 봤네요.) 그런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가 뭐가 있을까요? 전 동구권 감독 영화 본 거 두 편 정도 생각나는데(철의 사나이, 붉은 시편), 둘 다 그 적당한 예는 아닌 것 같고...

흠. 그러네효. 왜 지금 90년대인가,라는 질문이 더 핵심이겠어요. 근데 모든 복고주의는 뻔한 것 같아요. 현재에 대한 손쉬운 도피, 그때가 좋았어.. 라는 것. 그나저나 저야말로 엄청 회고적인 인간인데요. 복고와 회고는 다르지만, 여하튼 상투적인 건 모두 나빠요.ㅎ

루시 맥클레인 떔에 <다이하드4>를 보고 싶을 정도로 찬양하시는군요~. 하지만 그외 요소의 데미지가 너무 클 것 같아, 포기.ㅋㅋ

흠. 저도 당연히 라스트 스탠드, 스토커! 그리고 홍상수 신작은 아마 접근 불가로 못 볼 것이고. 분노의 윤리학은 시간 되면 보려고요... (되게 볼 것 같이 썼는데, 사실 요즘 영화 진짜 안 봐요. <베를린> 이전 본 게 한 달 전의 <파이 이야기>?!) 그리고 '남쪽~튀어'는 내일 예매해놨어요.

맥거핀 2013-02-22 14:37   좋아요 0 | URL
글쎄요..그런 영화가 뭐가 있을까요? 저도 막상 물어보시니 뭐가 있을지..(말씀하신 두 영화는 모두 제목만 알아요.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가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뭐 꼭 어떤 영화의 내용같은 것 보다도, 러시아 문학, 러시아 영화,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나 최근의 알렉산더 소쿠로프 등에서 보이는 인간 본연의 탐구, 어떤 거대한 질문 같은 것을 보면,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러시아정교나 어떤 대륙적인 기질 외에도 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같은 것이 어떤 작용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중국 영화나 지아장커의 다큐 등에서 인민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볼 때의 어떤 이질적인 감정 같은 것도 말이죠.

저는 그 배우,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영화는 거의 챙겨봤거든요. 으하..너무 매력적이예요. 작년에 내한했었을 때 한 번 가볼까, 심각하게 고민을..루시 맥클레인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경찰이 되어 하는 걸로 했으면 좋겠네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예고편만 봐서는 그냥 예전 영화들의 재반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또 그안에서 무엇을 변주해낼지 궁금하구요. <스토커>나 <라스트 스탠드>는 감독 본연의 스타일을 헐리우드와 어떻게 혼합해냈을지..걱정반 기대반이고..<남쪽으로 튀어>는 제가 좋아할 스타일의 영화인 것 같은데, 일단 보고나서 감상 전해주세요. 평은 나쁘지 않던데..(근데 저도 생각보다 별로 못봐요.)

2013-02-23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미클로시 얀초의 <붉은 시편> 좋았어요.
흠 저는 모르는 배우네요.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남쪽으로 튀어>는 별로였어요. 모든 요소가 삐걱대는 느낌. 재미없어서 졸았어요. 임순례 감독은 영화를 못 만드는구나, 하고 혼자의 결론을 내렸어요. (데뷔작 <세 친구>도 호평에 비해 영화가 재미없었던 기억이..)

맥거핀 2013-02-25 21:17   좋아요 0 | URL
이런 답글이 늦었네요. 아마 얼굴 보시면 아..이 사람,하고 기억이 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기는 그렇게 탑스타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연기파라고 하기에도 뭣하죠.

아..그런가요. 저는 임순례 감독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인데. 감독으로서의 특유의 정서가 있어요, 임순례 감독은.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어떤 독특한 지점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랄까요. 좀 덜 대중적인 면이 있기는 하죠. 특히 이번 영화는 만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삐걱거림도 있었으니 그런 면도 조금은 감안을 해야할 겁니다. 아무튼 그래도 <와이키키 브라더스>만한 게 그 이후로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

감은빛 2013-03-1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위에 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맥거핀님의 글을 읽으면서 앞선 다이하드 시리즈가 그랬구나.
존 맥클레인이 그런 캐릭터였구나 하고 되새겨 보았습니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가 누군지 검색해봤더니,
데쓰 푸르프에 나왔던 미녀로군요.
제가 본 건 그 영화 뿐인데 그 미모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들과 매우 가까이에서 대학을 다닌 내 입장에서'로 시작해서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전쟁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로 끝나는 부분,
정말 인상적이네요!
늘 느끼지만 맥거핀님 글 솜씨가 거의 예술입니다.
이렇게 잘 쓴 글을 얼마만에 읽어보나 싶은 기분이 들어서,
그 부분만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재밌는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3-03-13 16:38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여담입니다만, 글에는 그렇게 쓰기는 했지만, 그때 한창 '스타' 열풍이 불었는데, 사실 저는 '스타'를 잘 하지도 못하고, '스타'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늘 '피파'를 했었어요. 저는 당시에나 지금에나 늘 간단한 걸 좋아합니다. 골을 넣고 이긴다, 뭐 그런거요. 암튼 당시에 또하나 기억나는 건 그 수많았던 학교앞 비디오방들이 상당수 PC방들로 명함을 바꿔 달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 또 그 수많은 PC방들은 또다른 무엇이 되었습니다. 그 사라진 수많은 PC들과 그 주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게 궁금하기는 합니다.

아..'데쓰 프루프'를 보셨군요. 네. 그 영화에 나와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지요. 최근의 '다이하드'에서 보니 그 때보다 몸이 좀 불었더군요. '데쓰 프루프'는 영화보다도 그 OST를 참 좋아합니다. 영화 개봉 후 몇 년인데, 아직까지 그 OST는 제 기계 안에 들어있어요.
 

 

 

어제 밤을 거의 샜더니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 잠 좀 깨려고 간단한 정보성(?) 글 하나 적어봅니다. 얼마전 알라딘 전자책 서비스 오류(http://blog.aladin.co.kr/cscenter/6124342)로 전자책 이용자들에게 적립금 2000원씩이 주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게 유효기간이 내일, 그러니까 2월 15일까지군요.

 

2000원이 주어져서 좋긴한데, 뭘 사야할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내 돈 들이기는 아깝다, 하시는 분은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중에 하나를 고르심이 어떨까 싶네요. 전자책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구간은 1900원이라 가격이 딱 맞더군요. 내용도 다양하니 선택의 여지도 많고요. (아..참고로 살림 출판사와는 전혀 이해관계 없습니다.)

 

 

저는 이걸 샀습니다. 뭐 어차피 이걸 읽어도 가스통 바슐라르에 대해서는 겉핥기로 알게 될 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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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2-14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좋네요. 책샀다고 자랑하면서 1900원짜리 쿠폰으로 저 어려운 책을 겉핥기하다니! 그런데 왜 어제는 밤을 샜어요? (눈 초롱초롱 0('o')0) :)

맥거핀 2013-02-15 20:46   좋아요 0 | URL
뭐 먹고 살려다보니 가끔 밤도 새고 그래야죠.-_- 지금 한 3장인가 봤는데, 아직 뭔 말인지 잘 모르겠음..^^;

가연 2013-02-22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시리즈가 은근히 좋은 것 같더군요ㅋ 저도 여기 있는 시리즈 중 한 권을 적립금으로 샀었답니다.

맥거핀 2013-02-22 14:25   좋아요 0 | URL
흐흐흐. 네..5만원을 채워야 사은품 받을 수 있는데, 애매하게 한 2-3천원 남을 때 이 시리즈를 자주 활용합니다. 그냥 왔다갔다 할 때 읽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