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젼 - Contag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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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다보면, 이 영화는 미래의 묵시록일까, 아니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현재의 진실일까,라는 물음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구제역 파동, 밀림들의 파괴, 대형 제약사들의 농간, WHO와 CDC의 음모, 사스와 신종플루의 창궐 등에 관한 몇 개의 뉴스릴을 재주껏 조합하면 아마도 이런 영화가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김혜리 씨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가 농담삼아 말했던, 이 영화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뉴스들로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실험이라는 말이 어쩌면 아주 농담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만큼 이 영화는 드라마를 거의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아마도 드라마를 만들고자 작정하고 마음먹었다면, 몇 개의 눈물나는 드라마를 여기서 쭉쭉 뽑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독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양상'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그러므로 작정하고 '시사매거진 2580'이나, '추적60분'에 나올 법듯한 배경음악들을 삽입하고, 수천만달러 짜리 배우를 극 초반에 죽여 기꺼이 머리가죽을 벗겨낸다. 그는 자칫 드라마에 빠져 관객이 다른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묘하게 드라마가 살아있다. 그것은 물론 이것이 결국 뉴스가 아니라 영화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소더버그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처럼도 보인다. 어떤 리뷰들의 농담들처럼, 단순히 그 메시지란 '손을 철저하게 잘 씻자'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첫 희생자인 베스(기네스 펠트로)의 별 의미없어 보이는 동작들을 카메라는 세밀하게 좇는다. 그녀가 물잔을 들고, 카드를 집어들고, 어딘가를 스치듯이 만지고 하는 등의 동작들. 물론 이것의 주 목적은 그녀의 동작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동작들 사이로 유유히 유영하는 바이러스를 잡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여러 사람들의 별 의미없어 보이는 동작들도 영화는 비슷하게 잡아낸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이 있는데, 이 시작은 접촉(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contagion)들을 잡아내기는 하되, 그 접촉은 대체로 사람과 사물의 접촉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일반 상식이 가르쳐주는대로, 당연하게도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물이 접촉했을 때만 전염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직접 접촉, 예를 들어 악수나 포옹 등에서 바이러스는 더욱 신나게 자리를 옮길 것이다. 그러나 소더버그는 그 장면들을 왠지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해답처럼 보이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제시된다.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는 자신이 일하는 센터 직원의 아들에게 개발된 백신을 놓아주며, 악수를 하고, 악수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준다. 악수라는 것의 의미는 내 오른손에 무기가 없음을, 즉 내가 당신에게 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이 장면이 약간 특이하게 보이는 점은 소더버그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잉여를 조금도 용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필요하게도 악수의 참의미까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결국 어떤 잉여를 감수하고라도 이 위치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그 의미란 결국 소더버그가 담고 싶던 메시지일 것이다. (물론 베스의 딸이 남자친구와 춤을 추며 유투의 노래가 깔리는 장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메시지란 결국 영화를 뒤집어보는 데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바이러스의 창궐에 의한 파국을 막는 방법은 결국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접촉이 제로가 된다면, 결국 바이러스에 인간은 패배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립된 채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누가 당신을 구하러 올 것인가. 그러므로 결국 최종적인 극복은 인간들간의 연대로 가능한 것이라는 소더버그 식의 믿음이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소더버그 식의 연대는 한편으로 조금은 특이해보이는 점도 있는데, 그 연대는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소셜미디어적인 연대, 혹은 다른 어떤 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연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버스에서 쓰러진 남자를 구해줄 생각없이 휴대폰으로 찍는 사람들도 그렇고, 블로거 저널리스트(주드 로)를 영화에서 처리하는 뉘앙스에서도 느껴지지만, 소더버그는 이러한 방식의 연대, 혹은 관계에 별로 신뢰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소셜미디어나 인터넷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공포의 전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공포심 그 자체'이며, 그것은 도리어 이런 바이러스의 확대보다도 인간 자신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 심각한 문제란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이러스의 근본적 퇴치 방법인 '긍정적인 연대'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연대는 결국 이성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데, 그 이성이란 공포에 잠식되지 않았을 때만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맷 데이먼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며, 인간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블로거 저널리스트가 살아남는 것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실제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은 왠지 영화 <링>을 연상하게끔 하기도 한다. 영화 <링>에서 가장 무서운 씬은 아마도 사다코가 TV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씬이 아니라, 마지막에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고속도로를 타고 있는 여자의 굳은 얼굴일 것이다. 사다코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여 전파시키는 자에게 남은 삶이라는 상(혹은 벌)을 내려주었다. 어쩌면 이 <컨테이젼>에서의 바이러스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 블로거 저널리스트는 바이러스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포의 확산'의 매개체로서 그것의 전파에 큰 공헌을 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은 영화 속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던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그려져야만 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링>의 사다코 바이러스는 이 <컨테이젼>의 바이러스보다는 조금은 나은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사다코 바이러스는 누구나에게 찾아간다는 점.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지위를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축구로 치자면 전술과 전략에 능하기보다는 선수들의 적재적소의 배치와 교체에 능한 감독이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효율적인 장면 구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즉 그는 숏의 낭비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들의 이미지의 낭비 또한 원하지 않는다. 그의 이번 영화가 한편으로 뉴스릴들의 조합처럼 보이는 것은 그 까닭이다. 왜냐하면 뉴스란 무엇보다도 제한된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가장 필수적인 숏들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것이 뉴스가 아니라, 영화라는 점 또한 잘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한편으로는 누구나 척 하면 알 수 있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어 등장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은 이 영화를 거의 정말 뉴스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거니와, 이 영화의 캐스팅된 배우들은 표정만으로도 짧은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드라마를 거의 배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도 단 한 두 장면으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잘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확실히 자신의 능력을 잘 갈고닦은 장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솜씨이다. 흥행에 개의치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한 그의 결단력과 능력에 경탄을.  

 

 

 

 

덧.  

아..이 영화에서 케이트 윈슬렛은 너무 멋있다.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위 사람이나 가족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닌, 자신으로 인해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아참... 나도 이제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여 얼굴은 그만 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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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0-1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두 편이나 봤어요. 일본영화,터키영화
일본영화는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근데 왜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요?,,
단지 기억하는 건 영화내용이 아주 강렬했다는 것과 친구 덕에 소수만 들어가서 볼 수 있는 거의 침대 수준의 쇼파에서 편안하게 봤다는 사실이지요...^^
내년 쯤에 영화비평이나 공부해볼까 하는데...^^
영화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맥거핀 님처럼 비평을 쓰지요. 저도 해보고 싶네요.

맥거핀 2011-10-20 00:58   좋아요 0 | URL
하기는 사실 저도 공부 좀 하고 뭔가 쓰더라도 써야하는데, 야매로 아무 이야기나 쓰니 아직 잡설에 가깝구요. 비평을 쓰고 싶기는 한데, '비'는 없고, 어설픈 '평'만 있으니..

그건 그렇고 아주 좋은 친구분을 두셨네요.^^ 영화제 후기 글들만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몇 편이나 국내 극장들에 걸릴지 모르겠네요. 인상적인 일본영화라..어떤 영화를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이번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영화가 꽤 괜찮았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혹시 그 영화는 아닌지..아무튼 부러워요~!!
 
비우티풀 - Biutifu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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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utiful [형.] beautiful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그에 가깝게 다가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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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결코 뷰티풀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이 다르덴적 세계에서 그렇게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그 뷰티풀에 조금이라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가깝게 다가가려고 한다. 그 종착역이 결국 '뷰티풀'이 아닌 '비우티풀'이라도 말이다.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비참한 자신과 마주쳐 후회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는 적어도 그 참혹함을 맞서서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에 결코 고개를 돌려서는 안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글쎄.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영화내내 얼굴을 찌푸릴지도 모르고,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고, 어쩌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고, 영화관을 벗어나 나갈지 심각하게 고민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뒤돌아설 것인가, 참혹함에 고개를 돌릴 것인가.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결국 약간의 희망을 보여준다. 영화가 가르쳐준 것은 그것이다. 마지막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절망을 어떻게든 마주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 십분의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백이십분의 절망을 버텨내야 하는 것. 인생이란 그런 것, 마지막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뷰티풀'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 그럼에도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비우티풀'인 것.

맥거핀 2011-10-2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 21> 이후경 기자는 단평에서 '그런데 죄지은 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권과 부권을 둘 다 지닌 욱스발에게만 면죄부가 주어질 때, 영화는 거짓 휴머니즘에 빠진다. 그의 가족이 가부장주의적 환영의 비호를 받는 동안 중국인이나 세네갈인의 고통은 끝끝내 외면당한다.'라고 썼다.

글쎄..몇 가지 진술에 대해서 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시민권은 모르겠지만, 부권은 욱스발에게만 주어진것도 아니다. 또 무엇보다도 욱스발에게 과연 면죄부가 주어진걸까. 그는 그의 책임을 부인할 생각이 없으며, 관객 역시도 그 책임을 알고 있다. 가부장주의적 비호라고 했는데, 그것은 영화상으로 볼 때 어떤 비호나 죄사함보다는 일종의 심판에 가까웠다. 한편으로 영화가 중국인이나 세네갈인의 고통을 다른 식으로 다루었다면, 어쩌면 그것이 거짓 휴머니즘이 되지 않을까.

맥거핀 2011-10-2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 수정. 4개->5개.
이 영화의 몇 씬이 며칠이 지난 지금에도 머리 속을 떠돌고 있다.
 

리스트를 만든 김에 하나 더. 지난 2010년 10월 발행된 <씨네21> 776호에서도 'MUST READ 10'이라는 주제로, 2009년에서 2010년 사이에 발간된 영화 관련 도서 중 읽어볼 만한 책들에 관해 소개한 적이 있다. 영화인이나 준영화인들이 추천하는 읽어볼 만한 영화책들.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읽지 못한 책도 있고, 읽을 예정인 책도 있고, 산지는 꽤 되었으나 책장에만 박혀 있는 책도 있고, 앞으로 읽을까 의심스러운 책도 있다..그러고보니, 참 안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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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탐독-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활극
정성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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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정성일.정우열의 영화편애
정성일.정우열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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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독립영화를 말하다
남다은.변성찬.지승호 지음 / 수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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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The Secret Life
J. 랜디 타라보렐리 지음, 성수아 옮김 / 체온365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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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그러고보니 BEST 10이라며, 11권이네..하길종에 관한 책은 전 3권이니 실질적으로는 13권..
 

이번 주 발행된 <씨네21> 821호에서는 '가을날의 영화산책'이라는 주제로 최근 발간된 영화관련 서적 중 추천할만한 10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도 나름 영화 좀 봤다하는 사람들의 추천이니 한번쯤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사정으로 영화를 볼 수 없어, 책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추천. (기사에는 덧붙여, 영화평론가 13인이 추천한, 복간되거나, 번역되어야 할 영화책, 그리고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출간되면 좋을 상상의 영화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잡지에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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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 X 고다르- Jean-Luc Godard Interviews
장 뤽 고다르 지음, 데이비드 스테릿 엮음, 박시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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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의 래디컬한 의지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강태웅 옮김 / 소명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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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말하다- 안토니오 시모네와 나눈 영화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안토니오 시모네 지음, 김난주 옮김 / 한길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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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빔 벤더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빔 벤더스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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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짤막한 글을 쓰는데도 헷갈린다. '한번쯤'의 띄어쓰기를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 찾아보니, '한번'의 경우, 한 번, 두 번..할 때는 띄어쓰고, '한번 해본다'는 식으로 쓸때는 붙여쓰는 것이 맞다, 그리고 '쯤'의 경우 접미사이니 붙여써야 한다는 것이 결론. 아...
 

 

1.
지난주 와우북페스티벌에 들러 몇 권의 책과 함께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을 들고 왔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주요한 저작 중의 하나인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그다(이 책 <빅토르 세르주 평전>에는 원제에 충실하게 <러시아 혁명의 첫 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책날개에 붙어있는 그의 삶을 정리한 간략한 글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참 전형적이다. "러시아의 혁명 인민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난 세르주(본명 : 빅토르 키발치치)는 열다섯 살까지 벨기에에서 살았다. 고국 러시아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1919년, 스물여덟살 되던 해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으며 다양한 정치적 임무를 띠고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3년 독일판 10월혁명이 실패한 뒤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 좌익반대파와 함께했다. 언제나 정치적 반대파였던 세르주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로 인해 평생을 핍박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결국 1936년 러시아에서 쫓겨나 파리와 마르세유를 전전하다가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 속에 1947년 멕시코에서 눈을 감았다." 

전형적이라는 것은 그의 삶이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실패하고 몰락한 자의 초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세르주는 어린 시절 딱딱하게 말라붙은 빵을 커피에 적셔 먹는 끼니를 서술했으며, 그의 동생은 쫄쫄 굶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홉 살에 굶어 죽었다), 한 때 꿈을 가지고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그 혁명이 그 혁명을 지지해준 자들에게 적으로 돌아서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 반대편으로 돌아서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그가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것이 있었고, 아무 조직과 힘이 없었던 그가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고할 수 있었던 모든 매체를 통하여 치열한 반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명하고, 진정한 혁명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그 와중에 그는 당연하게도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거의 지구의 반대편까지 쫓겨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이야기. 아마도 영화로 만들고자 시나리오로 잘 정리하여 제작자의 책상에 정성껏 올려둔다고 해도, 두어 줄의 간단한 시놉만 보고도 그것은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지금의 이 때에 이런 것을 읽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다른 의미에서라면, 성공한 혁명가의 책, 아니 성공한 혁명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이보다는 훨씬 낭만적으로 보이는 다른 혁명가의 평전들 - 대표적으로 체 게바라 - 을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몰락한 혁명가의 생애, 아니 굳이 혁명이라는 말을 아예 없애버리고라도 몰락한,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이건 무슨 이상 심리일까. 어쩌면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을 통해 나의 삶에 대한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으려는 당연한 심리일까. 



2.
몰락한 것은 한 러시아 혁명가의 삶 뿐만이 아니다. 매일 저녁 프라임시간에도 지금 몰락한 자들의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그것도 비극물이 아니라 시트콤이다. 물론 그것은 김병욱의 새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이야기이다. 김병욱은 이번 시트콤의 키워드를 '몰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인터뷰했다. 물론 김병욱의 전작들에서도 몰락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였으며, 몰락한 캐릭터들도 가끔 등장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웃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몰락해 가고 있는 자들이 망가져 가는 틈에서 원래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김병욱의 이야기들은 꽤나 자주, 깔깔깔 웃음이 터지는 와중에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을 만들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서늘한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러 묘한 웃음들을 끼워넣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그의 시트콤의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죽음이 아닐까. 김병욱의 시트콤들은 이제 웃음은 뚝!, 이라는 식으로 마지막 순간에 시청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여러번 선물하였다. 그것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끊어버릴 때도 그랬고, 전체 이야기를 종결해 버릴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시트콤에서 상쾌하게 웃는 것으로 끝내고 싶었던 많은 시청자들에게 원망을 받기도 하였다. 하기는 김병욱의 시트콤을 보는 시청자들이 가장 자주 되묻던 질문은 "이거 시트콤 맞아?" 였으니까.

(글쎄. 앞의 심리와 연결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김병욱의 시트콤에서 그런 서늘한 순간들을 더욱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김병욱의 시트콤들을 어떤 시트콤을 대하는 느낌보다는 그냥 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많은 시청자들을 '김병욱 안티'로 돌아서게 만들었던 바로 전작의 꽤나 비극적인 결말도 내심 속으로는 상당히 괜찮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결말을 본 후 주위의 하이킥 팬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겉으로는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결말이야!, 라고 했었지만, 집에 와서는 그 마지막 회를 몇번인가 돌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몰락'은 이번에는 전면에 나섰다. 집안의 가장인 안내상은 절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내몰렸으며, 그 덕분에 아들 종석은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스하키를, 그리고 딸 수정은 미국 유학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몰락의 이야기는 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얹혀 사는 계상의 옆집에는 청년 실업의 상태로 선배 언니에게 얹혀 살고 있는 진희가 있으며, 이 집의 집주인인 지원에게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뭔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아직 캐릭터의 중심을 잡는 초반임에도 길바닥에서 누워서 자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툭하면 나타나는 빚쟁이들을 피해 집 바닥 땅굴로 공습경보를 받고 대피하듯이 달려가기도 하고, 조폭들을 피해 쓰레기통에 숨기도 하고, 사기 당하여 학교 공금을 날리기도 하는 등, 그간 다른 김병욱표 시트콤들보다 훨씬 더한 고초를 겪고 있는 중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몰락은 어떤 사건들보다도 이 캐릭터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일종의 징후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안내상은 별 것 아닌 일에 집착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비굴해지는 성격이 도드라지며, 백진희의 경우는 그의 삶의 피곤이 중첩된 몽유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을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나레이션의 등장이다. 이 나레이션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이들의 속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동을 마치 인류학적 보고서를 써내려가듯이 차분하게 분석하고 설명한다(물론 이는 미래의 이적이 과거의 어떤 때를 회상하는 식이라는 이 시트콤의 거대한 액자와도 관련이 있다). 즉 이 시트콤은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이들이 보이는 어떤 '징후적인 신호'에 관심이 있다. 이 시트콤은 이 몰락한 시대의 징후를 잡아내 거대한 분석 보고서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이 몰락한 세기의 징후를 어떤 식으로 포착해 낼 것인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들의 몰락은 마지막에 극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아니면 전작처럼 결국 몰락의 종말인 죽음에 이르게 될까.

3.
그리고 여기 한국프로야구에도 몰락의 거의 대명사가 되어가는 팀이 있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위업을 남긴 팀이자, 내 20년 가까이 되는 응원팀인 트윈스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고 하니, 뭔가 상당히 어려운 미션을 실패하는 것 같지만, 이 리그는 수십개의 팀 중에 달랑 몇 팀 포스트시즌 진출하는 그런 리그가 아니다. 8개 팀 중에 4팀 포스트시즌 나가서 뚝딱뚝딱 아장아장한 다음 우승팀 가려내는 그런 작은 리그다. 그런 트윈스를 보는 팬들의 심정은 뭐랄까, 9년 넘게 반등수 50% 안에 못들고 있는 그런 자식을 보고 있는 심정이랄까. 그런 트윈스는 올해는 더욱 기적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시즌 초중반까지 2-4위권을 유지했고, 초반 30승도 다른 어떤 팀보다 빨리 올렸음에도 결국 6위(그것도 공동이니 사실상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런 트윈스 상당수의 팬들이 바라는 것은 이번 야구 시즌이 빨리 끝나는 거였다. 망가져가고 있는 팀을 보면서 DTD니, 내려갈 팀이니 하는 비아냥을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들도 있었지만, 이번 시즌이 끝나면 무엇인가 희망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늘상 스토브리그에 가장 바쁜 것은 트윈스팬들이었고, 가장 설렜던 것도 트윈스 팬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올해는 여러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듯 했고, 마침 박감독의 사퇴 발표로 팬들은 올것이 왔다고 잔뜩 기대했다. 트윈스 홈페이지 게시판과 각종 야구 게시판에는 희망적인 꿈을 가득 담은 각종 카더라와 설들이 난무하였고, 팬들은 곧 거의 예정되어 있는 김연아 금메달을 생각하며 마지막 프리를 즐기자는 심정으로, 발표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올것이 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올 것이.

팬들이 분노하고, 그 분노를 넘어서, 허탈과 그에 따른 이탈을 예고하는 것은 단순히 원하지 않는 감독이 선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감독이 새로 부임하여, 나은 성적을 올리고,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고, 혹은 기대한다고 해도 다른 면에서 분노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트윈스 팬들이라면, 몇년 동안 이어진 트윈스의 부진이 단순히 야구 실력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물론 야구 실력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야구실력이란 것이 결국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트윈스나 다른 어느 팀이나 기본 자원은 같다. 좁은 한국 고교야구가 그것이다). 그간 부임해왔던 정치적인 인사들과 아직 프런트 및 코치진에 자리잡고 있는 정치적인 인사들이 팀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조금씩 보아왔다. 그런 정치적인 인물들을 이번에 갈아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구단의 생각은 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학교로 따지자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관심없고 교장의 비위만 맞추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교사를 아이들 성적이 엄청 떨어져서 해고했다고 좋아했더니, 교장의 친인척이 와서 그 자리를 메우는 꼴이다. 옆 명문학교의 정말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교사들이 몇 명씩 놀고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팬들이 이번에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가 아니라, 우리 프로야구의 기원에 있는 것들이다. 군사독재의 선전용, 혹은 귀막음 도구로 재벌들의 결합으로 시작된 우리의 프로야구. 그 프로야구는 그들이 말한대로 결국 국민들과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은 결국 그것을 가진 기업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팬들의 목소리라는 것이 현재 전혀 들어갈 틈이 없게 짜여진 이 구조에서, 팬들의 바람이란 결국 헛된 카더라일 뿐이라는 것. 내 소유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데 당신들이 왜 나서는가, 아마도 트윈스 구단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팬들은 포스트시즌 진출을, 우승을 열망하지만 구단도 그것을 열망하고 있을까. 어쩌면, 뭐 우승...하면은 좋기야 한데, 뭐 안해도 항상 야구장에는 관객들 그득하고, 어차피 적자인 상황에서 야구단이야 일종의 홍보물일 뿐이고...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 트윈스 홈페이지의 회원게시판은 감독 선임 이후 며칠 째 오류를 핑계로 작동되고 있지 않는 중이다(뭐 어쩌면 엘지의 기술력이 이 수준일지도..). 그런 상황에서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현수막을 들고 야구장에 갔다가 폭도로 몰리거나, 지나친 팬심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뉴스에서 듣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미 길들여져 버린 우리들은 오늘도 여전히 멍하니 야구중계를 튼다. 

 
    

4.
자꾸 몰락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더니, 몰락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는, 장정일 작가가 <빌린 책/산 책/ 버린 책 2>(이 책 역시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사왔다)에 쓴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장정일 작가는 책 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쾌락이란 어떻게 보면 모순되고,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전체에 몰각됨으로써 얻는 쾌락이 있고, 전체와의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명료하게 느끼는 쾌락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서 느끼는 쾌락이 전자라면, 신비주의에 귀일해서 얻는 쾌락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의 생각에 완전히 녹아들기도 하고, 그 속에서 반성적이 되거나 자각을 얻기도 합니다."

몰각과 자각,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함경록 감독의 영화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도가니>와 같은 영화가 몰각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 영화 <숨>은 자각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물론 영화는 기본적으로 몰각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은 있다. 스크린과 합일하여 충만해지는 상태적인 쾌락이 몰각이라면, 아마도 영화보기는 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것을 떠올린 것은, 이 영화 <숨>이 <도가니>와 가까운 이야기를 상당히 다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숨>에서는 결국 장애인 여주인공의 결혼과 가정이라는 꿈이 외부의 선을 표방한 사람들에 의해 깨어지게 된다. (<도가니>를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간 <도가니>에 대한 여러 글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도가니>의 명확한 선악 구분과 달리,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상당히 모호한 데가 있다. <도가니>가 분노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이 영화 <숨>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즉 분노가 일종의 쾌락과도 맞닿아 있다면, 그것은 몰각에 가까울 것이고, 생각과 반성은 일종의 자각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나는 <도가니> 보다 <숨>이 더 영화적으로 낫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영화를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는 영화가 사람들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든다면(즉 몰각을 시도한 영화가 그 몰각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면), 그것만큼 충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 <숨>은, <도가니>와 그로 인해 이어져가고 있는 광주 인화학교를 둘러싼 일련의 진행들을 보면서 조금은 우려되는 부분들, 조심해야할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이 분노가 무엇을 위한,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분노는 나의 쾌락적인 만족감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광주인화학교 대책위에서 과도한 관심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나, 학교 폐쇄를 우선으로 하고 있는 정부의 대책들을 보면 조금은 여러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리고 또 동시에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아동이나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은 더더욱 조금은 조심스럽고 최대한 피해자들을 보호해가면서 사건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도가니>의 열풍 속에서 그런 조심스러운 접근을 또 조금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 했다.

아무튼 이 영화 <숨>은 굳이 <도가니>와 연결짓지 않아도 그 나름의 영화적 성취 속에서 또다른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윤리의 문제 역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영화적 성취나 윤리의 문제는 혹시라도 쓰게 될 다음 포스트에. <도가니>를 본 사람에게 추천, 곧 내려갈 것 같으니 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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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10-0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전에서 시트콤으로 야구로 책으로 영화로....숨가쁘게 따라 읽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중 어느 하나도 읽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이렇게 다양한 문화영역을 몰락이라는 주제로 꿰어가시다니... 놀랍습니다.

맥거핀 2011-10-10 18:23   좋아요 0 | URL
왠지 요즘 보고, 듣고 한 것들 중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서, 무리하게 연결해 본 글입니다. 사실은 다른 건 훼이크고, 요즘 트윈스 구단 때문에 너무 열받아서 쓴 글..이라는 게 더 정확한 사실에 가깝구요.^^;

노이에자이트 2011-10-09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에 대한 책이 요즘 안 팔리죠.좌익반대파의 우두머리인 트로츠키 관련 서적도 잘 안 팔리는데 세르쥬 같은 사람의 전기가 팔릴 리가 없습니다만...

몇 년 전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인 왕범서의 회고록이 번역되었던데 이 책도 몇 부나 팔렸을지...여하튼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까요.

맥거핀 2011-10-10 18:41   좋아요 0 | URL
하기는 책을 싸게 판다는 와우북페스티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감안한다고 해도, 정가 18,000원의 책이 5,000원에 팔리고 있더군요. 그나마도 잘 안팔려 다른 책들보다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다른 평전 시리즈보다 이 책이 더 유달리 싸기도 했구요.
말씀하신 책도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중국 트로츠키주의자 회고록도 번역된 적이 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10-10 22:45   좋아요 0 | URL
공산당 당수 하다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향한 진독수 평전은 절판된 지 20년이 넘으니 왕범서 것이라도 읽어야죠.요 몇 년 새 일본의 아나키스트들 전기도 나오고 그렇더라구요.역시 갈수록 세상은 발전하죠.예전엔 이런 책들 구경도 못하고 소문으로만 들었으니까요.

맥거핀 2011-10-11 22:23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노이에자이트 님은 어찌 그리 다양한 영역에 대해서 잘 아시는지..늘상 여러 가르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1-10-10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1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