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2005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이자, 복수 연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중간에 한 번 영화가 탈바꿈을 한다. 엄밀한 용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톤(tone)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중간의 기점은 금자(이영애)가 백선생(최민식)이 가지고 있던 다른 아이들의 상징물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이 때부터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던 이 영화는 급속하게 지상으로 내려와 관객들에게 달라붙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중간까지의 분위기의 형성에 큰 몫을 담당하던 나레이션(내용상으로 볼 때 이 나레이션은 금자의 딸 제니가 후일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목소리는 라디오 '밤의 플랫폼' 등으로 익히 알려진 성우 김세원 씨가 맡고 있다)이 이 중간을 기점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이 중간 이후로 등장하지 않던 나레이션은 마지막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물론 내용상으로 볼 때도 이 중간부터 이야기는 다른 양상을 띤다. 전반부까지는 금자가 복수를 위해서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이다. 무엇인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공간(물론 이는 여성교도소라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공간이 주무대인 점에도 이유가 있다)에서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비현실적인 톤으로(예를 들어 기도하는 금자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장면 같은 것) 이루어진다. 그런데 금자가 거의 복수에 성공하고 그것을 완결지으려 할 즈음에 금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아이가 원모 한 명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이 때부터 이른바 '집단의 복수'가 등장하고, 문제의 학교에서의 씬이 이어진다. 그리고 박찬욱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 후반부의 학교에서의 일들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이야기에 앞서서 먼저 몇 가지의 자잘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미장센 구성 능력과 형식적인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박찬욱이 특히 <스토커>에서 쉴새없이 보여줬던 평행편집의 원형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화를 섞어서 새로운 제3의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대비되는 두 사건을 교묘하게 엮어서 독자의 이해의 쾌락을 증폭시키는 것 등이 그런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금자와 백선생이 다른 인물(목사(김병옥)와 박이정(이승신))들을 이용하여 서로를 추적하는 장면이나 영화의 중간 금자 사건의 담당 형사가 빵집에서 금자를 대면하는 장면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빵집에서의 씬에서 금자와 같이 일하는 근식과 금자의 대화, 그리고 형사와 형사 아내의 대화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간단하게 금자와 형사를 동일 선상에 위치시킨다. 즉 금자의 사건에서 금자가 가지게 되는 죄의식의 어떤 부분을 형사도 공유하고 있음을(왜냐하면 그도 결국 당시에는 진범을 잡아내지 못했고 금자를 범인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나중에 학교에서 금자를 돕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도리어 주목하여야 할 것은 대화보다도 어둡고 축축해보이는 긴 지하도를 통과하는 형사와 그의 아내의 모습이다)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미묘한 것들도 살짝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형사의 아내는 금자가 만든 케이크를 내던지며 "이걸 어떻게 먹어!"라고 형사에게 소리치는데, 이 대사가 (근식에게) 예전에 아이를 살해했다고 말하면서, "걱정 마. 먹지는 않았으니까."라고 덧붙이는 금자의 대사 뒤에 붙음으로서 '먹는다'라는 표현이 말하는 미묘한 뉘앙스가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있다(그리고 이 장면 뒤에 금자와 근식이 관계를 맺는 장면이 붙는데, 이는 '먹는다'라는 대사와 맞물려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예를 들어 금자와 근식의 관계, 혹은 형사와 금자의 관계, 백선생과 금자의 관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것은 또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 금자의 딸 제니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금자의 죄'라고 할만한 것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 영화를 보다보면 이 금자의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금자는 아마 아이를 꾀어냈을 뿐, 범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복수의 구조는 성립한다. 금자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백선생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고, 그 결과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죄일 뿐, 사실 어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속죄'와 같은 것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가 결코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녀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준비하는 복수는 철저히 그녀만의 것이고, 형식상으로는 원모의 원한을 갚는다는 식의 형태를 띠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복수(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에 가깝다. 즉 원모의 부모에게 속죄하고, 죽은 아이를 대신하여 백선생을 처단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이는 한편으로 이 복수를 어떤 가벼운 놀이극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친절하다'. 그녀가 친절한 것은 자신들의 복수를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교도소에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친절하기도 했지만, 공공의 적 마녀를 쓰러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럼으로써 타인의 신뢰를 얻지만, 동시에 마녀의 지위를 물려받기도 했다. 즉 그녀는 친절하지만, 이 친절함은 왠지 가면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녀는 감옥에서 나와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변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 '변했다'는 것은 일종의 복선이다. 왜냐하면 금자는 실제로 변했으니까 말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의 복수를 대신해서 처리했던 금자가, 그래서 심지어는 자신의 복수마저도 일종의 놀이극처럼 보이게 만들었던(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정작 그 자신의 복수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이 마지막의 학교에서 금자는 이 복수에서 살짝 '비껴서' 있다(그녀는 결국 죽은 백선생의 시체에 총알을 날렸을 뿐이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야기한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연쇄이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낳고, 복수를 행한 당사자는 다음 번의 다른 복수에 의해 쓰러진다. <올드보이>에서 이야기한 것은 복수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살고자 하는 노력, 혹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즉 복수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하는 것이며, 복수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 뿐임을 말한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다. 복수, 즉 처벌은 결국 자신을 해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처벌을 그만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백선생과 같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선생은 일종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이다. 이것에는 어떤 윤리적인 의미나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이 없다. 백선생은 안이 텅 비어있는 입출력기계, 어떤 신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와 같다(예를 들어 그가 밥을 먹다가 박이정과 거의 강간에 가까운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의 입력(먹는 것)과 배출(로서의 성행위)은 거의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최민식은 흥미롭게도 <악마를 보았다>에서 이런 캐릭터를 한 번 더 연기하기는 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연관되어 있으며(그는 요트를 사기 위해 아이들을 죽였다고 했다), 또한 예전에 말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음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백선생과 같이 (현대 자본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에 맞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영화에서와 같은 대리 처벌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면서도 필요한 복수를 행하는 것, 그것이 대리 처벌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사회가 구현하는 방식이다. 결국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처벌은 사회적인,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처벌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것의 실행과 집행은 공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맥락과 실행으로 볼 때 <친절한 금자씨>에서 '돌아가면서 칼로 찌르기'나 우리 사회에서 '재판을 통해서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거의 동일한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복도의 긴 의자에 우비를 입고, 비닐장갑을 끼고, 손에 단도를 들고 어떻게 하면 손이 다치지 않고 잘 찌를 수 있는지에 대해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떠올린 낱말은 '신산스러움'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내재된 그 '신산스러움' 말이다. 우리 사회의 재판과 형의 집행은 그것을 조금 더 간편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즉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있는 이들에게는 이 '신산스러움'과 '다가올 복수의 쾌감'이 공존한다. 우리 사회의 대리 처벌은 이 중 '신산스러움'을 상당부분 제거했고, 그 결과 복수의 쾌감이 더 크게 남았다(물론 이 과정에서 복수의 쾌감도 줄어들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단하게 남겨져 현재 비교적 간단하게 실행되는 이 과정에서 은연중에 잊게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죄를 처벌하는 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사실 그에 대한 많은 함의를 잊어버렸다.) 그 밑바탕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친절한 금자씨>는 위에서 이야기했듯 백선생의 죄가 원모의 죽음 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금자가 알게 되는 것이 기점이다. 즉 이야기는 이를 기점으로 그 전까지의 금자의 개인적인 복수에서 후반부의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간다.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가는 까닭은 금자가 이 아이들의 부모의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비디오를 보고 나서야, 혹은 그 비디오를 보고 부모들이 보이는 엄청난 강도의 '애끓음'을 보고 나서야 금자는 백선생이 자기가 간단히 처리해야 할 장난감이 아님을 깨닫는다. 간단히 말해서 백선생은 자기 혼자 간단히 먹을 작은 케익이 아니라 커다란 케익의 한 조각인 것이다. 물론 그녀가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의 딸 제니의 존재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왜 <친절한 금자씨>에 딸 제니가 중간에 등장하고,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는 양부모가 등장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것을 보아야만 금자가 공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래서 그녀는 이 복수에서 '비껴선다'. 그러므로 사회적 복수, 혹은 사회적 처벌의 근원에 있는 것은 공감하는 마음, 혹은 동정하는 마음이다(물론 이는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복수의 선행 이전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회적인 처벌, 일종의 대리 처벌이 이루어질 때 악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을 이루어내서는 안된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 악은 맥락이 없는 악이다. 그것을 우리가 나쁜 놈이니까, 혹은 죽어야 할 놈이니까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 맥락없음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근원에 놓인 맥락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악과 우리가 다른 점이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은 이렇게 조금씩 진화한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마지막 모든 인물들이 죽었고, <올드보이>에서는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으나 정신분열을 피하지 못하였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마지막 나레이션이 이를 이야기해 준다). 그것은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공감이나 동정에 이르지 못하였고, <올드보이>의 인물은 여전히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였으나(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전편에서 혀를 자르는 징벌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는 이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로 큰 스피커로 들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 말에 대한 불신은 계속 이어지는데, 금자씨가 백선생을 잡아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으며, 어른인 채로 금자씨 앞에 나타난 원모(유지태)는 금자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하자 재빨리 재갈을 물려버린다), 금자씨는 어렵게나마 약한 공감, 혹은 동정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얘기가 조금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영화의 배우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쓰이고 있다. 위에 든 최민식이나 유지태도 그러하려니와 금자와 제니에게 나타난 두 명의 킬러, 송강호와 신하균은 어떤가. 그렇다. 사실 이들은 동일한 한패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간에 금자씨 역시도 영혼의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박찬욱에게 구원은 그렇게 쉽게 오는 문제가 아니다. 정성일도 지적했지만 마지막 빵집에서 샹들리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를 나홍진의 <추격자>와 비교할 수 있는데, <추격자>에서 가장 의아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교회를 둘러싼 설정들이다.) 예를 들어 미친 자이거나 남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의 구원이란 없을 것인가. 그것의 양상들을 우리는 박찬욱의 다음 영화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05-2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반부를 백선생의 처단하는 모습에서 "생생한"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필 제가 맥거핀님의 이 글을 보기 바로 직전 "검단산 여대생 살인청부 사건"의 전말을 봤답니다. 복수..혹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게 불필요하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맥거핀 2013-05-27 20:12   좋아요 0 | URL
네..그 장면들이 그 소설의 그 부분과 통하는 부분들이 있죠.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 따라했느니 하면서 여러 말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근데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그 사건은 뭐죠? 관련내용을 찾아보겠습니다. 글쎄요..근데 인류 역사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그것을 되돌리면, 우리는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아님 무엇인가(예를 들어 정의)를 '회복'하는 것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확인해보니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나온 사건이군요.)

Shining 2013-05-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좋아요. 약속을 지키는 맥거핀님이 공정사회를 만드실겁니다요-_-b(...뭐지;;)

저는 이 영화를 생각하면, 희미하게 드는 어떤 예감같은 것,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균질하지 못한 감각, 같은 게 느껴지는데 어쩌면 그게 맥거핀님이 말씀하신 톤,일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할만큼 불쾌해지는 영화예요. 잔인함이나 주제나 방식과는 별개로. 어떤 묘한 불쾌감.

불쾌감, 하면 말씀하신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도 떠오르네요. 비오는 날 풍기는 어슴프레한 비린내나 수초 표면에 낀 이끼자국, 지하실의 습기 같은게 떠오르는 영화. 컷이나 연출보다는 뚜렷한 후각,으로 기억되는 영화거든요 저한테는.

덧) 윗 댓글에, 그것이 알고 싶다, 지난주 우연히 틀었다 광분과 혐오의 도가니에...하아.

맥거핀 2013-05-30 01:02   좋아요 0 | URL
저는 불쾌해진다는 느낌보다는 이상한 공포감을 많이 느꼈던 영화예요. 이 영화, 조금 무서운 구석이 있어요. 전반부는 영화가 이상하게 장난스러운 부분들이 있잖아요. 여러가지 테크닉적인 장난들, 혹은 내용상의 어떤 장난스러운 부분들 - 예를 들어 교도소에서 금자는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으로 보여지죠. 마치 거의 로봇을 보는 것 같은데, 이것을 로봇을 볼 때의 어떤 이질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 이 있고, 금자의 복수는 어떤 게임과 같이 혹은 장난과 같이 이어지죠. 금자가 원모의 부모님에게 사죄하는 방식 같은 것을 보아도 말이죠.

그런데 그런 영화가 후반부에 갑자기 확 틀어버려요. 장난을 하던 영화가, 이제 갑자기 "그래도 이게 장난같아보여?"하고 관객에게 묻는 거죠. 아이들이 울부짖는 비디오를, 그리고 그것을 보는 부모들이 울부짖는 것을 억지로 보게 하면서 말이죠. 그런 다음 영화는 부모들이 계좌번호를 주섬주섬 적고, 금자가 케익에 머리를 묻으면서 이상하게 다시 장난으로 돌아옵니다. 장난을 치던 아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그 장난에 숨은 무서운 걸 보여주다가, 아니 사실은 그것도 장난이었어 하고 말하는 격이랄까요. 저는 그게 조금 무서웠어요. 아니 사실은 많이 무서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들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뭐 그냥 제가 그렇다는 겁니다.^^

아이리시스 2013-05-3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읽었는데 이제 댓글 달아요. 공정사회는 저 같이 약속안지키는 사람도 있어서 만들어질 수가 없어요. 그냥 맥거핀님의 바른 자세가 이 세상을 영차영차 하면서 끌고 올라와 저를 희석시키는 거;; 영화는 '너나 잘하세요'나 기억날 뿐이지만, 이 영화는 유독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닌 게, 저는 이영애가 너무 별로;; 근데 이영애만 기억이 나고 다른 배우들은 거의 기억이 안나지만 내용(감독의 철학)은 확실히 처음보다 점점 발전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리뷰 보니까 더더욱.

그런데 나홍진 감독에게는 왜 동의안해요? 이건 Shining님 대신에 제가 궁금해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도 보실 건가요?ㅋㅋㅋ

맥거핀 2013-06-03 14:34   좋아요 0 | URL
공정사회는 뭐..일단 제가 공정하지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을 거예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이번에 순서대로 다시 보니까,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흐름이랄까, 어떤 내용의 단계적인 발전이랄까 같은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후에 아마 기회가 기회가 있으면 쓰게 되겠지만, 이 흐름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박쥐>, <스토커>까지 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들은 뭐랄까, 인물들이 너무 가혹하게 버려진다는 느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미학적인 아름다움, 혹은 일시적인 감정을 주기 위해서 인물들이 가혹하게 다루어질 때, 아니 감독이 창조한 인물을 스스로 갑자기 구겨버릴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그리고 저번에 제가 질문했는데 왜 질문에 답 안달아줌? ㅋㅋ

아이리시스 2013-06-04 16:00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요, 그거 제 댓글 아래 댓글 그거 맥거핀님이 맥거핀님 글에다가 비밀댓글로 단 거 아니예요? 이상하게 비밀댓글인데 그게 제 답글같단 말이죠.. 제가 좋은 정보도 알려주고 간만에 일본어도 사용했는데 왜 답글 안달아줌? 이게..전부터..좀 의심스러웠음..ㅋㅋ

그게 아니라면 무슨 질문?


2013-06-04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4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7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5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5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3-06-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커> 별로였는데요-.,- 그래서 다음부터 박찬욱 아니올시다 라고 결정지으려다가 음,,님 글때문에 갈등때리네요 하~ 어쭙잖은 갈대의 방황 ㅋㅋ 박찬욱의 세계다음에 이제는 누구차례인가요? 조금은 저는 맥거핀님의 박찬욱을 다루고자 하는 글들을 봤으면 하는 소망도 있지만요,,이렇게 작품 따로 따로 떼어내지 말고 전체적인 작가론은 볼수 없나요? ㅋㅋ 왠 요구사항이 이렇게 많을까요^^ 아 그런데 올해 상반기 베스트로 어떤 영화를 선정했나요? 저는 음 한국영화제외하고 베스트원은 <제로다크서티>, 그다음은 <코스모폴리스>, 음 그리고 그리고 <링컨>, <장고>, <문라이즈 킹덤> 요렇게요,,

맥거핀 2013-07-02 00:33   좋아요 0 | URL
하하..네오님 오랜만. 근데 아직 박찬욱이 안 끝나서요. 싸이보그..도 써야하고, 박쥐나 스토커도 다시(특히 <박쥐>는 예전에 쓴 리뷰가 지금 읽어보니 엄청 이상하더군요.) 써야하는데..사실 필요가 있어서 작가론을 하나 쓰기는 했는데, 그거를 쓰다가 남는 부분들을 이렇게 리뷰들로 재활용(?)을 하고 있어요.ㅋ

근데 상반기 베스트는 일단 최소한 어느정도 챙겨본 사람들이 뽑는 거라서, 제가 뽑으면 그냥 본 거 다 써야할 것 같은데요.ㅋ 저는 위에 뽑으신 거 사실 하나도 안 봤어요. <링컨>은 꼭 보고자 마음먹었건만...<제로다크서티> 리뷰 쓰셨던가요? 찾아봐야지.
 
올드보이 일반판 - 재출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올드보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리뷰를 등가교환으로 끝냈으니 그것으로부터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장과 신장의 교환, 익사와 익사의 교환과 같은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은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오대수(최민식)는 사설감옥의 사장 철웅(오달수)의 이빨을 장도리로 뽑아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철웅은 오대수의 이빨을 뽑아내려 한다. 철웅은 미도(강혜정)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그 대가로 손이 잘린다(이것에는 또한 오대수의 어떤 오해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크고도 근본적인 등가교환은 이 영화 그 자체이다. 즉 우리는 영화의 전체에 걸쳐서 오대수의 복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우진(유지태)의 복수이다. 그리고 그 복수란 자신(이우진)과 이수아(윤진서)의 관계와 동일하게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커다란 등가교환의 영화이고,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로 대치되는 영화이다. 오대수의 복수에서 이우진의 복수로 영화는 어느틈에 옮겨가고, 이우진과 이수아는 오대수와 미도로 슬그머니 대체된다. 어떻게 보면 <올드보이>는 모든 비밀이 담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달려오는 영화이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개연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저 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지금까지 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묻는다. 이 상자를 열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택하겠습니까. 이것을 열면 무엇인가를 보게 되지만, 그것을 본 대가는 당신이 치러야합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 어떠한 것의 부재를 거의 그것과 동일한 실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거의 정신병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병의 많은 징후 중 하나가 등가교환이지, 등가교환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이미 광기를 가지고 있었고(오대수의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이우진의 모습에서도 광기를 지우기란 힘들다), 이 영화 <올드보이>는 두 광기를 가진 사내들의 대결이다. 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물리적으로 갇혀있음으로서 생긴 광기가 오대수의 광기라면, 이우진의 정신적인 문제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의 정신적인 갇혀있음(고착)이다. 즉 그는 이수아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갇혀있고, 그것에서부터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둘다 무엇인가에 갇혀있고, 말 그대로의 '올드보이(즉 아주 오래된 소년들, 육체는 자랐지만 여전히 정신은 과거에 남아있는 소년)'들이다. 정신병이란 일종의 고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신병에 걸린 주체는 어떤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떤 순간, 그의 정신병이 촉발된 어떤 순간에 머물러 있다. 라캉의 이야기를 빌어서 말한다면, 정신병에 걸린 이들은 언어와 법의 세계인 상징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몸 이미지의 세계인 상상계, 혹은 몸의 리비도인 실재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건을 상징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재 그 자체를 망상으로, 거의 완전한 실재에 가까운 망상으로만 만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동생의 아이를 뱄다는 소문 속에 휩싸인 이수아가 실제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이것을 이우진은 "이우진의 성기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임신을 시켰다"고 표현한다). 그 망상과 상상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마법의 진실, 혹은 고통스러운 진실이 들어있는 보라색 상자가 온다. 그리고 질문이 반복된다(그러나 조금 바꿔보자). 이 상자를 연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하나는 주체가 상징계로 나아갈 길은 애초에 완전히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는 징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법과 언어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법이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법의 흔적 자체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사설감옥이 존재하고, 이우진이나 오대수가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은 거의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 더욱 막혀있는 것은 언어의 세계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오대수는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리고 그 대가로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물론 이 자체도 일종의 등가교환이다). 사건은 언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대수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서 징벌된다. 그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올드보이>는 조금 색다른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아파트의 옥상에서 오대수는 자살하려는 남자(오광록)의 넥타이를 잡고 있고, 남자는 울먹이면서 말하다. "말투도 X같고, 당신 도대체 누구야, 씨발..." 그리고 오대수는 느리게 말한다. "내 이름은..." 그리고 이 때 플래시백되어, 경찰서에서 술이 떡이 된채로 '오.대.수.'라고 답하는(그리고 '오늘만 대충 수습'한다는 그 유명한 설명과 함께) 장면으로 넘어간다.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 첫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대수의 사설감옥에서의 고행이 끝난 후 이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는 다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오대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를 나서고 있고, 그 뒤로 남자의 시체가 차 위로 떨어진다. 이 남자는 오대수가 살려주려 했음에도 왜 자살을 결국 감행한 것일까. 물론 오대수는 이 죽음에 물리적인 책임이 없다. 오대수가 어떤 위해를 가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신 다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대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옥상에서의 장면은 조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짧게 구성되어 있는 시간과 달리, 오대수와 남자는 꽤 길게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오대수의 대사가 있고, 커팅 된 후, 아 그렇군요, 그럼 내 얘기를 할께요,라는 남자의 대사가 이어진다. 즉 우리가 보지못한 커팅된 이 사이에는 오대수의 긴 자신의 이야기(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으므로 생략된)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15년간이나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오대수는 그 말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특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이것만 보아도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막 자신의 이야기를 남자는 하려고 하는데, 오대수는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 즉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공감, 혹은 동정의 능력의 결여되어 있다. 공감이나 동정의 하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물론 중요한 것은 이는 공감이나 동정의 수많은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들으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가 마지막 혀를 자르는 것은 이우진의 사건에 대한 징벌이면서, 동시에 이 남자에 대한 죽음에 대한 징벌은 아닐까. 그가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어쩌면 이 남자는 뛰어내리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렇게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혀를 자름으로써 말하지 않고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며 언어의 세계는 근본에서부터 거부된다(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에 대해 또 한번 징벌을 받기는 한다.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자).

두 가지 중의 다른 나머지 하나는 그 이후 주체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바로 앞의 이야기, 즉 오대수가 말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관련되어 있다. 전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올드보이>의 마지막에서 이우진은 참 잔혹해보인다. 그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심장이 리모컨으로도 끌 수 있다며, 버튼을 누르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오대수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 때 쓰러지는 것은 이우진이 아니라 오대수다. 왜냐하면 그 버튼은 이우진의 심장을 폭파시키는 버튼이 아니라, 오디오를 재생시키는 버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는 곧 오대수와 미도의 절정의 신음소리로 가득찬다(그리고 이때 이우진은 당신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즉 이 마지막에서 입을 잃고 귀만 남은 오대수가 가장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가득한 리비도이다. 상상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내던진 것은 리비도로 가득찬 실재계, 혹은 리비도 그 자체였다. 즉 이우진은 아니 박찬욱은 상상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체에게 상징계를 주는 대신에 실재계를 선물할 정도로 잔혹하다. 그렇다면 이 주체에게는 그 육체를 파괴시키는 일만이 남은 것일까. 즉 죽음으로 리비도만 남은 육체를 끝내는 것만이 남은 것일까. 박찬욱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반복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자살하려는 남자가 하고, 다른 한 번은 오대수 자신이 한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살하려는 남자는 처음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고, 중간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면, 혹은 어떤 대사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그 장면이 중요하다는 뜻이고,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박찬욱의 말이고,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짐승만도 못한'보다 '살 권리'에 찍혀있다. 이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제시되는 말이 있다면 다음의 이 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성경 구약 '잠언' 6장 4절이라고 소개되며, 그것은 오대수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찾는 주요단서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잠언' 6장 4절이 아니라, 6장 5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래의 6장 4절의 내용이다(나는 물론 박찬욱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수라고 보지만, 실수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호사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또 공교롭게도 그다음 6장 6절부터는 개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개미에 대한 비유와 맞물린다는 점이 또 재미있다. 그 이야기는 있다가 하자). '잠언'의 6장 4절은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이다.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고,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라는 것, 이는 '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살 권리'의 다른 말이다. 즉 스스로 구원하라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벗어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오대수가 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결국 정신분열이다. 비밀을 아는 몬스터와 비밀을 모르는 오대수로 나뉜다는 이 마지막은 정신분열의 일종의 비유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 박찬욱의 복수연작의 두 번째 단계이다(그러므로 사실 마지막 오대수가 몬스터인지 오대수인지를 묻는 것은 주체를 두 번 죽이는 외설적인 질문이다). 복수연작의 첫 단계(<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두 번째 단계에서는 비록 정신분열을 스스로 선택했을지언정, 오대수는 살아남았다(즉 박찬욱의 복수 연작에서 가장 양상이 다른 것은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위치이다. 물론 그것을 일종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박찬욱의 대답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망상을 부서뜨리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이 때로는 삶을 유지시키는 기제가 되고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신의학의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다(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박찬욱의 후일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정신병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 지젝에 따르면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 즉 정신병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정신병자란 바로 상징적 질서에 의해 속지않는 주체이다." - <삐딱하게 보기> p.162. 그리고 이는 법과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의 길을 애초에 막아놓은 박찬욱의 선택이 그렇게 기만적이거나 가혹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상징적 질서들이 벌이는 속임수들은 그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에게는 상징적인 질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전에 이야기한 동정이나 공감과 같은 것들이고 그것은 사실 상징적 질서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금자씨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덧.
약간 반농담삼아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올드보이>는 동시에 개미형 인간과 거미형 인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설감옥에서 개미에 대한 환상을 보는 오대수, 그리고 지하철에서 커다란 개미의 환상을 보는 미도가 개미형이라면, 오랫동안 덫을 놓고(15년간이나 이우진은 기다렸다)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우진은 거미형이다. 이는 또한 <복수는 나의 것>과 교묘하게 연결되는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개미형이 류(신하균)라면 거미형은 동진(송강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영미(배두나)가 류에게 "개미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으며, 동진이 딸의 환영, 혹은 실재를 만나게 되는 장면 직전에는 동진 집의 텔레비전에서 거미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고 있다. 물론 그가 전기충격기를 문의 손잡이에 연결시켜 놓고 류의 집에서 자면서 류를 기다리는 장면은 거미의 사냥방식이다. 그렇다면 개미형 인간들이 거미형 인간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개미가 아니라 '개미'라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떼지어 다니는 개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개미는 소도 무너뜨린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아니 개미는 사실 자신이 하나의 몸뚱이에서 자라난 두 머리임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타인이 되어보아야 한다.
 
여담을 하나 붙여두자면, 아주 예전에 어쩌다 이 영화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가 올드보이에 나온 개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길래, 농담으로 오대수는 개미형 인간이고, 그것은 주식시장의 개미투자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줬다. 영화에 보면 이우진이 아주 돈많은 사람으로 뭘 팔고 어쩌고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마디로 거대한 기업투자자가 개미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잡아먹는 이야기라고 말이다(실제로 오대수가 영화내내 농락당하지 않는가). 그는 놀랍게도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치였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개드립에 죄송한 마음을 전할 뿐이다(하지만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개드립을...).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3-05-1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투브 음악 하나 링크시키려다 날려먹고 다시 올림..ㅠㅠ

올리려던 음악은...OST에 있는 The Searchers
'올드보이'는 사실 영화보다 음악이 더 좋음..


넙치 2013-05-1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 영화들 다시 보기 중 이신가 봅니다.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셨네요..

맥거핀 2013-05-14 13:16   좋아요 0 | URL
사실 이미 다 다시보기는 했어요. 글로 쓰는 게 오래걸릴뿐이죠.
박찬욱 영화들은 다시 봐도 또 새롭게 보이는 지점들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Mephistopheles 2013-05-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마지막 "개드립"에 빵 터져버렸습니다....ㅋㅋㅋ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이 복수 시리즈를 4부나 5부까지 만들어 사회의 제도적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영리한 분이다 보니 그 부분만큼은 살짝 비켜나가는 것 같더군요.)

맥거핀 2013-05-14 13:18   좋아요 0 | URL
아..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 지배자의 복수란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올드보이는 다시 봤더니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잔혹하더군요. 물리적인 잔혹함보다는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게 이정도였나 싶은 영화였습니다.

Shining 2013-05-1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개드립... 맥거핀님은 술김에 그런 생각이 나오나요? 아님 혹시 미리 준비해둔...-_-
이 기세라면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서도 글을 쓰실 것 같군요. 좋아요 좋아-_-*

덧)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혼인관계란 것을 알았을 때 무지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고 개츠비 역으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마이클 패스빈더(패스밴더,가 맞나요?), 피터 사스가드 둘 다 이미 캐리 멀리건과 연기한 적이 있군요. <셰임>과 <언에듀케이션>.

민머리라... 브루스 윌리스, 섹시하지 않나요?ㅎㅎㅎ

동생이 <아이언맨 3>를 보고 최고의 오락영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 어찌고 하길래 뭬야?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어, 라면서 싸울 뻔 했습니다... <아이언맨3> 안 봤지만 제깟게(ㅋㅋ)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다, 고 저는 믿습니다...

맥거핀 2013-05-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일 1개드립을 실천중입니다. 네..아마도 다음번의 글은 <친절한 금자씨>가 될 것 같군요. 그 전에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다른 것을 쓰겠지만..

민머리..하기는 민머리와 뭐 정력의 관계 같을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죠.ㅎ 사실 브루스 윌리스는 별로 섹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이나 <셰임> 두 개 다 본 적이 없어요.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부부라는 것도 Shining님에 의해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아이언맨이 다크나이트에 비견될 정돈가요. 뭐 둘이 진짜로 싸우면 아이언맨이 배트맨을 이길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오락적 완성도로 봤을때도 다크나이트에 한 표를 던집니다. Shining님이 맞아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3-05-2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샤이닝님 답글이 독자적 댓글로 버려져있어요(대단한 발견!).
그런데 강혜정은 왜 이 영화 이후로는 더 나아가는 배우가 되지 못했을까요.
미녀는 괴로워 이후 에이급 스타가 된 김아중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김아중보다는 강혜정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

오랜만에 와서 댓글 참 쓸데없네요, 맥거핀님. 미..미..미안..

맥거핀 2013-05-23 12:06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댓글 달고 며칠 뒤에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놔뒀어요.ㅋㅋ 강혜정은 좀 아쉽지요, 괴물 같은 배우가 나온 줄로 알았는데, 여러가지 논쟁들(?)에 휘말려 배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아중씨는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아이리시스님도 살아있군요! 생존 신고를 좀 하세요.ㅋ

2013-05-23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2012.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타비아니 형제는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관객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연극의 절정을 지나고 마무리 단계에 이른 장면이다. 시저를 암살한 모의에 동참한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결국 브루투스는 죽고 연극은 관객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끝나고 배우들은 성공에 기뻐하며, 퇴장한 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때 화면은 흑백으로 전환되고 시간은 6개월 전으로 플래시백 된다. 이 배우들이 '줄리어스 시저'를 처음 시작하던 그 때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연극의 제작발표에서부터 배우들의 오디션, 그들의 연습과정을 차례대로 짚어가기 시작한다.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것은 이 때부터다. 영화가 선택하는 것은 이들의 연습과정을 극의 순서에 맞추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들은 이들의 연습을 보면서, 동시에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을 본다. 이들의 연습은 브루투스 일파의 시저 암살모의에서부터, 점쟁이의 시저 운명에 대한 암시, 시저의 암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과 같은 순서로 우리들에게 보여지며, 이로써 우리는 이들의 연습을 볼 뿐만이 아니라,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한편의 연극을 이 영화를 통해서 오롯하게 감상한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연습과정만을 보여줌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 이들이 침대에서 (자신들이 '천장관찰자'라며)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이 영화를 한편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생각해본다면 시저의 암살 장면 전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다. 즉 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실제상황(물론 이는 짜여진 '실제'이다)'을 마치 거사의 실행 직전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브루투스 일파의 모습처럼 비춰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연날 철문이 열리며 관객들이 우루루 들어오는 모습이 브루투스 세력과 안토니우스 세력의 전투 장면의 전초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나, 무대를 새로 제작하는 동시에 새로운 배우가 이 연극에 투입된다고 하면서 그가 옥타비아누스 역을 맡게 된다고 했을 때 생겨나는 효과들도 마찬가지이다(왜냐하면 '줄리어스 시저'라는 극의 내용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은 그 자체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면서 동시에 사태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연극은 동시에 재소자들의 교정교화의 일환으로 상영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배우들은 모두 조직폭력, 살인, 마약밀매 등으로 최소 15년에서 40년 이상을 선고받은 중범죄자들이며, 이들이 연습을 벌이고 있는 이 공간은 교도관의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교도소이다. 그러므로 이 연습은 단지 연습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들의 어떤 개인사들과 겹쳐지는데, 예를 들어 한 재소자는 연습을 하다말고 연극의 어떤 소도구로 기억하게 된 자신의 옛일을 생각하느라 연기를 이어가지 못한다. 즉 이들에게 이 연극을 하는 실질적인 중요한 문제는 관객에게 좋은 연극을 보여준다는 것보다도 이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자신 내부의 무엇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됨으로써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상연하는 연극이 바로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사실일 것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이유는 시저가 왕이 되려한다, 즉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되리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찾으려는 이들의 거사가 바로 자유가 없는 교도소 재소자들에 재연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이들이 벌이는 연극 '줄리어스 시저'는 단지 역사극이 아니라, 마치 이곳 현재의 이야기처럼 보이며, 이들은 단지 연기로서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이들 역사적인 인물이 빙의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가 죽은 시저의 시체를 광장에 데려다 놓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면, 창살에 갇힌 다른 재소자들을 마치 로마시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자유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를 묻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현재의 한 장면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이 오디션을 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오디션은 오랫동안 떨어져야만 하는 가족에게 자신의 신상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과 수사기관에서 강요에 의해 자신의 신상을 말해야 하는 상황, 두 가지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즉 이들은 나름의 슬픈 사연을 가진 개별의 인간일 수 있지만, 동시에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장면은 보여준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역할을 실제의 재소자들이 맡은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픽션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고(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다큐로만 보기는 힘들다. 이들 중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들이 교도소에서 연극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 보다 가까이 들어온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시작부에서, 연극의 마무리와 연극이 끝난 후 이들이 다시 하나하나 수감되는 장면을 보여준 후, 다시 6개월 전으로 돌아가서 이들의 6개월을 한편의 연극으로 보여지도록 한 다음에 연극이 끝나고 이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각자의 방에 수감되는 장면이 되풀이되며 끝난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서 두 번 보여지는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나고 마지막에 수감된 한 재소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하는 대사이다.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이제서야 감옥이 되었구나."

 

 

이 두 가지를 보면 타비아니 형제가 결국 우리에게 보여주려던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다. 즉 두 번이나 반복하여 보여지는 것이 이 영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저를 사랑했지만, 시저보다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브루투스의 자결, 즉 자유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난 후 각자의 방에 갇히는 이들 재소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마지막 재소자의 말로 반복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드디어 감옥으로 느껴진다는 그 말은 예술이라는 것에 담긴 자유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들은 연극이 마침내 끝났기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는 것일 뿐이지만, 연극을 통해서 브루투스가 되어 자유라는 것을 간절히 외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 그 자체에서 자유를 맛봤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들이 이곳에 갇혀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즉 타비아니 형제는 이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연습 자체를 하나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만들어 이 교도소라는 갑갑하고 막힌 공간을 로마의 거리, 로마의 광장으로 확장했지만, 이 마지막에 이르러 연극을 종결시켰고, 로마의 거리와 광장을 다시 교도소로 되돌려 놓았다. 그것에 담긴 의미를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 브루투스의 자결과 재소자들의 수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에 들어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메시지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연극적인 효과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연극은 관객을 정면으로 향하고 발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것은 꽤 특수한 경우이다), 이미 연극은 끝났고, 그들 앞에 남아있는 것은 우리 영화를 보는 관객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연극의 연습, 실제의 연극, 재소자들의 현실이라는 이 3중의 이야기가 우리 관객들에게 던지는 또 한겹의 메시지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이 '줄리어스 시저'의 결말 이후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죽였고, 그들은 그들의 희생으로 자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결국 이루어진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제정이었다. 즉 '줄리어스 시저'에는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 결국 황제의 즉위를 불러왔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며, 그것은 로마의 시민들이 결국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교도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관객들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기꺼이 위정자를, 아니 왕을 모시고 있으니까. 또한 우리는 여전히 예술을 모르고 그런 우리들에게도 각자의 작은 방은 각자의 감옥일 뿐이니까.

타비아니 형제의 이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77분의 미니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장치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다(물론 이 영화가 미니멀한 장치로만 전개되는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교도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도소라는 곳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은 필요없는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미니멀한 장치를 가진 이 곳이 거대한 로마의 거리, 광장처럼 보이는 것은 타비아니 형제의 마법이 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공간을 확장시켰던 타비아니 형제는 다시 기어이 그것을 좁은 방으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우리 관객들에게 각자의 좁은 방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다시 이 이야기를 교도소의 담장을 넘어 우리 각자의 현실로까지 재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좁은 방이 각자의 감옥임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을 알아야만 하고, 그제서야 우리는 그 제목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그 의미를 말이다. 우리의 '시저'는 누구입니까.


덧.
지난 금요일, 만료를 앞둔 롯데시네마 포인트를 사용하려했지만, 영화를 선택하기가 참 어려웠다. 예를 들어 롯데시네마 건대입구는 특별관 샤롯데와 아르떼관을 포함해 총 12개관이 있지만, 9개관에서는 <아이언맨>이 2개관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이 상영중이었고, 다른 모든 영화는 그 작은 아르떼관에 몰빵되어 있었다. 그렇게 온 국민이 그 철갑덩어리를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 무슨 흥행신기록이니 뭐니 하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참 난감하다.

나는 대신에 일산에서 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보았는데, 덕분에 좋은 영화도 보고, 일산의 밤거리도 구경하고, 갔다왔다하면서 장시간 독서도 했으니 롯데시네마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hining 2013-05-0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잡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휘리릭 읽고 지나갔는데 맥거핀님 보셨군요. 전 <장고>이후 영화관 근처에도 안 갔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볼 영화는 <위대한 개츠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이 한 군데에서라도 개봉하길 기다리는 마음_- 하아, 멀티플렉스의 물량공세는 질리고 지치군요. 아, 저 최근에 <화차>다시 읽고 영화(한국)도 봤습니다. 화차 페이퍼로 가서 댓글 달까요?(웃음)

덧)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읽기만 하고 다른 얘기만 하네요; 음, 배경을 바꾸셨군요! 라고 끝까지 다른 얘기......

맥거핀 2013-05-08 15:25   좋아요 0 | URL
날씨도 따스해지고 해서 산뜻하게 바꿔봤습니다. 괜찮나요?

저는 사실 바즈 루어만이 별로 취향도 아니고, 왠지 디카프리오 연기도 안봐도 알 것 같고(...), 너무 원작의 감동을 알아야, 어쩌구 하는 책 광고도 왠지 비호감(...)이어서 아마도 보러가게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요새는 멀티플렉스에 가면 아이언맨 밖에 없는 게 너무 짜증이 나서, 막상 개봉하면 바즈루어만이든 뭐든간에 볼 것 같기도 합니다만..아무튼 요즘의 멀티플렉스는 도를 넘었어요. 많이 팔리는 영화, 많이 거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그것도 정도와 상식이란 게 있죠. 최근에 멀티플렉스에서 한 영화가 일정비율을 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준비중이라 여러모로 찬반양론에 말이 많은 걸로 아는데, 법 들이대기 전에 알아서 상식을 가동해주면 참 좋을텐데 말이죠.

Shining 2013-05-10 11:35   좋아요 0 | URL
산뜻하기도 하고 왠지 좀 더 감성적인 느낌이에요. 말랑말랑?(웃음)

저도 바즈 루어만은 취향이 아니고 디카프리오 캐스팅에는 동의할 수가 없어요(...내가 뭔데 여전히ㅋ). 닉 캐러웨이 역의 토비 맥과이어와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는 듣는 순간부터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디카프리오가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항상 예상 가능한 연기를 하는 느낌이에요. 이런 얼굴로 화를 내겠지, 이렇게 윽박지를거야, 이런 식으로 절망하겠군, 등등의 예상 가능한? (제가 언젠가도 이렇게 똑같이 말했죠?큭큭) 아내가 죽은 남자 3부작(레볼루셔너리 로드 - 셔터 아일랜드 - 인셉션) 보고 짜증이 확 나더라는_- 마찬가지로 이 얘기도 전에 했던 것 같은데 저는 개츠비 이미지를 (개인적으로는) 마이클 패스빈더나 피터 사스가드에 가장 가깝게 상상했거든요(애먼 이야긴데, 마이클 패스빈더 왜 이렇게 섹시하죠....쿡쿡).

아이언맨, 돌풍이라는데 저는 2보고 너무 실망해서_- 꿋꿋이 안 가렵니다.

상식, 상식 없는 사회로는 대한민국이 최고죠. 하아.

맥거핀 2013-05-10 22:14   좋아요 0 | URL
저도 디카프리오 연기가 어째 비스무레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캐릭터들이 비슷한 걸까 보면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은데, 뭐랄까 배우가 캐릭터를 잡아먹는달까요. 디카프리오가 주연인 'J. 에드가' 같은 영화를 봐도요, 무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의 영화인데, 이스트우드의 색깔은 별로 안느껴지고, 이건 뭐 디카프리오의 영화이군 하는 생각만 들어요. 캐릭터가 인상에 많이 남긴 하는데, 남는 건 캐릭터밖에 없으니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혹은 이걸 의도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개츠비 원작을 보지 않아서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네요. 마이클 패스빈더라면 매끈하지만 뭔가 너무 매끄러워서 좀 이질적인 느낌이 있죠. 그리고 피터 사스가드는 대머리 아저씨 아닙니까?! 하긴 대머리도 섹시할 수 있다는 것은 일찌기 키퍼 서덜랜드에 느꼈습니다만...

아이언맨은 나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왠지 망했음..싶은 것이..-_- 물론 망하지 않고 잘 나가고 있습니다만...
 
복수는 나의 것 (2disc)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습니다.)



2002년 3월 개봉한 박찬욱의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연작'의 서두이며, 박찬욱 특유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영화 그 자체로 보면, 이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중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뉘어지는 듯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중첩이다. 일은 계속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한 가지 사건은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을 불러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 중간의 한 가지 사건, 즉 아이의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아이의 죽음이 불러오는 죽음의 연쇄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반부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이 <복수는 나의 것>의 플롯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먼저 전반부의 사건을 짚어보자.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죽음, 그러니까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어린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사건은 매우 발생할 확률이 낮았다. 아니 어떻게보면 낮다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의 죽음은 다음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했다. 1. 신장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아픈 누나를 둔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사기당해 가지고 있던 돈 전부와 자신의 신장을 털린다. 2. 그런데 그 때 누나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증자가 나타난다. 3. 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배두나)와 함께 유괴를 계획한다. 4. 원래 유괴하려던 아이는 다른 아이였지만, 자신들이 노출될까 두려웠던 류와 영미는 유괴의 대상을 그 아이의 친구, 즉 동진의 딸로 바꾼다. 5. 이때 자신 때문에 유괴를 저질렀음을 누나가 우연히 알게 된다. 6. 누나가 죄책감에 자살한다. 7. 누나를 어릴 때 같이 놀던 곳에 묻으려한다. 8. 그 누나를 묻으러가면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간다. 9. 아이는 류가 누나를 묻을 동안 차에서 자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를 뺏으려던 동네 지체장애인에 의해 깨어난다. 10. 류를 찾으러 차 밖으러 나온 아이는 실수로 강물에 빠진다. 11.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만 류는 청각장애인이라 듣지 못한다. 12.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류는 아이를 구하려했지만, 물이 자신의 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들 엄두를 못낸다. 그러나 이는 류의 착각이었다(어릴 때 이후 그곳에 가보지 못한 류는 물의 깊이보다 훨씬 자신의 키가 자랐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1. 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2. 기증자가 그 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3. 유괴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4. 원래의 아이가 유괴되었더라면 5. 누나가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6. 누나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7. 누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했다면 8.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9. 아이가 차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10. 아이가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11. 류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12. 그리고 류가 자신의 착각을 빨리 알았차렸더라면, 적어도 동진의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건은 무려 12개의 우연이, 혹은 12개의 운명이, 아니면 12개의 오해, 오인, 혹은 잘못된 선택이 중첩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니 박찬욱의 잔인한 장난으로 사건은 발생했고, 동진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 즉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뚝뚝 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환영 혹은 실재(아이가 나타난 뒷날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환영이 실재였다는 보장은 없다)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로 인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류와 영미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온 전기고문기를 손에 든 동진을 보고, 장기밀매업자는 자신을 찾아온 가위를 든 류를 보고, 다시 동진은 칼과 성명서를 손에 쥔 4명의 사내들, 즉 영미의 복수를 하러 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본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양상, 혹은 복수의 연쇄를 본다. 동진은 류에게 복수하고,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영미는 다시 동진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복수는 이것이 전부인 것일까? 어쩌면 동진이 류에게가 아니라, 류가 동진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동진의 딸의 죽음을 류의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류가 동진의 딸을 죽게 만든 것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실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으며(이 논리는 나중에 <친절한 금자씨>에 그대로 반복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류와 영미는 돈을 받으면 아이를 얌전히 돌려줄 생각이었다(혹은 받지 못했어도 돌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12개의 오해 또는 실수를 재론할 이유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났을 때이다. 이들은 스토리 상으로는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시점은 참으로 수상쩍다. 이들은 동진이 류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후, 아이의 보호자임을 부인한 후에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이란 동진의 딸이 아니라, 동진이 병원에 데리고 간, 자신이 해고하여 죽은 노동자의 아이다.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내팽개친 후에야 어디에선가 유예되었던 그들이 나타난다. 즉 스토리로 보았을 때 이들이 여기에 동진을 죽이러 나타나는 것은 뜬금없지만, 플롯으로 보았을 때, 즉 아이의 보호자를 거부한 후에 나타나는 이들은 유예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진이 노동자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어디에선가 불려나와 이 자리에 섰다. 아이의 보호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진에게 걸려왔던 전화는 동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노동자의 아이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물론 그 기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그 전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동진은 영화에서 3번의 배를 칼로 가르는 장면을 본다. 첫 번째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배를 칼로 자해하는 장면을 보고, 두 번째에는 자신의 딸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고, 세 번째에는 류 누나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에는 놀라지만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차마 쳐다보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마치 물건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다. 마지막 그의 배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성명서가 꽂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무심한 시선, 타인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는 이 무심한 시선, 자신의 딸의 배를 가르는 이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던 그 시선과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미가 중간에 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 머리를 두 개 가졌으니까 그만큼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을 잘랐느냐고 물었던 류의 멍청한 질문으로 이 장면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이제 그는 다시는 머리가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 동진과 류를 연상시킨다. 동진과 류는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사회에 공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류와 동진은 처음에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이 들려오는 류의 집과 전자동으로 커튼이 쳐지는 동진의 집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류의 집에 온 아이는 묻는다. "아빠 후배(류는 자신을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그런 그들이 어느 틈에 점점 비슷해지다가, 중후반부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추적하고, 동진이 류를 뒤쫓을 때 보면 거의 같아진다(이 때 박찬욱은 <스토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교차편집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 둘은 모두 동일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진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는 형사에게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류에게는 그의 목숨을 거둬가기 전에 네(류)가 착한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나름 착한 사람들이고, 착한 두 머리이다. 그러나 착한 그들은 왜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착한 그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한글제목과 조금 뉘앙스가 다른데, 'Sympathy for Mr.Vengeance'이다. 어쩌면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sympathy(동정)라는 것. sympathy의 어원은 'syn(같이 혹은 함께)+pathy(고통, 치료법)'이다. 즉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동정(同情)'이라는 한자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음 혹은 뜻, 생각 같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위치에 진정으로 섰을 때만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타인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님을, 혹은 한 몸뚱아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이어가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란 어쩌면 復讐가 아니라 複首, 즉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가 하나가 아닌 두 개란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복수는 나의 것'이란 두 개의 머리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은 腹水이거나 말이다. 타인의 배에 들어찬 물을 보는 것. 그 물을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는 것, 동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지 사물로만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배에 꽂힌 성명서를 내려다보려고 낑낑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 sympathy 혹은 동정은 동진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류나 영미에게도 그렇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루워커 류(이 영화에서의 류의 노동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고, 전반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거의 지옥과 같은 소음이 울려퍼지는 공장의 풍경과 밤샘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공장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남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 그리고 거의 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거리를 걷는 류의 모습)와 붉은색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영미(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구호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주로 외치는 두 개의 구호인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는 학생운동의 두 가지 세력의 각각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NL의 미군축출과 PD의 재벌해체)가 결국 선택한 것이 단지 유괴라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속성과 같은 것이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나쁜 유괴와 착한 유괴가 있으며, 나쁜 유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며, 좋은 유괴는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아이와 돈은 동일하게 교환될 가치가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교환의 표면적인 원칙은 '등가'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밤샘근무는 보수(돈)와 교환되고, 이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교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비중이 같은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애초에 그것들이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일까.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박찬욱의 복수 연작과 후속작들은 등가교환을 매번 시도한다. <올드보이>나 <박쥐> 등에서 나오는 등가교환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만 예를 찾아보자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려 찾아간 류는 자신의 신장을 탈취해간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똑같이 신장을 탈취하고, 자신의 딸이 익사했음을 아는 동진은 류를 동일하게 익사시키려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세계이고(이 <복수는 나의 것>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공권력을 해체한 후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설감옥이 등장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사설재판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사건의 해결을 동진에게 맡겨버리는데, 따라서 스토리로 보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즉 서사적으로 구멍이 생긴다), 거의 정신병적일 정도의 등가교환의 시도이다(예를 들어 일부 정신병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동일한 물건, 혹은 신체의 훼손은 반드시 동일하게 보상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우 실제 등가교환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교환되는 것의 가치가 달라서가 아니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은 동시에 잉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 잉여들이 어떠한 것을 낳는지는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가. 동진이나 류는 복수나 유괴로 동일한 교환을 시도했지만, 복수는 잉여를 낳았고, 잉여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돌고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해했다.) 밤샘근무라는 노동과 보수는 혹 교환이 가능할 수가 있더라도(물론 이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이의 생명, 혹은 아이의 존재와 돈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도 그게 가능하다고 금자(이영애)를 속였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요트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그것은 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혹은 당대의 학생운동에 대한 허상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샌델의 일부 논의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점점 무엇이든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환,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 그 환상은 점점 커지고 거의 정신병적이 된다. 그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은 박찬욱의 다음다음다음다음 영화 <박쥐>에서 부서질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먼저 몇 개의 죽음들, 혹은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들을 만나야만 한다.



덧.
그리고 박찬욱의 계단이나, 거미와 개미 같은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 영화가 개봉한 10년 전 그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누나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한다. 그 때 누나는 "너는 이런 영화가 좋니?"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3-04-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미 본 영화라는 이유로 다시보기가 안되고 있는 넘버원의 영화죠. 저는 데이트하면서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 영화가 그렇고, 동생이랑은 극장 안가고 국밥집이나 갈비집으로만. 누나랑 보셨다기에!

제동생은 영화를 정말 많이 보는데 그다지 계보는 없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씩 얘기하는거보면 또 계보가 있는것 같고. 걔는 좋으면 그냥 좋은거더라고요. 많이 보면 확실히 보는 눈은 높아지는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 통으로 기억하는 편인데, 그래서 뭐가 좋았니라고 물으면 컷이나 씬을 얘기못하고, 걔는 잘하더라고요. 맥거핀님처럼.

저는 영화에서 늘 부조리를 찾아서 그걸 현실에 대비시키려는 버릇이 있고, 그 부조리를 깨부수려는 노력을 하는 직업을 갖고싶었던 것 같아요. 예를들면, 늘 말했던 형사,판사,국제공무원같은. 자유를 엄청 갈구하면서 내 자유 대신 남의 자유를 찾아주고싶은 이 부조리한 마음가짐은 또 뭐란 말입니까!

1등댓글안쓰려고 했건만 :)

맥거핀 2013-04-30 14:25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나무를 보건, 숲을 보건 좋은 법이죠. 영화라는 건 사실 대부분 영화 그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그 이후에 기억남는 건 다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날 영화를 보고난 후 주고받은 얘기라던가, 보고나와서 먹었던 음식의 맛이라던가, 짜증나게 했던 뒷자리 사람이라던가..뭐 그런거요. 그런 것과 나중에 영화의 내용과 짬뽕되어 그 총체로 기억하는 거죠. 집에서 보는 영화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무엇을 보고나면 기억에 잘 안남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최근 집에서 DVD로 다시 봤지만요.)

근데 이 영화는 데이트용 영화로는 아주 최악에 가까운데 말이죠..좀 다른 얘긴데 예전에 설날인가, 추석 때 온가족이 모여 앉아있는데 특선영화라고 <올드보이>를 하더군요. 저는 편성담당자 저 인간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싶었지만, 부모님이 유명한 영화라고 기대감을 가지고 보시기에 잠자코 있었죠. 역시나 한 중반부 넘어갈 때쯤에 어른들은 이거 뭐 이상한 영화네..그러면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셨고, 저만 남아서 끝까지 봤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ㅋ

부조리에 부조리를 더하면 조리가 되죠. 아이리시스님 우리 1등 댓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잘 살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 멋진데요. 전혀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긁어주셨습니다.
전 그동안 맥거핀 님을 여성ㅇ라고 생각하다가 누나 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영화본지 오래도어서 가물가물하네요...ㅎㅎ. ㅎ여튼 박찬욱의 최고걸작은 늘 복수는 나의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맥거핀 2013-04-30 14:31   좋아요 0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의 글들이야말로 저도 읽으면서 가끔 오호..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좋더군요.

아..근데요. 누나라고 부른다고 해서 남성이라는 법은 없지요(옛날에 여성들이 형이라고 부르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남성들이 언니라고 부르고..). 물론 여자도 군복무를 할 수 있고요. ㅋ

Mephistopheles 2013-04-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직접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잔인한 상황을 묘사해주는 장면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송강호의 전기고문에 소변배출하는 배두나의 모습이나 마지막 송강호가 신하균을 죽인 후 강가(?)에 널브러진 신하균의 옷과 피범벅이 된 그리 크지않은 보따리 묶음(토막)등등은 뭐랄까 직접적인 고어의 느낌보다 강렬했어요.

맥거핀 2013-04-30 14:3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올드보이>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죠. 인간은 상상함으로써 비겁해진다고, 상상하지 않으면 졸라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죠. 박찬욱 감독이 뭐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류의 감독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들에서 상상이나 뉘앙스로 조금 더 잔인하게 느끼게 하는 면이 있죠.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아무래도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나고,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효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넙치 2013-04-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에 또렷이 남은 건 그 영화 개봉 당시 분위기, 그리고 영화를 봤던 때가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다는 것 밖에 없네요.
맥거핀님 글 읽고 난 후 제가 썼던 리뷰를 봐도 생경하기만..;;;

맥거핀 2013-04-30 14:36   좋아요 0 | URL
앞으로 어떤 화양연화가 또 올지 모르죠.^^ 예전에 쓰셨다는 리뷰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저도 예전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기억과 이번에 새로본 영화의 느낌이 상당히 달랐어요. 아무래도 영화라는 건 보는 이가 나머지 퍼즐조각을 맞추는 모양입니다.

Shining 2013-04-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읽었는데 댓글은 이제 남겨요. 저는 가끔 실은 종종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저랑 맥거핀님은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인데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사고의 회로도가 다르다는 느낌? 뭔가를 바라보는 투영도나 설계도, 농도, 질감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요.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맥거핀님의 글을 읽는게 즐겁다가 좌절하고 좌절하다 자극받고. 네, 그래서, 좋다구요 :)

저도 가끔 저 영화 짱이야, 라면서 혼자 TV 차지하고 같이 영화 보다가 가족들이 대개 짜증내거나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이건 슬픈 이야기).

맥거핀 2013-05-02 01:44   좋아요 0 | URL
아..그래서 말입니다. 아마 예전에도 그런 얘기한 것 같은데, 저도 Shining님의 어떤 글을 보면서 이건 못써, 이건 절대 나는 이렇게는 쓸 수 없어 하는 글들이 있어요. 그건 좋은 거겠죠. 네..아마도 좋은 걸 겁니다.

저도 가족들과는 거의 영화를 같이 안보게 되는 것 같아요. TV영화들도 거의 같이 본 적이 없는 것 같고...그리고 보다가 민망해질 것 같은 영화는 알아서 도망가구요. 뭐 특히 박찬욱 감독 영화라면 가족이나 애인과 같이 관람은 안하는 것이...

cyrus 2013-04-3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영화 장면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수월하게 잘 풀어내시는거 같아요. 저도 가끔 영화 한 편 보고나서 나름 영화에 대한 생각을 글로 끄적거리고 싶은데 책 읽고 글 쓰는 것과는 좀 느낌이 달랐어요. 책은 기억 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찾아서 볼 수 있는데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영화 서평은 영화 한 편을 한 번 봤다고해서 쓰는게 아니라 여러 편 보다가 그게 여러 가지 생각이 모아서 한 편의 글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맥거핀님은 영화 서평을 이렇게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맥거핀 2013-05-02 01: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른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을 영화글에다가 그냥 씁니다. 그러고 마치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처럼 구라를..^^

근데 DVD로 영화를 보다보니까 조금 달라지는 면이 있더군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DVD 같은 경우에는 보다가 끊고 자꾸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싶어져요. 그 충동을 참는 게 힘듭니다만, 생각해보니 왜 참아야하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우끼 2016-01-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 `복수는 나의 것` 영화를 보고, 이 리뷰를 보니, 정말 멋지네요.. 맥거핀님 글 잘쓰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새삼 감탄했습니다. 이 리뷰를 쓰시는 데 쓰인 시간과 노고를 가늠해보니.. 이 글이 더 값지게 보입니다. 복수라는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신 부분이라든가, 두 머리에 대한 우화와 연결지은 류와 동진의 관계, 자본주의의 위선적인 등가교환 신화에 대한 지적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 속에 감독의 작위적인 메세지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군요.. 인간의 괴물을 여실하게 드러내면서도 감독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괴물을 비판하는 방법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괴물로 살고 싶지 않은데, 겨우 허덕이며 위선을 베푸는 게 전부인 요즘, 어떤 삶을 살아야 괴물을 마주하면서도, 괴물로 남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하던 지점에서, 이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우끼님. 댓글로 얘기나누는 건 처음이죠? 제 글 읽어주시는 거 알고 있었는데,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단 칭찬 먼저 감사드리구요.

박찬욱 감독은 제가 참 좋아하는 감독이라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담아내기도 하고, 영화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죠. 아무래도 영화가 좋아야(물론 책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만큼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할 말이 더 많아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제 글은 물론 그 중에 일부만 다룬 것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분명히 다층적으로 볼만한 내용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 느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부조리와 폭력이 만연하는 이 사회에서 아마도 대부분 자신들만의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작은 투쟁을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요. 매일 또 지면서 말이죠. 예전에 누군가 한 말대로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는 법이니...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오멸, 2012

 

 

 

최근 어떤 글에서 허문영은 세르쥬 다네의 말을 빌려 세상의 영화를 역사적 영화와 지리적 영화로 구분지었다. 허문영의 설명에 따르면 역사적 영화는 사건의 영화이고, 지리적 영화는 장소의 영화이며, 예를 들어 서부극이 미국의 건국신화라는 설명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서부극이 역사적 영화라기보다 지리적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구분법을 영화 <지슬>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지슬>은 역사적 영화인가, 지리적 영화인가.

일단 영화 <지슬>은 역사적인 요소와 지리적인 요소를 둘다 가지고 있다. <지슬>은 흔히 4.3사건이라 불리는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정과 우리군에 의해 저질러진 제주도민 학살사건, 혹은 그에 맞선 민중들의 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동시에 이는 제주도라는 좁고 한정된 고유의 지역성을 크게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지슬>이 역사적 영화이자 지리적 영화라고 답한다면 굳이 이 구분법을 끌고 들어온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슬>은 지리적 영화다. 이는 역사적인 이 사건이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동시에 이 영화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감독 이하 제주도 사람들이 만든 제주도 말로 진행되는 영화라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저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있지만, 그래서 4.3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도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이 영화에서 지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제주도 방언으로 진행되고, 표준어 자막이 계속 밑에 따라붙는 특이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제주도를 지운다면, 즉 예를 들어 이 배우들에게 표준어로 연기하도록 했다면, 이 영화는 어떤 형태를 띄었을까, 아니 이 영화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거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N사이트 같은데서의 20자 평에는 지리는 없고 역사만 있다. 아니 역사는 없고, 이념만 있다. 그것도 이상한 이념만 있다. 지독한 인간들.)

앞에서 허문영의 구분을 따르자면, 그러므로 이는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장소의 영화이고, 그러므로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이어지는 일련의 장소들이고, 장소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집과 이들이 있는 동굴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 바닥에 나뒹구는 제기(祭器)들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 보여주듯이 군인들이 머물고 있는 이 집은 제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집이다. 그리고 군인들은 태연하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시체 혹은 원혼의 옆에서 태연하게 과일을(아마도 제사상에 올라가 있었을 과일을) 깎아서 먹는다. 시체와 원혼과 군인들이 함께 머무는 집. 그래서 이 집은 한없이 으스스하고, 그들이 설혹 귀신들린 행동을 해도(예를 들어 이 부대의 지휘관인 김상사는 마약에 취해 흙바닥에서 헤엄를 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때로 의도적으로 인물의 포커스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종종 흐릿하게 보이도록 한다. 즉 이들을 일종의 영화적인 유령으로 만든다.

반면 이들이 숨어 있는 동굴은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신위-신묘-음복-소지라는 전통 제사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음복을 하고(무동 할머니가 죽으면서 남긴 감자를 나누어 먹고), 소지를 한다(군인들이 동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날려보내는 매운 연기는 소지의 연기이고, 동시에 울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실제의 제사에서 소지를 하는 것, 그러니까 죽은 이를 적은 신위를 불사르는 것은 동시에 울기 위함이 아닐까). 물론 이는 앞서의 으스스한 집과 다르게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곳에서 감자를 나누어 먹고, 서로를 걱정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을 북돋운다. 그것은 감독이 이 좁은 동굴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 동굴에서 인물들은 길게 늘어 앉아있고, 카메라는 그들을 각각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모두 꽉 들어차도록 잡으며, 그들 모두에게 포커스를 배분한다(딥포커스). 그것을 그들이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대화하는 씬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때는 대화를 이루어내는 몇 개의 무리를 잡되, 그 대화의 상대자가 매번 바뀌며, 앉는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고, 카메라는 마치 끝없이 계속 패닝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 때의 카메라는 이 좁은 동굴을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마법을 부리고 있으며, 그것은 이 좁은 공간에 가득 담겨진 그들의 공동체성, 그 무한의 힘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의 비교를 변성찬은 영화와 연극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것 역시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변성찬의 구분에 따르면 군인들의 장면은 영화적인 장면들이고, 주민들의 동굴에서의 장면은 연극적인 장면들이다. 기법상으로 보면 이는 영화적인 기법을 주로 활용한 군인들의 장면과 연극적인 기법을 많이 활용한 주민들의 장면이라는 대비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어떤 죽음과 관련한 은유들(유령들이 뛰노는 스크린과 죽어 있는 관객들)과 연극이라는 매체의 어떤 살아있음의 대비로 볼 수도 있다. 즉 <지슬>은 하나의 제의이자 연극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 제의이자 연극은 죽은 영화 속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우리 관객들)이 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의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의는 온전히 죽은 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죽은 혼령을 달램으로써 살아 있는 후손에게 나쁜 기운이 아니라 좋은 기운을 보낸다는 관점에서도 그렇고, 동시에 제의는 죽은 이들이 우리와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일깨우고(죽은 이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남은 하루하루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제의는 죽은 이와 우리를 연결지으면서도 동시에 선을 그음으로써,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케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이루어지는 제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고, 동시에 그것은 지슬(감자의 제주도 방언)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제목이 '지슬'인 이유일 것이다. 지슬은 누구에게나, 즉 주민에게나 군인에게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지슬>이 역사적인 영화가 아니라 제주도라는 땅에서 나는 지리적 영화, 아니 감자적 영화이고, 동시에 역사로서의 과거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현재를 다루는 영화이기도 한 이유다. 삶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으니까. 그러므로 제의(祭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덧.
이 말은 덧붙이고 싶다. 이 영화의 이미지는 때로 아름답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살인, 학살의 장면 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자연의 모습을 마치 한편의 수묵화처럼 비춘다(물론 살인 장면도 그다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 혹은 오멸 감독의 '어떤 태도'라는 것일 터이다.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 아무도 이 죽음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자연, 자연의 정령만큼은 이것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처참함 이후에 이런 아름다움을 보아도 좋은 것일까. 아니 처참한 것을 아름답게 찍어도 되는 것일까. 처참한 것은 처참하게 보이도록 찍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사실 우리는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처음에 보인 거의 모든 주민이 죽을 것을 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4.3 사건이라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대로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제의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이 영화가 이들에게 바치는 제의가 되려면 그전에 이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어떤 우스꽝스럽고 순박한 모습을 보면서도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치 이들이 진짜 죽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제의 제주도 사투리를 쓰고, 자막을 넣는 것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배우를 쓰는 것은 이 영화를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이게 했으며, 더욱 웃음을 짓지 못하게 했다. 곧 죽을 사람들을 보는 것, 혹은 그들의 죽음을 실제처럼 받아들이는 어떤 불편함이 나를 지배했으며, 그것은 어떤 실제의 죽음 혹은 학살을 보는 것, 혹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쇼아)를 다룬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에서 실제의 자료화면(죽음의 장면)을 쓰는 것을 '외설스런 짓'이라며 피하고, 오로지 인터뷰만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전쟁 다큐 <아르마딜로>에서처럼 의도적으로 실제의 죽은 시체, 혹은 죽어가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 - 등에 담겨진 질문들과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게 했다.

앞에서는 제의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그것을 보라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거기에서 죽음이 먼저 보이나 보다. 이렇게 이성과 감정의 거리가 머니 제대로 영화보기는 아직도 멀고도 멀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04-1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논란의 대상에 올라설 수밖에 없는 영화의 한 자리에 위치해버렸네요.

영화를 영화로만 이해하고 그 후 해석을 해도 늦지 않을텐데 지나치게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제법 많더군요. 여전히..(과연 네오나치와 일본 극우세력들과 이땅의 속칭 "일베"들과의 차이점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맥거핀 2013-04-18 23:18   좋아요 0 | URL
논란의 대상이 되도 본 사람들끼리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좋을텐데요. 뭐 하긴 늘 말이 많은 사람들은 안 본 사람들이긴 했습니다만...

그들의 전략이 꽤 나름 성과를 거두는 것 같아요. 그런 세력들이 주류언론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교과서를 고치고, 국사를 축소시키고, 아무튼 노무현 정권 말기부터 MB정부 때까지 꾸준히 노력을 해왔고, 그의 일종의 성과가 예를 들어 '일베'같은 것이겠죠. ('일베'를 일종의 돌연변이나 같은 세력으로 보는 것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꾸준하고 나름 세밀한 전략의 결과죠.) 아무튼 이제 그런 세력이 정치판에도 점점 발을 들이고 있구요. 분명 이번 정권 하에서 안좋은 방향으로 세력을 넓힐 거라고 봅니다. 앞으로 이런 논란은 꾸준히 그리고 더 큰 폭으로 이어질 것 같아요.

Shining 2013-04-1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말이 마지막 상영이었는데 결국 시간을 못 내서 못봤어요ㅠㅠ
여태껏 그랬듯(아직까진 저 약속 어긴 적 없죠?ㅎㅎ) 영화 보고 난 후 이 글과 씨네21(영화 보고 읽으려고 잡지 사두고 접어놨거든요;) 둘 다 읽고 댓글 달게요 :-]

맥거핀 2013-04-18 23:20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지슬>이 더 상영관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어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가능하면 오멸 감독의 전작들도 좀 찾아서 보려구요. 전작들을 보고 보는 것이 또 많이 느낌이 다르다고 하더라구요. 나중에 영화보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구요.^^

아이리시스 2013-04-2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영화보러 가고시퍼요.오오오오.
맥거핀님, Shining님 저 놔두고 무려, 2박3일이나, 여행갔어요! 이거 혹시 저만 아는 거였어요? 다 소문낼거예요, 혼자갔다고. 화내겠죠? 어쩔 수 없죠.힝힝.

경주(경주 맞나? 전에 자랑(!)했잖아요)갔던 얘기 해주세요. 저는 봄여행 못가요ㅠ.ㅠ

아이리시스 2013-04-23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맥거핀님 아직까지 안왔어요?(안왔군, 흠, 쳐들어가볼까;)(아니야;)(좀 더 기다려)(곧 올거야)(그래?;)(그래--;)

비와요, 비 맞지 말고 살아요, 맥거핀님.

맥거핀 2013-04-25 00:54   좋아요 0 | URL
요 며칠간은 좀 정신이 없네요. 지금도 뭐하다가 잠깐 들어와서 댓글 달고 있음.^^; 어차피 서울에 벚꽃이 펴도 볼 수가 없어서 얼마 전에 경주에서 벚꽃보고 와서 다행이예요. 아이리시스님은 봄여행을 못 갔으면 여름여행을 가면 되죠. 그래도 요새는 밖에 나가면 공기가 따스한 걸 느껴요. 곧 여름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나중에 아이리시스님 글도 읽으러 갈께요. 잘 안들리는 아이리시스님이 저보다 글은 더 쓰는 듯.^^

아이리시스 2013-04-26 14:57   좋아요 0 | URL
오, 여름여행!
사람없는 곳으로 한적하게,
따스한 공기속으로.

그런데 여전히 침대위에 전기매트를 켜고 잔다는 게,
아직 여름도 봄도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어요.

아..일어나보면 막 등에 땀이나..있는데도 끄고 잘 수가 없어요, 어쩐지..

글 더 쓸 거예요, 4월이 가기 전에 리뷰 세 편쯤?ㅎㅎㅎ

2013-04-27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3-06-12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봤고,
(지슬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봤습니다.)
심지어 공동체 상영시간을 맞추지 못해
시작부분을 못봤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좀 답답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어느정도 감독의 의도가 읽히고,
영화와 이 글에 대해 공감이 갑니다.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3-06-15 15:08   좋아요 0 | URL
아..보셨군요. 제의라는 형식을 영화에 도입함으로써, 단순히 이야기가 아닌, 영화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저도 듭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오멸 감독의 영화들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의 감상에 이 리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즐겁습니다. 저도 감은빛 님의 글들을 보며 늘 배우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